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 그건 단지 옷걸이일 뿐이잖아. "

나는 마지못해 그 여자에게 한마디를 던지고 말았다. 그러나 여자는 그 가늘고 고운 눈썹
의 양 끄트머리를 살짝 찡그리며 이해를 못 하겠다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마치 입 열 개
달린 외계인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그게 어쨌다는거죠?
지하철을 돌아다니며 잡상일을 하는 그녀는 드물게도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지나치
게 예쁘다. 특히 그녀가 눈을 한 번 깜빡여 여린 화초가 바람에 흔들리듯 그녀의 길다란 속
눈썹이 가늘게 떨릴 때에는 괜히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이다. 옷도 세련되면서도 깔끔하게
차려입었고, 향수 냄새도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으며, 어깨에는 비듬이 하나도 떨어져있지
않다. 내가 여태껏 만나본 여자 중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여자다. 그렇다면, 인기 없는 해충
방제 회사의 어느 신입사원 남자와 지나치게 예쁜 어느 지하철 잡상인 여자의 우연한 만남
과 대화가 연애와 결혼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다리 달린 뱀 보듯 서로 신기하게 쳐다보며
답답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 옷걸이는 그냥 옷걸이인 채로 두면 되는 거야. "
" 음, 나는 옷걸이를 그냥 옷걸이인 채로 두고 있어요. 옷걸이로 망치를 만들거나 고양이
목걸이를 만들지는 않아요. "

여자는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문제의 원흉인 옷걸이를 들어 보였다. 세워서 쓰는 식
으로 되어있는 그 옷걸이 기둥에는 아무개 음식점이라는 글씨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여자는 보란 듯이 내 앞에 그걸 세워 놓고 좀 더 작은 벽장용 옷걸이들을 검은 여행용 가방
에서 꺼내어 정성스럽게 하나씩 걸었다.

" 어때요? 틀림없는 옷걸이죠? "

만족스럽게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나선 옷걸이를 훌륭하게 걸었다고 스스로 칭찬
하며 흡족해 하였다, 흥, 흥.

" 하지만 옷걸이는 옷을 걸어서 보관하려고 있는 거잖아. 그렇게 옷걸이를 가지고 다닌다
면 옷걸이로서의 자존심을 해치는 일이 아닐까? "
" 당신은 유행에 둔하군요. 요즘 사람들에게 가지고 다니는 옷걸이는 필수품이라구요. 알
겠어요? 필. 수. 삐삐나 핸드폰 따위보다 더 중요한 거라구요. "
" 옷걸이가 어째서 필수인데? 그런 유행은 들어본 적이 없어. "
" 흐응, 좋아요. 그럼 당장 여기서 증명해 드리죠. "

여자는 뾰로통한 시선을 흘기며 열차 내를 둘러보더니 폴 매카트니를 닮은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 이봐요. 당신은 물론 옷걸이를 가지고 있겠죠? "
" 아니요. "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짧게 대답해버리는 폴 매카트니를 닮은 젊은 남자를 잠시동안 물
끄러미 쳐다보다가 돌아오더니, 세워놓은 옷걸이 기둥을 한 손에 들고 다시 그에게 돌아갔
다. 그를 옷걸이로 때려죽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여자는 꼼꼼하게 그
가 죽었는지를 확인한 다음에 그의 옷에서 지갑을 꺼내어 자신의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녀
는 손을 탁탁 털며 내게 되돌아오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이건 어쩔 수 없었어요. 나는 원래 비틀즈를 싫어해요. "
" 나도 별로 좋아하진 않아. 하지만 사람을 죽였으니 신고를 받고 경찰이 올 거야. "
" 괜찮아요. 비틀즈는 싫어하지만 경찰은 좋아하니까요. 정확하게는 경찰복이 좋아요. 꼭
옷걸이에 걸어보고 싶었거든요. "
" 좋을대로 해. "

나는 그녀가 하는 짓에 그만 맥이 풀려버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가 하는 일
은 분명 특별하지만, 따분하고 지루했다. 그냥 그 자리에 벌렁 드러누워 호랑이마님 안방
차지하듯 실컷 코를 골며 자고 싶었지만, 혹시 그녀가 옷걸이로 아까 그 남자처럼 나를 때
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억지로 잠을 쫓았다. 게다가 나는 '범고래로 파리를 잡는 연구 보
고서'를 오늘 안으로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여자가 빙
그레 웃더니 옷걸이를 멀찌감치 차버리고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조그만 어깨를 내게 기댔다.

" 이젠 옷걸이든 뭐든 필요 없어요. 까짓 거 옷걸이 몇 개 못 팔면 어때요? 이봐요, 난 당
신이 좋아요. 좋다구요. 당신이 내게 좋을대로 하라고 했으니 난 내가 좋을대로 할 거예요.
아이, 참. 이봐요, 내 말 듣고 있어요? 좋아. 한다. 구요. "
" 당신 유행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바뀌네. "
" 맞아요. 옷걸이는 한물 갔고, 이젠 비틀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사귀는 게 유행이라구요. "
" 그것 참. "
" 이봐요, 나랑 사귀어 줄 건가요? 아니라면 나는 당장 비틀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다른
남자를 찾겠어요. "

그러나 나는 그 예쁜 여자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는 사실을 떠올
리며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옷걸이를 둔하게 휘두르는 솜씨를 봐선 모기나 파리를 잘 못
잡을 것 같았다. 내가 거절하자 여자는 한숨을 쉬며, " 어쩔 수 없네요. " 하고는, 다음 역
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비틀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함께 다정하게 길거리를 거니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내 손에 들린 아무개 음식점 옷걸이를 향해 폭, 하고 한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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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명비 님 소개로 오게 되었습니다.
조잡한 솜씨나마 딴에는 썼다고 올려봅니다. (엉엉 ;ㅁ;)
KeR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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