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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뱀파이어] 그림자들

2006.02.19 10:4502.19

밤새 몹시 눈보라가 몰아친 아침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처럼 잔설이 흩날렸지만 눈보라는 이미 그쳤고 구름마저 말끔히 걷힌 하늘은 얼어붙은 듯 투명한 파란색이었다. 세상은 온통 청과 백-청금석 하늘 아래 순백의 설원이 펼쳐져 있었고, 그리고 청과 백의 경계선 위에는 두 개의 검은 점이 놓여 있었다.

점ㄱ은 점ㄴ을 향해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접근했다. 설원이 완벽한 유클리드식 평면이 아니라 (그노시즘적인 의미에서) 저속하고 타락한, 프랙탈 곡면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건 간에, 그렇게 해서, 점ㄱ은 점ㄴ과 만났다.

점ㄴ은 작고 예쁜 여자였다. 아니, 최소한, 작고 예쁜 여자처럼 보였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작고 예쁜 여자였던 것처럼 보였다.

낡아 헤진 모피코트는 얼음으로 뒤덮여 뻣뻣하고 묵직했다. 하얗다 못해 파리한 얼굴과 손도 온통 얼음투성이였다. 마치 천 년 동안 눈보라 속을 헤매기라도 한 것처럼.

비슷한 엄밀함으로, 크고 튼튼한 남자처럼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점ㄱ은, 점ㄴ을 들쳐 업고 그의 집인 직사각형ㄱㄴㄷㄹ로 돌아갔다.

*

니은은 늦은 오후에 깨어났다. 늦은 오후에 깨어난 니은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눈에 반사되어 보다 강렬한 늦은 오후의 햇빛이었고, 그 햇빛에 마치 광고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벽지의 섬세한 당초 문양과 불타오르는 듯 휘황한, 한 점 티 없는 침대 시트와 그 곁으로 힐끔 보이는 협탁 위 순백의 백자 주전자와 사기잔이었다, 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이나, 니은의 눈에 정작 들어온 것은 두꺼운 커튼으로 차폐된 희미한 미명 아래 안개처럼 뭉근해진 천장 벽지와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협탁, 그 위에 유령처럼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주전자와 컵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돌처럼 두꺼운 문이 열리고, 동굴처럼 어두운 복도가 드러나고, 기역이 들어왔다.

- 정신이 드셨군요.

뭐라 대답하기 애매하여 니은은 고개만 까닥 숙여보였다.

- 뭣 좀 드셔야 할 텐데요, 수프를 가져올까요?

- 아뇨, 괜찮읍니다.

당황한 니은이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지만, 기역은 이미 문 밖을 나서고 있었다.

*

따뜻한 김이 흘러나오는 크림 수프를 니은은 어색하게 마시는 시늉을 했다. 겨울 낮은 짧아 이미 어둑어둑한 얼어붙은 유리창 너머에서 몇 줄기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솟아올라 메아리쳤다.

- 늑대입니다.

니은이 몸을 떠는 것을 보고 기역이 말했다.

- 근방에 늑대들의 서식지가 있습니다. 낮에는 보이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없죠.

- 무엇을 먹고 사는 걸까요, 늑대란 짐승들은.

니은이 자연스럽게 수프가 담긴 컵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혼잣말처럼 물었다.

- 여러 가지,

기역은 눈치채지 못한 듯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 저택 밖의 숲은 말 그대로 미개간지입니다. 인간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못한 원시 한대림이 몇 백 몇 천 킬로미터고 펼쳐져 있죠. 아마도 사슴이나 고라니, 토끼, 너구리, 멧새, 기타 등등을 먹고 살 겁니다.

- 그런 동물들이 많나 보군요.

니은은 빛나는 눈빛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 네. 숲은 깊으니까요.

기역은 무심한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거의 줄어들지 않은 컵을 다시 쟁반에 챙겨들고 문을 나서며 무심한 듯이 덧붙였다.

- 저는 밤이면 서재에서 책을 읽거나 악기를 연주합니다. 그럴 때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전혀 알 수 없곤 하죠.

무심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마치고, 기역은 문을 반쯤 닫고 나갔다. 니은은 침대에 비스듬히 앉은 채 기역이 한 말의 의미를 곰곰이 곱씹었다.

*

아침. 그 날 따라 숲에서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간밤에 내려 쌓인 눈들을 치우느라 저택 주변을 돌아보던 기역은 문득 눈삽 아래에서 다른 감촉을 느끼고 허리 굽혀 삽날 앞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얼어붙은 작은 새의 사체였다. 던져버리려던 기역은 문득 그 무게가 유달리 가볍다는 생각에 보다 주의깊게 살펴보다 날갯죽지 부근이 피로 물들어 있음을, 그 중앙에 작은 구멍이 둘 뚫려 있음을 발견한다.

*

밤이다. 검은 바람이 유리창을 나직이 흔든다. 어두운 복도는 텅 비어 있다. 무례한 밤공기가 부웅부웅 알 수 없는 울음을 소리 없이 운다. 니은은 복도 ㄷ을 통해 기역의 침실로 향한다. 어둠에 파묻힌 계단 ㄹ을 능숙하고 오르고 소리 없이 복도 미음을 미끄러져 기역의 침실로 들어간다. 얇은 라사 커튼이 내려진 침대 안에서 기역은 숨소리도 안 들릴만치 조용하게 잠들어 있다. 니은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기역의 그림자 위로 쏟아진다. 니은의 긴 머리채의 끝없는 어둠 이 기역의 목덜미 위로 쏟아진다. 청명한 밤의 창틀 밖에서 내리치는 달빛에 니은의 송곳니가 백골처럼 혹은 잊혀진 고대의 첨탑처럼 반짝인다.

그러나 니은의 송곳니는 기역의 살갗 바로 앞에서 멈춘다. 밤은 변함없이 어둡고 시간은 변함없이 흐르고 니은은 그러나 기역의 경동맥 바로 앞에서 망설인다. 마침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고 일어선다.

*

니은의 침실에는 거울이 없다. 이 사실을 니은은 어느 날 저녁, 목욕을 마치고 젖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으며 방 안을 둘러보다가 비로소 발견한다. 그러고 보니 니은의 침실 주변 복도와 딸린 거실에도 조그만 거울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 저택은 수상하다, 니은은 다시 한 번 되새긴다.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저녁마다 들려오지만 저택의 모든 문들은 조금도 잠겨있지 않다. 낮마다 커튼이 쳐 있고 모든 거울이 치워져 있으며 밤마다 흐릿한 촛불이 방과 계단, 복도마다 즐비하다. 만찬은 고사하고 간소한 요깃거리도 없고 정적 속에서 기묘한 악기 소리만 간혹 들려온다. 그러나 기역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듯하다.

*

이 저택에 온 지도 며칠인가 지났다. 그동안 니은은 몇 번인가 밤 외출을 하였으며, 낮 동안 기역은 결코 니은을 찾지 않았다. 혹시 모를 긴장 속에 처음 며칠간은 한낮에도 반수면 상태로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기역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니은은 결국 낮이면 커튼과 베일의 그림자 속에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기역은 밤새 저택 앞에 날려 온 잔설들을 쓸곤 했는데 종종 얼어붙은 작은 새나 다람쥐의 텅 빈 사체들을 발견하기도 했으며, 밤 외출을 하지 않는 날-아니 밤이면 니은은 1층의 서재에서 기역과 함께 담소하거나 책을 읽었다. 기역은 대개 브랜디를 조금씩 오래도록 마셨으며 니은도 종종 진하고 달콤한, 피처럼 붉은 포도주를 몇 잔 마시며 책장을 넘겼다.

*

창 밖 너머 저 멀리에서 다시, 늑대의 울음소리가 솟아올라 메아리쳤다. 보들레르를 읽던 니은은 어깨를 조금 움찔하고 책을 덮으며 유리창에 찰싹 달라붙어 검게 번들거리는 밤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 이상하게도 저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두근거려져요.

- 불안하신가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니은이었지만 기역은 금방이라도 일어나 현관을 잠그러 나갈 듯이 대답했다.

- 아니요. 감사합니다. 무서워서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이상하죠? 마치 예전의 크리스마스 전날 밤과 같은 기분, 생일날 아침 첫 햇살 같은 그런 조금 들뜨고 설레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 어렸을 때 개를 좋아하셨나요.

- 개요? 늑대와 개는 한 줄기에서 나왔다는 말씀이신가요?

니은은 작게 웃고는 잔을 들어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입술이 피처럼 반짝였다. 그러나 기역은 조금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닙니다. 개들이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갔죠.

- 아,

감탄사 이후에는 아무 것도 덧붙일 수 없다. 잠들어 있었던 동안의 공백이 두 사람 사이를 혹은 과거의 니은과 지금의 니은 사이를 꽉 메우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창밖의 저 어둠처럼 확고부동한 무게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 같다. 몇 십 년이나... 혹은 몇 백 년?

침묵 속에서 기역은 잔을 들어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가볍게 웃어 보인 다음 다시 읽던 책-차펙의 희곡-으로 눈길을 돌렸다. 니은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다. 기역은 니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어째서 저렇게 태연한 걸까? 니은은 얼마나 기역에게 눈치 채인 걸까? 크리스마스는 아직도 있는 걸까? 개들이 다시 늑대들에 합류했다면 어떻게 기역은 니은에게 어렸을 때 개를 알았으리라고 생각한 걸까? 불안과 초조,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니은은 피에 대한 충동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는 것을 느낀다. 기역을 마시고 싶다. 저렇게 태연히 책장을 넘기고 새로 따른 술잔을 천천히 기울이는 남자의 피를 보고 싶다. 말라 쪼그라들도록 그 피를 마시고 마셔서 퀭한 눈으로 니은에게 애원하도록 만들고 싶다. 생명을, 오로지 니은의 자비만을 갈구하도록 하고 싶다. 그러면 니은은 마지못해, 내키지 않는 듯이 자신의 혈관을 물어 열 것이고, 거기에서 솟아나는 은총의 포도주는 기역에게 성스러운 피의 은혜로운 세례를...

니은은 살며시 그러나 단호하게 입술을 깨물고 술잔으로 손을 뻗었다. 달콤하고 강렬한 루비빛 포도주가 다시 한 모금 그녀의 입 안으로 흘러들었고, 니은은 스스로의 충동을 짓누르는 심정으로 그 피빛 액체를 목구멍 깊숙이 눌러 삼켰다.

*

몇 번이나 그랬듯이, 그날 밤, 밤 깊숙한 시간에 니은은 기역의 목덜미 바로 앞에서 혼란과 혼란과 혼란 속에 빠져 있다. 깊이 잠든 기역이 숨을 내쉴 때마다 진한 브랜디 향이 피어오르고 흥분한 니은의 입에서 흘러나온 숙성한 포도향이 한데 뒤섞여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향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 무어라 말할 수는 없지만. 향기는 향기다. 아아, 모든 것이 다 이렇다면 좋을 텐데. 시간은 시간이고 밤은 밤이고 개는 개고 늑대는 늑대고 인간은 인간이고...

...그러면 나는? 기역은?

*

니은은 결국 기역의 침대 옆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 없이 흐느꼈다. 피가 너무나도 마시고 싶었다. 그녀의 혈관이-심장의 대동맥과 목과 가슴과 허벅지의 큰 혈관들이, 손가락 끝 발가락 끝의 가장 자잘한 모세혈관들까지 하나같이 피를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심장은 피를 갈구하며 쿵 쿵 울렸다. 온 몸에 잎맥처럼 퍼진 핏줄들이 파르르 파르르 피에 대한 갈증으로 떨렸다. 어둠 속에서 기역은 너무나도 태연히,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고 밤은 너무도 깊었으며 니은은 너무나도 목이 말랐다. 몇 번이나 니은은 기역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어둠 속에서 하얀 뼈처럼 드러난 니은의 손가락은 결코 기역에게 끝내 가닿지 못했다. 결국 니은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끼며 기역의 침실을 뛰쳐나갔다.

*

다음날도 그 전날과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낮 동안 니은은 경계를 풀고 푹 잠들었고, 한 번인가 두 번 정도, 자연스럽게 잠이 얕아졌을 때 저택 어디선가 희미하게 울려나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들은 듯도 했으나, 두꺼운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던 햇빛이 완전히 사그라들 때까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간헐적으로 꿈도 꾸었다. 포도주빛-검붉은-적보라색-구름들이 대지를 두텁게 덮고,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들이 한 동안 불다가 마침내 비가 내렸다. 피처럼 붉은 비였다.

*

그날 밤, 밤 깊은 밤, 니은은 살며시 저택의 대문을 열고 밖의 어둠 속으로 걸어나갔다. 월광 아래 잔설은 차디차게 빛났고 꿈에 젖은 풀들은 발 걸음 걸음마다 사각사각 스산한 소리를 냈다.

- 가시는 건가요.

놀라 돌아보니 기역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낡은 실내복에 가벼운 슬리퍼 차림이었다. 전등이나 램프를 들고 있지는 않았지만 겨울 달은 밝았고 기역의 눈도 희미하게 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 네.

니은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 축하드립니다. 기력을 모두 회복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이것, 먼 길 가시는 데 필요할지 몰라 준비했습니다.

기역이 내민 것은 작은 바구니였다. 포도주 몇 병과 둥근 쿠키 몇이 잘 싸여 있었다.

- 과자나 빵을 대접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어쩐지 기묘한 어조로 니은은 한 손을 내밀어 받아들었다.

- 드시지는 않겠지만 작은 새나 들짐승들은 좋아할 테니까요. 조만간 떠나실 줄 알고 오늘 낮에 준비했었습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니은이 다소 조급하게 물었다.

- 후의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이어요. 하지만, 그래요, 전 인간이 아닙니다. 흡혈귀이어요. 내내 짐작하고 계셨겠지요. 살아있는 피를 빨아 마시고 어둠 속에서 끝없는 생명을 이어가는, 신이 버린 피조물이지요. 아마도 알고 계셨겠지요. 그 동안 이 저택 주변의 새나 쥐 등을 마시면서 힘을 되찾았읍니다. 하지만 저희는 인간의 피가 아니면 이 끝없는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 수가 없고, 그렇지만 저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도 은혜를 모르는 금수는 아닌지라 구조의 은인의 피를 마실 수는 없었읍니다. 하지만 힘을 되찾으면 되찾을수록 피에 대한 갈증은 점점 커지기만 하고, 그래서, 은인께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려 했던 것입니다.

- 겸연쩍으니 제발 은인이나 은혜 같은 말씀은 하지 마세요. 덕분에 잠시나마 밤마다 즐거웠습니다. 술과 책과 음악 앞에서 다른 즐거움은 미미하지만, 때로 기다림이 오래되면 미미한 즐거움의 부재도 강렬한 공백으로 다가오지요.

- 기다림이요?

- 네. 기다림입니다.

- 누구를?

- 사람들을.

- 사람들?

- 인간들 말입니다.

- 인간들?

동어반복의 대화 속에서 기역이 문득 빙긋 웃었다.

- 이거, 날이 새겠군요.

빙긋 웃더니 기역은 실내복의 옷깃을 느슨하게 늦추고, 드러난 맨가슴 한켠을 눌렀다. 피부가 네모반듯하게 갈라지고 파랗고 붉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 어맛!

어쩔 수 없이 니은은 비명을 질렀다. 플라스틱 튜브와 전선들로 연결된 동력기를 한 손에 꺼내든 채, 기역은 다시 웃었다. 씁쓸한 웃음이었다.

- 아마 제 몸에 피가 흐른다면 얼마든지 드렸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들이 만든 한낱 기계적 유사물에 불과할 뿐,

- 기계적 유사물!?

- 네. 희석 알콜 연소식 유사 유기 로봇 4.2 버전입니다. 다른 곳에는 탄수화물 대사식 유기 로봇인 5.X나 6.X 버전도 있다고들 하더군요. 하지만 아마 그들도 에너지 순환에 혈액을 사용하진 않을 겁니다.

마침내 니은은 기역의 말을 따라할 기력마저도 잃어버린 채 입을 딱 벌리고 마치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 짐작대로 너무 오랜 만에 깨어나신 모양이군요. 너무 놀라지 마세요. 인간들은 이제 없습니다. 우리들, 인류의 모양을 본떠 만든 로봇들만이 그들의 부재 속에서 묵묵히 주인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지요.

- 귀환이라면 어디론가 갔다는 건가요? 어디로?

그러나 기역은 니은의 마지막 희망마저도 쓰게 웃으며 고개 저어 부쉈다.

- 말을 잘못 했군요. 인간들은 모두 멸종되었습니다. 멸종의 원인으로는 몇몇 가지 설이 존재하지만 모두 추측일 뿐, 인류  문명 말기의 대혼란 속에서 그들의 파멸에 관한 모든 기록은 유실되었습니다. 귀환이라는 것은 다만, 몇억 년 후에는 혹 지성을 가진 생물체가 다시 진화할 지도 모른다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논리 회로가 기묘한 몇몇의 농담 섞인 표현이지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 동안 니은은 그렇게 서 있었고, 그런 니은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기역도 조용히 기다렸다. 바람이 불었고 밤은 기울기 시작했고 어디선가 늑대들은 또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침내 기역은 작은 표시등이 규칙적으로 점멸하는 자신의 동력기를 가슴 속 골격 안에 다시 장착하고 피부를 닫았다.

- 혹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더 묵으셔도 됩니다. 만일 당신 종족의 출처에 관한 인간들의 옛 전설이 맞다면 이 행성에서 인간들이 남긴, 가장 인간에 근접한 자취는 아마도 당신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저와 제 집의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것입니다.

기역의 말에 그러나 니은은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 고맙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한 번 둘러봐야겠군요. 말씀을 못 믿겠다는 건 아닙니다. 친절한 설명에 감사드려요. 그래도 직접 제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기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위어가는 달빛 속에서 한 손을 들어 인사했다.

- 그럼, 안녕히, 한 때 인간이었던 분이시어.

- 안녕히, 인간의 외모와 인류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존재여.

한 손 들어 답례한 니은은 기역이 준 바구니를 들고 밤의 마지막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숲은 밤에 젖어 있었다. 기역의 말대로 누구의 발자취도 남겨져 있지 않았고 아무런 길도 없었다. 니은은 꿈결처럼 모든 것의 윤곽이 뭉개진 어둠 속을 천천히 그러나 가볍게 걸었다. 먼 길을, 아주 먼 길을 걸어야 하리라. 그런데 언제부턴가 커다란 그림자 몇이 그녀의 앞뒤에서 천천히 그러나 가볍게 따르고 있었다. 니은은 미소했다. 야행성 동물의 눈이 빛의 꼬리를 끌며 그녀의 주위에서 흘렀다.

- 밤의 친구들아, 인간과 그들의 충직한 벗은 이미 사라졌을지라도, 어둠 속에서 나와 영원할 동반자들아, 나를 마지막 인간의 마지막 자취가 남은 곳으로 데려가다오. 어떤 어리석음이 그들을 종말로 이끌었는지 내가 확인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이 과연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어리석음이었는지 알아보자꾸나.

대답처럼 그림자들 중 하나가 짧게 짖었다. 인간의 그림자는 그렇게 개의 그림자들을 따라 그림자의 숲 사이를 천천히 그러나 힘차게 나아갔다.





                                                 - end of this story.
겨울비
댓글 7
  • No Profile
    배명훈 06.02.21 14:26 댓글 수정 삭제
    며칠 뒤에 보시면 알겠지만 제가 써 놓은 글하고 공명하는 데가 있는 글이네요. 저도 그랬지만, 화끈하게 가서 피를 빨아버리는 뱀파이어를 창조해 주지 못하는 걸 보면, 아마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인간형을 한껏 불어 넣어 놓은 뱀파이어 캐릭터가 딱 이정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흡혈형사 나도열이나 프란체스카나, 사실 안 무서운 뱀파이어로 전락해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니까요. 우리는 공포를 정복했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공포는 우리 시대의 광기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요?
    물론 이 세대의 뱀파이어에게는 짊어지고 가야 할 이 세대 나름의 고민이 있겠죠. 그 점은 부인하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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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하 06.02.21 16:30 댓글 수정 삭제
    벨라 르고시가 게리 올드먼으로 대체되는 도중에 뭔가 없어진 게 아닐까요? 공포를 정복한 건 아닐 거예요. 단지 뱀파이어가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시대가 온 거죠.
    팬터지가 상징 놀이라면, 개념 A가 오늘부터 더 이상 개념 A’를 상징하지 않는다면 그건 팬터지에 있어 영역 축소(가 아니라면 변화)를 의미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뱀파이어가 상징에서 캐릭터로 변화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들에게서 잊혀지는 상징들이 늘어난다면 그때의 팬터지는 우리들이 아는 팬터지와는 다른 뭔가겠죠.
    뱀파이어가 상징의 기능을 잃어버렸다면 그건 ①뱀파이어가 상징했던 개념이 이 시대에 필요없게 됐거나, ②뱀파이어가 상징했던 개념을 다른 단어가 상징하게 됐거나, 둘 중 하나. ②번이라면 몰라도 ①번이라면 이 시대의 뱀파이어에게는 짊어질 고민 같은 것부터가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도 아직까지 ①번은 아닌 것 같지만, ①번이 현실로 다가오는 그날 우리들은 고딕 소설에 그랬던 것처럼 팬터지 소설에 작별을 고해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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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2.22 11:10 댓글 수정 삭제
    뱀파이어는 에로티시즘과 연관이 있잖아요. 확 달려들어서 피를 빤다는 건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 대한 은유랄까. 이 글에서도 보듯이 피를 마실 것인가 말 것인가는 밤에 몰래 잠입해서 사랑을 속삭일 것인가 말 것인가혹은 몰래 키스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바꿔도 될만큼의 긴장감을 주는 것 같은데. 피를 빨리고, 몸이 마비되고, 빛을 볼 수 없는 세계로 빠져드는 그런 깊은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본질적인 공포를 진부하다고 생각하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대신 이 시대 뱀파이어에게 지워준 고민은 "영생"으로 대체된 것이 아닌지. 그러니까 내 방에 침입해서 사랑 혹은 공포를 주는 타자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는 자아 - 우리의 감정을 이입해 놓은 자아로 대체된 느낌입니다. 이 글에서 반전은 기역의 정체와 세상의 정체에 있잖아요. 니은의 정체가 아니라. 뱀파이어가 솔직한 자아고 인간과 세계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자가 되어서 나타나고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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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서하 06.02.22 14:22 댓글 수정 삭제
    배명훈님/
    절대자/불멸자로서의 상징이라면 드래건이 있죠(드래건이 아니더라도 많지만). 상징 A가 살아남으려면 상징 B, C, D와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의미의 차이가 없이 매력적인 캐릭터로서만 기능한다면 그건 상징이 아니라 장르 관습이잖아요. 장르 관습은 무의미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뱀파이어가 ‘상징’으로 기능하는 소설과 ‘캐릭터’로 기능하는 소설은 서로 다른 뭔가라는 얘기예요. 브램 스토커와 키구치 히데유키는 인터넷 서점에서라면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될지 몰라도, 하나로 묶기 어렵죠.
    이 시대의 뱀파이어는 자신이 상징할 수 있는 것으로 공포와 에로티시즘 대신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니라, 공포와 에로티시즘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제 영생밖에 남지 않은 거라고 생각해요. 겨울비님의 {그림자들}에서 인간 멸망 후를 관조하는 존재로 다른 불멸자들이 아닌 뱀파이어가 등장할 당위성은 공포도 에로티시즘도 남들 다 하는(?) 영생도 아니예요. 인간의 피를 마신다는 ‘식성’ 때문에 인간보다 우월한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 ‘식성’ 때문에 인간이 멸망하면 자신도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죠.
    이 시대의 뱀파이어는 이미 공포도, 에로티시즘도, 영생도 잃어버린 채 캐릭터로서 기능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이 순간, 다른 것도 아닌 뱀파이어를 이야기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들이 공포도 에로티시즘도 영생도 정복하지 못한 주제에 뱀파이어가 진부하다고 투덜거린다면, 뱀파이어는 이미 소재로서의 힘을 소진한 게 아닐까요? ‘식성’ 얘기를 했는데, 한 번 뒤집어봐야 하는 소재라면 힘을 ‘거의 다’ 소진한 거고, 한 번 뒤집어봐도 별 수 없는 소재라면 힘을 ‘다’ 소진한 거고, 그런 거죠.
    뱀파이어라는 상징이 진부한 시대에 뱀파이어 이야기를 하려면 뱀파이어라는 상징이 진부하지 않은 시대에 뱀파이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더 노력해야겠죠. 그렇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그게 뱀파이어 이야기를 하려는 작가들에게 출발점이 되겠죠.

    겨울비님/
    다시 읽었습니다.
    먼저 ‘인류 멸망 후 인류와 같은 모습을 한 로봇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깨어난 뱀파이어’라는 건, ‘반전’을 노릴 만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반전이 충격적이라면 반전을 향해 달리는 게 낫겠지만 반전이 충격적이지 않다면(그건 반전이 아니라 국면 전환이 아닐까요?) 반전이 아닌 다른 것들에 신경쓰는 게 낫겠죠. 기역과 니은에게 사연이랄까, 지금 두 사람이 만나기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좀더 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읽으면서 집중한 건 다른 것들이예요. 예를 들면 기역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같은 외모의 로봇이라는 건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엉뚱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데, 그걸 약간이나마 무마할 수 있었던 건 발단의 서술방식(“점ㄱ은 점ㄴ을 향해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접근했다. 설원이 완벽한 유클리드식 평면이 아니라 (그노시즘적인 의미에서)저속하고 타락한, 프랙탈 곡면이었기 때문이었다”)이 복선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기역이 주도권을 쥐는 장면에서는 SF소설을 연상시키는 서술을, 니은이 주도권을 쥐는 장면에서는 고딕 소설을 연상시키는 서술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랬다면 뱀파이어와 로봇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들이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작용을 좀더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요? 뱀파이어와 로봇이 맨몸으로 충돌하는 게 아니라, 뱀파이어를 둘러싼 서술과 로봇을 둘러싼 서술이 포스로 몸을 둘러싼 요다와 팰퍼타인이 충돌하듯 충돌하는 거죠. :-) 지금 이대로는 무게중심이 뱀파이어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반전이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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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2.22 15:57 댓글 수정 삭제
    저한테 주신 말씀의 마지막 단락에 특히 공감합니다. 결국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쓰는 입장에서 뱀파이어는 어디가 매력적인지. 읽는 입장에서 뱀파이어가 나오면 어떤 점이 재미를 유발하는지, 그런 생각을 해 봤거든요. 사실 한발 더 나아가서 바래 보자면, 현재 통용되는 "뱀파이어"라는 단어의 용법을 뛰어넘는 새 단어가 되도록 뱀파이어를 한 번 집대성해 주기를 기대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런 의견이었습니다.
    겨울비님. 소중한 글 밑에다 너무 길게 갖다 붙여 놔서 실례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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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 06.02.22 18:39 댓글 수정 삭제
    두 분 말씀 감사히 들었습니다. 확실히 현대의 뱀파이어가 공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건 분명해보이는데, 브램 스토커로부터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으시시한 스티븐 킹의 '살렘스롯'을 생각해보면, 그건 결국 뱀파이어가 작품 안에서 타자로 남아 있는지의 여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변변찮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케케묵은 뱀파이어 공포물을 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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