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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브레인스톰

2015.11.22 23:0411.22

 

 

 

 

브레인스톰

Brainstorm

 

민경일


  나는 방금 침대에서 깨어났다. 알람을 끄고, 양치를 한다. 샤워를 하고 나면 머리를 말린다. 모든 것은 사방에 적혀있기에, 나는 많은 일을 스스로 할 수 있다. 늘 그렇듯 순조롭고 평온한 아침. 나는 수첩을 열었다. 적혀있기를 내가 어제 파란 셔츠를 다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은 파란색 셔츠를 입는 날이다. 옷을 입고 거울을 바라볼 때면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심호흡을 하고 말한다.

 

  나는 괜찮다.

 

  아침을 먹기 전에 약을 먹어야 한다. 하루에 한 알. 약을 먹으면 활력이 돌고 화가 누그러든다. 의사도 그렇게 말했다. 나는 한 번에 나아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내가 치료하겠다고 했을 때 친형은 기뻐하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형이 좋다.

 

  사실 나는 긴 문장을 생각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많은 것을 기억해 냈지만, 아직 남은 것 또한 많다. 정수리에서 목 뒤로 이어지는 굵은 상처는 아직 그 이유를 떠올리지 못한다. 가족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차 사고가 났다고만 말해줬다. 아직 나는 젊으니까 천천히 떠올리면 된다. 생각이 나면 이렇게 수첩에 적어두고, 매일 아침 읽다 보면 언젠가 내 기억이 될 것이다.

 

  두 번째 알람이 울리면 아침 8, 아침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다. 재료는 항상 전날에 사다 둔다. 싱싱한 채소를 손에 쥘 때는 왠지 모를 생기가 돌다가도, 곧 묵직한 기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의사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지만, 그럼에도 요리를 해야 한다고만 하셨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나는 요리선생님이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 수연 씨,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동혁 씨.”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그녀가 시키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분명 싱그러운 미소를 지녔을 것이다. 나는 수첩의 마지막 장에 그녀에 대해 이것저것 적어두었다. 그녀는 생머리에 키는 165cm 정도 된다고 했다. 과거에 수영선수를 했었기에 군살이 없다며 자랑한 적도 있다. , 남자친구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 별을 쳐두었다.

 

  “동혁 씨, 오늘은 우리 소고기뭇국을 할 거예요. 소고기뭇국은 동혁 씨가 아주 좋아하던 음식이에요.”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 수연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좋아하는지.”

 

  “동혁 씨가 좋아하던 음식이라고 하셨어요. 이틀 전에요.”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저런 말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스쳐가고 어떤 것은 남아 있다. 나는 소고기무국을 좋아했나 보다.

 

  “무를 씻어서 얇게 나박썰기 할 거예요. 무를 약 7mm 정도 두께로 썰어주세요. 그걸 겹쳐 쌓아올려서 바둑판 모양으로 자르는 거예요. 먹기 좋은 크기로요. 칼질할 때는 항상 왼손을 조심해야 해요. 알았죠?”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그녀는 이따금 내가 똑바로 하고 있지 않다며 주의를 주곤 한다. 예를 들면 내가 무를 막 썰기 시작하면 집중해서 다시 하라고 한다. 오랜 강의 경력 때문일까, 그녀는 나를 굉장히 잘 아는 것 같다.

 

  그녀를 따라 하면 어느새 맛있는 아침이 완성된다. 냉장고에 있는 반찬은 모두 그녀와 함께 만든 것이다. 수첩에 오늘 요리내용을 적으며 밥을 먹었다. 그녀도 같이 밥을 먹었다. 시시콜콜한 질문에도 그녀는 항상 나긋하다. 그런데 남자친구가 없다니, 나는 오늘도 별표를 쳤다.

 

  오후 1. 일하러 가야 하는 시간이다.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아주 높다란 빌딩이 있는 도심에서 내린다. 수첩에 적어둔 대로 도넛 가게에서 도넛을 산다. 사무실 직원들이 도넛을 좋아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 이곳 점원은 참 친절했다. 내가 돈을 내면 고맙게도 거스름돈을 잔뜩 주었다. 다른 곳에서는 보통 안 그랬으니까.

 

  나는 오피스텔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일한다. 치료를 위해 의사 선생님이 소개해준 곳이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나면, 천천히 청소를 하고 직원들 휴지통을 비운다. 휴게실에 접시가 쌓여있으면 설거지도 해야 한다. 모든 일을 마치면 경영지원부의 은혜 씨에게 보고하고 퇴근한다. , 빈 약통을 주면 다시 한 알을 채워준다. 그래서 난 주말까지 일을 해야 한다. 약은 매일 먹어야 하니까.

 

  집으로 돌아오면 수첩에 적어둔 음식재료를 사러 간다. 오늘 저녁은 닭볶음탕이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수첩에 적혀있으니 이 또한 사실이다. 손질된 닭, 감자, 당근 그리고 양파를 사서 난 집으로 돌아왔다. 역시나 정확한 시간에 전화가 울렸다.

 

  “, 수연씨. 안녕하세요.”

 

  “동혁 씨, 자 그럼 오늘의 저녁을 함께 해볼까요?”

 

  수연 씨의 지시대로 난 감자와 당근을 듬성듬성 썰었다. 칼질할 때는 왼손을 조심해야 한다. 사실 신경 쓰지 않더라도 내 왼손가락은 겨울잠을 자는 마냥 안으로 굽어있다. 예전에는 슬펐지만 그래도 지금은 오른손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리가 완성되고 우리는 식탁에 앉았다. 수연씨도 나와 같은 요리를 하기에 우리는 매일 밥을 같이 먹는다. 오늘따라 내 말에 수연 씨가 자주 웃었다. 나는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다.

 

  “, 수연 씨.”

 

  “, 동혁 씨. 어디 불편하세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수연 씨랑 자, 자고 싶어요.”

 

  어제 TV에서 본 영화에서는 아주 멋져 보였었다. 그래서 수첩에 적어둔 말이었다. 말이 없어진 수연 씨 때문에 순간 어지러웠다.

 

  “, 미안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그,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동혁 씨…….”

 

  말을 자른 그녀의 목소리는 내 손을 붙잡았다.

 

  “동혁 씨. 무슨 말씀 하시고 싶은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돈을 받고 일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겠어요?”

 

  “, …….”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수첩에 적혀있는 끝내주는 밤, 커피 한잔 등등. 나는 볼펜을 들고 두 줄을 그어버렸다.

 

* * *

 

  나는 방금 깨어났다. 알람을 끄고 양치를 한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나는 어제 노란 셔츠를 다렸다. 그래. 오늘은 노란색 셔츠를 입는 날이다. 알약을 삼키고 아침 전화를 받았다. 아침을 먹고 일을 다녀왔다. 수연 씨와 저녁을 했다. 가벼운 수다를 떨었다. 가끔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르지만,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생각해야 한다.

 

  전화벨이 울렸다.

 

  “저기 수연 씨.”

 

  “, 동혁 씨.”

 

  “수연 씨는 왜 이, 이런 일을 하죠?”

 

  “, 동혁 씨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심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나도 관심이 생겼어요. , 많이요.”

 

  전화기 넘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알아요. 나랑 자고 싶다면서요.”

 

  “, 제가 그랬었나요?”

 

  나는 수첩을 빠르게 훑었다.

 

  “, 미안해요…….”

 

  그녀는 또 한참을 웃었다.

 

  “괜찮아요. 서툰 것뿐이잖아요. 근데요 동혁 씨. 아마 우리는 만나기 쉽지 않을 거예요.”

 

  “, 왜죠?”

 

  “제가 아직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거든요.”

 

  “, --?”

 

  내가 말을 더듬자 그녀는 아차 싶었는지 웃어넘겼다. 그녀도 나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물은 조심해야 한다.

 

  그녀는 말했다.

 

  “우리가 만날 수는 없어도, 동혁 씨가 제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한다면 기분이 좀 좋아지실까요?”

 

  나는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우리가 함께하는 요리 시간은 서로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분명했지만, 문제가 생겼다.

 

  “, 수연 씨. 오늘 아침에는 요, 요리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무언가가 저를 혼란케 해요. 어떤 느낌들. 장면들.”

 

  반복되는 일에 나는 지겹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요리가 무척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욕도 사라졌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지만 묵직한 무언가가 머리를 아프게 했다.

 

  “그거 알아요? 동혁 씨는 원래 요리사였어요.”

 

  내가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은 자꾸만 깜빡였다. 급하게 수첩을 뒤져 가까스로 찾아냈다. 나는 대기업의 영업 사원이라고 했다. 구체적인 분야는 적어두지 못했지만, 젊은 나이에 실적이 좋아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상을 받아서 TV에 나온 적도 있다고 했다.

 

  “동혁 씨.”


  하긴 수첩에 적힌 것이 전부였다. 과거 일은 단편적으로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지금 내가 요리사가 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수연 씨가 그렇다고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하는 수 없었다.

 

  “동혁 씨.”

 

  “, 수연 씨.”

 

  “동혁 씨는 요리사였는데 꽤 유명했어요. 압구정에 레스토랑도 있었죠. 근데 사실은 무척 요리를 지겨워했어요. 온종일 하기에는 꽤나 고된 일이니까요. 그래서 특별한 날이 아니면 요리를 하지 않았었죠.”

 

  나는 수첩을 닫아버렸다. 그냥 좀 쉬고 싶어서 일어섰을 뿐인데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정적.

 

  “동혁 씨, 화났어요?”

 

  듣고 보니 화가 난 듯했다.

 

  “, 수연 씨는 왜 거, , 거짓말을 했죠?”

 

  “아니에요. 나는 내가 아는 대로 말해 준 것이었어요. 얼마 전에 동혁 씨의 파일을 새로 받았거든요.”

 

  “,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모, 모두 말해줘요.”

 

  “그건 안 돼요. 할 수 없어요. 이런 이야기도 사실.”

 

  그녀의 말에 난 수첩을 내던졌다.

 

  “동혁 씨 전화 끊지 말고 들어봐요. 이건 다 치료과정에 포함된 거예요. 동혁 씨가 간절히 원하던 치료잖아요. 부모님 그리고 형님을 설득하는 것도 잘해냈고요. 그리고.”

 

  “, 그리고요?” 나는 말을 끊었다.

 

  “그리고요?”

 

  “, , 그리고요.”

 

  그녀는 한참을 뜸 들이다 말했다.

  

  “치료에 성공하면 우리가 만날 수도 있잖아요.”

 

  나는 방금 깨어났다. 알람을 끄고 양치를 한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모든 것은 사방에 적혀있다. 주방에서 알약을 먹고 싱크대 앞에 섰다. 찬장에 새로운 글귀가 붙어있다.

 

  ‘우리가 만날 수도 있잖아요. - 수연 -’

 

* * *

 

  나는 얼마 전부터 알약을 먹지 않는 대신 일요일마다 물약을 먹었다. 영롱한 파란색이었는데 아주 달달해서 좋았지만, 약을 마시면 난 하루 종일 잠들고 긴 꿈을 꿨다. 내가 어떻게 그곳에 간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김없이 해변에 누워있었다. 내가 수연 씨와 해변을 걸을 때면, 그곳은 분명 여름이었지만 물은 굉장히 차가웠다. 마치 푸른 반딧불이 녹아든 듯한 파도는 천천히 내 발가락 사이로 부서지고, 그것의 궤적은 해변의 모래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곧게 뻗은 새하얀 백사장에 펼쳐진 푸른빛 흔적, 나는 그것을 따라 어딘지 모를 저 해변 끝으로 걸어가곤 했다. 끝까지 가 본 적은 없지만, 해변에 놓인 저 푸른빛이, 반짝이는 점들이 나를 이끄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제부터 나는 의사 선생님의 지시로 일터에서 간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왼손은 여전히 뻣뻣했지만, 칼질에는 꽤나 자신감이 붙었다. 수연 씨를 떠올리면 재료를 어떻게 다룰지가 조금씩 떠올랐다. 그동안 수첩도 두 번이나 새것으로 바꾸었다. 가끔 머리가 무겁고 아지랑이를 보기도 했지만, 수연 씨 덕분에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부모님 집에 방문할 예정이다. 시외버스에 올라 나는 몇 번이고 수첩을 읽었다. 반복된 필기의 흔적들, 모든 것은 수연 씨 덕분에 정리가 되고 있었다. , 수첩 맨 뒷장에 적어둔 그녀에 대한 내용은 수첩을 바꿔도 꼭 옮겨 적는다. 나는 수연 씨의 얼굴을 모르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나는 그녀가 수연 씨라고 믿는다.

 

  수원에 사는 부모님은 늘 그렇듯 날 반겨주셨다. 어머니는 날 꼭 안으며 집으로 들어와서 사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집 밖은 많이 위험하긴 했다. 깜빡하는 나도 이 정도는 잘 알고 있지만 이런 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의사 선생님도 그게 치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내 방 모든 곳에 사용법을 붙여둔 것이었다.

 

  아버지는 수원에서 일하신 지 오래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정도였다. 지금 내가 받는 치료도 아버지가 소개해준 것이라고 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첨단기술로써 치료에 실패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난 상관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모든 것은 아버지가 결정하셨지만 난 상관없었다. 내가 만약 치료된다면, 결국 기술이 완성된다면 나와 같은 많은 사람이 두 번째 기회를 얻을 것이다.

 

  내가 요리를 시작한 지 좀 되었을 때 형이 도착했다. 형은 형수님이 죽은 이후로 항상 어두워 보였다. 내게도 그랬다. 눈을 마주치면 형은 자리를 피했다. 내 전화도 잘 안 받았고 가끔 마주하면 안부를 묻는 정도가 전부였다. 오늘도 인사를 건넸지만, 형은 왔느냐는 말만 던지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형을 좋아한다. 많은 것들을 수첩에 적어야만 하지만 형에 대한 기억은 많이 남아있다. 형은 심리학자이자 뇌공학자였다. 내가 밖으로 돌 때 형은 컴퓨터와 놀았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내 기억 속에 형은 나를 정말 좋아했다. 분명 나를 좋아했었다.


  오늘 요리는 삼겹살 스테이크를 했다. 격자무늬 칼집을 넣어서 밑간을 해두었다가 아주 센 불에 겉을 익힌다. 노릇노릇할 때 화이트와인을 넣어서 팬에 누른 육즙을 불려내어 같이 조린다. 마늘과 월계수 잎을 수시로 표면에 문질러준다. 거의 다 익었다고 판단이 되면 베란다에 미리 피워둔 화로에 물에 적신 히커리 훈연 칩을 넣어서 스테이크에 스모크 향을 입혀준다. 바비큐로 만들었으면 2시간 걸릴 요리지만 이렇게 하면 20분이면 충분하다. 모든 것은 수연 씨에게 배웠다. 이 메뉴를 할 때면 강렬한 느낌을 받곤 했다. 아마 예전에 알던 조리법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아주 맛있게 드셨다. 내게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셨고 나는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늘 그렇듯 답변을 위해서 수첩을 뒤졌다. 어머니의 눈빛에서 연민을 느꼈지만 괜찮았다. 형은 오늘도 말없이 먹다가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본능적으로, 어쩌면 뭔가에 홀린 듯 형을 따라나섰다. 

 

  형은 아파트 1층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구부러진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형 옆에 섰다.

 

  “치료는 잘 받고 있니.”

 

  형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가늘게 뜬눈으로 물었다. 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그래. 절대 포기하지 마라. 부탁이다.”

 

  형은 담배를 지르밟고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잠깐 눈이 마주쳤는데 아주 어두워 보였다. 형은 수연 씨 말대로 수면 아래 가라앉은 듯했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형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오늘따라 부들거리는 왼손으로 수첩을 펴들고 나는 가까스로 적었다. 절대 포기하지 마라.

 

* * *

 

  의사 선생님이 차도가 있다고 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똑같은 일상을 보내지만 그 말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수연 씨도 기뻐했고 나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나중에 말해준다는 말을 했다. 그래, 나중에 들어도 좋다. 수연 씨와 함께라면.

 

  나는 요즘 들어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기다란 도로에서 나는 액셀을 힘껏 밟는다. 꿈에서 보이는 내 표정을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나는 조수석에 앉은 여성과 키스를 하고 맥주를 들이켠다. 굉장한 속도로 과속 카메라를 지나친다. 하나, , . 다시 진하게 키스를 한다. 그 순간, 쏟아지는 별빛은 굉음과 함께 내 얼굴을 긁어낸다. 그리고 난 오랜 잠에서 다시 깨어난다.

 

  사고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다. 하지만 옆에 수연 씨가 앉아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들어 특히 그랬다. 이런 생각을 수연 씨에게 말하면 그녀는 그저 웃고 만다. 하긴 나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 느낌만은 점점 강렬해졌고, 그 여자가 수연 씨라고 생각하면 꿈은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수첩을 안 적은지 좀 된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잘하고 있다고 했다. 비록 어제 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 그리고 수연 씨에 대한 기억들은 슬며시 제 자리에 남아있기 시작했다.

 

  여느 날과 같은 아침이었다.

 

  “동혁 씨 두부를 이렇게 썰어서 들기름에 부치는 거예요. 건강에 좋은 것 알죠?”

 

  “수연 씨, 이렇게 말인가요?”

 

  나는 두부를 듬성듬성 썰었다.

 

  “네 바로 그렇게요. 그럼 가볍게 간장 소스를 만들어 볼까요.”

 

  우스운 이야기지만, 어느 순간부터 수연 씨가 이렇게요, 저렇게요 하면 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냥 감이 온다고나 할까. 예전에는 4cm 두께라고 정확히 말해줬었지만, 지금은 이게 서로 편해졌다. 프라이팬에서 고소한 들기름 향이 올라왔다. 자글자글하게 익어가는 두부를 막 뒤집었을 때였다.

 

  “동혁 씨, 지금 먹는 약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요?”

 

  “들어도 내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효과가 있으니 된 거죠.”

 

  거짓말이었다. 나는 의사 선생님께 몇 번이나 물어봤었다. 답변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 뿐.

 

  그녀는 말했다.

 

  “뇌를 활성화 시키는 신약이래요. 고목에 새싹을 틔울 수 있는 그런 약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수리 로봇이 동혁 씨 뇌에서 수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주 작은 로봇들이 말이에요.”

 

  나는 정확하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마 첨단기술이겠지. 나는 첨단기술을 통해 결국 낫게 될 것이다. 하지만 수연 씨의 목소리는 무척 걱정되어 보였다.

 

  “동혁 씨, 그러니까 치료가 잘 된다면 예전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게 될 거에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녀의 말을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니까……, 아니에요 동혁 씨. 그냥 다음에 이야기해요.”

 

  우리는 요리를 마치고 식사를 했다. 아쉽지만 그녀는 작별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에게 다시 연락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늘은 수원 연구소에서 아주 중요한 진료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오늘이 디데이라고 했다. 내가 준비가 됐기 때문에 마지막 단계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수연 씨를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장 좋아하는 셔츠를 다려두었다.

 

  3시쯤 되어서 부모님과 나는 진료실, 아니 연구실에 도착했다. 강남 사무실에서 봤던 직원들도 몇몇 보였다. 내 약을 챙겨주던 은혜 씨는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끌고 다니던 모습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특이하게 생긴 의자에 난 앉았고, 많은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생각이 무척 복잡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그것을 만감이 교차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선생님이 말하길 내가 임상실험 군에서 가장 차도가 좋은 환자라고 했다. 내 노력과 가족의 희생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약물을 주입하면 나노봇에 의해 수많은 꿈을 꿀 것이라고 했다. 반복되는 강렬한 빛이 나타날 수 있고, 예상치 못한 냄새가 날 수 있다고도 했다. 곧 의자가 뒤로 젖혀졌고 나는 수술실에서 볼법한 밝은 빛을 마주했다. 은혜 씨는 의사 선생처럼 말하며 내게 시시콜콜한 질문들을 던졌고, 대답하다 보니 내 몸은 어느새 무겁고 차가워졌다.

 

  ‘주입하겠습니다.’

 

  내가 얼핏 들은 말이었다. 뒷목에 뭔가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목으로 미적지근한 물이 흐르면서 점점 숨이 가쁘고, 나는 어느 순간 침대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내가 심연의 바닥에 닿자, 수차례 푸른 섬광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쌀쌀해진 가을날 새벽, 나는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흰색 레인지로버였다. 내 성공의 상징이자 캠핑을 좋아하던 내가 근래에 주로 끌고 다니던 애마였다. 스피커에서는 강렬한 비트가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익숙했고, 편안한 마음과 함께 술기운이 올랐다.

 

  조수석에는 수연 씨가 앉아있었다. 그녀는 맥주병을 차창밖에 흔들며 환호하고 있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녀의 가장 기쁜 얼굴, 나는 액셀을 힘껏 밟고, 우리는 시화방조제의 직선도로를 시속 160km로 달리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파고드는 서해바다의 향기와 그녀의 체취가 느껴지고, 나 역시 그녀와 함께 환호했다.

 

  시속 80의 과속카메라를 보란 듯이 지나치고, 도로의 곡선 부분을 빠르게 지나 다시 직진도로로 진입하는 순간이었다. 파란색 섬광들이 사방에 번쩍이고,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고 표류하는 것만 같을 때, 나는 시공의 장막을 초월했다. 가을 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긴 궤적을 남기고, 푸른빛 가루를 흩뿌리며 저 도로의 끝으로 반듯하게 수렴하고 있었다.

 

  시속 200km에 다다른 희열의 순간. 휴게소에서 직선 도로로 진입하는 덤프트럭을 마주했다. 나는 급하게 핸들을 틀었고,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순간 시퍼런 유리파편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차 밖으로 튕겨 나갔고, 반대편으로 굴러가던 차량은 굉음과 함께 시화호로 사라졌다. 수연 씨는 그렇게 차와 함께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차갑고 그리고 느리게. 내가 눈물을 흘리자, 나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고요한 실험실이었다. 모든 기억이 섬광과 함께 연쇄적으로 돌아왔다. 눈을 질끈 감아도, 작은 로봇들은 끊임없이 푸른빛을 뿜어내고, 장면 하나하나는 푸른 모래로 모래성을 쌓아올리듯, 점들은 선이 되고 면이 되어, 곧 현실이 되었다. 기억은 나를 완성했지만 숨죽인 눈물은 베갯잇을 적시고, 나는 가득 찬 공허함에 짓눌렸다.

 

  나는 압구정에 레스토랑이 있었고 와인 바도 있었다. 아래 직원들을 돌리면서 가끔 TV에도 출연했었다. 혼자 사는 오피스텔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형에게 거들먹거리려고 레스토랑에 부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은 여자 친구를 데려왔고, 우리는 모두 친해졌으며, 그해 형은 결혼했다.


  형수님은 무척 아름다우시면서 지고지순했다. 형은 참 복 받은 사람이었다. 하긴 형과 같은 성격과 스펙이라면 형수님과의 결혼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샌님 같은 형은 이따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냈는데, 그런 지적 유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형수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나는 형과 다르게 방탕하게 살았다. 요리라는 일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고된 일이었다. 그것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나는 최선을 다해 밖으로 돌았다. 형이 너 이제 이러다가 오토바이도 타는 것 아니냐는 말대로 난 오토바이를 탔고, 속도광이 되면 안 된다는 형의 말에 난 속도광이 되었다. 형은 이제 정착하라며 가족 모임에서 보란 듯이 화목한 모습을 보여줬다. 나의 우상인 형이 행복한 모습에 나도 가끔 안정을 꿈꾸기도 했다.


  뇌과학자인 형은 나노봇을 통해 미세수술을 하는 기술의 선두주자였고, 이미 전기적 신호로 생쥐의 행동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바 있었다. 침팬지를 대상으로 한 최근 실험에서, 물리적 외상으로부터 복원된 뇌는 정상적으로 작동했고, 그로 말미암아 수원에는 큰 생명공학 및 인공지능 단지가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로젝트는 점점 거대해졌으며, 형의 신변은 철저하게 보호되었다. 가끔 형이 접대할 일이 있다며 내 레스토랑에 훌륭하신 분들과 함께 올 때면, 형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형은 장차 큰일을 할 사람이었다.

 

  어느 해 가을, 나는 형수님께 안부 차 전화를 걸었다. 형수님은 지친 목소리로 형이 변했다고 했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총괄이 되면서 한 달에 한 두번 꼴로 집에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형에게 전화해서 형수 좀 챙기라고 했지만, 예상과 다르게 형은 영 시큰둥했다. 그럼 네가 챙기던가 라는 말은 솔직히 큰 충격이었고 형답지 않았지만, 스트레스가 막중해서 그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형과 한잔하고 싶었다. 우린 오랜만에 단골 참치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분명 우리는 친하게 자라왔지만 삶의 결이 많이 벌어졌음을 새삼 깨달았다. 자연스럽게 장난기는 말라버렸다. 나는 말없이 형의 술잔을 채우고, 형은 확실히 내게 불만이 있어 보였다.

 

  형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렵사리 형수님에 대해서 운을 떼자 형도 요즘 힘들다고 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술이 잔뜩 오르자 형은 껄껄거리더니 실언을 하기 시작했다. 와이프가 무슨 체위를 좋아하며, 신음은 어떻고, 또 가슴은 아주.

 

  “그만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랄하고 있네.”

 

  낄낄거리는 형은 나를 흘겨보며 술을 들이켰다. 멱살을 잡아 올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형은 확실히 변한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형수님과 일주일에 한두 번 같이 식사를 하고 와인을 했다. 가족끼리 친하게 지내는데 큰 이유는 필요 없었다. 형수님은 나랑 동갑이었기에 우리는 많은 추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만화를 보고 자랐고, 같은 드라마를 보며 사춘기를 보냈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도 하나같이 재밌었다.

 

  우리는 어느새 친밀해졌고, 곧 나는 형수님이라는 말 대신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수연아.”

 

  우리는 정말 가까워졌다. 그녀는 점점 쾌활해졌고 그만두었던 수영을 다시하기 시작했다. 우울감에 불어났던 체중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돌아온 생기에 그녀는 빛이 났다. 내가 막 장난을 치곤하면, 그녀는 나더러 양아치라며 놀려댔다. 그럼 나는 그녀에게 꿀밤을 때렸고, 그녀는 어딜 형수님 가지고 노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수연의 생일날, 딱 그런 날이었다. 소소한 유머들과 함께 우리는 와인 두어 병을 했고 예거밤 몇 잔을 나눠 마셨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댔고 무척 취한 듯 했다. 나 역시 그랬다. 형에게 전화를 걸어 형수님을 데려가거나 아니면 여기서 재우겠다고 했더니, 형은 바쁘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무책임한 빌어먹을 놈.

 

  “수연아. 형한테 내가 전화했어. 자고가라.”

 

  나는 그녀를 침대로 안내했다. 휘청휘청하며 우리 둘은 침대에 포개어졌다. 나는 바로 일어서려 했다.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날 잡았고, 그녀의 눈가는 촉촉했다. 그때 돌아섰어야 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사랑스러웠다. 아니, 처음 본 순간부터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는지도, 어쩌면 원래부터 내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우리 만남은 순조로웠다. 형은 여전히 바빴고 우린 행복했다. 우린 점점 대범해졌고 레스토랑에서, 차에서 그리고 형의 침대에서 살결을 맞대었다. 그러면서도 우린 몇 번이고 헤어지려고 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모든 메시지를 지웠고, 나는 다시 방탕한 생활로 돌아가려고 노력했지만, 눈가의 외로움은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이별여행을 준비했다. 수연이가 캠핑을 가자고 했다. 우린 곧바로 대부도로 캠핑을 떠났다. 바닷바람 시원한 해변에 우리는 텐트를 쳤다. 나는 BBQ 스타일의 삼겹살 스테이크를 준비했다. 프라이팬에서 삼겹살을 익히다가 훈연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스테이크를 접시에 썰어내자 그녀는 활짝 웃었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더욱 행복했다. 함께 있으니 그랬으리라. 식사를 했으니 누군가 말을 해야만 했다. 시답지 않은 말들 말고, 우리는 정말 여기까지라고. 하지만 우리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와인을 홀짝일 뿐이었다. 해가 저물자 가을 날씨는 꽤 쌀쌀해졌다. 화로를 피우고 담요도 덮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새벽이 되어 수연의 입술이 파래지는 모습을 보면서 안 되겠다 싶어 그녀를 차로 데려갔다. 그때만 해도 난 멀쩡했다. 수연이 드라이빙을 가자고 해서, 그녀의 애교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시동을 걸었다.

 

  시화방조제에 도착했을 때쯤 수연은 이미 뒷좌석에 놓아두었던 맥주 한 병을 비웠다. 평일 새벽의 그곳은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 직선 도로였다.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수연과 맥주를 했다. 음악의 볼륨을 올리고 몸을 흔들었다. 그녀는 내 위에 올라탔다. 그녀의 체온 그리고 향기. 차 속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우리는 몇 번이나 키스를 나누었다. 그녀는 다시 조수석에 앉았다. 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괜찮다고 하자, 그녀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액셀을 밟았다. 스피커에서 흐르는 진동은 도로 위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행복감에 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다. 동혁 씨 사랑한다고.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녀가 보란 듯이 나도 창문을 열고 외쳤다.

 

  “수연아 사랑한다!”

 

  우리는 곧 곡선 도로에 접어들었고 난 쏟아지는 푸른 별을 보았다. 그것들이 내 얼굴에 담길 때, 나는 눈을 감고 도로에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수면에 가라앉았다.

 

  어느 날 나는 침대에서 깨어났다. 매일 같이 알람을 끄고 양치를 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렸다. 모든 것은 사방에 적혀있기에 난 인간 구실을 하나씩 했다. 아니, 다시 깨어난 쓰레기겠지.

 

  가까스로 숨을 내쉬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의 수연을, 형수님을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됐었다. 쓰레기라는 단어가 맴돌던 그때 머릿속에서 전화음이 울렸다.

 

  “동혁 씨. 저 수연이에요.”

 

  깨달음이 놀라움을 압도하는 순간, 그녀는 속삭였다.

 

  “우린 이제 하나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색 빛줄기가 연구실 방안을 가득 메우고, 나는 끝없이 확장하는 지평의 중심에서 첫발을 내디뎠다. 내 발자국을 따라 피어나는 푸른 가지들에서, 나는 썩은 잎들을 하나씩 떼어냈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것들은 바스러지며 한 줌의 푸른 모래로 흩날렸다.

 

  내가 식물인간 상태로 병실에 누워있을 때였다. 형이 처음으로 병문안을 왔다. 형은 나를 욕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형은 어느 순간부터 형수가 질렸다고 했다. 연애의 환상이 무너지고 일과 가정의 우선순위의 경계에서 형은 진절머리가 나버리고 말았다. 결국 형은 일을 선택했다.

 

  형은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뇌 그리고 우리의 사고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생각이 뻗어나가는 힘이 모든 연구의 열쇠라고 믿었다. 형은 그것을 씨앗이라 불렀다. 생각의 씨앗은 가지를 펴고 무의식과 의식을 관통함으로써 우리를 기만하고 성격을 재구성한다.

 

  나는 형을 좋아했지만 형은 감정표현이 서툴 때가 많았다. 내가 형수님을 챙기라고 형에게 전화했던 날 형은 결심했다고 했다. 형은 형수에게 나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기 시작했고, 와인이 몸에 좋다고도 했다. 그리고 룸살롱 영수증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만해.’

 

  ‘지랄하지 마라.’

 

  나는 형과의 술자리 이후로 꿈에서 형수의 몸을 탐닉했다. 윤리적 잣대로 짓누를수록 단어 하나하나는 무섭게 무의식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형의 무관심은 나를 분노케 했고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했다.

 

  수많은 기억이 그렇게 스쳐 지나가고 썩은 이파리가 모두 사라졌을 때 쯤, 수연이 앞에 나타났다. 푸른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그녀는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여운 사람. 그녀가 내게 한 말이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자, 그녀는 푸른 모래로 부서지고 흩날리며 결국 사라졌다.

 

  나는 눈을 천천히 떴다. 가운을 입은 은혜 씨는 플래시를 내 눈에 비추며 차트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동진 씨?”

 

  “제 이름은 동혁입니다. 은혜 씨.”

 

  대답과 함께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죄해야 했다. 때마침 보호자인 부모님이 실험실로 들어오셨다. 어머니는 나를 쓰다듬으며 울고 계셨고, 아버지는 말없이 날 지켜보셨다. 나는 직감적으로 형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집에 도착했다. 현관에는 역시 형이 즐겨 신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래, 형은 나보다 항상 차분하고 정리정돈을 잘하곤 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지만 나는 힘껏 삼켰다. 작은방 문은 닫혀있고, 나를 짓누르듯 조용했다. 죄인이 깨났으니 형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들까. 그럼에도 포기하지 말라며 내 치료를 지켜봐 주었다니.

 

  내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 아버지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내 아들 동혁아. 이놈아. 이따가 대화 좀 하자. 알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고리를 돌렸다.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하지만 불 꺼진 어둑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문간에 서 계신 아버지를 쳐다봤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불을 켜주고 나가셨다. 아무래도 형은 잠깐 외출한 듯했다.

 

  작은 방에는 상자로 포장된 형의 짐이 가득했다. 나는 형을 기다리는 동안 형의 책상에 앉았다. 오래된 필기구와 고이 접어놓은 안경 닦이, 모든 것은 형의 취향 그대로였다. 나는 형의 책장을 훑다가 조심스레 연습장을 꺼내 들었다. 형의 필적을 따라 내가 얼마나 못된 녀석인지를 되짚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연습장에 끼어놓은 신문 스크랩을 발견했다.

 

  ‘셰프테이너(chef+entertainer)로 승승장구하는 뇌공학자.’

 

  사진에는 앞치마를 두른 형이 활짝 웃고 있었다. 아마도 내 레스토랑에서 촬영한 듯했다. 기사 내용에는 어떻게 요리를 시작했느냐는 질문에 아내 수연을 위해서 시작했다는 글이 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나는 연습장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으려 했다. 연습장을 들고 책장 가까이 선 순간 연습장에서 편지봉투가 떨어졌다.

 

  ‘To. 사랑하는 동혁 씨에게.’

 

  봉투에 적힌 글귀를 보며, 역시 형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에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나는 조심스레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 시간이 필요했지만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로 했어요.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그리고 당신이 누구라고 하든, 나는 언제나 당신을 사랑해요. - 수연.’

 

  나는 뒷목이 뻣뻣했다.

 

  ‘당신이 누구라고 하든

 

  내가 허겁지겁 편지를 봉투에 넣을 때 나는 봉투 안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수연의 생일날, 와인파티를 했던 그날이었다. 형은 내 옷을 입고 있었고, 수연과 활짝 웃고 있었다. 시퍼런 섬광이 번쩍이며 술 냄새가 확 올라왔다.

 

  “동진씨! 차 세워요!”

 

  순간 수연의 비명이 귓가를 때렸다. 나는 액셀을 힘껏 밟고 있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잔뜩 겁에 질린 수연에게,

 

  “그래, 여태까지 그놈하고 뒹구니까 좋았어?”

 

  “내가 말했잖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수연의 말에 나는 아주 평온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선택할 줄 알았지. 우리 말고 말이야.”


  수연의 상기된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미안해 동혁 씨! , 아니 동진 씨. 제발 이러지 말자…….”

 

  수연의 어깨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어디 한번 동혁 씨 사랑한다고 외쳐보지 그래! ?”

 

  “여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흐느끼는 수연을 위협하듯, 나는 핸들을 한 손으로 힘껏 내려쳤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수연은 가까스로 외쳤다.

 

  “, 동혁 씨 사랑해!”

 

  어느덧 속도는 시속 160km를 넘어서고 있었다. 서해바다의 향기는 무섭게 파고들고, 수연의 생기는 그것에 흩날려 사라지고 있었다.

 

  “동진 씨! 차 세워요! 제발, 내가 잘못했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웃어넘기고는 창문을 향해 외쳤다.

 

  “수연아 사랑한다!”

 

  어느덧 우리는 곡선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푸른 섬광이 번쩍이는 순간 나는 다시 정신이 들었다.

 

  “, 수연아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조수석에서 말없이 울고 있었다. 갑자기 깨어난 나는 뒤늦게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제어하려고 애썼지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리고 1, 우리는 덤프트럭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뒤섞인 기억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수연은 나를, 동혁 그리고 동진 모두를 사랑해주었고, 우리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그 차가운 물에 내던졌다.

 

  아버지는 내 손을 붙잡았고, 어머니는 옆에 서서 울고 계셨다.

 

  “,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죄인인 제가 어떻게…….”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차가운 눈물이 흐르고, 날숨에서는 지독한 서해바다 냄새가 느껴졌다모든 감각이 가시 돋친 듯 요동쳤다.

 

   저는 죽어야 합니다.”

 

  내 말에 아버지는 호통 쳤다.

 

  “이 빌어먹을 새끼야. 네놈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면 더 똑바로 깨어있어야지, 이놈아! 누가 죽음이 사죄하는 길이라고 했더냐. 깨어있어라. 하나도 빼먹지 말고 기억하고 깨어있어야지! 그게 바로 사죄하는 길인거야. 네놈만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서서 네가 연구하던 것을 완성하란 말이다.”

 

  그래, 그것만이 사죄하는 길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 , 아버지…….”

 

  내 왼손은 점점 굳어가고, 겨울잠에 빠져든 두꺼비처럼 말려들었다. 조수석에 앉았던 수연의 흐느끼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는 곡선 도로에 접어들었고, 휘몰아치는 푸른 별들이 내 얼굴에 차갑게 부딪혔다.

 

  아버지는 나를 붙잡아 흔들고, 나는 팔을 뻗어 수연에게 닿고 싶었지만, 선명하던 그녀의 얼굴은 수면 아래로 점점 멀어지고, 그녀의 뜨겁던 눈물이 내 눈가에서 차갑게 흘러내렸다. 가까스로 그녀의 이름을 한 모금 삼킨 나는 눈을 감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방금 침대에서 깨어났다. 알람을 끄고 양치를 한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린다. 모든 것은 사방에 적혀있다. 덕분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한다. 순조롭고 평온한 아침. 나는 수첩을 열었다. 치료에 진척이 있다고 메모해뒀다. 기술은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수도 있다. 과연 내게도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아침 8시가 되면 두 번째 알람이 울린다. 이제 아침을 할 시간이다.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수연 씨,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동혁 씨.”

 

  나는 그녀의 상냥한 목소리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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