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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속 검녀전

2015.11.27 11:4911.27

0.



비처럼 쏟아지는 햇볕이 따갑고 어지러웠다. 나무에 묶인 팔다리가 밧줄에 쓸려 따갑고 아프고 붓는듯하다 그예 감각이 없다. 목구멍이 말라 갈라질 듯한데 속에서는 자꾸 무언가가 치받아 올라오려 들었다. 햇빛이 정오의 칼날이 되어 정수리를 쪼갤 듯 떨어졌다. 나무에 묶여 물 한 모금 못 마시며 뜨고 지는 해를 두 번이나 보았다. 오늘의 해가 완전히 지고, 내일의 새 해가 떠야 비로소 나는 풀려날 수 있다. 공공기물을 파손하고 들개나 길고양이들을 연달아 살생하여 도시의 민심을 흉흉하게 어지럽힌 죄가 크지만 나이가 어리고 어머니를 잃은 충격을 감안하여 3일 동안의 구금형으로 본을 보인다는 것이 치안판사의 판결이었다. 끔찍하고 치욕스럽고 더러웠다. 

치안판사는 갈매기 모양의 회색빛 수염을 멋지게 기른, 살찌고 수다스러운 중년 남자였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 시합의 맨 앞줄 티켓을 달라며 성화를 부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를 따라 훌륭한 권투 선수가 되라며 호인(好人)인 척 내 머리를 쓰다듬던 부드럽고 퉁퉁한 손으로, 치안판사는 차갑게 나에게 이런 형벌을 내렸다. 

내 어머니 레메디아는 이 도시를 대표하는, 아니, 아카치 왕국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의 복서였다. 축구가 아카치안들의 오락이라면, 복싱은 아카치안들의 자존심이었다. 어머니는 오로지 아주 얇은 천으로 주먹을 감싼 채 그 어떤 거한에게도 물러서지 않고 번개같이 빠르고 강한 연타를 꽂아넣기로 아주 유명했다. 어머니는 저 멀리 동방의 반도에서 이름모를 전쟁 포로의 딸이 되어 노예로 살아왔지만, 오로지 두 주먹으로 자유를 쟁취한 투사 중의 투사였다. 어머니의 시합에도 체육관에도 사람들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없다 해도 허랑함을 느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산맥처럼 멋지게 솟아오르고, 야생 짐승처럼 힘차게 실룩거리는 어머니의 등은, 내가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등 이상으로 단단하고 멋졌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 등에서부터 힘차게 펀치를 뻗어 상대를 쓰러뜨렸다.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 무패의 복서였고, 링 위의 여전사였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는 죽었다. 누구도 어머니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파란 혈관이 비치는 창백한 안색, 제 몸처럼 마른 꼬챙이 같은 칼 한 자루도 제대로 못 휘두를 가느다란 팔로 그렇게 순식간에 어머니의 목을 꿰뚫을 거라고,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빌어먹을 발레리는 내 복수를 받아야 할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전에 내가 먼저 죽을 것만 같았다. 이제 하루도 채 남지 않았는데, 벌써 머리 속이 뱅뱅 돌며 어지러웠다. 햇빛이 몸 안 깊숙이 파고들어 혈관을 달굴 듯 뜨거웠다. 눈 앞이 어지럽고, 새하얗다가, 마침내 검게 흐려졌다. 정신을 놓는 그 순간까지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1.


“거참, 이 놈의 나라, 지긋지긋하네. 다음 배가 오면 빨리 나가든지 해야지, 툭하면 비야.”

“그러니 아카치라오. 우산의 나라, 신사의 나라.”

“지랄하네.” 짧은 욕설과 함께 습기 먹은 나무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를 잇는 높은 웃음소리가 귀에 익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온 몸이 풀려 있었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주위 풍경이 낯이 익었다. 항구 도시 여어크(Yeaork)의 유일한 동방인인 해롤드 스기야마의 도장 겸 집이었다. 두터운 안경을 끼고, 수염이 가득한 둥근 턱에, 번쩍거리는 대머리가 여전히 눈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복수를 위해 나는 그에게서 호쿠사이 전통 검술인 켄도(Kendo/劍道)를 몇 달 동안 배운 적이 있다. 물론 별 쓸모는 없었다.

“미스터 스기야마. 당신이 나를……?”

스기야마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이름만 아카치안일 뿐, 겉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는 호쿠사이인이었다. 말로는 아카치-호쿠사이 혼혈이라고 우기지만 도시의 변두리에서 켄도 도장을 운영하며 근근히 먹고 사는 노총각 홀아비였다. 발음도 보잘 것 없는 주제에 아카치안식 제스처는 아주 능숙했다. 그나마 머나먼 섬나라에서 온 이국 남성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죽도를 휘두르던 유부녀들이 발레리의 그럴듯한 폼에 홀딱 넘어가 떠날 때에도 스기야마는 한숨을 내쉬며 과장된게 어깨를 으쓱거려보였었다. 

“난 그럴 배짱 없다. 주제에 어딜 감히 치안판사를. 감사는 저 쪽이다.”

스기야마는 턱수염 끝으로 방금 닫힌 문을 가리켜보였다. 관리가 되지 않아 쭈글쭈글하게 뒤틀린 나무문은 그나마 비교적 넓은 도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문이 다시 쿠당탕 열리면서 우리 나라 날씨를 불평하던, 낮게 쉰, 왁살스럽고 거슬리는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내 원 참, 이런 것도 도장이라고. 이게 무슨 다다미야? 걸레쪼가리지! 이러니 문하생이 없지!”

“리에 상. 그 것도 정말 어렵게 만들었어요. 여긴 호쿠사이보다 더 습기가 많은 나랍니다. 다다미에 쓸 짚은커녕, 목검 한 자루 만들 나무도 변변치 않다구요.”

“하여간 핑계 많어. 그리고 내 이름은 례(禮)야, 례! 호쿠사이 발음은 왜 맨날 그 모양이야? 그러나저러나, 깨셨구만?”

그나마 스기야마의 우리 말 발음은 들어줄만한데 비해 리에, 혹은 례라고 불리운 여자는,  발음은 둘째치고, 왁살스러운 목소리부터 도저히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문법이나마 제대로 구사해주어 신통하다 여길 처지였다. 같은 동방인이라도 각자 반도어와 호쿠사이어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 말로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의 겉모습이 무척 예사롭지 않아 나는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 여자는, 적어도 내가 이 곳에서 본, 두 번째의 동방인이었다.

한 제국, 반도 왕국, 호쿠사이 연합 할 것 없이 동방인은 모두 작다고 생각했던 나의 선입견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 여자는 어머니가 살아 생전 상대해왔던 웬만한 남자 복서들보다도 더 크고 우람했다. 얼굴은 바위 같았고, 넓은 어깨는 봉우리처럼 불룩 솟았다. 얼굴이며 목에 잔흉터들이 가득해서 살아 생전 어머니가 봤더라도 언니로 모셔야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대체 뭘 그리 설쳐대며 살았는지, 아직 늙지 않은 사나운 얼굴에 눈은 하나 모자랐고, 오른쪽 소매 역시 팔 없이 축 늘어져 있었으며, 바짓가랑이 한 쪽에도 시커먼 무쇠 의족이 들어 있었다. 대체 어떤 삶을 살면 저렇게 눈과 팔과 다리 하나씩을 고스란히 잃어버리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상이 용사 처음 봐? 너희 같은 색목인들이랑 싸우다 없어졌어. 징그러운 것들. 우리한테만 잔혹한 줄 알았는데, 너 같은 애들을 사흘이나 잡아 매두다니. 우리 나라에서 그런 건 상상도 할 수 없다고. 종아리에 매질이나 좀 하고 말지. 이게 뭐람. 아무튼 아직 못 들었지만, 고맙다는 말은 됐다.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니까.”

스기야마는 또다시 어깨를 쓰윽 올렸다. 

“어쩔 수 없지요. 요즘 깃꾸 도오 릿빠- 아, 아니, 그러니까 긱 더 리퍼(Geek the ripper)라는 도끼 살인마 때문에 아카치 전역이 흉흉한걸요. 특히 온갖 사람들이 드나드는 이런 항구 도시에서는 더 하지요. 아마 본보기를 보인다는 뜻일 겁니다. 흉악범에 대한 색목인들의 공포심은, 에에, 뭐랄까, 동방의 심학(心學) 같은 걸로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러니까 로안, 너도 돌아가신 어머닐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런 장난은 그만두도록…….”

“내가 한 짓이 아니에요!”

스기야마는 커피를 따르다가 찔끔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허, 그 녀석, 누가 복서 아들 아니랄까봐 아직 쌩쌩하네.”

“내가 하지 않았어요! 누가 미쳤다고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개를 잡아다 이마에 구멍을 뚫어요? 내가 뭐 그런 장난질이나 할 정도로 한가한 줄 아세요!”

“하지만 치안 판사 말로는 유년 시절부터 그런 짓을 벌이는 아이들이 커서 싸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된다잖니. 에에, 그러니까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아, 여기에 이 말이 어울리는…….”

“글쎄, 내가 안 했다구요, 미스터 스기야마! 내가 그 동안 미스터 스기야마 도조(Dojo/道場)에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하기사 그렇지. 네 어머니 복수를 한다고 내 도장만 와서 들쑤신 게 아니라 레슬링 체육관, 킥복싱 강좌도 모자라서 심지어 발레리 펜싱 클럽까지 기웃거렸었지? 뭐 그렇게 이것저것 기웃거리기만 하면 절로 실력이 늘어날 줄 알았냐?”

“아, 글쎄, 그 지 어미랑 씹할(Mother fucker) 발레리 새끼 얘긴 왜 꺼내요! 그리고, 쪽팔리긴 하지만 그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빴는데, 제가 그런 미친 짓거리를 할 시간이 어딨냐구요!”

“근데 이 녀석이 말투 봐라? 야, 이 녀석아,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야. 여기 와서 제대로 죽도 잡는 꼴도 못 봤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할 것 아니냐?”

“그 놈의 죽도, 목검 백날 잡으면 뭐해요! 발레리 클럽 꼴통들한테 쪽도 못쓰는데! 그리고 저 아줌마 말투나 좀 제대로 가르치세요. 저 아줌마 우리 말, 미스터 스기야마가 가르친 거 아니에요?”

“……아, 아니, 난 내가 그냥 대충 주워들었는데……. 왜, 이상하냐? 너네 나라 말은 존댓말 반말 구분이 따로 없다고 그래서……….”

독학이 그 정도라면 수준급인 셈이라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스기야마는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내게 내밀었다.

“이거 마셔. 그리고 감자라도 삶아줄 테니 먹고 가라. 여기서 좀 쉬어도 좋고. 아무튼 정신 좀 차려, 이 녀석아. 사실 네가 했든 안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발레리와 네 엄마의 승부는 비록 누가 하나 죽어서 찜찜하긴 해도 서로가 합의한 희대의 명승부였어. 나나 리에, 아니, 례의 나라에서였다면 천년만년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을 게다. 명색이 아들이 되어가지고, 네가 복수를 하겠답시고 여기저기 찔러보고 소란피우니까 사람들이 괜히 불안해져서 네 편을 안 들어주잖냐?”

“맙소사, 미스터 스기야마, 내가 저번에 까마귀한테 돌 던졌을 때 뭐라고 했어요? 까마귀는 어미한테 벌레를 물어다주는 반포지효(反哺之孝)의 새라면서요? 그러면 나더러 지금 그 인간 앞에서 우리 어머닐 찔러죽여 고맙다고 허리라도 숙이란 말씀이세요? 까마귀도 제 어미는 깍듯이 모신다면서요!”

“아니, 근데 이 녀석이 왜 이렇게 자꾸 말꼬리를 잡지? 도로 확 묶어놔버릴까보다.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 내가 지금…….”

“긱- 더- 리퍼-! 긱- 더- 리퍼- 다!”

나와 스기야마 사이의 공기가 과열되고, 상황을 잘 모르는 례는 그저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커피잔의 김이 조금씩 갈마들어갈 때에 갑작스레 들린 찢어지는 고함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았다. 나와 스기야마의 몸이 얼어붙어 있는 사이, 뜻밖에도 례가 그 커다란 몸을 우당탕 날렸다. 육중한 무쇠 의족이 바닥의 나무 판자를 짓부수며 크게 울었다. 

긱 더 리퍼의 느닷없는 출현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동방 반도에도 올드 망태(Old Mang-tae)라는 희대의 변태가 있었다. 커다란 약초 보따리를 걸머지고, 제 병을 치료하는 약초를 찾아 헤매는 볼품없는 노인네지만, 온갖 약초를 주워먹어 생김새는 흉할망정 힘은 천하장사랬다. 불치병에는 어린아이 간이 좋다는 풍문만 믿고 쥐도 새도 모르게 아이들을 잡아다가 무쇠솥에 삶아먹고 뼈다귀만 남긴다고 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으면 동방의 부모들도 올드 망태가 잡아간다는 위협을 해서 억지로 재운다고 했다. 우리의 자장가도 그런 으스스한 가사가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긱 더 리퍼를 이용해서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 나라의 출산율 증진에 이바지하는 부부가 있을 터였다.

길쑴하고 날렵한 그림자가 긴 코트 자락으로 달빛을 휘저으며 거리와 골목 사이를 뛰었다. 다행히도 빗줄기는 약했지만, 물안개로 사방이 뿌옇게 흐렸다. 발자국 소리를 찾으려고 해도 이미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제복 경찰부터 자경단에 이르기까지, 거기다 겁에 질린 여자와 아이들이 목을 놓아 우짖는 바람에 거리는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다. 수도 총괄 경찰국에서 유치하게 박자까지 정해준 “긱- 더- 리퍼-다!” 라는 신호만이 여기저기서 메아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소리만 듣자면 긱 더 리퍼가 백만명쯤 되는 것 같았다.

례가 뒤뚱거리며 나간지 조금 되어서야 나와 스기야마도 제각기 죽도와 진검을 허리에 차고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생각보다 의족에 익숙한지 례는 약간 불안해보이긴 했어도, 커다란 지팡이로 보이는 꾸러미에 몸을 실은 채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체 그 여자는 어떻게 아시게 된 사이세요?” 

“하도 배고파서 게스트 하우스(Guest house) 열었다, 왜. 네가 뭐 스승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꼴이나 아냐?” 

“그러는 미스터 스기야마는 우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부의금이나 보냈어요?” 

“……관혼상제에 금전을 논하는건 오랑캐나 하는 짓이니라. 열과 성을 다해 향을 피웠지.” 

“니미, 이럴 때만 호쿠사이.” 

“니미? 너 지금 니미라고 했냐?” 

“씹할, 내 엉덩이나 핥아요! 꼴랑 한 달 좀 다닌 것 갖구 스승 노릇은 더럽게 하려드네!”

투닥거리면서 우리는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달빛만이 을씨년스럽게 빗방울 사이를 건너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긱 더 리퍼. 나이도 인종도 모르는 희대의 연쇄살인마. 귀족들의 전통 풍습으로 멋지게 기른 얇은 콧수염만이 그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을 뿐이다. 커다란 도끼를 차고 다니며 사람들을 난자해 죽인다지만 왜 그러는지, 언제부터 그러는지 누구도 몰랐다. 방직 기계를 들여오면서 하청 노동자들을 내쫓은 귀족들을 연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던 노동자 길드 대표 네드 러드 또한 긱 더 리퍼를 흉내내어 도끼를 잡을 정도였다. 네드 러드는 도끼를 든 노동자였지만 긱 더 리퍼는 도끼를 든 유령이었다. 누구도 그의 정체나 흔적, 자취를 알지 못했다. 오로지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도끼 자국이 무수한 시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제복 경찰을 제외한, 자경단과 그 외의 시민들은 즉시 귀가하십시오! 추적과 수사에 방해가 됩니다! 제복 경찰을 제외한, 자경단이나 그 외의 시민들은 즉시 귀가하십시오! 수총국의 긴급 명령입니다!” 

빗방울을 뚫고 다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도 총괄 경찰국- 수총국의 사복 수사관들과 제복 입은 관할지역 경찰들만이 거리에 남을 모양이었다. 긱 더 리퍼가 아카치 전역을 휩쓸면서 연쇄 살인을 일으킨지 벌써 몇 년 째였다. 늙은 사냥개라도 이제는 묘수를 터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 진작에 이 지역은 다 봉쇄되었을 것이다. 

“일단은 돌아가야겠구나. 리에 상도 찾아야지.”

칼자루를 쥔 채 목덜미를 덜덜 떨면서 스기야마가 처량하게 중얼거렸다. 그 때 내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수총국의 유력한 인사인 듯한 검정 코트를 입은 한 수사관과, 그 옆에서 장검을 허리에 찬 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는 젊은 남자. 사교 댄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에뜨르아 왕국에서 공부하다 우연히 잡은 검에서 펜서의 재능을 찾았다는 사나이, 귀국하자마자 아카치 각지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펜싱 클럽을 열고 내 어머니의 목을 단칼에 꿴 그 남자. 이름까지 재수없고 비린내나는 에뜨르아 식으로 고친 뷔엔 발레리였다. 곱슬거리는 짧은 머리칼 위에 모자를 눌러쓰고, 얇은 안경을 낀 그는, 파랗게 젖은 입술로 입김을 토해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발레리 펜싱 클럽의 실력 있는 문하생들을 모아 거리 봉쇄에 주력했습니다. 아마 긱 더 리퍼가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숨어다니기는 절대 불가능할 겁니다.” 

“역시 미스터, 아니, 무슈 발레리시군요. 긱 더 리퍼 담당 특수요원으로서 그저 협조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저 목소리 또한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수총국의 긱 더 리퍼 전담 스페셜 에이전트(Special Agent) 맥기. 어머니의 시합에서 특등석을 차지하고 거들먹거리며 저 주먹 한 방이면 긱 더 리퍼는 도끼자루에 손조차 대기 어려울 거라고 치사하던, 치사한 인간이었다. 이제는 발레리의 곁에 찰싹 붙어서 간살대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혔다. 스기야마는 재빨리 내 손을 잡았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긱 더 리퍼가 뜨는 바람에 지금 례가 널 풀어준 걸 아무도 모르는 거야. 여기서 난동부리다간 긱 더 리퍼까지 엮여서 더 골치 아파진다.”      

스기야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눈 앞이 새하얘지면서 절로 목구멍이 꿀렁거렸다. 거칠게 갈아붙인 위아래 어금니가 부서질듯 아팠다. 뷔엔 발레리는 귀국하자마자 신문을 통해 어머니에게 시비를 걸었다. 발차기조차 없는 복싱은 실전 격투기로서 별 의미가 없는 스포츠에 불과하다고 큰소리쳤다. 게다가 총이 불을 뿜는 시대에 맨손으로 싸워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원시적이라며 비웃었다. 그 글의 결론은 검술과 예술을 하나로 접목시킨 자신이야말로 근대적인 지식인이자 무인이라는, 자기자랑이자 광고였다. 하지만 그 칼럼을 본 어머니는 춤은 춤이고 검은 검일 뿐이라고 호탕하게 웃어넘겼을 뿐이었다. 그 말은 귀신같이 신문 기자들의 펜과 종이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공개적인 결투에서 어머니는 펀치 한 번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것이다. 정 그렇게 명성을 날리고 싶다면 어머니 말고 다른 격투가도 있었다. 또 굳이 이마 정중앙을 그렇게 찔러 죽일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제 이름을 날리기 위해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은 뷔엔 발레리를 나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긱 더 리퍼가 나보다 먼저 선수를 쳤다.

해롤드 스기야마는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했다. 보리수 나무 아래서 오랫동안 앉아 생각하다 깨달음을 얻어 저 스스로를 구원한 붓다라는 신의 경전을 자주 인용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카르마(Karma)라는 것이 있어 삶을 돌고 돌며 계속해서 갚아나가는 것이 불교의 법칙이었다. 그렇게 치자면 뷔엔 발레리는 전생에도 참 몹쓸 인간이었을 것이다. 하늘에서, 빗방울을, 바람처럼 가르면서, 긱 더 리퍼의 도낏날이 그의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그가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도낏날에 닿은 달빛이 사방으로 찢어졌고, 시커멓게 젖은 코트자락이 비 냄새를 흩날렸다. 수총국의 스페셜 에이전트, 긱 더 리퍼를 추적해왔던 맥기 요원이 칼을 뽑기도 전에 목에서 피분수를 쏟으며 뒤로 쓰러졌다. 두 번째 달빛이 비와 비 사이를 붉게 물들였지만, 발레리는 뒤로 살짝 물러나 피했다. 워낙에 창백한 얼굴이라 놀랐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검을 뽑을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긱 더 리퍼는 계속해서 도끼를 휘둘렀다. 긴 두 다리가, 고기 반찬을 지키는 스기야마 상의 젓가락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다리와 도끼의 움직임은 부드럽고 날쌨다. 나는 둘째치고 스기야마부터가 그 움직임에 놀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발레리는 춤을 추듯 흘렁흘렁 도낏날을 흘리다가 갑자기 골목의 모퉁이를 돌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긱- 더- 리퍼- 다! 여기다! 긱- 더- 리퍼- 다!” 그 소리에 호응하듯 호루라기 소리가 길게 울리더니 제복 경찰들이 아우성을 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긱 더 리퍼는 느닷없는 외침에 잠시 멈추어섰다. 마른 탓인지 그의 몸은 비에 젖은 긴 코트가 거추장스럽지 않아 보일 정도로 더욱 늘씬해보였다. 긱 더 리퍼는 도끼자루를 당겨쥐더니, 한 걸음에 몸을 돌려 단숨에 이 쪽으로 뛰어왔다. 순식간에 그의 살기에 젖은 붉은 눈과 특유의 콧수염이 눈 앞을 가득 메우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커다란 콧날만이 젖은 복면을 뚫고 나오듯 앞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살인 직전의 흥분이 그의 숨결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 비, 비, 비켜라! 로안!”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해롤드 스기야마 평생의 가장 큰 용기였을 것이다. 그는 단련을 게을리 하여 살찐 몸으로 허둥지둥 긱 더 리퍼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켄도는 “뽑아, 칼!” 구령이 있다 해도 기본적으로 검을 뽑은 상태에서 싸우는 검술이었다. 도끼를 든 연쇄살인마가 그 긴 호쿠사이 전통 장검을 뽑을 여유를 줄 리 없었다. 스기야마는 허둥지둥 칼자루를 쑤욱 잡아뽑았고, 정말 황당하게도 뽑는 와중의 칼자루 끝이 긱 더 리퍼의 오른쪽 턱관절을 정통으로 맞혔다. 아마 전생의 스기야마는 좋은 카르마를 많이 쌓은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얼굴에 한 대 맞은 긱 더 리퍼는 뒤로 물러났다. 한손 길이의 외날도끼를 사납게 곧추세웠지만 떨고 있을 망정 스기야마 역시 상단 겨누기 자세로 긱 더 리퍼와 맞섰다. 게다가 제복 경찰들이 이미 그의 등 뒤를 빈틈없이 막아섰다. 비 오는 날만 골라 출몰하는 긱 더 리퍼의 교활함 때문에 화약포가 젖은 제복 경찰들은 상비하는 핸드건을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 단검과 곤봉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끔찍한 연쇄살인마 앞에서도 다수의 힘을 믿는 탓인지 경찰들은 전에 없이 기세등등했다. 마침내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체포하는 역사적인 순간인 것이다.

그 때 돌연 긱 더 리퍼가 다시 한 번 몸을 돌려 제복 경찰들 사이로 돌진했다. 중년의 배불뚝이 호쿠사이 검객과 어린 아이보다 차라리 제복 경찰들을 상대하기가 편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긱 더 리퍼는 긴 다리로 제복 경찰 한 명의 허벅지를 밟았다. 하체가 흔들려 주저앉으려는 그의 낮은 어깨를 연달아 밟고 선 긱 더 리퍼는 몰려든 제복 경찰들의 어깨와 머리를 거침없이 내려밟으며 하늘을 날듯 뛰었다. 망할 발레리가 긱 더 리퍼가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도망치는 건 불가능할 거라더니 지금 그가 그렇게 도망치고 있었다. 긱 더 리퍼는 골목길 옆 담장에 안전하게 착지하여 번개같이 뛰기 시작했다. 뛰는 모습이 빠르면서도 부드럽고 안정적이라 빗방울 하나 날카롭게 튀지 않았다. 보면서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제복 경찰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스기야마는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쇼……쇼우죠우비(草上飛)?” 정말 이 양반의 한가로움에 탄식을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내 목숨을 구했으니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어쨌든 제복 경찰을 따라 뛰기로 결정했다.

그 때 또다시 발레리가 나타났다. 긱 더 리퍼처럼 날렵하진 않았지만 그도 문하생들의 도움을 받은 듯, 펄쩍 뛰어 담장 위로 위태하게 섰다. 긱 더 리퍼는 긴장하면서 도끼자루를 당겨쥐었다. 사력을 다해서라도 뚫고 나갈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 정도 발놀림이라면 못할 것도 없어보였다. 도끼를 코 앞으로 내밀고 살벌하게 달려나갈 기세의 긱 더 리퍼에 비해 발레리는 앞으로 내민 가느다란 검 뒤로 숨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 발을 깡총 내밀고 한 손을 허리춤에 짚고 선 꼴이 광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저 꼴로 발레리는 어머니를 죽였다.

도끼와 칼이 두어 번 빠르게 부딪혔다. 칼은 도끼와 쉽게 얽히지 않았다. 도끼를 막기보다 튕겨서 뿌리치려는 것처럼 보였다. 생긴 것답게 휘두르는 칼질도 삐친 여자가 앵앵대는 꼴이었다. 어쨌든 도끼가 뚫고 갈 여유가 없으니 긱 더 리퍼도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 하다못해 도끼가 칼을 물고 놓아주지 않는 교착 상태라도 만들어야 힘으로라도 누를텐데 발레리는 그럴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역시 교활하고 얄미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경찰을 농락해왔던 긱 더 리퍼가 한 수 위였다. 그는 너무 황당하게도 몸을 돌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뛰기 시작했다. 막고 지키는 것이야 그럭저럭 해도 긱 더 리퍼처럼 빠르게 뛰지 못하는 발레리는 대번에 당혹한 모습이었다. 병신, 그러면 그렇지. 나는 혀를 차며 제복 경찰들과 함께 다시 그를 쫓아 뛰었다. 비 냄새가 언제나 자취를 지워주기 때문에 경찰견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 나조차 안타까웠다. 경찰들은 당황한 나머지 같이 뛰는 나와 스기야마를 제지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긱 더 리퍼는 우리를 조련하듯 여유롭게 뛰었다.

그 때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던 례가 갑작스레 나타났다.

오랫동안 비를 맞았는지 후줄근한 모습이었다. 다리가 불편해서 제대로 뛸 수 없었기 때문에 비에 젖은 긴 머리칼이 넓은 등에 촉수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붉은 빛의 단색 옷이 온 몸에 조이듯 감겨 몸의 윤곽이 여실히 드러난 탓에 그녀의 몸이 얼마나 근육질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례는 커다란 꾸러미를 발판삼아 훌쩍 담장 위로 올라섰다. 천둥치는 소리가 그녀의 왼발에서 울렸다. 무쇠로 만든 의족이 쇠비린내를 질질 흘리며 담장에 중량을 실었다. 의족 아래로 번개 같은 실금이 으지직 퍼지고, 허벅지가 터질듯한 근육과 함께 부풀었다. 례는 담장 아래 비스듬하게 세워둔 꾸러미를 한 호흡에 기둥처럼 휘둘러 긱 더 리퍼를 후려쳤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그는 발 한번 제대로 놀리지 못하고 담장 아래로 처박히듯 떨어졌다. 제복 경찰들이 개미떼처럼 달려들어 도끼를 멀리 걷어차내고 그를 짓밟았다.

“망할 녀석. 코쟁이 주제에 경공이 제법이야. 답설무흔(踏雪無痕)과 초상비(草上飛)까지 쓸 줄은 몰랐다고.”

빅토리아 여왕 재위 11년째, 도끼 하나로 아카치 왕국 전역을 떨게 했던 공포의 살인마 긱 더 리퍼가 마침내 체포되었다. 저 멀리 동방에서 날아온 거인 여전사가 일격에 긱 더 리퍼를 제압하고 제복 경찰들에게 그 신병을 넘겨주었다는 전설 같은 풍문이 돌았으나, 여왕은 직접 성명을 발표하여 그 괴소문을 일축하고 긱 더 리퍼를 체포하다 순직한 특수요원 리처드 맥기를 기사로 추서했다. 물론 나에 대한 혐의를 모두 무효 처리해주기로 한 작은 거래 다음이었다.



2.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례는 심드렁했다.

“맏상주(喪主) 앞에서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어쨌든 재밌었어. 너네 어머니와 그 삐쩍 꼴은 칼잡이가 권투, 그러니까 복싱과 검술을 대표해서 서로 한 판 붙었고, 그래서 너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너는 어머니 복수한답시고 여기저기 온갖 무술은 다 기웃거렸고, 그런 와중에 개며 고양이가 칼로 쑤셔진 채로 죽어나가기 시작했고,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너를 지목해서 그렇게 묶여 있다가, 자비롭고 관대한 내가 그 꼴을 보고 대인(大人)으로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몹시 발동한 탓에 우리가 서로 인연을 엮게 되었다, 라는 얘기지?”

“……뭐, 아주 주관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어쨌든 틀리진 않아요.”

“근데 왜 내가 검술을 가르쳐줘야 하는데?”

“그거야 어머니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니까요? 어차피 여기 있을 동안에 스기야마 도조에 머물 거라면서요. 좀 도와주시면 안돼요?”

“그러니까 그걸 왜 굳이 검술로 갚아야 하느냐고. 너 복서 아들이라며. 그러면 권투로 해야 의미 있는 거 아냐?”

“그런 거 다 따지면서 어떻게 어머니 원수를…….”

“그런 거 따지기 싫으면 차라리 군대 가. 여긴 우리 나라보다 훨씬 그 건(Gun)이라는걸 구하기가 쉽잖아. 우리는 Bull-Jull-Tong이라고 부르지만. 여하튼 그걸로 한 방 쏴버리는게 훨씬 효율적이지 않겠어? 나라가 달라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우리 나라에선 원수 갚을 때 보통 가전무술(家傳武術), 그러니까 부모님으로부터 쭈욱 물려받은 무술로 많이들 싸우지. 그게 아니라면 명문정파의 말석제자로 들어가 장작패기, 설거지부터 하면서 무공을 쌓고. 왜 그럴 거 같아? 복수도 나름대로 타인들의 수용이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이야. 아무튼 로안이랬지? 너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실전에서는 무적이라거나 최강이라는 말 자체가 유치한 거야. 너네 어머니가 딱히 약해서, 혹은 칼이 무조건 주먹보다 길기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니라고.”

“하지만 어머니는…….”

“물론 그 때의 시합을 내가 보지 못했으니까 뭐라고 말할 순 없어. 하지만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놈은 세서 살아 남은게 아니야. 살아남았으니까 세다고 인정하고 넘어가는 거지. 중요한 건 뭘 배웠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상황에 적응했는가일테고. 이런 말해서 좀 뭐하지만, 너네 어머니가 최고의 복서이긴 했어도 검을 상대로는 어떻게 싸울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좀 없었던 거 아닐까?”

“그래요. 사실 그래서 저도 검이 뭔지 궁금해서 여기저기 좀 돌아다녀본 거라구요.”

“뭐 그런 것 치곤 사실 스승이 좀 허술하긴 하네. 그건 인정.”

시끌시끌한 펍 안이었다. 마침내 긱 더 리퍼가 체포된 날을 기념하여 아카치 전역의 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을 터였다. 아직 미성년자인 내가 펍에 들어와도 신경쓰지도 말리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역사적인 현장에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그리고 몇몇 사람 좋은 경찰들이 제법 추어올려준 덕에 마치 긱 더 리퍼의 도주를 결사적으로 막은 듯한 영웅이 된 스기야마는 진작에 취해서 혀가 꼬여 있었다. “크러니카, 췌에카! 커기서, 호옷쿠샤이, 히꾹! 츠어언통으 크엄술로!”

“얹혀 지내는 식객 처지에 이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어떻게 이런 스승을 모실 생각을 했어? 이 인간 다다미에 요즘 펜싱 칼 넣어놓고 자는 거 알아? 그거라도 있으면 뭔가 좀 일이 잘 풀릴 거 같다나 어쩐다나. 아이고, 아무리 만물을 전부 신으로 모시는 호쿠사이 인이라지만.”

할 말이 없어서 깔깔한 입안에 맥주만 퍼넣었다. 스기야마가 말하는 동방은 이런 예의범절을 무척 따진다고 해서 그녀의 눈치를 살폈지만, 례 역시 “너 내년이면 열다섯이라 그랬지? 아무렴, 장부 나이 열다섯이면 HO-PAE를 차야지.” 라는 모를 소리만 하며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튼 나는 몸도 이런데다 네가 원하는 검술 같은 건 가르쳐줄 수 없어.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배운 동방의 무공 같은 건 이 꼴로 가르치긴커녕 내가 쓸 수도 없거든. 그렇다고 군대식 야전 검술? 흥, 그런건 인간 종자가 손댈만한게 못 되지.”

“야전 검술이요?”

“사람 죽이는 실전 검술. 군대에서 필수로 가르치지. 뭐 그것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린 거지만.”

나는 혹했다. 사실 내가 스기야마의 도장에 굳이 입문한 건 단려하고 간결한 움직임의 반복이 좋아서였다. 복싱 역시 기술 자체는 그다지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다. 단지 수없는 반복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얼마나 깊이 숙련되었는지가 중요했할 뿐이다. 그래서 죽도와 목검을 쉬지 않고 휘둘러야 하는 호쿠사이식 검술은 내게 적성이 맞을 줄 알았었다.

“그거…… 가르쳐주시면 안돼요?”

례는 흉터투성이의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웃는 것인지 겁을 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소였다.

“네가, 사람을, 죽일, 각오가, 되어, 있다고?”

겁을 주는 것이었나보다. 

“관둬. 설사 그런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고 해도 아직 애한테 그딴 거 가르치고 싶지 않아. 아니, 그건 애, 어른 관계없어. 사람 죽이면서 사는 삶, 그딴 걸 보고 사는건 너무 참혹하고 끔찍해.”

례는 럼을 물처럼 들이켰다. 아카치는 물이 좋지 않아 아주 정밀하게 증류한 독주(Spirit)가 아니면 명주(名酒)를 구하기가 어려운 나라였다. 례는 트림을 시원하게 해대더니 더 독하고 향이 좋은 술을 찾았다. “이런 술집엔 그런거 없어요. 지금 마신 럼만 해도 뒤끝이 장난 아닐텐데요.” 

“크흐, 술상 앞에서 어른인 척하긴!”

례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성질과 등골을 한꺼번에 긁어내리는 짜증스럽고 불퉁스러운 목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났다. 시끌벅적한 펍의 분위기에서 그 정도 소란은 소란도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몸을 돌리자마자 그 녀석들이 보였다.

항구 도시의 아이들이 샌님으로 자랄리야 없겠지만 엘런과 그 패거리들은 유독 불량한 정도가 심했다. 엘런을 비롯하여 그와 어울리는 아이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장기 항해자인데다 어머니가 신경을 쓰지 않거나 죽거나 도망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엘런은 어머니의 체육관에서 가장 민폐가 심했고, 가장 많이 혼났으며, 어머니가 죽자마자 제일 먼저 발레리 펜싱 클럽으로 옮겨버린 녀석이었다. 개와 고양이들이 죽어나갔을 때 나를 범인으로 몬 것도 이 녀석이었다. 덩치는 컸지만 하는 짓은 좀스러웠다.

“엄마 죽었다고 찔찔 짜면서 개 쑤시는 짓은 이제 그만뒀냐? 조심해라, 치안판사는 둘째치고 우리 그랜드 마스터부터 널 주시하고 계시니까. 긱 더 리퍼도 그 앞에서 쪽도 못쓰는거 봤지?”

“응, 잘 봤지. 꼭 울 어머니 살아 계실 때의 너 같더군. 샌드백도 하나 제대로 못 치는게 맨날 손목만 삐어가지고 찡찡대던 거 기억나냐?”

“이 개새끼가 뒤질라고!”

엘런과 그 패거리들의 허리에서 챙강챙강 쇳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날을 세우지 않았지만 펜서들이 사용하는 길고 가느다랗고 낭창한 검이었다. 끝을 날카롭게 갈아서, 날을 예리하게 세워서, 발레리는 저 칼로 어머니의 미간을 뚫…….

“나가서 싸워! 이 망할 녀석들아!”

펍의 마스터가 맥주잔으로 바를 내려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금방 묻혀버렸다. 엘런은 사납게 덤벼들었다. 그나마 제 스승마냥 광대 꼴을 하며 폴짝폴짝 덤비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기사 녀석은 어머니에게 복싱을 배울 때에도 스텝은 늘 엉망이었다. 제 힘만 믿고 주먹을 휘두르다 샌드백에 손목삐고 스파링에서는 제 풀에 넘어져 씩씩거렸다. 엘런은 칼을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날을 세우지 않은 연습용 검은 회초리처럼 휘어져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나는 슬쩍 뒤로 피했다. 사방으로 잽을 내쏘면서 엘런 패거리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았다. 칼들이,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이기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엘런 녀석의 얼굴에 스트레이트를 한 번 시원하게 꽂아주고 싶었다.   

그 때 갑자기 무언가가 내 앞에 기둥처럼 쾅 하고 굉음을 내며 처박혔다. 그 서슬함에 놀란 사람들이 제풀에 입을 다물어 버리는 바람에 펍은 순식간에 아주 고요해졌다. 

나와 엘런 패거리 사이를 정확히 가로막은 채 펍 바닥에 내리꽂힌 그 것은, 례가 지팡이처럼 체중의 일부를 싣고 뒤뚱거리며 걷던 꾸러미였다. 그 안에 기둥이라도 하나 들었나 했더니, 천이 풀려나며 나타난 물건은 정말로 기둥 못지 않은 양손검이었다. 제대로 손질을 하지 않아 양쪽 날은 무르고 이가 빠졌지만, 칼끝의 첨단부는 아직 날이 살아 있었다. 저런 무지막지한 쇳덩이에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제아무리 긱 더 리퍼라도 실신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뭐, 뭐야 저거……. 블레이드야? 투 핸디드 소드(Two handed sword)?”

“저 애꾸 동양 여자가 저걸 던졌어. 블레이드맨이었나?”

“맨은 무슨…… 여자라며?”

“그렇긴 한데, 저 꼴이 여자야?”

“그렇다고 남자도 아니잖아. 정말 동양은 신비로운 곳이군…….”

“왠지 난 오늘부터 동양의 모든 모든 남편들을 다 존경하고 싶어졌어.”

수군거림은, 례가 입을 열자 다시 잠잠해졌다. 례는 조용히, 그리고 아주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각오 안 된 놈은 칼 잡지 마라. 특히 내 앞에서. 구역질난다.”

정말 저걸, 그 것도 한손으로 던졌나 싶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얼어붙어 있었다. 아니, 단 한 사람, 해롤드 스기야마만큼은 그다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단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흥……. 참마도(斬馬刀).” 라고 말했을 뿐이다. 아주 훗날에야 기병이 발달하지 않은 동방의 보병들이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썼던 커다란 칼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때 누군가가 외쳤다.

“무슈 발레리!”

뷔엔 발레리, 귀신같이 그가 나타났다. 평범한 펍에 오기엔 너무 비싸고 화려해서 재수없는 복장 그대로였다. 금발의 곱슬머리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비싼 안경을 쓰고 있었다. 엘런을 비롯한 패거리들이 비척거리며 그 주위로 몰려섰다.

“그랜드 마스터, 그러니까 이게…….”

“그만. 네 이름은? ……아니, 그 것도 됐다. 어쨌든 우리 클럽의 생도로군. 어서 돌아가라. 앞으로 아무데서나 에뻬(Epee)를 차고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면 규율에 따라 체벌하겠다.”

체벌. 엘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녀석은 입을 댓발이나 내밀고 제 패거리들을 수습하여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숨을 죽이고 있었고, 스기야마도 순식간에 술이 깬 얼굴로 뷔엔 발레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의 자신의 키만한 커다란 칼을 잠시 바라보더니 곧 담담한 얼굴로 럼을 마시고 있는 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동방의 여전사님.”

“관둬. 어린 애들이 다 그렇지 뭘.”

“동방에서는 어린 아이라고 해도 무척 엄정히 교육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여왕을 모시는 우리들도 나름대로 어린 아이들을 신사와 기사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쉽지 않군요. 아무쪼록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일 없어.”

례는 피식 웃으면서 럼 병을 들어보였다. 뷔엔 발레리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이 안경을 검지로 잡고 살짝 치켜올리며 목례를 하곤 몸을 돌렸다. 이색적인 두 검사들이 만나는 자리에서 행여나 근사한 구경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던 사람들은 아주 조그맣게 불만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그 때 갑자기 례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끄으으으으억. 아, 미안. 입을 벌리니까 이 녀석이 먼저 나오네. 흐. 어이, 칼잡이 샌님 양반. 할 말이 있는데 말야.”

거칠고 무례한 말투에 트림까지 앞세웠는데도 뷔엔 발레리는 고상한 척 별말 하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몸을 반쯤 돌렸다. 어머니가 얘기한 적이 있는 콘트라포스트(Contrapost). 가장 아름다운 인체의 역동미를 느낄 수 있는 불균형하게 뒤틀린 자세였다. 그 자세를 더욱 견고하게 응축시켜야 제대로 된 펀치, 특히 어퍼(Upper)가 나온다고 어머니는 말했었다.

“하시지요.”

“그 고양이들 말야. 고양이랑 개들.”

“…아, 네, 그 찔린 고양이와 개들. 네, 참혹한 일입니다. 저는 모두 정성껏 묻어주도록 지시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본의아니게 사건의 발단이나 계기가 된듯하여 그 정도 책임은 져야할 것 같았습니다.”

“뭐 정성껏이야 본인의 정성껏일테고, 제아무리 스승의 말이래도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 제자 놈들은 꼭 있기 마련이지.”

그 말에 갑자기 엘런과 몇몇 패거리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발레리도 분명히 그 움직임을 봤을 테지만 탓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맞습니다. 어딜 가나 있지요. 그러나 무도(舞蹈)든 무도(武道)든 그러한 제 자신을 극복하고 삶의 방향을 깨달아나가야 하는 과정 아니겠습니까?”

“오오, 훌륭한 말씀. 그렇지만 솔직히 이 보잘것없는 년은 무식한 군바리 출신이라 그런건 잘 몰라. 근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 죽이는 일을 업으로 해서 먹고 살아 그런지 아주 희한한 게 보이더란 말야. 그 고양이랑 개들 시체에서.”

“뭐가…… 말입니까?”

례는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 정중앙을 꾸욱 찔러보였다.

“글쎄, 한 놈도 빠짐없이, 이마 정중앙만 아주 정확하게 찔렀더라니까. 모든 시체들을 전부 말야. 아무리 노리고 찔렀어도 한두 개 정돈 빗나갔을 법도 한데. 누가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게다가 폭도 지금 보아하니, 아아, 에뻬? 이름도 어려워라. 그 송곳처럼 생긴 그 칼로 폭폭 찌른 게 아닌가 싶은데. 내 생각이 지나치게 멀리 갔나?”

뷔엔 발레리는 몸을 바로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허리를 바로 폈다. 그는 화려하게 장식한 검은 가죽 칼집의 에뻬를 손으로 들어보였다.

“클럽의 모든 생도들에게 연습용 에뻬를 적당한 가격에 지급하고 있긴 합니다만, 자격이 되지 않은 수강생들의 칼은 모두 날을 세우지 못하도록 금지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연습용이지요. 물론…….”

발레리는 엄지로 자루와 날 사이의 칼받이 부분을 가볍게 밀어올려 살짝 칼날을 드러냈다.

“저와 몇몇 마스터급 사범들은 날을 세운 칼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은 다시 칼집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훨씬 팽팽해진 긴장감 속에서 례와 발레리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나는 절대로 길짐승들을 찔러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양이와 개들 이마만 노렸다고 뷔엔 발레리를 바로 범인으로 지목하기엔 아무 증거도 없었다. 갑작스레 례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스기야마조차 굳어진 표정으로 례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방에서 오신 손님께서는 아무래도 제가 흉기를 가지고 다닌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그렇게 치자면 군인 출신인 당신도 단검 한 자루 정도는 가지고 계시겠죠. 게다가 대장장이며 무두장이, 목수들도 전부 용의자가 될테고요. 물론 동방에서 오신 손님이 관광보다 수사를 취미로 하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만 이 곳의 수사관들도 그 정도 생각은 다 하고 계신답니다. 그리고 저는 당연히 무혐의 판정을 받았지요.”

“아아, 화가 났다면 미안하구만. 나는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였지, 뭐 고명하신 검객께서 그런 추잡스러운 범죄자일 거라곤 말하지 않았으니까.”

례는 빙긋이 웃었다. 

“이제 가봐도 되겠습니까?”

뷔엔 발레리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례는 실례했다는 뜻으로 네모진 턱을 숙여보였다. 남자처럼 선이 굵고 왁살스러운 턱이었다. 발레리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목을 숙여 인사를 받고는 뒤로 돌았다. 그 때 례가 또다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도, 얼른 그녀를 보내는 게 좋을걸.”

발레리의 걸음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대답도 없었다. 그는 대신 칼을 들지 않은 손으로 부하들을 모두 이끌고 나갔다. 사람들은 다시 한번 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킥킥거리면서 술만 마셨다. “나한테는 보여. 난 봤다구. 수도 없이 봤어. 어쩌나. 그 여자뿐만이 아닐텐데.” 보아하니 저 곱상한 얼굴로 어디 사창가나 들락거렸던 모양이다. 구역질 나는 자식. 역시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3.



“멍청아, 몽둥이(Staff)를 쓰라고!”

스태프(Staff)가 아니고 스텝(Step)이라고 고쳐줄 여유가 없었다. 커다란 주먹이 연달아 날아들어왔다. 그나마 주먹은 어머니와의 스파링 때문에 그럭저럭 보이는데 허리 아래의 발이 문제였다. 레호(Leho) 거리의 미친 개(Mad Dog) 더그는 퇴락한 주정꾼이었지만 아직 베어너클 파이트의 강자였다. 말 그대로 맨주먹만 가지고 용력을 겨루던 권투가 형식적으로나마 규칙을 갖춘 복싱이 되면서 베어너클 파이트의 룰은 더욱 과격해졌다. 팔꿈치는 물론이고, 무릎이나 발차기도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왔다. 심지어 레호 거리에서는 무기를 써도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사람들은 다양한 공격 방식이 불러오는 유혈 사태에 광분했다. 비록 마셨을 때 미친 개고, 깨고 나면 그냥 개라는 더그지만 그는 아직 이 지역 베어너클 파이트의 터줏대감이었다. 술만 조금 덜 마시면 긱 더 리퍼를 잡았을 거라는 레호 거리 놀량패들의 신망도 두터웠다.

“몽둥이? 조오치, 뭐든 써봐! 네 어미처럼 깔끔하게 죽지는 못할테니까!”

다시 주먹이 부웅 하고 날아왔다. 굳이 말하자면 훅은 훅이지만 완력만 믿고 길게 휘두르는 초심자의 주먹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초심자가 나보다 백 파운드는 더 나갈, 곰 같은 거한이라는 점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운동하고 시합하던, 절제되고 늘씬한 근육을 가진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뼈대가 굵고 살점이 두툼한 몸뚱이였다. 차라리 바위와 씨름을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는 재빨리 주먹을 피하면서 옆으로 빠졌다. 어머니가 수도 없이 가르쳐준 스텝이었다. 다시 례의 목소리가 들렸다. 

“멍청아! 물러나지 말고 앞으로 나가, 밀어붙이라고!”

제아무리 아웃 복서라고 한들 도망만 다녀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완력에 자신이 있는 인파이터는 빠른 이동보다 버티는 스텝에 치중한다. 스탠스를 넓게, 간격은 짧게 잡고, 엄지발가락과 발뒤꿈치에 탄력과 부하를 반복하며 연타를 날려 상대를 제압한다. 아주 원시적인 방식이었지만 완력과 뼈대를 타고난 더그는 지금 그런 방식으로 무작스럽게 나를 몰아대고 있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멧돼지 같은 기세였다. 나는 바람처럼 치고 빠져야 했다. 상대가 치기 전에 치고, 칠 때 뒤로 빠지고, 치고 나서 다시 치는 스텝을 나는 분명히 배웠다. 다만 저 거대한 살덩어리 앞에서 나는 겁에 질려 토끼처럼 도망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복싱 경기로 치면 몇 라운드일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심판이 휴식을 선언하여 겨우 뒤로 물러났다. 관중들의 야유와 무시와 비난이 담배꽁초, 깨진 술잔과 함께 섞여 날아들었다. 더그는 여유롭게 제 자리로 돌아가 맥주를 물처럼 들이키고 있었다. 땀에 젖어 번들대는 뱃살이 꿀렁거렸다. 배를 잘못 맞으면 창자가 터진다며 어머니가 절대 엄금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내 주먹은 저 자의 창자는커녕 뱃살에도 흠집을 못 낼 것이다.

“걸음” 을 “몽둥이” 로 외친 장본인이 커다란 손으로 내 이마를 꽈악 잡았다. 온 몸이 땀으로 흠뻑 달아올라 그녀의 손조차 시원했다. 차라리 례가 더그와 한 판 붙었더라면 훨씬 어울렸을 것이다.

“야, 너 지금 뭐하는 거야? 계속 도망만 다니다 잡히면 박살난다?”

“누가 몰라서 이래요? 틈이 안 보이잖아요, 틈이!”

짜증이 나서 례의 손을 치우고 스기야마의 손에서 물병을 받아 입을 가셨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호쿠사이식 전통 의상을 구해다 입고 어울리지도 않게 땀수건을 목에 차고 있었다. 누가 보면 스기야마에게 복싱까지 배운 줄 알 것이다.

“틈이 안 보여? 난 엄청 잘 보이던데. 겁먹어서 눈알이 쫄아붙은 건 아니고?”

“아무리 베어너클이라지만 체급 차 좀 보세요! 내 펀치가 통하기나 하겠어요? 팔다리 길이도 너무 차이난다고요!”

례는 한숨을 내쉬면서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벅벅 긁었다. 굵고 거칠었지만 의외로 숱이 많지 않은 머리칼이었다. 두피에서 제법 큼직한 흉터 몇 개를 본 것 같기도 했다. 례는 반대편에서 아주 여유롭게 두 번째 맥주병을 따면서 숫제 술판을 벌이고 있는 더그를 건너다보더니, 어느 정도 잔소리를 해도 되겠다는 듯이 나를 주저앉혔다.

“앉아서 쉬어. 빨리 회복되게. 쉬면서 들으라고. 너처럼 따지면 세상 사람들 다 창이랑 활만 갖고 싸우지 뭐하러 칼은 배우겠냐. 칼든 놈은 칼든 놈대로 싸우는 방식이 있고, 주먹쥔 놈은 주먹쥔 대로 싸우는 방식이 있는거야. 너더러 그렇게 도망다니라고 어머니가 몽둥…… 아니, 스텝만 죽어라고 가르친게 아니란 말이다. 간격, 간격! 간격을 잡으라고!”

례가 나를 베어너클 파이트에 출전시키기 전부터 무수히 반복했던 말이었다. “무공의 팔할은 보법(步法)이다.” “보법을 함부로 전수하면 스승이 제자에게 뒤통수를 맞는 법.” 이니 어쩌니 희한한 소리를 하는 스기야마가 보는 앞에서 나는 그 동안 꾸준하게 해온 복싱의 스텝을 선보였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는 하루도 거르지 못했던 로드워크로 단련된 발이었다. 하기사 스기야마에게 켄도를 배울 때도 “여는 발” “닫는 발” “미는 발” “감춤발” 따위의 이상스러운 스텝을 배우긴 했었다. 발레리 펜싱 클럽의 수강생들은 타이즈를 신은 광대 꼴로 앞뒤로 아주 빠르게 찌르고 베며 움직였다. 움직임 자체를 따라잡거나 흉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균형이었다. 생각보다 만족스러워 하는 례 앞에서 나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펀치를 휘두르면 균형이 깨진다구요. 뭔가 제대로 때리는 거 같지 않다니까요.”

“멍충아. 주먹과 발을 따로 생각하니까 그렇지. 주먹은 팔힘만 가지고 휘두르는 게 아냐. 발에서부터 힘을 끌어올려서 등으로부터 뻗는 거라고.”

그 때 나는 잠시 멍해졌었다. 례가 하는 말은 어머니가 하는 말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주먹은 발로 치는 거라고 말하면서 매일 10km씩 로드워크를 시켰다. 달리지 않으면 하체가 풀린다. 그러면 펀치는 젖혀두고 체력전에서 지는 거라고 했다. “체력이 말라서 졌다는 변명은 복서에게 통하지 않아.” 어머니는 나보다 더 긴 거리를, 더 빠르고 악착같이 뛰었고, 항상 경기가 끝날 때까지 처음과 같은 체력과 위력을 유지했다. 나도 주먹을 빨리 내뻗고 싶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스텝이 우선이었다. 샌드백을 앞에 두고 주먹 한 번 뻗어보지 못한 채 춤추듯 발만 써야 하는 내 앞에서 엘런과 그 패거리들은 비웃음을 흘리며 나갔다. 그러자 어머니는 뜻모를 소리만 했었다. “택견꾼은 품만 3년을 밟는다.” “그게 무슨 소리야?” “꾀부리지 말고 스텝 연습 잘하라는 말은 동서(東西)가 똑같다는 뜻이야.” 땀이 스며 뭉친 근육을 풀어주면서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엄지발가락, 발바닥, 발뒤꿈치, 종아리, 허리, 등, 어깨, 팔, 주먹 끝까지 흐르는 선을 부드럽게 그렸다.

“발에서 체중을 끌어서 하체를 타고 허리에 심었다가 등을 중심으로 쭈욱 뻗는 거야. 펀치를 날릴 때마다 너는 나무여야 해. 꽃을 피우듯 주먹 끝으로 힘을 내쏜다고 생각하라구. 그러려면 어깨와 팔이 경직되지 말고 늘 가볍고 부드러워야하지.”

“어머닌…… 그런 걸 어떻게 알았는데?”

허벅지 뒤쪽 오금 근육을 풀어주던 어머니의 손이 잠깐 멈칫했었다. 

“내 스승님이 가르쳐줬지.” 

그리고 어머니는 손아귀에 힘을 꾸욱 주어 근육을 더 세게 풀었다. 온 몸이 찢어지는 듯 아파서 버둥대며 소리를 지르느라 나는 혹시 그 스승이 내 아버지냐고 미처 물어볼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무렵의 과거에 빠져 있는 동안 미친 개 더그는 맥주 네 병을 마시고 일어났다. “마지막 한 병은 꼬맹이를 엄마 품으로 날려버리고 마시겠어! 아, 그 여잔 이미 뒈졌나? 그럼, 끄어어억, 젠킨스 그 망할 영감 불러! 어른 관 반 자르면 꼬맹이 관되지?” 레호 거리의 껄렁패들이 환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명한 복싱 선수면서도 베어너클 파이트와 연관을 맺지 않은 어머니는 이 근방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었다. 한번쯤 출전해줄 수도 있지 않냐는 마피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쓰게 웃으면서 “동방 반도에서 충분히 겪었어요. 더 이상 야만스러운 노예의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네요.” 라고 거절했었다. 

하지만 례는, 자신의 검술을 가르쳐 주는 대신 오히려 나를 이 곳에 출전시켰다. 어머니조차 외면했던 강렬한 공격성을 일깨워주려는 의도였는지도 몰랐다. 물론 확신할 순 없었다. 일단은 살아남아야 한다. 

“네가 할 수 있는 걸 해! 무리하지 마! 넌 창이 아냐, 칼이다!”

“꼬맹이가 나온 거 자체가 무리야, 이 미친 년아…… 흐억!”

누군가 례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뒤늦게 그 얼굴을 본 모양이었다. 례가 무언가를 집어던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소리보다 눈이 더 선명했다. 길게 당긴 주먹이 내 정수리를 깨려고 망치처럼 비스듬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주먹을 보호하기 위해 얇은 천을 감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나마도 없는 맨주먹이 대부분이었다. 글러브로 감싼 주먹과 달리 수많은 변형과 변칙이 가능했다. 어머니라면 스웨이(Sway)하거나 비스듬히 머리를 제끼면서(Head slip)하면서 카운터를 꽂았을 것이다. 물론 나는 불가능해서 아직 아들이다. 대신 옆으로 돌면서 흩뿌리듯 그의 뱃살에 주먹을 꽂았다. 되든 안되든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었다. 맥주로 가득 찬 미친 개 더그의 배는 물렁하면서도 묵직하고 단단했다. 겉은 지방이었지만, 속에는 제법 옹골찬 근육이 심처럼 박혀 있었다. 

“꼬맹이가 재롱 피네!”

그는 여유롭게 웃음을 빼문 채로 손등으로 겨눈 뒤 가로로 휘둘러그었다. 복싱에서는 반칙인 백스핀 블로우(Back-spin Blow)였지만 원심력으로 쏘아지는 위력은 확실했다. 머리칼을 끊어낼듯 매서운 주먹이었다. 고개를 수그려 피하면서 다시 복부에 두어 방 꽂아넣고 옆으로 빠졌다. 복부를 맞아 실신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에 통증과 호흡 곤란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복부 공격은 지옥의 공격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체급 차가 너무 났다. 아무리 맥주를 물처럼 마셨어도 내 펀치로 그에게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다. 

체급이 같아도 신장 차가 많이 나는 경우는 있다. 그럴 때는 복부 연타로 상체를 수그리게 한 다음, 무방비로 내려온 턱에 일격을 꽂는 전법을 쓴다. 실제로 나는 어머니가 2m가 넘는 거인 선수도 그 전법으로 무너뜨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하면 미친 개의 턱을 내 눈 앞까지 내려오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눈 앞에서 춤을 추는 주먹들을 피하면서 생각했다. 

“다운(Down)!”

누가 다운을 먹었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아래를 보란 뜻이었다. 느닷없이 발이 세게 날아왔다. 어머니는 복싱 신봉자였다. 두 발로 서는 인간이 한 발을 공격에 쓰는데 중심이 흐트러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어설프게 발차기를 쓰느니 주먹을 정교하게 다듬으라고 충고했다. 례는 “다 동의할 순 없지만, 십각구위(十脚九危)도 일리는 있는 말이지.” 라고 첨언했다. 미친 개 더그의 발차기는 발을 찬다기보다 던지는 발길질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베어너클 파이트에는 넘어진 사람에게도 주먹을 소나기처럼 퍼붓는 마운트 펀치 룰이 적용되고 있었다. 발길질 자체는 피하기 어렵지 않았지만, 그 쪽에 신경이 나누어지니 대번에 내 움직임도 흐트러졌다. 이러다 구석으로 몰리면 끝장이었다. 더그도 더 이상은 나를 봐주지 않을 셈인 것 같았다.

크게 한 방 먹이려는 듯 더그의 턱이 아래로 당겨지고, 오른팔이 장전되듯 어깨를 뒤로 물렸다. 전문적으로 복싱을 배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였다. 위력을 높이기 위해 한 호흡을 쉬면서 주먹을 뒤로 뺄 때, 복서는 허리를 뒤틀어 신장력을 높이며 단번에 앞으로 튀어나간다. 지금 이 때를 놓치면 나는 중량 차 때문에 도망칠 짬도 없이 벽 쪽으로 몰릴 터였다. 나는 그의 목 언저리와 명치와 복부를 빠르게 연타했다. 

“사람 몸의 정중선(正中線)을 노려봐. 콧등, 인중, 목, 명치, 단전, 낭심처럼 인간의 급소를 세로로 잇는 선이야. 호쿠사이의 가라데(空手道/Karate)는 이 정중선을 정권으로 연타하는 기술을 필수적으로 연마하게끔 하지.”

빈둥거리기가 미안했던지 례 옆에서 스기야마가 훈수를 둔 적이 있었다. 묵직하고 두툼한 글러브를 낀 손으로는 예리한 펀치를 날리기 어려웠지만 이 곳은 베어너클 파이트였다. 나는 주먹에 얇은 천만을 감고 있었다. 비록 턱을 치진 못했지만 급소를 쳐갈긴 탓인지 혹은 허를 찔린 탓인지 더그는 처음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미친 개답지 않은 후진이었다. 그는 양주먹을 사방으로 마구 날렸다. 체력을 소비하도록 뒤로 잠깐 물러난 다음 그가 팔을 늘어뜨리자마자 다시 앞으로 튀어나가 명치와 복부를 연타했다. 명치를 때릴 때마다 더그의 호흡이 부서지며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몸뚱이가 떨리는 느낌이 주먹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어머니가 누누이 얘기하던, “손맛” 이었다.

“이 새끼 죽여버린다!”

갑자기 판이 몰리자 이성을 잃은 듯한 더그가 술냄새를 풍기며 양팔을 길게 벌렸다. 베어너클 파이트에서 신사적으로 클린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나를 끌어안고 박치기라도 할 심산인가 보았다. 이를 앙다문채 턱을 가슴 안쪽으로 깊숙이 끌어당기고 정수리를 내보인 채 황소처럼 덤벼들었다. 정면에서 턱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쉬운 대로 훅이 닿는 거리였다. 왼쪽 어깨를 마주 내밀어 달려들면서 오른쪽 펀치를 그의 얼굴에 꽂아넣었다. 볼살이 크게 일그러지면서 땀방울이 내 얼굴에 튀었다. 가슴에 붙였던 턱이 주르륵 미끄러져내렸다. 그러나 아직 멀다. 대신 왼쪽 훅으로 다시 한 번 관자놀이를 후렸다.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얼굴이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역전에 분위기가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베어너클 파이트는 공공연하게 돈거래가 오가는 경기였다. 아마 나에게 돈을 건 사람들은 거의 없을 터였다. 반면 더그는 이 경기에서 실패했다가는 그나마 직업 같지도 않은 이 직업조차 잃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베어너클 파이트의 왕자답게 그는 주먹을 세차게 휘둘렀다. 내 훅이 닿는데 그의 훅이 닿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대로 십자 블로킹으로 그의 주먹을 끊었다. 헤비급의 펀치도 막아내는 가장 두터운 방어였지만 글러브를 낀 복싱 경기에서나 통하는 말이다. 팔뚝이 부서질 듯 찌릿찌릿한 고통이 오면서 내 몸이 붕 뜨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팔이 저려서 두 번째 공격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더그의 주먹은 미친 개의 이빨처럼 날아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나도 모르게 어떻게 그런 공격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급한대로 저린 오른팔을 뻗었다. 그 팔이 우연치 않게 더그의 왼쪽 펀치와 얽혔다. 내 오른손이 더그의 왼팔 팔꿈치 안쪽과 교차되면서 나는 그 것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의 왼쪽 겨드랑이 아래 늑골 부위가 내 앞에서 훤하게, 아주 선명하게 드러났다.

오른발을 앞으로 내뻗으면서 그 상태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몸을 최대한 웅크려서 그의 모든 공격에 대비했다. 이미 깊이 안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발도 쓸 수 없을 터였다. 그 상태에서 허리를 휘돌리며 체중을 실은 훅을 쳤다. 손맛이 있다. 다시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나는 거대한 더그의 몸뚱이가 샌드백이라도 되는 것처럼 훅을 세 번 날렸다. 그리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내 공격은 별 타격이 없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더그의 공격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

미친 개 더그가 내 앞에서 몸을 웅크렸다. 오른손을 왼쪽 겨드랑이 아래에 끼운 채 뻘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뭐해, 이 멍충아! 바깥팔목으로 막기 잘해놓고! 코! 코를 노려!” 례의 말이 이번엔 분명하게 들렸다. 생각할 틈도 없이 한 걸음에 뛰어들어가 스트레이트를 쭈욱 뻗었다. 고통 때문에 몸을 한껏 수그린 더그의 코가 내 주먹에 분명히 닿았다. 쇠 냄새 풍기는 코피가 포도주처럼 터졌다. 호흡을 완전히 놓으면서 더그가 턱을 늘어뜨렸다. 코피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린 것일 게다. 이 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다시 한 번 안으로 들어가면서 허리를 숙였다가 대각선으로 비틀면서 힘차게 주먹을 뻗었다. 체중을 실은 어퍼였다. 

더그가 뱉어낸 피와 침이 정말로 빗방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왼팔을 겨드랑이에 바짝 붙인 채 오른팔만 사정없이 휘둘렀다. 그러나 기세는 좋았을 뿐, 이미 주먹의 끝은 조준도 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아마 내 훅 연타에 늑골을 다친 모양이었다. 나는 뱅뱅 돌면서 가드가 전혀 없는 그의 왼쪽을 계속해서 공략했다. 어디를 맞든 상관이 없었다. 딱히 얼굴이 아니라도 좋았다. 나는 오른손잡이였고, 얇은 천만 감아둔 맨주먹이었고, 게다가 그는 왼쪽 늑골을 다쳤다. 얻어맞을 때마다 늑골이 울려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오른팔을 풍차처럼 내돌렸지만 그 것도 잠시뿐이었다. 지친 그가 오른팔을 늘어뜨릴 때 나는 가장 자신 있는 스텝으로 단번에 그의 오른쪽으로 휘어들어가 옆구리를 후려치고 빠져나왔다. 그는 깜짝 놀라 오른팔로 어설프게 자신의 상반신을 가렸다. 고통으로 관자놀이가 움찔거리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때를 놓치지 않고 다시 왼쪽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심판이 달려들어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복싱 경기였다면 확실히 더그의 스탠딩 다운이었다. 그러나 심판은 우리를 양쪽 코너로 돌려보냈다. 이번 라운드는 확실히 다른 라운드보다 짧았다. 더그에게 돈을 건 작자들이 몸이 달아 수를 쓴 게 분명했다. 어차피 체급이 달라서 내가 그에게 KO를 단번에 따낼 수는 없었다. 나는 스기야마의 전폭적인 응원을 받으면서 의자에 앉아 호흡을 골랐다. 례는 빙긋이 웃었다. “좋아, 기세 탔어. 그렇게만 해. 집중력 흐트러지지 말고. 그나저나 그 바깥팔목 옆막기는, 스기야마 상, 당신이 가르쳤어?” “아니오……….” “놀랄 노 자로군.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그 때 갑자기 몇 명의 우락부락한 거한들이 관중들 사이를 비집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제아무리 복싱 링처럼 무대가 따로 없고 나무판자를 얼기설기 둘러쳐 만든 임시 경기장이라고는 하지만 베어너클 파이트도 엄연히 시합이다. 그들은 행색이 거칠었고, 덤불 같은 수염을 길렀으며, 하나같이 머리를 몽크(Monk)처럼 반들반들하게 밀었고, 례만큼은 아니었어도 역시 무늬 같은 칼자국을 얼굴에 한두 개씩 새겨넣고 있었다. 틀림없이 레호 거리의 승부 조작 브로커들이었다. 아무리 도박 시합이 성행하는 베어너클 파이트라지만 그들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다.

뜻밖에도, 베어너클 파이트 경기장도 기웃거려 본 모양인지 스기야마가 주눅든 목소리로 속삭였다.

“망했다. 브록킨 패거리야. 발렌(Wallen) 공국에서 넘어온 것들이 예서까지 지랄이네.”

척 봐도 엘런과 그 패거리들은 비교해보야 그저 귀여운 촌뜨기들에 지나지 않을 듯한, 정말로 전문적인 폭력배들의 냄새로 짙게 쩔어 있는 작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품에서 뜻밖에도 짧은 화승총을 꺼냈다. 비록 구식 화기이긴 해도 그들은 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온 몸의 땀방울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었다. 

“총알 먹을래, 집밥 먹을래?”

나는 반사적으로 등 뒤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레호 거리의 껄렁패들이라도 총에는 별 수 없었다. 사방으로 소란이 일었다. 그 와중에 스기야마가 내빼지 않은 건 용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바랄 순 없었다. 례의 표정은 별달리 변화가 없었다.

“밥은 역시 집밥이지.”

례는 망설일 것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약간 의외였다. 례가 금방이라도 그 커다란 칼을 꾸러미에서 뽑아 단번에 브록킨 패거리들을 토막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스기야마를 쿡 찔러서 짐을 챙기도록 했다. 스기야마는 허둥지둥 목에 건 수건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그러나 나는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례를 쳐다보았다.

“이봐, 무섭게 생긴 아저씨들. 혹시 개평 같은 건 없나, 이 나라엔?”

패거리들 중 관록이 있어보이는 중년 남자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술집에서 에뜨르아 칼잡이를 갖고 놀았다더니, 배짱 한 번 두둑하군. 동방 여자들은 다 그런가?”

“동방 서방을 떠나서, 남자 여자를 떠나서, 배짱과도 관계없이, 이 꼬마 불쌍하지도 않아? 아직 어린애야. 황소 같은 장정이랑 정면으로 붙었다구. 목욕비나 밥값 정돈 챙겨줘야 하는거 아냐?”

례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중년 남자는 등을 돌려 더그의 상태를 살폈다. 사람을 때리는데 이골이 난 인간은 어느 정도 의학적 지식도 갖추기 마련인지 그는 더그의 어깨를 돌리기도 하고 팔을 쭈욱 펴보기도 했다. 그 때마다 더그는 미친 개라기보다 꼬리를 내린 개처럼 끙끙대면서 죽을 상을 했다. 중년 남자는 침을 퉤 뱉더니 나를 노려보며 걸어왔다. 그의 손이 품 안에 들어가자 스기야마가 당황해서 얼른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의 허리는 비어 있었다. 사무라이에게 검은 목숨과 같다고 주접을 떨더니만, 역시 해롤드 스기야마는 문제가 있는 인간이다. 

다행히도 중년 남자의 손에서는 무기 대신 잔돈푼이나 들은 듯한 주머니가 끌려나왔다. 그는 돈주머니를 공기놀이하듯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했다. 

“두 번 다시 여길 기웃거리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약속하지. 원하는 건 얻었으니까.”

“원하는 걸 얻었다고?”

나는 흠칫했다. 대체 무얼 얻었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완전한 승리는커녕 브록킨 패거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돈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례는 몹시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적어도 한 고비를 넘긴 사람만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 보통 경기에서 이기고 난 뒤 어머니의 표정이 비슷했었다. 그러나 례는 등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그녀의 오른쪽 무쇠다리가 꿍꿍 울었다. 브록킨 패거리들의 손에서 언뜻 칼을 본 듯하다고 생각한 순간, 례의 팔이 거칠게 내 뒷덜미를 끌고 갔다. 스기야마만이 겁먹은 눈초리로 계속 뒤를 흘끔거렸다. 



4.



“내가 왜 동정해야 하는데?” 

례는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꼭 동정이 아니더라도 례는 얼마 전에 저도 구해줬고…….”

“네가 한 짓 아니라며?”

“………네?”

“네가 안 그랬다며. 아니야? 역시 니 엄마 죽었다고 네가 개랑 고양이 쑤시고 다녔어?”

“아니, 아니에요! 안했어요, 내가 한 짓 아니에요!”

례는 피식 웃었다. 

“그래, 내 생각도 그래. 더군다나 덩치만 컸지 아직 어린애가 무슨 짓을 했던 간에 나뭇대에 매어놓는 이 곳의 처벌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야. 하지만 미친 갠지 옆집 갠지 그 녀석은 지 꼴리는대로 살면서 지 뜻대로 결정한 일이잖냐. 주먹패로 먹고 산다는 거, 볼장 다 보면 끝물은 그런거지. 그 놈도 그걸 아니까 틈만 나면 술 처먹고 잊으려 했을 거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 때리면서 사는 삶 따위, 안 살면 그만이야. 명색이 사내새끼가 충분히 알고 결정한 일에 뭐하러 끼어드냐?”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례의 냉정한 말이 곧 어른들의 세계인가 싶었다. 어이없는 패배의 대가로 손가락을 모두 잘린 미친 개 더그는 그 날 이후 베어너클 파이트는커녕 제 손으로 수프 한 수저 제대로 떠먹을 수 없다고 들었다.    

“아마 그 인간들은 거기 밥 오래 먹을 생각 없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갑작스레 경기를 깽판 놓지야 않았겠지. 오히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가 녀석들이 발 빼도록 계기 한 번 잘 만들어준 셈이 되었군 그래.”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이제 그만. 입 닫고 네 일이나 신경 써. 전우애도 네 앞가림이나 해야 가지는 거다.”

정말 언제 날 잡아서 말이나 다시 가르쳐주든지 해야겠다. 아무리 감안을 해도 말투가 때때로 내 성질을 긁는다. 동방인들은 무척 예의가 바르다고 들었는데 례나 스기야마나 내가 아는 동방인과는 정말 거리가 멀어보였다. 스기야마 말마따나 진짜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을 가르며 채찍이 휙 날아왔다. 말 때릴때나 쓰는 도구를 사람에게 휘두르다니 정말 최악이다. “몸을 먼저 움직여!” 채찍 끝에 례의 엄격한 호통이 실렸다. 채찍은 뱀처럼 고개를 들고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끄트머리만 보면 될 것 같지만 채찍의 궤도는 손목을 아주 약간만 움직여도 크게 휘어지며 바뀌었다. 처음에 이 훈련을 했을 때 나는 채찍 끝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얻어맞았었다. 이 훈련의 목적은 채찍을 완벽하게 피해서 내가 례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데에 있었다.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어찌어찌 피할 수는 있었다. 미친 개 더그와의 경기에서도 부족하나마 이 훈련이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물론 례가 보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다.

“피하고 끝내지 마! 채찍 끝에서만 빙빙 돌지 말란 말야! 안으로 들어와!”

말은 쉬웠다. 채찍 끝이 약이 바짝 오른 뱀처럼 덤벼드는 상황에서 한 발짝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았다. 어설피 들어갔다가 물러날 때까지 계속해서 채찍이 돌풍처럼 온 몸에 감겨들기도 했다. 더그의 주먹이 묵직하게 온 몸을 부순다면, 채찍은 칼처럼 얇고 깊게 몸의 틈을 파고들었다. 무섭기로 치자면 무엇이든 마찬가지였다. 두려움으로 발이 굳어 몸을 사릴 때 채찍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다가 느닷없이 시야에서 사라져 발밑을 훔치곤 했다. 복싱 선수의 아들이 엉뚱하게 낙법부터 익숙해지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에 흙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나는 몸을 대충 털면서 일어났다. 처음 넘어졌을 때는 머리부터 떨어지는 바람에 가벼운 뇌진탕으로 며칠 고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에도 례는 채찍 훈련을 계속했다. 처음에 날 구할 때 교육 어쩌고 하더니 오히려 제가 더 엄하게 나를 잡았다. 그러나 어쩐지 어머니를 생각나게 했다.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례를 따라 충실히 훈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괭이질이나…… 해머질 같은 건, 안해요?”

잠시 쉴 겸해서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내가 생각해도 얕은 꼼수였지만 례도 거기까지는 탓하지 않고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등 근육 키워서 주먹 힘을 기르는 훈련 말이지? 물론 때 되면 해야지. 하지만 그 때는 내가 없을 거니까 네가 알아서 잘해봐. 다른 스승을 구하든지.”

“……네?”

“복수하고 싶다며? 난 복수에 필요한 훈련만 해주면 되는거잖아? 그 난들난들한 기둥서방 같은 양반과 싸우는데 굳이 광배근이나 배근력 훈련 같은 건 필요없어. 지금 네 힘으로도 충분하다고. 오히려 쓸데없이 근육을 더 붙였다가 몸이 둔해질지도 모르지. 지금 네가 할 일은 발을 예리하게 만드는거야. 자신의 약점을 잘 아는 그 칼잡이가 펼치는 최고의 방어를 뚫고 너의 공격을 닿게 하는 거라구.”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례의 말은 항상 설득력이 있었다. 그녀 말마따나 생사의 전선에서 몸으로 직접 겪었던 가르침들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 가드를 올려 자세를 잡았다. 그때 례가 별안간 손사래를 쳤다.

“아아, 잠깐, 로안, 차례를 지켜.”

“……차례요?”

“응, 오늘은 특별한 선생님을 한 분 모셨거든. 그 분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도록 해. 넌 눈이 좋으니까 아마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되겠지.”

설마 스기야마가?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역시 펜싱 칼을 끌어안고 쿨쿨 자고 있을 스기야마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나무 위에서 긴 그림자가 소리없이 번개 떨어지듯 날렵하게 착지했다. 나는 그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는 여기 있어서는 절대 안될 사람이었다.

“기, 기, 기, 긱 더 리퍼? 여기 어떻게?”

나는 재빨리 앞으로 달려들었지만 례가 더 빨랐다. 그녀는 채찍을 휘둘러 단번에 나의 전진을 끊듯이 막았다. 긱 더 리퍼는 더러운 죄수복을 입었고 약간 지쳐보였으나, 얼굴만은 천조각으로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다. 그는 뒤로 물러난 나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례를 바라보았다.

“제자인가?”

“인연이라고 해두지.”

“내가 도망칠 걸 알고 있었나?”

“여기서 보기 힘든 수준의 경공에다가 오늘은 달도 밝지. 남들 눈 피해서 조심조심 움직이는 성격이 아니니까 아마 시야가 훤할 때 도망칠 거라고 생각했어. 발 하난 자신이 있을테니 제일 전경이 트인 이 곳이 도망치기 좋겠지. 추적자들을 보기에도 편하고.”

“이번에도 날 잡을 셈인가?”

“잡기보다는 막는 거지. 당신은 최고의 수업 교재이기도 하고. 당신도 공부자(孔夫子)는 알지? 길을 지나는 세 명 중의 한 명 정돈 늘 스승이라셨지.”

“하여간 동방인들이란. 여하튼 놀아줄 틈이 없…….”

말을 끝맺기도 전에 긱 더 리퍼는 몸을 높게 솟구쳤다. 나는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그는 자기 밟을 연달아 밟으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몸을 움츠렸다 펴서 크게 도약한 다음 오른발로 왼발을 밟았고, 다시 왼발로 오른발을 밟기를 반복하며 떠올랐다. 내 눈으로 봐도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그 것이 동방 경공의 최고 수준 중 하나인 허공답보(虛空踏步)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서야 알았다.

“근데 어쩌나, 바빠도 좀 놀아주셔야겠는데?”

례는 비웃듯이 말하며 채찍을 크게 위로 휘둘렀다. 채찍으로 땅을 후리자 뱀처럼 움직이며 그 끄트머리가 하늘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례는 손목을 물결처럼 움직여 채찍으로 그를 쫓았다. 긱 더 리퍼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휘둘렀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손에는 도끼가 없었다. 아직 버릇을 고치지 못한 탓에 그는 오른손을 잡히고 그대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훨씬 높은 곳에서 떨어졌음에도 그는 공중에서 허리를 몇 번이고 뒤틀어서 아주 부드럽게, 흙먼지 하나 날리지 않고 땅으로 구르듯 착지했다. 례는 정말로 훈련 교관이라도 된듯 나를 보며 엄격하게 말했다.

“저 고양이 낙법까지 배울 필욘 없다.”

긱 더 리퍼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벌떡 일어났다. 팔에 감긴 채찍을 풀어내고는 기묘한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적당히 벌리고, 상반신을 반신(半身)으로 뒤틀고, 양팔을 하늘로 높이 뻗은 자세였다. 례는 경탄한듯이 외쳤다.

“벽괘권(劈掛拳)! 저 것도 무시해라. 헌데 정말 네 녀석의 사문(師門)이 엄청 궁금해지는구나! 대체 어떤 정신나간 인간이 너 같은 인간 말종에게 상승무공을 이리도 많이 가르쳤을까!”

“궁금하면 카론 영감에게 물어봐!”

정말이지 아주 기묘한 자세였다. 다리는 아주 빠르게 앞으로 움직이는데 허리 위로는 힘이 없는듯 흐느적거렸다. 힘을 주기보다 부드럽게 빼는 탈력(脫力)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탈력한 상태에서 팔을 바람개비처럼 휘돌렸다. 팔만 놓고 보면 두 개의 짧은 채찍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듯 보였다. 례의 채찍은 긱 더 리퍼가 휘돌리는 팔의 궤도와 서로 엉켰다. 례는 다리가 하나인데다 무쇠 의족을 땅에 박아둔 탓에 긱 더 리퍼의 접근을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되었다. 그녀의 손목을 그림을 그리듯 바쁘게 움직였고, 채찍의 궤도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긱 더 리퍼의 양팔은 채찍이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쳐낼 수는 있었지만 채찍을 붙잡거나 완전히 물리치지는 못했다. 결국 례가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지점에서 긱 더 리퍼는 채찍을 뚫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위가 아냐, 아래야! 다리와 허리를 봐! 벽괘권의 손 움직임을 보는 게 아니라 보법의 중심 이동을 몸에 새겨라!”

례가 채찍을 위에서 아래로 크게 내리그었다. 내가 보기엔 일부러 여유를 좀 둔 듯 해보였다. 그 순간 긱 더 리퍼는 허리를 휘돌리며 팽이처럼 안으로 꽂히듯 파고들었다. 만약 복서였다면 몸을 전방 자세로 두고 안으로 빠르게 달려나갔을 것이다. 옆으로 빠지는 자세에서도 복서는 언제나 시선을 전방에 둔다. 저렇게 자신의 등을 내보이며 몸을 돌리는 자세는 낯설기도 했지만,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순식간에 례의 바로 앞까지 쳐들어온 긱 더 리퍼는 원심력이 실린 손끝으로 그녀의 눈을 곧바로 찔렀다. 도끼가 없어도 살인마는 여전히 살인마였다.  

그 순간 례는 채찍의 자루를 놓고 양손으로 채찍의 끝부분을 짧게 잡았다. 눈을 노리고 날아드는 긱 더 리퍼의 긴 팔을 양손의 채찍으로 받아내는가 싶더니 손을 엇걸어 단번에 공격을 묶고 허리를 맴돌려 그를 땅바닥에 메쳤다. 너무나 빠른 공격이었기 때문에 천하의 긱 더 리퍼조차 피할 틈이 없었다. 낙법을 치지 못해 가슴을 쥐고 괴로워하는 긱 더 리퍼를 례는 강아지 다루듯 뒷덜미를 잡아 다시 저 쪽으로 던져버렸다.

“아자흔을 실전에 써먹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좀 아쉬웠어. 긱 더 리퍼.”

긱 더 리퍼는 더 이상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는 앞으로 질주했다. 례 역시 채찍을 바로 잡고 그의 돌격을 막았다. 긱 더 리퍼의 움직임은 복서인 나로서는 그저 이질적이고 낯설게만 보였다. 그의 척추는 강철 같았다.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몸 전체를 다방면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제서야 동방의 무공들 속에 어째서 그렇게 비실전적이고, 아주 어렵고 난해한 동작들이 많은지 깨달았다. 언뜻 보기에 쓸데없어 보이는 동작들을 통해 어떤 상황에도 대응이 가능하도록 신체의 모든 부분을 구석구석 단련하는 것이다. 

긱 더 리퍼는 온 몸의 근육을 전부 다 짜내어 쓰는 듯이 보였다. 채찍 앞에서 그는 납작 엎드린 개구리였다가 갑자기 높이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흘려내는 나비가 되었다. 나는 그의 움직임을 쫓는 것만으로도 눈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의 모든 관절들이 들끓듯이 아우성을 치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어서 저 몸짓들을 흉내내보고 싶었다.

“긱- 더- 리퍼-! 긱- 더- 리퍼- 다!”

익숙한 목소리에 익숙한 걸음걸이, 익숙한 얼굴. 뷔엔 발레리가 몇십 명의 경찰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끝에 아직도 잠이 덜 깨어 퉁퉁 부은 얼굴로 스기야마가 끌어안고 잤을 펜싱 칼을 휘두르며 헐레벌떡 뒤따르고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머스킷과 핸드건을 장비하고 있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긱 더 리퍼도 분명히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는 몇 차례나 공중제비를 빠르게 돌아 채찍의 범위에서 멀리 벗어났다. 례는 뜻밖에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경찰들은 널찍하게 포위망을 형성한 뒤 총구 안에 막대기를 쑤시며 장약했다. 긱 더 리퍼가 살인의 프로페셔널이라면, 경찰들 역시 월급 받아가며 수도 없이 훈련을 반복한 사격의 프로페셔널이었다. 경찰들이 짠 포위망은 누가 봐도 긱 더 리퍼를 맞힌다기보다 그를 한 구석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다. 경찰들이 몰아넣는 포위망의 끄트머리에는, 말할 것도 없이 뷔엔 발레리가 긴 에뻬를 얼굴 앞에 세워든 채 대기하고 있었다. 긱 더 리퍼는 경찰들을 한번 흘끔 돌아본 다음, 망설이지 않고 발레리를 향해 덤벼들었다.  

에뻬는 옆날을 세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찌르기만 조심하면 되는 무기였다. 긱 더 리퍼도 틀림없이 빗발치는 탄환보다는 발레리의 에뻬 쪽이 상대하기 편할 거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그는 허리를 뒤로 쭉 빼고 중심을 땅에 깊게 눌러박은 채 양팔을 사마귀처럼 길게 뻗었다. 한 손으로는 칼을 쥔 손목을 나꿔채고, 다른 손으로는 얼굴을 노려 비스듬히 후리는 공격이었다. 

파파팡! 세 번의 공격이 한 호흡에 질주했다. 발레리는 마치 회초리를 때리듯 에뻬를 낭창하게 휘둘러 긱 더 리퍼의 양팔을 때렸다. 벽괘권의 정수는 채찍처럼 휘도는 양팔의 경력(硬力)에 있다고 훗날 들었다. 가느다란 에뻬가 어떻게 폭풍 같은 벽괘권의 원심력을 양 옆으로 흩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양팔을 벌린 긱 더 리퍼는 마치 발레리를 끌어안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발레리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에뻬를 비스듬히 올려 찔렀다. 

인후 약간 옆쪽의 급소와 턱을 꿰어 뒤통수 쪽으로 에뻬의 검끝이 삐져나왔다. 갑작스레 목과 머리를 관통당한 긱 더 리퍼는 순식간에 온 몸이 마비당한 사람처럼 몸을 멈추었다. 발레리의 호흡은 평온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어깨는 어머니를 찌르고 난 뒤처럼 급하게 떨리지 않았다. 그는 잠시 긱 더 리퍼의 눈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에뻬를 빼냈다. 건장한 사내의 무게가 실린 탓에 검신은 조금 휘어 있었다. 그는 피를 흩뿌린 뒤 조심스럽게 천을 꺼내어 칼날을 닦았다. 긱 더 리퍼는 숨결 대신 피를 뿜는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카치 전역을 떨게 한 살인마의 죽음치고는 너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경찰들은 총을 거두고 주섬주섬 긱 더 리퍼의 복면을 벗기고 신원을 확인했다. 오로지 경찰들 사이에 끼었다는 이유만으로 스기야마는 그의 맨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 별다를 것도 없네. 평범한, 백인 중년 남자 얼굴.” 경찰들이 뒤처리를 하는 동안 발레리는 휘어진 에뻬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분명히 사람을 찔러죽여놓고 자기 일이 아니라는 듯 돌아가려는 저 꼴이 벌써 두 번째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긱 더 리퍼는 정말 나쁜 놈이었는데도, 그를 죽인 발레리가 괜시리 미웠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동요하지 않는 그 모습 때문이었을까. 

그 때 례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례의 투박한 얼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가벼운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녀를 어찌 떨치긴 한 모양이네? 장하구만.”

“덕분입니다.”

발레리는 냉정하다기보다는 새초롬하게 대답했다.

“나쁜 놈이긴 해. 근데 죽일 필요 있었어? 도끼 들었을 때에도 안 죽였잖아. 다시 체포할 경찰들도 있었고.”

발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검을 대충 허리에 비끄러매고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례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 에뻬라는 칼, 끝이 삼각형 모양이더라? 개랑 고양이들한테 있었던 삼각형 모양의 상흔, 이 시체에도 똑같이 났군 그래.”

“저를…… 여전히 범인 취급하실 생각인가 보군요.”

“글쎄. 그런 말은 안했는데.”

“자꾸 시비를 거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명예나 돈을 원하십니까? 원한다면 지금 상대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백황대전(白黃大戰) 때 뛰어난 전사였다고 들었습니다만.”

“아주 그냥 사람을 못 죽여서 안달이 나셨군. 하기사 피에 취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렇게 되지.” 

발레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창백한 얼굴에서 더더욱 핏기가 가셔 입술만 시퍼렇게 붉었다. 

“피에…… 취한다고요?”

“혈취증(血醉症). 끔찍한 병이야. 살아남은 내 전우들은 그 병과도 싸워야했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어둑시니 같은 병마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결국 최후의 싸움에서 져버린 이들을 셀 수도 없어. 그리고 내 눈엔 당신도 몹시 그래보이는군.”

발레리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오물거리다가 한숨을 팽 내쉬고는 몸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례는 구태여 그를 잡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눈은 활활 불타고 있었다. 눈이 하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써늘하고 독한 불길이 눈에서 춤을 추었다.  

해롤드 스기야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의 에뻬에 긱 더 리퍼의 피를 묻히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 신령함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칼에 더 깃들기를 바란다고 했다. 어이가 없을 여유조차 없었다.



5.



긱 더 리퍼를 단칼에 찔러죽인 뷔엔 발레리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해롤드 스기야마는 매일매일 부동산업자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발레리 펜싱클럽의 수강생이 늘어 건물이 하나 더 필요하니 어서 집을 팔라는 성화였다. 부동산업자인 로이드 씨도 배불뚝이 몸을 타이즈에 억지로 끼워넣고 에뻬를 휘두르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항구 도시 전체에 언제부터 이렇게 늦깎이 검사들이 많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의 훈련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례는 채찍 끝에 솜덩이를 붙인 큼직한 나무공을 달았다. 채찍을 피하면서 그 나무공을 펀치로 정확히 맞혀야만 했다. 

“굳이 번거롭게 공까지 달아야 해요? 례를 직접 때리는 거랑 뭐가 달라요?”

“어지간히 날 때리고 싶은 모양이군?”

“아,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들켰네. 씨발. 

“나는 다리가 불편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없잖아. 발레리는 더 이상 살인에 주저하지 않아. 그의 움직임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빨라졌어. 그렇다고 저 뚱뚱한 스기야마에게 발레리 대역을 맡길 거야?”

“………무리겠죠.”

“절대 무리지. 그러니까 채찍에 적응해. 채찍을 피한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을 때리는 것만으로는 훈련이 충분하지 않아. 긱 더 리퍼의 움직임을 떠올려. 온 몸의 근육을 전부 다 쓰란 말이야! 복싱이라는 움직임 자체에 고정되지 마! 네 어머니는 그랬기 때문에…….”

공기 가르는 소리와 함께 채찍이 내 얼굴을 정통으로 후려갈겼다. 다행히도 례가 말을 끊고 황급히 손목에 힘을 뺐기 때문에 내 얼굴이 수박처럼 박살나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눈과 뺨이 불이 붙은 듯 화끈거리더니 퉁퉁 부어 순식간에 시야가 좁아졌다. 그러나 나는 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죽었다구요?”

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미안해. 하지만 사실이야. 네 어머니는 너무 지나치게 복싱에 길들여졌어. 경직된 건 쉽게 부서지고 무너지지. 누가 상대방의 규칙에 일일이 맞춰서 싸워주지? 넌 양이 아니라 늑대가 되어야 해. 굶주림에 등뼈까지 말라붙어 배를 채우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굶주리고 악에 받친 한 마리 늑대처럼 덤벼!”

채찍이 파도처럼 길게 울며 다시 날아왔다. 생각할 것도 없이 앞으로 몸을 굴리며 채찍을 피해냈다. 앞구르기가 끝나기 직전에 허리에 힘을 주면서 몸 전체를 튕겨올려 바로 눈 앞의 나무공을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맞혔다…………… 라고 생각했는데, 나무공에 실린 무게가 뜻밖에도 천근이었다. 나무공은 내 주먹에 맞아 밀리지 않고 오히려 호되게 내 중지뼈를 맞때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으로 떨어져내렸다. 쿵!

“그 와중에 낙법은 잘 배웠네.”

“아, 뭐예요, 진짜! 이런 게 어딨어요!”

“구른 다음 뛰어올라서 주먹으로 친다, 좋은 생각이야. 내가 말해주기도 전에 몸으로 먼저 깨쳤으니 솔직히 칭찬할 일이지. 근데 봐. 높이 뛰어오르는데 정신이 팔려서 하체 힘이 전부 빠져버렸잖아. 네 팔힘만 가지고는 내가 나무공에 약간 힘만 주어도 이겨내지 못해. 실전에선 나무공이 아니고, 칼이야. 그리고 그 칼자루는 영악한 발레리가 쥐고 있다고. 그 정도 위력의 단순한 공격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치는 마. 그래서 일부러 힘 좀 더 줬어. 그리고 이건 잘하라는 뜻에서 한 방 더.”

따악! 나무공이 좀 더 세게 내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눈물이 찔끔 났다. 눈이 부어서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례는 다시 채찍을 감쳤다. 훈련은 계속될 모양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하기사 발레리가 내 눈이 하나 부었다고 봐줄 인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눈이 아무래도 영 이상했다. 례의 그림자가, 저렇게 많았나………? 

“여긴 아무래도 도장이 아니라 이미 곡마단으로 변한 거 같은데? 싸이클롭스(Cyclops)가 원숭이한테 뜀뛰기를 가르치고 있어! 도장 깨기 할 필요도 없겠다!”

“주둥이 좀 꿰매고 있어! 미스터 로이드가 여기 사들이려고 안달하는 거 몰라? 우리한테도 콩고물 좀 떨어질거라구!”

아, 정말이지 고전적인 고향 패거리들이여. 너희들도 언젠가는 추억 속에서 내 벗으로 새겨질 날들이 올까. 나는 이를 앙다물고 벌떡 일어났다. 도장깨기. 들어본 적이 있다. 어머니도 노예에서 놓여나기 위하여 숱하게 도장을 깼다고 들었다. 명예를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무사들의 혼을 건 대결.

“너네들이…… 여길 깨러 왔단 거냐?”

나는 업라이트 자세를 잡고 엘런을 노려보았다. 물론 위압적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병신이 꼴값 떠네. 눈깔은 밤탱이가 되어서. 너네 스승 흉내내………냐?”

그래도 우두머리라고 말은 맺었지만 엘런의 말끝이 흐뜨러지며 졸아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등 뒤의 례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등골을 적시던 땀이 순식간에 식어 마른다. 목 뒤가 뻣뻣하게 굳는다. 례는 무쇠 의족을 쿵쿵 끌면서 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이가 유독 하얬다.

“그래. 애꾸 스승에 애꾸 제자다. 그런데 너네가 감히 이 도장을 깨겠다고?”

“다, 다, 당신은 나서지 마! 이건 어디까지나 도장깨기야. 외인(外人)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짜식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나보군. 그래, 원칙은 그렇지. 그런데 원칙에 따르면 도장주인 스기야마랑 붙어야 할텐데? 도장주와 싸워 이기지 않으면 도장깨기는 성립하지 않아.”

엘런이 처음으로 례 앞에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아. 하지만 스승이 부재 중이면 제자가 그 자릴 대신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스기야마 도조 유일의 문하생 로안.”

례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런의 지적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스기야마 검문(劍門)에서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스기야마 도장에서 벌써 한달이 넘게 기숙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그의 제자였다. 젠장, 죽도 몇 번 잡아본 대가로 줄초상 치르게 생겼구나. 나는 례를 올려다보았지만 그녀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좋아, 인정. 하지만 도장깨기는 원칙적으로 일대일이다. 스기야마 검문에는 그의 유일한 문하생인 로안이 나간다. 그 쪽도 대표 하나 정해서 내보내.”

엘런은 피식 웃었다. 보나마나 저 쪽에서는 엘런이 나올 것이다. 나는 당황해서 례를 쳐다보았다. 

“례!”

“다 원칙에 맞는 말이야. 징징대지 말고 나가. 여기 부수게 그냥 둘래? 너나 나나 갈 곳 없다.”

례는 그 커다란 몸을 도장 한구석에 가만히 기대어 섰다. 진흙으로 빚어놓은 거인 토상(土像)이 관전하는 듯했다. 그 위압감만으로도 엘런 패거리들은 주눅이 들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엘런은 날을 세우지 않은 연습용 에뻬를 똑바로 세워들고 앞으로 나왔다.

“발레리 펜싱 클럽 엘런 오제이!”

나는 뭐라고 말할까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례가 나를 떠밀듯 먼저 나직하게 말했다.

“스기야마 검문 대행, 례문(門) 수제자 권사(拳士) 로안.”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례는 알듯말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목숨을 노리는 위험한 공격은 하지 않는다. 무인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는다. 정면. 상대에게 배례(拜禮).”

나는 무슨 말인지 몰라 허둥댔지만 엘런은 어디서 들었는지 제법 그럴듯하게 나에게 예를 갖추었다. 나는 엉거주춤 녀석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세를 잡았다. 엘런은 예의 그 광대 자세를 잡고 나에게 똑바로 칼을 겨누었다. 뾰족한 삼각형의 칼날 대신 콩알만한 금속 구슬이 동그랗게 달려 있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레리는 이보다 더 날카로운 칼을 더 빠르고 정밀하게 휘두를 것이다. 엘런 따윌 이기지 못하면 발레리에게는…….

“시작!”

깜짝 놀라는 사이 엘런이 몸이 앞으로 날쌔게 파고들었다. 엘런의 스텝도 많이 좋아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잽을 흩뿌리며 옆으로 맴돌았다. 엘런은 몸을 앞뒤로 빠르게 흔들면서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날쌘 코뿔소와 싸우는 기분이었다. 검이 정면을 향해 있을 때는 함부로 잽을 내뻗을 수가 없었다. 엘런은 어떨지 몰라도 발레리는 바로 그 중의 하나에 검을 꿸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움츠러들었고 엘런은 신이 나서 공격의 주도권을 잡았다.

칼 한 자루가 이렇게 성가실 줄 몰랐다. 엘런의 검은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스텝은 빨라졌지만 리듬에 맞춰 공격하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섣불리 찔러봐야 빈틈을 드러낼 뿐이라는 걸 녀석도 알고 있었다. 답답해보였다.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기는 쉬운데 결정타를 내지 못해 다급한 듯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검 한 자루 때문에 마음 놓고 주먹을 날릴 수가 없었다. 우리의 교착은 지루하게 맴돌았다. 

그 때 움찔거리는 엘런의 왼팔이 보였다. 녀석의 왼팔은 칼 따위 없어도 날 때려눕힐 수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입술을 핥는 혀끝이 초조하게 타들었다. 엘런은 검에 익숙하지 못하다. 녀석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무기가 아니라 오히려 족쇄였다.

족쇄!

순간 머리 한구석이 시원하게 뚫렸다. 이 녀석은 아직 검에 익숙하지 못하다. 검은 들었지만 몸도 머리도 검에 익숙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와 례, 두 스승을 모시면서 움직임을 몸에 익혔다. 자신감이 샘솟으면서 눈이 밝아지고 몸이 빨라졌다. 언뜻 례의 미소를 본 것 같기도 했다.     

몸을 쉬지 않고 앞뒤로 좌우로 흔든다. 멍하니 상반신을 세우고 있어봐야 칼에 꿰어달라 청하는 꼴이었다. 안 그래도 검에 익숙하지 못한 엘런은 더더욱 당황하는 눈치였다. 내가 살짝 무게중심을 앞으로 옮겨놓으며 달려들 기세를 보이자 엉겁결에 검을 휙 내찔렀다. 검을 쥔 팔과 앞다리를 한꺼번에 앞으로 쭈욱 뻗는 빈틈투성이의 자세였다. 비스듬하게 파고들면서 그대로 얼굴과 복부에 잽을 몇 방 내갈겼다. 그래도 반사신경은 빠른 녀석이라 얻어맞으면서도 뒤로 물러나 다시 거리를 잡았다. 이대로 놔주면 칼을 휘두를 거리를 벌어주게 된다. 나는 재빨리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는 엘런이 빨랐다. 문제는 칼을 잡는 자세였다. 검을 양손으로 쥐고 도끼처럼 휘둘렀다. 완력만 믿고 길게 휘두르던 더그의 훅보다 엉성하고 더 느렸다. 더킹해서 검의 궤적을 피하고 그 자리에서 발을 박차고 파고들어 낮은 어퍼를 꽂았다. 복부가 꿰뚫리는 느낌에 숨을 터뜨리며 바로 떨어지는 엘런의 턱을 다시 높은 어퍼로 후렸다. 덩치가 크고 실한 엘런의 무게가 주먹 끝에 모였다가 곧바로 흩어졌다. 녀석의 이가 핏방울을 튕기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콧잔등에 깊은 스트레이트를 꽂았다. 더그도 침몰시킨 적이 있는 마무리 일격이었다. 엘런은 코피를 양옆으로 쫙 내쏟으며 주저앉았다. 

례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확실히 많이 늘었군. 네 어머니가 생전에 기초를 잘 다져줬기 때문이야. 봤냐, 어설픈 칼잡이들? 오늘의 대결을 교훈으로 삼도록. 긴 꼬챙이 하나 더 들었다고 유리할 거라는 생각은 오늘 부로 버리도록 해.”

“미안하지만 못 버리겠군요.”

등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 인간은 왜 시도 때도 없이 나와서 설치지? 또다시 뷔엔 발레리였다. 작정을 하고 나온 듯 화려한 망토에 자루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검까지 차고 나왔다. 그를 알아본 엘런 패거리들이 어깨를 움츠린 채 재빨리 제 두목을 부축해서 도장 한구석에 몰렸다. 그 쪽으로는 일별도 하지 않은 채 발레리는 똑바로 례를 쏘아보았다. 

“로이드 씨가 쓸데없는 말씀을 하는 바람에 또 우리 클럽의 문하생들이 사고라도 칠까 싶어 왔습니다. 헌데, 례, 당신은 정말 도통 예의나 겸양이라고 하는 걸 모르는군요. 동방인들은 그런 점을 무척 중시한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아니겠나.”

“그렇지요. 당신의 말 또한 틀렸다는 점을 제가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니까요.”

발레리는 망토를 벗었다. 화려한 망토 안에서 흰색의 깨끗한 무복이 드러났다. 본디 그렇듯 몸에 착 달라붙어 움직임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옷이었다. 저 옷을 입고 발레리는 어머니를 죽였다. 나는 이를 벅벅 갈았다. 례는 빙긋 웃으면서 턱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랑 붙고 싶어? 하지만 저 쪽이 예전부터 빚 갚는다 벼르는데.”

“전 빚진 거 없습니다. 게다가……… 모자(母子)를 한 칼에 죽이는 건 아무래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닌것 같…….”

“뭐 이 새끼야!”

참으려고 해도 목울대가 꿀렁거렸다. 나도 모르게 발이 주먹을 싣고 질주한다. 발레리의 손바닥에서 하얀 빛이 꽃잎처럼 퍼진다. 검의 궤적이 화가의 붓처럼 허공에 선을 그렸다. 저 선 어딘가에 내 몸이 닿으면 영락없이 떨어져나갈 기세였다. 반사적으로 나는 몸을 움츠리고 뒤로 물러났다. 발레리는 싸늘하게 비웃었다. “겁나나요?”

“씨발, 누가 겁낸다고 지랄이야!”

“무리할 거 없어. 네 다리나 보고 말해.”

례의 무심한 지적에 얼굴이 더 확 달아올랐다.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달달 떨리고 있었다. 날이 있는 칼과 없는 칼, 엘런과 발레리의 차이가 그렇게 클 줄 몰랐다. 내 몸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발레리는 내 몸을 재듯이 검끝으로 나를 겨누었다. 체형을 따라 지그시 검으로 허공을 긋는다. 눈가에 서린 비웃음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다시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나서려 할 때 뜻밖에도 례가 내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만하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뭘 돌이킬 수 없게 되는데요! 비켜요, 례! 오늘에야말로 저 새낄 죽여버리고 말거예요! 할 수 있어요! 저 새낄 이기려고 그 동안 그렇게 훈련했잖아요!”

온통 흉터로 뒤덮인 거친 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안쓰러운 표정이 지나갔다.

“맞아, 로안. 하지만 역시 오늘은 아니야. 아직 아니야.”

“아니라구요?”

“왜 꼭 오늘이어야 하지? 오늘 아니면 복수를 할 수 없는 거야?”

“그럼 언제 해야 하는데요! 저 새낄 계속 저렇게 두고 살아야 해…….”

눈 앞에 정말로 별과 번개가 서로 뒤섞여 번쩍했다. 눈앞이 캄캄했다가 다시 돌아온 시야는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턱이 부서질듯 저리면서 입 안에 찝찔한 피가 고였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그대로 숨이 막히면서 턱이 아래로 떨어졌다. 배가 뚫릴 듯한 고통이 명치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고, 사지에 힘이 풀리면서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엄마가 살아 생전 쓰던 기술 그대로였다. 스매시(Smash)에 이은, 바디 훅. 례는 굳은살이 옹이처럼 박힌 커다란 주먹을 조심스럽게 거두었다. 

“머리 식혀라, 로안. 나는 너 같이 굴다가 죽는 어린 것들을 너무 많이 봐왔어. 발레리는 너보다 훨씬 오랜 세월 검을 잡았고, 실력도 너보다 위야. 전쟁터라면 넌 죽었어. 제 기량이 모자라 죽는 거야 전쟁에선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여긴 사람이 사는 세상이잖아. 왜 네 부족한 기량을 성질로만 메우려 드는 거지? 네가 확실히 이길 수 있을때 덤비면 안되나? 이유도 모르는 채 서로 죽여야하는, 개좆 같은 전쟁터도 아닌데. 네 목숨을 아껴, 로안. 한순간의 명예와 기분 풀이를 위해 네 귀한 목숨을 함부로 던지지 마. 악착같이 살아. 네 삶은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아. 지금처럼 훈련해서 네가 자신이 있을 때,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때 그 때 싸워도 늦지 않아.”

례가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렇게 다정하게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도 처음 보았다. 엘런 패거리 역시 흉칙하게 생긴 동방의 거인 여자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발레리만이 싸늘한 비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검으로 례의 등을 계속 겨누고 있었다. 

례는 고개를 털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사는 건 나 하나로 족하다. 어쩔 수 없이, 도망칠 기회가 없어서, 또 도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죽어야 했고, 누군가는 살아도 산 게 아니게 되는 세상은 이제 정말, 그만 보고 싶어.”

“당신도 겁을 먹은 겁니까?”

느닷없는 발레리의 이죽거림에 례의 눈썹이 높이 솟구쳤다. 만약 눈썹에도 성질이 있다면, 례의 눈썹은 그대로 이마를 찢고 머리 위로 기둥처럼 솟아오를 듯이 보였다. 정말로 동방의 도깨비 같은 얼굴로 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례의 거대한 체구 때문에, 쓰러져 있는 내가 발레리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례의 기둥 같은 다리 사이로, 발레리의 가느다란 다리가 떨리는 모습은, 그 자리에서도 분명히 보였다.

례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 겁을 먹었지. 그래서 브록킨 패거리들 앞에서도 말없이 물러나왔고, 빈틈만 보이면 내 등을 찌르고 싶어 안달하는 미친 놈과도 지금까지 계속 말을 주고받는 거지.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싸우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둘 다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정말 부탁인데 내 말 들어. 당신도 그 칼 집어넣고 그만 돌아가. 여긴 전쟁터가 아니야. 아무나 그렇게 푹푹 찔러대다간 제 명에 못 살아.”

“어이가 없군요. 전쟁터에서는 사람 죽이느라 누가 제 눈, 팔, 다리 모두 가져갔는지 알지도 못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죽고 죽이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 그만두어라? 성인군자 놀이는 그만하시죠. 전쟁은 무술과 과학, 의학 등을 발전시키는 인류의 발전 계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법과 금기를 말할 때, 나와 같은 예술가들은 늘 그 금기에 도전해 예술을 발전시켜왔다구요. 나의 검은 예술입니다. 누구도 내 검을 마음대로 집어넣으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단 말입니다!”

느닷없는 장황한 웅변을 토해내는 발레리를, 례는 대단히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 마디 툭 내뱉는다.

“너 아직도 그 여자 보지?”

갑작스러운 례의 말에 발레리가 처음으로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찔러 죽인 그 권투 선수, 로안의 어머니. 네 첫 살인의 피해자. 아직도 그 여잘 보고 있지? 악몽도 꿀테고, 혼자 있는 게 견딜 수 없어서, 밖에서는 칭찬을 해대는데 약한 모습은 들키기 싫고. 예술의 발전이니, 검술은 예술이니 허울 좋은 핑계 끌어다붙이면서 사실은 여기까지 기웃거리게 된 거 아닌가? 전쟁터에선 흔한 일이야. 두려움도 모르는 채 선봉에 서는 연놈들은 진짜 영웅이거나, 아니면 사실은 죽어서라도 그 끔찍한 헛것에서 도피하고 싶은 인간들이지. 더 이상 살인 따위 하고 싶지 않아서. 제발 그 끔찍한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막상 전쟁이 끝나도 그들은 전혀 적응하지 못하지. 난 네가 그 여잘 떨쳐버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제 보니 아니었군. 넌 오히려 더더욱 미쳐버렸어. 지금 여기에 온 것도, 분쟁을 핑계삼아 어떻게든 한두 놈 찔러볼 생각이었겠지. 아닌가?”

발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푸르게 질렸고 손목은 그 가느다란 칼 한 자루조차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로 무섭게 떨렸다. 례는 한숨을 내쉬면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무쇠 의족이 그때만큼은 위압적으로 울지 않았다.

“도와줄 수 있어, 발레리. 나도 그랬고, 내 전우들도 그랬으니까. 전쟁은 끝났다지만, 우리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나는 아직도 가끔 내가 죽였던, 혹은 내 옆에서 죽었던,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조차 안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이미 죽어버린 그들이 살려달라 아우성 치는 소리를 들어.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그랜드 마스터야!”

례는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육중한 무쇠 의족이 그녀의 움직임을 거추장스럽게 했다. 발작적으로 찔러넣은 발레리의 검은 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례는 몸을 휘돌리며 천으로 감싼 참마도로 공격을 막았다. 발레리의 검이 소나기처럼 참마도를 찌르고 베고 후리며 지나갔다. 발레리는 괴성을 내지르며 외쳤다.

“나는 검의 선구자야! 예술과 검술을 하나로 결합한 천재라고! 예술에는 희생이 필요해! 나는 위대한 예술을 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거야! 그 따위 헛것에 지지 않는단 말이야! 나는 너 따위 버러지 칼잡이와는 달라!”

그때쯤 어느 정도 호흡이 진정된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엘런 패거리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광기 어린 스승을 보고 있었다. 반면 나는 참마도를 사이에 두고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의 스승, 례를 보았다. 발레리가 공격해올 때마다 천의 끝부분을 틀어쥐고 살짝살짝 도신(刀身)을 옮기며 성벽처럼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공격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천조각이 조각조각 잘려나가 떨어지며 발레리의 검끝이 참마도의 도신을 정통으로 때렸다. 불꽃이 튕기고 무겁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거슬리게 울렸다. 발레리 또한 그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는 황급히 자세를 취하면서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온 얼굴이 땀과 침과 눈물에 젖고, 칼끝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어서 희대의 살인마 긱 더 리퍼 앞에서도 우아하게 검을 놀리던 대검객의 모습은 간 곳이 없었다.

례는 폐를 꺼내놓을 듯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래야 하나.”

례가 칼자루를 잡는 순간, 나는 례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평소에 거칠고 왁살스럽던 모습도 아니고, 아까 전처럼 낯설고 다정다감하던 모습도 아니었다. 견고하고 단단하고 침착하고 냉정한, 오랜 수라장 속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도 링 위에 올라설 때 바로 지금의 례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었다.

훨씬 진정된 모습으로 발레리는 앞으로 달려나가며 손목을 빠르고 부드럽게 휘돌렸다. 동시에 스텝을 아주 복잡하게 밟으면서 몸의 중심을 계속해서 옮겼다. 호쿠사이 연합에는, 사람을 전문적으로 암살하는 전통 무인들의 집단이 있는데 오랜 인내를 거쳐야 한다고 해서 그 이름이 닌자(忍者)라고 했다. 닌자들은 주위 환경과 똑같은 모습으로 몸을 감추고, 아무 도구 없이 벽을 넘고 문을 뚫는 등 여러 가지 신비한 이술(異術)을 지녔지만, 무엇보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으로 나뉘는 분신술(分身術)이 그 중 제일 가는 솜씨라고 했다. 발레리의 모습은, 마치 분신술을 쓰는 닌자들처럼 수없는 그림자로 나뉘어 한꺼번에 례를 덮치고 있었다.

례는 긱 더 리퍼를 잡았을 때처럼 의족을 깊숙이 땅에 박았다. 도장의 낡은 복도들이 진저리를 치며 주름을 잡았다. 으직으직 하늘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나무 바닥이 조각나며 위로 치솟아올랐다.  

참마도를 잡고, 허리를 비틀고, 이를 악물면서 거대한 칼을 뽑아 그대로 원호(圓弧)를 그리는 동작이 찰나의 한 호흡이었다. 례의 발끝에서 폭풍이 불었다. 례는 바닥을 밀어 부수는 전차처럼 나아갔다. 쇠로 된 의족이 폭풍을 짓밟으며 나무바닥을 짓부쉈다. 그 한 동작으로 충분했다.

눈을 너무 늦게 감았는지 핏방울 몇 개가 내 속눈썹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검월파(劍月派) 비전(秘傳) 회회검(回回劍). 례 역시 복수를 하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증오로 불태우던 세월이 있었음을, 아주 나중에서야 알았다.





終.



지방 치안판사까지 사임을 했어야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여왕의 측근이라는 늙은 재상이 손수 이 항구 도시까지 내려와 례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례는 싸늘하게 웃었다. “사람 죽이는 놈을 죽여줘서 고맙다는 뜻인가?” 늙은 재상은 크게 분노했지만 일개 외국인 여행객에게까지 권력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라를 대표해서 존경받는 대검객이 이러한 치부를 드러냈으니 어서 덮어야 좋을 일이었다. 아카치와 대대손손 원수 지간인 바다 건너 에뜨르아 왕국은 벌써부터 이 일을 대륙 전역에 퍼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역시 촉망받는 춤의 천재였던 발레리가 살인마로 전락한 이유는, 음탕하고 천박한 에뜨르아식 펜싱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응수할 모양이었다. 이러거나 말거나 우리 도시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은, 례 혼자뿐인 것처럼 보였다. 기묘하고 낯선 광경이었다.

스기야마는 틈새 시장을 공략했다. 그는 아예 날 자체가 없는 죽도와 목검을 예로 들면서, 호쿠사이식 전통 켄도는 검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고 심신을 차분하게 수양하는 고등한 무예라고 홍보했다. 엘런 패거리를 비롯한 발레리 펜싱 클럽의 문하생들은 고스란히 스기야마 도장으로 흡수되었다. 크고 넓은 도장을 새로 지은 덕분에 나도 례도 부서진 옛 도장을 고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례가 떠나는 그 날까지 우리는 아늑한 ‘옛’ 스기야마 도장을 캠프 삼아 종종 만났다. 

“복수의 명분, 얘기했던 것 기억나?”

“네, 말도 안되는 핑계였죠.”

례는 씁쓸하게 웃었다.

“눈치챈 모양이군.”

“처음부터 저한테 칼질 같은거 가르쳐주고 싶지 않았다는 거요?”

“이런 상황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어야만 끝나는, 절대로 도망치거나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없는, 그런 상황 말이죠.”

례는 하나밖에 없는 손으로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살면서, 좋은 교훈이 되길 바라. 절대로, 절대로,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 우린 인간이야. 반드시 싸우고 죽여야만 뜻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우리는 모두가 행복하게 살려고 이 세상에서 온 거야.”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일도 있잖아요.”

이번에는 례가 정말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것도 알아?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요. 사실 례랑 그 양반이랑, 요즘 사이가 좀 이상했잖아요. 그래서 나도 좀 알아봤죠. 생각해보니까 그때서야 아귀가 딱딱 맞아들어가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래? 그렇구나. ……어쩔까. 내가 그 일까지 해결하고 가야 마음은 편할 것 같은데. 결자해지(結者解之)라지 않던. 기왕 이 일에 끼어들었으니.”

나는 씨익 웃으면서 주먹을 들어보였다. 내 주먹에는 날카로운 쇠징을 박은 세스터스가 감겨 있었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이었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야겠죠. 마지막은 제가 처리하고 싶어요. 엄마의 주먹은 내가 이어받았으니까요. 그리고 례 말처럼 꼭 죽이고 죽여야만 해결보는 것도 아니구요.”

“……두 발로 서게 된 인류가 최초로 갖게 된 무기는 주먹이라고들 하지. 그래, 알았다. 잘 있거라. 인연이 닿으면 또 보겠지.”

례는 씨익 웃으며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천천히 자리를 떴다. 질질 끌려 불편한 무쇠 의족의 무게만큼 커다란 참마도에 체중을 기대 실은 채 그녀는 쿵, 쿵, 천둥 같은 발걸음을 옮기며 그렇게 사라져갔다. 떠돌이 생활에 익숙한 여자답게 뒤돌아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보던 거구의 그림자가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천천히 걸어 새 집으로 돌아왔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진 뒤로 왕국 법무부에서 특별히 예산을 편성하여 지어준 집이었다. 평생 동안 면세인데다 혼자 살기엔 지나치게 넓고 으리으리했다. 게다가 집 한 켠에는 팔십 명 가량의 문하생을 들일 수 있는 체육관까지 완비되어 있었다. 왕국 재정청의 계산에 따르면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적정선에서 꾸준히 회비를 받을 때, 약 팔십 명 정도가 적정하다는 것이었다. 감가상각, 예상 수지 같은 어려운 단어를 써가며 재정청 관료가 설명했지만 나는 그런 건 잘 모른다. 다만 나는 아무도 회원으로 들이지 않았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회원을 받지 않아도 누군가가 가끔 집 안을 기웃거렸다. 게다가 오늘은 무엇까지 사들고 왔다. 술병과 과일 바구니를 옆에 낀 해롤드 스기야마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맞았다.

“문을 안 잠갔더구나.”

“네, 뭐 금방 다녀오니까요.”

“례……… 배웅했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기야마는 한숨을 내쉬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례는 사건이 있고 난 뒤부터 무척 서먹해졌다. 나도 그 이유를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노을이 과일 바구니 앞을 적시며 지나갔다. 오늘따라 술병이 싸늘해보였다.

“더그…… 라고 했던가. 너에게 지고, 브록킨 패거리한테 손가락 잘려나갔던.”

“아, 네.”

“례를 따라간 것 같던데. 복수라면 너무 잘못 찍은 거 아니냐?”

나는 비죽이 웃었다. 복수, 이제는 진저리가 난다. 복수는 정말로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도, 바꾸지도 못한다. 복수는 오로지 또다른 원한만을 예비할 뿐이다. 그래서 복수는 자웅동체이며 단성생식이다. 복수는 스스로 복수를 낳는다.

“례한테 복수하려는 거 아니에요. 례가 에뜨르아 왕국에 데려다 준대서 같이 간거죠.”

“에뜨르아에? 거긴 왜? 설마 그 지랄맞은 펜싱이라도 하겠다는 건 아닐테고. 춤이라도 춘다더냐?”

“아뇨. 거기에 싸바뜨(Savate)라는, 발차기를 주로 하는 격투기가 있다던데요. 주먹질도 하긴 하지만 비중이 아주 적고, 손가락 좀 없어도 베어너클 했었던 더그라면 어떻게든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대서. 무엇보다 더그 스스로 재기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커요. 그래서 례도 군말없이 데려갔던 거 같은데요.”

아마 스기야마는 모를 것이다. 떠날 준비를 하던 례는 보급품을 사러 나가던 길에 구걸을 하는 더그를 우연히 보았다. 그 거구를 못 보고 그냥 지나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더그는 브록킨 패거리에게 상납할 돈을 바치기 위해, 그 우람한 몸으로 매 동냥을 하고 있었다. 코찔찔이 어린애들부터 중년 주부, 팔순 노인네까지, 그를 때리고 차고 물어뜯고 꼬집으며 쌓여왔던 울분을 풀고 있었다. 잔돈푼을 들고 구름처럼 줄을 선 군중들을 쫓아낸 례는, 더그의 몸에 예의 바디 훅을 힘차게 꽂아넣었다. 일격에 무너져 토사물을 흩뿌리는 거구의 사내 앞에서 례는 정말로 이렇게 살 것이냐 물었다. 브록킨 패거리도 고작해야 거지로 전락한 주먹꾼 하나 때문에 일격에 발레리를 두 조각 낸 동방의 거인 여기사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례는 간단하게 더그를 빼내와 함께 여행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는 미처 묻지도 않은 내게,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 듯 대답을 먼저 했다.

“전쟁터에서는 팔 없건 눈 없건 살아남으면 대접받지. 손가락 좀 없어서 병신 취급받는 세상이라면, 그렇게 안 살아도 되는 세상을 찾으면 되는거야. 원래 장님 나라에서는 눈뜬 놈이 병신이잖아? 손가락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으로 안내해주려는 것뿐야.”

례의 말이 옳았다. 어떤 시대, 어떤 세상이 찾아와도 꼭 지켜야할 원칙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곳곳마다 조금씩 다른 세상도 있다. 례는 단지 세상에 묶여있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스기야마는 세상에 묶여 있다. 그가 아무리 호쿠사이를 떠나 이 곳 아카치까지 흘러들어왔어도 그는 세상에 묶여 있다.

결국은 말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기야마 상.”

“……네가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 처음인데, 례가 가르쳐주더냐?”

어색하게 웃는 스기야마의 말을 무시했다. “범인은, 스기야마 상이지요?”

“범인? 갑자기 무슨 소리냐? 무슨 범인? 네 엄마 죽인…….”

“그거 말구요. 개랑 고양이 찌른 사람. 스기야마 상이잖아요. 알다시피 난 절대로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사건이 밝혀지면서 개와 고양이를 찌른 사람도 발레리라고 모두들 생각했죠. 나도, 례도. 그런데 례가 개와 고양이들 시체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시체의 미간을 뚫은 찌르기들의 깊이가 전부 제각각인 거예요. 발레리 정도의 숙련된 펜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스기야마가 크헝 코웃음을 쳤다.

“검을 안 잡아봐서 모르는구나, 로안. 물론 정밀한 반복 수련을 하긴 하지. 하지만 실전에서 모든 찌르기가 반드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같은 깊이와 위치로 들어간다는 보장이 어딨겠니? 너도 네 주먹이 언제나 같은 곳에 일정하게 맞는 건 아니잖냐.”

“맞아요. 근데 그래서 더 이상한 거예요. 깊이는 전부 제각각이었지만, 위치는 이상하게도 일정했으니까요. 마치 일부러 작정하고 쑤시기라도 한 것처럼요. 그래서 더 이상했던 거라구요. 아닌 게 아니라 나는 검을 잘 모르니까요. 지역 검시관들도 에뜨르아 검술 같은 건 잘 몰랐을테고, 아니, 애초에 개나 고양이 시체를 누가 그렇게 샅샅이 찾아보지도 않았겠죠. 들개와 고양이라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을, 그네들의 네 발에서, 례가 찾아냈어요. 손발을 강하게 졸라 묶은 듯한 흔적을. 전장에서도 포승줄을 너무 세게 묶어 흔적이 남거나 심지어 질식하는 경우가 있다죠. 누군가가 개와 고양이들의 손발을 묶은 뒤 미간을 노려 찌르는 연습을 한 거예요. 그래서 위치는 일정했지만, 깊이는 제각각이었던 상처들이 나왔던거죠.”

“근데 왜 내가 범인이라는 거냐? 알다시피 나는 여기 허리에 찬 진검처럼, 카타나(刀)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고. 에뜨르아식 펜싱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왜 굳이 그런 짓을 하겠니? 엘런인가, 네 친구들 중에 껄렁한 녀석들이 벌인 짓 아니냐?”

“나와 싸울 때 엘런, 그 똥멍청이 새낀 칼도 제대로 다룰 줄 몰랐어요. 하도 스텝, 스텝 하니까 발걸음 연습만 열심히 했겠죠. 우리도 처음엔 당신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매일매일 에뻬를 끌어안고 자던 당신을 말이죠. 하지만 그 날, 긱 더 리퍼가 탈옥을 하던 날에 당신은 에뻬를 휘두르면서 나왔지요. 왜일까요? 당신 말마따나 호쿠사이식 카타나 말고는 잡아본 적도 없을 당신이요. 게다가 그 칼에 죽은 긱 더 리퍼의 피까지 뒤늦게 허겁지겁 묻히구요. 초혼(招魂)이라도 하려고요? 피나 살을 바쳐 죽은 이를 부르는 건 음양도(陰陽道)의 사제들이나 하는 짓이라던데요, 례가. 사실은 그날도 에뻬로 개나 고양이를 찌르다가 급하게 달려온 것 아닌가요? 그래서 거기에 묻은 동물 피를 가리려고 전전긍긍하다 급하게 사람 피를 묻힌 거지요?”

스기야마는 양미간을 좁히며 나를 노려보았다. 여지껏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위엄이었다. 

“로안, 그만해라. 정체도 모를 여자 며칠 거둬 먹이고 재웠더니 아주 이상한 소릴 너한테 박아놓고 갔구나! 대체 내가 왜 야밤에 그런 짓을 하면서 돌아다녀야 한단 말이냐?”

“우리도 몰라요. 그래서 스기야마 상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하지만 다른 건 확실히 밝힐 수 있었지요. 이거 보이세요?” 나는 품에서 조그마한 약병을 하나 꺼냈다. 

“례가 주고 간 거예요. 반도 육군 수사대의 헌병들이 쓰는 특수한 약품이래요. 발렌 공국의 뛰어난 약사들이 만든 비전의 약품이죠. 스기야마 상이 없을 때 이걸 그 에뻬에 발라봤어요. 루미놀 반응이라고 해서, 이 약품을 바르면 혈액형에 따라 색깔이 다르게 나온다던데요.”

“…………………………………그래, 결과가 어찌 나왔냐.”

“아주 특이한 반응이 나왔죠. 사람한테나 쓰는 약품이지 개나 고양이 피를 찾아내려고 쓰는 약품은 아니니까요. 아마 지금쯤 당신 에뻬는 온갖 이상한 색깔로 울긋불긋 무지개 칼이 되었을 거예요. 얼마나 많이 찔러댔는지 칼 스스로 자백하는 꼴이나 마찬가지라던데요.”  

스기야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어도 내가 그 동안 보았던 스기야마의 표정은 아니었다. 엄혹하고 냉정했다. 언뜻 보면 참마도의 자루를 잡으며 사람을 벨 각오를 굳히던 례 같았지만 그보다는 명백히 더 살기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의 왼쪽 허리에 매인 카타나를 예의 주시했다. 

“왜…… 그랬어요, 스기야마 상?”

“칼을 잡지 않는 네가, 칼로 먹고 살지 않는 그 여자가 뭘 안다고!”

스기야마는 돌연 번개처럼 칼을 뽑았다. 이제까지의 둔한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칼집에서 뽑혀나오는 칼이 싸늘하게 울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킨 채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징 박힌 세스터스. 고대의 권투사들은 그걸 끼고 싸웠다지. 짐작은 했다. 례를 배웅하러 가는데 그런 무기가 왜 필요하겠냐.”

“스기야마 상, 칼 집어넣으세요. 례 말처럼 일을 더 크게, 어렵게 만들지 마시라구요.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하지만 언젠가는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지, 안 그러냐? 개나 고양이를 죽인 놈이 사람은 왜 못 죽이겠냐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 이제 겨우 먹고 살만해지는데. 고작해야 그깟 떠돌이 년 때문에 내 생활을 망가뜨릴 순 없어!”

“그래서 이젠 저까지 죽이실 건가요?”

스기야마는 칼자루를 잡은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직 사람을 베거나 죽인 적은 없잖아요, 스기야마 상? 이제 와서 저를 베려구요?”

“못 벨 것도 없지, 검의 본질은 원래 살인이니까. 발레리도 그 본질에 휘말린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스기야마 상,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걸 필욘 없을 것 같은데요.”

“…………뭐?”

“거짓말이었어요, 스기야마 상. 례가 귀띔해줬죠. 루미놀 반응은 아직 논문으로만 나왔을 뿐, 상용화되진 않았다고. 세상에 그런게 그렇게 쉽게 나오겠어요? 하지만 몰리면 결국엔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어떤 방식으로든 몰아붙이는게 중요하다고, 례 말이 정말 옳네요. 왈가닥 왈팬 줄만 알았는데.” 

“너, 이녀석………!”

결과적으로 례가 만들어준 밤탱이 눈알이 나를 구했다. 그 정도로 지독한 훈련이 아니었다면 스기야마의 일격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혹은 스기야마가 나를 진심으로 벨 작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번뜩이는 검광이 눈 앞을 지나가기 직전에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잘려나간 공기의 여운이 싸늘하게 내 피부에 와닿았다. 

이 쪽은 주먹, 저 쪽은 칼, 이 쪽은 주먹, 저 쪽은 칼.

스기야마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음이 떨리는지 칼끝도 따라 흔들렸다. 나는 세밀하게 그의 움직임 전부를 살폈다. 숙련된 복서는 상대의 어깨를 보고 공격을 예측한다. 검도 창도 결국은 주먹의 연장일 뿐이었다.

“스기야마 상.”

“많이 늘었구나, 로안. 아무튼, 아무튼, 미안하다. 널 죽이지 않게 해다오, 제발.”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떠나다오, 아무 소리 없이 떠나줘. 너는 지금 아카치 전역에 명성이 드높은 복서의 아들이다. 어디서든 먹고 살 수 있을거야. 하지만 나는 이제서야 겨우 정착한 떠돌이에 불과해. 개나 고양이 따위 찔러죽이는 변태라는 꼬리표를 달고선 어디서도 살 수 없어. 제발, 내게 그런 가혹한 삶을 주지 말아다오.”

“례가 그러던데요.”

“또 례냐! 그 애꾸 년이 대체 뭐라 또 지껄이던!”

인내의 한계에 다다랐는지 스기야마가 벌컥 화를 냈다. 평소에 능글맞게 농지거리나 던지던 해롤드 스기야마가 아니다. 칼끝이 거칠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만약을 대비해서 그의 마음을 흐뜨려놓을수록 나는 유리해질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돌연 스기야마의 얼굴이 멍해졌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냐고 그랬어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더군다나 남의 칼을 가져다가 그렇게 개나 고양이를 찌르고 다녔냐고. 이유가 있는 행동이긴 했는지, 알면서도 그랬는지. 전혀 동기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나나 례나, 아니 사람들도 전부 당신은 생각지도 않았던 거예요. 맞아요. 신경도 안쓰던 떠돌이 배불뚝이 입만 산 칼잡이니까.”

처음에는 나도, 례도, 개나 고양이의 미간에 연달아 칼을 찔러넣은 범인은, 엄마를 죽인 뒤 점점 살인에 취하게 된 뷔엔 발레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점점 클럽의 규모가 커져서 몸이 세 개라도 모자라게 될 발레리가 그렇게 한가하게 길고양이나 잡아다 찌르고 돌아다닐 시간은 없었을 터였다.  

해롤드 스기야마는, 혹시나 펜싱 검을 신처럼 모셔놓으면 운이라도 좋아지지 않을까 싶어 에뻬를 가져다놓았다고 했다. 하지만 에뻬에 늘 날이 서 있고, 칼끝에 핏자국이며, 자루에 손자국이 늘상 남아 있다면 누구도 의심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례가 스기야마 도장에 묵은 것도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례의 조언에 따라 아무렇게나 파묻은 개와 고양이의 시체를 다시 검사해보니, 상처의 깊이와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천재적인 재능으로 오랫동안 검을 수련한 발레리였다면 찌르기가 그렇게 불안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범인은 에뻬를 가지고 어떻게든 에뜨르아식 펜싱을 연구해보려던 해롤드 스기야마였다. 우리들의 의심과 달리 그는, 해롤드 스기야마는, 비록 늙었을망정 뛰어난 검술을 지녔어도 시대에 뒤처져 배를 곯게 된 가련한 유랑검객이었다. 긱 더 리퍼와 마주치던 날, 칼을 뽑다 그의 얼굴을 떄린 것도, 행운이나 우연이 아니라, 발도술이라는 고급 기술의 일부였을 거라고 례는 말해주었다. 

스기야마는 대꾸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았다. 그는 칼자루를 쥐었던 례 못지 않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봉꾼처럼 살았지만 그 역시 오랫동안 칼을 잡았다. 그는 나를 향해 진검을 겨누었다.

“주먹질밖에 모르는 너나 네 어미가 알 리 없겠지. 어쩌면 너희들은 취미 생활로라도 어떻게든 먹고 살 수 있을 거야. 그래, 격구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도구가 있어서 비로소 인간인 게야. 주먹질과 발길질만 가지고, 인류의 조상이 토끼라도 한 마리 잡을 수 있었을까? 검의 본질은 살인이야. 발레리 놈처럼 예술한답시고 춤추듯 깔짝거리거나 죽도, 목검 따위 가지고 노는 건 오락이지, 무예가 아니란 말이다! 앞으로 무기는 더더욱 발전할 거다. 창칼은커녕 활조차도 쓰지 않고, 총과 포탄으로 멀리서 멀리서 싸우는 날이 오겠지. 검을 쥔 자들은 그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사라지고 말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마음대로는 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천천히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 도시에 마지막으로 남은 무인을 향해 인사했다. 해롤드 스기야마도 정중히 맞받았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끝. 




*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등록할 수 있게 도와주신 민경일, 이형진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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