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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그리고 좀비



남자: 잭슨 폴락, 멋지지 않나요?

 

여자: 그러네요.

 

남자: 이 작품이 당신에게 뭐라 하나요?

 

여자: 이게 말하길, 우주의 부정성. 흉측하고 외로운 공허함의 존재성. 허무감, 척박함 속에 살 수 밖에 없는 곤경에 빠진 인간들. 신을 믿지 않는 영원함, 그 어마어마한 텅 빈 공 간의 아주 티끌 같은 불꽃, 그 깜빡거림의 허무함. 하지만 쓸 때 없는 공포감, 모멸감, 쓸데없는 형식. 절망적인 검은 색의 구속복, 우스꽝스러운 우주의 질서.

 

남자: 토요일 밤에 뭐해요?

 

여자: 자살할거에요.

 

남자: 그러면 금요일 밤에는요?

 

여자는 미술관 밖으로 나간다.

 

여느 연인처럼 그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났다. 남자는 생각했다. 요즘 우리 관계가 소원하긴 했지만, 크리스마스를 기회로 삼아 만회 할 수 있겠군. 여자는 생각했다. 요즘 우리 관계가 소원해진 건 순전히 망할 크리스마스 때문이야. 모든 연인이 행복한 척하니까. 우리 커플이 행복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잖아. 남자는 어느 모텔이 좋을지 생각하고, 여자는 어느 모텔이 이별에 좋을지 생각했다. 둘은 동시에 와인 잔을 입에 댔다. 여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 날 적당히 헤어질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당신이 날 만족시키지 못한다고 말할까? 사실 어떤 남자도 날 만족시킨 적이 없으니 당신 잘못은 아니라고 하면 괜찮겠지. 아니야, 남자는 인정하지 않을 거야. 자신의 섹슈얼한 부분에 항상 자신 있어 했으니까. 옆자리에 놓인 곰 인형을 핑계로 댈까? 곰 인형. 그래, 나쁘지 않아. 침대 옆에 곰 인형. 소름끼친다. 곰 인형도 로맨틱한 분위기의 재즈를 듣고 와인 잔을 기울이겠지. 그리고 침대 위 우리 둘의 행위를 낱낱이 볼 것이다. 맨들 맨들한 검은 눈동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눈망울. 내 발가벗은 모습을 비추고 싶지 않다.

 

남자는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한다. 웨이터의 미소가 소름끼친다. 설마 아이스크림은 아니겠지. 남자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반지를 찾아 손가락에 끼운다. 소름끼치는 대머리 웨이터에 의해 인위적으로 조작된 로맨틱한 무드. 빨리 끝장내야겠다. 사실 여자도 몇 년 전 엔 감성적이었다. 몇 년간의 연애. 몇 년 간의 곰 인형과 장미. 그리고 모텔. 그래, 모든 건 싸구려 모텔 때문이야.

 

밖으로 나오자 두 무리의 군중이 보였다. 광장 쪽엔 짝을 짓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프로그램기획자가 동물의 왕국을 모토로 삼아 만들었다는 이벤트. 허공에 떠다니는 여성 호르몬을 맡곤 어슬렁거리는 수컷들의 싸움. 남자는 이 무리에 관심을 보였다. 추운 날씨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여자를 찾는 솔로 무리를 보며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루저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여자를 내려 보았다. 여자는 반대편 군중에 관심이 있었다. 빨간색 스웨터를 입은 그들은 아이들에게 선물 상자를 나눠주었다. 번쩍거리는 빨간 LED코를 붙이고 캐럴을 웅얼거렸다. 여자는 잘 들리지 않아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찢겨진 채 말라붙은 핏자국. 허벅지에 검게 그을린 총탄자국. 남김없이 이가 뽑힌 선홍색 잇몸. 그들은 여전히 캐럴을 웅얼거리며 크리스마스 선물이 담긴 썰매를끌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가 끝나기 전에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줘야 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진 건 여자가 태어나기 전이였다. 여자의 부모세대가 살았던 시대 쯤 일 것이다. Z-전쟁이 끝나고 남겨진 좀비들을 처치할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도시가 재건될 때까지는 지하 벙커에 잠시 묻혔야만 했다. 그들은 여전히 위험했고 맹수와 다름없었다. 인류에겐 좀비들을 챙길만한 선택지가 없었다.

 

도시가 재건될 때쯤 벙커가 열렸다. 좀비들의 눈빛이 이전과 달랐다. 찾지않는 호수처럼 깊고 맑게 외로움이 배어있었다. 그들은 배고픔에 서로를 먹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살육. 그들은 살육을 통해 처음에는 즐거움을 그다음엔 외로움을 느꼈다. 최후에는 서로에게 몸뚱이를 넘겨주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남았고 결국 변했다. 정부에선 충분한 식량을 제공했고, 이들은 살육을 멈추었다. 이들은 무자비한 살육을 통해서 최소한의 이성을 습득했다. 좀비들이 휴식을 취할 동안, 수많은 대책이 오고갔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좀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두뇌는 오래전 기능을 멈췄고, 근육은 미세운동을 조절하지 못했다. 뜻밖에도, 모든 건 낭만적인 한 과학자에 의해 해결됐다.

 

지금 남자와 여자 앞에서 좀비는 캐럴을 부른다. 썰매를 끌며 선물상자를 나눠준다. 산타들은 웃음을 짓고, 아이들도 미소로 답한다. 여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남자에게 말한다.

                                                       

                                             “우리 헤어지자, 나 산타클로스가 돼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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