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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웃는자들의 도시

2016.06.30 15:0806.30

웃는자들의 도시
 by. 미.스.공

1.

“죽여! 죽여버려!!!”
“당장 매달아 태워버리라구!!”


분노한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내 귓전을 파고든다. 매캐한 그을음의 거북한 내음도 날카로운 가시처럼 코를 찔러왔다. 마치 이단종교의 광신도들 마냥 고성을 질러대는 수 많은 사람들... 도저히 이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듯 한 그들 무리 너머로 거대한 불기둥이 타오른다. 나는 그 불길 속에서 낯익은 것들을 발견하고 그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겨우겨우 지탱해오던 두 다리마저 힘을 잃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어서 움직이라는 듯 날카로운 물체로 나를 겁박하는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 순간 더 없이 고요하다.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문득 나는 예전에 본 공포 영화 한편을 떠올린다. 당시에 유행하던 좀비 영화중 한 편이었다. 죽이고, 또 죽이고, 그렇게 도망치는 것이 다인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영화의 도입부에 보여 졌던 그 설정만큼은 유독 기억에 남았다.

[지옥이 가득 차, 신은 죽은 이들을 다시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오래 전 신문지상과 TV 뉴스를 가득 채운 뉴스들을 떠올리며, 그것과 지금의 이 참혹한 현실이 다를 것이 무어냐는 푸념을 뱉어본다.




2.

[최근 전 세계적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어가고 있는 참혹한 묻지마 살인! 그 원인에 대한 미국부부와 미연방 질병관리국 측의 충격적인 공동 보고서가 공개되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최근 6개월 사이 美 전역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은 무려 28,502건, 이는 美 전역에서 지난 십년간 발생한 모든 살인범죄 건수를 합친 것보다 780% 가량 증가 된 양이었으며, 견고한 울타리 안에 있다고 여겼던 우리 사회 체계의 존립마저 송두리 채 뒤흔들어 버린 끔찍한 비극이었습니다.]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러한 살인사건이 종래의 살인사건이 보여주었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난 불특정 다수를 향한 충동적 범죄 소위 묻지마 살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원한, 금전관계가 완전히 배제된 완전한 충동적 살인, 또한 그 대상이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불특정 다수를 향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실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희는 멈춤 없이 나날이 증가해 나가고 있는 이러한 비정상적인 살인 행위를 막기 위해 미 연방의 모든 기관과 연계하여 관련 조사에 임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이 미연방 질병관리국에서 제출한 살인 피의자들에 대한 신체검사 소견서였습니다. 화면에서 보시다시피 이것은 살인 피의자의 대뇌 CT사진입니다. 보시다시피 다른 부분에 비해 전두엽이 눈에 띌 정도로 변형된 것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FBI와의 공조아래 미 연방 질병관리국은 곧바로 수많은 피의자를 대상으로 한 정밀 검사에 들어갔고, 그 결과 이 모든 절망적 사건의 원인이 바로 인간의 대뇌피질과 전두엽을 중심으로 증식되는 특정 바이러스에 의한 것임을 밝혀냈습니다.]

[다행인 사실은 이 바이러스는 호흡기로는 전혀 감염이 되지 않으나, 독특하게도 인간의 피부표피층에 머물다 접촉을 통해 다른 감염체로 전이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최초 감염 후 바이러스는 1차 증식을 통해 인간의 피부조직 외부를 통과해 내부로 흡수 된 후 혈액의 움직임을 따라 신체기관을 떠다니다 대뇌피질을 통해 전두엽에 이르러 비로소 2차 증식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바이러스 증식의 매개체가 된 전두엽은 본래의 특성을 잃고, 변형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동안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주요 원인이 되겠습니다.]

[전두엽은 인간의 충동적 성향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 동안 무차별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일반 시민들 모두 순간적인 살인 충동을 이기지 못해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시끄럽게 떠드는 행위, 단순한 인종적 편견, 또는 그저 억눌려있던 스트레스 등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낄 수 있는 모든 불쾌한 감정들이 그러한 충동의 매개체가 될 수 있으며, 전두엽이 완전히 변형된 경우 이러한 충동에 대한 제어가 전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작은 감정적 동요도 치명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네! 동요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척이나 심각한 질병입니다. 미 연방 질병관리국은 이미 최고위험도를 나타내는 AAAA를 발령하고 모든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경고 및 통제 조치를 촉구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잘 들으십시오. 절대 타인과 접촉하지 마십시오. 이 바이러스는 최소 7일에서 최대 3주까지 잠복기를 내포하며, 피부에 침투하여 증식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도의 비누 및 살균제품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사태가 진정되기까지 외출을 삼가십시오.]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뇌CT 촬영 등 복잡한 의학적 소견이 없이도, 그들 보균자는 손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피부침투와 동시에 뇌내 일부 기능을 교란시킵니다. 이는 인간의 안면근육을 통해 어렵지 않게 구분이 가능합니다.]

[웃으십시오. 보균자는 웃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웃고 있다면 그는 믿을 수 있습니다. 가족, 친지, 또는 연인 그 누구라도 상대방이 안심할 수 있도록 미소를 지어 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부터 웃지 못하는 인간은 우리의 부모 형제가 아닌 적이 될 것입니다.]


존 와슨트 미 국부부 총무 국장의 긴급 기자회견은 주요 외신 및 언론사를 통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바이러스는 너무도 널리 퍼져 있었고, 이유 없는 아니 너무도 초라한 이유의 묻지마 살인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부모가 자식을, 또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결혼식을 눈 앞에 둔 연인이 상대방을 무참히 살해했다. 전 세계는 심각한 패닉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는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국가이며, 가장 발 빠른 대응을 시도해온 미국조차 감당하지 못한 대 재앙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세계의 패권을 손에 쥐기 위해 가졌던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되려 그들의 목을 졸랐다. 가장 좋은 무기는 가장 살상력이 높은 무기라는 뜻이었고, 가장 강력한 군대는 그러한 살상무기를 가진 자들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그랬다. 바이러스는 그러한 그들 내부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며 퍼져나갔고, 가장 강력한 군대는 자신이 가졌던 가장 강력한 힘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어 갔다.
외부의 적은 손쉽게 격퇴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간 파멸에는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갔고, 아무 이유 없이 자행된 학살은 그들 안에서 흉폭한 형태의 폭력으로 발전되어 스스로의 의지로 그 힘을 해체하고 봉인하기에 이른다. 
군과 경찰이 그러한 이유로 가장 먼저 스스로의 목을 조르자, 곧 전기, 수도, 교통 등, 인류가 구축해 놓은 모든 인프라 역시 함께 궤멸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의 정부는 속속 해체되었고, 사상초유의 완전한 무정부 상태 속에서 인류는 결국 파멸로 치닫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되었다.

하지만... 
수천, 수만년의 세월동인 지구상에서 영욕의 세월을 보내온 인간의 저력은 남아있었다.
생존이라는 절대 절명의 명제 속에서 그들은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해야 했고, 곧 그렇게 되었다. 그러한 생명력이야 말로 인류가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니까...
그렇게 그들은 서로를 향해 웃기 시작했다.

시체들과 함께 뒹굴며 피로 물든 옷을 입고 그들은 웃었다.
파괴된 건물들 속에서 빗물을 받아 마시면서도 그들은 웃었다.
먹을 것이 없어 덜 부패된 시체를 찾아 먹으면서도 그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미소를 머금은 자들...
그리고 아직 웃을 여력이 남은 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힘을 모았다. 그들은 아직 쓸 수 있는 무기들을 수집하고, 운전 가능한 차량들을 개조하여 스스로의 성을 지었다. 
살아남기 위한 명제는 생각보다 간단했기에, 그들은 자신들만의 지침과 법을 만들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감염자와 비 감염자의 구분법은 실로 간단했기에, 그들은 웃었다.
그리고 웃지 않는 자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감염자를 찾아 죽였으며, 더 이상의 전염을 막기 위해 불태웠다. 
인류는 이미 궤멸 위기에 치달아 있었기에, 살아남은 인간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고, 감염을 위한 매개체가 줄어들었다는 것 역시 인류로서는 다시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3.

“죽여 버릴꺼야! 당장 이 문 열어!!!”


포효에 가까운 욕설과 고성이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주저앉은 채 귀를 막았다.
금방이라도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릴 것처럼 쿵쿵거리는 격렬한 충돌음이 문을 통해 전달된다.
아마도 그가 감금된 장소를 빠져나오기 위해 문을 발로 차는 것이리라.
이강진(71세),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괴성을 지르며 나를 저주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풀어줄 수 없다.
나는 여전히 귀를 막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요 아버지”


아버지의 발작이 시작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른 방에서도 고성이 쏟아졌다. 높은 하이톤의 가녀린 목소리가 귀가 아닌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문 열어! 문 열라구!! 염병할 놈!! 죽여버릴꺼야!!”


나는 비틀거리며 다음 방을 향해 걸었다.
서승희(68세), 평생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그녀는 일어서지도 못한 채 닫혀진 문을 손톱으로 격렬히 긁어댄다. 나는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그녀가 내게 차려준 아침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던 그 아름다웠던 나의 유년기를 떠올린다.


“엄마... 엄마...흑흑...”


회상은 늘 아름다웠지만, 그 언젠가부터 회상은 내게 고통이자 슬픔의 또 다른 이름이다.
어머니의 흡사 저주와도 같은 악다구니를 애써 참아내려 해보지만, 나에겐 아직 더 많은 빚이 있다. 어머니의 발작과 함께 시작된 또 다른 방에서의 격렬한 분노가 내 심장을 찢어놓을 듯 쏟아진다.


“미친놈! 니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날 여기 가둬놔? 문 열어!!”


진설희(31세) 짧은 단발머리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던 여자...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만 해도 항상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던 여자
일로 인해 늦은 시간 퇴근할 때면 늘 골목 언저리까지 나와 나를 맞이해주던 여자
내 심장의 반쪽...
내 아내 설희가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를 향해 소리친다.
그녀는 작은 반지 하나와 함께 영원을 약속했던 그 날부터 내 심장의 일부였기에, 도려낼 수 없는 나의 반쪽이었기에, 나는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나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지하실 한 쪽 구석에 위치한 마지막 작은 방 하나가 그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육중한 무게로 나를 짓눌러왔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려도, 터질듯 한 심장을 움켜쥐어도, 기도를 해 봐도, 그 어떤 고통을 말을 되뇌어 보아도, 결국 나를 내가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너무도 작고 소중한 존재가 그 곳에 있었다.


“신이시어... 진정 당신이 그 어딘가에 계신다면, 저는 기필코 당신을 찾아내 죽이고 말겁니다.”


신앙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버려졌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의 아내... 그 세 사람이 당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안 그 순간의 나는 그래도 당신에게 기도하고, 당신의 전능이 비로소 우리를 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울며 간청했다. 이 모든 저주가 우리들의 죄에 대한 당신의 심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니다.
이 아이는 아무런 죄도 없다.

이솔(만7세)... 나의 하나뿐인 딸...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인 나조차 잃어야 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장난감과 TV를 보며 마냥 행복하기만 해도 모자를 나이다. 그런 아이에게서 당신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다. 아이는 책가방 대신 자신의 신체를 억압하는 목줄을 매야 했고, 불과 6살에 불과했던 딸 아이가 휘두른 칼에 어깨죽지를 찔린 후 나는 모두를 위해라는 미명하에 그 애 마저도 격리시켜야 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처절한 통곡이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온다. 


“쿠르르릉, 쿠르르르릉!”
“빵빵~~~ 빵빵빵~~~”


순간 둔탁한 디젤 자동차의 엔진소리와 함께 시끄러운 경적음이 들려온다.
소위 미소 해방단이라 불리는 정신 나간 학살자들이 또 다시 거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1년 전부터 도시 외곽에 자리를 잡고, 흡사 요새와도 같은 성을 지었다.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화기와 군용 차량으로 무장한 그들을 보면 아마도 과거 군에 종사하던 자들이 주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보지만, 이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나로서도 정확히 알고 있는 바는 없다.
스스로 궤멸되지 않고 꾸준히 거리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비감염자들로만 구성된 단체처럼 보였다. 처음 그들을 발견한 나는 모처럼 만난 다수의 비감염자 무리에 호감을 느꼈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불행히도 나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학살, 방화, 약탈...
사회학자들이 무정부 상태에서 흔히 벌어질 것이라 예측하던 그러한 무질서가 그들에게서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 졌다. 물론 그것이 감염자에 한정되어 나타난 행위였다면, 아마 난 그것에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부여 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기나긴 외로움에 너무도 지쳐 있었으니까, 하지만, 감염자와 비감염자의 구분이 모호할 때도 일체의 확인 없이 상대를 사살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곧 그 마음을 접어 버렸다.
나에게는 그들로 하여금 충분한 의심을 자아내게 할 수 있는 4사람의 가족이 있었으니까...


“빵빵빵빵!!!”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그 동안 그들의 행태를 눈여겨 봐왔던 나로서는 그것이 일종의 사냥 의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 
그들은 언제고 분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아주 작은 것, 아무렇지도 않은 것에서도 분노를 느끼고, 치밀어 오르는 살인의 충동을 제어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점을 노리고 일주일 혹은 한 달의 차이를 두고 이렇게 거리에서 경적을 울려댄다. 
낚시와 같은 원리였다. 인간의 심리를 건드리는 시끄러운 경적소리라는 미끼를 던지고,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감염된 인간이 나타나 미끼를 문다. 격렬히 흔들리는 찌의 움직임처럼 그것은 무척 쉽게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달려오는 감염자와 잔인하게 난사되는 총탄의 굉음!
거리는 이내 고요와 함께 붉게 물든다.
무언가 이질적인 환한 미소와 함께...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인간의 전두엽을 변형시켜 그런 살인 충동을 증폭시키고, 제어할 수 없게 만드는 저주받은 바이러스...
하지만 인간들은 살아남기 위해 충실하게 배워낸 것이다. 바이러스와 똑같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그들은 철저하게 환경에 적응 했다. 
처음의 나는 그것에 격한 거부반응을 느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도 않은 인간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간처럼 감염된 인간을 죽인다는 행위는 나에겐 납득할 수 없는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태초 이래 인간이 자연의 법칙 속에서 지식을 체득했듯, 그들 역시 단지 환경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운 것 뿐이다. 단지 그 대상이 바이러스라는 이유로 그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킬 이유는 없다.
그들에겐 단지 학살의 대상일 뿐인 감염자가 내 가족이 아니라면 말이다.
나는 그들이 점점 내 집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급히 커튼을 닫았다. 하지만 시끄러운 경적소리 때문인지, 다시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던 가족들이 각자의 방에서 다시금 발작을 시작했다. 
고성과 욕설, 그리고 잠긴 문을 부숴버릴 것 같은 충격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슬픔과 고통이라는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다. 혹시라도 이 소리를 들은 그들이 가족의 상황을 눈치 챈다면 이 곳은 곧 감염자 처분이라는 미명하에 시끄러운 총성으로 붉게 물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음을 통해 그들이 나의 집 바로 앞까지 당도했음을 인지한 나는 황급히 계단 옆에 위치한 레버를 당겼다. 그러자 곧 약간의 진동과 함께 모터가 움직이며 각각의 방으로 연결된 환풍구에 희뿌연 가스를 공급한다.
인체에 큰 해가 없는 일종의 수면 가스였다. 독하지 않게, 아이도 함께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효과는 길어야 2~3시간이지만, 즉시성이 좋아 수분이내에 지하실 전체가 고요해진다.
나는 가스가 주입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서둘러 옷깃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방의 밀폐가 완전하지 않아 가스가 방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도 그 이유였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들 미소 해방단이라는 자들의 사냥이 단순히 감염자의 색출 및 사살행위에 그치지 않고, 각각의 가정에 대한 약탈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붕괴된 뒤, 전기와 수도, 교통 등 모든 물자의 흐름 역시 막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살아남는 법은 장기보관이 가능한 식량을 찾아내 공급받는 것 뿐이다. 그런 이유로 최초의 약탈은 상점이나, 대형마트의 폐허에서 주로 자행되었으나, 한정된 물자는 곧 바닥이 나버렸고, 허기진 그들은 이제 도심을 누비며 각각의 가정에 혹시나 비치되어 있을지 모를 식량을 찾아 나선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자행하는 감염자 사냥 역시 기실은 식량 수집 시 혹시 닥치게 될지 모를 위험을 막기 위한 사전 조치에 불과한 것이다.
아직까지 그들이 내 집 문을 부수고 들어온 적은 없지만, 늘 사고와 말썽은 만약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너무도 잘 알기에, 지하실 한쪽에 놓여진 산탄총을 품에 안은 채 계단을 통해 1층으로 올라갔다.


“후우우...”


심호흡과 함께 심장이 떨려온다.
이건 아마도 내가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내 자랑 같지만, 10살에 3개 국어를 하고, 15살에 대학 정규과정을 마친 후, 미국으로 영재 유학을 갔던 나다. 20세 무렵엔 세계 유수의 의학저널 및 질병관련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해 메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도 있다.
[천재 한국인 소년의(혹은 가난한 유색인종 소년의) 획기적인 논문이 미국의 저명한 학술지에 게재된다]라는 건, 언론이나 매스컴으로선 꽤나 군침 도는 소재였기에, 낯 뜨거운 헤드라인과 함께(이를테면 대한민국을 책임질 뉴 글로벌 리더 5人이나 바이러스 연구의 최첨단을 달리는 나이 어린 천재의 에볼라 극복기 같은)나는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상당히 잘 알려진 유명 인사였다.
당시의 나는 에볼라 바이러스를 연구중이었고, 관련 성과 역시 꽤 인정을 받고 있던 터라, 변명 같지만, 그 동안 해오던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군 입대를 택할 수는 없었다. 학계에서 인정 받는 존재에게 미국 시민권은 너무도 쉽게 발급된다. 나의 국적은 미국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병역은 선택사항이 되어버렸다.


“빵빵... 빵빵...”


시끄러운 경적소리가 문 바로 앞에서 들려온다. 불안한 예감은 늘 잘 들어맞는다더니, 감염자 청소를 위해 나선 차량이 집 주변에 정차한 듯 계속 같은 음량으로 경적소리가 뿜어져 나온다. 


[차량을 세우고 일대의 감염자를 모두 제거한 후 약탈을 시작할 셈인가?]


나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나는 그저 이것이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한 아주 잠깐의 정차이기만을 바래본다. 산탄총을 품에 안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어를 위한 무기일 뿐 그들이 가진 인명 살상용 무기와는 격이 다르다. 
사거리, 파괴력, 연사능력... 그리고 결정적으로 병력의 숫자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이룬다.


[그냥 가라... 가... 제발...]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나의 작은 바람을 힘주어 말한다. 비록 무기의 화력에선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화마가 퍼져나가는 산탄총의 특성상 좁은 공간에선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밖으로 나가지 말고 내부에서 방어만을 목적으로 할 경우 특별한 조준도 필요치 않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격려해 본다.


[이제 거의 다 됐단 말야... 거의 다... 오 제발 주여...]


나는 버렸던 신의 가호까지 열망하며, 벽에 몸을 기댄다.


[덜컹 덜컹!]


심장을 멎게 만들 것만 같은 창틀의 움직임... 
호흡이 곤란할 정도의 긴장감과 압박감이 나를 조여 온다.
누군가... 누군가 집안으로의 침입을 위해 닫혀진 창틀을 흔들어 대고 있다.




4.

[철컹 철컹]

“잠겼는데?”
“여기 경적 좀 더 크게 울려봐!”
“왜?”
“안에 혹시 숨어 있을지도 모르잖아!”
“샘! 됐어 됐어! 그 망할 경적 좀 그만 울리라구! 이봐 에드! 어지간히 해! 그 정도 울렸으면 감염자들 벌써 10번은 더 몰려나와도 몰려나왔을 거야 그만 하라구! 귀가 먹어버릴 것 같아!”
“마크! 너 죽고 싶어? 시끄러운 건 잠깐이지만, 감염되면 그걸로 끝이야! 지난번 식량수집 때 한 년이 감염되서 바로 사살된 거 기억 안나? 니가 총을 잘 쏘는 건 알지만, 이건 흔한 좀비영화가 아니야! 좀비는 물리지만 않으면 되지만, 감염자 새끼들은 그냥 피부에 닿기만 하면 아웃이야! 오래 살고 싶으면 무조건 조심해야돼! 이봐 샘! 경적 더 울려! 미친듯이! 아니! 아예 그걸 틀어!”


나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문 밖에선 미소 해방단 끼리의 실랑이가 벌어진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들의 대화만으로 추정해본다면, 곧 문을 부수고 안으로 난입할 태세다. 나는 급히 산탄총을 굳게 붙잡은 채 계단 옆의 가구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에드라고 불리운 사내의 말 때문일까? 시끄러운 경적소리는 결국 멈췄지만, 이번엔 시끄러운 앰프의 하울링 노이즈가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롭게 들려왔다. 
그리고는 곧 더 시끄러운 로큰롤 음악이 창문을 뚫고 내 귓전을 간지럽힌다.


[I see a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빨간 문이 보여, 그 문을 검게 칠해 버리고 싶어

no colours anymore I want them to turn black.
다른 색깔은 필요 없지, 모두 검은 색으로 바꾸고 싶어

I see the girls walk by dressed in their summer clothes,
여름 옷을 입고 지나가는 소녀들이 보여

I have to turn my head until the darkness goes.
어둠이 지나갈 때 까지 난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겠어

I see a line of cars and they're all painted black,
한 줄로 늘어선 차들이 보여 그 차들은 모두 검은 색이야

with flowers and my love, both never to come back.
꽃과 나의 사랑을 보냈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운명이 되어 버렸어

I see people turn their heads and quickly look away,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사람들이 보여

like a newborn baby it just happens every day.
그건 마치 매일 누군가가 태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렸어

I look inside my self and see my heart is back,
내 자신을 들여다 봤어 그리고 내 마음이 검다는 걸 알게 됐지

I see my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빨간 문을 보니 검게 칠해버리고 싶어

Maybe then I'll fade away and not have to face the facts,
그럼 아마 난 이 현실에 맞설 필요 없이 소멸될 수 있을지도 몰라

it's not easy facing up when your whole world is black.
까맣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용감히 맞서는건 쉽지 않아.

No more will my green sea go turn a deeper blue,
파아란 나의 바다는 더 이상 푸르러지지 않을 거야

I could not forsee this thing happening to you.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If I look hard enough into the setting sun,
my love will laugh with me before the morning comes.
지는 태양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보면 아침이 밝기 전에 내 사랑은 나와 함께 웃겠지

I see a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빨간 문이 보여 그 문을 검게 칠해 버리고 싶어

no colours anymore I want them ot turn black.
다른 색은 필요 없어 모두 검은 색으로 바꾸고 싶어

I see the girls walk by dressed in their summer clothes,
여름 옷을 입고 지나가는 소녀들이 보여

I have to turn my head until my darkness goes.
어둠이 지나갈 때 까지 난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겠어.

I want to see it painted, paint it black
검게 칠해진 모습을 보고 싶어

Black as night, black as coal
어두운 밤처럼, 석탄처럼 검게 말야

I want to see the sun, blotted out from the sky
태양마저 하늘에서 사라져 버리기를...

I want to see it painted, painted, painted, paint it black
검게, 검게, 검게 칠해진 모습을 보고 싶어

롤링스톤즈(Rolling stones)-Paint It Black 가사]


아주 오래된... 노래...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지고 불리워진 노래였지만, 락 매니아이자, 고전 TV드라마 매니아였던 나에겐, 베트남전을 다룬 ‘머나먼 정글’이라는 TV드라마의 OST로서 친숙한 곡이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서, 죄의식마저 묻어 버려야 했던 참혹한 베트남전의 민낯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문제적 작품... 그리고 그 속에서 슬픔에 절규하는 군인들의 등 뒤에선 늘 이 노래가 OST로서 흘러나왔었다. 나는 이 음악을 선곡한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전쟁터처럼 어그러져 버린 지금의 현실과 무척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참혹한 현실... 사람들은 감염자와 비 감염자로 나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인다.
검게 칠하고, 칠해진다.
이제는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일이 마치 누군가가 태어나는 행위처럼 당연한 것이 됐다.
모두들 세상을 검게 칠하려 한다.
자신의 양심과 신념은 외면한 채, 다른 색을 용납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나 역시 이대로 소멸되어 버릴 수 있다면, 노래 가사처럼 현실을 직시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니다.
나는 아니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에겐 아직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


믹 재거의 구슬픈 목소리 탓인지 한껏 상념에 젖어 있던 나는 황급히 고개를 흔들며 나 자신을 채찍질 한다. 한낱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쨍그랑!!]


굳게 잠긴 문을 여는 것이 수고스러웠는지, 그들은 창문을 깬 뒤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 듯 보였다. 그리고는 곧 창의 남은 파편들을 거칠게 부숴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쯤 창문은 아마 날카로운 파편들마저 모두 깨지고 누구나 쉽게 넘어 들어올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쿵!]
[빠드득]


누군가 창문을 넘어 안쪽으로 착지한 듯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유리파편이 발에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결렬한 긴장감으로 변해 나를 짓누른다.


“FuCK! 젠장 여기 한 놈 있었어!!”

[탕! 탕탕탕탕!]


롤링스톤즈의 비장한 음색을 뚫고 퍼져나가는 시끄러운 총성!


“쏴! 죽여버려!!”

[탕탕!! 탕탕탕!]

“맞았어? 맞은거 확실해? 확실히 죽었나 확인해!”
“죽었어! 와 이 자식 어디에 숨어 있었던거야! 그렇게 시끄럽게 경적을 울릴 때도 안나오더니!”
“그러게 이거 혹시 비감염자였던거 아냐?”
“젠장! 그딴 빌어먹을 소리 하지마!”
“뭐야 마크! 지금 그 얼간이 같은 표정은? 설마 얼어버린 거야? 히히히! 괜찮아 잘했어 잘 했다구! 비 감염자건 빌어먹을 감염자건 간에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 확인 안된 녀석이 달려들면 무조건 갈겨 버리는 게 끝까지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야! 괜찮아 잘했다구!‘


나는 계단 한쪽에 산탄총을 기대 놓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히 누군가 집의 창문을 깨고 실내로 침입하긴 했지만, 바깥쪽 어디에선가 누군가 나타났고, 그에 따른 약간의 교전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총소리에 가려 자세히 들리진 않았지만, 실내에 침입했던 누군가도 바깥쪽의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다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또 하나의 생명이 죽어간 듯 했지만, 음악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문득 부숴진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검게만 느껴진다.
Paint it black...



5. 

[끼이이이익]

나는 조심스레 거실 한 켠에 있는 소파를 밀어낸다. 소파 뒤쪽엔 원래 낡은 나무문이 있었지만, 나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손잡이를 제거하고 마치 벽의 일부분인 것처럼 하얗게 칠해버렸다. 내가 죽거나 혹은 어떤 피치 못할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지하실에 숨겨져 있는 나의 가족들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후우우”


문을 열기전 환풍기를 가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얕은 농도의 수면가스가 콧가를 간지럽힌다. 나는 다시 한 번 입을 막고 조용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끼릭 끽끽끽]


오래된 통조림 캔 몇 개가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열려진다. 보존식으로 조리된 콩 통조림이다. 처음엔 그럭저럭 먹을 만했지만, 이젠 보는 것 만으로도 역겹다. 허나 외출 자체가 극심한 위협이 되는 현 상황에서 밖에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적어도 저 지겨운 통조림 캔들이 모두 사라질 때 까지는 안전을 위해 미각을 포기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다.
나는 그래도 제법 풍족했던 처음의 3개월을 떠올렸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저장식량들을 걱정 없이 먹어 치워도 됐으니까 말이다. 가족들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매일 맛없는 콩 통조림만을 배식해주는 이 무능한 가장을 아마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몇 달도 버티지 못하는 빌어먹을 라면 따위를 잔뜩 가져왔던 것일까? 지하실 한 켠에는 채 뜯어보기도 전에 유통기한을 훌쩍 넘겨버린 라면들이 아직도 몇 봉지 굴러다닌다. 모두 심각한 상황이 도래하기 전 인근의 상점에서 집어온 것들이다. 연구실에만 쳐박혀 있느라, 요리엔 도통 문외한이었던 나는 이전까진 라면이란 것이 그렇게 유통기한 짧은줄을 몰랐다.


“많이 드세요.”


죽은 듯 잠들어 버린 아버지의 방문을 열고, 나는 바닥에 미리 고정시켜 둔 배식통에 콩을 부어 놓는다. 


“정신을 차린 후 허기가 지게 되면 드시겠지... ”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내도 지금 이 상황에선 먹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다르다. 한창 성장하고 커가야 할 나이다. 보다 균형 잡힌 식사를 주어야 하는 것이 아버지의 의무다. 만약 정부가 그대로 존속되어 있고, 연방경찰이나, 지역 아동단체가 존립되어 있는 상태라면, 아마 난 아동 학대죄로 구속될지 모른다.
벌써 몇 주째 콩 통조림만을 먹인다는 건, 이 나라에선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니까...
가족들이 곧 깨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이유로 난 황급히 계단을 걸어올라 1층으로 갔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종종 분노로 인해 바닥에 고정된 배식통을 짓밟아 버린 탓에 한층 여위어 버린 아버지의 얼굴이 진득한 액체로 변해 눈에 머금어진다. 


“이제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끝나!”


1층을 지나쳐 곧장 2층에 올라온 나는 나 자신을 격려해 본다.
비록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에볼라의 정복에는 실패했지만, 나는 지금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생의 마지막 연구에 몰두해 있다. 

이 저주 받은 바이러스의 극복!

숭고한 인류애, 모든 인간에게 내려진 저주를 이겨내는 것, 인류의 평화...
그 어떤 것도 나에겐 무의미하다.
나는 그저 오직 단 하나의 의미만을 나에게 부여한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그리고 내 딸]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상관없다. 그들은 나에게 전 세계이며, 전 인류이고, 또한 모든 것이다.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현미경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지난 1년간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는 않았는지, 최근의 내 연구는 놀랄만한 수준에 도달했다.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바이러스의 실체!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괴멸시킬 것인가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다고 자부한다.
여기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그리고 내 딸의 표피 세포가 이용되었다.
피부 진피층에서의 1차 증식을 차단하는 것은 이미 3개월 전에 반쪽의 성공을 거두었다. 지극히 한시적이고, 제한적이지만, 일시적으로 바이러스의 감염 체계를 무력화하는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극복과 승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려면 우리 인류가 그랬던 것처럼, 바이러스 자체를 궤멸 시키는데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나의 최종 목표는 어디까지나 감염을 차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기 감염된 감염자의 치료 및 항 바이러스성 내성인자를 생성하는 백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아아...”


깊은 탄식이 흘러 나온다.
작게 잘리워진 표피를 통해 준비된 항 바이러스 제재를 침투시켜 준비한 아흔 여섯 번째의 시료가 검게 변색되어 있다. 감염 체계 및 바이러스의 내부 핵을 파괴해야할 항 바이러스 제재가 도리어 괴멸당해 검게 드러난 것이다.


[실험 노트 3-96 아흔 여섯 번째 시료, 실험재료 이강진의 어깨 표피세포, 결과 : 실패, A350형태의 항 바이러스 제재는 일시적으로 바이러스의 증식 및 감염을 차단하는 성질은 가졌지만, 12시간 이상 바이러스에 노출시켜 본 결과 바이러스의 증식능력을 따라잡지 못해 결국 궤사]

[실험 노트 3-97 아흔 일곱 번째 시료, 실험재료 서승희의 목에서 채취한 표피 세포, 결과 : 실패, A350형태의 항 바이러스 제재에 증식성을 일부 향상시킨 형태의 배양액으로 시료를 제작하였으나, 바이러스에 침투하기보다 증식 쪽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침투능력 부족으로 바이러스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함]

[실험 노트 3-98 아흔 여덜번째 시료, 실험재료 진설희의 혀에서 채취한 표피세포, 결과 : 실패, B-2157군의 항 바이러스 제재중 증식성과 내핵 투과율이 높은 제재가 혼용 사용되었으나, 바이러스 자체와 결합만 될 뿐 바이러스 제거 기능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됨]

[실험 노트 3-99 아흔 아홉 번째 시료, 실험재료 이솔의 코 안에서 채취한 표피세포, 결과]


“어!!!”


나는 실험 결과를 써내려가다 말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현미경 속을 다시 들여다본다. 아흔 아홉번째 시료속의 실험재료는 항 바이러스 제재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완전하게 궤멸되어 있었고,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손상을 입었어야 할 바이러스들이 한층 더 공격적인 형태로 증식되어 있었다. 


“젠장! 이건 뭐지? 빌어먹을! 죽이기는커녕 되려 기존보다 몇 배나 빠른 속도로 바이러스가 증식되어 버렸잖아! 이래서야!!”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바이러스를 죽이기는커녕 되려 바이러스를 더 증식시키는 항 바이러스 제재라니... 현미경으로 확인한 것이 사실이라면, 바이러스의 극복이 아니라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증식성과 전염성을 지닌 바이러스를 재 창조할 판이었다.
바이러스 입자가 지금보다 몇 십배 정도만 작고, 지금과 같은 갈고리 형태만 아니라면, 피부에 유착되지 않고 대기 중에 떠올라 마치 감기처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퍼져 나갈 지도 몰랐다. 단순한 피부접촉이 아닌 대기를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가족이 함께 웃는 포근한 보금자리이지, 지옥행 편도 열차가 아니었기에, 나는 황급히 한층 더 시커멓게 변해버린 시료의 뚜껑을 덮고 책상 옆에 놓여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깊게 두어 모금을 빨아내고 나서야 비로소 담배각 안에 들어있는 담배가 이제 단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인진된다.


“그래도 참 아껴서 피웠는데, 결국 이제 딱 하나 남았구나!”


희뿌연 담배연기가 나의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다. 오늘은 담배였지만, 내일은 콩 통조림이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큰 위기 없이 지내왔지만, 당장 한 달 정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지하에 저장된 몇 통의 물로는 버텨낼 수가 없다.
7박스의 콩 통조림, 1박스의 과일통조림, 밀가루 200g들이 한 봉지, 이미 유통기한을 훌쩍 넘겨버린 몇 봉지의 라면들이 지금 내가 가진 전부다.
아... 아끼고 아껴온 담배 한 개비... 
하지만 나는 모처럼 웃어봤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재산일망정, 폐허가 되어 버린 뉴욕이라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나는 상위 1%이내의 부자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허탈함과 허망함이 공존된 미소가 사라지자, 금세 고개를 쳐드는 것은 깊은 절망감이다. 
그리고 절망은 늘 인간을 피로하게 만든다.


“오늘은 이쯤에서 조금 자 둘까?”




6.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정오의 센트럴 파크, 나는 그 널따란 잔디밭 위에 누워 이 자애로운 따사로움을 만끽한다.


“청연아!”
“아빠!!!”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기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달려오는 내 딸이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울컥 나올 것만 같았다. 나를 향해 건강하게 뛰어오는 딸도,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지도 모든 것이 다 너무도 그리운 추억속의 모습이다.


“솔아!”


나는 딸 솔이를 부둥켜 안은 채 오열했다. 이렇게 행복한데 눈물은 왜 미친 듯이 쏟아지는 걸까? 조그마한 딸의 몸이 내 품에 꼭 안긴 채 버둥거린다. 


“아빠 그만해 숨막혀!”
“솔아 잠깐만... 아빠 잠깐만 이렇게 너 안고 있으면 안될까?”
“안돼! 안돼!‘


문득 딸의 목소리가 차갑게 느껴졌다. 갑작스레 햇살을 가려버린 구름 탓일까?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친다. 


“죽여버릴꺼야!”


어린 딸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변한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의 얼굴에서도, 어머니의 얼굴에서도 아내 설희의 얼굴에서 화사하게 번져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 번뜩이는 살의...
아찔한 한기가 내 몸을 감싼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안고 있던 딸을 뿌리친 채 뒷 걸음질 치고야 만다.


“니가 우릴 가뒀어!”
“널 죽여버릴꺼야!”
“화가 나! 화가 나! 죽어! 죽어버려!!”


내 가족의 손에 어느샌가 칼이 들려 있다. 아니 어느새 내 아랫배를 차갑게 쑤시고 들어오는 냉랭한 감촉이 느껴진다. 딸이었다. 딸의 그 작고 고사리 같은 손에는 과도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정없이 내 아랫배를 관통한다.


“솔아... 으... 솔아... 안돼 난 니 아빠야”
“죽어! 죽어! 아빠따위 죽어!”


딸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피를 흘리며 그저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가족들은 한층 더 분노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마치 거짓말처럼 내 손에는 언제들려 있었는지도 모를 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다. 
살고자 하는 본능과 가족에 대한 애정이 충돌한다.
나는 연신 [안돼! 안돼!] 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이 말을 듣지 않는다. 두 팔 역시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들려진다.


[타탕! 탕탕탕탕!]


시끄러운 총격음이 울려 퍼진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가족들은 끈이 풀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고, 이제껏 한번도 본 적 없는 원망스러운 눈빛들이 나를 향한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한게 아니야!”


나는 소리치며 들고 있던 총을 던져버리려 했지만, 총은 흡사 접착제라도 발려 있는 듯 내 손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봐 그 총! 네가 들고 있잖아! 네가 그 총으로 우리를 쏜 거야! 사랑하는 가족들을 죽인거라고!”


가족들이 한 목소리로 나를 향해 외친다. 아버지의 머리, 어머니의 가슴, 아내의 어깨, 딸의 복부에서 연신 핏물이 솟구친다. 


“안돼!! 안돼!!!”



7.

지독한 악몽이었다. 나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쌀쌀한 밤바람이 머리칼을 스친다. 아마도 어제 낮 미소 해방단의 약탈자가 창문을 깨는 바람에 그 곳으로 차가운 가을바람이 새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헉헉...”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생경한 감각들이 나를 괴롭힌다. 나는 서둘러 내가 앉아 있던 1층의 쇼파를 치우고 가족들이 숨겨진 지하로 내려간다. 작은 방탄 창문 사이로 잠들어 있는 가족들의 얼굴들이 하나씩 보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작은 손전등을 끄고 터벅터벅 1층으로 올라왔다.


“저 찬 바람 때문이야... 찬바람이 새어 들어와 나도 모르게 악몽을 꾼 거야!‘


나는 애써 악몽의 원인을 찬바람 탓으로 돌려본다. 그래야 했다. 그래야만 어쩌면 내 안에 숨겨져 있을지 모를 가족들에 대한 살인 욕구를 부정할 수 있다. 

임시방편이지만 창고에 있던 비닐을 이용하니 더 이상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진 않았다. 어설프게 접착테이프로 붙여버린 것이라 보기엔 흉했지만, 악몽을 꾸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다시 쇼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부디... 악몽으로 변하기 전의 그 아름다웠던 시절을 다시 한 번만 꿈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8. 

진한 갈증이 느껴졌다. 지난밤의 악몽 때문일까? 몸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아니다 등과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으로 보건데, 몸살이라도 걸린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손으로 이마를 짚어보니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심적인 고통과 더불어 간밤의 차가운 바람이 쇄약해진 몸에 짓궂은 선물을 주고 간 듯 했다.
나는 덮고 있던 낡은 담요를 걷어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기 몸살 덕분인지 평소보다 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듯 했다. 날이 많이 밝아져 있었고, 창문의 커튼 틈 사이로 10월의 햇살이 스며든다.
한 낮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음에도, 지난 밤 나를 괴롭혔던 차가운 바람은 여전히 매섭다. 임시방편으로 쳐 놓은 비닐이 자신을 가로막는 것에 성이 났는지, 신경질적인 풍절음을 내며 연거푸 창을 두드려 온다. 나는 다급히 바닥에 손을 뻗어 지난 밤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놓았던 산탄총을 찾아본다. 시끄러운 풍절음의 등 뒤에 숨어 있었지만, 확실히 동화되지 못한 어색한 진동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불규칙적인 진동음이 멈추고, 불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제서야 그 불규칙적인 진동음의 정체가 오래된 디젤 차량의 털털거리는 엔진음이었고, 그것이 나의 집 앞에서 멈추었으며, 불편한 발걸음의 주인공이 나의 집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그머니 산탄총을 들고 2층으로 가는 계단 뒤에 숨었지만, 어느샌가 발자국 소리보다 더 크게 쿵쾅거리기 시작한 심장 탓에 긴장감은 극에 달한다.


“에드... 경적이나 음악을 좀 틀어서 감염자부터 해치우고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어?”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러운 듯 그 조심성 없는 목소리만 들어봐도, 그들이 집 앞에 서 있고,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한층 더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아니야 이 안엔 감염자가 없어!”
“무슨 근거로 그런 장담을 하는거야?”
“어제 기억 안나? 난 이 집에 들어가려고 했지... 마크 넌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샘이 음악을 틀어놓은 사이 난 창문을 깨트렸어, 문은 잠겨 있었고, 잠긴 문을 부수려고 애를 쓰거나, 총알을 낭비하는 것보단 창문을 통해 진입하는 것이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지”
“그래서? 그게 감염자 유무와 무슨 상관이란 거지?”
“자 봐... 이 창문을... 어제 내가 깨어놓은 창을 누군가 비닐로 막아두었어, 만약 감염자가 안에 있었다면, 그는 깨어진 창문에 분노하여 건물 밖으로 뛰쳐나와 우리에게 덤볐거나, 또는 아예 창틀 채 이 부분을 박살내 버렸겠지... 그들은 조금도 자신을 제어할 수 없으니까! 헌데 봐... 조심스레 안쪽부터 테이프로 붙여놓은 걸... 이건 확실히 비 감염자의 집이야!”
“그럴 리가? 이제 이 도시안에 우리 외에 다른 비감염자는 없어, 있다고 해도 우리에게 합류할 생각이 없는 놈인 것 같은데, 구태여 위험을 무릎 쓰고 들어가 볼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우리처럼 조직화되지 못한 상태에선 곧 감염자들의 희생양이 되고 말걸?”
“멍청하긴!!!”


에드란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일행에게 면박을 준다. 나는 처음보다 한껏 힘을 주어 등을 바짝 벽에 붙인 채, 그의 뛰어난 관찰력에 찬사를 그리고 나의 부주의함엔 비난을 퍼부어 본다.


“잘 생각해봐! 어젯밤 이곳에 갑자기 정착한 뜨내기라면 상관없지만, 이곳에 숨은 채 살아가고 있는 비 감염자가 있다면, 그의 창고 안에 뭐가 있을지 말이야!”
“창고?”
“그래...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혼자 살아가려면, 무언가 준비를 단단히 해두었겠지, 이를테면 물이나, 식량 같은 것 말이야!”
“와우! 에드 너 혹시 천재 아냐? 바이러스가 퍼지기전에 변호사였다고 했나? 나 지금 엄청나게 감탄했다구! 니 말마따나 그게 사실이라면, 오늘 꽤 엄청난 소득이 있겠는데? 우와! 빌어먹을 콩 통조림 말고, 뭔가 씹을 만한게 있었으면 좋을 텐데! 베이컨이라든가, 아니면 먹음직스럽게 구워놓은 칠면조 요리 같은 것 말이야!”


바짝 긴장한 상태의 나였지만 문 밖에서 들리는 마크란 사내의 말엔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시골의 농장도 아닌데, 베이컨에 칠면조라니... 감염자들이 툭하면 나타나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그런 것들을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지하실의 내 창고엔 그가 그렇게 빌어먹을 것이라고 말하는 콩 통조림 몇 박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쉿! 소리를 낮춰... 혹시 비 감염자 놈이 안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아... 그렇군... 뭘 가지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이 미친 세상에서 감염자든 비 감염자든 자기가 가진 식량을 웃으면서 내어줄 놈 따윈 없을 테니까!”
“내가 신호를 할 게 준비해!”


내가 귀를 쫑긋이 세운 채 자신들의 말을 전부 다 듣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놈들은 신이 나서 떠들어 댄다. 어제 들었던 롤링 스톤즈의 노래가 떠올랐다. 한 놈은 변호사, 또 다른 한 놈은 뭘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둘 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의 직업이 킬러나 살인자였던 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옜 날의 베트남처럼 하나의 전쟁터가 됐다. 총알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사지(死地)에서 아군과 적군, 그리고 죄 없는 시민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는 대상을 먼저 검게 칠해야 한다. 손에 든 이 강철의 붓으로 말이다.


“들어와... 들어오기만 해... 날려버려 줄테니까!”


조용한 다짐과 함께 다른 한 손으로 불룩한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본다. 당장 가지고 있는 총알은 2발, 하지만 쏘는 순간 납 탄이 흩어지며 발사되는 산탄총의 특성상 두 놈이 한꺼번에 문안으로 들어왔을 때 갈겨버리면, 한방에 끝낼 수도 있다. 빌어먹을 콩 통조림도 그렇지만, 총알 역시 지금의 나에겐 최대한 아껴야하는 필수 자원 중 하나다. 거기에 총알을 아낀다는 건 혹시라도 총소리를 듣고 분노할지 모를 감염자들의 출현도 사전에 막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됐다.
손가락을 방아쇠에 넣는다. 땀 때문인지 검지손가락 끝마디가 미끌미끌 거린다. 두 놈을 한방에 날려버린 후, 비 감염자의 출현에 최대한 대비하며 놈들과 차량을 먼 곳에 옮겨 놓아야 한다. 집에서만 멀리 떨어진다면, 놈들이 바이러스에 걸린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서로를 죽여 댔는지 확인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스걱스걱... 스걱스걱]


약간의 정적이 지나자, 칼로 창문의 비닐을 찢어내는 듯 한 소리가 집안으로 유입된다. 바이러스만 없었다면, 안전한 진입을 위해 넘어 들어오는 것이 불편한 창문 보다는 문의 자물쇠를 총으로 부수고, 문 안쪽으로 총을 난사하여 혹시나 안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누군가의 움직임을 사전에 봉쇄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나, 지금은 그들이나 나나 피차 총소리를 듣고 나타날지 모를 감염자들을 조심하는 것이 먼저였다. 
바람소리가 들린다. 닫혀 진 공간 안으로 불어오는 찬 공기가 이 공간을 외부와 단절시켜주었던 비닐이 완전히 제거되었음을 알린다. 


[타탁!]


소리를 최대한 죽인 누군가의 착지음이 날렵하게 귀를 때린다. 계단 뒤쪽 벽에 몸을 바짝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져 나올 것처럼 긴장된 상태라, 무언가 빨리 결착을 내야 할 것 같은 심정이었지만, 나는 처음의 작전을 유지하기로 했다. 아직 착지음은 하나, 총알 한 발을 소모해 버리는 것은 자원적인 측면에서도 마이너스지만, 남은 다른 한 명에 대한 대처가 어렵다. 게다가 군인 출신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보여 지는 미소 해방단 놈들과 달리 군대가 생소한 나로서는 이 산탄총의 조작이 아직 미숙하다. 놈들의 총과 달리 내 총은 추가적인 장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연사(聯射)가 필요한 상황은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한 놈만... 한 놈만 더...”


품에 안은 산탄총의 총신이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처럼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하다. 이것이 작은 납 탄들이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가는 형태의 산탄총이었기에 망정이지, 정확한 조준이 필요한 일반적인 장총이었다면, 이 긴장된 땀방울들만으로도 분명한 나의 패배다. 


[샤박 샤박!]


조심스러운 걸음소리가 들려온다. 먼저 들어온 한 놈이 내부를 살피는 듯 했다. 아직은 조심스러운 듯 성급히 집 안을 휘젓지 않고, 걸음을 멈춘 채 고요함을 유지한다.


“들어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조심성 없는 목소리는 약간의 긴장감도 찾을 수 없는 경박한 목소리로 창밖을 향해 외친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봐 마크 그렇게 빨리 경계를 풀어서야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겠어?]라고 홀로 되물어 보지만, 그 소리는 나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할 뿐 밖으로 소리 내어 흘러나오진 않는다. 아마도 그가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은 내 손에 들린 산탄총이 그를 향해 불을 뿜은 이후가 될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털썩!]


또 한 번의 착지음이 귓전을 스치자마자, 나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있던 계단에서 몸을 빼내 문과 창문이 있는 쪽을 향한다. 내 예상대로 먼저 들어온 마크란 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방금 전 창문을 넘어 들어온 사내는 아직 바닥에 앉은 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콰앙!]


시종일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던 나의 두 손은 그 간의 긴장이 무색할 만큼 익숙한 동작으로 목표물을 향해 총신을 들이댄 후 불을 뿜는다. 


“으아악!”
“커헉!!”
[쨍그랑! 와장창창!]


매캐한 화약 냄새와 함께 두 명의 남자가 피떡이 되어 쓰러진다. 발사된 납탄들로 인해 벽과 가구가 온통 엉망이고, 창문 역시 모두 박살났지만, 상황은 완벽했다. 한 방으로 두 명의 적을 효과적으로 사살했으며, 깨어진 창문 밖을 예의 주시했지만, 감염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우... 마크... 긴장을... 긴장을 너무 빨리 풀지 말라구!”


나는 그제서야 다소 진정된 심장을 한 쪽 손으로 어루만지며, 피 떡이 된 시체 한구를 향해 조금 전 떠올렸던 마지막 인사를 건네 본다.


“그쪽도 타이밍이 조금 이른 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등에 와 닿는 차가운 감촉, 조금 전 들었던 것 같은 냉소적인 목소리... 나는 그제서야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마치 만담꾼들처럼 경적음을 울리는 문제로 설전을 벌였던 두 남자, 그리고 그들의 대화에서 거론된 또 다른 남자! 그렇게 그들은 셋이었다.


“마크, 에드, 샘... 그래 어젠 분명히 세 명이서 왔었지?”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나의 부주의를 탓해본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딱딱한 총신의 차가운 감촉이 내 목덜미에 와 닿는다.


“호오... 기억력이 좋네... 어제 우리가 왔을 때도 이 안에서 우리 얘기를 다 듣고 있었군? 그렇지? 젠장! 어젠 내가 먼저 이 안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창문을 부쉈던 것도 나였고, 만약 그때 다른 쪽에서 음악소리를 듣고 감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마 저기에 누워 있는 건 나였겠지? 흐흐 안녕 비 감염자씨, 난 에드야, 왠지 불안해서 마크와 샘을 창문으로 들여보내고, 난 건물 뒤쪽으로 돌아서 조용히 뒷문을 따고 들어왔지, 보통은 갑자기 감염자들 만날까봐 뒤로 돌아가는 건 미련한 마크에게 주로 시키지만, 오늘은 왠지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더라구! 어때 내 육감이? 이 정도면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승자의 냉소적인 조소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마음 같아선 어딘가 비뚤어진 패자의 반박을 한껏 퍼부어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곧바로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저 차가운 바람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내 뒤통수와 입을 연결하는 커다란 구멍이 생길 것만 같았다.
뭐 아니라도 그가 날 살려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 테지만 말이다.


“자! 말해! 식료품은 어딨지?”
“없어! 다 먹었어, 이곳엔 어제 저녁에 왔어! 나도 다 뒤져 봤지만, 물 한 모금 마실 것도 없었다구!”


나는 어설픈 거짓말로 그를 속여 보려 애썼지만, 나의 절절한 표정연기는 그가 내 뒤통수만을 보고 있었던지라 조금도 전해지지 않은 듯 했다.


“거짓말... 도시 인근엔 아직도 감염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아, 차 없이 도시 한 가운데로 진입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들어오기 전 주변을 다 확인했어, 이동 가능하거나, 기름이 있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넌 여기 상주하던 비 감염자야! 분명히 먹을 것이 있을 꺼야!”


그의 총구가 내 뒷목을 더 세게 찔러왔다. 그 순간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유년시절에 보았던 액션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멋진 상황반전을 떠올려본다. 그의 총구가 다시 한 번 뒷목을 건드릴 때 나는 마치 미끄러지듯 그가 내민 총부리를 타고 빙그르르 돌며, 그의 목덜미에 강력한 왼손 당수 촙을 꽂아 넣는다. 마치 추억의 액션 영화 속 잭키 찬과도 같이 말이다. 상대는 나의 기세에 놀라 주저앉을 것이고, 나는 재빨리 어린 시절 배워둔 태권도의 앞차기 자세로 그를 제압한다.
물론 현실로써 그것을 시도해볼 자신은 없다. 나는 잭키 찬이 아니고, 미국으로 오기 전에 배운 태권도는 겨우 5살 때의 것이라 그때의 발차기가 아직도 가능할 리 없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총이 없는 맨손의 사투라도 허구헌날 연구실에만 쳐 박혀 있던 내가 그를 제압할 수 있을리 없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혹시 이곳에 너 말고 다른 일행이 있나? 오호라! 네 동료가 널 도와주지 않을까 해서 지금 시간이라도 끄는 거야?”


헛된 상상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는 내게서 조금 떨어져 뒤쪽으로 걸어간다. 누군가 2층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것을 대비하고자 하는 듯 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의 눈동자는 2층 계단과 그의 뒤에 있는 뒷문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겠지...
이래서야 당수 촙이고 잭키 찬이고 간에 아무 소용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했다간 지하실에 숨겨져 있는 가족들까지 위험할 판이다.


“아무도 없어! 나 혼자야!”
“거짓말 마!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니 말만 믿고 경계심을 풀 생각도 없고, 자 니가 앞장서 보실까? 자 어서 계단으로 올라가! 멍청한 니 동료가 2층에 숨어 있다면 둘 다 머리통에 구멍을 내 주지... 니가 가진 산탄총과 달리 내 것은 연사가 가능하니까 말이야! 자 어서 그 산탄총 저 쇼파 위로 내던지고 앞장 서!”


그가 내게로 다시 다가와 등에 총구를 가져다 댄다. 나는 그에게 반항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순순히 들고 있던 산탄총을 쇼파위에 던졌다.


“자 손을 들어! 머리 위로, 그리고 냉큼 2층으로 걸어 가라구! 니가 앞장을 서면 2층에 있는 놈이 총을 가지고 있더라도 먼저 희생되는 건 니가 될꺼야! 그러니 허튼 생각 말라구! 지금 내 손가락은 무척 예민한 상태라 작은 인기척에도 니 놈 머리통을 날려버릴지도 몰라!”


한바탕의 극심한 긴장감을 느껴봤던 나로서는 그의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다행히 집의 2층엔 실험장비와 샘플들만이 즐비할 뿐 아무도 없기에 나는 순순히 그의 말대로 2층 계단을 올랐다.


“옳지... 옳지... 딴 생각은 하지 않는게 좋을꺼야!”


삐그덕 거리는 계단소리와 함께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용도가 방패막이든 뭐든 아직 그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의 감사를 표하면서...


“뭐지 이건?”
“실험장비...”
“무슨 실험?”


그의 총구가 다시 한 번 거칠게 내 등을 찔러온다. 나는 그의 이런 거친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바이러스... 그 빌어먹을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있어!”
“뭐? 하하하하 너 미쳤어? 나라에서도 어쩌지 못한 바이러스를 이 조그마한 방에서 어쩌고 있다고? 여기 아까 죽은 마크 말고도 머저리가 하나 더 있었구만!”
“쳇! 저기 책장에 꽂힌 책들 보이지? 오른쪽 책장 말이야! 믿을 진 모르겠지만, 저 책들의 저자가 다 나라면 믿겠어? 못 믿겠다면 제일 끝에 꽂혀 있는 타임지와 네이쳐지를 들쳐 봐도 좋아! 그 달의 표지에 내 얼굴이 박혀 있을 테니까! 아! 맞다 당신은 아직 내 얼굴도 못 봤지? 뭐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내가 그 빌어먹을 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는 것 만은 사실이야!”


낡은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선 약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가 내 말에 흥미를 가지고 책장으로 다가가는 듯 했다.


“호오! 진짜인가? 이거 얼간이를 하나 잡은 줄 알았는데, 너 의외로 대단한 놈이었나? 그래서 어떻게 성과는 있어?”
“아니... 아직...”
“쳇! 결국 얼간이에 불과했군!”
“하지만 꽤 성과가 있어! 일시적인 바이러스의 표면 증착이나 한시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항 버이러스 제재는 찾아냈다구...”
“어려운 말 하지 마... 변호사가 되려고 법전은 제법 찾아봤지만, 의학이나 과학쪽은 영 젬병이거든! 쉽게 말해!”
“간단한 임시방편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야”
“흐음... 당장 죽고싶지 않아서 떠드는 거짓말은 아니고? 어디보자 그럼 니 말도 확인해 볼 겸 거리로 끌고 나가 감염자들하고 레슬링이라도 시켜볼까?”
“아니! 그건 안돼! 방금 말했잖아 임시방편일 뿐이라고, 아직은 완벽하지 않아서 결국 접촉후의 피부에서의 최종적인 증식은 막을 수 없어. 다만 조금 느리게 진행시키는 것을 성공했을 뿐이야!”
“뭐야 그럼 쓸모가 없으니까 죽여 버려야겠는데?”


그는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반응하고 당황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포로였고, 그는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현실이고 아마도 기막힌 반전은 쉽게 찾아올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자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당장 중요한 현실적 문제로 넘어가 볼까 연구원 나으리? 아니 타임지에도 나왔으니 유명인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자 이제 니가 그 동안 숨겨두고 야금야금 먹어치운 식료품들이나 어서 꺼내 봐!”


나는 문득 내가 집 뒤편에 커다란 닭장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닭과 칠면조를 키우고 있으니, 당신이 원한다면 그것들을 몽땅 가지고 가도 좋아 라는 농담을 떠올려봤지만, 그것이 그에게 그다지 재미있는 농담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겨우 몇 박스밖에 남지 않았지만, 유통기한이 긴 빌어먹을 콩 통조림은 죄다 지하창고에 쌓여 있었고, 그곳에 있는 것은 콩만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왜 콩 통조림을 지하실이 아닌 다른 곳에 숨겨두지 않았느냐는 자조적인 반성을 해 본다. 내가 포로로 잡히는 이런 사태에 대해 좀 더 빨리 대비책을 세워두어야만 했다. 콩 통조림을 찾기 위해 지하실에 들른 그가 그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해 줄 나의 가족들을 발견한다면 어떤 표정이 될까?
나는 콩과 가족을 그에게 보여준 뒤 가족과 함께 처절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반항하다 홀로 죽은 뒤 얼마 후 굶주림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나보다 조금 더 오래 살다 내 곁으로 돌아올 가족들을 만나는 것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했다.
물론 승자는 나의 숭고한 가족애에 감동한 나머지, 그가 나와 가족들은 고스란히 놔둔 채 콩 통조림만을 가져갈지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이었다.


“너를 곧바로 쏴 죽이지 않길 잘했어, 니가 없었다면, 난 아마 이 지하실로 가는 통로를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감염자들이 언제 튀어 나올지도 모르는데, 동료도 없이 집 안을 샅샅이 살핀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그는 낑낑대며 홀로 쇼파를 치우는 나를 돕기는커녕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약간의 탐욕이 번들거리는 그 눈동자를 가족에 대한 숭고한 나의 사랑이 이길 수 있을까?


“앞장 서... 허튼짓은 생각도 하지 말고 말이야”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그는 끝까지 나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아니 어두운 지하 계단을 통해 내려 가다보니 한층 더 경계하는 듯 보였다.


“잠깐 불을 켤테니까. 그 소리에 놀라 쏘지 말라구!”


나는 나를 위한 경고를 그에게 전달한 뒤, 손으로 벽을 더듬어 버튼을 찾아 눌렀다. 그러자 곧 윙하는 소형 발전기의 둔탁한 진동음과 함께 천천히 불이 켜졌다.


“오... 지겨운 콩 통조림이긴 해도, 제법이잖아? 몇 박스나 있네? 이걸 가져가면 해방단 간부들이 꽤 좋아하겠어! 저건 물인가? 라면까지? 이거 내가 [엘도라도]라도 찾은 것 같은 기분인데?”


만면에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라면의 유통기한이 몹시 짧다는 것 알고 있느냐]고 되물으려 했지만, 혹시라도 그의 기분이 언짢아 질까봐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건 숭고한 가족애로 그를 감동시키는 것, 그리고 그가 나의 가족들의 정체를 알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저 문들은 뭐지? 뭐야 사람이잖아!”
“우워어어어어!!!”


낯선이를 보아서일까? 고요하던 아버지의 방이 가장 먼저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반응하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단단한 철문으로 감금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지만, 고요하던 지하실에 순식간에 4명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자 총을 가졌음에도 그는 꽤 긴장하기 시작했다.


“뭐야! 너! 저 사람들은 다 뭐냐구!!”
“잠깐! 잠깐! 내가 다 설명할께! 얘기나 들어보라구!‘
“젠장! 빌어먹을 감염자들이잖아! 너 미쳤어? 감염자들과 함께 살다니! 혹시 너도 감염된거 아냐! 떨어져! 저리 떨어지라구!!”


고요했던 지하실 안은 둔탁한 자가 발전기 소리와 발광하기 시작한 네 감염자의 포효, 그리고 당황한 외부인 한명의 고성이 울려 퍼져 마치 슈퍼볼 경기장에라도 온 것 같은 소음을 만들어 냈다. 가족들을 진정시키는 것, 당황한 그를 진정시키는 것... 양쪽 다 나에겐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9.


“그러니까... 바이러스 연구원이었는데, 가족들이 감염되서 이 곳에 감금한 채 연구를 해왔다고? 젠장... 코스비 가족(고전 미국 가족 시트콤)보다 더 재밌는 녀석이잖아 너!”
“코스비? 뭐야 그게 난 그런거 몰라...”
“있어 애송이들은 모르는 고전 시트콤, 그나저나 저 철문 앞에 붙어 있는 레바들은 뭐야?”
“워워! 건드리지마, 감염된 우리 아버지하고 마주앉아 체스라도 둘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잡아당기면 바로 문이 열린 다구!”
“걱정마, 체스에는 취미가 없으니까. 용케도 감염된 가족들을 죽이지 않고 놔뒀군? 이거 꽤나 눈물겨운 휴먼 스토린데? 너의 그 쓸모없는 바이러스 연구보단 이쪽이 훨씬 더 감명 깊어!”


변호사 출신이라더니, 다행히 그는 내 가족들을 보고도 금방 냉정하게 흥분을 가라앉혔고,  심지어 이제는 나와 함께 농담 따먹기까지 하는 여유를 보였다. 나를 바라보며 미소까지 지어보이는 그를 보며, 나는 잘하면 그가 나의 기분 좋은 상상처럼 나와 우리 가족들을 내버려 둔 채 가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콩은 잘 먹을께... 한 박스만 챙겨야 겠어”
“정말? 너 보기보다 좋은 놈이구나?”
“저걸 다 가져가봐야 재미 보는 건 해방단 간부 놈들뿐이니까... 남는 건 여기에 잘 숨겨두고, 만약을 대비한 내 비밀식량으로 삼을 생각이야!”
“그 말은...”
“그렇지... 연구원이라더니 너 꽤 똑똑하구나? 비밀 식량이란 건, 목격자나 증인이 없어야 완벽해 지겠지...”
“철문 안에 갇힌 내 가족들은... 어쩔 셈이지?”
“일단은 철문 안에 있으니 안전해 보이지만, 이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들어 올 때마다 철문이 안전하게 잘 닫혀져 있길 기도하며 들어올 순 없겠지!”
“젠장! 조금 전 내가한 말은 다 취소야!”


놈이 총구를 들어 내 가슴팍을 겨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나의 바람은 모두 물거품이 된 듯 했다. 숭고한 가족애가 누군가를 감동시키기엔 너무도 팍팍한 세상이 되어 버렸는데, 난 도대체 무슨 기대를 했던 걸까? 
그때였다.


[치지직...치지지직... 에드... 에드... 대답해 에드!]


그의 품안에서 시끄러운 무전기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해방단 간부들이군! 자 벽을 보고 뒤로 돌아서! 입은 조용히 다물고 말이야, 안 그러면 곧바로 네 가슴팍에 총알구멍이 날 꺼야!”


그는 내가 벽에 붙어선 채 뒤로 돌아선 것을 확인 한 후 무전기를 통해 대화를 시작했다.


“이봐! 무전 함부로 하지 말라고, 근처에 감염자로 있었으면 어쩔 셈이야!”
[치지지직... B팀이 외곽도로에서 피난차량을 발견했다. 대형버스를 개조했고, 32번 국도 끝의 주유소 잔해에서 유류보급중이라고 한다. B팀의 보고에 따르면 식량과 의약품을 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즉시 B팀에 합류해라. 상대는 8명 남짓, 아이와 여자가 포함되어 있으니, 너희와 B팀이면 충분할 거야 탈취해 와라!]
“뭐야? 지난번에도 피난민을 털었는데, 아무것도 없었잖아! 헛수고라고!”
[그건 우리가 판단한다. 너는 지시대로 하면 돼, 해방단에서 쫓겨나고 싶나?]
“젠장! 하지만 샘과 마크가 죽었다구! 여긴 나 혼자야!”
[그래?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C팀과 D팀은 도시 반대쪽을 뒤지러 갔다구, 그들이 B팀에 합류하면 너무 늦어, 즉시 B팀이 있는 32번 국도쪽으로 이동하도록]
“알겠다. 젠장!”


에드라는 사내의 목소리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32번 국도쪽에 차량으로 이동 중인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아마 에드와 B팀이라는 다른 사람들을 시켜 그들에게서 식량과 의약품을 탈취할 생각인 듯 했다. 물론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면, 또 한바탕의 총격전이 벌어지겠지.
지금처럼 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상황에선 언제 일어나도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남자들은 모두 사살당할 것이고, 여자들은 강간, 아이는 총알을 아껴야 하니 칼이나 다른 도구에 뭇매를 맞고 죽어가겠지? 물론 반대의 상황도 가능하다. 어쩌면 그들을 얕보고 달려든 해방단 놈들이 한바탕 총알세례를 받고 죽어가겠지, 하지만 어떤 결과든 지금의 나에겐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난 지금 당장 죽게 생겼으니까...


“젠장! 젠장! 늘 상 이런 식이야! 위험한 곳은 우리를 보내지! 간부 녀석들은 무전기 하나로 이래라 저래라! 결국 죽는 건 우리들뿐이야!”


에드는 꽤 흥분한 듯 보였다. 그의 말을 통해 미루어 짐작하건데, 소위 간부라고 불리 우는 자들은 해방단의 지휘체계를 독차지한 자들로 그들에 의해 해방단의 모든 시스템이 좌지우지 되는 것 같았다. 새로운 멤버를 받아들이는 것도, 누군가를 쫓아내는 것도, 또 죄 없는 누군가를 약탈하는 것도 말이다. 험난한 세상이다. 힘 있는 동료들과 손을 잡거나, 아니면 나처럼 철저하게 숨어 지내야 한다. 바이러스로 인해 난폭해진 세상에 혼자 떨어져 나온다는 건 말 그대로 자살 행위다.
그렇게 에드가 한껏 흥분하여 꺼져있는 무전기를 상대로 거침없는 욕설을 내뱉는 사이 나는 나대로 조금 대담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 물론 에드에게 붙잡히던 순간에도 나를 겨눈 총구를 빙그르르 돌아 회피한 후, 재키 찬처럼 당수 촙을 꽂아 넣는다던지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했던 건 지금도 깊이 후회하고 있다. 그건 그냥 망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는 몹시 흥분해 있고, 나의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는 듯 했다. 왜냐하면 벽을 바라보고 서 있던 나는, 조금 아까부터 슬그머니 벽의 한쪽에 붙어 있는 스위치를 향해 손을 뻗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자가발전기의 전원 컨트롤러와 연결되어 있는 스위치다. 이 곳은 지하실이고, 방음, 방진뿐 아니라 불을 끌 경우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내가 그 스위치를 누르는 즉시 이곳이 완벽한 암흑상태가 된다는 말이다.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에드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일단 첫 번째는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는 것이다. 나야 불이 꺼진다 해도 이 지하실의 구조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니, 이동에 별다른 제한이 없어, 다시 불을 켤 수 있지만, 나라는 위험요소를 앞에 두고 그가 그런 결정을 내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가장 가능성이 높은 두 번째... 바로 눈앞에 있는 나를 향해 총알을 난사하는 것이다. 당장 코앞에 있을지 모를 위험요소를 간단하게 제거하고, 자신의 안전을 답보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후일에 대한 도모까지 가능케 한다. 내가 그였더라도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가장 걱정하는 나의 가족들은 단단한 철문으로 충분한 보호를 받고 있었으며, 내 옆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육중한 자가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다. 불을 끈 후 내가 재빨리 이 충직한 엄폐물 뒤에 숨는다면, 아마도 그의 총알은 높은 가능성으로 빗나가게 될 것이다. 물론 총알을 난사한 이후의 그를 어떻게 해치울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의 총에 맞아 가족과 함께 몰살하는 것보단 백배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손이 떨려온다. 스위치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다. 여전히 그는 흥분해 있지만, 언제 저 흥분이 가시고 냉정하고 경계심 많은 에드로 돌아올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재빨리 손을 뻗었다.


“뭐야! 어떻게 된거야!”


갑작스런 어둠이 찾아오자 예상했던 대로 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탕탕탕! 탕탕탕탕탕!]


역시나 내 예상대로 총알이 난사된다.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십 여발은 족히 발사된 것으로 보아 그는 어느정도 패닉상태에 빠져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 내 몸은 어느 한 곳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에구 이 충직한 자가 발전기 같으니라구... 나는 문득 지난날  아마존을 통해 이 자가 발전기를 구입할 때 가격이 비싸다며 투덜거렸던 나를 반성해 본다. 더 이상 이 것은 자가발전기가 아니다.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탕탕탕!]


다시금 시끄러운 총소리가 밀폐된 지하실 안에 울려 퍼진다. 방향은 여전히 내가 서 있던 쪽인지 총알이 자가발전기의 두툼한 철제 외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아~ 이 얼마나 숭고한 희생인가? 나에게 충분한 전기를 공급해 주던 이 녀석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 되었지만, 어쩌면 이것이 그가 태어난 사명을 수행하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겠다.


[탕!]
“으악!!!”


또 한 번의 총소리, 그리고 들려온건 단발마의 비명이였다.
내 것이 아니니, 아마도 에드의 비명일 것이다. 총을 든 것은 그일텐데, 왜 비명을 지른 것일까? 지어낸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사실적인 것으로 보아, 나를 속이기 위한 거짓은 분명 아니다. 


[설마?]


지금 이 순간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다. 그는 좁은 공간에서 무턱대고 총알을 난사했고, 그가 쏘아낸 총알 중 하나가 배덕하게도 어딘가의 단단한 곳을 맞고 튕겨져 그에게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마치 자신이 태어난 곳을 향해 되돌아가는 힘찬 연어떼 처럼!


“으으으으... 제길!”


에드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그가 털썩 주저앉는 듯 한 소리도 들려왔다. 분명 연기가 아니다. 머리나 심장을 맞았다면 심음소리조차 내지 못했을 거고, 팔이나 어깨를 맞았다면 주저앉을 이유가 없다. 허벅지나 종아리, 아니면 영 좋지 못한 곳중 한 군데에 맞은 것이 분명했다. 이로써 그는 시야뿐만 아니라 신속한 이동능력까지 잃어버리게 됐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다. 아직도 그는 총을 가지고 있고, 그의 두 팔은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까!


“어딨어 이 빌어먹을 놈아! 으... 내 다리...”


역시 다리를 맞았다. 그는 아마 지금쯤 한층 더 극심한 패닉상태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경계심이 많은 에드였는데, 시야가 확보되지 않고, 다리까지 다쳤으니 그것은 훨씬 더 심해질 것이다. 
나는 이제 남은 명제들을 중심으로 이 난국을 타개할 최종적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그는 내가 보이지 않고, 다리를 가쳤으며, 몹시 긴장된 상태다. 내가 그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익숙함이란 탐지계를 통해 보지 않고도 지형지물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비해 이동에 유리한 두 다리, 마지막은 명석한 두뇌, 음... 애석하게도 이것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을 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총...
저것을 해결해야 활로가 열린다. 내가 가진 장점들을 모두 상쇄하고도 남는 저 잔인한 살상무기를 먼저 무력화 시켜야 한다. 


[좋은 방법... 총을 빼앗거나, 못 쓰게 만들 수 있는 방법... 젠장! 또 쏴대다가 튕겨나간 총알이 그의 머리통을 뚫어주면 간단한 건데... 아 맞다! 그렇지!]


순간 기막힌 방법이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총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그가 가진 총을 빼앗을 필요는 없었다. 그냥 계속 갈기게 하면 되는 것이다. 방금 전 생각한 것처럼 또 튕겨나가 그의 머리통을 박살내주면 더 좋겠지만, 생각해보니 그건 어쩌면 낮은 확률로 나를 향할 수도 있었다. 또 나를 튼실히 막아주고 있는 이 자가발전기가 뚫려 버리기라도 하면 난감하다. 최대한 나와 거리가 먼 곳... 아무 상관없는 곳으로 총알을 난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처음 나를 사로 잡았을 때의 조심스러운 그였다면 이것은 조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나, 지금의 그는 극심한 패닉상태에 빠져 있다.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그는 위협을 느낄 것이다.
나는 어둠속에서 바닥을 더듬었다. 다행히 무언가 작은 것들이 손에 잡혔다. 볼트와 너트 같은 것들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기계 부품일수도 있었다. 나는 시험 삼아 그것들 중 작은 하나를 나와 조금 떨어진 한쪽 구석에 던져보았다.


[탁]
[탕탕탕!! 탕탕탕탕!!]


역시나 여지없이 총알 세례가 날아든다. 그는 아마도 나를 기필코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좀 더 많은 그것들을 벽 한쪽으로 던진다. 


[타타탁]
[탕탕탕! 탕탕 탈칵!]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총알이 떨어진 것이다.


“이... 이런! 젠장!”


당황한 에드의 목소리가 완벽한 확증을 준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익숙한 동작으로 자가 발전기를 피해 계단을 향해 뛰었다. 그는 총알이 떨어졌고, 다리가 불편하니 나를 잡을 수 없고, 나는 재빨리 위로 올라가 위쪽에 놔둔 산탄총을 가져올 심산이었다. 혼잡한 세상에서 결국 믿을 건 총 뿐이다. 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해 보지만, 사실은 다리를 다친 사람이라곤 해도, 맨몸의 육탄전엔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빌어먹을 자식! 어디가는거야!”


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에드가 황급히 소리치지만, 이미 늦었다. 나의 두 다리는 어느새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만약 그에게 예비 탄창이 있다하여도 재장전 후 발사하기도 전에 나는 안전한 위쪽으로 이동한 후 일 것이다. 


“젠장!!!”


분노한 에드의 고함소리가 위쪽까지 들려왔다. 내가 잠시 동안 그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의 그 고함소리만을 듣고 그가 감염자일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여깄었구나! 반갑다. 내 총!”


나는 재빨리 산탄총을 품에 갈무리 한 후 서둘러 지하실로 들어가는 통로 앞에 섰다. 이제 상황은 200% 역전됐다. 반전, 대 반전! 인생은 역시 한판 뒤집기가 있어 흥겹다. 나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사 그가 추가 탄창을 가지고 있더라도 유리한 쪽은 무조건 나다. 그는 어둠속에서 정확히 조준을 해야 하지만, 내가 가진 산탄총은 그 고유한 특성상 탄알이 전방위적으로 퍼져나가기 때문에 별다른 조준이 필요 없다. 한정되고 좁은 공간에선 사거리나 관통력, 연사능력 따윈 의미가 없다. 
일발필살! 나는 지난날 총포상에서 이 녀석을 구입할 때 보인 나의 혜안을 또 한 번 칭찬해 본다.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지하 통로로 향하는 문을 살짝 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문을 활짝 열고 나를 쏴주세요 하고 들이댈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는 어둠속에 있고, 문을 연다는 건 빛이 새어 들어간다는 것이니 상대방의 출현 여부는 지하의 에드가 유리했다. 하지만 문을 살짝 열고, 그 안으로 총구만을 들이밀어 쏴버리는 데에는 상대가 누구든 당해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생각으로 조심스레 지하계단의 문을 열었다.


“날 쏴버릴 생각이겠지?”


에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곧 내가 죽여야 할 대상과 대화를 나눈다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은 아니었지만, 오지랖 덕분인지, 아니면 그 역시 내게 총을 겨눈 뒤 바로 죽이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서인지 나는 그의 질문에 친절히 대답했다.


“물론... 당신도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렇지... 이를테면 뿌린대로 거둔다 이건가?”
“미안해! 하지만 나도 어쩔 도리가 없어”
“내려와... 내려와서 이야기하지... 아까 들었듯이 이미 난 총알을 모두 소진했어”
“안돼 네 말을 믿을 수 없어, 추가 탄창이 있을지도 몰라.”
“그래? 이럼 어떨까!”


에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단위로 무언가 길다란 물체가 금속성의 충돌음을 내며 떨어진다.


“거기선 빛이 새어 들어오니까 보일 거야 잘 봐! 내 총이야”


그의 말대로 계단에는 그의 총이 떨어져 있었다.


“어째서 총을 버린 거지?”
“어차피 총알도 떨어졌고, 총알이 없다면 그건 그냥 쓸모없는 쇠막대기에 불과해! 그것보다 나는 너와 협상을 하고 싶어”
“협상? 내가 거부한다면?”
“그럼 나도 최후의 방법을 강구해야 하겠지!”


에드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했다. 나는 도무지 그와 내가 왜 협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지만, 이것은 어쩌면 그의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르니 이야기 정도는 들어주자는 생각을 했다.


“너에겐 나와 협상을 할 만한 카드가 없을텐데?”
“아니... 니가 위로 올라가고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있다 보니, 나도 좋은 카드를 한 장 뽑았어, 그런 경우 있잖아? 포커에서 마지막으로 카드 한 장을 체인지 했는데, 운 좋게 스페이드 에이스가 나와서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를 완성하는 그런 거!”
“다리도 다치고, 총알도, 총도 더는 없어,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네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나오는 패가 아니야. 아마 포커판에서 그걸 볼 수 있는 확률은 250만분의 1정도 밖에 안 될 껄? 왜! 그 안에서 방탄 탱크라도 발견한 거야?”
“흐흐흐 재밌는 농담이야 아마 밖에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꽤 재밌는 포커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쉬워... 네 말이 맞아, 내가 들고 있는 패는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아닐지도 몰라, 그거였다면 이렇게 협상을 구걸하지도 않았겠지, 그런데 말야? 포커란 늘 최고의 패만을 가지고 겨루는 게임이 아니야, 이건 지극히 상대적인 게임이지. 똑같은 원 페어라도 상대방보다 높은 숫자만 들고 있으면 판돈은 그의 차지가 되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글세? 왜 자꾸 나는 무늬도 숫자도 모두 내가 위라는 생각이 들까?”


나는 자신만만했다. 사실 평소 포커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상대방의 패가 무엇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그는 블러핑(낮은 패로 높은 패인 것처럼 속이는 행위)을 하고 있다. 자신이 괜찮은 패를 쥐고 있는 것처럼 자신만만해 하지만, 막상 까보면 굉장히 하찮은 숫자들을 가지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에 대학 룸메이트였던 찰스가 가르쳐준 블러핑을 간파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것은 매우 간단했다. 내가 가진 돈을 한 방에 박아 넣는 것이다. 상대방이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허풍장이는 지레 겁을 먹게 마련이다. 


“미안! 내가 죽여야 할 상대와 길게 대화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못할 짓인 것 같아! 네 카드는 저승에서 다시 만나 확인하도록 하자. 네가 탈 기차는 아무래도 곧 출발할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안녕!”


나는 열려진 작은 틈 사이로 산탄총의 총신을 짚어 넣었다. 
All or Nothing!
죽든지 살든지, 결론은 하나뿐이다. 허풍선이에게 이보다 더 강력한 배팅은 없을 것이다.


“잠깐! 잠깐 기다려! 내 말 좀 들어봐! 쏘지 말라구! 어두워서 보이지 않겠지만, 내가 지금 손으로 무얼 붙잡고 있는지 알면 너도 깜짝 놀랄거야! 응?”


나는 도통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방아쇠 위에 손가락을 얹어 놓은 채 마지막으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나의 심드렁한 대답에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나는 그의 대답을 전혀 들어줄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 있었다.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반전의 쇠망치가 나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이 레바! 니가 말했잖아! 잡아당기면 곧장 문이 열린다구 말이야! 난 이 철문을 열어버릴 생각이야 그것도 동시에 두 개나! 산탄총으로 내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 없으니, 아마 네가 총을 쏜다 해도 문을 열리고 말겠지! 생각해봐 얼마나 짜릿해?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들과 살을 부비며 재회하는 거야! 나는 산탄총으로 쏴 죽일 수 있겠지만, 밖으로 튀어나갈 네 가족들에겐 그럴 수 없겠지! 어때? 내 마지막 카드가!”


250만분의 1...
내 눈 앞에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전의 반전, 나는 힘없이 지하계단으로 이어진 문을 열었다.




9.


“좋아... 총은 문 앞에 내려놔, 그리고 너는 천천히 내려오도록 해”


에드가 웃으며 나를 반긴다. 그의 손은 여전히 철문 개폐장치의 레바 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총을 계단 위쪽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후 터벅터벅 아래로 내려왔다.


“좋아 이젠 어쩔 거야? 나는 총을 내려 놨지만, 넌 그 레바를 당기지 못 할 거 아냐! 내 가족들이 밖으로 나오는 순간 너 역시 감염자가 될 테니까 말이지!”
“아직 상황이 나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건 나도 인정해, 다리를 다친 나로서는 아무래도 너와 싸우기 힘들테니까 말이지. 그래서 나는 너에게 협상을 하자고 한 거야!”
“협상? 이 상황에서 어떤 협상을 하자는 거야!”
“일단 내가 먼저 지금 상황을 고백할게, 먼저 말하지만 화를 내진 않았으면 좋겠어”
“무엇에 대해 말이지? 네가 나를 포로로 잡았던 것? 나와 가족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 아니면 내 콩 통조림들을 혼자 차지하려고 했던 것?”
“하하하 그건 뭐 이미 지나간 일들이잖아! 그런 것에 연연했다간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기는커녕 제일 먼저 작아 먹히고 말꺼야! 아까 네가 불을 껐을 때였어, 평소의 나는 제법 냉정한 편이지만, 생판 모르는 지하실에서 완전한 암흑 상태가 된다는 건 꽤나 당혹스러운 일이었지, 그래서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몰라.”
“뭐가?”
“총을 쏘는 내내, 그리고 다리를 다쳐 주저앉는 순간에도... 나는 무전기를 켜고 있었지. 그 말은 즉 방금 전의 총격전이 미소해방단의 간부 놈들에게 모조리 송신되었다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그래! 곧 놈들이 이곳으로 들이 닥칠꺼야! 해방단의 간부들은 군인 출신이야! 특수부대 교관이었던 놈도 있지, 그들이 몰려온다면, 너와 네 가족의 생명은 아마도 보장하기 어렵겠지...”


총을 내려 놓은 나, 다리를 다 친 채 잠금 레버를 붙잡고 있는 그...
나는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진 적어도 그와 내가 완전한 호각세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단순히 해결 불가능한 대치상태가 오래가겠구나 라던 나의 생각은 또 다른 반전에 당혹스럽기만 했다.


“젠장! 널 죽여버리겠어!!!”
“워워! 잠깐! 잠깐! 진정해! 그렇게 서둘러 계단위로 올라갈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그건 네가 산탄총을 가져온다고 해도 해결될 문제는 아니야. 나도 조금 전에 무전기의 배터리를 빼버렸고 말이야!”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이제와서 뭘 어쩌자고! 네 동료들이 몰려온다면서!”
“동료? 누가? 간부 놈들이 내 동료라고 누가 그래! 그냥 그 놈들은 우리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서 이용할 뿐이야! 아까도 들었잖아. 교전지역에 나를 내몰려고 했던 것. 그들은 제 몸뚱이를 지키기 위해 식량 수집에도 나서지 않아. 우리가 확보한 식량도 모두 압수하여 죽지 않을 정도만 배급하지! 그들에게 난 그저 대체 가능한 소모품에 불과하다구! 거기다 봐! 이 다리를... 난 의사가 아니라 확신할 순 없지만, 당장 치료를 받지 못하면 아마 걷지 못하게 될 꺼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필요 없어진 소모품이 어떻게 되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꺼라고 믿어”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의 말은 모두 납득이 됐지만, 상황은 또 다시 반전된 것이다. 나는 어쩌면 상당시간 동안 나의 가장 치명적인 적이었던 그를 동료로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날 도와줘. 그럼 나도 널 도울게”
“너를 어떻게 믿지?”
“자 봐... 이 다리가 증거야. 난 이제 니 도움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해. 그 놈들한테 가도 죽고, 니가 날 버려도 죽어, 하지만 뭐랄까? 그 놈들은 100% 나를 죽일 테지만, 넌 어쩌면 나에게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네가 아직까지도 네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에 마지막 배팅을 하기로한거지!”


약간의 고민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내가 도출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당장 닥쳐올 난국을 타개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 그 이후의 일은 그때가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어때? 승낙인가?”
“좋아. 하지만 확실히 해두겠어... 넌 내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널 계속 부양할 순 없어. 너도 봤다시피 식량은 한정되어 있고,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일단은 승낙이란 얘긴가? 좋아, 좋아! 나도 생면부지의 너에게 계속 얹혀 지낼 만큼, 낯짝이 두꺼운 인간은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아. 일단은 다리를 치료하고, 거동이 가능한 시점까지만 네게 신세를 질 생각이야. 이후엔 나도 어디론가 떠나야겠지. 자 그럼 동료가 됐으니까 이름이나 물어보자”
“이청연”
“아... 일본인이 아니었군?”
“많이 듣는 소리지...”
“좋아. 나의 첫 번째 중국인 친구! 그나저나 자네 가족들은 언제쯤 잠잠해지는 거지?”


그는 문 뒤의 가족들이 우리의 소동으로 인해 날뛰는 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냉소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그에게 친절히 말해주었다.


“일단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고, 몇 시간정도 걸릴꺼야!”
“그래? 그럼 큰일인데?”
“뭐가 말이지?”
“위기를 타개할 방법 말야... 내가 조금 전 구상해 둔 것이 있거든...”


에드가 구상한 위기 타개책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무전을 들은 해방단 간부들은 다른 식량 수집조 또는 간부들 스스로 직접 이 곳을 찾아 올 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산탄총을 가지고 2층에 숨어 있고, 에드는 이 곳 지하실에서 그들을 유인한다. 그들이 지하로 모두 들어오면, 나는 재빨리 2층에서 내려와 지하실에 산탄총을 마구 쏴 좁은 공간에 모인 그들을 한꺼번에 격멸하는 것이다. 물론 에드의 말에 따르면 그런 유인 작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자신의 안전을 답보했으면 하고, 그는 그 방안으로 내 가족 중 한 명을 다른 방에 감금하고, 자신이 그 철문 뒤에 숨어 있겠다고 했다.


“안돼! 어차피 안돼. 그걸 위해서 언제 분노할지 모를 내 가족 두 명을 한 곳에 몰아넣어 싸우게 만들 수는 없어!”
“그렇군! 아쉽지만, 나도 다 부숴진 저 자가발전기 뒤에 숨을 생각은 없는데 어쩌지?”
“좋아! 좋아! 알았다구! 그 방법을 쓰면 되니까. 별 문제 없겠지 뭐”


나는 곧장 2층의 연구실로 갔다. 그 곳에는 종종 가족들을 잠재우기 위해 사용하는 수면가스 제조 성분이 보관되어 있었다.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것을 지하실의 가스 분출기에 추가로 충전한 후 늘 그렇듯 가스를 이용 가족들을 먼저 재울생각이었다. 물론 잠든 뒤엔 안전장갑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 곳에 모셔, 에드가 숨을 수 있는 안전장소를 마련할 것이다.


“그렇군... 언제 공격받을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가족들을 계속 보호할 수 있었던 건, 그 수면가스 덕분이군? 머리가 꽤 좋은데?”
“시끄럽고, 내가 아버지를 옮기는 걸 도와줄 생각이 없다면 입 닥치고 있으라고!”
“미안 미안! 보시다시피... 다리가 이 모양 이 꼴이라서 말이지? 누구 때문에 말이야!”


나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에드 역시 배배꼬인 어투로 대답한다. 과연 이 동맹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궁금할 지경이다.


“좋아! 그럼 나는 저쪽 끝 방에 숨어 있으면 된다 이거군? 뭐 주의사항이라든가 그런건 없어?”
“거기 깔아둔 비닐 밖으로 나가거나, 벽에 몸을 기대거나 하진 마, 이 바이러스가 사물이나 물체에서 생존해 있다가 피부로 옮겨오진 않는 거 같지만, 뭐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친절한 조언이군, 좋아 난 이 안에서 꼼짝 않고 소리만 지를꺼야! 그나저나 여기 정말 잘 꾸며 놨는데? 그 계단 쪽에 있는 길다란 줄을 잡아 당기면 각각의 방으로 아까처럼 이 수면가스가 분출되는 거지? 후아~~ 근데 이 가스 혹시 몸에 안 좋은 거 아냐? 뭐 가족에게 쓰고 있는 것이니 그닥 해로울 것 같지는 않지만 말야. 후우~ 냄새는 정말 형편없군.”


에드는 아직 철문 안쪽의 방에 남아 있는 희뿌연 잔존가스를 손으로 헤집으며 투덜거린다.


“걱정마 오늘처럼 자주 마시지만 않으면, 특별한 부작용은 없으니까... 그리고 부작용이란 것도 결국엔 중추신경계가 이 가스에 적응해서 소량으론 효과가 없다 뭐 그 정도니까”
“마치 마약과도 같은 거군... 양을 점점 늘려야 되지... 마치 저 미소해방단의 빌어먹을 간부들처럼 말야... 그들은 계속 더 많은 피를 원해! 그리고 더 많은 음식과 여자도... 소모품은 즉시 처분하지만...”


에드의 목소리에선 약간의 회한이 느껴졌다. 그는 해방단에 있는 동안 도대체 어떤 일들을 겪었던 걸까? 약간의 궁금증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을 보니 물어봐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아마도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야만스러운 행위들 중 몇 가지 일 테지? 문득 진득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간다. 과연 난 그런 잔혹한 야만인들에게 맞서 싸우고, 또 이겨낼 수 있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지금은 그저 믿고 또 믿을 뿐이다.


[쿠르르르릉 쿠르르르릉]


한층 더 시끄러운 디젤 자동차의 엔진 배기음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곧 이어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전에도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곡이다.
[롤링스톤즈의 ‘Paint it black’] 


[I see a red door and I want it painted black,
빨간 문이 보여, 그 문을 검게 칠해 버리고 싶어

no colours anymore I want them to turn black.
다른 색깔은 필요 없지, 모두 검은 색으로 바꾸고 싶어

I see the girls walk by dressed in their summer clothes,
여름 옷을 입고 지나가는 소녀들이 보여

I have to turn my head until the darkness goes.
어둠이 지나갈 때 까지 난 고개를 돌리고 있어야 겠어

I see a line of cars and they're all painted black,
한 줄로 늘어선 차들이 보여 그 차들은 모두 검은 색이야

with flowers and my love, both never to come back.
꽃과 나의 사랑을 보냈지만,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운명이 되어 버렸어

I see people turn their heads and quickly look away,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사람들이 보여

like a newborn baby it just happens every day.
그건 마치 매일 누군가가 태어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돼버렸어

I look inside my self and see my heart is back,
내 자신을 들여다 봤어 그리고 내 마음이 검다는 걸 알게 됐지]


노래 가사처럼 검게 칠해진 인간들이 몰려온 것이다. 흥겨운 리듬과 달리 구슬픈 선율이 밀려온다. 마치 그 옛날의 영화 속 베트남에라도 온 것처럼 음악 뒤로 시끄러운 총성이 섞여 한층 더 구슬프다.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고 있다. 먹지 못하는 생물을 사냥하는 유일한 종족... 그 종족의 잔혹한 노래가 들려온다. 하지만 나에겐 맘 편히 음악 감상이나 하고 있을 여유 따윈 없다. 에드가 눈빛으로 신호를 준다. 잠복을 위해선 서둘러 산탄총을 집어 들고 2층으로 향해야 한다.


[음악 꺼! 대충 이 근처는 정리 된 것 같아! 바퀴벌레 같은 자식들! 죽여도 죽여도 어디선가 또 기어나온다니까!]
[마크가 타고 나간 차가 여기 있어!]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부 놈들이군... 우리는 늘 3인 1조로 움직이니까, 딱 한 방이면 될 거야. 행운을 비네”


에드가 나를 보며 웃어 보인다. 신의 은총을 이라는 말보다는 훨씬 듣기 좋은 표현이다. 나는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봐 에드 궁금한 게 있는데...”
“뭐지?”
“저 음악은 누가 선곡 한 거야?”
“왜?”
“누군지 꽤 괜찮은 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마워”
“뭐가?”
“괜찮은 놈이란 칭찬!”
“쳇 너였구나!”
“간부놈들을 잘 해치우면, 그 칭찬 너에게 돌려 줄게... 지금도 꽤 괜찮은 녀석인 거 같지만 말야”


에드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는 스멀스멀 몰려오는 민망함을 이겨내기 위해,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뛰어 오른다. 


“젠장!! 이것 봐! 여기야!”
“빌어먹을! 마크 아냐! 샘도 여기 있어! 어떻게 된 거지?”
“모르겠어! 에드 그 개자식도 무전을 안 받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이 안에 감염자라도 있는 거 아냐?”
“아니야 감염자가 있다면 조금 전 시끄러웠을 때 뛰어 나왔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기색은 없었어...”
“일단 들어가 보자구!”


사내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꼭 잡은 산탄총의 총신을 통해 냉랭한 기운이 뺨을 스며온다. 
시끄러운 총소리와 함께 문이 박살나는 소리도 들려왔다. 누군가에 의해 창틀이 부서진 채 떨어져 나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깨진 유리가 발에 밟혀 으스러지는 소리, 삐걱이는 낡은 마루 바닥의 소음, 깨진 창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소리...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어이!!”


그 사이 친근해진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에드였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2층까지 전해진다. 


“에드 도대체 무슨 일이야!”
“감염자가 있었어! 마크와 샘은 그들에게 죽었고, 하지만 걱정 마! 내가 이미 그들을 해치웠으니까!”
“뭐야! 헌데 무전은 왜 안 받았어?”
“싸우는 통에 무전기가 박살났지 뭐야! 이리로 좀 내려와 줘, 감염자가 쏜 총에 다리를 맞았지 뭐야! 도저히 기어 올라갈 수가 없어!”
“그 빌어먹을 어두컴컴한 지하실엔 도대체 왜 들어 간 거야? 분명히 32번 국도쪽으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잖아! 젠장! 시끄러운 네 무전기 소리가 산통을 깨어놓는 통에 B팀은 전원 몰살 당했다구! 그 놈들도 차를 타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미안! 어쩔 수 없었어! 여기서 먹을 것을 좀 발견 했다구!”
“그게 정말이야?”
“그래 어서 내려와서 이걸 가져가고 나도 꺼내줘! 요쇄로 돌아가서 조금 쉬어야 겠어!”


미끼가 된 에드의 언변은 훌륭했다. 군더더기도 없었고, 이유, 당의성, 그리고 표현력까지 만점짜리 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나는 2층에 숨어있는 통에 그들이 어디쯤에 있는지, 몇 명이나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안토니오, 하비에르, 프란시스코! 니들 맞지? 호오 좋아! 세명 다 왔구나! 어서와 나를 좀 부축해줘! 이 빌어먹을 지하실에서 어서 나가야겠어!”


아니나 다를까, 영리한 에드는 어둠속에서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세명 다 왔구나’라는 말로 나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준다. 


“먹을 것은 어디있지?”
“나를 좀 먼저 부축해줘”
“닥쳐 먹을 것이 어디있냐니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겠지만 저쪽 끝에 맛좋은 콩 통조림 박스가 있다구!”
“정말이야? 이봐 프란시스코! 전등을 좀 비춰봐 먹을 것이 보이는지 말이야”


지하실을 통해 각기 다른 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의 작전은 완벽하다. 이제 살금살금 마치 못된 도둑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계단을 내려가 문틈으로 총을 들이 민 후 쏴버리면 끝나는 것이다. 만약의 생존자를 위해 여분의 총알을 두 개나 주머니에 박아두었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된다. 실패는 곧 죽음을 뜻한다. 나 그리고 에드, 또 나의 가족들... 나는 이것이 나의 최후의 싸움이 되기를 기원하며,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삐그덕, 삐그덕]


조심한다고 했지만 아주 작은 삐걱거림이 느껴진다. 하지만 괜찮다. 지하에서 열심히 떠들어 대고 있는 그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는 아니다. 게다가 그들이 알아차릴 때 즈음엔 나의 산탄총이 불을 뿜을 것이다.


“역시 나를 먼저 부축해주는 녀석은 없군? 내가 다리를 다쳤으니, 날 놔두고 먹을 것만 가져갈 셈이야 그렇지?”
“시끄러워! 허튼짓 하지마! 프란시스코의 총이 널 겨누고 있으니까 말이야! 지금 앉아있는 그 구석방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있으라구! 이봐 정말인데? 여기 콩 통조림 박스가 있어, 며칠은 식량걱정 없겠어! 맛은 더럽게 없지만”
“좋아 나는 이걸 차로 옮길게!”


비열한 대화가 오고간다. 에드는 그의 예상대로 그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았다. 어딜봐도 그들의 대화엔 에드를 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롤링스톤즈의 노래 가사처럼 검게 칠해진 사내들이다. 나는 그들을 다시 붉게 칠하기 위해 지하 계단 안쪽으로 총을 내밀었다.


“감염자는 아닌가보지?”


냉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등 뒤다. 고개를 돌려보려 했지만, 총의 개머리판 같은 것이 날아와 내 목덜미에 꽂힌다. 


[우당탕탕탕!]


시끄러운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강한 충격을 받고 계단으로 굴러 떨어진 내가 만들어낸 소리다. 어두운 가운데 작은 손전등하나가 내 얼굴을 향해 빛을 쏘아낸다.


“젠장! 안토니오, 하비에르, 프란시스코 너희 셋이 한조가 아니었던가?”
“안녕 에드!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아까 32번 국도 때문에 오늘은 불청객인 내가 끼어버렸네? 명색이 해방단 지도자인데, 큰 건수 때마다 빠져서야 위신이 안서서 말이지? 안녕 처음 보는 친구 반가워! 난 해방단 지도자 잭이야... 재키라고 불러도 좋아! 얼마나 오래 보게 될지는 모르게지만 말이야! 흐흐흐흐”


음흉한 웃음소리가 지하실 안으로 울려 퍼진다. 계단을 굴러 떨어지면서 어깨 죽지가 찢어졌는지 시큰하면서 뜨끈한 액체가 흐른다.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은 목덜미는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아파온다. 하지만 어느새 꼬일 대로 꼬여버린 상황을 떠올리면 마냥 불평불만만 하고 있을 새는 없다. 최악의 상황에 접어들었다. 어두워 보이진 않지만 에드의 표정 역시 잔뜩 찡그려 있겠지? 방법을... 이 참담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10.


“이게 그건가?”


해방단의 지도자 잭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는 프란시스코라 불린 중남미 계열의 사내가 가져온 현미경으로 내가 실험했던 시료들과 실험노트를 번갈아 바라본다.


“잭 여기 있는 콩 통조림들 바깥의 차에 실어 놓을까?”
“하비(하비에르의 약칭)지금 그게 문제가 아냐. 보라구! 우리가 놀라운 것을 찾아냈어. 이 봐 너! 이게 정말 사실인가?”


잭이 나를 보며 말한다. 진득한 호기심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그가 내 이마에 권총을 들이대고 있지만 않았다면, 나는 좀 더 친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설명을 해줄 수 있으련만, 사실 그렇게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사실입니다. 일시적인 바이러스의 증착 및 피부세포에서의 증식은 막을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습니다. 아직은 완전하지 못하지만, 바이러스를 정복하는 것이 꼭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좋아! 좋아! 이건 어쩌면 굉장한 무기가 될지도 모르겠어! 이봐 하비에르, 안토니오! 이놈도 차에 실어야겠어!”
“예? 이 노란 원숭이를 해방단으로 데려 가시겠다구요? 이 콩을 싣고 나면 남는 자리도 없다구요!”
“그래? 자리야 만들면 되지!”


[타앙!!]


시끄러운 총소리가 지하실 안을 정신없이 울려댄다. 


“으아악!!! 으... 내 다리... 내 다리...”


연이어 들려온 비명소리,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지 않아도, 누가 총에 맞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어쩌나? 남은 다리마저 못 쓰게 됐네? 뭐야 그럼? 쓸모가 없겠네? 식량이나 축내는 좀벌레를 차에 실을 순 없지 안그래?”
“흐흐흐 맞아요. 잭! 게다가 저 놈은 배신자 아닙니까! 벌을 주는 게 맞지요”
“아니야! 아니야! 나도 어쩔 수 없었다구! 저 놈이! 저놈이 시킨거야! 저 놈이 산탄총으로 날 위협해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원해서 배신한 게 아니라구!!”
“정말인가?”


에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협상, 그리고 제안 모두 에드가 먼저 제시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냥 굳게 입을 다물었다. 만약 내가 에드의 입장이라도 죽음이라는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못할 말이 뭐가 있을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잠시나마 동료였던 그에대한 나의 마지막 존중이라고 생각했다.


“살려줘! 지난 1년 동안 너희들이 시키는 거라면 뭐든 했잖아! 여자도 잡아오고, 몇 사람을 죽였는지 몰라, 시.. 식량도 열심히 찾아 다녔다구! 이 봐 하비에르! 기억 안나? 내가 발견한 레토르트 카레를 보고 기뻐했잖아! 안토니오! 나 나을 수 있다구! 다리만 나으면 더 열심히 먹을 것을 찾을게! 잭! 제발! 제발 내게 한번만 기회를 줘! 응? 제발 살려줘!”


에드의 간절한 애원이 들려온다. 그는 피로 물든 자신의 두 다리도 돌보지 않은 채 돌바닥을 기어 나오며 외쳤다. 나는 당연히 잭의 입에서 냉정한 거절의 말이 나올 것이라 짐작했지만, 의외로 잭은 부드러운 말투로 잭을 달래듯 말했다.


“그래 에드! 그건 내가 잘 알지, 넌 멍청한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제법 영리한 녀석이었어, 나는 너를 좋아했지, 그게 니가 오랫동안 우리 해방단에서 일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지, 나는 지금도 너를 무척 좋아해, 걱정하지마, 다리를 다쳤다곤 해도 우린 널 죽이지 않을꺼야!”
“정말? 정말이지 잭? 고마워! 나 이 다리만 나으면 더 열심히 할 거야! 여... 여자도 잡아오고, 전투상황이 되면 가장 먼저 앞장 설거야! 고마워 고마워... 흑흑... 고마워...”


에드는 연신 눈물을 쏟아내며 잭에게로 기어왔다. 그리고는 감격에 겨운 표정을 지으며, 그가 신은 군화위에 거듭 입을 맞췄다.


“잭! 정말이야? 정말 저런 기생충 같은 놈을 살려둘 생각이야?”
“우리를 위해 고생한 동료를 죽일 수야 있나! 배신에 대한 의혹도 있고, 꽤 오랫동안 식량이나 축내겠지만, 그런 짓을 해서야 지도자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지! 그에게 총을 겨누지마 하비! 그는 우리의 동료였잖아! 오늘 낮의 32번 국도에서처럼 에드에게도 기회를 주자구! 흐흐흐”
“아... 32번 국도에서처럼? 크크크크 뭐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고마워 잭... 고마워...”
“자 하비 여기 이 동양인 놈은 니가 끌고 올라가, 프란시스코와 안토니오는 콩 통조림을 싣고, 서두르자고! 감염자가 언제 또 나타날지 몰라!”


에드는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려댔다. 비록 그가 배신행위에 대한 원인으로 나를 지목했지만, 나로서도 그의 입장을 이해하기에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한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드에게도 에드의 사정이 있듯, 나에게도 나만의 사정이 있지 않은가!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잭이란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제 가족들은... 제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제 가족들을 데리고 가게 해주세요!”
“네 가족들? 혹시 저기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감염자들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내 말을 들은 잭은 약간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봤다. 약간의 불쾌함과 곤혹스러움이 뒤 섞인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가 에드에게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를 나에게도 보여주길 바랐다. 만약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위해 연구하고, 에드처럼 그의 군화에 입을 맞출 각오가 되어 있었다.


“너 혹시 착각하고 있나본데...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야. 나보고 앉음뱅이가 되게 생긴 버러지하고, 너 같이 냄새나는 동양인을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감염자를... 그것도 넷이나 데려가라구?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딜이 통할 것 같아? 난 그저 니가 도움이 될까 해서 끌고가려는 것 뿐이야. 너에게 협상이나 제안을 할 권리 따윈 없단 말야!”
“그래 리! 감염자들까지 데려간다는 건 말도 안된다구! 맞아요 잭!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어느새 다시금 잭의 충직한 개(?)가 되어버린 에드가, 조금 전의 곤경 따윈 모두 잊은 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약간이나마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안타까워했던 나의 마음에 약간의 후회가 밀려온다. 이미 한 번의 변절, 그리고 다시 맞닥뜨린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씁쓸한 마음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저기... 안토니오, 미안하지만 콩 통조림을 싣기 전에, 혹시 차에 가서 압박 붕대나, 항생제를 먼저 가져다주면 안 될까? 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말이야!”


나와의 교전 속에서도 당당함과 신중함을 잃지 않던 에드가, 어느새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향해 꼬리를 흔든다. 하지만 에드를 바라보는 그들의 표정은 너무도 밝고 환하다. 마치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한 가려운 표정이다. 결국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 만 그들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깔깔대며 웃다 겨우 말문을 열었다.


“압박붕대, 항생제, 그거 가지고 되겠어? 박힌 총알도 빼주고, 좋은 음식과 여자도 붙여줄꺼야! 하하하하 않그래 잭?”
“그렇지... 우리의 동료였던 에드 마네스를 위해 우리가 못해줄 게 뭐가 있겠어! 다 주자구! 다! 하지만 이걸 어쩐다? 차는 4인승이고, 안토니오, 하비, 프란(프란시스코의 약칭)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 타면 자리가 없는데... 이봐 하비! 트렁크에 혹시 자리가 좀 있나?”
“아니! 저 냄새나는 동양인 놈과 녀석의 콩을 싣고 나면 여분이 없을 것 같은데?”
“들었지 에드? 넌 우리의 동료야 우린 절대 널 죽이지 않아! 공교롭게도 오늘 낮 32번 국도의 B팀 때도 그랬지, 거기서도 알렉스가 그만 너처럼 다리에 총을 맞았지 뭐야? 오늘은 아무래도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인 것 같아, 하지만 우린 그를 죽이지 않았어, 다만 그에게 말해 두었지, 너에게 치료와 음식, 그리고 여자를 줄테니 대신 해방단 요쇠까지 오는 건 홀로 해결하라고 말이야! 에드! 넌 그때 알렉스 그 자식이 지은 표정을 봤어야 해! 그건 최고였어! 총도 없이 우리가 탄 차량을 기어서 쫓아오던 그 절박한 표정 말이야! 아쉽게도 넌 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도 힘들겠지만 말야! 하하하하하!”
“너희들... 이 개자식들!! 안돼!!! 안돼! 제발 살려줘! 이 개자식들!! 복수할꺼야! 아니야! 니들 장난치지마! 왜 이래 제발! 살려줘! 날 좀 살려달라구 이 망할자식들아!”


잭과 다른 일당들의 비열한 웃음이 쏟아진다. 잭은 웃는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는 일당들에게 욕을 해야 할지, 아니면 마지막 끈을 잡기 위해 애원해야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극도의 심리적 불안감을 느끼는 듯 했다.
안타깝지만, 그를 동정할 겨를은 없다. 나 역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신세가 아닌가! 그는 두 다리를 잃었지만, 나 또한 나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가족들을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난 다급한 목소리로 잔악한 잭과 그의 일당들에게 소리쳤다.


“내 가족들을 데려가지 않을 거라면, 나도 가지 않겠어! 콩이든 뭐든 다 가져가! 하지만 가족들 없인 날 데려갈 수 없을 꺼야! 헉!!”


숨이 멎을 것 같은 통증이 아랫배에 몰려든다. 잭의 주먹이 나의 복부에 꽂혔고,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니 놈도 두 다리에 총알을 먹인 뒤 여기에 버려줄까? 앙? 뭔가 착각하나본데? 우린 널 대우해줄 생각이 없어!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잘 들어! 여기선 내가 법이야. 넌 우릴 위해 하던 연구를 계속해줘야 하고, 타협은 없어!”


잭의 비열한 미소가 나를 향한다. 하지만 난 굴복할 수 없었다. 가족들은 이 참담한 현실에서 나를 붙잡아주는 희망이다. 그들이 없이는 연구도, 바이러스의 극복도 모두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쏴! 쏴버려! 내 두 다리를 박살내! 하지만 가족들을 버리게 만들 순 없을꺼야! 차라리 난 죽음을 선택하겠어!”


온 힘을 다한 나의 외침이 지하실을 가득 채운 비열한 웃음소리를 덮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내 멱살을 움켜쥔 하비의 손아귀 뿐이었다.


“잭! 이 자식 정말 쏴버릴까? 백신을 정말 만들지 어쩔지도 모르고 말야!”
“하비 하비! 내가 늘 말했잖아. 현실에 안주해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야! 생각해봐! 만약에라도 저 노란 원숭이 놈이 백신을 개발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말이야! 어쩌면 파괴된 이 땅에 새로운 질서가 성립될지도 몰라. 백신을 구하기 위해 수 없이 많은 비감염자들이 모이고, 그들을 규합해서 세력을 넓혀야지, 우린 새로운 세상의 왕이 될 꺼야! 새 문명, 새 질서, 새로운 법을 우리가 만들 수 있지! 만약 백신 개발에 실패하더라도, 저 녀석 연구노트에 적힌 대로 일시적인 바이러스의 감염만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그것도 꽤 큰 자산이 되지!”
“설마 그렇다고 저기 바닥에 누워있는 감염자들을 데려가겠다는 거야?”


하비가 수면가스에 취해 두 번째 방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리킨다. 에드가 산탄총의 화마를 피하기 위해 잠재워 옮겨 둔 곳이었다. 


“문을 열어!”
“잭! 난 반대야! 저 감염자들을 만질 생각도 없고!”
“문 열어!!”


잭이 한층 강한 목소리로 하비를 향해 소리쳤다. 간부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왠지 잔인한 잭을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안토니오와 프란시스코라고 불린 두 남자도 잭의 언성이 커지자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갇혀 있던 방 그리고 나의 아내 설희가 곱게 잠들어 있는 방의 철문을 연다.


“난 이런 놈들을 다루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지, 많은 전장을 오갔거든? 바이러스 이전의 세상은 평온해 보였지만, 실상은 아주 많은 전쟁이 이뤄졌어, 난 그 쪽에 흥미를 느꼈지, 그래서 군을 제대하고 사설 용병 업체에 입사했지, 그게 얼마나 멋진 일이었는지 알아? 군에서는 버러지 같은 놈들 몇몇을 죽이는 것도 보고를 해야 했어, 사실상 교전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으니까! 빌어먹을 허구헌날 폭격이었어, 우린 늘 다 박살난 폐허를 정찰하는 일만 했지, 그건 그냥 공군이 볼일을 본 뒤 밑구녕이나 닦아 주는 거야! 난 강렬한 걸 원했어, 전투! 그리고 피! 살아남은 놈들은 붙잡아 우리 식대로 처리했지, 머리 가죽을 벗기고, 발목을 도려냈어! 아직도 그때의 감촉이 생생해! 그래! 물론 너 같은 놈들도 있었어, 종교든 신념이든 아니면 가족이든,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놈들이 있었지, 그때 배운거야! 이걸!”


잭은 품에 있던 권총을 꺼내 나를 겨냥했다. 잔혹함이 한껏 베어든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내 들려온 시끄러운 총성...
나는 눈을 감았다.


[탕!]


잭의 총구가 불을 뿜었는데, 왠지 나에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살며시 감았던 눈을 떴다. 


“아버지!!!”


잭이 뽑아든 권총 뒤로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쏟아진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버지의 피가 뭉클뭉클 새어나온다. 나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달려가려 했으나, 어느새 하비의 팔이 내 몸을 붙들고 있었다.


“아버지... 흑흑... 안돼 이 망할 자식들!”
“지켜야 할 대상... 그것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들은 생각보다 너무도 쉽게 부숴지더군! 아프가니스탄이었어! 마을에 숨어있다 도망친 반군 지도자를 잡기 위해 잔당 중 한 놈을 생포해 고문을 했는데, 제 가족이 연루되어 있으니 아무리 괴롭혀도 입을 안 열더군, 굉장히 쉬웠어! 마을의 절반을 헬기로 박살내 버렸지, 울부짖더군! 바로 지금의 너처럼! 우린 말했어, 네가 입을 열지 않으면 나머지 반도 박살내겠다고! 우린 결국 놈에게서 답을 얻었지, 자! 대답해! 우리에게 답을 줘! 남은 네 가족들을 마저 죽여 버리기 전에!”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와 함께 보낸 나의 유년시절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도저히 눈물이 멎을 생각을 안했다. 미국으로 오기 전 나의 열 번째 생일을 함께 보내고, 아들의 성공을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와 세탁소 및 식당의 허드렛일을 하며 고생하셨던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터질 곳 없는 울분이 가슴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온다. 한꺼번에 폭발하듯 쏟아진 울분은 꺽꺽 거리며 제대로 소리조차 내어지지 못한 채 응어리지고, 연소되지 못한 분노가 나의 두 눈을 충혈시킨다.


“하비 어서 그 놈을 끌어내! 안토니오와 프란은 식량을 챙기고!”
“개새끼들!!!!”


나는 살짝 미쳐버렸는지도 몰랐다. 태어나서 운동을 배운거라곤 초등학교 시절 건강을 염려한 아버지가 강제로 보낸 태권도장을 몇 달 다닌 게 전부였고, 20대 이후로는 고전 영화를 좋아한 탓에 재키 찬(성룡)의 액션 영화를 보며 흉내 낸 것이 다였다.
그런 내가 지금 내게 총구를 겨눈 하비를 향해 분노의 당수촙을 날리고 있었다.


“으악!!”


천 번에 한번, 혹은 만 번에 한 번 올까 말까한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비는 이미 나에게 어느 정도 방심한 상태였던 것 같았고, 나의 혼신의 힘을 다한 당수 촙은 놈의 목덜미에 정확히 꽂혔다. 하비는 그 충격에 약간 비틀거리는 듯 했지만 그것만으론 그를 쓰러뜨릴 수 없었다. 하지만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어린 시절 배웠던 태권도의 앞차기를 그에게 날렸다. 다행히 이것조차 행운이 따랐는지, 무심결에 날린 나의 앞차기는 그의 사타구니 낭심에 정확히 도달했고, 하비는 마치 영화처럼 악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분노한 나의 회심의 일격, 아니 이격에 모두가 당황한 사이, 잠시 잊고 있었던 에드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망쳐! 위로 가서 산탄총을 가져와! 어차피 이놈들은 네 가족들을 모두 죽일꺼야!”


고마운 에드의 외침에 분노에 젖어있던 나는 겨우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그렇다! 우연히 꽂힌 당수촙과 앞차기였지만, 상대는 모두 총을 가지고 있고, 더구나 숫자도 셋이나 됐다. 이대로 머뭇거리고 있다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곧바로 그들에게 제압될 것이 뻔했다.


“이런 망할자식!!”
“으윽!!”

안토니오의 개머리판이 나에게 소리친 에드를 향해 내리쳐지고, 에드는 피를 흘리며 다시 바닥에 쓰러진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잃지 않은 채 안토니오의 다리를 붙잡고 소리쳤다. 


“도망쳐! 위로 올라가!”


나는 재빨리 계단을 향해 뛰었다. 장소는 좁은 지하실 안... 올라가는 데에는 불과 몇 초면 된다. 산탄총은 입구 바깥 어딘가에 버려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다. 그들에겐 총이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무사히 계단을 올라가는 것보다 그들이 내 등에 총알을 박아 넣는 것이 훨씬 빠를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들은 세 명... 그것도 나완 달리 총을 잘 다루는 군인 출신의 악당들이다. 그들의 총알이 나를 빗나가주기만을 바라는 건 어쩌면 지나친 과욕일지도 몰랐다. 확률은 수백분의 일, 하지만 망설이거나, 고민할 시간은 없다. 이것은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고, 나와 가족들을 위해선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탕탕탕!!]
[탕탕!]
[탕!]


좁은 지하실을 온통 뒤흔들어 버릴 듯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수발의 총성소리! 
나는 겨우 이제 막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을 뿐이다. 
원래대로면 나의 몸은 이미 벌집이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내 몸은 멀쩡했다. 그렇다곤 해도 안도하거나 감탄하고 있을 여력은 없었다. 나는 더 빨리 힘을 주어 계단을 올랐다. 
급박한 상황속에서 너무도 힘을 주어 올라온 탓일까? 계단 끄트머리에 걸려 바닥에 나뒹굴었지만, 다행히도 빼앗겼던 산탄총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것을 손에 들고, 넘어진 채로 통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망할자식!!!”


돌아선 내 눈에 보인 것은, 어느새 내 뒤를 따라 올라온 안토니오의 분노한 표정이었다.


[탕!]


조준 할 것도 없이 당겨진 산탄총의 방아쇠는 기대대로 불을 뿜으며 탄알을 쏟아냈고, 곧 피떡이 된 안토니오가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놈들은 셋이나 남았다. 내가 쓰러뜨린 하비도 곧 몸을 추스릴 것이고, 잭과 프란시스코란 녀석은 멀쩡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다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그래 있구나 있어!‘


놈들이 나에게서 산탄총을 빼앗아 갔지만, 다행히 주머니에 넣어둔 총알은 건드리지 않았기에, 나는 서둘러 그것을 꺼내 총신에 채워 넣었다. 그러나 다급하면 할수록 되는 일이 없다더니, 평소엔 그렇게도 잘 되던 산탄총의 총알 채우는 일이 아무래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 마음은 한층 더 초조해지고, 손은 무디다. 나의 표정은 절망으로 번져 갔다. 이렇게 시간을 지체 했다간 방금 전 안토니오처럼 다른 놈이 뛰어 올라올지도 몰랐다. 놈을 해치우는 건 둘째 치고 나에게 남은 총알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탕탕탕!] 
[탕탕!]


총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에게 쏘아진 것 같지는 않다. 누가 맞은 것일까? 에드? 그들은 왜 나를 쫓아오지 않는 것일까? 아래에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거지? 나의 불안감은 한층 더 커져만 간다. 


[철컥!]


산탄총의 총알이 들어가고 총신이 제대로 결착되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지하실을 향해 총신을 들이 댔다.


[타앙!!!]


지하실에 울려 퍼지는 나의 마지막 총성...
거친 비명소리와 함께 지하는 천천히 고요로 물들어 간다.


“헉... 헉... 헉...”


안도와 함께 내쉬어지는 지친 숨소리... 나는 마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마라톤 평야를 뛰어 당도한 아네테의 페이디피데스처럼 지친 몸으로 비틀거리며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혹시라도 그들 중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가진 총은 장약의 양이 보통의 산탄총 보다 많은 4게이지의(산탄총의 탄알을 구분하는 단위, 보통 12게이지가 사용되며 작아질수록 화력이 강해진다.)산탄총이다. 좁은 지하실에선 누구도 피해나갈 수 없다. 게다가 나에겐 더 이상 남은 탄알이 없으니, 생존자가 있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지하실 안을 가득채운 매캐한 연기와 화약냄새... 위쪽 통로에서 새어 들어온 옅은 빛이 참담한 지하실 안의 풍경을 비춘다.
쏘아진 납탄들을 정통으로 맞은 듯 박살난 하비에르의 흉측한 몰골과 더불어 목부분이 관통된 듯 쓰러져 있는 프란시스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하실의 중앙엔 해방단의 지도자 잭 역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들이 아닌 다른 것이었다.
산탄총을 가지기 위해 무방비 상태로 계단을 뛰어 오를 때, 나의 등 뒤로 날아든 그 무자비한 총탄을 온몸으로 막아준 사람, 그리고 안토니오에게 장전되어 있던 총알을 발사한 뒤, 긴장감에 재 삽탄을 하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동안 그들이 뒤쫓아오는 것을 막아준 사람...
마치 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게 내가 사랑해 마지않던 두 사람이... 나의 전부나 다름없던 두 사람이 그 곳에 쓰러져 있었다.


“어머니... 여보!!!!”


쏟아지는 통곡과 오열... 
지금 이 순간, 나는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다.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내 가족의 희생 때문이라니... 
계산대로라면, 나의 가족들은 좀 더 오랫동안 죽은 듯이 잠들어 있어야 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각각의 방에는 충분한 양의 수면가스가 공급되었다. 앞서 에드에게도 설명한 적이 있었지만, 수면가스의 화학적 특성상 중추신경계는 그것에 내성을 가질 수 있다. 허나 그렇다곤 해도 어머니와 아내가 깨어난 시점은 누가 봐도 내성으로 발생할 수 있는 오차의 범위를 다소 벗어난 것이었다. 
나는 나의 심장을 찢어낼 듯한 작별의 고통 속에서, 그것이 단순한 화학적 효과에 의한 것이 아닌 다른 어떤 힘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의 가족에 대한 사랑...
원래 그것은 종종 기적을 만들어낸다고 들었다.
참혹한 총상의 흔적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웃고 있는 어머니와 아내의 표정 속에서 나는 그것이 진실임을 깨닫게 됐다.
어쩌면 나는 감염자의 미소를 본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미... 미안해요 엄마... 여보... 흑흑...”


“으... 자네 괜찮나?”


나의 온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가운데 어두운 지하실 한쪽 구석에서 에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는 애초의 계획대로 마지막 방에 겨우 몸을 숨긴 듯 했다. 하지만 몸의 거동이 불편해서 인지 완전히 숨지 못해 그의 하반신은 산탄총의 화마에 휩쓸린 듯 여기저기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난 괜찮아. 어차피 이 두 다리는 못 쓸 것 같았으니까... 쿨럭쿨럭..”


괜찮다고 말하던 에드가 갑작스레 피를 토해냈다.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아마도 그 역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듯 했다.


“자네가 뛰어 올라간 뒤, 자네 어머니가 먼저 뛰쳐나왔어, 놈들은 당황했지, 쿨럭... 그래! 놈들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자네 어머니가 감염자라는 사실을 말이야. 어땠는지 아나? 누구 하나라도 이타적인 놈이 있었다면 그 놈은 자네를 향해 총을 쐈을 꺼야! 하지만 놈들은 그러지 못했지.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자기 이익만 생각하던 놈들이었거든, 놈들의 총구는 동시에 자네 어머니에게로 향했어, 그렇지... 그게 당연하지 이 비좁은 지하실에서 스치기만 해도 그들은 감염이 될 테니까 말이야. 자네 어머니가 쓰러지자 안토니오가 자네 어머니를 피해 계단을 뛰어 올라갔지! 자네를 잡기 위해서, 다행히 자네 총이 먼저 불을 뿜었고, 안토니오는 죗값을 받고 아래로 굴러 떨어졌지만, 잭과 다른 녀석들은 그 뒤를 쫓지 못했어, 그건 자네 아내가 뛰쳐나왔기 때문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야! 자네 어머니와 아내, 모두 놈들에 의해 죽었어, 자네의 산탄총이 쏘아지기도 전에 죽었단 말이야! 쿨럭! 쿨럭! 쿨럭!”


나를 위로하려는 듯, 에드는 연신 피를 토해내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었다. 


“저기... 잭의 총이 있어... 비록 마지막에 자네를... 크흑... 등졌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동료였으니,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나?”


그리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자네 어머니가 쓰러질 때 조금 닿았어, 아마 난 곧 감염자가 될 거야. 괜찮다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정상인 상태로 죽고 싶어,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게.. 쿨럭... 쿨럭! 크헉!!!”


하지만 그것은 진실로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그 말을 마치자마자 피를 토하면 바닥에 쓰러졌다.


“에드!!! 흑흑... 흑흑... 젠장!!! 젠장!!!”






11.

나는 지금 미소 해방단이 타고 온 무장된 SUV차량에 탑승했다. 마치 장갑차처럼 꾸며진 이 차량은 연비는 형편없어진 듯 했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감염자를 피해 움직이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아빠... 우리 어디로 가?”


딸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그 날의 참혹했던 현장을 정리하던 중, 나는 가장 참담한 실패를 거뒀다고 믿었던 아흔아홉번째 샘플... 즉 딸의 콧속 표피에서 채취한 샘플의 놀라운 변화를 목격했다. 
항 바이러스 제재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완전하게 궤멸되어 있었던 바로 그 시료,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손상을 입어줬어야 할 바이러스들이 한층 더 공격적인 형태로 몇 배나 증식되어 있던 그 시료 속 바이러스가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바이러스 든 인간이든, 또는 어떠한 생명체든, 그것은 결국 생존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남기기 위해 끝없이 증식한다. 
처음부터 그것을 공격하여 죽이려고 했던 생각부터가 잘 못 된 것이었다. 우리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바이러스 역시 끝없이 증식하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 기막힌 반전은 눈을 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마치 우리 인간들이 그랬던 것과 너무도 흡사하여 나에게 실소를 머금게 했다.
번영, 풍족함, 끝도 없는 번식을 위한 자양분...
인간은 늘 가장 번성했을 때마다 전쟁을 치러왔다. 그리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파괴했다.
바이러스 역시, 말도 안 되는 증식이후 급격히 쇠락했다. 마치 우리 인간들처럼...
지나칠정도의 증식 뒤 스스로가 스스로를 파괴하기 시작한 그것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도 타협하지 못하고, 공멸(攻滅)을 택한다.
아마 바이러스가 없었다면, 인류 역시 그와 같은 행태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핵무기, 수소폭탄, 지구상에 존재해서는 안됐을 수없이 많은 무기들이 아직도 이 땅 여기저기에 잠들어 있지 않은가?
바이러스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난 누군가의 논문에서 읽은 몇 줄의 글귀를 떠올렸다.


[바이러스는 인체에 침투해 면역체계를 어지럽히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결국 항체에 의해 섬멸된 후, 인간은 더욱 더 강한 면역체계를 가지게 된다. 어쩌면 바이러스는 처음부터 인간을 괴롭히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닌, 인간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한 담금질 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동안 신을 저주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어쩌면 신은 우리가 스스로 공멸의 길을 걷기 전에, 우리 인류가 더 건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한 일을 행하셨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스스로 다시금 되물어 본다.
우리 인류는 이번 사태로 인해 과연 성숙해 졌을까?
스스로의 오만으로 다시금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답은 알 수 없다.
오직 그것은 신만이 알뿐...
나는 그저 내 개인의 길을 갈 뿐이다.


“아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우리 어디로 가는 거냐니까?”
“아 솔아 미안! 애리조나에 갈 거야. 내 기억이 맞다면, 예전 그곳에 에볼라를 위한 백신 대량생산 설비가 있었거든? 아빠는 그곳에 한번 가보려고...”
“거기에 가서 백신을 만들면, 아픈 사람들이 다 낫는 거야?”
“그럼...”
“그럼 더 이상 화도 안내는 거고?”
“그으럼!”
“와! 잘 됐다. 아빠 그 약 많이 만들어서, 사람들에게도 나눠주고, 집에 있는 엄마랑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주자 응?”
“솔아... 흑... 그... 그게..”
“잉~ 아빠 왜 울어! 응? 울지마 아빠!”
“그래 솔아... 엄마랑, 할아버지랑, 할머니에게도 그 약 꼭 주자... 꼭...”


연중 비가 오는 날이 손에 꼽을 만큼 적은 황량한 사막위에 비가 내린다. 그것은 건조한 차창을 온통 흐리게 만드는 비다. 이 지역은 비가 오는 날이 드물지만, 한번 올때면 며칠이고 계속 비가 내린다. 심할 경우 2주 이상 그치지 않고 비가 내린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을 잃고, 마지막 희망을 위해 떠나는 나그네의 눈에서 내리는 이 비는 언제 멈출지 모른다. 
한손엔 핸들을, 다른 한 손엔 조수석에 앉은 딸의 손을 붙잡은 사내의 얼굴엔 슬픈 미소가 머금어진다.


웃는자들의 도시 Fin.


쓴 지 꽤 오래된 글이라 많이 미력합니다.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다 정도로 봐주시면 좋겠네요. 지금도 못 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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