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도 때론 포르노 그라피 주인공이고 싶다.

  바람이 분다. 붉은 태양은 온 거리에 햇빛을 토해냈고, 아스팔트는 찐득한 토사물같은 열기를 내뿜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만이 반가웠지만 그마저도 도로 위 차들이 뿜어대는 매케한 연기탓에 사라지기 일수였다. 모두들 무언가를 뿜어대고 토해내고 있다. 나 역시도 땀을 쏟고 있다. 매연이라는 추를 매달아 무거워진 공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탓에 아스팔트 위를 걷는 내 발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버스를 탈 걸. 배도 고프다. 나는 점점 숨이 막혀왔지만 계속 걸었다. 저쪽에 드디어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손으로 이마 위 땀을 닦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속 체크카드는 믿음직스럽게 제자리에 있었다.
  나는 삼성프라자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에어컨 바람이 달라들었다. 갑작스런 기온 차이 때문에 팔에 소름이 돋았다. 반팔 와이셔츠를 입은, 뚱뚱한 남자가 나에게 달려왔다. 그가 말했다.
“손님, 찾으시는 제품 있으세요?”
“잠시만 둘러볼게요.”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지만 혹시 하는 맘에 한번 더 살펴보기로 했다. 사려고 했던 넷북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꼼꼼이 제품을 살펴봤다. 전시용 상품이라 그런지 이 넷북은 흠집이 조금 있었다. 넷북 코너에서 두리번 거리던 나는 에버라텍 HS101에서 걸음을 멈추고 직원을 불렸다.
“이거 하얀 색도 있죠?”
“그럼요, 손님. 오늘 가져가시겠어요? 네, 그럼 저쪽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제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낑낑대며 학교 언덕을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곧 나의 것이 될 넷북을 꺼내기 위해 창고로 가는 대리점 직원을 나는 흐뭇하게 쳐다봤다. 그러나 흐뭇한 표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직원의 등이 땀에 젖어 등에 점이 몇 개 있는지 다 보일 지경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마에 손을 갖다댔다. 아까 내 이마에 흐르던 땀은 에어컨 바람에 말라버린지 오래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에 널부러진 여성지를 뒤적거렸다. 아무 글씨나 읽으면서 틈틈이 창고쪽을 쳐다봤지만 직원은 나오지 않았다. 여름이라 잡지 뒤쪽에는 납량특집으로 무서운 이야기가 실려있었다. 나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흔하디 흔한, 여름에 놀러가서 누구나 한번은 들었을 것 같은 얘기밖에 없었다.
“저... 손님.”
  드디어 내 넷북이 온 건인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직원은 말했다.

“손님, 죄송한데... 주문하신 제품이 딱 하나 남아있었는데 한 시간 전에 예약이 되었다고 하네요. 혹시 남아있는 게 없나 해서 창고도 다시 살펴보고 근처 대리점에도 전화를 해 봤는데 거기도 다 나갔네요. 이 전시용 상품은 어떠세요? 전시용은 30%세일이 됩니다.”

  직원은 나에게 전시용 넷북의 장점을 하나하나 말했다. 내 표정이 쉽게 밝아지지 않자 그의 말은 더욱 빨라졌다. 직원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고, 한방울이 이마를 타고 굴러떨어졌다. 댐이라도 건설해 땀구멍을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온 손님을 그냥 내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알겠지만, 난 착찹한 심정이었다. 이 정도 스펙에 이 정도 가격대인 넷북은 이거밖에 없었다. 그냥 인터넷으로 살까....
“그럼 40% 빼 주세요.”
“손님, 그건 안 되구요. 30%가 한계입니다. 저희도 장사해야죠.”
  몇 번의 실랑이가 이어졌고 결국 나는 30%할인에 여러 가지 주변기기들을 공짜로 얻을 수 있었다. 아까부터 지갑 속에서 기다리던 체크카드가 이제 제 역할을 할 때가 왔다.
“서명 부탁드릴게요.”
  나는 서명을 하고 기다렸다. 잠시 후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죄송한데.. 한번만 더 부탁드려요 라고 말했다. 나는 순순히 서명을 다시 했다. 그러나 세 번째 서명을 부탁받을 때부터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싸인은 내 이름에서 지렁이 한 마리로 변해갔다. 무려 다섯 번째 서명에서야 카드 영수증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직원과 하이파이브라도 치고 싶은 심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에게 카드를 다시 건냈다.

  겉에 난 기스 자국만 빼면 넷북은 새 것이나 다름없었다. 넷북은 성능이 낮아서 포토샵만 돌려도 버벅댄다고 들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단 괜찮았다. 넷북을 산지 이틀 정도 지나고 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삼성프라자입니다. 얼마 전에 넷북 구입하신 고객님 맞으시죠?”
“아 네 그런데요?”
“혹시 제품에 문제는 없나 해서 확인 전화드렸습니다.”
“별 문제없는... 아 그러고 보니까요.”
  나는 전화를 끊으려다 배터리가 생각났다. 이건 문제라기보단 좀 이상했다. 한참 인터넷을 하고 일어났는데 넷북에 연결된 코드가 빠져있었다. 꽤 오랜 시간 사용했는데 아직까지 넷북은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바로 코드를 연결하고 작업표시줄에 있는 배터리 용량을 확인했다. 배터리 용량을 나타내는 바 안의 초록색 블록은 100%에서 0%까지 오르고 내리락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심장박동같기도 했다.
“다른 건 문제가 없구요. 배터리 용량 표시가 제대로 안 되요.”
“1년간 무상수리 받으실 수 있으니까 언제 한 번 대리점으로 방문해주시겠어요?”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남자가 아니고 여자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갔을 때 그 넓은 매장에 직원은 그 남자 단 한 명만 있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 속 그 남자 가슴에 붙어 있던 명찰 부분만 뿌옇다. 몇일 후에 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매장에 다시 가지 않았다. 뭐 배터리 오래가면 좋은 거지.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

“모하냐ㅎㅎㅎ”
마선이가 네이트온에 접속하자마자 나에게 쪽지를 보냈다.
“걍 있지, 넌 뭐해?”
“좋은 거 보고 있다.”
  마선이와는 작년에 같은 반이었다. 마선이는 공부도 좀 하긴 했지만 공부보단 야동 용량으로 전교에서 순위권 안에 드는 놈이었다. 수줍은 듯 있다가도 야한 얘기가 나오면 눈이 번쩍였다.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그저 찌질한 놈이지만 나는 녀석이 그리 싫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가 야동을 보는 마당에 이 녀석은 그냥 좀 대책없이 솔직한 것뿐이다. 솔직하다라는 것, 나는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녀석하고 어울리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늘 그렇듯이 별 영양가도 없는 농담이나 주고 받다가 녀석이 나에게 파일 하나를 전송시켰다. 파일 이름은 Ark34이다. 꽤나 프로그램 파일같은 이름이다. 그런데 확장자는 왜 avi인가.
“좋은거임ㅋㅋㅋ 최근 중 베스트!ㅋㅋㅋ”
  나는 별 생각없이 파일을 전송받기 시작했다. 내 문서 폴더를 열었을 때 Sometimes 라는 폴더가 눈에 띈 것은 그 때였다. 새 폴더를 만들 필요없이 나는 마선이가 보내는 파일을 Sometimes에 저장하고 라면을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갔다. 다시 방으로 왔을 때 파일 전송은 끝나있었다.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 부모님과 동생은 모두 자고 있다. 나는 이어폰을 넷북에 꼽았다. 그리고 Sometimes 폴더를 클릭했다.
  그 폴더에는 ‘Ark34.avi’, ‘Sometimes.avi’ 이렇게 두 개의 파일이 있었다. Ark34는 마선이가 보낸거고 나머지는 뭐야. 나는 ‘Sometimes.avi’ 를 클릭했다.
순간 모니터 화면이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으로 확 바뀌었다. 괜한 짓을 했다라는 생각에 키보드를 아무거나 눌렀지만 여전히 검은색 모니터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바이러스인가... 그렇게 10초정도 지났을까. 서서히 화면이 밝아졌다. 마우스를 움직여보니 다행히 넷북은 멀쩡했다.
  동영상은 흐릿했다. 초점이 잘 맞지 않은 듯 싶다. 하지만 앉아있는 사람이 여자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체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볼 생각이 없는 듯 바닥을 응시했다. 동영상 너머로 카메라를 잡고 있는 사람이 초점을 조정하기 시작했는지 초점이 서서히 맞기 시작한다. 조금씩, 조금씩 이제 보통의 화면과 다를 바 없이 뚜렷했다.

여자는 묶여 있었다.

  입은 청테이프로 막혀있다. 누군가 다가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위로 잡아 올렸다.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눈물이 이번엔 여자의 무릎 위로 떨어진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카메라는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나 또한 가만히 바라봤다.
  갑자기 남자가 여자의 뺨을 내리쳤다. 아주 날카로운 소리가 내 귀에 박혔다. 내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여자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사내를 노려본다. 그리고 카메라를 쳐다봤다. 갸름한 얼굴에 하얀 얼굴, 눈물 맺힌 눈, 그리고 왼쪽 눈 아래에 찍힌 점.

화면이 어두워졌다.

  다시 환해졌다. 동영상 속의 남자는 계속 뺨을 때리고 옷을 찟었다. 여자의 비명 소리가 모니터로 넘쳐 나올 것 같았다. 여자는 반항했지만 손과 발에 묶인 줄은 쉽게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여자의 옷이 다 벗겨졌을 때야 비로소 남자는 여자의 발에 묶인 줄을 풀어주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단지 자신을 위해서였지만.
   나는 츄리닝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나는 방문과 모니터를 살피며 손을 움직였다. 이렇게 과격한 동영상은 처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밥을 먹으면서도 나는 그 동영상을 떠올렸다. 누군가가 타인에게 고통받는 장면에 흥분하는 내가 이상했지만, 머리 속에서 부유하는 그 장면들을 걷어낼 수가 없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텔레비젼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빨리 가족들이 어딘가로 나가길 바랬다.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나에게 엄마가 같이 가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종택아, 점심 먹었으니까 빨리 약 먹어야지. 엄마 성당 갔다온다.”
  집 안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자 나는 바로 넷북으로 달려갔다. 다시 동영상을 클릭하려는 순간, 마선이에게 쪽지가 왔다.
“잘 봤냐?ㅎㅎ”
“나에겐 그것보다 더 굉장한 것이 이써ㅋㅋㅋ”
“뭔데?”
“이걸 어케 말로 설명해ㅋ”
  나는 마선이에게 ‘Sometimes.avi’ 를 보내려는 순간, 이 동영상의 용량이 10기가라는 것을 알았다. 자그마치 10기가.
“야 이거 용량이 10기가야, 네톤으로 못 보내겠다.”
“미친..ㅋ 여러 명 나오는 거야?”
“아니,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남자 좆 터지겠네ㅋㅋ 됐다, 너나 많이 봐라.”
  대화창을 닫았다. 그리고 동영상을 재생했다. 이상했다. 파일 용량은 10기가가 넘는데 재생시간이 1시간도 되지 않다니. 동영상 화질이 눈에 띄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뭐, 용량이 크건 작건 상관없었다. 나는 동영상을 보면서 내 본연의 일에 충실하기로 했다. 쉽게 참아낼 수가 없어 3번 정도 자위를 했다. 이 동영상은 시작도 그러했지만 마무리도 불성실했다. 처음 동영상을 켰을 때처럼 갑자기 모니터에는 검은색 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끝인가. 미처 다 짜내지 못한 눅눅한 수건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검은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검은색 화면은 서서히 흰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런 글이 천천히 타이핑되기 시작했다.


잘 보셨습니까?
그러나 현실와 이상은 다른 것입니다. 열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해보는 것이 낫다는 말도 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즉, 실제로 해 보고 싶다면
오늘 오후 6시에 두루미 공원 분수대로 오십시오.
빨간 모자는 당신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꼭 빨간색 모자를 쓰고 나오세요.


  웃기지도 않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날짜가 나온 것도 아니고, 뜬금없이 오늘 오후 6시라니. 이 동영상을 누가 볼지 알고 이런 글을 쓴 것일까? 나는 고개를 흔들며 동영상을 껐다. 말도 안돼. 그러나 그냥 한 번 나갈볼까 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었다. 뭐 어때, 아님 그냥 공원에 바람 쐬러 갔다 온 걸로 하면 되지.
  그래도 나 혼자 가기엔 말 그대로 좀 그랬다. 나는 마선이에게 전화를 걸어 녀석을 우리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 동영상과 글을 보여줬다.
“풉, 김종택, 설마 너 이거 믿는 거야? 꼬마냐. 말이 안 되자나 난 또 뭐라고.”
“그래도 이거 진짜 실제같지 않아?”
“나름 리얼리티가 있긴 하지만 요즘 워낙 연기를 잘 해서 것두 확실치 않아. 묶어놓고 우는 척 하는 거일수도 있어. 너 진짜 나갈거야? ”
“몰라, 그래도 궁금해. 그냥 산책삼아 나갔다 올거야. 넌 싫으면 너네 집으로 가라.”
“종택아, 그치만....”
“됐어, 별일 있겠냐.”
“아니... 빨간 모자 꼭 챙겨야지. 나도 같이 가.”

  아파트를 나서자 무겁고 축축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발걸음이 한층 무거웠다. 해가 내리치는 빛은 조금씩 힘을 잃어갔다. 무거운 태양을 피해 그늘 아래를 골라 걸었다. 마선이는 내 모자를 뺏어 자신이 쓰고선 이 상황이 마치 영화같다고 말했다. 나는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될 것 같냐?”
“잘 될거야.”
“어떻게?”
“잘.”
“잘 어떻게?”
“분수대가 갑자기 열리면서 다른 차원으로 갈 수도 있고, 분수대에 엄청난 보물이 있을 수도 있고, 분수대 밑에 석유가 있을 수도 있고, 또....“
“됐다.”
  친한 녀석이지만 이럴 땐 짜증이 났다. 정말 덥다.
“종택아, 나 궁금한거 있는데. 그 약 먹으면 기분이 어때?”
“그 우울증 치료제? 나 그거 안 먹어. 하루에 한 알씩 뜯어서 변기통에 넣고 물 내려. 정신과도 웃기더라. 그냥 평소에 우울한지, 죽고 싶다는 생각한 적 없는지 몇 번 물어보더니 약 주고 하루에 한 알 먹으래. 난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한 척을 하는 것 뿐이야. 멍청한 의사 덕분에 학교도 쉬고 말야.”
  너무 여유를 부리며 나왔을까? 시간은 거의 다 되어 가는데 아직 두루미 공원은 한참 남았다. 주말 저녁엔 어디나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 사이를 뛰어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결국 우리는 택시를 타야 했다. 둘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으면 두루미 공원 근처까지는 갈 수 있었다. 공원 근처에서 내린 우리는 달릴 수 밖에 없었다.
  땀 흘리는 직립동물들을 피해 겨우 두루미 공원에 도착했다. 다행히 6시 전이다. 잠깐 달렸을 뿐인데 온몸은 땀으로 축축했다.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공원 정수대로 다가갔다. 물을 먹다가 문득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선아, 핸드폰 가지고 왔어?”
마선이가 물을 잔뜩 입에 머금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동전 있어?”
  마선이는 동전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겨 내게 날렸다. 동전은 포물선을 그리며 정수대 위에 떨어졌다. 동전은 멈칫하더니 이내 하수구로 빨려들어가려고 했다. 나는 얼른 손을 뻗어 동전을 집었다.
  정수대 옆 쪽에는 먼지가 수북히 싸인 공중 전화기가 있었다. 요즘에도 공중전화기를 쓰는 사람이 있다라는 사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우선 동생에게라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동생 휴대폰 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러나 동생은 받지 않았다. 하긴 전화를 받아도 할 말이 별로 없다. 공원엔 뭐하러 갔다고 물어온다면 어떨까? 강간을 실제로 해 보기 위해? 아니면 그냥 왔다고? 전화기를 내려놓자 동전이 툭 떨어졌다. 동전을 꺼내기 위해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조그만 돌 하나가 들어있었다. 나는 동전과 그것을 같이 주머니 속에 넣었다.

이제 6시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계 초침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7시를 향했다. 고개를 돌려봐도 특별히 눈길을 끄는 사람은 없었다. 가끔 스쿠터나 소형차가 지나가기는 했다.
마선이가 일어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배고프다. 종택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결국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도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만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나는 마선이 머리의 씌워진 내 빨간 모자를 벗겨내 내 머리에 썼다.
“내가 불러냈으니까 오늘 내가 쏠게. 뭐 먹을래?”

그순간, 검은색 카니발이 우리 앞에 멈췄다. 차는 천천히 다가왔다. 서두를 것 없다는 듯 창문도 스르륵 조금씩 내려왔다.
“야, 진작에 쓰고 있어야지. 헷갈렸자나. 빨리 타.”
라고 앞자리에 탄 사내가 말했다.
마선이와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먼저 고개를 끄덕이자 마선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제까지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그냥 가기 싫었다. 우리는 둘이었고 차엔 그 남자밖에 없었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그리 강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설령 어떤 일이 생겨도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어찌됐든 우린 2명이다.
나는 뒷문을 슬쩍 열고 조심스레 안을 봤다. 차 안에는 어떤 사람이 상체를 차에 기댄 체 두 발을 쭉 뻗고 있었다. 우리는 차 안에 올라타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불을 켰다. 차 안에는 여자가 손, 발이 묶인 체로 앉아 있었다. 갑자기 밝은 빛이 켜지자 그녀는 눈을 찔끔 감았다. 서 있기엔 천장이 낮았다. 허리를 숙이고 옆으로 움직이던 마선이가 그녀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마선이는 바닥에 넘어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 표정만 찡그렸다.청테이프로 입이 막힌 여자는 가는 신음소리만 낼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숨이 막혔다. 그녀의 이목구비와 왼쪽 눈 옆에 있는 점, 그리고 입은 옷까지 동영상에서 봤던 여자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마 밑으로 드러난 하얀 허벅지를 보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나와 마선이는 차 뒤에서 그 여자와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마선이는 이 상황이 막상 되자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에게 뭐라고 말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앞자리에 탄 사내는 우리에게 불을 끄고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차를 운전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창 밖에 보이는 사람의 수가 적어져 간다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내 몸이 들썩거렸다. 차는 산으로 향했고 비포장도로로 들어가자 차는 더 심하게 덜컹거렸다. 흔들리는 차 때문에 내 발이 근처에 앉아있던 그 여자의 다리를 살짝 건드렸다. 그 때 그녀는 흠칫 놀라며 자신의 발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어렸을 때였다. 동네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횡단보도 쪽으로 가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차에 치었다. 깜 놀라 나는 주위를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는 차가 다니는 도로라는 생각도 못하고 강아지에게로 다가갔다. 강아지는 움직이지 못했지만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그냥 쳐다보고 있었다. 강아지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빵 하고 크랙션 소리가 났다. 커다란 트럭이 나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강아지를 구하지 못하고 나만 옆으로 비켜났다. 트럭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췄지만 내 아이스크림과 도로에 눕혀진 강아지를 피하지 못했다. 이상하다. 그리고 나서 내가 울었던가. 그 날 집엔 어떻게 돌아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한참을 잊고 있던 이 일이 왜 지금 생각이 나는 걸까?

덜컹. 차가 커브를 돌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이제는 어둡다. 이것은 분명히 뭔가 잘못된 일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차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은 이 불길한 예감을 더 증폭시켰다. 이건 아니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저 내려주세요. 더 가고 싶지 않아요.”
사내는 백미러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희한할 정도로 특징이 없는 얼굴이었다. 평균의 눈와 평균의 코과 평균의 입, 아무것도 꾸미지 않은 아바타의 얼굴 같았다. 그는 운전을 하며 말했다.
“거의 다 왔다.”
“가고 싶지 않아요. 내려줘요.”
“거의 다 왔다. 조금만 참아라.”
“지금 내려달라고. 어디로 가는 거야. 이런 젠장.”
나는 차 문 손잡이를 힘껏 당기며 소리쳤다. 락이 걸려있어 차문이 열리지 않았지만, 나는 계속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차 안의 침묵은 이내 철컥대는 소리로 바뀌었다. 마선이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내려달라고 소리를 치다가 급기야 창문 유리창을 발로 차서 깨버렸다.

차가 멈췄다.

마선이는 발을 움켜쥐었다. 하얀색 양말에 붉은 반점이 조금씩 커져갔다. 앞자리에 타고 있던 남자는 차에서 내렸다. 천천히 트렁크쪽으로 온 그가 트렁크를 열었다. 비로소 차 안에 타고 있던 네 명이 얼굴을 마주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화를 내려 벌떡 일어서던 나는 그의 손에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권총을 보았다. 또한 총구와 그 남자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남자는 턱으로 차 안의 여자를 가르켰다. 내 시선도 남자와 여자 사이를 오갔다.

“뭘 꾸물거려. 빨리 시작해.”
그가 말했다.
“나.... 난... 이런 건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무슨 소리지. 그럼 여기까지 왜 온 거야. 이건 니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야.”
“아니야. 난 이런 일을 원하지 않았어. 이게 무슨 미친 짓...”

순간 남자는 총을 쐈다. 나는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였고 차 안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몸을 수그렸다. 총성이 지나가고 고개를 들었을 때 자동차 천장에 생긴 동그랗고 선명한 구멍으로 빛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선이의 고함소리가 들린 건. 녀석은 그 남자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박치기를 했다. 멋대로 눌린 총은 멋대로 발사되서 차 안 어딘가에 총알을 박았다. 그리고 마선이는 차 밖으로 뛰쳐 나갔다. 남자의 시선이 마선이에게 쏠린 사이 나는 아까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돌을 꽉 쥐고 그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텅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머리를 움쿼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남자는 단지 움직임을 멈췄을 뿐이었다.
이상했다. 이건 뼈에 돌이 부딪친 느낌이 아니었다. 물론 한 번도 사람 머리를 돌로 찍어본적은 없지만 이런 느낌이 아니란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씹쌔끼들.”
남자는 고개를 돌려 구두로 내 배를 세게 찼다. 나는 형편없이 뒤로 나가 떨어졌고 의자에 머리를 찌었다. 그 뒤로는 내 얼굴로 남자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처음 몇 대 맞을 때까지는 반항했지만 점점 시야가 흐려졌다. 점점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이 새끼는 나를 죽일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자는 막힌 입으로 소리를 질렀다. 물론 남자는 신경쓰지 않았다. 차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잠시 후 간신히 쥐고 있던 내 주먹은 맥없이 풀어졌다.

눈을 감고 얼마나 지났을까. 살며시 눈을 떴다. 나는 여전히 차 안에 누워있었다. 죽진 않았지만 그 개새끼는 아주 고맙게도 내 팔과 다리를 묶어놓았다. 차 천장에 뚤린 구멍에는 달빛만이 조금 들어왔다. 지금쯤 가족들은 나를 찾고 있을까. 나는 왜 병신같이 핸드폰을 들고 오지 않을걸까. 왜 괜히 마선이를 불렀을까. 내가 너무 한심했다. 이젠 다 끝난 것 같다. 몸에 힘은 하나도 없고 팔다리도 다 묶였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때 내 귀 옆으로 무언가 움직였다. 여자의 발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여자는 발가락으로 내 입에 붙어 있던 청테이프를 간신히 뜮어냈다. 여자는 양말을 신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발가락으로 테잎을 떼어낼 수 있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속옷이 보였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그 여자는 막힌 입으로 무어라고 말을 했다. 자신의 테잎도 떼어달라는 듯 보였다. 나는 양말을 신고 있는데다 손까지 묶여 있었다. 결국 벌레가 기어가듯 그 여자의 곁으로 가서 이빨로 테잎을 떼어낼 수 있었다. 이빨에 청테이프가 잘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앞이빨로 청테이프를 뜮어낼 수 있었다.
나는 말했다.
“저기, 어쩌다가 이런 일이..”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 트렁크는 확 열렸다. 내심 마선이가 다시 와주길 바랬지만 밖에 서있는 사람은 그 남자였다. 남자는 차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내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고는 나를 차 밖으로 끄집어 던졌다. 나는 꼼짝없이 땅바닥에 내팽게 쳐졌다. 허리가 땅바닥에 있는 돌덩이랑 부딪쳤다. 충격이 발톱 끝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남자는 이번엔 발로 내 배를 찼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서는 억억 소리만 나왔다. 잠시 후 남자는 분이 풀렸는지 발차기를 멈췄다. 그리고 내 발에 묶인 밧줄을 칼로 자르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남자는 내 눈 바로 앞에 라이트를 비췄다. 밝은 빛이 내 눈을 후비고 들어왔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찌를 듯한 빛이 지나가고 다시 감각이 돌아왔을 때 남자는 내 얼굴 앞에 총을 들이밀었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걸어.”
이젠 시키는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잠자코 걸었다.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나에게 멈추라고 명령했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남자는 라이트로 땅을 비췄다.
그곳엔 마선이가 죽어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마선이 얼굴엔 풀조각들이 맘대로 붙어있었다. 입을 헤 벌린 체, 눈도 감지 못한 체로.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어쩌자고 나는 이런 곳에 오게 된 걸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흐르는 눈물이 남자에게 얻어맞아 생긴 상처를 건드려 쓰렸다. 그러나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머리 속엔 내 옆에 서 있는 저 미친 놈에 대한 증오만이 가득 차올랐다.
“다리를 잡고 끌고 가.”
내가 움직이지 않자 남자는 욕을 했다. 가만히 울고 있던 나는 남자에게 달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다리 힘이 풀린 내가 그를 당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총 소리가 숲 속을 흔들었다.
나는 마선이의 두 다리를 끌고 다시 차로 향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몸을 뒤집어 얼굴이 땅에 긁히지 않게 해주는 것 밖엔 없었다. 축 쳐진 마선이의 팔이 숲 속에 길을 냈다. 여름이지만 산속의 밤 공기는 차가웠다. 온몸이 욱씬거려 숨을 들이 쉴때마다 폐조차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다시 차에 도착하자 남자는 차 트렁크를 열고 권총으로 안을 가르켰다. 마선이를 바닥에 눕혀 놓고 차에 올라서려 할 때 그는 말했다.
“그 놈도 같이 올려. 빨리.”
나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했다. 마선이를 올리고 내가 차에 올라가려 할 때 차 엔진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차 한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혹시 지나가던 사람이 총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온 걸까? 나는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남자는 차가 다가올때까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차는 적당한 곳에 멈춰졌다. 라이트가 꺼지고 그 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뚱뚱한 남자. 차에서 내린 사람은 삼성프라자 직원이었다.
“미안 좀 늦었지.”
“좀 늦어? 씨발, 여기 상처 안 보여? 이새끼 다 해 놓으니까 오네.”
“미안미안, 일이 좀 늦게 끝났어.”
그 직원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선 불을 붙였다.
“저 새끼야?”
직원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근데 너도 참 멍청하다. 넷북, 노트북 합쳐 30개 컴퓨터에 동영상을 넣어놨는데 진짜 나온 놈은 너 딱 한 명이다. 한심한 새끼.”
그는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끈적이는 타액이 천천이 내 턱으로 내려왔다. 나는 담배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담배를 반쯤 태운 뚱뚱한 직원은 다시 자신의 차로 가서 가방 하나를 들고 왔다.

“시간이 없다. 빨리 시작해. 옷부터 벗겨.”
남자는 총을 나에게 겨누며 말했다. 뚱뚱한 직원은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전원을 켰다.
손이 발발 떨려왔다. 아까 여자 입에 붙어 있는 테이프를 떼어내지 않은 건 차라리 잘한 일 같았다. 여자는 막힌 입으로 소리를 지른다. 아니 지르기 위해 애쓴다. 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여자에게 죄송합니다라고 조그맣고 낮게 말하곤 브라우스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어나갔다. 손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렸다. 옷은 차례차례 내 손을 통해 벗겨졌고 하얀 살이 순서대로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속옷을 벗겼다. 나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와 총머리는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만지고는 있지만 이게 사람이 아니라 나무토막같았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여자, 남자, 카메라 3개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다.
총을 든 남자는 다가와 여자의 발목에 묶인 밧줄을 잘라내고 여자의 다리를 벌렸다. 여자는 소리치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녀를 향해 총머리를 돌리고, 그녀 쪽으로 총을 한 발 쐈다. 총소리와 함께 여자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남자의 인형처럼 움직였다. 하라는 대로 삽입을 했고 하라는 대로 사정했다. 그 후 조용히 나에게 다가온 남자는 내 입을 손수건으로 막았다. 손수건이 물에 젖어있다고 생각했지만 손수건에 묻어있는 것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갑자기 숨이 막혀왔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눈을 떴다. 차 안은 무척 어두웠다. 몸이 무거워 일어나기 어려웠다. 천장을 더듬어 조명을 켰다. 마선이는 눈을 반쯤 뜬체로 입을 헤 벌리고 있었고, 여자는 목이 졸렸는지 목에 보라색 굵은 자국이 나 있었다. 마선이 입에는 종이 하나가 말려서 꽂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꺼내 폈다.

니들 아까 차에 타는 거 다 찍혔어. 우리가 억지로 태운게 아니라구. 즉, 너네들이 원해서 이곳에 온 거지. 경찰에 말 하려면 해.
단, 말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제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앞자석 기어변속기 옆에 생수통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얼굴에 생수를 부었다. 얼굴 전체가 쓰려왔다. 백미러를 보며 피를 닦았다. 일단 집으로 가자. 나는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나는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달이 무지막지하게 밝아 길은 잃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산을 한참 내려간 끈에 큰길로 접어들 수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 길에는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내 얼굴에 난 상처와 멍 게다가 옷 역시 엉망이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몇몇은 내 얼굴을 보고 옆 사람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러나 누구도 나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하긴 무슨 일이냐고 물어온들 뭐라고 답할 것인가. 나는 고개를 숙인 체 계속 걸었다.
산에서 거의 다 내려왔을즈음 휴게실 옆에 서 있는 공중 전화를 발견했다. 나는 동전을 넣었다. 통화신호음이 들린다. 어디에 전화를 해야 할까? 신호음은 나를 재촉했다. 문득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넷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갑 속 대리점 명함을 꺼내 번호를 꾹꾹 눌렀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고 걸어주십시오.’
내가 번호를 잘못 누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누르려고 명함을 보았을 때 지갑 가장 정면에 넣어둔 주민등록증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내 손에서 힘없이 전화기가 미끄러졌다.   전화기는 공중전화박스 유리에 퉁하고 부딪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 얼굴을 하고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집에 전화를 해 친구 집에서 놀고 가겠다고 했다. 누구네 집이냐는 말엔 대충 얼버부렸다. 피곤한 탓에 피시방 의자에 앉아 골아떨어졌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대리점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망할. 내가 잘못 누른 게 아니었다. 번호는 없었다. 아니, 없어졌다. 나는 곧장 대리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대리점 간판은 그대로였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텅 빈 가게 안을 살폈다. 그 새끼를 찾아서 나를 찍은 비디오를 되돌려 받아야 했다. 목이 말라왔다. 나는 그 건물 입구에  서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았다. 버튼에서 내 손이 떨어지자마자 음료수캔은 바닥에 떨어졌다. 내가 허리를 숙여 캔을 꺼낼 때 건물에서 두 명의 중년 남자가 걸어나왔다.

“야, 여기 주인은 왜 그렇게 서둘러서 나간거야? 아직 빚도 있다고 들었는데. 주인이 어떻게 생긴 놈이지?”
“그 있잖아, 뚱뚱해서 졸리게 생긴 얼굴. 근데 그 놈도 좀 이상해. 그젠가 빚쟁이들이 와서 난리치고 갔길래 위로나 해줄까 해서 가게 들어갔는데 글쎄 그 놈이 뭐가 그리 좋은지 웃더라고. 근데 내 생각엔 또 어디에 쫓기나봐. 전화만 오면 깜짝깜짝 놀라더라고.”
“걔 좀 이렇게 된거 아닌가?”

대머리 중년남자는 귓바퀴 옆으로 원을 그리며 혀를 쭉 내밀었다. 둘은 껄껄 웃으면서 내 옆을 지나갔고 나는 차가운 캔을 쥐고 생각에 잠겼다. 공허한 시간이 몇 분쯤 흘렸다. 어찌됐든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적지근해진  음료수 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캔은 묵직하게 떨어졌다. 두 손을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한 손은 차갑고 한 손은 따뜻했다.
나는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벌써 그 일은 일주일이 지났다. 며칠 전엔 마선이 집에서 전화가 왔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만 대답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무 고민스러웠다. 텔레비젼 뉴스에는 야산에서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차 안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나왔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째 밖에 나가지 않고 있다. 가족들은 친한 친구의 죽음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며칠 전엔 다시 정신과에도 다녀왔다. 의사는 우울증이 심해졌다면 복용량을 두 배로 늘리라고 말했다. 물론 약은 전혀 먹고 있지 않다. 그리고 오늘,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 전화는 만수의 전화였다.
“응, 나야 괜찮아?”
“그냥 그렇지. 만수 너는 내일 장례식 갈거야?”
“나는 가려고. 저기 근데 말이야. 너 혹시 빨간색 모자 있어?”
나는 침을 삼켰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동영상 하나를 받았는데... 그게 있자나... 거기 나오는 빨간 모자 쓴 사람이 얼굴도 너랑 비슷하고 옷도 비슷하고 그니까...”
나는 아니라고 그럴리가 없지 않는냐며 얼버부렸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숨을 가다듬고 나는 그 동영상을 어디서 받았는지 물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만수가 알려준대로 동영상을 받았다.

설마설마했다. 그러나 동영상을 켜자마자 내 얼굴은 정확하게 나왔다. 비록 모자를 쓰고 있긴 했지만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볼 자신이 없어 빨리 넘기면서 동영상을 확인했다. 동영상은 누군가에 의해 교묘히 편집되어 있었다. 내가 옷을 벗기고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강간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번에 알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영락없이 이 모든 것을 내가 했다고 믿을 지경이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덮어쓰는 것이다. 경찰에 가서 이건 내가 아니다라고 말해서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동영상을 보게 될 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사실을 알려줄 수는 없다.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야동. 이 동영상 끝에도 공원으로 나오라는 글이 있을까. 나는 동영상 맨 뒤로 커서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 모든 게 이 넷북 때문이다. 나는 넷북을 들어 책상에 내 던졌다. 넷북은 책상에 부딪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쓰레기통에 쳐 넣었다. 의자에 주저앉았을 때 벨이 울렸다. 나는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문 밖에 서 있는 사람도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몇 번의 벨이 다시 울렸을 때 나는 누가 온 건지 카메라를 통해 봤다. 우리 집 문 밖에는 낯선 남자 4명이 서있었다.



2010년 4월 18일 새벽 뉴스
가출한 여고생과 같은 반 친구를 살해한 협의로 긴급 체포된 고등학생이 자신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며 협의를 부인하고 있으며, 자신은 다른 사람이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라는 주장만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씨는 최근까지 큰 문제없이 학교를 다녔지만, 최근 경미한 우울증 증세를 보이면서 등교를 거부했습니다. 경찰은 우울증이 심해져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 중입니다.
시신이 발견된 차 안에서 이 씨의 주민등록증이 발견됐습니다. 또 범행에 사용된 총에도 이 씨의 지문이 발견됐었으며, 범행 현장이 담긴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었습니다. 때문에 경찰은 이 씨의 강력한 부인에도 혐의를 입증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범행에 차가 쓰였고, 동영상을 촬영하는 등 동범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습니다.

“별 미친 놈도 다 있군.”
최 씨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벌써 6개월째 오늘처럼 새벽에 일어나 쓰레기통에서 돈 될만한 것을 구해 팔고 있다. 요즘은 이 짓도 경쟁이 붙어서 일찍 나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건질게 없다. 지금 듣고 있는 라디오도 며칠 전 쓰레기통에서 주운 것이다. 그의 눈은 오직 돈 될만한 것을 찾기 위해 깜박인다.
그는 또 다른 쓰레기 봉투를 열었다. 봉투를 열자마자 음식물 썩은내가 진동했다. 최 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쌍욕을 내뱉곤 봉투를 저쪽으로 치웠다. 그는 잠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통증이 몸 전체로 퍼졌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인상을 쓰자 주름이 더욱 도드라졌다. 저쪽 쓰레기봉투의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무언가 네모난 것이 봉투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봉투를 열고 뒤집었다. 조그만 검정색 넷북이었다.
최 씨는 휘바람을 불며 넷북 전원을 켰다. 겉은 더러웠고 속도도 느렸지만 아직은 쓸만했다. 그는 오랜만에 웃었다. 넷북을 다시 끄고 가방에 넣었다. 어딘론가 향하는 최 씨의 발걸음이 가볍다. 그리고 방금 넷북에 불이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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