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독서시간

2006.07.15 02:5107.15

인간은 피의 책이다.
펼쳐보면 붉다.        -클라이브 바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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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시간
            Ea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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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너 그 책 안먹을 거야?

'기현'은 내 손에 들고 있는 책을 보고는 놀란 듯 물었다. 나는
책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안먹어?
-이미 먹은 책이야.
  또 먹을 필요 없지.
-그럼 왜 샀어?
-산 거 아니야.

기현의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말을 이었다.

-청소하다가 찾았어.
  동생이 샀었나봐.
-아..

기현은 괜히 물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볼을 긁적이다가 다시
나를 보고 말했다.

-무슨 책인데?
-켄 키지.
-아, 그책.
-응.
-그래도..안먹고 있다가 괜히
  빼앗기거나 하면 억울하잖아.
-그래도..

내가 책을 내려보며 머뭇거리고 있는 것을 본 기현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내 손에 든 책을 보고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럼, 그 책 나 주지 않을래?
-예전에 같이 사서 먹었잖아.
-한번 더 먹으면 어때.
  압수당하느니 보다
  나한테 주는 게 좋잖아.
-그래도..

나의 입과 다르게 나의 손은 그에게 이미 책을 건네었다. 기현은
만면에 밝은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고는 책을 입 안에
넣었다. 그렇게 책 한권이 입으로 사라졌다.

*

책은 나무 조각의 묶음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 다음은 얇은 종이
두루마리의 형태로, 그리고는 양장에 쌓인 종이모음으로, 그 뒤
에는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시각적 이미지의 형태로 끊임
없이 발전했다. 인간은 끊임없이 편하고 쉽게 지식을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결국 극한점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캡슐 형태의 책을 먹고 위액에
녹아 분해된 내부에서 나온 미생물은 뇌를 자극하여 지식을 새겨
놓는다. 미생물은 약간의 조작 만으로도 여러 형태로 변형 가능
했고 그것은 다양한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인문학자들의 격렬한 반대 속에 처음 세상에 나온 '먹는 책'은
누구나 사도행전을 보지않고도 외울 수 있게 해주었고 지식을
얻기 위해 투자하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한 독자들의 지지 아래
책은 급격하게 먹는 형태로 변환되었다. 가격은 점점 저렴화되어
갔으며 다양한 서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다. 영아살해범이 대법전을 먹고는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여 무죄로 풀려났다. 사기꾼들은 세법을 간식처럼
먹었고 학교에는 학생이 보이지 않았으며 의학서적을 읽은 환자
들이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판매되는 지식의 캡슐
은 먼저 먹고 지식을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뻗는
손과 휘두르는 주먹을 방관했다. 책을 먹기 위한 투쟁은 모두의
탐욕을 촉매로 하여 파괴를 불러내었다.
한차례의 전쟁이 인구를 100/1로 감소시키고 큰 피해없이 끝난
뒤, 전쟁에서 개개인이 했던 행동을 기준으로 급수가 나누어지고
지식을 먹는 것에 대한 제한선이 생겼다. 인류 문화를 지켜내고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을 주도한 사람들은 1급으로 분류되어 모든
책을 섭식할 수 있게 되었다. 전문적 지식을 가지고 1급을 보조할
계층인 2급은 1급이 먹을 수 있는 책의 ⅔를, 전쟁이 끝난 사회의
보편성을 확립해야 할 계층인 3급은 2급의 한도에서 ⅔를, 그리고
1,2,3 급이 싫어하는 육체 노동을 담당하는 계층인 4급은 3급의
½만 열람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그리고 5급은 책을 읽을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채 도시 외곽에서 위험한 노동을 담당했다.
감시용 소형 로봇이 거리와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작위로 사람들을
스캔하고 상위 계급에게만 허용된 책을 먹으려는 하위 계급자들을
색출하면 경찰이 나타나서 체포했다. 체포당한 자는 자신이 가진
서적에 대한 지식을 제거당하고 5급이 거주하는 도시 외곽 지대로
추방당한다. 이러한 체계가 1세대를 거쳐 2세대를 지나 3세대에
이르렀고 각 계급의 거주 지역은 분화된 채 사회는 일정한 룰 안
에서 평안했다.

*

나는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책을 삼킨 기현을 바라보았다.

-너 그 책 이번에 3번째 먹고 있잖아.
-응?
-저번에도 그 책 내용 기억안난다고
  한번 더 사서 먹었지..
-아아, 그랬나.

기현의 멋쩍은 대답에 나는 더욱 의혹을 느끼게 되었다. 혹시..
내 시선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려하는 기현의 손목을 잡아 끌어
당겨 앉혔다.
주위를 살폈다. 감시용 로봇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이 다음 문장을 말해봐.

"만일 사실이라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보고 싶다.
  나는 옛날 계곡 주변의 땅을 다시 한번 봐두고 싶다.
  다시 한번 그것을 또렷이 머리 속에 새겨두고 싶다."

기현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좀 더 큰 소리로 물었다.

-네가 3번이나 먹은 책이잖아.
  어서 대답해봐.

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가가 젖어들어가고 있는 것은
나도 알 수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책을 먹는다고 해서 책을 모두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의 뇌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이어서 같은 책을 먹더
라도 기억을 떠올리는 정도에 약간씩의 차이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극소수의, 먹은 책에 대해 기억해내지 못하는 뇌도 있다.
그러한 사람은 출신성분이 어떤 계급이었는지에 상관없이 5급으로
분류되어 추방된다. 책을 먹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선천성일
수도 있고 사고나 질병 등으로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섭취한 책을
잊게 되는 후천적 증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기현은 내가 언젠가 들었던 적이 있던 말을 다시금 되풀이
해주었다.

-자꾸만..잊게 돼.

나는 기현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가다'는 기현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다.
그리고 내 동생이 그렇게도 먹고 싶어하던 책이었다.
나는 기현의 손목을 놓았고 그는 힘없이 일어나서 어디론가 걸어
갔다.
며칠 후 거리에 경찰들이 나타났고 기현은 집에서 끌려 나왔다.
기현은 경찰의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증명해야 했지만 관청에
기록되어 있는, 이 거리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먹는 4급 필수 서적
의 목록과 기현이 기억하는 내용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가 있었다.
경찰에게 끌려가는 기현을 보고 뛰어나간 나는 경찰의 곤봉에
배를 맞고 주저앉아 증오가 섞인 소화물을 구토했다.
내 동생에 이어 친구도 그렇게 5급으로 재분류되어 추방되었다.

*

계급 붕괴를 준비하는 모임의 청년부 결집 장소는 너무도 허름한
반지하실이었다. 지하 배수로를 한참 지나야 나오는 그곳까지
들어가서 자발적으로 회의에 참가한 나를 보며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내가 기현의 친구라는 사실은 곧 증명되었고
회의가 끝난 후 나는 옆에 칸막이로 만들어진 사무실로 안내됐다.

-계급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인야'가 말했다. 그는 청년부 사무장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사실로도 그는 유명했다. 4급 내에서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섭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뿐인 헌 책상을 두드리며 이어서
말했다.

-지식과 정보가 많이 필요해.
-지식과 정보?
-그래. 상층 계급과 맞먹는 지력.

인야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남자치고는 상당히 미성인 그
목소리는 시를 읊는 것 같았다. 나는 되물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잖아요.
-응.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보 취급
  받으면서 3급에게도 밀려서 이렇게
  망가진 시궁창에서 썩어가고 있지.

그의 말은 그를 만나기 전에 예상했던 것보다도 도발적이었다.

-난 전부터 너에 대해 듣고 있었어.
  얼마 전에 4급 내에서 모을 수 있는
  모든 서적을 먹은 사람이 생겼다는
  소문이 있었지.
-책을 먹을 수록 돈은 사라지더군요..
-기현의 추방 때문에 충격 받아서
  그런거야? 동생도 그랬다던가.

인야의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어찌 됐든,
  나 이외에도 또 한명이 4급의 모든
  지식의 보고가 되었군. 그 점은
  나랑 같아서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그는 말을 살짝 끊었다가 얕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와 같이 활동하고 싶으면
  4급을 넘어선 지식을 갖추고 와.
-..무슨 뜻이죠?

그는 쓴 입맛을 다시고는 흰자위가 많은 눈을 굴려 나를 보더니
피식 웃으며 읊조리듯이 말했다.

-일을 시작할 때 처음 부닥치는 난관에 겁을 먹고
  주저앉지 말라. 그 난관만 돌파하면 뒤는 의외로
  쉬워지는 법이다.
-..4급 서적에는 없는 내용이군요.
-채근담.
  2급 서적이지.

인야는 앙상한 양팔을 벌려 앞에 보이는 낡은 책상에 올렸다.
양팔에 그려진 전갈 문신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1급과 4급은 두뇌 자체에는 아무 차이
  가 없어. 망할 계급법만 아니었으면
  우리도 대법전을 먹고 법원에 앉아서
  경찰들 보고나 들으면서 위성 TV로
  사형 장면이나 구경하면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책이 없어도 머리는 굴릴 수 있잖아.
  책에서 얻을 수 없는,
  책을 찾기 위한 정보들.

나는 인야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한 후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소문 들은 적 있어요.
-어떤 소문?

되묻는 인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B451거리에, 2급을 위한 서적을 파는
  암매상이 있다는 말..들은 적 있어요.
-그래. 훌륭해.
  하지만,

그는 한손을 책상에서 치우며 말했다.

-그 암매상은 굉장히 비싸지.
  지금 돈도 안남았다고 했잖아.
-신장腎腸이라도 하나..
-애꿎게 몸에 칼대지마.
  더 나중을 생각해야지.

인야의 찡그렸던 얼굴을 다시 펴면서 큰 입을 벌려 이빨이 드러난
미소를 지었다.

-더 손쉽게 지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

인야는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을 알고 있다. 4급이 가질
수 없는 책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을 궁금해하도록 만든다.
인야의 남은 한손도 책상에서 치워졌다.
그는 칸막이 너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고개돌려
내 눈을 보고 말했다.

-뇌腦.
-..네?

당혹한 나의 질문에 그는 말했다.

-B612거리에 가본 적 있어?
  그곳에는 감시하는 로봇이 없어.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한번씩 지나치게 되는 길목이지.
  그 중에는 2,3급도 꽤 많아.
-그렇다면..

인야는 윙크했다.

-2급 호모 녀석이었지. 고분고분했어.
  구역질은 나지만 참고 먹을만 하더군.
  착실하게 책을 먹었는지
  꽤 만족스러워.
  저런, 가려고?

그의 말을 듣고 뒤로 물러서는 나를 보며 인야는 말했다.

-다음에 다시 올 때는
  너도 나처럼 말할 거야.
-나는 살인은 하지 않아요!
-그럴까?

인야는 코웃음치며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너는 나랑 비슷해.
  4급에서 더 이상 얻을 지식이 없다는
  사실에 방황 중이었겠지. 네가 찾아낸
  삶의 유일한 돌파구가 막혔으니까..
  네가 나를 찾아온 것도 저항군에
  들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 이유가
  클 것 같은데?

인야가 내 등 뒤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물이 흘러내리는 배수로를 지나 비가 내리는 철길을 따라서
정신없이 뛰어갔다.

*

인야의 말은 사실이었다. B612거리에는 감시하는 로봇이 없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시간이었다. 나는 천천히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골목의 바닥에 주저앉아 소매 속에 감춘 칼을 확인하고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
감시용 로봇도 아닌 내가 육안으로 2급이나 3급을 스캔해내는 것
은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책을 찾아내는 것도 도박이다.
백발의 색목인이다. 어느 도시에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눈동자에서 흐르는 지적인 느낌이 2급은 아니어도 3급쯤은 되는
것 같다. 뒤에서 보니 나보다 체격이 작다.
결정했다. 나의 타겟이다.
접근은 쉬웠다. 그에게 숙박할 수 있을 만한 곳을 안내해 주겠
다고 하며 3급 지역 근처에 있는 C24거리의 배수로로 이끌었다.
그리고 칼을 꺼내었다.
이방인의 지식은 곧 내 입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벽에 기대어 서도록 했다.

C24거리에서 죽어있는 누군가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4급 지역
의 사람들은 말을 아꼈다. 그 시체의 머릿속이 깨끗히 비어있었
다는 소리에 인야는 쓴웃음만 지었다.
인야는 새로운 멤버를 맞이하였다. 백발에 파란 눈동자를 지닌,
이 도시에서 보기 힘든 외모였다. 그는 5급 지역 출신이라고
했지만 4급 서적 내에서 모든 분야를 섭렵한 것 같았다.
인야는 그에게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
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했다.

<終>
댓글 3
  • No Profile
    무단슬픔 06.07.16 20:26 댓글 수정 삭제
    흡입력있는 설정과 시작에 비해 결말이 아쉬워요. 잘 읽고 갑니다.
  • No Profile
    yunn 06.07.16 21:46 댓글 수정 삭제
    뭔가 좀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그러게요.... 뭔가 쓰다가 만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오타가 하나 있어요! 100/1이 아니라 1/100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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