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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당신을 환영합니다

2015.12.16 09:1712.16

당신을 환영합니다

 


 

1

지하도를 걸었다. 개찰구 주변만 사람들로 북적일 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한산했다. 곧 만남의 장소로 보이는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그곳은 야외무대처럼 계단에 둘러앉아 구경하게끔 되어 있으며, 벽면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무명가수의 공연이 삼십 분 전에 끝났다는 걸 알았다. 좀 더 일찍 왔으면 공연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시간은 밤 아홉 시를 향해 갔다. 이제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소녀는 개찰구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한참을 걸어도 개찰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쪽이 아닌 모양이다 생각하고 되돌아 걸어도 상황은 여전했다. 그 사이에 이십 분이 지났다. 아홉 시 이십 분이면 늦은 시간도 아닌데,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수상쩍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지하도에서 우왕좌왕하다 보니 방향감각을 잃었다. 다리는 아프고 보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두려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그때 뒤쪽에서 어렴풋이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드디어 사람들이 하나둘 보였다. 소녀는 낯선 광경을 목격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사람들이 바닥에 누워 잠을 잤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왜 하필 지하도 바닥에 누워 잠을 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9번 출구라는 글자가 적힌 계단 주위에도 사람들이 종이상자를 깔고 잠을 잤다. 주변에는 구겨진 신문지와 빈 소주병이 나뒹굴었다. 사람들은 안주도 없이 독한 소주를 들이붓고 잠든 게 분명했다. 소녀는 지하도 양쪽으로 줄줄이 누운 사람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걸었다. 그곳에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는 사람, 벌써 곯아떨어져 코를 드렁드렁 고는 사람, 낡은 가방을 보듬고 누울 곳을 찾아 서성이는 사람, 서로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사람, 두세 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질긴 오징어를 씹으며 독한 소주를 마시는 사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소녀는 바닥에 누운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나 덮치면 어쩌나 걱정했다. 하지만 바짝 붙어 지나가도 누구 한 사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시선을 피하는 듯했다. 문뜩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얼굴이 시커먼 여자가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분명히 젊은 여자인데, 머리가 희끗희끗해 노인처럼 보였다.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말라비틀어진 젖가슴을 붙잡고 빠는 아이는 영양실조였다.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아이를 낳았나 몰랐다. 초라한 행색만 보더라도 아무런 대책이 없어 보이는데, 아이가 아프지 않고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을지 의문이 일었다.


저쪽에서 한 남자가 다리를 절뚝절뚝 절며 걸어왔다. 잘 먹지 못해 남자도 삐쩍 말랐으며, 몇 겹을 껴입고 그 위에 두꺼운 외투를 걸쳤다. 이제 겨우 겨울 문턱을 지났을 뿐인데, 남자를 보고 있으니 한겨울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마디 하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외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소보로빵이었다. 유통기한이 지나 버린 걸 가져온 듯 지저분해 보였다. 남자는 빵에 묻은 오물을 소매로 닦아 여자에게 건넸다. 여자는 남자가 건네준 빵을 움켜쥐고 한 입 베어 먹었다.


저런 더러운 빵을 먹다니!”


소녀는 더러우니 먹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목에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소녀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허연 노인이 돌아다니며 누울 곳을 찾았다. 그새 가운데 통로까지 콱 차 누울 곳이 보이지 않았다. 노인은 출구 쪽 계단을 올려다보고는 다시 이쪽으로 걸어와, 비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으려 했다. 다리를 쭉 뻗고 눕기에는 다소 좁아 보이는데, 노인은 개의치 않고 낡은 모포를 바닥에 깔았다. 그제야 먼저 자리를 잡은 남자가 알아차리고 발길질을 했다. 그래도 노인이 나가지 않자 벌떡 일어나 미친 영감탱이야, 저리 안 꺼져!” 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사정없이 발로 찼다. 노인은 얼굴을 몇 대 얻어맞고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다행히 코피는 터지지 않았으나 콧등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은 옆에서 싸움이 벌어져도 구경만 하고 있을 뿐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얻어터지는 노인을 경멸하는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노인은 바닥에 펼쳐놓은 낡은 모포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가방을 들었다. 소녀는 사람들을 피해 반대편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노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어디서 본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 잠깐만요!”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린 소녀가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 지상낙원에 있을 때 교수님이라 불렸잖아요.”


교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무언가 묻고 싶은 듯한데, 입을 선뜻 열지는 않았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주위에는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늙은 교수는 그제야 안심하고 네가 지상낙원을 어찌 아느냐?” 하고 물었다.


엄마와 함께 그곳에 간 적 있어요.”

그런데 왜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구나.”

내가 그곳에 몇 번 가지 않아서 잘 모를 거예요.”

잠깐만! 이제야 생각이 나는구나. 재작년 봄에 젊은 여자가 어린 딸을 데리고 지상낙원에 들어온 적 있었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너는 분명 그 젊은 여자가 데려온 아이일 게다. 나중에 여자는 딸아이를 버리고 혼자 지상낙원에 들어왔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자는 그곳 사람들한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많이 힘들어했지.”


늙은 교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과거를 회상하듯 말했다.


그곳에 들어오려면 자신이 소유한 건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그곳에 들어온 순간 가족과도 인연을 완전히 끊어야 하고. 그래야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어 떠나는 일이 없을 테니까. 그곳에 들어와 사는 사람은 다들 그렇게 했고, 나 역시도 살던 아파트까지 팔아 그곳에 바쳤다.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살던 아파트도 팔지 않고, 거의 빈손으로 들어오다시피 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가는 곳마다 따가운 시선이 따라다니고, 강제로 쫓겨나지 않은 것만 해도 여자한테는 큰 행운이었지.”


그곳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사전에 철저히 조사를 벌여, 남은 재산이 있으면 도로 내보내 찾아오게 했다. 그럼 대부분 숨겨놓은 돈을 한 푼 남기지 않고 가져오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강제로 내쫓지는 않았다. 지상낙원이라 하더라도 지저분하고 하기 싫은 일이 있게 마련이라, 그런 일은 소녀의 엄마처럼 명령에 따르지 않고 빈손으로 들어온 사람한테 시켰다. 사람들한테 인정도 못 받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해도, 그들은 그곳이 지상낙원이라 믿고 만족하며 살았다.


만일 중간에 생각이 바뀌어 도망치면 어떻게 하죠?”


소녀는 햇볕이 들지 않는 골방에 갇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온갖 고초를 겪은 후 반미치광이가 되어 쫓겨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지 않으나, 도망친 사람을 끝까지 쫓아가 잡아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당장에라도 보내줄 테니, 나가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 찾아오라 말하지. 그러나 강제로 쫓겨나는 사람은 있어도 스스로 찾아와 나가겠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나가봐야 따뜻하게 반겨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굶어 죽을 게 빤해 스스로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들어갈 때 한 푼 남기지 않고 내놓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못 떠났다. 돈이든 값나가는 물건이든 그곳에 한번 내놓으면 되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지 않고 끝까지 붙어 있어야 했다.


강제로 쫓겨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죠?”

게으름 피우고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 그들에겐 조건이 하나 붙는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지상낙원에서 보고 들은 걸 말하지 않는 것이다.”


조건을 어기면 이유를 불문하고 목숨을 끊어 땅속에 묻어버렸다. 소녀는 땅속에 묻는다는 말에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그러니 너도 누가 지상낙원을 물으면 무조건 모른다 해라. 그곳 사람들이 찾아와 시험 삼아 물어볼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교수님은 이 시간에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지상낙원에서 교수님 같은 분을 강제로 내쫓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소녀는 낡은 모포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끼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고 늙은 교수가 지상낙원에서 쫓겨났다는 걸 느꼈다. 늙은 교수는 원칙대로 재산을 한 푼 남기지 않고 모두 갖다 바쳤고, 사람들을 가르칠 때도 피를 토할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았으며, 지상낙원에 들어와 사는 걸 자랑스러워했다. 그런 사람이 지상낙원에서 쫓겨나 잠잘 곳조차 찾지 못하고 밤거리를 떠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야긴 별로 하고 싶지 않구나.”



 

2

십 년 전, 낯선 사람들이 교수실로 찾아와 모든 사람이 차별받지 않고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는 말을 들었을 때, 일가를 이루지 않아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서른둘에 처음 교단에 선 후 삼십 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쳤으니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늙은 교수는 더 이상 자리에 집착하지 않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처음에는 들어올 때 모든 재산을 바쳐야 한다는 규칙도 없었고,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몸이 불편한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오면 농사지을 땅도 공평하게 나눠 갖고, 아픈 사람은 돈 한 푼 안 받고 치료해주며, 잘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구분 없이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집에서 잠을 자니,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지상낙원이었다. 사람들은 그곳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밖으로 나가면 곧 죽을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감는 그 날까지 내쫓지만 말아 달라며 숨겨놓은 재산까지 모두 찾아와 내놓았다. 나이 많은 노인네들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자 삽시간에 퍼져 젊은 사람들까지 무소유를 실천했다. 그 이후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소유한 재산을 한 푼 남기지 않고 내놓게끔 규정지었다. 새로운 규칙이 정해지자 늙은 교수는 미련을 버리고 그동안 모은 재산을 탈탈 털어 내놓았다. 그때는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으므로 주머니에 한 푼 들어 있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사람들을 모아놓고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답게 사는 삶인가를 가르치는 데 힘썼으며, 사람들은 그의 강의를 듣고 밤새 고민하고 토의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서 그를 교수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사람이 차츰 늘어났다.


처음 삼 년은 해야 할 일이 많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빴으며, 다음 해 봄 지상낙원에 첫 위기가 찾아왔다. 지도자가 갑자기 변해 울타리를 치고 사람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불만을 표출하자, 심복들을 보내 이 모든 건 여러분을 감시하려는 게 아니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늙은 교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지상낙원이 무너지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하므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감시자의 필요성을 알렸다. 늙은 교수까지 나서서 그렇게 말하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평소처럼 땅을 일구고 자신이 수확한 걸 나누어 먹었다.


그때까지 늙은 교수는 지도자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지도자가 처소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니 볼 기회가 없고, 보여주지도 않는 얼굴 굳이 봐서 뭐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첫 위기를 넘기고 삼사 년이 또 금세 지나갔다. 그사이에 지상낙원에 들어온 사람이 부쩍 늘었다. 소녀의 엄마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렇게 큰 소동 벌어지지 않고 잘 지나가다 작년 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가족도 없이 혼자 지상낙원에 들어온 한 소녀가 아이를 가졌는데, 지도자 아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소녀는 어린 나이에 임신했다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어린 소녀의 죽음이 가져다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늙은 교수는 어린 소녀의 죽음을 계기 삼아 지도자 실체를 파헤쳐 비리가 드러나면 만천하에 알리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직접 지도자를 없애고 싶었다. 그러나 감시가 심해 지도자가 기거하는 방까지 가기가 쉽지 않았다. 잘 아는 감시자를 따로 불러 물어봐도 모른다 하고, 방법은 한 가지뿐 심복들 중 한 명을 구워삶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지나가다 지도자가 병들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지도자가 어린 소녀들을 자꾸 침실로 불러들이는 이유도 죽기 전에 지상낙원을 물려줄 자식을 남기기 위함이라고 했다. 늙은 교수는 지도자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돼 무척 기뻤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도록 지도자가 죽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올해 봄, 늙은 교수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생각하고, 감시자를 불러 심복들 중 아무나 한 명 소개해 주라고 말했다. 답변은 일단 긍정적이었다. 친하게 지내는 심복이 한 명 있는데,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볼 테니 가서 기다리라 했다. 늙은 교수는 고맙다 말하고 돌아섰다.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려 기분이 좋았다. 그날 밤 평소처럼 편히 누워 잠을 자는데, 감시자들이 갑자기 나타나 눈을 가리고 끌고 나갔다. 앞을 볼 수 없으므로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밤새 두들겨 맞고는 혼절해 버려졌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 소리를 듣고 깨어나 보니 주택가 공원 벤치에 누워 있었다.





 

소녀가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열 시 이십오 분을 가리켰다. 어린 소녀에게는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안 되니까 이야긴 그만하고 돌아가라. 기다리는 식구도 생각해야지.”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집에 들어가도 맞아줄 사람 없으니까요.”


소녀는 열 시 반이 다 되도록 피곤한 줄 모르고, 잠을 막 자고 일어난 듯 정신이 말짱했다. 요즈음 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 기억이 없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잘 오지 않고, 스르르 잠들었다가도 두세 시간 지나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럼 피곤해 시도 때도 없이 꾸벅꾸벅 졸아야 하는데, 학교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졸음을 전혀 못 느꼈다. 밤이 찾아와 어둠이 짙게 깔려도 잠은 오지 않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으니, 한밤중에도 밖에 나가고 싶어 창문을 열고 기웃거렸다. 그 정도면 상태가 꽤 심각한데, 소녀는 자신이 불면증 환자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설마 집에 너 말고 아무도 없는 건 아니겠지?”

새엄마랑 함께 사는데, 밤에 일을 나가요. 그래서 늘 혼자예요. 아빠는 이곳 근처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있고요. 교통사고를 당했거든요.”


소녀는 생각날 때마다 오늘처럼 혼자 전철을 타고 와 아빠 얼굴을 보고 갔다. 새엄마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


안 됐구나! 아빠가 빨리 회복하길 바라 마.”


늙은 교수가 진심으로 소녀를 위로했다.


아빠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영혼을 상실했거든요.”

영혼을 상실하다니. 아빠가 식물인간 상태인 모양이구나?”

새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간호사 언니들은 아빠 뇌가 죽었다고 말해요. 표현만 다를 뿐 의미는 같으니까요.”

알았으니, 이걸 가지고 가서 음료수나 하나 뽑아 와라. 나는 저쪽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늙은 교수가 낡은 외투를 뒤져 지폐 한 장을 꺼냈다. 소녀는 지폐를 받지 않고 늙은 교수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실내는 불이 꺼지고 간판만 켜진 꽃집 옆에 음료수 자판기가 한 대 세워져 있었다. 꽃집에서 주로 파는 건 조화였다. 그래서 가게 앞을 지나치면 인공의 향기가 콧속을 자극했다. 소녀가 꽃집을 향해 달려가자, 늙은 교수는 손에 쥔 지폐를 도로 주머니에 넣고 불 꺼진 상가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가게가 일제히 문을 닫아 한낮처럼 훤하지는 않아도 간판이 켜져 있으니 앉아서 이야기 나누는 데는 아주 문제없었다. 그때 안쪽에서 누구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 교수님이군요. 저쪽에는 자리가 없던가요?”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얼굴만 살짝 내밀었다.


자리를 잡고 누우려니까, 옆에 사람이 발로 차면서 내쫓더군.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도로 이곳으로 왔지.”


늙은 교수는 옷가게 쪽에 있는 종이상자를 몇 장 가져와 바닥에 깔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내가 뭐라던가요. 가봐야 아무도 반기지 않을 거라 했잖아요.”


남자는 모포를 뒤집어쓰며 돌아누우려다, 저 아저씨는 누구냐는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걱정할 것 없다. 나쁜 아저씨 아니니까.”


소녀는 들고 있는 음료수 캔을 늙은 교수한테 건네고, 모포 밖으로 얼굴을 내민 남자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 남자는 늙은 교수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교수님이 잘 아는 애요?” 하고 물었다.


잘 아는 아이는 아니고, 엄마와 동행해 지상낙원을 몇 번 다녀간 모양이야. 그때를 안 잊고 있다가 나를 보고는 금방 알아차리더군.”


남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므로 반대편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소녀가 저 아저씨도 지상낙원을 잘 아는가 봐요?” 하고 묻자, 잘은 모르고 그런 곳이 있다는 정도만 안다고 했다.


눈이 침침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가보도록 해라.”

하나만 물어보고 갈게요. 지도자라는 사람, 어떤 사람이에요? 교수님은 지도부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으니까 잘 알 것 아네요?”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겠니. 나도 지도부 사람들 부탁을 받고 가르치기만 했지, 그들과 가깝게 지낸 건 아니란다. 지도자 방에는 심복 몇 사람만 드나들고, 우리 같은 일반인은 근처도 못 오게 했으니까. 내가 지상낙원에서 쫓겨난 것도 그것 때문이다. 너처럼 궁금해 알려고 하다가 지도부 사람들한테 들켜 실컷 두들겨 맞고 쫓겨났으니까.”

그러니까 교수님도 지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네요? 나는 보통 사람과 다르게 생겼다니까 거대한 벌레를 떠올렸거든요.”

딱정벌레나 나비 같은 곤충 말하는 거냐? 보통 사람과 다르게 생겼다 해도, 설마 곤충같이 생기기야 했겠니. 그래도 사람인데.”


그래도 사람인데, 하고 말하는 것이 늙은 교수도 지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소녀가 생각하는 지도자는, 딱정벌레나 나비 같은 곤충이 아니라,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유충 같은 모습이었다. 엄마를 따라 지상낙원에 갔을 때, 아이들이 모여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지도자는 벌레를 닮았대.” 하고 속삭이는 말을 들었다. 지도자가 얼굴을 비치지 않으니까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지어서 한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으나, 아이들이 하도 그럴듯하게 말하니까 사실로 느껴졌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고 땅속에 잠든 유충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처소에 숨어 나오지 않지, 딱정벌레나 나비 같은 모습이라면 숨어 지낼 이유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까 정말 가봐야겠네요. 내일 다시 여기로 오면 교수님을 만날 수 있나요?”

그건 장담할 수 없다. 보다시피 나야 아무 데서나 자도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물어볼 게 있으면 또 올 테니까 될 수 있으면 여기에 계세요. 저쪽에 사람 많은 데는 가지 말고요.”


소녀는 곧장 일어나 9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늙은 교수는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보고 있다가, 이내 바닥에 모포를 깔고 누웠다. 순간 몽둥이로 얻어맞은 왼쪽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어금니를 악물고 참았다. 통증은 보통 새벽녘에 찾아오는데, 지금부터 이 모양이면 오늘 밤에도 옳게 잠들기는 틀렸다. 늙은 교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나, 모포를 둘둘 말아 옆구리에 꼈다. 누워서 괴로워하느니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나았다. 그 사이에 잠을 깬 남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저 영감! 저러다 완전히 미치고 말지.” 하고 혼잣말을 했다. 부랑자들이 늙은 교수를 발로 차고 못 오게 하는 이유는 자다가 갑자기 일어나 소리를 지르기 때문인데, 그럼 옆에 사람들까지 잠을 깨 신경질을 부리며 소리 못 지르게 누가 가서 영감탱이 주둥이를 막아버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남자는 그런 늙은 교수를 볼 때마다 자신이 당한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3

소녀는 무용 연습을 마치고 나와 시계를 보았다. 여섯 시 십 분이면 버스가 미리 도착해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데, 다른 학원 버스만 대기하고 있다가 무용을 마치고 나온 아이들을 태우고 떠났다. 다시 학원에 들어가 버스가 언제쯤 도착하느냐고 물으려다 귀찮아 지하도를 향해 걸었다. 며칠 전 보았던 늙은 교수를 다시 만나볼 생각이었다. 늙은 교수를 만나려면 9번 출구가 있는 역까지 가야 하는데, 아빠가 입원해 있는 병원 근처이므로 노선표를 보고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젊은 아가씨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그때 전철이 곧 도착하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라는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 전철에 올라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까닭에 서 있는 사람이 많은데, 다음 역에 도착하면 객실이 사람들로 가득 차지 않을까 싶었다. 소녀는 중간쯤 가서 손잡이를 붙잡고 멈춰 섰다. 지금 가면 늙은 교수를 만날 수 있으려나 몰랐다. 그날 늙은 교수가 9번 출구에 나타난 시간은 밤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였다. 지금 시간이 여섯 시 삼십 분이니까 일곱 시 정각이면 목적지 역에 도착했다. 늙은 교수가 9번 출구에 나타나는 시간을 아홉 시로 가정하더라도 어디 가서 두 시간을 흘려보내야 했다. 두 시간은 어린 소녀가 흘려보내기에는 꽤 긴 시간이었다.


전철은 정확히 일곱 시 오 분에 목적지 역에 도착했다. 그 사이에 승객이 가득 차 비집고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소녀는 힘겹게 전철을 빠져나와 계단을 올랐다. 어떤 식으로든 두 시간을 흘려보내야 하는데, 우선 9번 출구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야 두 시간 뒤에 다시 오더라도 헷갈리지 않았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서 있는 곳은 4번 출구였다. 이쪽은 죄다 짝수뿐이니, 9번 출구를 찾으려면 반대편으로 건너가야 했다. 소녀는 그렇게 믿고 반대편으로 건너갔다. 역시나 3번 출구가 나왔다. 5번 출구를 가리키는 화살표를 보고 쭉 걸으면 9번 출구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소녀는 걸음을 재촉했다. 5번 출구를 지나 드디어 7번 출구에 이르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9번 출구다 생각하고 가는데, 아무리 걸어도 9번 출구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 걷다 이상해 돌아보니 긴 터널 같은 지하도를 혼자만 걸었다. 다른 곳은 사람들로 미어터질 지경인데, 이곳은 왜 아무도 없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 9번 출구를 분명히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 잠을 자는 모습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눈에 선했다. 그러니까 의심하지 않고 찾아 나섰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면 9번 출구가 정말로 있는지 안내판을 먼저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9번 출구가 나오지 않나 몰랐다. 지난번과 똑같은 일을 두 번 겪다 보니 정신이 몹시 혼란스러웠다. 순간 이곳 지하도에 9번 출구는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오랫동안 9번 출구가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날 밤 유령을 봤다는 건데, 그게 사실이라면 지하도에서 만난 늙은 교수 또한 유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날 밤 늙은 교수와 나눈 이야기를 또렷이 기억했다. 그러니 유령은 절대로 아니었다. 소녀는 방향을 틀어 조금 전 지나쳐 온 7번 출구를 향해 뛰었다. 낯선 곳을 혼자만 걷는다고 생각하니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뛰어도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7번 출구라도 나와야 하는데, 보이는 건 끝없이 이어진 하얀 벽이 전부였다. 소녀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시계를 보았다. 느낌은 십 분 아니면 십오 분쯤 지난 듯한데, 여덟 시 오 분을 가리켰다. 목적지 역에 도착한 게 일곱 시 오 분이니까, 이곳까지 오는 데 한 시간이 걸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같은 속도로 시간이 흘러간다면 아홉 시뿐만 아니라 열 시도 금방 지나갔다. 그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고, 시계가 제멋대로든가 자신이 엉뚱한 곳에 들어와 있든가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시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고장 난 적 없고, 화살표 방향만 보고 똑바로 왔으므로 엉뚱한 곳에 들어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염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도시에 있는 지하도에서 듣는 염소 울음소리는 환청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므로, 소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 생각하고 걸으려는 찰라 다시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는 염소 울음소리였다. 그렇다면 근처 어딘가에 염소가 있다는 말인데,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지하도에서 염소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었다. 소녀는 염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이미 방향 감각을 잃어버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염소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곳에 가면 염소가 나오든 염소를 치는 목동이 나오든 할 것이었다.


소녀는 염소 울음소리를 좇아 무작정 달렸다.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한참 달리다 보니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두 곳 모두 똑같이 생겼는데, 왼쪽이 좀 더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은 길이면 조금이라도 더 밝은 쪽이 낫지 않을까 싶어 오른쪽을 선택해 달렸다. 한참 달리다 보니 염소 울음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선명하게 들렸다. 그건 염소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 시간 사람들이 모여 있는 9번 출구에 늙은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아 다들 늙은 교수가 굶어 죽거나 시설에 들어간 줄 알았다. 이곳에 모인 사람은 대부분 모포를 뒤집어쓰고 누웠으며, 일부만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셨다. 그들 중에는 부랑자들이 대장이라고 부르는 사내도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늙은 교수를 발견하고 대장! 저기 봐요.” 하고 소리쳤다. 대장은 고개를 돌려 더벅머리 사이로 보이는 늙은 교수를 뚫어지게 보았다. 뒤에 무언가 따라오는 것 같아 자세히 보니 검은 염소였다.


염소를 데리고 왔군!”


대장 옆에 앉은 남자 역시도 늙은 교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 했다. 눈만 붙이고 있을 뿐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도 염소를 데리고 왔다는 말에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이봐요, 교수님! 염소는 어디서 훔쳐온 거요?”


처음 늙은 교수를 발견한 사내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훔쳐온 게 아닐세. 스스로 따라온 게지


늙은 교수는 어느새 근처에 이르러 멈춰 섰다. 염소 목에 줄이 감기지 않은 것이 정말로 스스로 따라온 듯 보였다.


사람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는다니, 신기한 놈이군.”


사내가 겁을 줘 내쫓으려 했다. 하지만 검은 염소는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설마 여기서 염소를 기르려고 데려온 건 아니겠죠?”


대장 옆에 앉은 남자가 종이컵을 바닥에 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염소한테 뭘 먹이나. 보다시피 여긴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콘크리트 바닥뿐이잖아.”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에 보니까 염소가 종이를 잘 먹더군.”

종이야 사방에 널렸으니, 신문지라도 잘게 찢어서 먹이면 되겠네.”

그럼 똥은 누가 치우고?”

똥은 교수님이 치워야지, 누가 치워!”

염소 똥 치우는 교수님이라, 그거 말 되네! 하하하!”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때까지 대장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장! 정말로 저 인간이 여기서 염소를 기르게 내버려둘 거요?”


옆에 앉은 남자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대장을 보았다.


안 될 것도 없지. 여러분이나 여기 있는 염소나 다를 것 하나 없으니까. 각자 옆에 있는 사람 머리에 콧구멍을 바짝 들이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셔 봐. 어때? 지독한 냄새가 나지 않아? 여기 있는 염소보다 더 심한 냄새 말일세.”


늙은 교수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그의 눈에는 길바닥에 누워 자는 부랑자나 주인을 잃고 돌아다니는 염소나 다를 바 없었다. 몸이 심하게 망가져 골골거리는 사람을 보자면 오히려 염소보다 못했다. 염소는 씩씩하게 잘도 돌아다니는데, 저들은 다리에 힘이 없어 살짝만 밀쳐도 피식 쓰러졌다. 그리고 말하는 입이 더러운 저들보다 말을 못하는 염소가 백번 나았다.


저 미친 늙은 교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보다 저 지저분한 염소가 더 낫다는 것 아냐?”

헛소리 못하게, 누가 가서 저 늙은 교수 입을 짓밟아버려!”

오래 사니까, 이제 별놈의 소릴 다 듣네.”

그러게 말이야. 염소보다 못하다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야지.”


주위를 보니 다들 흥분해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했다.


다들 입 좀 다물지 못해!”


그때까지 한마디 않고 있던 대장이 소리를 지르자, 다들 입을 다물고 눈치만 살폈다.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니까 염소보다 못하다는 소릴 듣는 것 아냐. 솔직히 우리가 저 염소보다 나은 게 뭐가 있는데? 한 가지라도 있으면 그 잘난 주둥이로 뭐라고 말들 해봐!”


웅성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주변이 잠잠해지자 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봐요, 교수 양반. 조금 전 염소가 스스로 따라왔다 했는데, 그놈의 염소를 어디서 발견했는지, 그 이야기나 들어봅시다.”

대장! 미친 교수 말 들어봐야 귀만 아프니까 당장 내쫓아버려요.”


대장 옆에 앉은 남자만 마땅찮은 표정을 지을 뿐, 다른 사람들은 늙은 교수의 말을 듣고 싶은 눈치였다.


내가 며칠 안 보인 까닭부터 들려줘야겠군. 그래야 이야기 순서가 맞으니까. 요 며칠 계속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잠을 한숨 못 자고 떠돌아다녔지. 그러다 보니 주머니에 든 돈도 다 떨어지고, 다리가 뻐근해 더 이상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지.”


그때 늙은 교수 눈에 새 건물이 하나 보였다. 사 층 높이의 제법 큰 건물이었는데, 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를 보고 교회 건물이라는 걸 알았다. 늙은 교수는 배가 너무나 고파 뭐라도 얻어먹을 게 있지 않을까 싶어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평일 한낮이라 사람이 몇 명 없을 줄 알았는데, 꽤 많은 사람이 교회 안에 있었다. 그들은 자리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늙은 교수를 발견하고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 가장 젊은 남자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늙은 교수의 눈은 젊은 남자를 향해 있으나, 귀는 뒤쪽에 있는 사람들한테 쏠려 있어,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명이 거지로 보이는데, 당장 내쫓아야 하는 것 아냐?” 하고 말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 말에 동의했고, 젊은 남자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 했다. 늙은 교수는 사람들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젊은 남자한테 배가 고프니 먹을 것 좀 달라 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젊은 남자가 다른 사람들한테 가서 늙은 교수의 말을 전했다.


교회가 식당도 아니고, 왜 여기 와서 밥 달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없으니까 다음에 오라 말하고 내쫓아버려!”


잠시 후 젊은 남자가 돌아와 지금 바쁘니까 다음에 오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늙은 교수는 얻어먹기 틀렸다는 걸 느끼고 교회 문을 나섰다. 그러고 곧바로 뒤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머리가 아프면 하늘이 샛노랗게 보이고 세상이 빙빙 돌아 도저히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늙은 교수는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땅을 짚으며 일어섰다. 뒤에 누가 있는 것 같아 돌아보니 검은 염소가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염소는 주차장이 있는 뒷마당에서 나온 듯 보였으며, 도시 한복판에 있는 교회에서 검은 염소를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늙은 교수는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기르는 염소를 당신이 가져왔다는 것 아니오?”


다른 사람들은 가만 듣고만 있는데, 대장 옆에 앉은 남자만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에는 늙은 교수가 미치광이로밖에 보이지 않아,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갔으면 했다.


나는 교회 뒷마당에서 나왔다 했지, 교회에서 기르는 염소라는 말은 하지 않았네. 혹시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교회에서 염소를 기르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교회에서 기르는 염소가 맞는다면 최소한 먹이를 준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풀 한 포기 떨어져 있지 않고 아주 깨끗했거든.”


그래서 늙은 교수는 안심하고 염소를 데려왔다. 만일 염소를 기르는 흔적이 있었다면 그곳에 두고 왔을 것이었다.


교회에서 기르던 염소든 아니든, 분명한 사실은 당신이 저 염소 주인이 아니라는 거요. 스스로 따라왔을 뿐, 당신이 돈을 주고 산 게 아니니까. 내 말이 틀렸소?”

그 말도 맞으나, 나를 따라왔으니 반은 내 것이나 다름없지.”

대장! 이제 어떻게 할 거요? 저 미친 늙은 교수가 여기서 염소를 기르도록 내버려 둘 참이요?”


옆에 남자는 늙은 교수와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대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가만있었다.


저 염소 역시도 사람을 보고 도망치지 않는 걸 보면 미친 게 분명해.”

통통하게 살쪄서 잡아먹으면 더없이 좋겠군.”

그래도 반은 자기가 주인이라니까, 늙은 교수 허락을 받아야겠지?”

그럼 잡아서 반은 늙은 교수한테 주고, 반은 우리가 먹으면 되겠네.”

저 염소를 여기서 잡자는 거야?”

안 될 것도 없지. 대장이 지시만 내리면 당장 멱을 따고 잡을 거야. 우리가 이때 아니면 또 언제 고기 맛을 보겠어.”


늙은 교수는 대장이 무슨 말을 할지 그것만 관심 있을 뿐, 다른 사람들 말은 하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지시를 내리면 잡을 수 있겠어?”


대장이 고개를 쳐들고 당장 멱을 따겠다는 사내를 보았다.


대장! 지시만 내려요. 우리가 당장 멱을 따고 가죽을 벗길 테니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놈은 내 것이나 다름없으니,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손을 못 대!”


늙은 교수는 험악해진 분위기를 느끼고 검은 염소를 얼른 잡아끌었다. 저들은 대장이 지시만 내리면 당장 염소를 죽이고 가죽을 벗길 태세였다.


좋아! 반대하지 않을 테니 염소를 죽이고 가죽을 벗기라고. 고기는 여기 있는 사람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줄 테니까. 오늘 밤 멋지게 잔치를 한판 벌여보자고.”

안 돼! 죽이지 마! 너희는 염소 몸에 손을 댈 자격도 없는 놈들이야!”


늙은 교수가 할 수 있는 건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었다. 사내 둘이 달려들어 팔을 뒤로하고 꺾어버리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염소를 넘어뜨리고, 숨겨둔 칼을 꺼내 염소 멱을 땄다. 염소는 파닥거리다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바닥에는 염소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고여 흥건했다. 저들 중 한 명이 바닥에 고인 피를 두 손으로 모아 사방에 흩뿌렸고, 다른 사람들은 그 광경을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저들은 염소 복부에 칼집을 내고, 양옆으로 잡아당겨 가죽을 벗겼다. 가죽이 두꺼워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쉽게 벗겨졌다. 염소는 이제 선홍빛 고깃덩이에 불과했다.


자자! 대장이 골고루 나눠준다니까 먹고 싶은 사람은 다들 이쪽으로 오라고!”


몇몇은 소리를 듣고 바로 오고, 몇몇은 귀찮아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먹고 싶은지 고기 냄새를 맡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사람 수를 염두에 두고 자르라고. 생각 없이 자르다 보면 나중에 못 먹는 사람이 생길 수 있으니까.”


대장이 고기를 잘라 나눠줄 사람을 한 명 고르고, 자신은 멀찍이 떨어져 공평하게 돌아가는지 지켜보았다. 고기를 먹겠다는 사람이 많은 탓에 각자에게 돌아가는 양이 생각보다 적었다. 그래도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프라이팬 위에 놓고 굽고, 그마저도 없는 사람은 종이상자를 태워 구워 먹었다. 생고기가 좋다고 핏물이 질질 흐르는 살점을 물어뜯어 질겅질겅 씹어 먹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지하도는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와 고기 타는 냄새가 뒤섞여 콧속을 찔렀다. 늙은 교수는 뼈만 덩그러니 남은 염소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들 자기 배만 채우지 말고, 교수도 맛 좀 보게 떼어주라고.”

내 것을 좀 떼어서 주니까 먹기 싫은지 염소 대가리만 멍청하게 보더군.”

절반은 자기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뼈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화가 날만도 하지.”

교수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고기 맛을 봤으니 감사해야지.”


늙은 교수는 염소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고 혼잣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은 먹는 데 정신이 팔려 늙은 교수가 왔던 길로 되돌아나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의 시야에서 늙은 교수가 사라질 때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고기를 나눠 먹은 사람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었다. 괜히 옆에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주먹을 날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칼을 집어 들고 달려들었다. 늙은 교수는 지하도를 빠져나가려다 귓가에 들리는 비명을 듣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저들의 난동이 너무나 위험하고 살벌해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았다. 사람들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데, 저들이 저렇게 많은 칼을 숨기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칼을 든 사람들은 닥치는 대로 상대를 찌르고, 칼이 없는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늙은 교수는 대장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찾았다. 칼을 휘두르는 사람들 사이에 없는 것이 이미 빠져나간 듯 보였다. 칼부림은 저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바닥에 쓰러진 뒤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한 사람이 돌아다니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심장에 칼을 꽂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쓰러져 죽었다.


순간 지하도에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껏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늙은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늙은 교수는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 사이를 덩실덩실 어깨춤까지 추며 돌아다니다, 검은 가죽을 발견하고 비로소 동작을 멈추었다.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걸 망설이지 않고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는 곧장 9번 출구를 통해 지하도를 빠져나갔다.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소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늙은 교수 뒤를 따랐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고층 빌딩 꼭대기에 붙은 전광판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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