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코끼리 보러 간 아침

2016.07.26 19:3107.26

 "왜?"


 ‘왜’ 라고 물었다 내가. 아니면 당신이 아니. 아마도 당신이 아니. 사실은 당신이 물었던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당신이 물은게 맞았다. 당신과 사귀던 반년 간 나는 당신에게 질문한 적이 없었고 당신의 말끝엔 항상 물음표가 달려 있었으니까.

 우리가 싸운 다음날, 화해 대신에 성의 없는 섹스를 한날. 토스트기에서 올라온 두 장의 식빵에 잼을 바르며,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문제였다.

 그래서였을 게다. 당신에게 코끼리를 보러가자고 말했던 이유는... 어째서 코끼리였나. 이제와 묻는데도 할 말은 없다. 희고 곧게 뻗은 그놈의 긴 상아를, 크고 당당한 포유류의 몸체를 보고 싶어서? 아니면 언젠가의 새벽에, 당신이 잠든 사이에 티브이 볼륨을 4로 낮추고 보았던 네셔널 지오그래픽의 코끼리 특집 때문이었을까...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그냥 천천히 구워진 빵을 씹으며 당신이 아주 성가신 여자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잠깐 동안.


 그때 당신이 물었다.


 “왜?”


 나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코끼리를 보러가고 싶다고. 당신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당신의 눈을 보며, 그제야 당신이 좋아할 만한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너와 함께 코끼리를 보고 싶어서 그래.


 긴 침묵. "알겠어." 한참만에야 당신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 뒤론 말이 없었다. 내가 주차장에 내려가 시동을 걸고 차를 예열하는 동안, 액셀을 밟아서 과천의 공원에 이르는 동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영원할 것 같은 침묵. 과천까지 한 시간 남짓 되었던 시간. 그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오래잖아 우리는 서울대공원에 도착했다. 퍽 오래 걸었다. 우리는 홍학 떼를 보았다. 세 마리의 곰과 표범을, 사자를 보았다. 날개를 활짝 편 공작새를 보았고, 더위와 여름의 태양에 무료해있는 한 떼의 원숭이를 보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온갖 종류의 설치류를,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먼 곳에서 온 앵무새들을 보았다. 코뿔소와 하마를 보았다. 돌고래는 보지 못했다. 모르는 사이에 아쿠아리움을 지나치고 말았으니까.

 코끼리는 우리 코스의 마지막에 있었다. 장내의 순환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온 거리가 무색하게, '오늘은 코끼리가 쉬는 날'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동글동글한 필체로 보아서, 아마 여자사육사가 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끼리 가족이 아파요.' 라는 말도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우리는 잠깐 서있었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이 아스팔트 위에 뚝뚝 떨어졌다.

 피로했다. 공원에는 먼지가 많았고, 땀에 젖은 옷이 달라붙어 무겁게 느껴졌다. 햇볕이 뜨거웠고, 코끼리는 없었다. 

 그제야 말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만나자.' 고.


 "왜?"


 왜. 당신은 한번더 그렇게 물었다. '모르겠다'. 고 다시 대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와는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외엔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에서 당신은 시종 조용했다. 


 "...왜 코끼리를 보자고 했던거야?"


 당신이 말한 것은 차에서 내린 뒤였다. 모르겠다고. 어지러운 머리를 꽉 누르며 내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당신도 왜? 라고 묻지 않았다. 당신은 쓸쓸한 얼굴로 사라졌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안녕. 잘 살렴.



 작년에, 당신의 소식을 들었다. 간만이었다. 영이가 당신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당신과 헤어진 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한 영이와의 통화였다. 뜻밖의 소식에, 어디로 가면 되느냐 물었더니, 어제 발인을 마친 뒤라고 했다. 편히 갔노라고도 말해주었다. 술을 마시면 언니는 가끔 당신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영이는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언니가 오빠를 많이 좋아했던 것 알아요?"


 몰랐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제 그녀는 내게 거의 잊혀진 사람이라고, 그녀가 나를 그렇게 까진 생각하고 있던 줄은 몰랐다고 돌려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도 말했다.


 "알아요. 오빠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치만."

 

 수화기 저편에서 울먹이던 그녀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느껴졌다. 거칠어진 그녀의 숨소리를 떨리는 공기를 알았다.

 영이가 물었다.


 "왜"


 왜 였느냐고. 왜 당신과 헤어지자고 말한 것이냐고. 그때 왜 언니를 울게 한 것이냐고. 왜 그 뒤로 한번도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왜, 왜? 왜 그랬어요? 예상치 못한 영이의 물음에, 나는 이번에도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영이의 물음은 삼년간 묵혀온 당신의 질문이기도 했다. 긴 침묵이 이어졌고, 한참 만에 전화가 끊겼다. 나는 술을 조금 마셨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깐 깨곤 했지만, 완전히 잠을 설치지는 않았다. 꿈에 당신이 나오지도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제였다.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코끼리에 대한 영상을 보았다. 우연이었다. 코끼리는 수명이 길지만, 그 긴 수명동안 관절염을 앓습니다. 코끼리의 발굽에 있는 이 해면체 같은 덩어리가, 나이를 먹을 수 록 줄어들고, 약해지죠. 마침내 늙은 코끼리는 걸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말이에요. 나는 쓰러진 코끼리를 뒤로하고 티브이를 껐다. 간만에 서랍을 뒤졌다. 당신과 사귀던 동안의 앨범을 찾아내고 천천히 관찰했다. 백일 때 그녀가 해준 선물이었다.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서 우리는 더러는 웃고 있었고, 더러는 무표정했다.

 전체적으로 우리는 헤어질 수 있는 연인처럼 보였다. 


 진실로, 그립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진실로, 아프지 않았던 사랑이었다.

 진실로,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연인이었다. 


 그랬어도 말했어야 했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코끼리를 보러가자고 해서는 안 되었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해서도 안 되었다. 당신이 묻는 왜 라는 질문에 더 이상 대답할 이유를 생각해 내지 못하겠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아니면 당신의 질문에 섞인 행간의 의미를 읽지 못하겠다고. 어쩌면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게 아닐까 생각된다고.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아니면 화를 내야했다. 싸우고 소리 지르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찝찔한 이별보다 그것이 나은 이유를 새삼스럽게 말하기는 어렵다. 

 

 모른다는 말만은 안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256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살려주고 잊어버리다 니그라토 2016.09.23 0
2255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시옥황 아트만과 악귀 니그라토 2016.09.23 0
2254 단편 총통령의 야망 MadHatter 2016.09.18 0
2253 단편 겁의 과실 송망희 2016.09.11 0
2252 단편 탑승객4 인스머스의눈 2016.09.07 0
2251 단편 1.   “그... 인스머스의눈 2016.09.07 0
2250 단편 스마트폰은 이제 우리 몸의 일부나 다름없습니다 creya 2016.08.31 0
2249 단편 [파편] 뿔피리 송망희 2016.08.12 0
2248 단편 [파편] 타임머신 송망희 2016.08.12 0
2247 단편 당신의 재능은 그만큼 빛나지 않아 Mik 2016.08.02 0
2246 단편 (엽편) 첫 술 13월 2016.07.28 0
단편 코끼리 보러 간 아침 13월 2016.07.26 0
2244 단편 [A to Z] Computer EL_Tau 2016.07.17 0
2243 단편 증위팔처사 13월 2016.07.16 0
2242 단편 속 사소설 고양이 이야기1 너구리맛우동 2016.07.09 0
2241 단편 청소1 오청 2016.07.03 0
2240 단편 당신의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미스공 2016.06.30 0
2239 단편 웃는자들의 도시 미스공 2016.06.30 0
2238 단편 합법 살인 : origin of doomsday 미스공 2016.06.30 0
2237 단편 추동에 사시는 김일여어머니 포공영박하 2016.06.27 0
Prev 1 ...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 147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