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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어느 역사학자의 일기

2017.01.13 15:0001.13

어느 역사학자의 일기

 

123

 

오백 년쯤 전에 어떤 현자가 말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

아무래도 현자가 틀린 듯하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역사는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역사가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다.

먼 옛날, 중국 후한의 황제 영제는 열 명의 환관들에게 둘러싸여 정치를 등한시하고 주색잡기에만 골몰하였다. 결국 황건적이 난을 일으켜 한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왕도 다를 바 없다. 왕은 경력도 능력도 없는 자들에게 친하다는 이유로 감투를 씌워주었다. 감투를 쓴 자들은 왕의 귀를 막고 입을 봉하고 손을 묶었다.

안근. 왕의 귀. 왕은 오로지 이 자를 통해서만 세상의 말을 듣는다.

정성. 왕의 입. 왕은 오로지 이 자를 통해서만 세상에 말을 전한다.

이만. 왕의 손. 왕은 오로지 이 자를 통해서만 세상을 움직인다.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어린아이들이 물에 빠져 떼죽음을 당하고, 외세가 우리나라의 산과 들을 호시탐탐 노리는데도, 왕은 궁궐에 들어앉아 미남미녀가 나오는 연극을 보며 박수를 치고 있다. 어두운 세월을 끝낼 방법이 진정 없는가?

머리를 식힐 요량으로 사료 보관소에 내려갔다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악한 공책이었다. 누군가 손으로 급하게 휘갈겨 쓴 듯했다. 국가의 공식 문서도 아니었고, 작자의 이름도 나와있지 않았다. 이런 문서가 왜 보관되어 있을까? 나는 공책을 외투 안주머니에 챙겼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요즘 세상에는 아무도 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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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청이 눈을 비볐다. 뻑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연구실은 암흑이었다. 창문을 두꺼운 커튼으로 막아놓은 탓이었다. 희미한 전등불만이 책상 위에 놓인 고문서를 밝히고 있었다.

위청은 고문서를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 보존서고에서 발견했다.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아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온 나라를 통틀어 고문서학 전공자는 몇 명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환갑이 넘은 노학자들이었다. 경영학과 경제학이 부자들의 똥구멍을 핥으며 돈 잔치를 벌이는 동안, 가난한 학문은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여 뿌리부터 말라가고 있었다.

고문서는 독특했다. 고문서는 조선 후기 보관함에 있었다. 그런데 고문서에 써 있는 글귀는 조선 후기의 문법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대 한국어에 가까웠다. 위청은 고문서를 읽을수록 혼란스러워졌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조금 늦었습니다.”

이광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대학원생이었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 덕분에 체육대학 학생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위청이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이광이 머리를 긁었다.

평소처럼 버스를 탔는데 광화문에서 시위대에 둘러싸여 오도가도 못하고 한참을 갇혀 있었어요. 앞으로는 지하철 타려고요.”

시위대?”

모르세요? 대통령이 글쎄 자기 일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한테 맡겨 놓아서 나라가 개판이 됐잖아요. 연구도 좋지만 뉴스도 좀 보세요. 그러다 병 나겠어요.”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 학자는 연구와 논문으로 말하는 거야. 그리고 시위 하면 세상이 바뀌기라도 하던?”

이광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달라요. 시위대 규모가 엄청나다고요.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정도에요. 집권 여당 국회의원들도 흔들리는 모양새에요. 잘만 하면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없던 일이 될지도 몰라요.”

위청은 코웃음을 쳤다.

잠깐 부글부글 끓고 말 거다. 우리나라 사람들 냄비근성이 어디 가겠냐?”

아니에요.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매일 집회를 연다고 했어요. 끝까지 갈 거라고요.”

위청이 얼굴을 찌푸려 코에 주름을 만들었다.

매일 집회라고? 그러면 너도 매일 늦겠구나?”

걱정 마세요. 일찍 나올게요.”

이번 기회에 차를 하나 사는 게 어떠니?”

이광이 멋쩍게 웃었다.

제가 운전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제가 운전하는 날이 아마 제 제삿날이 될 거에요.”

위청도 따라 웃었다. 그는 이광의 소박함이 좋았다. 모두가 일신의 영달만을 좇는 요즘 이광은 돌연변이 같은 존재였다.

그래. 늦어도 별 이야기 안 하마. 어차피 바쁜 일도 없으니까. 그나저나 지질학 연구소에 의뢰한 고문서 연대측정 결과는 나왔니?”

그게연구소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검사비가 올랐으니 돈을 더 내라고 하더라고요.”

무슨 소리야? 지질학 연구소가 사기업도 아니고 무슨 국책연구기관이 검사비를 자기네 마음대로 올려?”

연구소 재정이 계속 적자라고 정부에서 압박이 들어왔대요. 앞으로 수익을 못 내면 연구소를 해체시켜버리겠다고요.”

위청이 입을 벌리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 비용 지불한다고 해.”

이광이 쭈뼛거렸다.

교수님그러면 예산이 모자랍니다.”

설마. 우리가 돈을 쓴 적이 없는데 예산이 왜 모자라?”

대학 본부에서 역사학과 취업률이 나쁘다고 예산을 줄여 버렸어요.”

위청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이마를 한참 문질렀다.

그래. 됐다.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라도 해 보자. 고문서의 내용을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해서 다른 사료들과 문법적 공통점이 있는지 찾아봐 주렴.”

이광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뒤로 돌아섰다.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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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공책은 대략 삼백 년 전의 것으로 보인다. 띄어쓰기를 했고, 모음 가 여전히 구분되어 있다. 종이가 갈색으로 변하여 글자가 희미해졌지만 약품처리를 하니 그런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독해의 진정한 어려움은 공책의 작자가 지독한 악필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글자의 획이 거의 다 이어져 있어서 도대체 무슨 단어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작자가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리도 서둘러 기록을 남겨야만 했을까? 목숨이 위태로웠을까? 협박을 당했을까? 그런 상황에서도 꼭 남겨야만 하는 내용이란 대체 무엇일까? 아직 알 수가 없다.

연구에 몰두하고 싶지만, 시대가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3인방의 전횡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들은 감찰관을 기어코 쫓아내었다.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이유였다. 왕의 명령이라고 했다. 개소리. 감찰관은 3인방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은 유일한 관리였다.

이제 3인방을 견제할 사람은 없다. 온 나라의 탐관오리들이 3인방에게 줄을 선다. 부자들이 금은보화로 이들을 유혹한다. 미녀들이 이들에게 들러붙는다. 나라는 더 이상 백성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3인방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작동하고 있다.

왕은 열흘 넘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살아있기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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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였다. 고문서에 적혀 있는 글귀의 문법은 현대와 비교할수록 비슷해졌다. 하지만 현대 한국어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모음 가 모조리 로 바뀌어 있었다. ‘백 년‘’벡 년으로, ‘재미제미로 썼다. 과거 시제를 나타내는 복자음 받침 도 단자음 으로 바뀌었다. ‘없었다없엇다, ‘했다햇다로 표기하였다. 정체불명의 문법이었다. 옛 한글 문헌을 모조리 뒤져보아도 동일한 사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떤 점에서는 더 편한데요? 맨날 쌍시옷 받침 쓰느라 귀찮았는데. 나중에 한국어 문법이 이 고문서처럼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이광이 스캐너에 머리를 묻은 채 말했다. 그는 고문서를 한 장씩 스캔하여 글자 부분을 선명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위청이 대꾸했다.

모음 가 사라진 것도 더 편하다고 말할 작정이냐?”

그럼요. 요새 하고 를 확실히 구분해서 발음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교수님도 한번 따라 해 보세요. 내가 네게 베개를 백 개 주겠다. 어때요?”

위청은 이광의 말을 따라서 중얼거렸다. 정말로 가 잘 구분되지 않는 듯했다. 위청은 갑자기 심술이 났다.

쓸데없는 소리. 카드 줄 테니까 먹을 거 좀 사와라. 출출하다.”

뭐로 사올까요?”

평소랑 똑같이. 삼각김밥에 컵라면.”

에이, 교수님. 좀 더 쓰시죠. 요새 주말도 없이 일하는데. 오랜만에 족발에 소주 어떠세요?”

위청이 입맛을 다시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충성충성충성. 교수님 사랑합니다.”

이광이 실실 쪼개며 연구실 밖으로 달려나갔다.

위청은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위청은 나이를 실감했다. 그도 50대였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종일 연구에만 몰두하는 생활은 이제 무리였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기는 싫었다. 싸늘한 공기, 정적, 고독. 집에 혼자 있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개중에는 죽음도 있었다. 우울한 삶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럴 때마다 위청은 연구실에 돌아와 강박적으로 일에 몰두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할 것이 뻔한 연구과제를 붙들고 밤새 씨름했다. 위청에게는 현실을 잊게 해줄 도피처가 필요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출처 불분명한 고문서에 매달려 있는지 몰랐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지는 미국이었다. 위청은 전화를 받았다.

웬 일이야, 이 시간에?”

부인이 남편한테 전화하는데 웬일은. 집이야?”

아니. 연구실.”

한국 지금 금요일 저녁 아니야? 일 좀 적당히 해. 몸 상해.”

그럴게.”

그런데 준수 아빠. 나 할 말이 있는데.”

위청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요구사항이 있을 때마다 아들 이름을 팔았다.

얘기해.”

다음 달부터 생활비 좀 올려줄 수 있어? 준수가 라크로스 하고 싶대.”

라크로스? 신발 브랜드 아냐?”

언제적 소리야? 그건 옴파로스잖아. 라크로스라고 하키 비슷한 운동인데, 아이비리그 대학에 가려는 애들은 다 이거 해. 준수도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얼마나 더 필요한데?”

2천 달러만 더 보내줘.”

여보. 나 지금 사는 아파트 관리비 내기도 빠듯해.”

고시원으로 옮겨 봐. 혼자 사는데 집 넓을 필요 없잖아.”

위청은 눈을 찌푸렸다.

고시원에서 어떻게 살아?”

왜 못 살아? 고시원도 다 살만 하니까 사람들이 살겠지.”

위청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들이쉰 뒤 말을 토했다.

당신이랑 준수랑 그냥 한국으로 돌아오면 안 될까? 나 혼자 사는 거 이제 지쳤어. 준수도 미국 간 지 몇 년 됐으니까 영어는 잘 할거 아냐. 영어특기자로 좋은 대학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장난해? 한국에 좋은 대학이 어디 있어? 사방에 깔린 게 서울대 카이스트야. 연고대 나와도 취업 못하는 세상이라고. 정신 똑바로 차려.”

꼭 좋은 대학 나와야 행복하게 사는 거 아니잖아.”

됐어. 징징대지 마. 당신이 진짜로 준수 생각한다면 내 말대로 해.”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위청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이 떨렸다. 위청은 서둘러 책상 서랍을 열어 약봉지를 꺼냈다. 그리고 약을 삼켰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떨림이 멈추었다. 위청은 의자에 앉아 고문서를 들여다보았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고문서에는 각 단락마다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일기 같았다. 날짜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아라비아 숫자. 말이 안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위청은 고개를 들었다. 고문서는 사기였다.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문법을 제멋대로 바꾸어 낙서를 휘갈긴 뒤 보존서고에 숨어들어와 조선 후기 고문서 보관함에 넣어둔 것이다. ? 3인방의 전횡? 망상증 환자가 분명했다. 위청은 고문서 뭉치를 벽에다 집어던졌다. 누런 종이가 흩날렸다.

연구실 전화가 울렸다. 위청은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다.

누구요?”

수화기 건너편 목소리가 당황한 듯했다.

위청 교수님 연구실 아닌가요?”

그런데요.”

여기는 지질학 연구소입니다. 연대측정 의뢰하셨죠?”

됐습니다.”

?”

저희 예산도 부족하고, 의뢰 취소하겠습니다.”

취소라니요? 검사 결과 다 나왔는데요.”

위청이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소립니까? 누구 마음대로 검사를 해요? 이 사람들이 아주 돈독이 올랐구만. 우리는 비용 지불 못 합니다. 예산 없다고요. 어차피 그 고문서 가짜니까 검사 결과로 똥을 닦든 쌈을 싸먹든 당신네들이 알아서 하시오.”

말씀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검사비용 깎아달라고 사정사정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돈을 못 내요? 장난합니까?”

누가 사정을 해요?”

거기 대학원생이요. 이광? 그 친구가 하도 사정을 해서 딱한 마음에 예전 가격을 받기로 했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쳐요?”

위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광이가 저 모르게 일을 진행했나 보네요.”

전화기 너머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아, 그러세요? 그 친구가 지도교수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네요. 의뢰하신 문서는 약 3백 년 전 물건입니다. 오차범위는 30년입니다.”

“3백 년 전이요?”

자세한 검사 결과는 등기우편으로 보내드리지요. 검사비는 다음 달 10일까지 입금해 주시고요.”

전화가 끊겼다. 위청은 무릎에 힘이 풀렸다. 3백 년? 고문서가 진짜라는 말인가? 조선시대에 아라비아 숫자를 썼다고? 띄어쓰기와 가로쓰기도? 위청은 혼란스러웠다.

이광이 연구실로 돌아왔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였다. 한 손에 비닐 봉지를 들고, 다른 손에는 전화기를 들었다. 이광은 말없이 회의용 탁자에 족발과 소주를 펼쳐놓았다.

위청이 말했다.

광아, 할 말이 있다.”

저도요.”

이광이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위청에게 건넸다. 그리고 자기도 잔을 채웠다.

광아, 고문서 제작 연대가…”

교수님. 일 이야기는 있다가 하시고 지금은 일단 한잔 하시죠.”

둘은 잔을 비웠다.

이광이 말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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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

 

정신 나간 자들이 권력을 잡으니 비정상이 정상으로 둔갑하고 정상은 비정상으로 낙인 찍힌다.

오늘 아침, 정성이 왕의 칙령을 발표했다. 첫째, 개인과 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모든 역사 서적과 사료를 즉시 국가에 반납한다. 둘째, 국가에서 인정한 역사관 외에 다른 역사관을 주장, 유포, 찬양하는 행위를 전면 금지한다. 셋째, 위 사항을 어기는 자는 옥에 가둔다.

왕의 칙령이라니! 왕은 거진 한 달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이것이 진정 왕이 내린 칙령인지 어떻게 아는가? 나는 한달음에 궁궐로 달려가 신문고를 두드렸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오기가 생겨 쉬지 않고 저녁까지 북채를 휘둘렀다. 마침내 정성이 등장했다.

나는 그에게 따져 물었다.

국가가 어째서 역사를 독점하려 하는가?

정성이 대답했다.

역사 해석을 역사학자들에게만 맡겨두었더니 너무 한 쪽으로 편향되어서 객관성을 잃어버렸다. 국가가 나서서 편향된 역사 해석을 바로잡으려 한다.

나는 다시 물었다.

국가의 역사 해석은 객관적이란 말인가? 국가 역시 다른 인간집단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가치관을 지닌 이해관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의 역사 해석에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자들의 가치관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신이 아닌 이상 역사를 객관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정성이 성을 냈다.

우리는 국익을 위해 행동할 뿐이오.

그 이후로도 고성이 오갔다. 하지만 정성은 똑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역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대화를 포기하고 정성에게 왕을 뵙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정성은 거절했다. 왕이 병에 걸렸다는 이유였다. 나는 재차 물었다. 왕이 어디가 아프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가웠다.

당신이 알 바 아니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왕은 백성들에게 권력을 위임받아 국가를 통치한다. 백성은 자신의 권력이 제대로 행사되고 있는지 알아볼 권리가 있다. 백성의 요구를 무시하는 왕은 독재자에 불과하다.

나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동맹휴업에 들어갈 것이다. 저항이 들불처럼 타오를 것이다. 저들은 학자의 양심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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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것 같아요.”

이광이 잡지를 탁자에 던졌다.

대통령 지지율이 4퍼센트 아래로 내려가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사를 진행하는 마당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한다니. 교육부장관 지금 제정신이에요?”

위청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믿는 구석이 있겠지. 정치인들이 언제 보험도 없이 움직이던?”

그렇겠죠. 아직도 박정희 사진에 절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까.”

누구든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법이다. 남자들 모이면 군대 무용담 늘어놓잖니. 막상 군인이었을 때는 맨날 욕 먹는 관심병사였으면서. 마찬가지야. 기성세대는 과거를 쉽게 부정하지 않을 거다. 자신들이 살아온 인생을 영광으로 빛내고 싶어하니까.”

그건 사실이 아니라 미화잖아요. 미화는 교과서가 아니라 일기장에 써야죠.”

대중은 사실에 관심이 없어. 사실로 믿고 싶은 것에 관심이 있지.”

이광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건 역사를 왜곡하는 짓이에요. 역사는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석해야 돼요.”

역사는 객관적일 수 없어. 서술하는 사람에 따라 역사를 다르게 해석하는 거야.”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하지만 현실이 꼭 바람직한 건 아니에요. 객관적인 역사는 불가능한 명제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객관성을 추구해야 돼요. 그래야 일본 우익이 전쟁범죄를 미화할 때, 이스라엘이 성경을 앞세워 팔레스타인을 폭격할 때, 우리에게 가해자를 비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겨요.”

위청이 웃었다.

랑케가 살아 돌아온 것 같구나. 논문으로 써보지 그러니?”

이광이 손사래를 쳤다.

일개 대학원생 주제에 그런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라고요?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이광이 일어나 외투를 입었다.

위청이 물었다.

어디 가니?”

오늘 교육부 앞에서 항의 집회가 열려요. 가봐야죠.”

그래. 잘 다녀오거라. 몸 조심하고.”

교수님은 안 가세요?”

나는 됐다. 학자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지.”

이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어요. 정치 문제에 무관심할 자유도 있죠.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니까요.”

이광이 떠났다. 위청은 문득 눈을 들어 창문을 바라보았다. 두꺼운 커튼이 여전히 빛을 차단하고 있었다. 빛은 종이를 망가뜨린다. 위청은 잠시 커튼을 걷어 바깥 풍경을 바라볼까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연구실 전화가 울렸다. 위청은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면도날 같았다.

위청 교수님 연구실입니까?”

맞습니다.”

요즘 재미있는 물건을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물건이요?”

남자가 낮게 웃었다.

, 죄송합니다. 직업병이라. 고문서 말입니다. 해독은 잘 하고 계십니까?”

누구시죠?”

모르셔도 됩니다. 그냥 교수님께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두죠.”

위청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한테 관심이 많으시다면 본인 신분을 먼저 밝히는 것이 예의 아닙니까?”

어디까지 해독하셨죠?”

이제 중반 정도…”

무슨 내용입니까?”

일기입니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제 연구내용을 알려주고 싶지는 않군요.”

좋은 자세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세요.”

뭐요?”

이제부터 고문서의 존재를 외부로 알려서는 안 됩니다. 교수님께서 고문서를 발견하셨으니 연구는 계속 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고문서를 연구실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거나, 고문서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시는 행위는 저희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고문서 해독을 완료하시면 저희에게 즉시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합니까? 고문서는 대학 소유입니다. 나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고문서를 대여했으니, 대학 규정을 어기지 않는 한 내 뜻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요구사항이 있으면 직접 방문하세요. 이만 끊습니다.”

아드님이 운동을 참 좋아하더군요. 라크로스던가요? 라켓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데 보는 재미는 별로 없더군요.”

그게 무슨…”

위준수. 열일곱 살. 미국 코네티컷 켄트 스쿨. 성적은 중하위권. 중학생 때 집단폭행사건에 연루되어 강제로 전학을 갔더군요. 그 뒤에 유학을 보내셨고.”

그만.”

잘 알아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를 실망시키지 마시길 바랍니다.”

위청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참, 부인 분께 신경 좀 쓰세요.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입니다.”

남자가 킬킬대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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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8

 

학자의 용기를 과소평가한 사람은 저들이 아니라 나였다.

학자들은 납작 엎드렸다. 관리들이 쳐들어와 사료를 마구잡이로 쓸어갈 때 그들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했다. 평소에 정치적 중립이 중요하다고 떠들어대던 자들이 막상 국가가 학문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려 들자 복날의 개처럼 꼬리를 내렸다. 불의를 목도하고도 모른 체하는 것이 정치적 중립인가? 개만도 못한 자들이다. 거세된 개도 발정기에는 허리를 흔든다.

나는 저항했다.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나는 사료 보관소 앞을 가로막고 병사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병사의 손짓에 나가떨어졌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국 학교에서 쫓겨났다.

지금 나는 어두운 골방에 들어앉아 모든 분노를 펜과 종이, 그리고 오래된 공책에 쏟아붓는다. 아직 희망을 버리기에는 이르다. 우리에게는 절대권력에 항거했던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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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청은 몇 시간째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중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불안했다. 결국 위청은 전화기를 들었다. 새벽 세시. 미국 코네티컷은 오후 한시였다. 위청은 아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연결음이 자동응답기로 넘어갔다. 아내는 낮 시간에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았다. 위청은 다시 잠을 청했지만 실패했다.

위청은 지하철에서 깜빡 조는 바람에 연구실에 늦게 도착했다. 이광이 먼저 나와 있었다.

교수님, 무슨 일 있으세요?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어요.”

별거 아니다. 작업은 다 됐니?”

스캔 다 떴고, 선명화 작업도 거의 끝났어요. 그런데 교수님, 이것 좀 보세요.”

이광이 고문서의 오른쪽 위를 확대했다. 무언가 희미하게 보였다.

뭐지? 얼룩인가?”

글자에요. 알파벳 대문자 N, 그리고 소문자 o 같아요.”

위청이 헛웃음을 뱉었다.

무슨 소리냐. 너도 지질학 연구소에서 보낸 검사결과를 읽었잖니. 고문서는 오차범위를 고려한다 해도 최소 270년 전에 작성되었어. 알파벳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한글이 아니에요.”

밥 먹다가 국물이 튄 모양이지. 우연히 글자 비슷한 자국이 남은 거고.”

이광이 화면을 넘겼다.

다음 장이에요. 똑 같은 글자가 있어요. 다음 장에도. 그 다음 장에도.”

화면이 계속 넘어갔다. 동일한 위치에서 같은 글자가 계속 보였다. 알파벳 대문자 N, 소문자 o.

위청이 입을 벌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작성자의 서명일 거야. 아마도 한 장을 다 쓸 때마다 종이 오른쪽 위에 자기 서명을 남기는 버릇이 있었겠지.”

손으로 쓴 글씨가 아니에요. 보세요. 고문서의 본문은 손으로 썼기 때문에 종이가 필기구에 눌렸어요. 그런데 오른쪽 위 글자는 눌린 자국이 없어요.”

얼룩도 아니고 서명도 아니면 이게 대체 뭐란 말이냐?”

인쇄된 거에요. 고문서의 종이는 공산품이에요.”

위청은 위장이 꼬이는 듯했다. 아라비아 숫자. 알파벳. 하지만 고문서의 제작 연대는 분명 조선 후기였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버렸다.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갑자기 건물 전체가 짧은 탄성에 휩싸였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잠시 후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위청이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지? 불이 났나?”

이광이 복도로 나갔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돌아왔다. 눈꼬리가 처지고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틀었다.

아나운서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은 종로경찰서에 나가있는 OOO기자 연결하겠습니다. OOO기자, 경찰 관계자의 제보에 따르면 대통령이 청와대 관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외부인의 출입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자살로 추정할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것인데요. 타살을 포함한 다른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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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왕이 죽었다. 왕도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죽는다. 어떻게 죽었느냐가 문제다.

3인방은 왕이 병으로 죽었다고 발표했다. 왕의 주치의라는 자가 왕의 사인을 병사로 기록했다. 사망원인은 심폐정지였다. 그렇다. 심폐기능이 정지하면 인간은 죽는다. 인간이 죽으면 심폐기능도 정지하기 때문이다. 아침이면 해가 떠오른다. 해는 아침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섭씨 100도의 온도는 물을 수증기로 바꾸기 때문이다.

왕은 자식이 없었다. 후계자를 정해놓지도 않았다. 아직 죽기에 이른 나이였다. 그런데도 3인방은 마치 왕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듯 금새 다음 왕을 옹립했다. 국정공백을 최소화한다는 이유였다. 새 왕은 옛 왕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왕가의 족보를 근거로 내놓았다. 족보가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국가에서 모든 사료를 압수했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불가능했다.

새 왕은 곧바로 즉위식을 치렀다. 즉위식은 정체불명이었다. 제단은 동쪽을 바라보았다. 제단에는 소, 돼지, 닭의 머리를 놓았는데 익히지 않은 상태라 핏물이 흘렀다. 왕의 복장 또한 괴상했다. 몸통 부분은 금색 옷감이었고, 왼팔은 흰색, 오른팔은 파란색, 왼다리는 검은색, 오른다리는 붉은색이었다. 왕은 제단을 향해 절을 두 번 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제단 앞에서 원을 그리며 백 바퀴를 걸었다. 입으로는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나중에 사람들이 왕에게 무슨 말을 했냐고 묻자 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개인의 종교는 검증 대상이 아닙니다.

종교라니! 어째서 왕의 즉위식에 종교가 개입한다는 말인가? 나는 직감했다. 왕은 거대한 음모의 말초신경에 불과하다. 분명 머리통이 존재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대중을 기만하는 사이비들.

나는 내일 국가기록원에 잠입할 것이다. 국가에서 압수한 모든 사료가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과거의 기록에서 새 왕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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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청은 연구실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했다. 오랜만이었다. 포털사이트는 전쟁터였다. 대통령의사망 소식을 전하는 뉴스 아래로 댓글이 수만 개씩 달렸다. 상당수는 여당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여당을 지지하는 여론이 늘어나고 있었다. 야당이 대통령을 지나치게 압박했다는 이유였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했는데도 당신들은 사냥개처럼 달려들어 연약한 여자를 물어뜯었습니다. 이제 후련합니까? 당신들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 입장에서 한 마디 남깁니다. 정말 너무들 하네요. 아무리 그래도 돌아가신 분께 그렇게 못되게 구는 거 아닙니다. 정말 보기 불편하네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고발당해 독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무지한 대중이 선동을 당하면 이토록 끔찍한 결과를 낳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천민민주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자살하신 게 아닙니다. 야당과 종북좌파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대통령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종북좌파 빨갱이들을 척결해야 합니다.’

좆불든 양아치들아 배부르고 등따스니까 할지랄이 없어 좆불들고 난동부리지만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못먹고 못살던 그시절 때문에 몸도 마음도 성한 곳 없는 분들이다. 박정희 대통령님이 싫으면 북한에가서 감자에 옥수수죽만 먹고 살아봐라 그래야 정신차리지 좆불든 젊은놈들아.’

위청은 웹 브라우저를 종료했다. 안구에 똥물이 튄 느낌이었다. 정치는 역시 더러웠다. 욕설과 비방, 독선과 혐오가 난무했다. 뉴스를 보는 게 아니었다. 정치인들이 위에서 끼리끼리 무슨 짓을 벌이든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다. 평범한 생활인들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광이 연구실로 들어왔다. 눈두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위청이 놀라 물었다.

얼굴이 왜 그러냐? 싸웠어?”

이광은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 눈두덩에 문질렀다.

늦어서 죄송해요. 집회에 잠깐 발자국만 찍고 오려 했는데 갑자기 애국청년단이라는 놈들이 들이닥쳐서 우리를 두들겨 패는 거에요. 말이 애국청년단이지 덩치는 용역깡패 같았어요.”

경찰은?”

옆에서 실실 웃으며 보고만 있더라고요. 개자식들.” 이광이 이를 갈았다. “대통령이 죽은 뒤로 정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한마음으로 대통령을 까던 보수 언론과 여당 정치인들이 다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어요. 여론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겠죠. 경상도에서는 여당 지지율이 50퍼센트를 넘었대요. 죽은 대통령이 불쌍하다나 뭐라나. 이쯤 되니 저조차도 대통령의 죽음이 사실은 여당 재집권을 위한 시나리오의 일부가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에요. 기획된 자살인 거죠.”

음모론은 위험하다. 학자라면 사실에 근거해서 판단해야 돼.”

알아요. 하지만 무엇이 사실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저들이 독점하고 있다면요? 경찰은 대통령이 사망한 당일에 자살이라고 발표해버리고, 부검도 신청하지 않았어요. 대통령이 유서를 남겼다고 하는데 원본은 공개하지도 않고 무슨 A4용지에 인쇄한 문서를 유서라고 내밀잖아요.”

위청이 되물었다.

얼마 전에는 객관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니?”

객관성은 학문의 장이 제대로 작동할 때에만 가능해요. 운동장이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공정한 경기가 되겠어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지지하던 사람들도 똑같이 말했지. 역사학계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이야.”

이광이 대답 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컴퓨터를 켰다.

위청이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까지 번역한 고문서의 내용을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해 놓으렴.”

위청이 USB 메모리를 이광에게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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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2

 

인맥을 모두 동원하여 국가기록원에 들어갔지만 새 왕의 정체를 밝힐 증거는 찾지 못했다. 사이비 종교를 추적한 논문들, 신문기사, 형사재판기록까지 살펴보았지만 왕이 즉위식에서 행한 괴상한 의식에 대한 내용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3인방이 미리 손을 써놓은 것이 분명하다.

실망감에 휩싸여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을 달래려 한참 동안 손에서 놓고 있었던 삼백 년 전 공책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희망이 빛을 뿜었다.

공책의 저자는 삼백 년 전에 어떤 권력자가 갑작스럽게 등장했던 사건을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그 권력자는 전임 통치자의 자살 이후에 정세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등장했다. 그는 전임 통치자의 후계자를 자처하여 대중에게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쥐자마자 대중의 기대를 배신하고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손을 잡았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권력자의 취임식 장면이었다. 그 권력자는 동쪽을 향해 제단을 쌓았으며, 제단에 소와 돼지와 닭의 머리를 놓았고,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든 옷을 입었다. 그리고 제단 앞에서 합장을 하고 원을 그리며 백 바퀴를 걸었다. 새 왕의 즉위식과 똑같았다.

삼백 년 전에 갑자기 등장했던 권력자. 지금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왕. 똑같은 즉위식. 똑같은 성씨.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세월 동안 장막 뒤에 숨은 기득권들에게 지배당한 것이다. 이들은 권력을 위협받을 때마다 지저분한 권모술수로 민중의 열망을 조작했다.

이 공책은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사료다. 아무에게도 공책의 존재를 알려서는 안 된다. 이제 거의 다 해독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요즘 들어 누군가 내 뒤를 밟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제 보았던 사람을 오늘 또 보았다.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 지나친 의심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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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짬뽕을 뒤적거리다 혀를 찼다.

가격은 올랐는데 내용물은 부실해졌네. 진짜 법칙이에요. 경제학과에서는 왜 이런 거 연구 안 하나 몰라.”

위청이 짬뽕에서 홍합 껍데기를 건져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원래 그렇지 뭐. 아리스토텔레스도 장사꾼은 믿지 말라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홍합이 죄다 벌어지지도 않았어요.”

이광이 아가리를 꽉 다문 홍합을 손가락으로 벌리려 애를 썼다. 홍합이 쪼개지며 국물이 튀었다. 홍합 속은 썩어 있었다.

위청이 말했다.

거봐라. 입 다문 홍합을 왜 열려고 하니? 그냥 버려.”

이광이 휴지에 손을 닦았다.

아깝잖아요.”

어차피 썩었잖아.”

열기 전에는 썩었는지 모르죠.”

그러니 버려야지. 썩었을지도 모르니까.”

이광이 닫힌 홍합을 하나 더 집어들었다.

아니요. 홍합 속이 썩었을까 봐 열어보지도 않고 다 버리면 이 중국집은 앞으로도 계속 썩은 홍합을 사용할 거에요.”

이광은 기어코 홍합을 다 깐 뒤 식탁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한바탕 화를 냈다.

위청이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게도 산다.”

이광이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을 식탁에 비스듬히 세웠다.

피곤하게 살아야 세상이 변하는 법이에요. 뉴스나 보실래요?”

뉴스에서 신임 여당 대표의 인터뷰가 나왔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명 정치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전임 대통령이 사망한 뒤 종편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야당에게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어 유명해졌다. 그는 야당이 김정은에게 지령을 받아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살해했으며, 다음 대선에서 애국보수 시민들이 종북세력을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 단체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에게 관심도 두지 않았다.

이광이 얼굴을 찡그리고 송곳니를 드러냈다.

아오, 저 새끼 또 나왔네. ? 대선 주자? 미친놈. 너처럼 막말이나 일삼는 놈을 누가 대통령으로 뽑아주겠냐?”

이광이 채널을 돌리려 하자 위청이 제지했다.

잠깐만.”

화면이 여당 대표 취임식으로 넘어갔다. 특이했다. 고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단상에 소, 돼지, 닭의 머리가 보였다. 여당 대표가 나타났다. 그는 조선 왕들이 입었던 곤룡포와 비슷한 한복을 입었다. 곤룡포는 아니었다. 색깔이 달랐다. 몸통 부분은 금색이었고, 왼팔은 흰색, 오른팔은 파란색, 왼다리는 검은색, 오른다리는 붉은색이었다. 그는 제단에 절을 한 뒤 두 손을 모으고 원을 그리며 걸었다.

위청이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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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3

 

3인방이 공책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이 분명하다.

낮에 전화를 받았다. 출판사 직원이라고 했다. 국가가 역사를 독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책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나를 필진으로 초빙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약속장소에 나가자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내가 물었다.

왜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오?

그가 대답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그는 정체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히죽히죽 웃기만 했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그는 협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난장판이었다. 3인방의 하수인들은 이불 속까지 뒤집어 놓았다. 나는 외투 주머니 안의 공책을 더듬으며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들은 나를 멈출 수 없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다. 욕심도 없고 야망도 없다. 오로지 진실을 향한 욕구만이 나를 움직일 뿐이다.

집은 이제 위험하다. 안전한 장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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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흥분에 사로잡혀 말했다.

고문서를 공개해야 돼요. 사이비 종교가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어요.”

위청은 면도날 같은 남자의 전화를 떠올렸다. 그는 아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안 돼. 출처도 확실치 않은 고문서를 공개해서 어쩌겠다는 말이냐?”

출처가 확실치 않다니요. 삼백 년 전 고문서가 지금 여당 대표의 취임식을 똑같이 묘사하고 있잖아요. 이 문서가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보다 확실한 출처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언론사에 찾아가서 신임 여당 대표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있다는 근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삼백 년 전에 작성된 예언서라고 말할 작정이냐? 기자들이 네 말을 믿어줄 것 같아?”

예언서가 아니라 사료에요.”

위청이 비웃었다.

사료? 조선시대 왕들이 요상한 의식을 치렀다는 기록이 이 고문서 말고 또 있던? 이건 날조된 문서일 뿐이야.”

날조요? 교수님도 연대측정 결과를 보셨잖아요.”

그래. 종이는 삼백 년 된 물건일 수도 있지. 하지만 기록은? 어떤 미친 작자가 삼백 년 전 종이를 구해다가 지 멋대로 써갈겼을 줄 누가 알겠어?”

그렇다면 더욱 놀라운 일이죠. 그 미친 작자는 신임 여당 대표의 취임식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을까요? 고문서를 공개해서 작자를 찾아야 해요. 그는 분명 더 큰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거에요.”

위청이 소리쳤다.

공개는 절대 안 돼.”

이광이 눈썹을 찌푸리고 위청을 잠시 쳐다보았다.

교수님, 뭐를 두려워하시는 거에요?”

위청이 눈을 피했다.

무슨 소리냐? 내가 뭘 두려워한다고 그래?”

말씀해 보세요.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죠?”

쓸데없는 소리!” 위청이 한 박자 늦게 책상을 때렸다. “광이 너 딴 생각 했다가는 나한테 논문지도 못 받을 줄 알아라. 알겠어?”

이광이 얼굴을 굳히고 낮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이광의 눈 아래 근육은 경직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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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5

 

새 왕이 본색을 드러냈다. 숙청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교육부였다. 전임 교육부장관은 칙령을 제대로 이행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칙령이 발표된 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국가의 역사관을 부정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은 한자릿수에 불과했다. 결국 교육부장관이 경질되고 교육과 별 관련도 없어 보이는 자가 새 교육부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왕이 다녔던 대학의 교수였다. 그가 왕의 시험 답안지를 조작하여 왕에게 A학점을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는 장관에 오르자마자 압수한 역사 서적을 모두 불태웠다. 그리고 앞으로는 오로지 국가기관만이 역사책을 제작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왕은 박수를 쳤다.

다음은 문화부였다. 왕이 즐겨보던 연극의 감독이 장관을 차지했다. 그는 불온사상 의심자 명단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명단에는 정권에 비판적인 예술가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 그래도 배를 곯던 예술가들은 밥줄이 완전히 끊기자 작품 활동을 그만두거나 왕을 찬양했다. 왕은 환호했다.

마지막은 경제부였다. 경제부 장관은 애초부터 정권의 개였다. 그는 법인세, 증여세, 상속세를 감면하는 대신 담뱃값과 주류세를 올렸다. 주식과 부동산으로 벌어들인 수입에 대해서 세금을 대폭 감면해 주고, 제조업 및 서비스업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이 일반 상업은행을 소유할 수 있도록 금산분리법을 폐지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이 과정에서 기업이 정치권에 거액의 뇌물을 살포하였다는 제보가 흘러나왔으나 수사기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왕은 축배를 들었다.

이로써 지배세력은 나라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을 쥐어짜 부를 축적하고, 문화를 장악하여 대중을 조종하며, 역사를 날조하여 미래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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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청이 연구실 출입문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오른쪽으로 돌렸다. 열쇠가 헛돌았다. 위청이 문고리를 돌리자 문이 그대로 열렸다.

광이냐?”

대답이 없었다. 연구실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랐다. 이광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다. 위청은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 화면을 밝혔다. 화면에는 시사주간지 기자의 전화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벌레가 척추를 기어다니는 느낌이었다. 위청은 서둘러 자신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USB 메모리가 보이지 않았다.

위청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역번호 032. 인천이었다. 위청은 전화를 받았다.

광아.”

이광의 목소리가 떨렸다.

교수님, 죄송합니다. 이제 못 뵐 것 같아요.”

괜찮다. 돌아오기만 하면 모두 없던 일로 하자.”

아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너무 멀리 왔어요.”

위청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인천 어디야? 공중전화야?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가 그리로 갈게.”

안 돼요. 그러면 교수님도 위험해져요. 저는 안전한 곳에서 잠시 숨어있을 거에요.”

위험?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너 혼자 거대한 권력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했니?”

그래요. 인간이 권력을 만들었으니 권력에 저항하는 것도 인간이에요.”

그건 네 바람일 뿐이야. 인류 역사를 생각해 봐. 아이티 혁명, 공산주의, 시리아 내전. 권력에 대한 저항은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을 낳을 뿐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야.”

아니에요. 절대 동의할 수교수님, 저 이제 가봐야 해요.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광아, 잠깐만. 광아.”

전화가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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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6

 

나는 지금 내가 근무하던 대학의 사료 보관소에 들어와 있다. 문은 안에서 잠갔다.

검은 선글라스는 집요했다. 내가 어디로 가든 항상 그의 모습이 보였다. 미행이 아니었다. 그는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신경이 곤두서 공책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다. 결국 대학 수위에게 열쇠를 빌려 여기까지 들어와야 했다. 열쇠는 하나뿐이다.

보관소는 어둡고, 춥고, 건조했다. 이곳은 생존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나는 마지막을 직감했다. 그러자 오히려 집중이 잘 되었다.

검은 선글라스는 왕의 졸개가 분명했다. 그는 왜 3백 년 전 공책에 집착하는 것일까? 추론의 결과는 분명했다. 공책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새로 즉위한 왕은 3백 년 전 나라를 암흑으로 이끌었던 권력자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 관계는 혈통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왕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사기꾼 집단일 수도 있다. 그리고 새 왕은 옛 권력자처럼 나라를 말아먹을 것이다.

이제 몇 장만 더 해독하면 된다. 무기는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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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청은 연구실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광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금방 통화불가 메시지로 넘어가는 것을 보니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었다. 미국에 있는 아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위청은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침이 밝았다. 위청은 찬 물로 세수를 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낯설었다. 그는 늙고, 지치고, 허약했다. 수명을 다한 수생식물 같았다. 비가 오면 휩쓸려 갈 운명이었다.

위청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역사학과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도 패기 넘치는 신입생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역사학은 밥 먹고 살기 힘든 전공이라며 진학을 말렸지만 위청은 듣지 않았다. 그는 역사학이 좋았다. 역사학은 과거를 해석하여 현재를 비판하고 미래를 예측했다. 그것은 일종의 신비였다. 위청은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공부모임에 가입했다. 첫 번째 교재는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학 논고였다. 위청은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한참을 떨었다. 번역문은 비문이었다. 그러나 의미는 언어를 극복했다.

모든 세기마다 현재를 영원한 비극으로 여겼지만,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해왔던 것처럼, 그것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선이 아니다.’

하지만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을 하고, 대출을 얻고, 아이를 낳고, 교수가 되었다. 예전에는 논문을 한 문장씩 곱씹어 읽었지만, 이제는 초록만 훑은 뒤 치워버렸다. 일제가 한반도에서 수탈한 쌀의 양보다 월급통장에 찍힌 숫자가 더 잘 보였고, 간신배들이 왕에게 하던 아첨을 학장과 총장에게 그대로 써먹었다. 그 사이 아내는 미국으로 떠나고, 아들의 모습은 안개처럼 흐릿해졌다. 삶이 심장을 옥죄었다. 생존본능이 도전정신을 먹어치웠다. 위청은 자신이 거대한 굳은살로 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이 벌컥 열렸다. 위청이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어슬렁거리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실실 웃고 있었다.

교수님, 온 나라가 난리인데 지금 잠이 옵니까?”

위청이 일어섰다.

누구십니까?”

선글라스 남자가 과장된 몸짓으로 연구실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제가 말씀 드렸을 텐데요. 실망시키지 마시라고요.”

위청의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뭔데 남의 연구실에 와서 협박질이야? 당장 꺼져. 안 그러면 경찰 부를 거야.”

남자가 킬킬댔다.

신고하면 누가 올까요? 성동서 김 형사? 박 형사? 최 형사는 지금 외근 나갔고, 정 형사는 마누라가 애기 낳는다고 휴가 중이고, 지구대 애들은 잘 모르는데 이번 기회에 안면 트겠네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고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위청은 가만히 서서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팔을 벌리고 의자에 앉았다. 다리를 쩍 벌린 채였다.

저희는 교수님께서 고문서를 발견하신 뒤부터 계속 교수님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을 뿐이죠. 그 때는 정권을 누가 잡을지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교수님을 그냥 놓아둔 겁니다. 문서의 내용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한 말이죠. 이제는 아닙니다. 다음 권력이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고문서는 다음 권력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물론 큰 영향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희는 모든 가능성에 미리미리 대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요. 일종의 직업병이랄까요.”

위청이 말했다.

고문서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소?”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공공기관은 권력 앞에 납작 엎드리기 마련입니다. 특히 기관장의 자리가 위태로울 때는 더욱 그렇죠.”

지질학 연구소였다. 연대측정 비용을 깎아준 이유가 있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고문서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이제 교수님밖에 없습니다. 은퇴하십시오. 미국으로 떠나세요. 여생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겁니다. 교수님 맨날 라면 아니면 김밥만 드시더군요. 그게 뭡니까? 행복하세요? 마누라가 차려준 따듯한 밥 드시면서 편하게 사세요.”

위청이 눈을 부라렸다.

아니. 고문서의 존재는 내 제자도 알지. 그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었어.”

남자가 다리를 꼬았다.

쥐를 잡아본 적 있으십니까? 쥐는 위험을 느끼면 구멍을 찾아 들어갑니다. 쥐 입장에서는 현명한 선택이죠. 하지만 쥐 사냥꾼에게는 그만큼 반가운 일이 없습니다. 쥐가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면 사람들이 놀라지만, 구멍에 들어간 쥐는 조용히 처리할 수 있거든요.”

남자가 정장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뉴스를 틀었다. 뉴스 화면은 빨간색 마티즈를 비추었다. 화면 아래로 자막이 떠올랐다.

‘34세 이모씨, 본인 차량에서 숨진 채 발견. 현장에 타다 만 연탄재. 자살로 추정.’

위청은 입을 벌리고 고개를 저었다.

개소리. 광이는 운전 안 해. 장롱면허라고.”

그래서요? 그게 중요합니까?”

남자가 일어섰다.

두 번 실망시키지 마십시오. 퇴직금은 두둑하게 챙겨 드리겠습니다. 아 참, 요새 부인 분하고 통화 못하셨죠? 이 번호로 연락해 보세요. 너무 화내지는 마시고요.”

남자는 작은 쪽지를 건넨 뒤 연구실을 떠났다.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위청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밤이었다.

위청은 책장에서 빈 공책을 꺼냈다. 그리고 기록했다. 고문서의 존재와 연대측정 결과, 지질학 연구소, 신임 여당 대표의 취임식, 검은 선글라스와 이광의 죽음까지. 사건이 벌어진 날짜와 맥락을 모두 썼다. 위청은 마지막으로 서명을 남기고 공책을 덮었다. 그리고 지하 보존서고로 내려가 공책을 보관함에 넣었다. 고문서를 발견했던 그 자리였다.

위청은 연구실로 돌아가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볼을 할퀴었다. 오랜만에 보는 바깥 풍경이었다. 그 동안은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위청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검은 선글라스가 알려준 번호를 눌렀다.

“Steve, Honey. What is this phone number? Are you on a business trip?”

마누라의 목소리였다.

위청이 말했다.

여보, 나야.”

여보? 아니, 그게이 번호 어떻게 알았어?”

어떤 사람이 알려줬어.”

어떤 사람? 누구?”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 좀 이상해.”

여보. 나 미국 갈까 봐. 아니, 갈게.”

? 미쳤어? 준수 학비는 어쩌고? 우리 생활비는?” 그녀는 당황한 듯했다. “당신 장난하는 거지? 그냥 잠깐 휴가 온다는 거지?”

위청이 입술을 다물었다가 떼었다.

나 학교에서 잘렸어. 돈 걱정은 하지 마. 퇴직금 많이 챙겨준대.”

? 잘려? 테뉴어 받은 정교수가 어떻게 잘려? 대체 한국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아무 짓도 안 했어. 무슨 짓을 한 건 당신이지.”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개새끼. 내가 여기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딴 식으로 말해? 꼴도 보기 싫어.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위청은 시선을 멀리 던졌다. 왕십리로가 언덕 아래를 가로질렀다. 수많은 차들이 교통신호에 따라 흘러갔다. 파란불에 달렸고, 빨간불에 멈추었다. 좌회전 신호에 좌회전을 했고, 우회전 할 때 우회전을 했다. 모두 흐름을 거스르지 않았다. 가끔 교통법규를 어기는 차가 있었지만, 오로지 자신의 이득을 위한 것이었다. 차들은 가치도 도덕도 인정도 부끄러움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위청은 눈물을 흘렸다.

 

---

 

1 27

 

공책을 모두 해독했다. 맨 마지막에 저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위청. 그는 이 공책의 주인이었다. 또한 패배자였다. 그는 성실한 서기였지만 용감한 싸움꾼은 아니었다. 서기는 역사를 기록한다. 싸움꾼은 역사를 만든다.

이제 새 왕의 정체를 폭로할 때가 되었다. 공책을 언론사에 제보할 것이다. 아직 기자의 양심이 남아있다면 내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불안하기도 하다. 기자를 만나기 전에 공책을 빼앗긴다면? 기자가 정권의 앞잡이라면?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니다. 공포는 저항을 방해한다.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만약을 대비해서 내 일기장을 여기 사료 보관소에 두고 간다. 당국은 이미 이 곳의 사료를 압수했기 때문에 여기를 다시 수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내가 성공한다면 이 일기장은 쓸모가 없을 것이고, 내가 실패한다면 일기장은 유일한 희망이 될 것이다. 나는 일기장이 세상에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차라리 일기장을 과거로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 내 기록을 읽고 사람들에게 경고를 한다면, 당신들이 사회에 눈을 감고 자기 밥그릇에 코를 박는 동안 엘리트들이 여러분에게서 권력을 빼앗고 자유를 빼앗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시민을 신민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려준다면, 지금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도 조금은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텐데.

아니다. 망상이다. 배가 고프다. 우선 나가서 뭘 좀 먹어야겠다. 라면에 김밥은 지겹다. 따뜻한 밥을 먹어야지. 콩나물무침에 된장국, 분홍색 옛날 소시지 부침도 있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학교 앞 코끼리분식에 가야겠다. 학부 졸업하고는 처음이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건강하실까?

김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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