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나는 죽은 에밀리아의 재능을 보았다. 우아한 받침대 위, 투명한 유리관 속에 보관된 재능은 정말이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파손되거나 도난되는 일을 막기 위해 받침대를 중심으로 장미덤불을 본딴 튼튼한 철망이 둘러쳐져 있어 그녀의 재능으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는 더 떨어져야 했는데 말이다.

 

"저토록 아름다운 재능을 가졌건만…. 신도 무정하시지."

 

사방을 메운 인파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런 식의 말을 속삭이며 눈물을 떨구고 코를 훌쩍거렸다. 추모의 의미로 철망 사이마다 꽂힌 장미의 은은한 향은 바닥에 쌓일 사이도 없이 누군가의 울음에 흔들려 먼지처럼 날아올랐다. 나는 숨이 막혔다. 그 무수한 한숨과 울음, 장미향 때문이 아니라, 그토록 아름다운 재능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분야를 막론하고 어떤 재능을 가진 이들이 죽었을 때 그들의 심장에서 보석이 나온다는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보석을 품은 장본인들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지에 따라 색도 형태도 가지각색으로 달라지는 그 보석들에게는 보통 누군가의 재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심장 박동 대신 세밀한 다면체에서 빛을 흩뿌리고, 붉은 피 대신 감동을 흘려보내는 에밀리아의 재능에 한참 못 미치는 재능도 엄연히 존재했다. 어떤 것은 표면이 반들반들하게 손질된 자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보석으로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곤궁함이 있다.그래서인지 가난한 집일수록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여섯 남매가 정신없이 뒤섞여 사는 우리 집은 비슷한 처지의 이웃들과 비교하면 특별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무슨 변덕이 일었는지 알 수 없는 행운의 요정이 우리집 문간을 밀치고 들어왔다. 누이의 이름이 적힌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입학허가증. 재능을 보장하는 그 한 장의 서류를 탁자에 올려둔 채 부모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 아카데미의 엄격한 심사와 그걸 통과한 누나의 재능에 대해서.

 

누나는 자기에게 못해도 주먹만한 보석은 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쪼그린 무릎 사이로 들린 말은 물기 반 웃음 반이었다.


며칠 뒤 누나는 버섯 스프를 먹고 죽었다. 심장에서 나온 보석은 옆집 갓난애의 손바닥과 비슷한 크기였다. 뭐 어쨌든 보석이 나오기만 했다면야 다른건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는 누나의 보석을 작은 주머니에 넣어 손목에 단단히 묶은 뒤 피 묻은 손을 오랫동안 씻었다. 장의사를 불러오는 것은 내 역할이었다.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뤄졌다. 보석을 정확히 감정할 감정사는 일주일 내로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동안 어머니는 온갖 치열한 집안일을 처리하면서도 손목에 묶은 주머니를 결코 떼어놓지 않았다. 감정사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오른손이 이상한 색으로 부어올랐을 정도였다.

 

그러나 누나의 재능은 에밀리아의 재능처럼 사람들 앞에 장식되기에는 좀 모자랐다. 아니, 실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었다. 감정사의 솔직하고 세세한 결과를 들은 어머니는 헛웃음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정말 겨우 그것 밖에 안되나요? 낡은 벽 한 켠에 밀가루 반죽처럼 달라붙어있던 나는 나무 틈새로 새어나온 빛 속에 잠겨있는 개미를 보았다. 검은 몸체와 그림자가 뒤엉켜 새카만 덩어리 같았다.

 

"이 정도 가치로 용케도 합격했군요. 이럴거면…"

 

이럴거면,

차라리 떨어질 것이지.


어머니의 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몇 달 뒤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젊은 총아로 칭송받던 에밀리아가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소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에밀리아의 가문이 그녀의 찬란함을 대중들에게 공개하기로 했다는 말까지 물고 들어왔다. 이럴수가, 그렇게 할 수도 있단 말인가. 나는 가벼운 쇼크에 휩싸인 채 며칠을 보내다 전시관으로 향했다.

 

에밀리아의 재능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동안 벌레에게 물어뜯기는 것 마냥 머리가 저릿거렸다. 새벽같이 일어나 차가운 물로 몸을 한바탕 씻어냈는데도 어딘가에 개미 한 마리가 악착같이 붙어있었던 걸까. 아니면 옷 사이에 숨어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몸을 이리저리 긁거나 제자리에서 통통 뛰는 내 주변에서 사람들이 조금 물러섰다.

 

 

그리고 에밀리아의 재능이 눈 앞에 나타났다.

 

내 몸에서 개미가 떨어져나갔다. 온갖 생각이 떨어져나갔다. 그 재능을 본 한 순간, 밀물처럼 몰려온 빛의 파도는 내 안에 있던 모든 것을 부수고 집어 삼켜버렸다. 압도적인 재능, 시대를 바꿀 수 있었던 천재.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언어는 그 빛의 광채에 비하면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에밀리아의 재능은, 그 어떤 수식어도 감히 그 앞에 나란히 설 수 없을 정도로 찬란했다.

 

그 압도적인 빛은 한참동안이나 내 마음을 지배하다 겨우 쓸려나갔다. 겨우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차마 고개를 계속 들고있을 수 없어 숙여버린 시야에 무슨 얼룩같은 것이 보였다. 순간 누군가의 발에 밟혀 죽은 개미인가 싶었지만, 자세히 보니 어느 장미에서 떨어진 꽃잎이 뭉개진 거였다.

돌아오는 길은 견딜 수 없이 허전했다. 빛이 밀려들며 부숴지고 압도당한 것들이 이제야 나뒹굴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정성껏 씻어냈던 누나의 보석을 떠올렸다. 어린애 손바닥 정도의, 별 가치없던 탁한 빛.

 

[그녀의 재능은 세상 어느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

 

에밀리아의 아버지가 썼다는 문구가 재료를 손질하던 어머니의 투박한 손짓에 잘려나간다.

나는 따뜻한 수프 그릇을 앞에 두고 입술을 달싹이던 누나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M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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