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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연화

2017.05.06 16:1705.06

선생님은 조류학자시고 나는 선생님의 조교였다. 연로하신 선생님이 필드에 나서시는 일은 드물었지만 오늘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한국에서 극히 드물다고 알려진 나그네새가 목격되었기 때문이다. 그 생태가 거의 드러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새의 둥지를 찾아 알이나 새끼의 사진을 찍는다면 좋은 보고서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선생님과 나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오래 헤맨 끝에 우리는 정말로 둥지를 찾아냈고, 알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둥지의 높이를 재고 알의 가로세로비를 측정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하지만 욕심이 과해 무리를 했다. 하산할 시기를 놓쳐 밤이 되었다. 산의 일조시는 짧았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겁이 난 우리 둘은 서둘러 하산을 시도하다가 실족, 둘 다 절벽 아래로 떨어져 크게 다쳤다. 그 와중에 들고 있던 가방이 실종되었다. 교수님의 휴대폰도 교수님을 떠났고, 내 휴대폰은 기절해 있던 동안에 배터리가 나갔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에 입고 있던 외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우리 둘은 살기 위해 비를 피할 곳을 찾아다녔다. 어둠 속의 숲은 바로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험난했지만 한 자리에 그대로 머물다 저체온으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우리 등을 떠밀었다.

그런데 불빛이 보였다. 다리를 저는 선생님을 부축하며 나는 그 불빛으로 다가갔다.

 

그 집은 낡은 적산가옥이었다.

어쩐지 불안하구나.”

선생님이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인상을 받을 만큼 낡은 집이기는 했다.

뭐 위험한 게 있을까요?”

선생님은 고개를 저으셨다.

아니다. 신경 쓰지 마라. 옛날 일이 잠깐 생각나서. 별 대수롭지 않은 거야.”

그 대화는 그렇게 넘어갔다. 우리 둘은 현관처럼 보이는 곳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음에도 버려진 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우연히 이 집을 찾아서요. 잠시 비만이라도 피할 수 있을까요?”

주인은 다행히 군말 없이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군말뿐만 아니라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집 안도 바깥처럼 낡고 오래되어 보였다. 건물의 양식 자체에 눈에 띄는 점은 없었지만, 벽마다 잔뜩 걸려 있는 우키요에가 시선을 끌었다. 몇 점은 대기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몇 종류는 액자에 넣어져 보관되고 있기는 했지만 하나같이 먼지가 가득 덮여 있어 집 안의 다른 물건들처럼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풍겼다.

주인공은 나와 선생님을 어둠이 깔려 있는 이층으로 올려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다리가 성치 않아 두 번째 층계에서 넘어져버렸다. 일단 붕대나 부목이라도 해 두는 게 좋을 듯싶었다.

죄송하지만 혹시 부목이나 찰과상 처치를 할 수 있는 데가 있을까요?”

주인은 이 질문에 어물거리다가 일층의 한쪽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에는 더욱 많은 우키요에가 걸려 있었다. 하나같이 색채가 강렬하고 표현하는 대상도 기괴해 시선을 멀리 두고 조망하니 멀미가 나올 정도였다. 잘은 모르지만 예술적 가치가 상당해 보였는데, 마찬가지로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방에는 그림 외에 도자기도 놓여 있었고, 전쟁 기념품으로 보이는 일본도도 벽에 걸려 있었다. 훈장도 유리 액자 안에 넣어져 있었는데 나중에 찾아본 바로는 훈이등 욱일중광장이라는 이름의 훈장이었다.

 

주인이 가져다 준 낡은 목재 구급상자로 대충 아는 선에서 처치를 했다. 구급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도 온통 오래된 것뿐이었다. 연고는 겉면의 포장이 바라서 글자를 읽을 수 없는 정도였는데, 그나마 남아 있는 부분은 한자의 일부처럼 보였다. 심지어 붕대는 노란색이었다.

나쁜 냄새가 올라오는 기름등잔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연고를 바르고 붕대를 감으려 그 등잔을 들어 멀찍이 두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소리를 질렀다.

!”

나는 얼른 두 손을 선생님의 발에서 치웠다.

많이 아프신가요?”

하지만 선생님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내 어깨너머 어딘가를 바라보고 계셨다. 거대한 거미라도 본 것일까 나도 잔뜩 움츠러든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거기 있는 것은 큰 그림이었다. 벽에서 불거져 나온 기둥 곁 어둑한 구석에 숨겨져 있어 아까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초상화로, 우키요에가 아니라 유채화로 보였는데 문외한이지만 굉장히 특이한 양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공허한 회색을 배경에 두고 의자에 앉아 있는, 막 여인이 되어가는 나이의 여자를 그린 그림으로, 첫인상이 굉장히 독특했다. 마치 아기, 어린소녀, 묘령의 여성을 한데 섞어 그린 것처럼, 그림 한 장에 불과한데도 그 안에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였다. 난 그 그림에 압도되었고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은 머릿속에서 말끔히 날아갔다.

어서 치료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주인이 끼어들며 재촉했다. 난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마무리를 서둘렀다. 이제는 눈을 감고 있는 선생님의 얼굴은 어쩐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드러난 피부는 온통 식은 땀투성이였다.

 

우리 둘은 겨우겨우 이층 방으로 올라갔고, 아무 것도 없는 어둡고 휑한 방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층 현관에 켜진 불이 희미하게 연장되어 사람 얼굴을 구분할 정도로는 밝았다.

이런데 손님이 오는 일은 없어서. 별 다른 게 없습니다.”

주인은 이렇게만 말했다. 아마 다 헤진 다다미 맨바닥에 재울 심산인 것 같았지만, 불평할 처지는 아니었다. 주인은 곧 방을 나갔다.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다 사위가 조용해지자 선생님이 소곤거리는 소리로 나를 불렀다.

명욱아, 명욱아.”

, 선생님.”

큰 소리 내지 말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야 한다.”

, 선생님.”

시간이 촉박하다. 이 집에서 당장 도망치라.”

이러니 나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 이 집은 위험하니 서둘러 너만이라도 달아나라.”

선생님은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는 처음 보는 것으로 새롭고 신선했다. 하지만 순순히 따르기에는 맥락이 없어도 몹시 없는 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위험하다는 것인가요?”

선생님은 학부생들 시험지를 채점할 때 그러는 것처럼 깊은 한숨을 쉬신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 집이 왜 위험한지 이야기해주겠다. 잘 들어야 한다.”

.”

 

아까 그 그림을 보았지!?”

어떤 그림이죠? 그림이 하도 많아서.”

그 여자 그림! 맨 마지막에 본 그림 있지 않냐.”

,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혀를 쩝쩝거리며 건조한 입에 침을 바르셨다. 마른입을 벌릴 때마다 썩은 생선냄새 같은 구취가 생생하게 풍겨왔다.

그 그림은 틀림없어. 연화라고 하는 주박 (呪縛)의 일종이다.”

모르는 단어가 많았으나 일단 이야기를 다 들어보자는 마음에 잠자코 있었다.

일제 정부에 의해 국가신토가 국교로 화하면서 일본 본토에서는 전전에 이미 완전히 실전된 걸로 되어 있어. 우리 대학 민속학과의 차송원 교수에게 들었을 때는 그랬지. 하지만 조선으로 넘어온 일본인 중 일부는 이 주술을 알고 있었어. 내가 어린 시절에 분명히 보았다!”

귀신이나 무속 같은 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과학자이신 우리 선생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내심 충격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자기가 하는 말에만 온통 몰입해 있었다.

그때는 무엇인지 몰랐지만. 아직 신계에 속한다고 받아들여지는 7세 이전의 아이가 죽었을 경우, 같은 연령의 살아있는 아이를 제물로 죽은 아이를 되살릴 수 있어. 하지만 되살려진 아이는 그대로 방치했을 경우 늙지도 않고, 치명적인 사고를 당해 죽거나 미쳐서 자살하기 전까지는 자연사하지도 않아.”

주변에 벼락이 떨어져 하늘을 찢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그 충격에 놀랐지만,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선생님의 시선은 지금 현세가 아닌 어딘가 다른 곳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본능적으로 살아 있는 인간을 증오하게 되고, 그 살과 피를 탐하기 시작한다. 이런 되살려낸 아이를 진짜 인간처럼 키우기 위해서는 그림을 통해 제대로 된 시간선 속에 흔적을 남기는 방법밖에 없어.”

선생님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 화등잔만 하게 뜬 눈에 물기가 서려 번득이고 있었다.

그림말이다! 일단 되살려낸 아이를 화폭에 유화로 그려놓은 뒤 그 아이가 살아있었을 경우 성장했을 속도에 맞춰 그 그림 위에 계속해서 다음 단계의 성장한 모습을 그려가야 해. 그러다 마지막으로 시체의 모습을 그리면 그 되살아난 아이의 생명이 다하는 원리이지.”

결론은 이랬다. 그 연화라는 것은 마지막으로 그려진 단계를 포함해 그 이전 단계의 성장 모습이 마치 한 화폭에 동시에 담겨있는 것과 같은 독특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런 전승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식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여기 이 집에 있는 것이 틀림없어! 우리 둘 다 위험하다. 하지만 나는 다쳤으니 너 혼자라도 도망쳐야 해!”

 

이러니 선생님이 아까의 충격으로 노망이 났나 싶기도 했다. 안 그래도 몸이 아프고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서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조금 강하게 반박했다.

선생님. 정말 그런 연화라는 게 있다고 해도, 아까 본 그 그림이 정말 연화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디서 본 양식을 따라 그린 건지 알 수 없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냐, 틀림없어. 왜냐하면 거기 그러진 여자, 내가 어릴 때 본 여자였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잠시 정적이 흐르다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내 소싯적에 살던 동네에서 외진 곳에 거주하던 일본인 가족의 딸이야. 나도 몇 번 본적이 있어. 바깥출입은 하지 않아도 가끔 이층 발코니에 앉아있기는 했는데, 그 정도만으로도 동네에서 유명인사가 되었지.”

유명했다니요?”

아까 그 그림을 보면 알지 않겠나. 인근에 사는 남자라면 그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 그러다가 느닷없이 동네 조선인 남자랑 도망갔지. 그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난 슬슬 심각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일본인은 화가였지. 딸이 실종된 이후 자기 아내랑 같이 자살했어. 틀림없어! 그때 그 여자야!”

선생님. 그냥 그림일 뿐이잖아요. 실제로 그 여자가 살아있다는 걸 본 것도 아니고.”

 

그때부터 누군가가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그림 속의 그 여자였다. 난 선생님이 곁에서 목 막히는 소리를 희미하게 내는 것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아버지에게 얘기를 들어서.”

여자는 매끄러운 한국어를 구사했다. 양 손으로 목조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쟁반에는 김이 오르는 자기로 만든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여자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와 쟁반을 우리 둘 앞에 들이밀었다.

이거, 약인데 회복에 도움이 되실 거여요.”

잔 안에 들어있는 액체는 갈색이었는데, 더운 김과 함께 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선생님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벌벌 거리고만 있기에 내가 잔 두 개를 전부 받아 바닥에 놓았다.

맛이 쓰니까 식기 전에 드셔야 할 텐데.”

여자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 감사합니다. 조금 식으면 먹을게요. 저희 둘 다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

여자는 나를 향해 생긋 웃고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으로 갔다. 난 여자의 웃는 얼굴을 보고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 했다.

조금 있다가 요깃거리를 가지고 올 게요. 계란이랑 빵 정도는 있어요.”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곧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아아, 명욱아!”

선생님이 내게로 쓰러져 옷자락을 부여잡고 덜덜 떨었다.

, 여자다. 그 여자가 틀림없어!”

그러더니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엣 필리이, 엣 스피리투스 상티! 저 모습을 본 것이 벌써 50년 전이야. 50년이 넘었는데도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니 틀림없이 인간의 피와 살을 먹으며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선생님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나도 많이 무서웠지만 차마 선생님을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학질환자처럼 파들파들 떠는 선생님을 들쳐 업고 몰래 방문을 연 뒤 계단을 내려왔다. 고요한 가운데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느껴졌지만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가 어느 정도 완충해주리라 기대할 뿐이었다.

딱딱딱

사시나무처럼 경련하는 선생님의 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렇게 계단을 모두 내려왔을 때 난 왼쪽에서 거대한 중압감을 느꼈다. 그것은 농밀한 소리와 냄새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사적으로 왼편을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주인이 우리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와 주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눈을 통해서 내 마음이 주인에게 읽혀진 듯 했다. 곧 주인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슬그머니 올렸다. 그것은 날붙이였다.

난 선생님을 집어던지고 고개를 숙였다. 내 비명소리에 섞여 도끼날이 허공을 가르는 휘-익 소리가 들려왔다. 곧바로 걸리적거리는 선생님을 발로 걷어 차 방으로 밀어 넣었다.

아이고~ 아이고!”

선생님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 곡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린 이곳에서 영영 병풍 뒤에 누워 향냄새조차 맡아보지 못하는 처지에 빠질 수도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로 방안으로 들어가며 미닫이문을 닫아버렸지만 주인은 어렵지 않게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난 손에 잡히는 것을 마구 집어던졌다. 도자기, 족자, 어두워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일단 손에 닿는다 싶으면 냅다 휘두르거나 던지고 보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저항은 주인에게 생채기밖에 내지 못했다. 선생님은 내 뒷발에 차여 계속해서 데굴데굴 굴렀다. 좀 일어나서 도망쳐도 좋을 텐데.

주인이 무섭게 날리는 도끼날이 내 머리를 까부술 뻔했다. 이제 죽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주인이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휘휘 둘러보니 내가 아까 전에 본 여자의 그림이 든 액자를 손에 쥔 직후였다.

문득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가 떠오르며 뇌리가 번득였다. 난 얼른 액자를 못에서 잡아 뜯고 품에 안았다.

물러서! 안 그러면 이 그림을 찢어버린다!”

확연히 주인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몸짓만을 통해서도 그런 감정이 느껴질 정도로 주인은 그림이 처한 위험에 동요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선생님부터 다시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난 방구석으로 걷어 찬 선생님이 있을 방향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런데 누가 내 등에 닿았다. 돌아보니 그 여자였다. 가까운 거리라 여자가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것 같은 뾰족한 치아들이 팽팽하게 조여진 허기와 욕망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앞으로 닥쳐올 끔찍한 순간을 예상하며,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여자가 이빨로 내 귀를 뜯었다. 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피를 흩뿌리는 사이 여자는 뜯어낸 귀를 입 안에서 우물우물 굴렸다. 곧 주인이 도끼자루로 생각되는 둔탁한 무언가로 내 머리를 내려쳐 기절시켰다.

 

정신을 차리니 지하실로 생각되는 공간에 있었다. 축축했다. 내 곁에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우리 둘 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손목과 발목이 묶인 채 고정되어 있었다.

지하실 구석에는 인간의 유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바닥에는 살점과 피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듯 보였다. 지하실로 차오르는 빗물로만 자연배수를 하는 것 같았는데, 아주 불결한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선생님은 어디라도 다치신 건지 연신 끙끙대며 고통에 겨워하셨다.

얼마 후 주인이 커다란 대야를 들고 내려왔다. 정확히는 대야를 두 개 겹쳐 놓은 것으로, 주인은 그것들을 하나씩 바닥에 나란히 놓고는 나를 의자 채로 들어 한쪽 대야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도 같은 일을 했다. 일이 마무리되자 주인은 다시 지하실을 나갔다가, 이번에는 피딱지가 말라붙은 전기톱을 들고 여자와 함께 내려왔다.

곧 전기톱에 시동이 걸렸다. 여자는 입구 쪽에 기대어 잔뜩 들뜬 표정을 지은 채로 입맛을 다시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주인은 전기톱을 어정쩡한 자세로 들고 나에게로 나가왔다. 먹기 좋게 해체하려는 것 같았다.

, 김개똥이 맞지?”

갑자기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주인은 이 말을 듣고 멈칫했다. 내 머리가 둘로 쪼개지기 직전이었다.

맞구나! 나다! 최명길이야! 우리 어릴 적에 매일 같이 놀고 그랬잖아!”

주인이 전기톱을 거두고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명길이!?”

그래 임마, 나야! 너 그렇게 사라지고 나서 어디서 뭐하나 했는데 살아 있었구나! 여기서 이런 일 하면서.”

주인은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그러더니 전기톱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떨어지는 동안 전기톱의 톱날 방향이 한 바퀴 돌아 내 고간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일정 시간 후에 톱날이 멈추는 최신형이었는지, 바닥에 떨어진 전기톱은 곧 잠잠해졌다. 주인은 그렇게 한 동안 말이 없는 채로 미동조차 않았다. 여자가 그런 주인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개똥아.”

이제 그만 하자.”

주인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들더니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어.”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네 아빠가 그림에 미쳐서 너를 가둬두는 것 같아서 구했던 거였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주인이 굵은 눈물방울 하나를 떨구었다. 그러고는 선생님을 쳐다보면서 웅변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무대에서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때 하루코는 아빠에 의해서 감금되어 있었어. 어두운 지하실에서 계속 이시가와의 그림 모델이 되었지. 하루코는 순종적인 성격이라 이시가와의 말을 반항 없이 따랐지만 바깥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집에만 갇혀서 모델로 사용되기만 하는 생활에 점점 지쳐갔어. 하루코는 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았지.”

주인은 여자를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명길이, 자네도 알겠지. 난 이시가와네 집에서 적은 급료를 받고 간단한 심부름을 해주고는 했어. 그러다 하루코를 보았지. 모든 실상을 알고는 내가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야.”

주인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감정이 북받쳤는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문질렀다.

그날도 아빠는 나를 그리고 있었지.”

여자가 말을 이었다.

여느 때처럼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아빠가 외친 말이 기억나. ‘이 그림은 기적이요! 한없는 사랑의 징표이다!’. 그때 개똥이가 내 아빠를 기절시키고 나를 데리고 도망쳤지.”

여자는 이렇게 말하며 천천히 주인에게로 다가섰다. 나를 볼 때는 식사를 보던 눈길이더니 주인을 보는 시선에는 제법 사랑이 묻어났다.

그때 너는 금방이라도 죽은 것처럼 병약해져 있었지. 우리가 처음 밤을 보낸 그곳이 기억나?”
주인이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내리 깔고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주인은 다시 선생님을 보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기보다는 혼자서 회고하는 것에 가까웠다.

우리 둘은 많은 것을 경험했지. 살아가기 위해 함께 많은 사람을 죽였어. 하지만 이제는 지쳤어. 이쯤에서 그만하자.”

여자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그래. 우리 같이 죽자.”

주인은 여자에게로 돌아서서 손을 맞잡았다.

너의 모습을 그려줄 화가를 어떻게 해서든지 찾을게. !”

주인은 급히 숨을 몰아쉬고는 가래 끓는 기침을 심하게 했다. 기침이 멎었을 때 주인의 입을 가리고 있던 손에는 거품이 일고 있는 검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여자가 그 손을 감싸 안았다.

이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아. 당신이 나를 그려줬으면 좋겠어.”

둘은 그러고 애틋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렇게 일변한 상황을 보며, 난 이제 죽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세느라 머릿속이 바빴다.

 

피로 칠해질 뻔했던 습한 지하실이 졸지에 작업장으로 변해버렸다. 주인은 다 낡아버린 이젤 위에 여자의 그림을 올려놓았고, 여자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그림에 나와 있는 바로 그 포즈를 취했다. 기름 냄새가 지독했다. 주인이 곁에 둔 화구더미에서 붓을 꺼내어 물감을 묻힌 뒤 스케치 없이 바로 채색을 시작했다. 문외한이 봐도 뭔가 이상하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어설픈 방식이었다.

물감이 그림 위에 무참히 덧발라졌다.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병 때문인지 떨리는 손과 늙어서 흐려진 눈, 부족한 경험에 의해 그림은 점차 엉망이 되어 갔다. 주인의 눈에는 자기가 그리는 게 대체 무엇으로 보이는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림 속의 인물이 변이되어감에 따라 그 모델이 되는 여자의 신체에도 변형이 일어났다. 얼굴은 서서히 뒤틀렸으며 호흡이나 혈색, 표정 등의 지표로 신체 상태도 시시각각 나빠져 가는 것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자는 인내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최대한 고통을 숨기고 태연함을 가장하려 했다. 나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주인에게는 먹히는 것 같았다.

크윽!”

여자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데 완전히 몰입한 주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림이 점차 완성(?)되어감에 따라 여자의 얼굴과 몸은 엉망이 되어갔고, 그에 의해 기괴한 병리학적 현상이 유발되었다. 드러난 팔에 염증과 부종이 나타났으며 폭이 고르지 못한 하지는 울혈이 잡혀 검붉게 변했다. 여자의 왼쪽 귀에서는 출혈이 시작되었다. 특히 그리기 어려운 얼굴 전면은 완전히 얽혀 호흡이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거기에 부패가 동반되었다. 그러나 주인은 한참동안 그림에만 몰입해 있었다. 무시무시한 똥손이었다.

이제 넌 다시 인간이 되었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마치자 주인은 이렇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앞에 있는 것은 클라인병처럼 뒤틀린 채로 살아있는 고깃덩어리였다.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 여자는 주인에게 손을 뻗으며 안아달라고 다가왔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은 생리적인 현상이라 더 극심한 생리적 현상을 이겨내지 못했다. 주인은 심장도 약했던지 여자의 끔찍한 모습에 발작을 일으켰다. 주인에게로 다가오던 여자가 충격을 받고 발걸음을 멈췄다. 노골적으로 상처받은 모습이었다. 이내 여자는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주인은 발작을 일으켜 허우적대다가 기름 램프를 자기 머리 위에 떨어뜨렸다. 불길이 주인을 삼켰을 때 나는 결국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손목의 찰과상에서 상당한 양의 피가 흘러내렸지만 불에 타죽기는 싫었다. 난 발목에 묶인 밧줄도 풀고 선생님을 구한 뒤 등에 업은 채 불타는 지하실에서 빠져나왔다.

 

우리는 집에서 탈출해 비바람이 몰아치는 산 속으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불타 무너지는 집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걷자 타오르는 집의 불빛은 곧 어지럽게 자라 있는 목본들 사이로 사라졌다. 선생님을 부축해 얼마나 걸었을까. 뒤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무너지나 보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곧 우리 앞에 세차게 흐르는 흙탕물이 드러났다. 땅에 깊게 팬 수로를 따라 산 위에서부터 모여든 빗물들이 토사를 머금고 난폭한 기세로 몰아쳤다.

!”

모퉁이를 돌아 떠내려 오는 집의 파편을 먼저 발견한 것은 선생님이었다. 그을린 집이 지붕, , 기둥, 벽 등으로 쪼개진 채로 급류에 휩쓸려 떠밀려왔다. 그것들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암석과 충돌해 더 이상 지붕, , 기둥, 벽이라고 부를 수 없는 형태로 부서졌다. 그 사이에 수면 위로 두 다리를 드러내 놓고 거꾸로 꽂혀 있는 집주인이 있었다. 코키토스에 박혀 있는 사탄과 같은 모습을 한 채 검게 변한 집 주인은 꾸준히 하류로 움직여갔다.

그리고 그 저주스러운 꼴을 한 여자도 함께였다. 그들과 같이 물에 둥둥 떠다니는 그림은 어느새 다시 액자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액자 전면이 물 위의 나무토막과 부딪치는 바람에 유리가 깨져버렸다. 캔버스가 흙탕물을 머금자 그림은 흘러내렸고, 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모든 기관이 서로서로 얽히더니 뼈가 드러났고, 결국 그 뼈도 삭아버렸다. 결국 남은 것은 노랗게 물들어 찢어지기 시작한 화폭과 원래 그래야만 했던 형태로 화한 인간뿐이었다.

그들이 모두 시야에서 자라지자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선생님을 치켜 올렸다. 그러나 선생님도 이미 죽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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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근에 틈틈히 쓴 글을 올려봅니다.

미세먼지가 극성이라서 요새 고생을 좀 많이 했습니다ㅠㅠ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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