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호접지몽

2015.12.04 17:0012.04

  “, 이제 흙 퍼먹고 살아야 되나...”

  민철은 앞이 깜깜하다. 초등학교 때 엄마 손에 이끌려 간 영화관에서 본 인터스텔라에 꽂혀 과학도의 꿈을 품게 된 민철이었다. 민철은 괜시리 엄마가 원망스럽다.

 

  민철의 부모는 민철에게 건 기대가 컸다. 민철이 또래들보다 구구단을 석 달쯤 빨리 외웠을 때는 민철이 노벨상이라도 탈 줄 알았더랬다. 반대로 민철이 분수와 소수의 개념을 또래들보다 반 년쯤 늦게 이해했을 때는 민철이 대기만성형 인재임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민철의 엄마는 어린이용 위인전을 보던 민철이 자기도 아인슈타인처럼 훌륭한 박사님이 될 거라고 하자 큰 인물 났다고 온 동네에 자랑을 하고 다녔다.

  민철의 부모는 없는 형편에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매고 민철에게 온갖 영재교육을 시켰다. 민철의 꿈은 민철의 엄마가 원하는 것이 되는 것이었다. 민철은 헌신적인 부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민철은 박사가 되어야만 했다.

  민철은 중학교에서 이미 자신은 영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재라면 소금물 농도를 구하지 못하는 게 분해서 눈물을 훔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철은 부모 앞에서만큼은 영재여야만 했다.

  모자란 머리로 열심히 했다. 민철은 재수 끝에 SKY는 아니지만 나름 알아주는 서울 모 사립대학의 물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인터스텔라의 영상미와 교양 물리서적에 나오는 재미있는 상대성 이론 이야기에 혹해 물리학이야말로 적성에 딱 맞다는 착각을 했던 민철은 반 학기 만에 중학교 때처럼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범인은 일반물리의 파동함수였다.

  졸업반이 된 민철에게 달리 취직할 곳은 없었다. 또한, 영어도 짧고 돈도 없는 민철에게 유학은 언감생심이었다. 민철은 마침 대학원생이 모자라던 대학원의 자교생 우대정책에 편승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재능이 없어도 노력만 있으면, 열정만 있으면 어떻게든 풀릴 거라는 순진한 망상에 빠진 민철은 이태승 교수 밑에서 입자물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기로 한다.

  이태승 교수는 MIT에서 학부과정부터 박사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33살에 교수 직함을 달았다. 한국에서 소립자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나 이태승 교수를 떠올릴 정도로 학계에서도 꽤나 명망 있는 학자였고, 학교에서는 테뉴어를 따고도 SCI 논문을 매달 찍어내는 보물이었다.

  노벨상 수상 인터뷰를 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처음 랩에 나간 민철은 한 달만에 현실을 깨닫는다. 무사히 박사 논문 통과해서 나가게만 해준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박사 과정 7년차에 접어들도록 제대로 된 논문은 나올 생각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깐깐한 이태승 교수의 학문적 프라이드를 만족시킬 만한 논문을 만들어낸다는 게 둔재인 민철에게는 무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들은 길어야 5년에 끝내는 박사과정을 민철은 8년이나 걸려서 억지로 끝낼 수 있었다. 재능이 없으니 몇 년 더 데리고 있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지도교수가 대충 요건만 채워 졸업시킨 것이다.

  8년 걸려 박사가 되었지만 민철에게 남은 것은 시골 어설픈 연구실 포닥자리 하나 비벼들어가기에도 벅찬 추천서 뿐이었다. 재능 없고 실력 미달이라는 지도교수의 추천서를 가지고 민철이 구할 수 있을만한 직장은 9급 공무원 정도가 다였다.

  이제 불혹을 바라보는 민철이지만 수중에 남은 것이 없다. 결혼할 여자는 고사하고 연애 경험조차 없으며, 모아둔 돈은 300만원 남짓. 친척들이 명절마다 언제 결혼하냐고 묻는 것 정도는 넉살좋게 받아넘길 수 있게 된 민철이지만 박사만 따면 연봉 1억이 통장에 따박따박 들어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부모님 생각만 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 이제 흙 퍼먹고 살아야 되나...”

  민철은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망가졌는지 생각해본다. 괜히 엄마 아빠 탓도 해보고, 자신이 조선반도 학부모들의 지나친 교육열의 희생자라는 생각도 해본다. 어떻게 보면 이공계를 천시하는 사회 풍토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물리학이 아닌 다른 적성에 맞는 일을 했었더라면 하고 후회도 해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교양과학책 장사꾼들을 원망해본다. 하지만 민철은 다른 적성에 맞는 일을 하나도 떠올리지 못하고 이내 생각을 그만둔다.

  “에휴, 내가 병신이라 그렇지 뭐...”

  민철의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는 사실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당장 내일부터 망한 민철의 인생을 살아가고 마무리하는 것은 결국 민철의 몫이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소주가 쓴 민철이었다.








  죽겠다는 결심을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살아남아서 버티려 할수록 더 꼬이기만 하는 것이 민철의 인생이었다. 민철은 이제 쉬고 싶었다.

  죽더라도 총각 딱지는 떼야겠다고 생각한 민철은 통장에 조금 남은 돈을 모두 홍등가에서 써버렸다.

  막상 죽으려니 아플까봐 무서워진 민철은 인터넷에서 자살을 도와준다는 글을 발견했다. 요지는, 약 먹고 안 아프게 죽도록 도와주는 대신 장기를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

  XXXX섬으로 가는 배의 분위기는 침울했다. 민철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자신 말고도 꽤 있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오늘 같이 죽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동지애같은 것도 느껴졌다. 민철은 그런 기분이 섬뜩하면서도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내 옆에 앉은 여자 되게 예쁘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은 사전에 부여받은 순번대로 면담실에 들어갔다. 길지 않은 면담이 끝난 사람들은 모두 옆에 있는 큰 방에 들어가 마지막 순번인 민철의 면담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듯 했다.

  면담실에 들어선 민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교수님이 왜...”

  “앉게

  이태승 교수가 유리창 너머에서 말했다.

  “보다시피 나는 여기서 죽고는 싶은데 그 고통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네. 생물 랩의 송 교수와 함께 일하고 있지.”

  “...”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군. 하지만 더 자세히 알려주긴 어렵네. 그나저나 자네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유감이군.”

  “교수님 추천서 덕에 갈 곳이 없어서 죽으러 왔습니다.”

  “내 추천서 탓을 하면 곤란하네. 자네 능력 그 이상을 추천서에 써 줄 수는 없는 법이네.”

  “차라리 더 데리고 있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일전에 이야기했지만 가망 없는 자네 때문에 유망한 대학원생 둘을 못 받고 있지 않았나. 결단을 내려야 했네.”

  “제가 그렇게 가망이 없습니까.”

  “내가 자네 대학원 올 때부터 뜯어말리지 않았나. 자네는 과학을 할 사람이 못 되네.”

  “제가 뭘 잘못했기에 몇 년째 그러십니까. 정말 억울합니다.”

  “학부 때부터 10년이 넘도록 지켜봤지 않나. 자네는 과학이 적성이 아니네.”

  민철은 설움이 북받쳐 올라 소리쳤다.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십니까. 어떻게 제자에게 제대로 된 기회 한 번 주지 않고 못 쓸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을 수가 있습니까.”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좋네. 그럼 여기서 자네의 가치를 증명한다면 없는 자리를 만들어서라도 당장 자네가 있을 곳을 마련해주겠네.”

  “좋습니다.”

  “우선, 자네는 학부 졸업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상대성 이론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네.”

  “?”

  “자네가 박사과정 밟으면서 논문주제로 처음 제안했던 것이 뭔지 기억하고 있나?”

  “티플러 실린더를 이용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대해 다뤄보려 했었습니다.”

  “자네는 거기서 커 블랙홀 주위의 프레임 드래깅을 따라 공전하면 그 휘말림 정도에 따라 12시에 출발해서 12시에 출발점에 돌아오거나 12시에 출발해서 11시에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등의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네.”

  “틀렸습니까?”

  “아니. 정확하네. 하지만, 자네는 과거와 미래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네.”

  “현재보다 이전이 과거고 이후가 미래 아닙니까?”

  “틀렸네. 과거는 이전의 사건들 중 현재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들만을 뜻하네. 그것이 상대론에서의 과거라네. 예를 들어, 855분에 화성탐사선이 외계인을 발견한 사건은 9시에 예정된 우주국 직원들의 티타임에 영향을 주지 못하네. 그 정보를 보내는데 10분이 걸리기 때문이지. 855분에 외계인이 있었거나 없었거나 9시의 티타임은 그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855분의 외계인 발견은 9시의 티타임보다 과거라고 할 수 없네. 하지만 845분에 외계인을 봤다면 우주국 직원들은 55분에 그 사실을 알고 9시에 예정된 티타임을 취소하겠지. 그렇기 때문에 845분의 외계인 발견은 티타임보다 과거라고 할 수 있네. 만일 커 블랙홀의 프레임 드래깅을 극도로 이용해 블랙홀 생성 당시까지의 시간으로 갔다고 하더라도 인과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간으로 가는 순간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보정될 것이네. 커 블랙홀에서 몇 년을 과거로 이동하더라도 인과율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절대 일으킬 수 없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여행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네.”

  민철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네가 얼마나 오개념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과학적인 직관력이 부족한지 추론할 수 있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의 캐비넷을 열었다. 큰 유리관 안에 사람의 뇌가 들어있었고 유리관에는 여러 선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교수가 말했다.

  “뒤의 저 뇌 잘 보이나? 저 뇌에서 나오는 모든 신경다발에 전선을 연결해서 적절한 자극을 주고 있네. 저 뇌는 몸 없이 뇌만 있지만, 산소와 전기 신호만 주면 저 뇌는 자신이 몸 전체와 함께 살아있다고 생각하며 가상현실을 살아가게 되네.”

  민철은 놀라 새삼 유리관을 한 번 더 쳐다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자네도 그렇게 가상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네. 저 뇌는 가상현실 안에서 가상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실재합니다.”

  “그것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그렇게 확신을 할 수 있나? 자네 스스로가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시험관의 뇌와 같은 처지인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네. 심지어 자네 스스로도 절대 증명이나 반증할 수 없네. 그런데도 그렇게 한 가지 이론만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으면 곤란하지.”

  “오컴의 면도날에 따라 제가 실재한다는 결론을 따라가는 게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자네 그것도 오개념이네. 오컴의 면도날은 절대로 진위를 가르는 잣대가 될 수 없네. 진리라는 것은 오히려 거짓보다도 더 거짓같을 때가 있는 법이네. 자네 머리로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오컴의 면도날 운운하며 모두 내다버리는 식으로 연구를 했다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낼 수 있었겠나?”

  민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리처드 도킨스가 학부생이었을 때 일어난 일이네. 당시 옥스퍼드 동물학과의 한 존경받는 교수는 수 년 동안 '골지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착각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자신 있게 믿어왔고, 또 그렇게 가르쳤네. 어느 월요일 오후 과 전체가 방문 강의자의 연구를 듣는 동물학과의 전통대로 미국인 세포생물학자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거기서 세포생물학자는 골지체가 실존한다는 완전히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네. 강의가 끝나자마자 그 교수는 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 미국인과 악수하고는 열의에 차서 말했네. '내 친애하는 친구여, 당신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네. 내가 지난 15년 동안 틀려왔었다네.' 똑같이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네는 자네가 틀렸을 가능성을 항상 인정해왔는가?”

  “그랬던 것 같은데요.”

  “자네 박사 논문 뭐로 썼나?”

  “끈 이론..”

  교수는 민철의 말을 잘랐다.

  “그래 그 끈 이론 말이지. 한 일곱 차원 정도는 어디 콩 만한 데 말려들어가서 안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11차원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그 허무맹랑한 말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나?”

  “수학적으로 말이 되잖아요. 이론 자체가 구조적으로 딱딱 들어맞는 부분도 있고.”

  “이건 물리인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끈 이론은 아직 실험으로 증명이나 반증할 수 없는 이론이네. 이론이 아니라 가설이라고 불러야겠지. 수학과 물리는 다르네. 수학에서야 그럴싸한 규칙 몇 개 던져뒀는데 그럴싸한 구조가 만들어지면 멋진 이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저 숫자 몇 개 가지고 계산기 두들겨봤더니 그럴싸한 결과가 나오니까 이게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지 생각해보게. 지금의 끈 이론은 그저 지금까지 세운 가설들끼리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 것 말고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네. 모순이 없으면 뭐하나? 결국 우주가 끈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 끈 이론은 단박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론이 되어버릴 것이네.”

  “하지만 힉스도 발견되었고 이제 중력자만 검출되면...”

  교수는 다시 민철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중력자가 검출되었나? 자네는 중력자가 꼭 검출될 거라는 데에 무엇을 걸 수 있나? 말려들어간 7차원 중 단 한 차원이라도 관측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적어도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끈 이론이나 내가 자네에게 주장하고 있는 시뮬레이션 이론이나 공평하게 받아들여져야만 하네. 나는 당장에라도 이런 이론 20개는 만들 수 있네. 성경책도 좋은 예가 될 수 있네. 어쩌면 우리 우주는 아주 큰 블랙홀의 공간 왜곡으로 인해 생긴 소우주 그 자체일 수도 있네. 아니면 정말로 과 같은 절대자가 실험실에서 여러 우주들을 배양중일 수도 있겠지. 이를테면, 오메가의 값을 바꾸면서 오메가가 얼마인 우주는 팽창하고 얼마인 우주는 수축하는지 실험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는 것이네. 실험실 다중우주이론은 마틴 리의 여섯 숫자가 왜 이렇게 정해졌는지 아주 잘 설명할 수 있겠군. 너무 억지스러운가. 사실 이 정도면 애교라고 할 수 있네. 심지어 어떤 책팔이들은 뇌 구조에서도 프랙탈 구조가 나오고 성간 구조에서도 프랙탈 구조가 나오니까 우주가 어떤 큰 생물의 뇌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네.”

  교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어쨌든, 끈 이론이 지금처럼 이론물리학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단지 수학적으로 깔끔하게 네 가지 힘을 통합할 수 있기 때문이네. , 다른 그럴싸한 이론이 제시되거나 네 가지 힘을 통합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면 끈 이론은 영영 죽은 이론이 될 것이라는 걸세. 지금 이론물리학계에서 끈 이론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게임이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들 난리인 것뿐이지.”

  “교수님 말씀은 다른 학자들이 끈 이론을 연구하는 것은 괜찮지만 제가 끈 이론을 연구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거의 비슷했네. 자네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끈 이론을 연구해서는 안 되네. 자네는 기존 관념이나 이론이 틀렸을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없네. 자네도 느끼지 않았나. 자네가 학자가 되었다면 평생 다른 똑똑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럴싸한 이론을 공부만 하다가 죽을 걸세. 자네가 기존 이론 하나를 다 공부할 때쯤이면 누군가가 새로운 이론을 내놓기 때문이네. 자네는 그저 주어진 이론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꼬거나 뒤집고 비트는 사고의 흐름이 유연하질 못하네. 그런데, 다른 똑똑한 사람들은 그럴싸한 이론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알고 있나? 자네와는 달리 기존 관념이나 이론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롭고 독창적인 이론들을 뽑아낼 수 있는 것이네. 남이 만들어 놓은 이론 읽고 이해하는 것을 누가 못하나? 그런 것은 학부생 때나 하는 일이네.”

  “...”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가는 끈 이론은 분명 언젠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네. 초끈이론, M이론, 다중우주 전부 다 끈 이론에서 시작된 기형적인 땜질 이론들의 연속이야. 이렇게 땜질해서 모순점 없애고 저렇게 땜질해서 모순점 없애고... 하지만 가능성은 열어두고 있네. 몇 년 뒤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 나타나서 중력자도 발견하고 말려들어간 차원을 관측할 수 있는 방법도 제시한다면 나도 군말없이 끈 이론을 인정할걸세. 하지만, 앞서 말한 이유들로 인해 그 똑똑한 사람이 자네는 절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네. 자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증명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우니까 끈 이론은 참일 것이다.’정도가 되겠네. 천동설이나 정상상태우주론을 신봉하던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한 번 생각해보게. 더 할 말 있는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유리관에 들어 있는 뇌의 진짜 정체는 뭡니까?”

  “시뮬레이션 중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자네와 마찬가지로.”

  “교수님이 끈 이론에 대해 하신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그런 비유는 이제 안 하셔도 됩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닐세.”

  “적당히 하시죠.”

  민철은 교수의 괴상한 농담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내 말을 못 믿겠나?”

  교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는 면담실을 나갔다. 민철은 머리가 복잡했다. 교수는 화려한 언변으로 민철에게 민철의 무지함을 이해시켰다. 민철의 머리 속은 무력감과 패배감으로 채워졌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으니 다 관두고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유리창 너머로 교수가 다시 나타났다. 옆방에서 죽을 시간만 기다리던 여자와 함께.

  “이 여자는 자네와 같이 배 타고 들어온 여자네. 지금부터 잘 보게.”

  교수는 능숙한 솜씨로 여자의 옷을 찢어발겼다. 여자는 저항했지만 교수에게 뺨과 복부를 몇 차례 맞은 뒤로는 저항조차 포기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당황스럽고 놀랍다기보다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민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신선한 충격에 한 동안 멍하니 앉아있기만 할 뿐이었다. 일을 마친 교수는 나체의 여자를 그대로 옆방에 밀어넣고 면담실로 돌아왔다. 민철은 그제서야 물었다.

  “뭡니까?”

  교수는 태연히 대답했다.

  “놀랄 필요 전혀 없네. 어차피 나도 실재하지 않고 방금 그 여자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네. 자네는 방금 그 여자가 있던 방도, 그 방에 있던 다른 남자들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네. 실재하는 것은 자네의 뇌와 실험실뿐이네. 자네는 게임하면서 사람한테 총도 많이 쏘아봤으면서 왜 그렇게 놀라나? 여긴 가상현실일 뿐이야. 내가 하고 있는 말, 나와 그 여자가 한 행동 모두 이 시뮬레이터 밖에서 자네 뇌에 연결된 전선을 통해 입력되고 있는 조작된 영상일 뿐이네. 뇌 밖에 없는 자네보고 계속 자네라고 하는 것도 웃기구만.”

  민철은 소리쳤다.

  “아니지. 그냥 너는 지금 궤변으로 나를 깔아뭉개면서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있을 뿐이야. 좀 잘났다고 모자란 사람 괴롭히면서 희열 느끼는 쓰레기 같은 놈! 외딴 섬에 자살하겠다고 제 발로 걸어온 사람들한테 니가 무슨 짓을 못해? 지금 니가 옆 방가서 다 쏴죽여도 뭐라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강간이라고 못할까. 가상현실이 뭐 어쩌고 저째? 야 이 미친놈아 내가 니 밑에서 10년씩 공부했다고 그렇게 병신으로 보이냐?”

  교수는 너털웃음을 쳤다.

  “껄껄껄. 잘했네. 그럴싸했어. 그런 식으로 그럴싸한 이론을 만드는 것이네. 자네가 지금 세운 가정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았네. 가능성 있는 이론이야. 하지만, 자네의 이론이 맞고 내 이론이 틀렸다고 확신할 순 없네. 자네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실험방법론을 제시하지 못했네. 자네는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을 뿐이야. 그렇기 때문에 아직은 자네의 이론과 내 이론이 공평하게 고려되어야 하지.”

  민철은 악에 받쳐 유리창을 두들겼다.

  “입 닥쳐! 말장난 그만하라고 개자식아!”

  “말장난이라... 자네가 하려던 일이 바로 그것 아니었나? 양자적 다중우주? 홀로그램 우주? 거품 다중우주? 자네가 짬뽕 먹을지 짜장면 먹을지 고민할 때마다 우주가 한 개씩 더 생긴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네가 시뮬레이터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지 않은가? , 그 양자적 다중우주론에 따르면 저 어떤 우주에서는 내가 그 여자를 범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않은가?”

  민철은 대꾸하지 않았다.

  “, 그리고 농담 아닐세. 양자론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게. 3D게임을 구현할 때 복셀의 크기를 작게 할수록 그래픽이 좋아지지만 컴퓨터에 부하가 많이 걸린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자네는 복셀의 크기가 플랑크 부피인 초고성능 가상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도록 하게.”

  교수는 빙긋 웃으며 면담실을 나갔다.






  민철은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시다. 새소리가 들린다. 늘 일어나던 시각. 830분이다. 민철은 출근 준비를 하면서 생각했다.

  ‘박사 논문 때문에 요즘 스트레스가 심한가...’

  요즘 들어 이상한 꿈을 자주 꾸는 민철이었다. 민철은 지갑 속의 부모님 사진을 한 번 보고 현관문을 힘차게 열었다.






  “, 예 장기는 다 브로커 통해서 갔구요. 배달사고 없었습니다. . . 아 네. 그 쪽은 송 교수한테 보냈습니다. . 수고하세요.”

  이태승 교수는 매주 토요일이 가장 바쁘다.

  “, 송 교수 그거 잘 받았지? 시뮬 잘 돌아가? 걔는 안에서 잘 살고? , 그래 대신 담에 밥 한 번 근사한 데서 쏴라~”

  이태승 교수는 때때로 자신조차 가장 밖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안이면 어떻고 밖이면 어때. 어차피 구별도 못하는 것 가지고 머리 싸맨다고 답이 나오나. 그냥 있는 데서 잘 살면 되지.’


- 끝 -

eddiem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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