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기괴.

안나 드 발자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저 한 단어로 귀결됐다.

그녀의 개인공방 정력에서 매일 같이 터지는 폭발음이나 하루가 멀다 하고 그곳을 드나드는 근육질의 남정네들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언제나 기름때를 잔뜩 묻히고 다니는데도 감춰지지 않는 그녀의 미모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안나 드 발자크에게는 머리가 없었다.

신체부위를 하나쯤 떼어내고 다니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종종 과시욕에 취해 두 개의 신체부위가 없는 사람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했지만, 분명 안나 드 발자크의 경우는 이런 풍토 속에서도 기괴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미녀를 보고 있자면 오래전에 존재했다는 서쪽 작은 섬나라의 전설을 떠올리게도 했는데, 모 잡지사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자신은 그런 이야기의 존재도 몰랐다고 한다.

아무튼 안나 드 발자크는 기괴하게도 머리가 없었다. 지금도 그랬다.

한 손에 뜨거운 밀크티 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거친 종이의 페이지를 넘긴다. 지난달에 구입한 엔티크 탁자 위에 아름다운 미모를 올려둔 채 말이다. 공방의 아침은 소음대신 기괴함으로 가득했다.

안나 드 발자크가 읽는 활자희극신보는 빼곡한 악필로 악명이 자자했는데 그만큼 쓸데없는 정보도 많았다. 매일 여기에 짜증을 내는 것이 그녀 나름 아침을 여는 방법이었다.

휴고 교위가 또 순교자의 언덕에서 뛰어내렸군. 미친 새끼.”

안나 드 발자크는 경사 10도도 되지 않는 잔디밭에서 구른 전쟁광의 이야기에 솔직한 감상을 밝혔다. 찰과상이나 입으면 다행일 것이다. 며칠 동안은 그 아래 공원에 가 새싹들을 구경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리스가 흐드러지게 피려면 아직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밀크티를 마저 마셔버린 안나 드 발자크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기 무섭게 잔이 채워졌다. 지안느였다.

주인님. 또 소문이 퍼지는데요.”

이번엔 뭔데.”

주인님이 어린 남자를 좋아한대요.”

사실이야. , 돈이 많고 잘 생겨야 해.”

지안느는 주인의 의견에 동의했다. 취향은 다양하고 그만큼 존중도 필요하다. 그러나 휴머노이드가 판단하기에는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했다.

성격도 좋아야죠. 주인님을 감당하려면.”

안나 드 발자크는 뭐라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만든 닮은꼴 창조물의 말에 수긍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속물적이고 싸가지가 없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지성인이었다. 다만 수긍을 위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머리를 다시 붙이려면 지하 공방으로 내려가야 했다. 퀴퀴한 작업실에 처박히는 것은 일할 때로 족했다.

그런 기준에서라면 그 녀석은 확실히 미달이야. 신상에 빨간 도장 쾅!”

아직 앞날이 창창한 분을 범죄자로 낙인찍지 마세요. 질투하는 여자는 보기 안 좋다고요. 고작 주인님보다 열 살 적을 뿐이잖아요?”

그래. 난 고작 열 살 많을 뿐인데 앞날이 막막하구나.”

지안느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 씨, 계세요?”

저런. 천민 오셨군.”

안나 드 발자크는 간단히 소감을 밝혔고 지안느는 걸어가 문을 열었다. 아무리 자세히 보더라도 더러운 천의 집합체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이 그렇게 추워, 루이?”

옷이 이것뿐이에요.”

태연하게 대답한 헝겊더미에서 팔이 하나 튀어나와 여러 겹으로 두른 천을 능숙하게 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옷을 대충 접어 지안느에게 넘긴 루이는 할 일을 마치고 축 늘어진 기계팔을 덜렁거리며 안나 드 발자크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너 때문에 삶이 막막해졌어, 개새끼야.”

축하드려요.”

루이는 공방 정력을 제집처럼 다닌 지 반년이 넘었고, 안나 드 발자크의 폭언에도 익숙했다. 적당히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이면 그것으로 족한 아침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모래폭풍이 장난 아니에요.”

제길. 화단 관리를 더 잘해야겠어.”

그래봤자 매번 다 죽잖아요.”

안나 드 발자크는 자신이 이 열네 살짜리 소년에게 지금까지 너무 좋게 대해준 게 아닌가 싶었다. 얼마 전 생일이라고 저 기계팔을 달아주는 게 아니었다. 그녀 수입의 상당수는 바로 화단 구성에 쏟아 부어지고 있었고, 그녀 역시 틈만 나면 화단 개량에 재능을 바치곤 했다. 물론 노력이 화초의 목숨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했으나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애화가愛花家인지 다시금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죽으면 너를 빻아서 거름으로 줘버릴 거야.”

그래도 죽어요.”

루이는 그렇게 말하곤 지안느가 가져다준 프랜치 토스트에 케첩을 발랐다. 피처럼 터져 나오는 붉은 소스에 안나 드 발자크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였다.

이러니까 주인님이 어린 남자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는 거예요.”

내가 뭘 어쨌다고.”

어린 남자한테 약하시잖아요.”

지안느는 손을 뻗어 아기를 달래듯 자신과 꼭 닮은 주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계가 가지는 차가운 감촉이 열 받은 머리에 기분 좋게 다가왔지만, 안나 드 발자크는 정곡에 찔려 여전히 뾰로통했다.

쟨 돈이 없어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얼굴은 비쩍 말라서 볼품없는데다가 여자 마음에 아무렇지 않게 상처 입히는 천하의 상놈이야.”

거의 반쯤 울고 있는 비난에 루이는 굳이 반응해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미묘한 승리감에 도취돼 방금 입에 집어넣은 토스트를 잘게 찢는 데만 집중했다.

울분을 삭히느라 한동안 말이 없단 공방 정력의 젊은 주인은 슬슬 일 할 때가 다가오자 거짓말처럼 태도를 바꿨다.

오늘 할 거리는?”

남동부전선에서 총화기 1794자루를 부탁했어요.”

인스턴트커피 봉지를 적은 물에 두 개나 넣어 진한 모카 향을 즐기던 루이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매일 출근하기 전, 도시에 있는 세 개의 우편국을 돌며 공방의 주문지를 받아오는 것이 그의 아침 일과였다.

기한은 보름 후인데 아마 거긴 지루하니까 스무날까지도 별 말 없을 거예요. 양측 사령관이 모두 쫄보예요.”

한 달 기한 잡으면 되겠네.”

문제는 서부전선이에요. 무기 상담을 하겠대요.”

루이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동시에 닥친 문제를 제기했다. 안나 드 발자크의 눈이 짜증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좆같네.”

지휘자가 아마 이 근처에 와 있을 걸요.”

빅 더 휴고. 아침 신문에도 났더군. 그래서 그 짓을 벌였나.”

무슨 짓이요?”

안나 드 발자크는 건방지지만 일 하나는 확실한 제자에게 활자희극6면을 펼쳐보였다. 루이는 그녀가 말한 기사를 찾느라 한참을 고생했고 도대체 왜 이 신보를 읽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구실이라면……. 재작년에 달아준 엉덩이가 고장 났다며 고쳐달라고 올 거야.”

그럼 한동안 도망칠까요?”

황제한테 받은 일도 있어. 이엑스칼리버에 버금가는 검을 갈아 달래.”

주문서가 아닌 안나 드 발자크에게 직접 온 비둘기 서신이었다. 나흘 전 쯤, 천장 창문을 깨며 날아든 이 미터짜리 비둘기의 위엄을 직면한 적이 있었다. 비록 지안느가 처참하게 날개를 날려버리는 것으로 복수했지만, 다리에 묶인 서신 덕분에 그것이 황실 전용의 서신 전달 비둘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맡은 바 임무를 다한 휴머노이드를 타박하며 빠르게 날개를 만들어 달았는데, 제대로 돌아갔을지는 그녀로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위대한 비둘기 마음을 한낱 수식에 파묻힌 공순이가 어찌 알겠는가.

천장 수리비보다 비둘기 보상금이 더 나올 거야. 사료 값이라든가 간식 값이라든가 미용하는데 필요한 비용 같은 거 말이야.”

미친 것 아니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무슨 비둘기를 키우는데 그 돈지랄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투덜거린 안나 드 발자크는 루이가 맞장구를 쳐주자 오랜만에 신이 났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말은 그녀를 똥 씹은 표정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것 말구요. 이엑스칼리버에 버금가는 검이라니, 세상에 그런 게 만들어 질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정말 미쳤나 봐요.”

……비둘기가 미쳤다는 것 아니었어?”

고작 안나 씨에게 그런 대단한 걸 맡기려는 황제가 미친 거죠. 애꿎은 비둘기는 왜 욕하고 그래요?”

스승에 대한 거침없는 평가는 루이의 좋은 점이자 나쁜 점이었다. 문제는 그 평가가 세간에 들리는 소문과 크게 연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남자에게 약한 젊은 미녀의 이야기가 어찌되었건, 안나 드 발자크가 세계에서 알아주는 천재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 새끼 지랄하는 것 좀 봐, 지안느!”

그것보다 지금은 서부전선 사령관님의 일이 더 문제 아닐까요?”

울음 섞인 외침으로 지금 상황을 부당함을 알렸지만, 냉정하다는 점에서 휴머노이드는 사람보다 더 심한 축에 속했다. 날카로운 지적에 안나 드 발자크는 분노를 삼키고 직면한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황제의 일을 거절하지 못한 이상, 도망은 포기해야 해.”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수리비를 무지막지하게 요구한다던가.”

어차피 구실일 뿐이야. 무기를 구하러 오는 거니까.”

황제의 요구보다 더 미친 것인가 보죠?”

안나 드 발자크는 제자의 질문이 멍청한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빅 더 휴고 교위의 바람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유일무이한 무기에 대한 갈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안나! 있는가!”

천민 새끼가 또 왔어.”

눈치 없는 등장이 오늘 벌써 두 번째였다. 그것만으로 귀족 출신인 빅 더 휴고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루이는 빙글 웃으며 나 왔을 때도 그랬어요?”라며 물었고 어차피 넌 천민 새끼 맞잖아.”라는 안나 드 발자크의 날카로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지안느가 문 앞으로 소리도 없이 다가가 주인에게 문의 벌어짐 정도를 묻는 눈짓을 보였고, 잠깐의 한숨 후 마지못해 허락이 떨어졌다. 모래폭풍과 함께 방으로 들어온 빅 더 휴고는 제일 먼저 옆에 공손히 선 휴머노이드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큰 보폭을 안으로 옮겼다. 탁자 위에서 기괴한 안광을 뿜어내는 안나 드 발자크의 시선을 그는 너털웃음으로 받아내어, 세간에 흔히 말하는 전쟁광의 여유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어린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용건만 말해.”

안나 드 발자크는 짧은 대화도 싫다는 듯 빅 더 휴고 교위의 넉살을 몰아붙였다. 그는 과장된 표정을 지어보이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작년에 수술 받은 불알이 고장이네.”

쓰레기 새끼가. 난 그런 병신수용소 만든 적 없어.”

훌륭한 엉덩이를 만들어냈으니 비뇨기과도 같이 잘할 거라고 믿어서 왔네. 아직 태어나지 못한 내 아이들이 하늘 건너 사기꾼 돌팔이 작품에 시달리게 둘 순 없어.”

빅 더 휴고는 탁자 옆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는데 아주 현명한 행동이었다. 근거리에 있었다가는 화를 참지 못한 안나 드 발자크의 손찌검을 피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리고 탁자와 눈높이를 맞춰 그 나름 거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얼마면 되겠나?”

돈이 문제가 아니야.”

그러면?”

……황제한테서 온 의뢰가 있어.”

황제야 내가 당장에라도 가서 죽여 버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털이 북슬북슬한 사람 좋은 인상의 덩치가 여유롭게 안나 드 발자크의 임기응변을 무시했다. 비록 그 내용은 제국법에 위반돼 커다란 위기감을 조성할 법했지만, 누구라도 부정할 수는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빅 더 휴고가 서부전선 사령관이 된 이유는 단지 그쪽에 적군이 많아 학살하기 편하다는 것일 정도로 그는 미친 자였다.

난 공방의 주인이야. 당신이 쉽게 벗겨낼 수 있는 족쇄가 아니지.”

그 점은 인정하지. 각자 자리에서 최고라면 그런 프라이드는 중요한 거라는 걸 나 역시 잘 알고 있네.”

예상과는 다른 전쟁광의 대답에 안나 드 발자크는 잠시 얼이 빠졌다. 이 자는 이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빅 더 휴고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허나 이것은 거부할 수 없을 것이야.”

모두가 숨을 죽인 그 때.

황제 폐하의 기밀 특명이다. 죄인 안나 드 발자크는 즉시 수도로 오라.”

안나 드 발자크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도 하지 못한 전개에 머리를 빠르게 굴렸지만, 임기응변도 빈약한 그녀가 내뱉을 수 있는 건 고작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었다.

내가 왜 죄인이지?”

황실 비둘기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면 충분히 죄인일세, 공방장.”

지안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실제로는 전혀 변화가 없어 그 자리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건 불공평해요.”

어디가?”

왜 주범은 처형당하지 않는 건데요? 완전 불공평해!”

루이는 교수대 앞에서 벌벌 떨며 짜증을 냈다. 순식간에 연행되어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사형 위기라니. 게다가 교수대라는 이 구시대적 발상은 그만을 위협했다. 어차피 목을 매달더라도 기계가 죽을 리 없었으니까.

나는 교수형을 당할 수 없는 걸,”

안나 드 발자크는 자기 머리를 들고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주범이라니. 거기 휴머노이드가 잘못한 건데?”

당신이 주인이잖아!”

새끼가 스승한테 당신? 다앙시인?”

육 개월 된 제자의 막말에 안나 드 발자크는 어이가 없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옆에서 둘이 말싸움을 하건 말건 지안느는 지안느대로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자신은 교수대 앞에 선 사람처럼 평범하게 두려움에 몸을 떨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두려움은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기왕 사람을 닮은 거 그 정도 프로그래밍은 괜찮지 않은가 싶었다.

주인님이 원망스러워요.”

지금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거든!”

현대 기술에서 매너모드는 필수라고요.”

안나 드 발자크는 휴머노이드가 보이는 독자적인 반항에 또 이상한 걸 학습한 건 아닐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 앞에 이번 일의 주동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안나, 자넬 위해 준비했네.”

빅 더 휴고는 커다란 대포를 끌고 안나 드 발자크 앞에 섰다. 그는 그녀의 눈에서 두려워하는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 더욱 즐거웠다.

쏴서 죽이려고?”

아니, 자네 대갈통을 포탄 대신 쓸 걸세. 무기공방장의 최후답지 않나?”

미친 새끼가.”

안나 드 발자크가 내뱉는 욕이 빅 더 휴고에게로 대상을 옮겼지만 거대한 털북숭이 전쟁광은 그저 껄껄 웃으며 여유롭게 그녀의 분노를 받아넘겼다. 넷이 정신없이 실랑이를 하는 그때, 올 것이 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말에 탄 채 비린내 풍기는 접시를 들고 끊임없이 쩝쩝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건만 머리숱은 이미 반절도 남지 않았고 지나치게 왜소한 체구의 그는 슬하에 자식도 없어 꽤 급한 상태였다.

죄인 안나 드 발자크. 네 죄를 아는가.”

황실 비둘기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억울합니다. 비둘기가 먼저 저희 공방을 습격했고, 그에 따른 방어 시설이 작동한 것뿐입니다.”

옆에서 가신들이 폐하께 무슨 말대답인가! 무엄하다!”라거나 쳐 죽일 년이! 어딜 감히 폐하 앞에서!”같이 욕과 손가락질을 하건 말건 안나 드 발자크는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비둘기 따위가 죄가 된다면 웃기는 일일 터였다. 생각해보면 비둘기는 전보다 기동력이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렇게 억지로 끌고 왔다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문제는 해결되었고, 죄인에게는 다른 죄목이 있다.”

안나 드 발자크는 깜짝 놀라 자신이 저지른 또 다른 죄를 고민했다. 솔직히 걸린다면 한 두 개가 아니긴 했다.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한 번 입맛을 다시고 입을 열었다.

풍기문란에 기준한 아동청소년법 위반이다.”

?”

자네가 미성년자인 소년과의 불손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가 전국에 퍼져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죄명이었다. 더군다나 지안느가 알려줬던 소문이 벌써 전국구였다니 더욱 충격이었다.

잠시만요! 아닙니다!”

부정하는가?”

당연합니다! 제 취향은 잘 생기고 돈 많고 마음씨 좋은 남성입니다! 쟨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수긍했다면 스스로 스승을 고발할 생각이었기에 루이는 번거롭지 않게 되었다고 속으로 만족스러워 했다. 죽이 맞는 스승과 제자를 보곤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짐이 보기에도 저 소년이 잘 생기고 돈 많고 마음씨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신고자 빅 더 휴고. 이 사태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나?”

저쪽은 단순히 즐기는 상대고 따로 숨겨둔 정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안나 드 발자크는 황제의 앞임에도 불구하고 미친 새끼야!”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주변의 신하들이 노발대발했으나 정작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 일에 대해 짐은 직접 대화를 나누도록 하겠다. 공방장은 황궁으로 들라.”

빅 더 휴고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고 있던 안나 드 발자크는 황제의 명에 황급히 양 손으로 머리를 들어 숙여보였다.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온갖 발린 말로 아첨하는 신하들과 함께 먼저 황궁 헬레나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새끼.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자네가 가지고 있는 무기가 탐나는 것뿐일세, 안나. 황제의 의뢰 핑계를 대기에 조금 손을 썼지.”

곧장 으르렁대는 안나 드 발자크에게 빅 더 휴고는 담담히 자신의 욕망을 밝혔다.

내가 넘길 것 같아?”

두고 보면 알 테지.”

안나 드 발자크는 황궁에서 나온 시종들이 그녀와 일행을 끌고 가는 중에도 쉴 새 없이 전쟁광에 대한 상스러운 예찬을 계속했다. 빅 더 휴고는 두툼한 손을 흔들며 그들을 천천히 따랐다.

곧 잔뜩 분칠을 해 더욱 빛나는 미모를 들고 안나 드 발자크는 대연회장에서 황제를 독대하게 되었다. 기다란 식탁은 생굴이나 굴전부터 장어튀김까지 갖은 스태미나 음식으로 상다리가 휠 지경이었다. 그녀가 앞쪽의 접지를 조금 밀어 공간을 확보해 자기 머리를 놓는 것을 확인한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질문을 던졌다.

굴 좋아하나?”

안나 드 발자크는 이것이 생사를 좌우할 인생 최대의 질문이라고 확신했다. 이 와중에도 황제가 쉴 새 없이 먹어대는 저 굴들에 대해 과연 사실대로 불호를 외쳐야 할 것인가, 거짓말로 호를 외쳐야할 것인가. 불호를 외친다면 노력하는 정력가인 황제의 식단을 불쾌히 여겼다는 평을 받을지도 몰랐고 호를 외친다면 황제의 것을 탐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럴듯한 구실만 붙인다면 어느 하나 사형감이 아닌 것이 없었다.

언제까지고 고민할 수는 없었던 그녀는 결국 한 번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굴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네, 공방장이여.”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공방 이름이 마음에 들더군.”

유명한 예술가였던 선조를 본받아 정력적으로 공방을 운영하려 한 각오일 뿐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밝힐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자기 키만한 의자에 앉아서 안나 드 발자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네.”

나름 지옥에서 보낸 한 시간이었습니다.”

호탕하게 웃는 황제를 보며 안나 드 발자크는 확실히 안도했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빅 더 휴고의 계략 속에 있음을 더욱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 전쟁광은 이제 황제까지 움직여 자신이 가진 무기를 탐내고 있었다.

빅 더 휴고 교위야.”

그가 흑막임은 알고 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안나 드 발자크의 질문은 황제가 씁쓸한 미소를 띠게 만들었다. 그는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요청했던 검은 어떻게 되었나.”

만들었습니다만, 커다란 바위에 박아놓고 최소 몇 백 년 정도는 담금질해야 합니다. 설령 만든다 해도 그를 견제할 수 있지는 않을 겁니다.”

포기하지.”

황제 역시 빅 더 휴고에게서 벗어나려 발악하고 있음을 알게 된 안나 드 발자크는 자신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빅 더 휴고 교위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비참해지는 것.”

그는 학살에 미친 자입니다.”

지금 같은 전시 상황에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일세.”

안나 드 발자크는 황제의 대답이 전시 상황이 아닐 경우의 빅 더 휴고를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커다란 제국을 다스리는 이 남성도 그라는 필요악만큼은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빅 더 휴고는 아군이든 적군이든 한 나라를 충분히 집어삼킬 수 있는 인재人材이자 인재人災였다.

서해 전선으로 가주게.”

?”

거대한 해일이 있을 거라는 예언자 노스트라담의 말이 있었어. 전선을 지켜주게.”

필시 빅 더 휴고의 계략일 것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따르는 황제에게 안나 드 발자크는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는 결국 이 제국에서 2인자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잡아들고 다시 한 번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을 향해 숙였다.

받들겠나이다.”

심란한 마음에 적당히 식사를 마친 안나 드 발자크에게 황제는 물러가라 명했고 대연회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이와 지안느를 만났다. 시종들이 마련해주었는지 새 옷을 입고 신난 제자를 보고 천재 공방장은 중얼거렸다.

옷이 날개네.”

저도 꾸미면 이 정도는 된다고요.”

고개를 돌려 그 발언을 깔끔하게 무시한 안나 드 발자크는 심각한 투로 말했다.

잘못 걸렸어.”

왜요?”

변태 새끼가 일을 벌였어. 서부 전선으로 가야할 것 같아.”

미인과 함께 하게 돼서 기쁘군.”

황제가 식사중인 대연회장 앞 복도였지만 빅 더 휴고의 목소리는 아랑곳 않고 쩌렁쩌렁 울렸다. 기분 나쁜 등장에 안나 드 발자크는 더러움을 떨쳐내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서쪽 전선에서 뭘 꾸미고 있는 거지?”

황제 폐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인재로 자넬 추천한 것뿐이네. 내가 그 지역의 사령관이니 말일세.”

내가 해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거야?”

자네는 못하더라도,”

서부전선 사령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하며 그녀를 압박했다. 서서히 다가와 귓가에 대고 그가 속삭이자 턱 끝에 닿는 푸른 수염의 감촉에 안나 드 발자크는 소름이 돋았다.

자네가 가진 무기는 할 수 있겠지.”

저리 꺼져!”

빅 더 휴고는 자신을 앙칼지게 밀쳐내는 여인의 손길에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슬쩍 물러났다. 안나 드 발자크는 입술을 깨물고 황제가 말해준 빅 더 휴고의 목적에 대해 따올렸다.

비참해지려 한다고 들었어.”

나는 누구보다도 많이 비참한 자들을 만들 걸세. 그리고 내가 마지막에 비참해지는 것으로 역사상 최고의 비참함을 완성하겠지.”

안나 드 발자크는 차라리 직접적인 두통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기 머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죽음으로?”

죽음으로.”

빅 더 휴고는 중후하게 웃으며 천재를 비난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안나 드 발자크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머리와 몸을 분리해도 살아있는 자네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그러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많은 무기를 만들어내는지도 모르지.”

 

서해바다에 폭풍우가 내려치는 날이면 해녀들은 짜증을 내며 신을 저주하곤 했다. 지안느는 존재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것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주인은 나은 편이었다. 진짜 머리가 떨어져서도 살아서 쌩쌩히 돌아다니니 고대 전설의 재림이 여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날씨 정말 지랄 맞네.”

여느 공방장들처럼 안나 드 발자크는 비를 증오했다. 모래폭풍보다도 기계에 안 좋은 것이 바로 물이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하늘에서 무차별적으로 떨어져 쇠에 폭력을 휘두르는 기상현상을 달가워하지 못했다. 그저 밝은 햇살을 좋아하는 제자와는 다르게 확실한 이유였다.

공방 정력의 일원들이 서부전선에 자리한지도 어느새 엿새가 지나고 있었는데 그 기간 내내 비가 내렸다. 공방에서 진행 중이던 일은 전부 황실의 이름으로 다른 공방에 떠맡겨졌다. 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안나 드 발자크는 후일 황제에게든 빅 더 휴고에게든 값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비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던 탓도 있었다. 그나마 서부는 본토에 비해 싱그러운 꽃이 많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던 머리 없는 그녀의 뒤쪽 문이 열리며 이 지역의 절대적인 지휘자가 나타났다.

예언자 노스트르담 말로는 내일 그칠 거라더군.”

해일은?”

내일 올 거라더군.”

둘 모두 많은 물이 쏟아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안나 드 발자크와 루이, 지안느는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그들의 반응에서 해일이라는 현상을 직접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빅 더 휴고는 연초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잘 보게.”

그는 거대한 체구에 맞는 폭풍 같은 호흡 한 번으로 연초를 심지까지 태워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게 바로 비가 내리는 걸세.”

입과 코에서 연기를 가득 피워 올리며 빅 더 휴고는 담담히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꽁초를 버리고 발로 짓밟는 그에게 말을 건 것은 다름 아닌 호기심을 참을 수 없던 열네 살의 루이였다.

저기, 한 번에 다 피우셨는데요. 저희가 이론 상 아는 해일과 비슷한 것 아닌가요?”

이건 내 특징일세. 뭐든 한 번에 끝장 보지. 물론 침대 위에서는 아니지만.”

이해 못하겠으니까 설명이나 해.”

짜증 가득한 안나 드 발자크의 재촉에 빅 더 휴고는 연초 하나를 더 꺼내며 말을 이었다.

요는 흔적이 남는다는 걸세. 어떻게 해도 연기가 남고 꽁초가 남아. 그런데 해일은,”

그는 그대로 연초를 입안에 넣고 씹지도 않은 채 그대로 삼켰다. 숙소 안의 모두는 그를 따라하듯 숨을 꼴깍 삼켰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네. 황제가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해. 자식농사도 못 짓는 사내새끼는 정점에서 내려올 때가 정해져 있거든. 이쪽 바다에는 유명한 굴 양식장이 있지. 나이도 있는데 정력이라도 더 단련해야 하지 않겠나?”

더러운 새끼.”

더러운 세상이지. 내일 방법이나 잘 구상해 두라고.”

스콜처럼 몰아친 털북숭이 전쟁광에게 얼이 빠진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익숙한 축에 속했던 안나 드 발자크는 가장 먼저 자기의 어린 제자에게 경고를 날렸다.

덩치 큰 꼰대 마초라고 해서 다 목표로 해야 할 건 아니야, 루이.”

전 털 안 나니까 저렇게 안 돼요.”

두서없는 대답이었지만, 안나 드 발자크의 우려와는 다르게 루이는 그를 동경하고 있지 않았다. 워낙에 왜소한 체구라 커다란 것을 좋아하는 그였지만, 그 역시 사리분별은 했다. 정확히는 공방에서 머리 없는 스승에게 단련된 결과였고 이는 그녀를 퍽 만족시켰다.

좋아.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내가 제모 기계라도 만들어주지.”

왁싱도 돼요?”

꺼져.”

루이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애인과도 같은 거대한 오른쪽 기계 팔을 만지작거렸고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지안느가 주인에게 물었다.

그러면 주인님. 내일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솔직히 말하면 뾰족한 수가 없어.”

지난 엿새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안나 드 발자크의 머리에서는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자연재해를 막아야하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쭈뼛거리며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괜찮습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지? 마음껏 해도 괜찮아.”

안나 드 발자크는 심란할 휴머노이드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지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오래전부터 마음 속 깊이 숨겨왔던 주인에 대한 사랑을 표출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건데, 그 들고 계신 대갈통 부셔버리고 싶어요.”

누굴 닮아서 저렇게 입이 걸어?”

차마 자기를 닮았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안나 드 발자크는 괜히 소중하게 자기 머리를 품에 안았다. 목을 잘랐던 건 품에 안고 싶어서가 아니었는데. 그녀는 조용히 아이리스 꿀로 맛을 낸 독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주인님은 절 마음에 들지 않아하셨죠.”

지금은 그렇지 않아.”

그래서 고마워하고 있어요.”

넌 휴머노이드야.”

지안느는 술에 취한 주인의 두서없는 지적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안나 드 발자크를 본 딴 휴머노이드인 동시에 주인과는 다르게 목이 붙어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밤이 깊더라도 잠들지 않고 주인 곁을 지키는 가장 충실한 종.

새벽안개를 헤친 오랜만의 아침햇살에 안나 드 발자크가 눈살을 찌푸리자 지안느는 그 옆에서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좋은 아침이네요.”

내 뱃속은 아닌가본데.”

얕게 신음하는 머리를 들고 천재 공방장은 화장실로 뛰어갔다. 곧 들려온 요란한 소리를 묻어버리려 라디오 볼륨을 한 층 높인 지안느는 아침을 만들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요.”

루이 님 일어나셨어요?”

뭔가 기합이 들어갔네, 지안느.”

안나 드 발자크가 일어났던 바로 옆 이불뭉치에서 루이의 얼굴이 톡 튀어나오던 작은 코를 벌름거렸다. 저렇게 엿새나 잠을 잔 이상 자기 주인이 어린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더 퍼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생각한 지안느는 쓰게 웃었다. 매일처럼 술까지 퍼마셔댔으니.

. 오늘은 힘 내야하는 날이니까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주인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

예언의 해일이 몰아칠 것이었다. 그러나 빅 더 휴고의 명령 아래, 서부전선의 병사는 한 명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안나 드 발자크는 이것이 그가 파놓은 철저한 계획이라는 걸 곧장 깨달았다. 사람들을 죽게 만들지 않으려면 그녀가 해일을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자신이 만든 포 소리가 울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만이 위안이었다.

서부에는 스트레스를 풀어줄 만큼 활자가 빼곡한 신문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대신 안나 드 발자크가 사령부에서 호탕하게 들리는 빅 더 휴고의 웃음소리를 속으로 까고 있을 때, 노스트르담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성녀님, 어디 불편한 점이라도?”

안나 드 발자크는 저 호칭이 알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서부전선에 도착한 날 만난 노스트르담은 자기 고집을 꺾지 않았기에 그녀는 이제 만류하길 포기하고 애써 웃음을 지었다.

조금 긴장되네요.”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죽어도 저희를 구원하실 겁니다. 머리가 떨어진 채로도 살아계신 기적을 보여주시는 것처럼.”

죽어도, 라니. 예언은 해일이 오는 것까지잖아요. 그렇죠?”

누군가가 막는다는 예언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 안나 드 발자크는 노스트르담의 얼굴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예언자는 곧 들이닥칠 자연재해에도 제가 한 예언은 거기까지가 맞습니다. 그리고,”라며 입을 열었다.

예언자들은 자기 예언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설령 그것이 좋지 않은 것이라도. 보세요. 해일입니다.”

노스트르담의 갑작스런 선언에 안나 드 발자크는 잔뜩 긴장해 반쯤 잘린 그의 검지 끝이 가리킨 수평선을 바라봤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언에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구원자가 없는 것도 아니지요. 억지 같습니까?”

억지죠.”

억지일세.”

안나 드 발자크는 자기의 대답과 동시에 들려온 빅 더 휴고의 목소리가 자신과 같은 의견이라는 것이 몹시 불쾌했다.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지 마. 당신 의견 물어본 적 없으니까.”

그게 싫었으면 내 귓구멍에 불알이라도 박아놓지 그랬나, 공방장.”

그녀 역시 기회만 있었으면 진즉에 했을 터였다. 안나 드 발자크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부전선 사령관을 노려봤다. 빅 더 휴고는 능글맞게 눈으로 웃으며 그 시선을 받아냈다. 노스트라담이 그들 사이로 말을 비집어 넣었다.

그 억지라고 생각 않는 게 바로 믿음입니다.”

안나 드 발자크는 예언자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기에 세상은 지나치게 발달해있었고 그만큼 타락해있었다. 과연 그녀가 머리를 떼어내고 돌아다니며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녀를 믿어줄 것인가. 믿음은 어려운 문제였다. 답을 찾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몇 시간 후 해일이 찾아왔을 때까지 천재를 고민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옵니다.”

나지막한 노스트라담의 목소리에 빅 더 휴고가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모두가 술렁이며 몸을 움츠릴 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안나 드 발자크는 전쟁광을 따라 앞으로 나섰다. 지안느는 주인을 보좌했다.

당신이 한 비유 말이야.”

감명 깊었나?”

전혀 느낌이 달라.”

빅 더 휴고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안나 드 발자크가 밝힐 수 있는 솔직한 감상이었다. 석양을 업은 해일은 땅을 울리며 모든 것을 덮쳐오는 붉은 바다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위해 몸을 던질 휴머노이드를 바라봤다. 지안느는 묵묵히 해일에서 눈을 떼지 않고 명령만 기다렸다.

지안느. 미안해.”

주인을 닮은 휴머노이드는 피조물에게 사과하는 주인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안느는 하나씩 차례차례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제가 자초한 일인 걸요.”

알긴 아는구나.”

저는 여전히 주인님을 꽤 싫어해요.”

그것도 알아.”

어린 남자 좋아한다는 소문 퍼뜨린 거, 저예요.”

……그건 몰랐는데.”

안나 드 발자크는 순간 지안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이 빠졌다. 휴머노이드가 주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행동을 한다니. 허나 숨길 수는 있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프로그램 상, 저 고백은 사실이라고 봐야했다.

?”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타당한 저 이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안나 드 발자크는 머리를 굴렸고, 지안느는 평소처럼 돌아온 그 모습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주인님은 재미로 저를 만드셨잖아요.”

말을 마친 지안느는 주인이 들고 있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해일을 향해 날았다. 곧 시야를 어지럽히는 강렬한 빛과 함께 거대하게 몰려오던 해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노스트라담은 잠잠한 바다 위 붉은 석양을 바라보며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죽어도, 자신들을 구원하는 성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끝난 줄 알았는데.”

?”

서부전선 사령관이자 제국의 존망을 결정지을 수 있는 남자, 빅 더 휴고는 자신 앞에 펼쳐진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많은 이들이 자기와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안나 드 발자크는 그런 그에게 무슨 문제될 것 있냐는 식으로 되물었다. 그녀의 옆엔 빈 찻잔에 밀크티를 따르는 지안느가 있었다.

아니, …… 날아갔잖나. 거대한 해일을…… 없앴고.”

그랬지.”

멀쩡한가?”

안나 드 발자크는 그 물음이 자신에게 묻는 건지, 지안느의 상태를 묻는 건가 고민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머리가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숙면도 취했고 나름 멀쩡한 편이었다. 그녀는 자연재해를 물리치고 돌아와 자기 할 일을 하는 휴머노이드에게 물었다.

멀쩡해?”

안 그랬으면 돌아오자마자 주인님 머리채를 잡았을 거예요.”

멀쩡하네.”

지안느는 눈썹을 한 번 올려 수긍을 하고 다시 토스트를 구우러 돌아갔다. 그 정도 일을 해내고 돌아온다는 점이 확정이라는 면에서 빅 더 휴고는 큰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확신했다.

내가 탐내던 무기가 저거였군. 무기장인이 만들어낸 궁극의 무기.”

무기가 아냐.”

매몰차게 말한 태도와 다르게 안나 드 발자크는 꽤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 미친 전쟁광이 지안느를 얻기 위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다. 허나 빅 더 휴고는 무섭도록 침착한 자였다. 섣부르게 판단하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차근차근 자신의 대계를 맞춰갔다.

무기가 아니라면 뭐지? 해일을 단 일격에 없애버리고 멀쩡하게 돌아오는 저것이?”

전 지안느예요.”

주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루이에게 토스트를 가져다주던 지안느가 직접 말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내뱉은 앙칼진 대답에 빅 더 휴고는 큼지막하게 미소를 걸었다.

네이밍 센스는 그냥 그렇지만, 그래도 무기지. 아무튼 황명일세. 다시 수도로 가야지. 오후에 출발할 테니 준비하게.”

……곧장 덮칠 줄 알았는데, 김빠지네, 당신.”

뻣뻣하게 굳어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안나 드 발자크의 말에 빅 더 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 떨어진 여자와는 해본 적 없지만 바란다면 해줄 수 있네. 독특한 경험일 것 같군.”

꺼져버려, 변태 새꺄.”

집어 던진 플라스틱 컵을 유유히 피해 빅 더 휴고가 방을 나서자 안나 드 발자크는 탁자 위 미모를 구겼다. 전쟁에 미친 서부전선 사령관은 절대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수도까지의 여정이 남았으니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터였다. 반면 노려지는 쪽의 지안느는 태연하게 주인의 빈 잔을 다시 채웠다.

수도로 가야겠죠?”

가야지. 문제는 그 다음이야.”

안나 드 발자크는 여전히 불안한 눈치인 루이의 질문에 입술을 곱씹었다. 황제가 전쟁광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을까? 답은 아니었다. 빅 더 휴고는 그를 가볍게 물리칠 것이다.

원한다면 다시 저를 사용하셔도 좋아요, 주인님.”

안나 드 발자크는 지안느를 무기로 보지 않았고 무기로만 봤던 지난날의 자신을 혐오했다. 지안느 역시 그것을 바라는 휴머노이드는 아니었다. 고작 인간 한 명이 무서워서 다시금 그녀를 무기 취급할 수는 없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야. 설령 황명이라도.”

어울리지 않게 폼 잡지 마세요. 어제 사과까지 해놓곤.”

지안느는 곧장 주인의 진심을 내쳤고, 안나 드 발자크는 돌아온 휴머노이드가 어딘가 고장 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수도로 돌아올 때까지 공방 정력의 일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빠졌다.

수고했네.”

여전히 비린내 가득한 식탁을 마주한 채,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머리가 없는 천재를 간단히 치하했다. 가만히 눈을 깔고 예를 표한 것과 다르게 안나 드 발자크의 속은 타들어만 갔다. 하는 둥 마는 둥 지나간 식사 시간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말을 꺼냈다.

휴고 교위를 막아주십시오

가능할 거라고 보는가?”

가능해야합니다.”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에게 빅 더 휴고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알게 모르게 자신을 압박하는 것은 물론 크고 작게 언제든 자신을 위협해왔다. 안나 드 발자크의 말은 황제 역시도 바라는 것이었지만, 그는 무기력했다.

짐이 왜 강력한 무기를 원했다고 생각하는가. 고작해야 꼭두각시 황제일 뿐인데?”

안나 드 발자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도에서 가만히 존재할 뿐인 황제가 무기를 원한다면 이유는 몇 가지로 추려졌다. 그중 하나는 위협적인 존재의 배제를 위해서였다.

짐에게는 자식조차 없다. 언제든 목숨을 잃는다면 그 누구든 새 황제가 될 수 있지. 어쩌면 자식을 만들어도 부질없을지 몰라.”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눈을 가늘게 떴다. 굴전을 집던 손이 멈췄다는 것이 그가 크게 반응했다는 증거였다.

무슨 수로?”

그 무기를 만들어오라는 황명이면 됩니다.”

무시할 테지.”

안나 드 발자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황제의 젓가락질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요. 당장 할 수 있는 걸 해야…….”

그렇다면 그가 원하는 걸 줘버리게.”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식탁 위에 올라있는 머리통에 대고 말했다. 안나 드 발자크의 붉은 입술이 단호하게 열렸다.

그럴 순 없습니다.”

황명이라도?”

또 욕먹기는 싫거든요.”

수저를 내려놓아 식사를 마쳤다는 의사를 확실히 보인 안나 드 발자크는 황제에게 인사를 한 후 자신의 머리를 들고 연회장을 나섰다.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은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고, 어부지리로 자기 자리를 위협하는 자를 견제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는 나름 계산이 확실하고 동시에 비열한 인간이었다.

황명이다! 안나 드 발자크 이하 두 명은 당장 공방으로 돌아가 짐이 맡긴 작업에 착수도록 하라!”

황제의 외침을 들은 빅 더 휴고는 어이가 없었다. 저 무기력한 정점에게 기대는 건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수였다. 게다가 그의 바람이 이뤄질 발판까지 마련해준 샘. 전쟁광은 짐승처럼 칼을 뽑아들었다.

거절한다.”

황명을 무시하는 것이냐, 빅 더 휴고 교위!”

그렇다. 그리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제 제국 또한 내줘야겠다.”

선언과 동시에 빅 더 휴고는 칼을 집어던졌다. 정확히 날아간 칼끝이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이 타고 있던 황제마의 미간을 맞췄다. 굴러 떨어지는 작은 남자를 보며 서부전선 사령관은 털이 덥수룩한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를 따르는 자와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자가 뒤엉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빅 더 휴고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자네가 만들어준 엉덩이가 나는 아주 마음에 드네, 안나.”

걷어 차버릴 거야.”

살 밖에 없는 엉덩이라는 부위에 작은 공장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자네는 역시 변태가 분명해.”

공방 정력의 일원들 앞에 위풍당당하게 선 전쟁광은 손을 뒤로 돌려 엉덩이를 몇 번 주물렀다. 곧 그의 손에는 주먹만 한 폭탄이 들려 나왔다. 위험을 감지한 지안느가 주인과 제자의 앞으로 나섰다.

무기로 안 쓴다고 하지 않았나?”

주인님을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이 년 전, 안나 드 발자크는 한창 실험할 대상을 찾고 있었다. 마침 한 털북숭이 남자가 찾아왔고, 그녀는 그가 바라는 대로 새 엉덩이를 달아주었다.

거기 천재 무기장인이 만들어낸 첫 번째가 이 엉덩이지. 그럼 휴머노이드 자네는 내 후배가 되는 건가? 멋지군.”

당신이 이렇게 미친 작자인 줄 알았으면 만들어주지 않는 거였어.”

미치지 않았더라도 그러지는 말았어야지, 공방장. 그 머리를 떼어낸 순간부터 자네 역시 미쳐버린 게야.”

빅 더 휴고의 손에서 폭탄이 떠나자마자 지안느는 곧장 손을 길게 휘둘러 그것을 쳐냈다. 황궁 오른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몇 명이나 비참하게 죽었을까. 적어도 그쪽으로 황제 보나파르트 지 팍이 도망가다 그대로 소멸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황제치고 비참한 정도가 꽤 만족스럽다고 여기며 전쟁광은 다음번 폭탄을 꺼내 던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길 바라네, 안나. 사람은 머리 없이 살아갈 수 없어. 그런데 자네는 아니지.”

머리를 떼어내도 자기 뒤통수는 직접 볼 수가 없었다. 안나 드 발자크는 자신이 맞닿은 남들과 똑같은 한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궁금해 하네. 자네가 어떻게 음식을 섭취하는지, 호흡하는지, 생각하는지, 그리고 살아있는지.”

안나 드 발자크는 수없이 받아온 인터뷰에서 밝혀왔다. 듀라 뭐시기는 모르겠지만, 자신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머리가 없는 여자는 그렇게 천재가 되었다.

천재라면 가능하다. 굉장한 믿음이지 않은가. 그리고 난 나름 평범한 사람의 한 명으로서 자네가 죽을지 궁금하네.”

평범하긴 개뿔.”

자네는 앞에 그 무기를 내게 주고 편안히 비참해지면 되네.”

이번엔 대검을 꺼내든 빅 더 휴고였다. 안나 드 발자크는 자기 앞을 가로막은 휴머노이드를 흘끗 바라봤다. 지안느는 무기가 아니었고, 싸우게 둘 수는 없었다. 저 미친 작자도 그걸 알기에 안심하고 달려드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녀는 다른 이름을 불렀다.

루이.”

?”

일 좀 하자.”

루이는 부들부들 떨면서 스승의 뒤에서 나왔다. 정말 나오기 싫었지만, 스승의 명령이었고 꽤 위험한 순간이었다.

제자라고 먼저 보내는 건가? 대단한 인성이군.”

비웃는 목소리에 루이가 불안한지 고개를 휙 돌려 자기 스승을 바라봤다. 안나 드 발자크는 한숨을 쉬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제자의 이마를 쥐어박았다. 그리곤 들고 있던 머리를 그의 귓가로 가져가 조용히 속삭였다.

집어던져. 네 팔이라면 저기까지 닿을 거야.”

뭘요?”

내 머리통.”

제자가 놀란 눈이 되건 말건 안나 드 발자크는 그에게 머리를 넘기고 뒤로 빠졌다. 전쟁광에게 죽는 건 비참하니 자살하려는 건가 싶었지만, 루이는 우선 자기 스승을 믿어보기로 했다. 입이 험하고 해괴한 짓을 워낙 많이 벌이는 여자였다. 그는 오른쪽 기계 팔을 휘둘렀다.

빅 더 휴고는 작은 소년이 자신에게로 뭔가를 던지는 것을 봤다. 그는 대검을 휘둘러 막으려 했지만, 제대로 상황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것이 자기 배 근처까지 날아온 상태였다.

안나 드 발자크는 벌리고 있던 입 안에 무언가 닿자, 그대로 입을 세게 다물었다. 물컹하고 진득한 무언가가 그녀의 입안에 가득 퍼졌다.

사내의 음부를 물고 있던 머리가 폭발했다. 이어진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한 템포 늦은 비명이었다.

말 한대로 독특한 경험을 했는데, 느낌이 어때?”

빅 더 휴고는 끔찍한 고통에도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은 온 몸을 개조하고 천재의 무기작품까지 달린 지상최강의 사내였다. 게다가 질문의 주인은 조금 전 폭발한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무슨……, 어떻게…….”

어쨌거나 당신 말마따나 나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들어낸단 말이야. 이 년 전 무기보다 좋은 무기가 없겠어? 당신, 천재 손바닥에서는 꽤나 구식이라고.”

쓰러진 전쟁광의 눈에 미치도록 눈부신 얼굴이 있었다. 그 머리는 목 위에 온전히 달려 있었다. 어느새 홀로 다가와 앞에 쪼그려 앉은 안나 드 발자크였다.

비겁한……. 머리를 감추고 있…….”

감추고 있었을 수도 있고, 또 새로 붙인 건지도 모르지. 뭐든 나라면 가능해. 하지만 네 건 아니거든. 빅 더 휴고, 이 고자 새끼야.”

고간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절명한 빅 더 휴고의 시체에 침을 한 번 뱉은 안나 더 발자크는 그대로 일어났다. 그녀의 머리는 다시 온데간데없었다. 정말 감춘 건지 새로 붙였던 건지, 그녀만이 알고 있었다. 루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스승을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떻게 저렇게 끔찍한 짓을.”

어차피 가망 없는 불알이었어.”

안나 드 발자크는 제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작은 어깨가 움찔, 하고 떨었다.

누구보다 커다란 사람이 되겠다면서 내 공방으로 찾아왔지? 마침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

루이는 스승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죽은 것 같거든. 그러니까 네가 대신 제국을 짊어져. 꽤 무거우니까 커다란 사람이 해야 해.”

스승인 안나 드 발자크의 선언에 평범했던 열네 살 소년 루이는, 제국 태양의 황제가 되었다.

좀 도와주지.”

공방 정력의 무기장인 안나 드 발자크에게는 머리가 없었다. 그녀가 어떻게 말을 할 수 있고, 숨을 쉴 수 있고,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녀 말고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이 천재가 생각하기에, 살아가는데 있어서 머리가 달려 있는가아닌가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안나 드 발자크는 웃고 싶었다. 그래서 웃었다.

빌어먹을 신분상승한 황제의 교사라든가.”

알랑방귀 뀌셔도 개인 정원 같은 거 안 줄 거니까요.”

이제부터는 돈도 많고 꾸미면 또 괜찮을 거고 나이도 어리네요. 성격만 고치면 딱 인데요, 주인님?”

기괴하게도,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211 단편 쉽고 간단한 확률게임 Mr.Nerd 2016.02.07 0
2210 단편 악몽 MadHatter 2016.02.04 0
2209 단편 물질의 사제 니그라토 2016.01.26 0
2208 단편 크로스로드 민경일 2016.01.10 0
단편 안나 드 발자크의 개념상실 iCaNiT.A.Cho 2016.01.06 0
2206 단편 무림제일고 치무쵸 2016.01.02 0
2205 단편 [심사제외] 황혼의 요람 excelion 2015.12.31 0
2204 단편 도깨비 가면 레몬 2015.12.26 0
2203 단편 원 갓(One God) 니그라토 2015.12.23 0
2202 단편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개별난방 2015.12.19 0
2201 단편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 mirror 2015.12.18 0
2200 단편 당신을 환영합니다 장피엘 2015.12.16 0
2199 단편 약물요법ZA 목이긴기린그림 2015.12.05 0
2198 단편 호접지몽 딱따구리 2015.12.04 0
2197 단편 휴먼 에스컬레이션 민경일 2015.12.02 0
2196 단편 뒷골목의 성형내과 Mr.Nerd 2015.12.02 0
2195 단편 소희가 외계인이었던 시절 목이긴기린그림 2015.11.30 0
2194 단편 속 검녀전 이니 군 2015.11.27 0
2193 단편 브레인스톰 민경일 2015.11.22 0
2192 단편 고리, 幻 장피엘 2015.11.16 0
Prev 1 ...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