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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라디오 보이

2017.08.10 21:4808.10

위성궤도 위를 항진하는 한별 호는 새로운 라디오 전파를 송출기에 실었다.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진 넓적한 안테나 끝에서, 부드러운 전파 파장이 지상을 향하여 쏟아졌다.
아름다운 전파의 베일이 작은 반도 위를 덮었다. 서울의 번화가 위에도, 강원도의 작은 산골 위에도, 부산의 작은 선착장 위에도.
두꺼운 구름을 통과하여 힘이 약해진 전파 한 줄기가 어느 도시의 음울한 아파트 단지로 떨어졌다. 둥그런 접시 안테나가 그 전파를 흡수했다. 전파는 트랜지스터 검파기와 증폭기를 거쳐 이윽고 스피커에 이르러 아름다운 화음으로 완성되었다.

2차선을 접하고 있는 3층짜리 허름한 전세 아파트.
주파수 검색기에서 막 손가락을 뗀 소년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소년의 이름은 이소월이었다. 그는 추위에 곱은 손가락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삐익삐익하며 의자의 관절이 비틀리도록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항상 요란스런 개인 방송국들의 락앨롤. 광고방송사의 얄팍한 유혹이 깃든 목소리. 뉴스채널의 시시콜콜한 사고소식과 신랄한 비평들. 흐릿한 라디오 전파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복음의 근원이었다.
<진실을 쫓는 사람은 사실을 의심하는 법이다.>
짙은 어둠 속. 허리를 웅크린 그 작은 아이는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좋아하는 말이다.
스펀지가 뜯어져 나간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그러자 책상 위에 놓인 비스킷 포장지가 방정맞게 굴러가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소월은 생각했다.
나는 몇 년 후에야 이 허술한 아파트를 벗어날 수 있을까? 언제가 되어야 모래 냄새와 곰팡이 냄새를 잊을 수 있을까? 갈라진 벽 틈에서 바퀴벌레 기는 소리가 들렸다.
회청색 플라스틱 라디오는 울적한 그를 달래려는 듯, 희망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노래 사이로 못돼먹은 잡음이 끼어들었다. 잡음은 금방 사라지지 않고 계속 노래가사를 가로채고 있었다.
소월은 미간에 어두운 빛을 띄웠다. 문득 오랫동안 펴지 못한 허리뼈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주파수 검색기를 조정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안테나가 잘못됐나?'
창문 밖에 매단 접시 안테나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월은 접시 가장자리를 잡고 각도를 높였다. 그러나 라디오의 잡음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아예 창문 밖으로 고개를 빼었다.

3층에서 내려다 본 거리는 빙하 밑을 흐르는 물처럼 차가운 안개에 잠겨 있었다.
전파상의 쇼윈도 너머에서 깜빡거리는 파란색 영상,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며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하는 소녀의 검은 그림자, 낙엽을 대신하듯 바람에 날리고 있는 하얀색 전단지, 자동차가 다니지 않아서 이미 반쯤은 인도가 되어버린 낡은 아스팔트 도로. 이곳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 저 멀리 바람에 깜빡이는 번화가를 보며 부러운 듯한 표정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소월은 이곳이 지독히도 싫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싸늘한 풍경만은 좋아했다. 차가운 오렌지 빛깔의 풍경이 그의 풍부한 감수성을 자극하곤 했기 때문이다. 아래  쪽에서 두 남녀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이러지마."
뒤로 물러서면서도 어쩐지 유혹하는 듯한 여자. 좀 취한 것처럼 보인다. 두꺼운 코트를 벗은 남자가 그것을 여자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들은 점점 가까워졌고, 서로의 입술을 맛보기 시작했다. 두 남녀의 모습은 고전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잉그리드 버그만, 캐리 그란트.
소월은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얼른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때, 그는 불길한 무언가를 보았다.

-SHOOt HIm-
긴 그림자 하나가 2차선 건너편의 골목에서 나타났다.
그림자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눈먼 사람처럼 버둥거리고 있었다. 길게 왜곡된 그 동작은 매우 기괴하게 느껴졌다.
소월은 고개를 좀 더 내밀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창틀 모서리에 살이 눌렸지만 참을 만 했다.
이윽고 중년의 사나이가 골목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키스를 나누던 남녀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사나이는 진득한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는 비틀거리면서도 도와달라는 듯 두 팔을 뻗었다. 자신을 끌어올려줄 지푸라기를 찾는 듯했다. 두 남녀는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갔다. 불길하게도 라디오의 잡음이 점점 기세를 올려갔다. 마치 전파의 비명처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소월은 고개를 좀 더 내밀었다.
골목 안쪽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사나이를 쫓는 사람일까? 그림자는 침착하게 골목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사나이는 겁에 질려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다가 2차선을 건넜다.
순간, 잡음이 계속되던 라디오가 침묵에 휩싸였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죽었어.]
그와 함께,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사나이는 일순간 공중에 떠오른 것처럼 보였다. 가슴과 어깨에서 붉은색 안개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부유와 함께 격정적으로 치켜 뜬 눈에, 추락과 동시에 죽음이 드리워졌다.
소월은 방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아스팔트 위엔 빨간색 액체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쓰러진 사나이는 가끔씩 몸을 경련시켰다. 소월은 방금 살인사건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무심결에 골목 귀퉁이를 바라보았다. 역광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키 작은 사람이 권총을 들고 서있는 건 알 수 있었다. 갑자기 그가 소월이 있는 3층 창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소월은 재빨리 창문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몸을 웅크리고 벽 뒤에 숨었다.
'그가 날 봤을까?'
거친 숨이 목구멍을 할퀴며 들락거리고, 얼음장 같이 차가워진 입술 안에선 이가 부딪혔다. 뺨 속에까지 한기가 스며든 것 같았다. 겨울. 이건 악몽이다.
밖에선 이미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막 깨어난 아랫집 사람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겁에 질린 눈동자로, 책상 위에서 요란스럽게 잡음을 내고 있는 라디오를 보았다. 매끄러운 사각형의 몸체가 가끔씩 달빛에 모습을 드러냈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른쪽 상단에 붙은 다이오드가 미친 듯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소월은 불가해한 존재를 만난 것처럼 감히 그 라디오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그가 알고 있던 친숙한 전자장치가 아닌 것이다.
칼로 잘라낸 것처럼, 갑자기 라디오의 잡음이 멈췄다. 소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라디오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비친 라디오가 하얗게 보였다. 소월이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키는 순간, 스피커에서 방금 전의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너!]
짧은 지시어. 자신을 가리키는 걸까, 아니며 이 주파수를 듣고 있는 모두가 이 소식을 들은 걸까. 소월은 공포를 느꼈다.
스피커가 다시 말했다.
[네가 본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해선 안 돼. 절대!]
짧지만 엄격한 명령이었다. 다시 잡음.
소월은 숨을 죽였다.
마치 잠들었다 깨어난 듯 개인방송국 <피버 기타보이즈>의 방송멘트가 다시 방안을 가득 메웠다.
소월은 두 팔로 무릎을 감싸 쥐고 조그만 짐승처럼 모을 둥글게 말았다. 신을 믿지 않았으나 밤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rAdIO bOy-
시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모두의 관심으로부터 외면당한 초등학교가 있었다.
소월과 같은 구 시가지의 낙오자들이 모여드는 구차한 곳이다.
교사건물은 떨어진 콘크리트 사이로 꼬부라진 녹슨 철골을 드러내고 있고, 책상은 검은색으로 썩어가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수업보다는 당일 점심식사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학생들은 이곳을 부엌 아니면 식당이라고 불렀다. 적어도 점심식사는 무료로 제공되었으므로.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지하철과 급정거하기 일쑤인 시내버스. 대중교통이라는 고문대를 지나온 소월은 윤기가 없는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리에 앉았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손과 팔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공허했다. 그는 어제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것 좀 봐."
학생들은 교탁에 설치된 홀로비전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한 아이가 친구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B급 거주지에서 사람이 죽었대!"
"뭐야!"
조명 아래 드러난 도둑처럼, 소월은 순간 몸을 움츠렸다. 덕분에 납작한 의자 모서리에 허벅지를 긁히고 말았다.
라디오의 명령은 그에게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그는 경찰은 물론 다른 누구에게도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정의하기 어려운 강제력이 그에게 작용하고 있었다.
홀로비전엔 한 중년 남자의 사진이 영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떠올랐다. 소월은 지나가듯 그 사진을 훔쳐보았다.
'어제 총에 맞고 쓰러진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일까?'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오후 11시경. 구시가지 B급 거주지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피해자는 올해 39세의 이현묵 씨로, 그는 지난 8월 경 마약조직 오협관의 두목 강만혁을 살해한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조직 내의 복수전으로 보고 있으나,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아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소문을 좋아하는 아이가 법석을 떨었다.
"경찰도 헛고생하고 있네. 이 사람을 죽인 건 '라디오 보이'야."
"라디오 보이?"
"그래, 난 어제 라디오를 듣고 있었는데, 내내 잡음만 나오더라고. 잡음은 '라디오 보이'가 나타났단 증거지. 이현묵이 누군지 알아? 그 사람은 마약조직의 중간 보스였어. 인터넷만 뒤져봐도 알 수 있지. 증거불충분으로 구속은 못했지만."
라디오 보이.
대화의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월은 작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라디오 보이'를 그저 뜬소문이라고 생각했다. 흑점의 폭발이나 태풍 같은 기상이변이 악인의 죽음과 묘하게 맞물렸을 뿐이라고. 그런 소문이 유독 구시가지에서 유행하는 것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모두 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월은 생각했다. 열세 번째 계단 아래 묻혀 있는 어느 여학생의 시체나, 운동장 밑에 있는 공동묘지처럼 라디오 보이 역시 헛된 망상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어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대체 뭘까?
자신을 올려다보던 검은 얼굴과 라디오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떠올랐다. 소월은 공포와 호기심이 기묘하게 섞인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소월이! 너도 그 근처에서 살지 않나? 어제 밤에 뭐 본 거 있어?"
"아니, 난 어제...일찍 잤어."
소월은 라디오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혼자 이 비밀을 소유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교실 앞문이 열리며 담임교사가 들어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낯선 아이가 모두의 시선을 붙잡았다. 번들거리는 가죽재킷, 중간쯤의 키에 덥수룩한 머리가 눈을 가리는 남자아이였다. 학생들은 모두 그가 손쓸 수 없는 문제아일 거라고 짐작했다. 다만 소월 혼자만이 그의 냉담한 표정에서 가느다란 긴장감을 읽어내고 있었다.
"갑작스럽지만 새로 온 전학생이야. 연아, 자기소개를 해줄래."
"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부모님 직장 때문에 갑자기 전학 오게 됐어. 류연이라고 해. 잘 부탁한다."
소개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가 책상 사이로 지나가자 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비틀며 피했다. 어떤 아이는 드러내놓고 겁먹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가 소월의 뒷자리에 앉아 버리자, 다른 학생들은 재빨리 앉은 자세를 견고히 고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더 이상 자리를 바꿀 생각은 하지 말라고 시위하는 듯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강가하는 건 소월 혼자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오래지 않아 연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훔쳐보는 듯한 은밀한 시선이 하루 종일 그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신경이 쓰여 글자도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연이 날 훔쳐보고 있는 걸까?'
그러나 주의를 주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볼까 해도 도중에 단념하게 된다. 연의 눈빛과 마주했을 때의 꺼림칙함을 상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tHE GUn KId-
가난하고 구차한 학생들에게도 늘 활력이 넘치는 일과가 있다면 그건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당번이 퍼온 밥이며 반찬들을 식판에 담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묵은 쌀에 싼 반찬이라도 공짜라는 이유 때문에 어쩐지 맛있게 느껴졌다.
소월은 문득 연의 자리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자리는 점심이 시작된 직후부터 비어있었다. 점심은 먹지 않는 걸까.
"새로 온 전학생 말이야. 좀 이상한 것 같지 않아? 하루 종일 한 마디도 안 하고, 내내 석고상 같은 표정만 짓고 있잖아."
"어디서 뭐하다 온 놈인지도 모르겠다, 야."
"딴 학교에서 사고치고 쫓겨난 게 분명해. 난 그 놈 별로 맘에 들 것 같지 않아."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벌써부터 그를 별종 취급하고 있었다. 소월은 연의 차가운 눈빛을 상기하며, 이로 숟가락을 물었다. 왠지 숟가락의 쇠맛과 그의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접하면서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그 무엇.

식사가 끝났다.
한 바퀴 산책을 하고 돌아온 소월은 문득 연의 자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리 옆에 매단 가방이 반쯤 열려 있었다. 이때 다른 친구가 소월의 옆으로 다가왔다.
"열어보자."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겉이 찢긴 낡은 노트와 노랗게 세월에 물든 교과서. 몇 개의 볼펜. 초등학생들의 일상적인 준비물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친구는 실망하는 눈치로 가방 앞쪽의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엔 번쩍거리는 베레타 자동 권총이 들어 있었다.
"와!"
친구는 환호성을 지르며 권총을 끄집어냈다. 총구에서 반사된 햇빛이 소월의 눈동자를 가로질렀다.
순간, 얼어붙은 공기를 진동시키던 두 발의 총성이 떠올랐다. 소월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어냈다.
"이거 진짜처럼 잘 만들었는데? 어디서 파는 거지?"
"몰라. 비비탄을 넣고 쏘는 건가? 오! 이거 꽤 묵직한데?"
"나 이거 알아! 새로 나온 건데, 신소재를 써서 엄청 가볍다더라. 혹시 진짜 아니야?"
하나둘씩 몰려든 친구들이 권총을 돌려보았다. 광이 흐르던 몸체가 때 묻은 지문으로 더렵혀졌다.
이리저리 넘겨가다가 가장 처음 총을 쥔 친구에게 총이 돌아갔다. 총을 넘겨받은 친구가 소월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한 번 쏴 볼까? 어때?"
쓰레기 같은 양아치 녀석. 소월은 속으로 욕을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일진인 이 애는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녀석이다.
담배처럼 하얀 연기를 흘리던 살인자의 총이 자꾸 겹쳐져 보였다
전신이 떨려왔다. 소월은 한쪽 팔을 잡으며 자신의 망상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어제 본 붉은색 피안개가 틀림없이 정신의 어느 한 부분을 망가뜨려 놓은 거라고.
드르륵 앞문이 열리며 수학선생이 들어왔다. 점심시간이 끝난 것이다. 친구는 재빨리 소월에게 총을 넘겼다. 소월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바로 등 뒤에서 거친 손 하나가 튀어 나왔다. 어느새 제자리에 돌아온 연이었다.
"그건 내 건데."
"아, 그래."
소월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권총을 넘겨주었다. 고개를 돌리다 연이 자신을 쏘아보는 걸 보고 소월은 다시 눈을 돌렸다.


-CIty LInE-
소월은 매일 도시를 종으로 가로질렀다. 학교 근처에서 지하철을 타고 번화가의 강변역에서 내린 다음,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가야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걷는 내내 소월은 뒤가 신경 쓰였다. 바보처럼 습관적인 의심증에 걸려버린 게 아닐까? 소월은 의심을 떨쳐버리기 위해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연이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소월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승강장으로 통하는 복도 끝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의 뺨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다.
우연의 일치일 뿐이야. 연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앞쪽에 걸린 지하철 노선을 보고 있는 거야. 걘 오늘 처음 전학 왔잖아? 소월은 속으로 상황을 납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심장 박동이 서서히 빨라지는 것을 멈출 순 없었다.
"지하철 시간에 딱 맞겠는걸."
"빨리 걸어야 돼."
친구들의 말대로, 개찰구 너머에서 전철의 도착을 알리는 메시지가 들려오고 있었다. 앞선 친구들이 재빨리 개찰구를 통과했다.
저 개찰구만 넘으면 연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소월은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끼며 개찰구를 넘으려 했다. 그러나 개찰구는 그를 반대편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삑'하는 비프음과 함께 납작한 경고등에 불이 들어온 것이다.
소월은 자신의 ID카드를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스캐너에 가져다 대었다. 또다시 비프음이 울렸다.
소월은 초조해졌다. 이미 건너편에는 지하철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직원이 의심스런 눈을 하고 다가와서 소월의 ID카드를 살폈다.
소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저, 제 카드 안 되는데요."
"개찰구 고장은 아닐 거야. 잠깐 기다려봐."
직원이 경비실로 보이는 곳 안쪽으로 들어가서 카드 리더기에 소월의 카드를 밀어 넣었다. 거기서는 카드를 인식했지만 다시 개찰구에 대보니 또 안 되었다.
소월이 물었다.
"그냥 지나가면 안 돼요?"
"안 돼. 개찰구를 그냥 통과하면 벌금을 물게 되어 있어."
소월의 미간에 어두운 빛이 드리웠다. 이미 지하철은 친구들을 태운 채 떠나가고 있었다.
이때 등 뒤에서 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철을 놓쳤니?"
떼어놓으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끈질기게 따라붙는 악운처럼, 연은 벌써 소월의 옆에 서있었다. 소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개찰구에 녹색 등이 들어왔다. 마치 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사정을 모르는 직원이 분위기에 맞지 않게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저절로 고쳐진 모양이네. 불편하게 해서 미안하다, 얘야."
연이 앞장서서 개찰구를 통과했다. 소월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넌 B급 거주지에 사니?"
연이 소월에게 물었다. 하루 종일 말이 없더니, 소월의 옆에 붙어선 두 번 씩이나 먼저 말을 건 것이다. 소월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응. 그런데 너는?"
"나도 아마 같은 지하철을 타야할 거야."
연이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표정을 보여주었다.


-rAdIO bOy2-
"B급 거주지로 가는 버스는 굉장히 드물어. 여긴 번화가지만, B급 거주지는 인구도 적고 지원도 별로 못 받는 형편이야."
건망증 환자의 기억력처럼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버스였다. 지하철에서 함께 내린 소월과 연은 강변의 정류장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연은 아무런 말도 없고 표정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모든 일에 무관심한 듯,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구시가지의 두 초등학생이 다른 사람들에겐 어떻게 보일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아저씨, 심부름을 가는 듯한 꼬마 아이, 아이를 업은 아주머니.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한 여학생이 그들을 바라봤지만 그저 우연인 것처럼 보였다. 깨진 플라스틱 바람막이 사이로 차가운 강바람이 불어왔다.
연은 바람결에 날려 온 광고 전단지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소월은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하고자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전단지에 나오는 건 50%는 순 뻔이야 그 집에서 파는 고기는 폐사한 가축들을 사들인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그러나 연은 소월의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전단지를 접어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소월은 침묵이 싫었다.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연도 라디오를 좋아할까? 소월은 라디오에서 들은 무수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기, 라디오에서 그러는데……."
"너희 집 근처에 경찰서가 있지 않아?"

좀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걸까? 어쨌든 그건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소월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구나. 흠. 무슨 이야길 하려고 했어? 라디오?"
"그래, 라디오."
순간 소월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를 까먹었다. 소월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 했다.
"라디오가 왜?"
"라디오……라디……라디오 보이 알아?"
"라디오 보이?"
연이 소월을 바라보았다.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쩐지 무표정을 가장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인데?"
"그건 소문이야. 라디오 보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마음대로 전파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대. 처음엔 수많은 기관으로부터 관심을 받고 후원금도 적잖이 받아서,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연구기관에선 그 아이에게 위험한 실험도 서슴지 않았어. 그래서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멀리 외국으로 떠나기로 했대. 그런데 그 아이가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한 범죄조직이 아이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걔를 납치하려고 했다는 가봐."
소월은 들은 대로 말을 하며, 이것이 정말 전형적인 도시괴담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로 만들면 B급이다. 얼토당토않고 유치한, 그러나 듣고 나면 스티커라도 붙인 듯 잊히지 않는.
연의 표정엔 전혀 비웃는 기색이 없었다. 소월은 말을 이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 사이 연은 접고 있던 종이를 다시 반으로 접으면서 무관심한 듯이, 그러나 어쩐지 감상적으로 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아이는 그 사람들에게서 탈출했다고 하지. 그러나 부모님들은 이미 모두……. 뭐 그래서 그 아인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복수를 하고 다닌다고 해. 어두운 밤에, 갑자기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잡음을 내면, 그게 바로 라디오 보이가 나타났다는 증거라고 하더라고."
"재미있는 소문이네."
연은 다 접은 종이를 집게손가락을 들어 강 위로 날릴 시늉을 했다. 광고문구가 알록달록하게 새겨진 날렵한 종이비행기였다.
연은 힘차게 비행기를 날렸다. 차가운 바람에 내맡겨진 종이비행기는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날아갔다.
연과 소월의 시선이 종이비행기를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강 상류 쪽에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몇 걸음만 더 뒤로 걸으면 강에 접한 콘크리트 절벽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도 사진을 찍느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막 그가 강을 향해 걸음을 내딛으려 할 때, 그의 뒷주머니에 꽂혀있던 휴대폰이 반짝거리며 벨소리를 냈다. 그는 그제야 사진기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자신이 강에 빠질 뻔한 것을 알고는 몸서리를 치며 길 쪽으로 물러섰다.
연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능력이 있으면 참 좋겠다."
"그렇지."
소월은 남자가 사라진 곳에서 얼마간 눈을 떼지 못했다.
이쯤 되었으면 버스가 오지 않을까?
갑자기 조바심이 일어서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차분한 음악 속에 취해버리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텐데. 의자에 구부리고 앉아 듣는 음악이란 얼마나 안락한가.
그때 연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이런, 벌써 왔어."
"뭐?"

-FOLLOw ME!-
주유소를 낀 코너를 돌아 검은색 승용차가 나타났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미끄러지며 긴 비명을 토했다. 지나치게 과격한 운전이었다. 창이 새카맣게 세팅되어 있었으므로 안에 타고 있는 두 남자의 삭막한 윤곽만이 겨우 식별되었다. 연이 소월의 팔을 잡고 일어섰다.
"왜?"
소월은 연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검은색 승용차가 소월을 향해 속도를 높이며 달려왔다. 플라스틱 바람막이가 파편을 튀기며 깨졌고, 스테인리스 골조가 번개모양으로 휘어졌다. 간발의 차이로 핏덩이가 되는 신세를 면한 소월은 그 자동차가 명백한 살의를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연이 소월의 팔을 잡아당기며 외쳤다.
"따라 와!"
연과 소월은 좁은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입구에 멈춰 선 검은 차에서 두 명의 사내가 뛰어 내렸다. 연은 가방 속에서 총을 꺼냈다.
순간 소월은 학교에 있을 때와는 정 반대의 생각을 했다. 장난감 총으로 뭘 어쩌겠다는 거지? 그러나 연이 자동차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때, 화약연기와 함께 터져 나온 소음이 소월의 모든 생각과 감각을 멈추게 했다. 소리는 한참동안 소월의 머릿속에서 메아리 쳤다.
사내들은 연의 총격에 화들짝 놀라 차 뒤로 몸을 숨겼다. 연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총격을 가하곤 골목 반대쪽으로 빠져나왔다. 소월은 벌써부터 땀으로 진창이 된 몸을 이끌고 연을 따랐다. 먹먹해진 귀 때문에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소월은 붉어진 얼굴로 연과 골목 쪽을 번갈아 보았다. 가슴 한복판에서 가솔린 엔진 같은 것이 쿵쿵 거칠게 회전하며 피를 펌프질했다. 그 때문인지 목소리가 고함처럼 커지고 말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연은 권총을 바지 뒤춤에 감추면서, 마치 소월의 질문이 무척이나 멍청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전혀 상관없는 말을 했다.
"총소리가 났으니까, 경찰이 올 거야! 하지만 우린 아직 할 일이 있어!"
검은색의 차는 도로를 따라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연과 소월은 아직도 차가 횡단하고 있는 도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운전자들의 비명소리와 욕설이 이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자신들이 빨간 신호등에 걸려있음을 깨달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번화가 일대의 모든 도로가 동시에 빨간 신호등으로 묶여버렸다. 도처에서 경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멈춰버린 도시의 모세혈관 속을 유유히 누비다가 상가지역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자동차로 추적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은 사내들이 도로로 내려섰다. 그러나 바로 그때 모든 빨간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때문에 그들의 추격은 상당히 늦춰지게 되었다. 초저녁의 상가는 휘황찬란해, 동화 속의 왕국처럼 줄지어 늘어선 쇼윈도들은 황금색조로 빛나고 있었다. 문 앞에서 손님을 물고 있는 마네킹 로봇이 입술 끝을 기계적으로 밀어 올리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저희 가게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영국 전통 기법의 <베틸레느>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소월은 저도 모르게 좌우를 둘러보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 욕심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연이 초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놈들이 곧 뒤쫓아 올 거야."
소월은 다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잠깐만! 아까 그 사람들 누구지?"
"오협관 놈들이야. 네가 쓸데없는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소월은 그 소리에 마음속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자신을 올려보던 검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녀석이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을까? 광고 문구를 스크롤하고 있는 홀로비전 광고판 위에 붉은 색의 화살표가 나타났다. 마치 그 전자장비 뒤에 선 누군가가 두 사람을 인도해주는 것 같았다. 연은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앞장서서 뛰어갔다.
"저 쪽이야! 따라 와!"
골목을 돌면서, 하나의 길이 시야에 나타났다가 곧장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연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거침없이 길을 달려갔다.
골목을 지나서 넓게 트인 길로 나서자, 또 다른 전자 상가가 나타났다. 그때 상가 저편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거기 서!"
오협관의 사내들이었다. 불행히도 그들은 벌써 십 미터 안쪽까지 다가와 있었고, 등 뒤는 어느 건물의 콘크리트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소월은 머뭇거리지 않고 하수구 홈에 끼워져 있던 긴 쇠막대기를 빼들었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다면 발악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이 그의 행동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그의 말대로 수월은 그 쇠막대를 휘두를 필요가 없었다. 손님몰이용 마네킹 둘이 갑자기 사내들을 얼싸 안아버렸기 때문이다. 마네킹은 여전히 기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손님, 여기로 들어오세요. 저희 가게엔 국내 최저가의 전자 카메라를……."
사내들은 심하게 몸을 버둥거렸다.
마네킹의 관절에 달린 전동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매우 성능이 좋은 것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어린 아이를 다루는 듯이 사내들을 묶어 놓았다. 사내들의 운은 그것으로 다한 것이 틀림없었다. 운이 떨어지다 못해 역으로 악운이 스며든 것 같았다. 버둥거리던 사내들의 품에서 권총이 떨어진 것이다. 물론 소동을 보러 몰려와 있던 사람들은, 전형적인 폭력배 스타일의 남자들과 그 금속성의 물체를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었고, 곧 그 총이 장난감이 아닌 진품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곧 비명을 지르거나 경찰을 부르며 소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좋아. 첫 번째 문제는 해결 됐어."
연은 고소한 미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모로 보나 깨끗하게 해결된 것이다. 그들은 버둥대고 있는 사내들을 지나쳐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소월은 걸어가다가 가끔씩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에 가야 되지 않겠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따로 있어."
"넌 도대체 누구야?"
"류연이야. 부모님 직장 때문에 갑자기 전학을 온 거라고……잠깐, 여기서 보인다. 저 쪽 빌딩 보이지? 공원 저 편에 있는 것 말이야. 저 곳에 잠깐 들러서 할 일이 있어."
"저쪽은 아무도 안 살아. 판자촌이 바로 옆이잖아. 거기는 내가 사는 곳보다도 세 배 정도 형편이 나쁘고, 다섯 배 정도는 위험한 곳이야."
"아무도 안 사는 건 아니야. 내 친구가 거기에 살거든."
연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어쩌면 원래부터 말이 많은데 지금껏 참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가를 벗어나 부드러운 잔디밭 공원 위를 지나갔다.
공원 끝의, 천천히 경사가 올라가는 둔덕은 공원과 판자촌의 저지대를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물과 기름같이 어울리지 않는 두 구역의 경계엔 20층의 빌딩이 있었다. 그 빌딩은 경제 호황기에 지어져 몇 년 간 재미를 보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유령 건물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부의 흐름이 번화가의 상가를 거쳐 점점 부풀어 오르는데, 유독 이 빌딩을 지나가면서 끝도 없는 블랙홀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판자촌의 주민들이 그런 이유 때문에 이 빌딩을 싫어할 지도 모를 일이다.
둔덕을 올랐다. 바람을 가르는 높은 소리가 소월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옆에 있던 나뭇가지 하나가 잘려나갔다. 소월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휑하니 뚫린 시야 저편으로 번화가의 높은 빌딩과 골리앗 크레인이 보일 뿐. 근천엔 사람이 없었다. 연이 거친 목소리로 소월을 다그쳤다.
"빨리 와!"
"내가 왜 이런 소릴 들어야 되는 거야?"
소월은 작게 중얼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갔다. 또 다른 바람 소리와 함께 바닥에 있던 낙엽과 흙이 공중으로 튀었다. 소월은 그제야 저격수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소월은 허겁지겁 뛰어 완만한 둔덕 뒤쪽으로 굴러 내려갔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동차와 사내들 다음엔 저격수라니.
연이 둔덕 너머로 슬쩍 고개를 내밀어 반대쪽을 살폈다. 저격수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그는 몇 번 더 밖을 내다보다가 둔덕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예상하지 못한 거야."
이 순간, 번화가 중심의 다목적 빌딩 위에선 한 명의 저격수가 공원 쪽을 겨누고 있었다. 점퍼와 담요로 추위를 완전히 차단한 그는 망원렌즈에 눈을 가져다 대고 신중하게 숨을 내쉬었다. 개머리판을 견착한 어깨가 아까부터 따끔거렸다. 이게 다 상관이 지시한 터무니없는 명령 덕분이다. 어째서 이런 날 저격임무를 맡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그를 방해하고 있던 바람이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이제 그 꼬마들이 둔덕 건너편으로 그 조그만 대가리를 내밀면 틀림없이 명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며 미소를 지었다.
만약 아무런 이변이 없었다면 그의 자신감은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다른 눈이 있었다.
한반도 상공을 지나고 있던 감시위성 백룡 호는, 빌딩 위에 엎드려있는 한 저격수를 찾아냈다. 위성은 꼬리에 달린 안테나로 전파신호를 발신했다. 목적하는 수신지는 지상의 어느 한 인물이었다.
잠시 뒤, 빌딩 근처에 있던 노란색 골리앗 크레인이 내연기관을 점화시키며 거대한 몸체를 움직였다. 지상에 내려와 땀을 식히던 기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완벽한 자세제어를 위해 설치된 컴퓨터 시스템은 예정된 일정을 바꾸어 건너편 빌딩에 있는 저격수를 먼저 걷어내기로 했다.
크레인 끝에 달린 강철 와이어가 빠른 속도로 감겨 올라갔다. 와이어가 완전히 감기자, 크레인은 넓은 회전 반경을 그리며 빌딩을 향해 풀스윙으로 팔을 휘둘렀다. 저격수는 그때까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득 밀려오는 풍압에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그 자신은 크레인에 부딪혀 옥상 저편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그는 전신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둔덕 너머로 크레인의 풀스윙을 본 소월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이 상황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연이 소월에게 말했다.
"어쨌든 두 번째 문제도 해결됐어."
그는 소월의 어깨를 치며 둔덕 아래로 내려갔다. 작은 길 하나를 건너자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20층 건물이 나타났다. 외벽의 유리창은 먹다 남아버린 옥수수 알처럼 쳐 개가 드문드문 박혀있을 뿐이었고, 나머지는 나무판자들로 기워져 있었다.
멀리 보이는 판자촌의 풍경은 저녁 끝 무렵의 붉은 빛 때문에 평소보다 더욱 황량하게 느껴졌다.
연이 소월에게 손을 내밀었다.
"ID카드 좀 줘봐."
맡겨둔 물건을 다시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소월은 망설이는 듯 하다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주었다. 연은 카드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짓밟았다. 소월이 앗하고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이렇게라도 해놓지 않으면 그 놈이 길을 못 찾고 헤맬까봐 그래. 그럼 들어갈까? 우린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GOOd GUy&FrlEnd-
"여긴 이제 주인이 없어. 빌딩 주인이 8년 전에 자살하고 나서 세입자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한동안 부랑자들이 이곳을 사용했어. 창문 대신 붙어있는 나무판자는 그때 붙인 거야. 어떤 자본가가 여기에 다른 시설을 설치하려고 그 사람들을 쫓아낸 다음 공사를 했는데, 그도 여의치 않아서 이렇게 방치됐어. 저 천장에 구멍 보이지? 빨간색 철제 아이빔도 말이야. 공사할 때 뚫어 버린 거야. 어떤 구멍은 4층까지 이어져 있어. 다행인 건 적어도 바람이 세지 않는다는 것 정도."
"부랑자들은 다시 모여 들지 않았어?"
"응. 왜냐하면 내 친구가 살기 시작했거든."
연의 목소리는 황량한 콘크리트 배경 속에서 풍부한 울림으로 진동했다. 모든 물체가 뿌연 무채색에 깊이 잠겨 있었다. 소월은 이렇게 어두운 점이 자기 아파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곰팡내 나는 자신의 아파트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졌다.
그들은 좀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고 어둠의 농도는 점점 짙어졌다. 연이 능숙한 손길로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동그란 백열전구에 불이 들어오자, 황폐한 건물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라디오. 라디오.
수많은 라디오들이 한 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깨어진 대리석 데스크 위에 부상병처럼 쓰러져 있는 붉은색 사각형 라디오. 벽에 걸린 팬더 모양의 라디오. 필요 없는 장난감을 쌓아놓은 듯한 수많은 워크맨들. 동그란 안테나. 깨진 벽에 드러난 철골가시가 보기 싫다는 듯 알록달록하게 매달아 놓은 가지각색의 스피커들. 천장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크기의 대형 앰프. 깜빡이고 있는 다이오드. 반쯤 열린 방안에 수북이 쌓여있는 전자부품. 해골처럼 허연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마네킹들이 자랑하듯 걸러 맨 대형 라디오. 스피커를 입 대신 달고서 대기하고 있는 조그만 로봇들.
이건 정신 이상자의 콜랙션이었다.
소월이 질린 눈으로 연의 동의를 구했다.
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지만, 친구 집이야."
"네 친구가 누군데?"
"너도 알잖아."
연이 벽에 달린 또 다른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건물을 감싸던 차이 모두 검은색의 불투명한 유리로 바뀌어 버렸다. 전기로 투명도를 조정하게 되어 있는 특수유리일 것이다. 이런 작용이 건물 전체에서 동시에 일어났으므로, 소월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이 화제를 바꿨다.
"오협관이 굉장히 큰 조직이라고 생각하겠지? 텔레비전에 나왔으니까."
"아니야?"
"물론. 오협관은 전체에 비하면 손톱만큼도 안 되는 조그만 조직이야. 차를 타고 왔던 사내들이 막내야. 우리를 저격하려 했던 사람이 넘버 3인 해결사고. 어제 죽은 이현묵이 중간보스였어. 그 사람이 죽는 건 봤지? 어제 아파트 창문 너머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남은 건 보스 밖에 없지. 그런데 보스인 강만혁은 이현묵이 죽였거든. 좀 이상하지만 그게 다야. 이제 오협관은 없어. 생각보다 일이 쉽게 됐지 뭐야. 정말 고마워. 넌 내 생각보단 괜찮은 놈인 것 같아. 보통 놈들은 대게 그런 상황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기 마련인데 말이야. 그럴 때면 내가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몰라. 정말 그런 새끼들은 최악이라고."
연의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흥분한 색을 띠어가고 있었다. 소월은 잠시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런 녀석들은 나도 좀 거칠게 대하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너에겐 그러고 싶지 않은 걸."
"그런데 네 친구는 언제 오는 거지?"
"곧 올 거야."
연은 옆에 있던 라디오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 라디오엔 먼지 한 점 앉아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계속 매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소월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이 짐작한 것을 말했다.
"난 네가 어제 이현묵을 쐈다고 생각했었어. 살인자는 내 방에 있는 라디오에 장난을 칠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넌 그런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가진 재능이 아니야. 그런데 했었다는 건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야?"
연은 심드렁하게 말하면서, 그에 잘 어울리는 굼뜬 동작으로 허리 뒤춤에서 총을 꺼내 탄알의 개수를 확인했다. 소월은 그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래,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아. 넌 아까 그 사내들을 일부러 빗맞췄어. 그렇게 가까운 거리였는데."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달라. 왜냐하면 그놈들에게 쏜 건 공포탄이었거든. 조준을 할 필요도 없지."
"네가 그 사람을 쐈다면, 오협관이 날 쫓아오는 이유가 뭐야? 정상적이라면 널 쫓아야 되는 거잖아? 게다가 내가 살인범을 봤다는 사실은, 총을 쏜 당사자만 알고 있을 텐데. 네가 쐈다면 그 놈들이 날 알 리가 없지. 총을 쏜 건 복수를 하려고 다짐한 오협관 일원이었어. 그래서 목격자인 날 죽이려고 하는 거란 말이야."
"그게 문젠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오협관 놈들이 아까부터 쫓아오던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알다시피 그런 조직은 아무리 작더라도 여기저기 끄나풀들이 많아. 알고 싶은 건 얼마든지 알 수 있어. 가령 중간보스가 총에 맞아 죽었는데, 그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살인범은 누구인가 하는 것. 난 기회를 보다가 네가 이현묵을 죽인 살인범인 것처럼 꾸밀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나로선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어제 죽은 놈은 최악의 인물이었어. 그런 사람은 죽는 게 당연하지, 안 그래?"
연은 흥분해서 권총을 위아래로 흔들어 댔다.
"그런 놈을 죽이는 건 정말 잘 하는 짓이야. 하지만 누군가가 그런 행동을 처벌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방어를 해야지! 희생은 어느 시대에나 정의를 위해선 꼭 필요한 것이었어!"
연이 씩씩 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넌 내가 여기서 널 붙잡아 두고 뭘 하려고 하는 건지 궁금하겠지."
그때였다. 가려진 벽 너머 입구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연의 친구일까? 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왔다."
그가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어렵사리 공간을 밝히던 등불이 사라지고 나자, 사위는 완벽한 어둠 속으로 침잠해 버리고 말았다. 한치 앞도 밝히지 못하는 울긋불긋한 발광 다이오드가 공간 저편에서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문이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잘 열리지 않아서 억지로 밀고 있는 듯 했지만, 소리가 계속 되는 것으로 보아 여의치 않은 것 같았다.
그때 벽 저편에서 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그러나 연의 손이 여전히 소월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으므로, 소월은 그 소리가 속임수임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층 안에 놓여있는 수많은 라디오들. 소리는 그 라디오 중 하나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 위치 불명의 라디오가 계속해서 말했다.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어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일이 꼭 필요하다는 걸 알아두었으면 좋겠어."
탕탕탕! 목소리가 끝나려는 시점에 총성이 울렸다.
벽 건너편에서 섬광이 튀었다. 이윽고 어둠이 다시 내려앉자 성급하게 뛰어가는 소리가 건물 내부에 울렸다. 이어서 금속 조각이 튀는 소리, 중얼거리는 욕설, 나사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때였다. 수많은 라디오들이 하나 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뉴스를 전하고 있었고, 다른 것은 음악을 내보냈다. 날카로운 기타음이 분위기를 주도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청량한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소월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언어가 섞여 있었다. 건물 전체가 라디오의 아우성으로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듯 했다.
저쪽에서 한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욕설을 내질렀다. 목소리는 벽과 바닥에 반사되어 층 전체를 울렸다. 소월은 몸을 움츠렸다. 저 남자는 연이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아닐 것이다. 아님 연의 은유적 표현이었는지도 모르지. 자기 맘에 안 드는 사람은 무조건 '친구'라고 하는 건지도.
그때 연이 움직였다. 그의 발자국 소리는 곧장 앞으로 향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총성이 울렸다. 소월은 귀를 막았다. 몸을 웅크리고 총알이 자기에게 맞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래서 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몇 발의 총성. 정신없는 발자국 소리와 거친 숨소리, 끊임없이 계속되는 라디오들의 아우성. 모두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사태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소월은 벽을 등지고 천천히 움직이며 생각했다. 연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남자는 누굴까.
허공에 밝은 빛이 지나갔다. 소월의 눈은 재빨리 빛의 근원을 쫓았다. 그것은 공중제비를 돌고 있는 손전등이었다. 손전등은 탁 하는 충돌음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고, 빙글빙글 회전하는 노란색 빛이 소월이 있던 공간을 비추었다.
소월은 본능적으로 이 장소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직감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거친 사내의 목소리가 그를 제지했다.
"저 놈 쏴버리겠어!"
소월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둠 저 편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하나의 총구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오늘 일은 나중에 소설로 써도 되겠다 하고 소 소월은 생각했다. 운이 다하지 않는다면.
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같은 방향에서 들려왔다.
"그렇게 하면 네 뒤통수에도 구멍이 뚫릴 걸!"
"그 총엔 공포탄뿐이야. 부하들이 보고하던데!"
"그럼 쏴 봐. 내가 중간에 실탄을 끼워 넣었을 수도 있지. 사실은 그게 겁나서 방아쇠를 못 당기는 거지?"
"내가 널 먼저 쏴 벌릴 지도 몰라!"
둘은 <저수지의 개> 풍의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찌됐든 이건 서로의 생명을 걸고 하는 매우 위태로운 줄다리기다. 소월은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사내가 초초한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연이 그를 비웃었다.
"왜 그렇게 안달이야? 겁나나 보지?"
"초조해 하는 건 네놈이야."
"그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의미하는 것은 반전된 상황이었다. 연이 공포탄만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혹은 도박에 걸어보는 것일 수도.
그렇다면 기회는 지금 뿐이었다. 소월은 그 잠깐의 틈을 타 재빨리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총성이 울려 퍼졌다.
정확히 세 발이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도대체 누가 이긴 것일까? 소월은 차라리 둘 다 같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내 아파트에 돌아가는 거야. 그리고 밤새도록 라디오로 음악을 들어야지. 여기 있는 자폐아 수집품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라디오 말이야. 그 기분은 얼마나 안락하고 평화로울까?
순간 소월은 노란색 빛과 함께 자신의 그림자가 앞으로 길게 늘어지는 것을 보았다. 천천히 걷고 있는 그림자가 매우 기괴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제 죽은 그 남자의 몸짓처럼.
소월은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온통 피칠갑을 하고 있는 낯선 사내였다. 키는 작았고 손에 든 총이 소월을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리고 신중한 눈으로 자신을 겨누는 사내를 보며, 소월은 어제 봤던 그 살인자를 떠올렸다. 그의 두뇌는 빠른 속도로 두 개의 이미지를 겹쳤다.
그 살인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끝났단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그러자 공이가 빈 약협을 때리며 찰칵하고 맥없는 소리를 냈다. 탄알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그는 조금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권총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이 아까부터 그의 탄알 수를 계산하며 행동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기묘한 정적이 감도는 짧은 순간. 갑자기 오른편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옥외용 서치라이트의 동그란 발광면이 마치 태양처럼 그들을 비췄던 것이다. 소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빛을 가렸다. 손가락 틈으로 본 서치라이트의 한 가운데에는 어떤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러나 그 실루엣은 어린아이가 아닌 여자의 실루엣이었다.
갑자기 모든 라디오가 아우성을 멈추고 오직 한 가지 소리만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시끄러운 음파의 스크래치.
소월은 자신이 <라디오 보이>의 포효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rAdIO bOy3-
소월은 사내 쪽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곁눈으로 여자를 경계하며 새로운 탄창을 권총에 끼우고 있었다. 저 탄창이 다 끼워지는 순간엔 소월의 운도 바닥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소월은 재빨리 벽 너머 암흑 속으로 도망쳤다. 톱니바퀴에 접한 다른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것처럼, 사내는 소월을 쫓아가려 했다. 그러나 작은 물체가 사내의 진로를 자르고 지나가며 그의 발걸음을 저지했다. 그 물체는 벽에 기대있던 합판에 꽂히며 꼬리 끝을 부르르 떨었다. 동물들을 생포하기 위해 사용하는 마취총이었다.
사내는 눈을 찡그리며 서치라이트 쪽을 바라보았다. 작은 여자의 실루엣이 위협하듯이 그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총을 들어 여자를 겨냥했다. 그러나 동시에 서치라이트가 꺼지며 주위는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라디오의 잡음마저도 칼로 자른 것처럼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내는 손전등으로 재빨리 주위를 밝혀보았다. 살아있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작은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아주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어둠 속을 배회했다. 그것은 어느 한 층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2층에서, 아니 3층에서, 아니면 지하에서 나는 것도 같았다.
사내는 손전등을 사납게 휘두르며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2층을 향해 뚫려있는 넓은 구멍에서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탕!
사내는 재빨리 총을 쐈다. 그러나 그 물체는 플라스틱 파편을 튀기며 자신이 생명체가 아니라고 웅변했다. 사내의 뺨에 묻어 있던 피가 땀에 씻겨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걸어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소월은 난감했다. 총을 든 미친 사내가 자신이 숨은 곳으로 점점 다가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움직여서 피해야 할까? 그림자 속에 숨은 채로 그가 지나가기를 빌어야 할까?
다시 한 발의 총성이 벽 저편에서 울려 퍼졌다. 작은 파편이 땅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누군가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아직 판넬을 얹지 않은 곳의 철골구조물을 지나가고 있는 듯, 탕탕거리는 금속성의 발자국 소리였다. 서치라이트에 비추었던 그 여자일까?
다시 총성이 들렸다. 사내는 극도로 긴장해버린 것 같았다. 건물 전체를 배회하고 있는 발자국 소리. 희미한 손전등 불빛 뒤에서 움직이고 있는 작은 물체들.
사내는 벽을 등지고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는 귀신을 믿지 않았다. 현실이란 언제나 냉정한 것이지, 몽환적이거나 기괴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무언가에 홀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그는 재빨리 뒤돌아 허연 윤곽을 드러내 다가오는 여자에게 총을 쏘았다. 그러나 총알에 부서진 것은 새빨갛게 터져 나오는 살덩이 아니라 노란색 불꽃을 내며 날카롭게 부서지는 금속 조각이었다. 로봇이었다.
마치 그를 약 올리는 것처럼 발소리가 그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사내는 천천히 숨을 조절하면서 발을 옮겼다. 그는 소월을 찾아서 없애려던 자신의 원래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그 조그만 녀석을 없애면 나의 승리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넌 죽어야 돼."
사내는 순간 몸을 작게 떨었다. 그 목소리는 그가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바로 어제 밤, 그가 자기 손으로 쏜 자의 목소리다.
목소리는 저 멀리에서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넌 죽어야 돼, 넌 죽어야 돼, 넌 죽어야 돼!"
날카로운 비명과 동시에 그의 눈앞에 허연 실루엣이 튀어나왔다. 안면에 달린 날카로운 이가 그를 향해 허연빛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총을 난사했다. 그는 부서진 로봇을 발로 차버리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사내는 거친 숨을 가라앉히며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고 나자 벽 반대편에서 소월의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잡았다! 사내는 소월이 있는 코너로 뛰어들었다. 그가 본 것은 벽에 붙어있는 소형 라디오였다. 그 라디오는 사내가 내미는 총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찢어지는 비명을 스피커로 토해냈다.
그리고 쿵 하는 격돌음과 함께 그들이 있던 바닥이 거울의 한 면처럼 조각조각으로 깨어졌다. 사내는 지하로 떨어지고 말았다.
온 몸에 생채기가 나고 뒤늦게 떨어진 낙석에 머리를 부딪쳤지만, 그는 오로지 떨어뜨린 권총을 찾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바닥을 더듬었다. 그가 들고 있던 손전등은 이미 부서져서 콘크리트 더미 속에 끼어 있었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파란색 불빛이 생겨나 그를 눈부시게 만들었다. 천장의 등으로부터 생겨난 빛은 원뿔 모양으로 바닥을 비추었고, 그 바닥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미끼일까? 내가 저곳으로 다가가면 또 다른 뭔가로 날 약 올리려는 건가? 순간, 파란색의 빛 안으로 여자가 들어왔다. 검은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기른 창백한 여자였다. 스무 살쯤 되어 보였고,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권총을 집어 들었다. 사내는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다.
문득 음악이 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구덩이 밖에서부터, 라디오들이 스피커가 터져라 음악을 울려대고 있었다. 워낙 유명한 곡이라 이 와중에도 음악의 제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였다.
앞에서, 여자가 조롱하듯 그 곡조를 휘파람으로 따라 불렀다.
사내는 빛을 향해 달려갔다. 여자는 방아쇠를 당겼다.

소월은 자신의 눈앞에서 바닥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먼지가 섞인 보이지 않는 기류가 앞에서부터 그를 덮쳐버렸다. 그는 잠시 기침을 했다. 이제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거친 손 하나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희미한 빛이 비쳤기 때문에 소월은 피에 젖어있는 그 손을 볼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는 연의 얼굴이 보였다.
"제대로 안 됐어. 제대로 했다면 정말로 깔끔했을 텐데."
"다쳤어?"
"아니, 스쳤어. 어깨에."
지하에서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연이 일어서서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몇 개의 유리창이 투명하게 바뀌며 하얀 달빛을 통과시켰다. 건물 안에 있던 사물들이 차갑게 빛났다.
"소독을 하면 내일 학교에 갈 수 있을 거야."
연이 말했다. 소월은 연이 학교를 언급해서 놀랐다.
"결석이라고?"
"그래, 말했잖아. 부모님 직장 때문에 갑자기 전학을 왔다고.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어?"
소월은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고민되었다. 문득 복도 저편에서 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은색의 달빛이 그녀의 창백한 피부 위에서 부드럽게 부서지고 있었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흩어지고 있는 그 빛은 매우 아름답고 유혹적이었다.
연이 잠깐 사이를 두고는, 조금 쑥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저 애가 내가 말한 친구야."


-rAdIO bOy4-
달빛 아래를 걸으면서 연은 내내 신음을 흘렸다. 소월은 연을 부축하면서 연이 지시하는 대로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 애 말이야. 저기에 혼자 놔둬도 될까?"
"걘 뭐든지 잘 해. 마취침을 몇 개 가지고 있는데 그걸로 그 사람을 잠재워서 경찰에 넘길 거야."
소월은 그녀의 얼굴을 생각해보았다. 달빛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마 그녀는 매우 창백하게 보였다. 목소리는……듣지 못했다. 그녀는 손수 소독약과 붕대를 가지고 연을 치료했지만, 모든 과정이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빌딩을 빠져나오면서 연에게 그 사실이 이상했다고 말을 했다. 연은 짧게 대답해주었다.
"걘 말을 못해."
그 후 한참 동안은 소월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연이 말했다.
"걔가 누군지 알겠어?"
소월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그 이름을 입에 대답했다.
"라디오 보이……. 보이(Boy)가 아니라니, 완전히 속았어."
소월은 처음엔 연이 라디오 보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연의 친구가 나타나 총을 든 남자를 상대하는 것을 보며 라디오 보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그녀라는 것을 깨달았다.
"맞아. 나는 서희의 조력자일 뿐이야."
강변을 따라 나있는 길을 걷다 문득 소월이 물었다.
"총을 쏘던 아저씨는 누구야?"
"그 남잔 강만혁이야. 죽었다는 오협관 보스."
"그 사람은 죽었다며?"
"서류상으로만 사망하는 경우도 있거든.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서희가……그러니까 아까 친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조사했어. 난 그냥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고. 걘 오협관이 목격자인 널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저승에 있던 강만혁을 이승으로 끌어내고 싶어 했지."
연은 강만혁은 스스로 죽은 것처럼 꾸미고 다른 일을 진행시키려 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던 것이 경찰이 이현묵을 용의자로 지목하면서 문제가 생겼을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현묵을 죽일 이유가 없을 거라 했다.
"뭐 서희가 다 알아서 할 거야. 여기서 더 뛰어다니라면 당장 입원할 거야."
소월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어떻게 그 누나랑 넌 내 아파트 앞에 일어난 일을 알고 있는 거야? 내가 그 사람을 봤다는 건 어떻게 알았고."
그러자 연이 정말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뭐? 몰랐어?"
"그래."
"서희는 어제 거기에 있었어. 못 봤니? 전파상 앞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척 하고 있었는데."
소월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정말로 봤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게다가 걘 아까 지하철 승강장에서 내 뒤에 서 있었어. 버스 정류장 앞에서 바로 우리 앞을 지나가면서 웃음까지 지었는데 말이야. 걘 언제나 우리 주변에 있어. 그러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적절하게 자기 재능을 발휘했지."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스치듯이 지나가는 사람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할 수 있겠는가?
소월은 아파트 근처에서 연과 헤어졌다. 마치 한 달 만에 들어오는 것처럼 자심의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 위에 쓰러지듯이 엎어져서 한동안 편안한 감촉을 음미했다.
졸음이 쏟아졌다.
정말 피곤한 하루야. 이런 일이 두 번 생긴다면, 그건 정말 못할 일이겠는걸.
그는 팔을 뻗어 책상 위에 있던 라디오를 틀었다.
<피버 기타 보이즈>는 시간대에 걸맞게 조용한 발라드를 내보내고 있었다.
좋아. 소월은 자신이 원하던 안락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고마워]
깊은 잠으로 의식이 침잠해가던 사이, 소월은 라디오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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