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날 산 속에서 시간여행자를 만났어



유림은 바람소리를 들었다. 어딘가 좁은 틈새로 미지근한 공기가 새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날아든 바람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종아리를 살랑살랑 간질였다.

‘여긴 어디지?’

깨어난 유림이 처음 떠올린 질문이었다.

평소 아침을 맞이하던 자신의 방이 아님은 분명했다. 풍겨오는 냄새가, 얼굴에 와 닿는 햇살의 온기가, 손바닥에 만져지는 바닥의 재질이 온통 생경하기만 했다.

“엄마?”

낯섦의 이유를 찾기 위해, 미지의 공포를 떨치기 위해, 익숙한 호칭을 불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금 밀려든 바람만이 등줄기를 타고 오를 뿐이었다. 일어나 앉아 잔뜩 몸을 구부려 본다. 가슴께로 잡아당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서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자 빠르게 요동치던 심장 박동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가슴을 죄어오던 불안도 제법 크기가 줄어든 것 같았다.

날 때부터 유림에게 세상은 희미한 그림자였다.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채 세상에 나온 시신경은 빛과 어둠 정도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쭈그리고 앉은 공간은 희미한 백색이었다.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고 있지만 실내를 충분히 밝히진 못하는 것 같다.

미숙한 시각 대신 꾸준히 사용해온 다른 감각들로 유림은 주변을 살폈다. 눈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그만큼이나 다양하고 풍부한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다.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은 신선하면서 조금 습했다. 바닥엔 거친 느낌의 모포가 깔려있었다. 그 아래론 싸구려 장판의 감촉이 느껴진다. 공기 중엔 희미한 냄새들이 섞여있다. 익숙한 것과 낯선 것들을 구분해 가려내자 머릿속으로 리스트를 만들 수 있었다. 젖은 흙내, 풋풋한 풀의 향, 그리고 목재의 단면에서 풍기는 냄새다.

유림은 자신이 작은 창이 난 협소한 실내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근처에 숲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다시금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올라왔다. 유림의 집은 도심 한가운데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에 작은 텃밭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풍성하고 신선한 향기를 뿜어낼 정도는 아니다. 이곳은 분명 그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저기요, 거기 누구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유림은 사람을 불러본다. 그 부름에 누군가 답을 한다손 치더라도 반길 일은 아니겠지만 어딘지도 모를 곳에 덩그러니 혼자 내던져지는 두려움보단 차라리 그쪽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허공 속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대체 여긴 어디야?’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주변을 더듬자 마침내 익숙한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보행 시에 들고 다니는 맹인용 지팡이였다. 접어서 휴대할 수 있는 모델이지만 지금은 전부 펼쳐진 채 모포 귀퉁이에 놓여 있었다. 알루미늄 재질의 지팡이를 그러쥐고서 유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저편에서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위가 한결 밝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흠칫 놀라 뒷걸음질 치던 유림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외쳤다.

“누구에요?”

빛이 들어오는 방향, 열린 문이 있을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희미한 그림자, 작게 들려오는 숨소리, 그리고 전신으로 느끼는 사람의 기척.

“일어났네요.”

마침내 들려온 것은 낯선 목소리였다. 굵고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남자는 계속 유림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어디죠?”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어 경계심을 내비치며 유림은 물었다.

“산이에요. 용정산 중턱에 있는 산장입니다.”

“산장?”

생전 처음 듣는 산 속의 집에 어째서 자신이 누워있던 것인지 유림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부스럭, 사내가 신발 벗는가 싶더니 이내 실내로 불쑥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잠깐. 거기 멈춰요!”

날카로운 유림의 목소리에 발소리도 뚝 끊어졌다.

“아, 미안해요. 내가 생각이 짧았네. 상황 설명부터 했어야 하는데.”

남자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자박, 발소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개부터 할게요. 전 이기철이라고 합니다. 여긴 내가 렌트한 집이고요. 오늘 아침에 산책 나갔다 아가씨가 계곡에 쓰러져 있기에 여기로 옮겼어요. 기억나세요?”

기철이란 남자의 설명에 유림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산...에 온 적 없어요. 나. 집에 있었다고.”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 잔뜩 힘을 주고서 유림은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진정해요.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산 속에 쓰러져 있기에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 데려왔을 뿐이에요.”

그의 말에 유림은 즉각 반박을 했다.

“그, 그럼 경찰! 경찰에 연락을 했어야죠.”

하아, 남자가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죠. 그렇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요. 하지만 어제 태풍 때문에 엉망이 됐어요.”

“태풍이라고요?”

유림은 되물었다. 그 역시도 그녀에겐 금시초문이었다.

“정말 기억 안 나요? 난 또 그 와중에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인가 했는데. 아무튼. 계곡에 물이 불어서 산을 내려갈 수가 없어요. 지금도 달리 돌아갈 길은 없나 확인하고 온 참이에요. 핸드폰은 원래 여기선 먹통이고. 인터넷도 태풍에 선이 끊겼는지 간밤부터 접속이 안 되고요.”

유림은 황급히 재킷의 주머니를 뒤졌다. 평소 들고 다니는 시각장애인용 시계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순간 불안과 짜증이 동시에 치밀었다.

“거짓말!”

“뭐라고요?”

“내가 산에 혼자 왔을 리도 없고. 당연히 조난당할 일도 없어요.”

“저기, 아까부터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지팡이 그쪽 물건이죠. 그러니까 내 말은...”

기철은 무언가 물어보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주저하는 모양이었다.

“내거에요. 그리고 맞아요. 나 눈이 안 보여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쉽게 속일 생각 말아요. 방금 태풍이라고 했죠. 이상하잖아. 5월 초에 무슨 태풍이 와요!”

날카롭게 소리를 내지르고서 유림은 씩씩 거친 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상대가 당황하고 있음을 유림은 느낄 수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남자는 헛기침을 하고 꿀꺽 마른 침을 삼키더니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5월... 이라고?”

“그래요.”

단호하게 대꾸하며 유림은 상대의 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지금은 8월이에요.”

“정말 자꾸 거짓말 할 거야! 대체 당신 정체가 뭐야?”

“하아... 미치겠네.”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서있던 남자가 이내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것이 느껴지자 유림은 빽 소리를 내질렀다.

“가까이 오지 마!”

“진정해요. 나쁜 짓 하려는 거 아니니까. 그쪽한테 줄 게 있어서 그래요.”

“주다니, 뭘요?”

“라디오에요. 방 반대편 탁자 위에 놓여 있어요. 지금 당장은 전화도 인터넷도 안 되지만 AM주파수는 여기서도 잡히니까. 라디오 뉴스 채널이라도 틀어 놓으면 내 말을 확인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태풍이 왔었는지, 오늘이 몇 월인지.”

유림은 빠르게 머리를 굴렷다. 상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라면 그 제안은 합당해 보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쪽은 유림이었다.

“알겠어요. 하지만 내가 직접 가져올게요. 그러니까 라디오가 어디 있는지 말로 설명해요.”

지팡이를 아래로 내린 유림은 좌우로 흔들어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기철은 그런 유림에게 라디오가 놓인 탁자의 위치를 말로 설명했다.

“왼쪽으로, 아니 내 왼쪽이니까 당신한테 오른쪽 방향으로 다섯 걸음 정도 나가요. 좋아요 그래도 그만, 그만. 됐어요. 거기서 다시 왼쪽으로 두 발자국 정도. 맞아요. 거기 탁자가 있어요. 그 위에 라디오가 있어요. 모서리가 둥그런 상자 모양이고 크기는 어른 주먹 만해요.”

갑작스런 상황임을 감안하면 기철의 지시는 제법 정확해서 유림은 쉽게 라디오를 찾아 들 수 있었다.

“오른쪽 위에 안테나가 만져지죠? 일단 그걸 뽑아요. 전원 스위치는 왼쪽 귀퉁이 맨 위에 있어요. 그 아래에 있는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주파수를 검색해주고. 애초에 AM모드로 맞춰져 있으니까 그 정도면 될 거에요.”

그의 말처럼 스위치를 켜고 SEEK버튼을 한 차례 누르자 자글자글 거리는 소리가 멈추고 앵커의 목소리가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난밤 태풍 피해 소식을 알아봤습니다. 오늘 새벽 전국이 태풍 영향권에서 벗어난 가운데...’

기철의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림의 불안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분명 어제만 하더라도 유림은 자신의 집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딘지 모를 산 속에서 생면부지 남자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태풍이라니. 태풍 소식은 전혀 들은 기억이 없었다. 그 사이 몇 개의 단신을 추가로 전한 앵커의 뉴스 마무리 멘트가 귀에 들어왔다.

‘이상으로 2016년 8월 12일 10시 뉴스를 마치겠습니다.’

유림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기철이 서 있을 방향으로 돌아선 그녀가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죠?”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아니, 당신 말고. 뉴스에서요.”

“태풍이 왔다고…….”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냐고요!”

그녀의 일갈에 기철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답을 해줬다. 그리고 유림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상황은 처음보다 더욱 알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다. 뉴스에서 그리고 기철의 입에서 나온 날자는 그녀가 알던 시점에서 6년이나 더 지나있었던 것이다.

***

시간여행을 생각할 적에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게 있어요. 미래든 과거든 시간을 뛰어넘을 기술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고요. 예를 들어 빽 투더 퓨쳐에 나온 들로리안 타임머신 같은 거요. 당신은 자동차에 타고 시속 88마일로 가속을 해요. 순간 꽝! 소닉붐이 일고 눈  앞이 번쩍이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미리 지정해둔 다른 시간으로 여행을 하는 거죠. 그런데 거기가 정말 당신이 원하는 장소일까요? 시간을 이동시키는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시간여행은 기존의 여행에 하나의 차원이 더해진 거잖아요. 여기서 저기로, 한국에서 미국으로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이동하는 3차원의 여행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뛰어 넘는 이동이라고요. 공간에 시간을 더한 시공간 4차원 단계의 여행 말입니다. 시간 축을 이동한 사이에 그만큼 공간축도 이동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어째서 우린 그것을 무시한 채로 시간여행을 상상하느냐는 겁니다.

자 다시 한 번 설명할게요. 달리는 기차 안에서 시간이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고요. 1호차 1번 좌석에 앉은 채로 10초 후의 미래로 갔어요. 하지만 당신의 공간좌표는 그대로라면? 그러니까 처음 출발했던 장소 그대로라면 어떻게 될까요? 얼른 생각하면 출발점은 1호차 1번 칸 같지만 사실은 아니죠. 기차가 달리고 있었잖아요. 10초 후에 그 지점은 10호차 될 수도. 아니면 아예 기차가 모두 지나가버린 허공일 수도 있지 않겠어요? 게다가 사실은 그게 끝이 아니에요. 우리가 평소에 인지하지 못하는 움직임들이 있죠. 지구는 계속해서 자전 중이잖아요. 게다가 태양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공전도 감안해야죠. 10초 정도면 큰 영향이 없겠지만 그보다 먼 시간을 이동한다면 우주 한 복판에 들로리안이 빵 나타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시야를 더 넓히면 우주의 팽창은 어떤가요? 이렇게 시간이란 축을 더할 때 좌표의 개념은 상상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시간여행을 생각할 적에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변수가 되겠죠.

***

2010년 5월 12일.

그것이 유림이 기억하는 오늘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를 산장 가운데 앉아있는 지금은 그녀가 알고 있는 오늘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6년이란 시간을 훌쩍 넘은 시점이다. 이제 유림에겐 자신이 어디에 있느냐 만큼이나 언제에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정말 밖으로 연락할 방법이 없다는 건가요?”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유림은 아까부터 반복해서 던진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래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태풍 때문에 그런 거니까 조만간 복구가 될 거에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는다면 내일 불어난 계곡물도 이 무렵이면 정상 수위를 되찾을 거고. 그렇게만 되면 직접 마을로 내려갈 수도 있어요.”

기철은 그녀를 안심케 하려는 듯 같은 답을 지치지 않고 반복했다.

“그런데 아까 그 말 사실인가요? 지금이 2010년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거.”

너무 놀란 나머지 기철의 앞에서 속내를 그대로 내뱉어 버린 것을 유림은 뒤늦게 후회했다. 어째서 지금인 2016년이냐며, 자신은 2010년에 살고 있었다고 그 앞에서 횡설수설 해버렸던 것이다. 정말로 여기가 2016년인가의 문제 이전에 그런 말을 했다는 자체가 문제였다.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그런 얘길 들었는데.”

아무래도 상대는 자신을 미친 여자 취급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유림은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등지고 앉았다.

“그런데 아저씨는 뭐하는 사람이에요.”

“아저씨라니 섭섭하다. 내 목소리가 그렇게 올드한가. 아직 학생이거든요. 대학원생.”

그럼 아저씨 맞구먼 속으로 꿍얼대며 유림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대학원생이 산 속에 혼자 틀어박혀서 뭘 하고 있었어요?”

“휴가 중이였어요. 연구며 사람이며 치이고 살다 보니까 아무 간섭도 없이 조용히 있고 싶어서.”

아이고, 도사 나셨어요. 사회부적응자란 소리잖아. 자꾸만 날선 말들이 나오려는 것을 유림은 꾹꾹 안으로 눌렀다. 아직 그녀는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앉은 곳이 어딘지 그리고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여기서 산책로를 따라서 30분만 올라가면 정상 부근에 작은 평지가 있어요. 사방이 뚫려 있는데다 공기가 좋아서 별을 관찰하기엔 더 없이 좋죠.”

“별이요?”

“예, 하늘을 관찰하는 게 취미이자 전공이거든요. 별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왜 거기에 있고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연구하는 거요.”

“천체물리학 말이군요.”

유림은 저도 모르게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잘 아시네요.”

“그런 건 아니고. 우리 아빠도 같은 쪽이거든요.”

“아버님이 천체물리학자란 말인가요?”

기철은 이 우연이 무척이나 놀라운 눈치였다.

“그쪽을 가르치신다고 알고 있어요. 잘은 모르지만. 주워들은 정도죠.”

“혹시 누구신지 알 수 있을까요? 이쪽은 우리나라에선 워낙 좁은 동네니까 교수님이라면 제가 이름을 들어봤을 수도 있어요.”

“글쎄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아니세요.”

“말해 봐요. 어차피 통신 복구되면 가족들에게 연락부터 해야 할 텐데 난 유림 씨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요. 조금이라도 정보가 있으면 보다 수월하지 않겠어요?”

이번에도 기철의 설득은 합당하고 논리적이었다. 유림은 내심 그가 천체물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화법은 어딘가 아빠를 닮았다.

“오상일이요. H대학 천문학과 교수세요.”

“오상일 박사님이라. 얼른 떠오르는 게 없네요. 미안해요. 혹시... 그건 2010년 기준인 건가요?”

기철의 질문에 유림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만 놀려요!”

“놀리는 게 아니에요. 아까부터 생각해 봤는데요. 지금 유림 씨의 상황 말이에요. 그러니까 영문도 모른 채 계곡에 쓰러져 있었다거나 그걸 정체 모를 사람이 구해서 어딘지도 모를 곳에 데려왔는데 하필 거긴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곳에 게다가 앞을 볼 수마저 없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황당한 거짓말을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어요. 그렇다면 진짜로 지금이 2010년이거나 적어도 유림 씨는 그때라고 믿는다는 거잖아요.”

“그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죠.”

“맞아요. 유림 씨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까 라디오 들었잖아요. 유림 씨를 속이려고 제가 가짜 뉴스까지 만들었을까요? 그리고 조작된 라디오를 통해서?”

그것은 가능한 가정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그렇게까지 수로를 들여 기철이 자신을 속일 이유를 유림은 얼른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뭐요? 아저씨도 나도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면 뭐라는 거예요?”

갑갑한 마음에 유림은 투덜대며 주먹으로 콩 자신의 무릎을 내리쳤다.

“타임리프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타임리프? 내가 시간여행이라도 했다는 건가요?”

“물론 황당한 상상이란 거 인정해요. 하지만 지금 유림 씨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제법 들어맞아요.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몇 년 후의 미래로 왔다는 거잖아요.”

유림은 잔뜩 몸을 움츠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속 불안이 부글부글 덩치를 키웠다. 아무래도 기철이란 남자가 정상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합당한 설명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잖아요. 적어도 아버님에 대해 알아보려면 과거의 시점으로 바라봐야 하고요. 유림 씨가 기억하는 건 2010년의 현실이잖아요.”

“아빠한테 들었어요. 타임머신은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거라고. 사람이 시간여행을 하는 일은 현재의 과학으로 당분간은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하셨어요.”

“맞아요. 교수님이니까 누구보다 잘 아시겠죠. 하지만 이론으로만 존재한다는 건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우리가 누리는 과학의 혜택 대부분은 과거엔 이론으로만 존재했던 것들이에요. 개중엔 이렇게 빨리 실현되리라 생각지 못한 것들도 많고요.”

“그래서 내가 시간여행을 했다? 그럼 이상하지 않나요. 지금은 2016년이라면서요. 정말 시간여행이 가능하고 과거의 내가 미래로 온 거라면 이곳에서도 시간여행은 존재해야 하잖아요. 지금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진 않은데요? 설마 2016년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건가요?”

“아니요. 2016년에도 여전히 시간여행은 이론으로만 존재하는 가설이에요.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죠.”

기철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켰다.

“별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었죠. 내가 여기 온 이유 말이에요. 그거 알아요? 밤하늘에 빛들 중에선 이미 사라진 별의 흔적도 있다는 거.”

그의 말에 유림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글쎄요. 전 별빛 같은 거랑은 별로 친한 편이 아니라서.”

“아, 미안해요.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됐어요. 내가 나쁘게 받아들였을 뿐이니까. 유림은 속으로 떠오른 생각을 굳이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아무튼 내 말은 그렇게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별이 사실은 과거의 흔적일 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매일 밤 머나먼 별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셈이란 거죠.”

“하지만 아저씨하고 나하고 거리는 그렇게 멀지 않은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죠. 겨우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지만 우리 둘 다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라면 6년이란 시간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어쩌면 태풍 때문에 외부랑 단절되면서 이 숲속에 두 개의 시간이 겹쳐지는 현상이 벌어진 걸지도 몰라요.”

“이상한 얘기는 그만 하세요. 무서워지려고 그러니까.”

“하하하, 미안해요. 그냥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는 거였는데. 아무 말도 않고 멀뚱히 앉아 있으면 서로 어색하잖아요.”

머쓱한 듯 웃으며 기철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유림은 다시금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새로운 기억들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아빠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교수이자 천체물리학자였던 아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라기보다는 몽상가이자 재담가에 가까웠던 아빠는 어린 유림을 앉혀놓고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곤 했었다.

마치 2016년에 살고 있다 주장하는 기철이란 남자처럼 말이다.

***

“똘이란 아이가 있었어.”

“무슨 이름이 똘이야? 너무 촌스러워 아빠.”

“똘똘해서 똘이야. 그러니까 별명 같은 거지.”

“그럼 오케이. 별명은 촌스러워도 되니까. 그래서 똘이가 있었는데?”

“똘이는 타임머신을 발명했어. 그러니까 언제든 원하는 시간으로 갈 수 있는 장치 말이야.”

“나도 타임머신이 뭔지 알아. 아빠 지금 초딩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그래, 그래. 우리 따님께서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럼 똘이가 왜 타임머신을 만들었는지 말해볼까. 똘이에겐 동생이 있었어.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던 동생이었지. 하지만 동생은 어려서 먼저 죽고 말았어. 똘이는 언제나 그게 맘에 걸렸지. 건널목 맞은편에 있던 똘이를 보고서 신호도 안 보고 찻길로 뛰어들었다가 사고를 당했거든.”

“불쌍해…….”

“그래. 동생도 똘이도 불행한 일이었지. 그때 똘이는 타임머신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 과거로 돌아가서 그날 동생이 건널목으로 뛰어들지 못하게 막으면 되니까.”

“그래서 성공했어?”

“글쎄,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똘이가 착한 아이였다면 동생을 구하지 않았을까?”

“그럼 동생을 구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어떡하지? 그렇게 되면 똘이는 더 이상 타임머신을 만들 이유가 없는데. 그럼 타임머신도 없고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올 똘이도 없어.”

“그럼 동생을 구할 수 없잖아?”

“그래. 결국 동생은 사고를 당하고 다시 똘이는 타임머신을 만들어야겠지.”

“으으... 이상해. 타임머신을 만들지 못하면 동생은 죽고. 동생이 죽지 않으면 타임머신을 만들지 못한다는 말이야?”

“그래.”

“음, 그럼 있잖아. 일단 동생을 구하고 나서 옛날 똘이한테 지금 똘이가 타임머신을 꼭 만들어야 한다고 말을 해주면 되잖아. 아빠.”

“그거 좋은 생각이네. 어느 날 갑자기 미래에서 온 똘이가. 과거의 똘이에게 타임머신을 만들어, 그렇지 않으면 네 동생은 죽을 거야라고 말해야 한다는 거네?”

“응!”

“그럼 처음에 죽은 동생은 어떻게 된 걸까?”

***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게 뭐에요?”

바스락, 무언가의 포장을 벗기는 소리와 함께 기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곡에 간 기억이 없다면서요. 그럼 정신을 잃기 직전에 어디서 뭘 했는지는 생각이 나는가 싶어서요.”

그의 질문에 유림은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사실 똑같은 질문을 산장에서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던져보고 있던 터였다.

유림은 생각했다. 정말 나는 시간여행을 한 것일까? 어린 시절 아빠에게 들었던 똘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일종의 퀴즈였다. 아직 어렸던 유림은 계속 이어지는 아빠의 질문에 결국 답을 포기하고 말았다. 동생을 구하거나 타임머신을 만들거나 두 가지 변수는 서로 맞물려있고 동시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것이 타임 패러독스와 관련된 이야기임을 알게 된 것은 몇 살을 더 먹은 후의 일이었다. 아빠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는지는 결국 물어보지 못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딸이 좀 더 다양하고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길 원해서였는지. 자신이 가르치는 분야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알려주고 싶어서였는지. 것도 아니면 답이 없는 질문 앞에서 당황해서 끙끙대는 유림의 모습이 재밌어서였는지. 다만 똘이 이야기는 어린 맘에도 제법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확실했다.

이후에도 몇 번인가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만약 똘이가 시간여행으로 동생을 구하고 무사히 현재로 돌아올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똘이에겐 두 개의 미래가 존재한다. 동생이 죽은 미래와 그렇지 않은 미래. 그만큼의 시간이 똘이에겐 두 가지 버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 나중의 미래가 앞선 미래를 온전히 대체하는 것일까? 것도 아니면 앞선 미래만을 기억하는 똘이가 바뀐 미래에 적응하며 살게 될까? 어느 쪽이든 똘이의 기억은 뒤죽박죽 혼란스럽게 될 터였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어떻게요?”

“그럴 때 있잖아요. 아침에 눈을 떴는데 간밤에 언제 잠이 들었는지 헷갈리는 거. 책을 읽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졸음이 와서 뒤척이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고서야 제대로 자리에 누웠는지. 라디오를 들었던 것도 같고. 친구랑 전화 통화를 했던 것도 같고.”

“다른 날들의 기억들이 뒤섞여 버린 기분 같은 거 말이죠.”

“맞아요. 그런 느낌.”

유림은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그때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배를 감싸 쥐며 유림은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이후 제법 시간이 흘렀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6년 만의 한 끼를 요청하는 위장의 외침인 지도 모른다.

“하하, 그렇지 않아도 컵라면 끓이려던 참인데. 같이 먹어요.”

그렇게 말하며 기철은 방의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다시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컵라면 비닐 포장을 벗기는 소리란 것을 유림은 깨달았다.

“좋아요.”

그녀의 경계벽도 배고픔 앞에선 결국 높이를 낮추고 말았다.

딸깍, 무언가 스위치를 넣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물이 끓기 시작한다. 방 안엔 전기포트도 있었던 모양이다. 통신선은 끊겼어도 전기는 제대로 들어오고 있다. 아니면 워낙 외진 곳이라 자체적으로 발전기를 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림은 다시 조금 전 기철이 꺼냈던 질문으로 돌아갔다. 과연 자신의 마지막 기억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산을 오른 이유가 어쩌다 계곡에 쓰러져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6년이나 지난 미래에서 깨어난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까도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간밤에 자신이 언제 잠이 들었는지 정확한 시점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가장 가까우면서도 분명한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부터 시작이다.

‘아빠 오늘도 늦는데?’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그러자 문득 엄마한테 말을 거는 자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던졌던 건가 유림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아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다.

“유학…….”

저도 모르게 새어나온 소리에 유림은 스스로 놀라며 입을 가렸다.

“뭐라고요?”

저편에서 기철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뭐가 생각이 나서.”

“생각이라니 뭐라도 기억나는 게 있어요?”

딸깍, 다시 전기포트 스위치가 소리를 내며 물이 다 끓었음을 알렸다.

“유학을 가겠다는 말을 하려고 그랬어요.”

“아버지한테?”

“...예.”

컵라면 용기에 물은 채운 기철은 이제야 젓가락을 찾는지 부산스럽다.

“어디로요?”

“뭐라고요?”

기철의 말에 유림은 고개를 까닥이며 되물었다.

“어디로 유학을 가려 했느냐고요.”

“아, 미국이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과정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유림은 자신의 눈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허락을 못 받았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아까보다 느리고 조심스런 걸음으로 기철이 다가오는 소리에 유림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

“그랬다면 여기가 아니라 그랜드캐년 어디쯤에 있지 않았겠어요? 자 여기 컵라면.”

실없는 농담과 함께 기철은 앞으로 내민 그녀의 오른손에 컵라면을 왼손에는 나무젓가락을 차례로 들려주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요.”

컵라면의 벌어진 입을 자신의 몸 쪽으로 돌려놓고서 유림은 나지막이 말했다.

“맞아요. 허락을 받지 못했어요.”

***

“너무 무모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여기서도 혼자 생활하기 힘든 아이인데 느닷없이 미국이라니. 그렇다고 우리가 따라갈 상황도 아니었고.”

오상일 박사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옆에 앉은 아내는 말없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치고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의외로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였다. 어쩌면 평소에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 늘 대비하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고 형사는 생각했다.

“따님 스스로 집을 나갔을 가능성은 정말 없을까요?”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럴 확률은 적습니다. 아니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말씀하신 그... 장애 때문인 거죠?”

수첩의 메모들을 확인하며 형사는 다시 확인하든 물었다.

“예, 항상 그 부분 때문에 조심하고 살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오 박사의 표정엔 한 마디로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 부부가 딸의 실종 신고를 한 것은 사흘 전이었다. 성인 실종은 신고가 들어와도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특별했다. 실종자 오유림은 특수한 신체적 장애 때문에 대부분 집에서 머무르며 생활을 했다고 한다. 가족이 동행하지 않으면 외출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부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비단 딸이 사라졌다는 걱정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딸의 장애를 보듬으며 함께 해온 세월의 흔적이었다. 형사로선 쉽사리 상상조차 하기 힘든 그늘이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매몰차게 굴지만 않았어도…….”

오 박사는 끝내 견디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린다. 부인은 그런 남편의 어깨를 다독이며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만 되뇐다. 남은 질문들이 있었지만 형사는 그것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자리를 피했다. 형사가 안방을 나오자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후배가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실종 당일에 집 주변에서 수상한 남자를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주변 CCTV부터 뒤져서 실종자 동선부터 파악해. 진짜 수상한 사람 있었는지도 알아보고.”

“예, 그리고 실종자 핸드폰 말입니다. 위치추적을 해봤는데 마지막으로 신호가 잡힌 게 집 근처입니다. 이후엔 전혀 흔적이 없고요.”

“꺼버린 걸까?”

“특별히 주문제작한 모델이라서 전원을 꺼도 배터리만 연결되어 있으면 GPS신호를 보내게 되어 있어요. 아마 의도적으로 분리를 했거나 망가뜨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쯧, 혀를 차며 형사는 손에 들린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에선 실종된 유림이 밝게 웃고 있었다. 뽀얀 피부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예쁘장한데다 나이보다 어려보이는 얼굴이다. 인면수심의 인간이 욕정을 품기엔 충분하고도 남을 인상이다. 게다가 오상일의 집은 제법 부유해 보인다. 하나뿐인 딸이라니 돈을 뜯어내기 위한 유괴일 가능성도 온전히 배제할 순 없었다. 후자의 경우라면 이미 연락이 왔어야 할 테지만.

“힘든 케이스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형사는 사진을 후배에게 건넸다. 부디 수배 전단에 저 사진이 사용될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맘이었지만 현재까지의 상황이나 실종자 유림의 상태를 감안한다면 수월하게 일이 풀릴 가능성은 적어보였다.

고개를 돌려 형사는 실내를 둘러본다. 학자의 집답게 거실 한쪽이 온통 책으로 가득하다. 대부분은 제목만으로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도 힘든 학술 서적들이다. 그나마 형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시간의 역사’라는 책이었다. 다른 것도 아닌 시간의 역사라니 역전 앞이나 전설의 레전드 같은 동어반복처럼 느껴졌다. 별 생각 없이 꺼내어 주르륵 책장을 넘겨본다. 제목과 달리 내용은 우주에 관련한 것이었다. 시간의 역사에 우주라니 그로선 더더욱 미로에 빠져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펼쳐진 페이지에 적힌 챕터 이름은 혼란스런 형사에게 작은 단서가 됐다.

‘벌레구멍과 시간여행’

아마도 책의 제목은 시간여행과 관련된 모양이다 형사는 지레짐작했다. 그리고 순간 아 소리를 내며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오상일 박사의 얼굴이 눈에 익어 어디에서 봤나 찜찜하던 것이 ‘시간여행’이란 단어를 보는 순간 해결되었다. 몇 년 전, 과학 이슈들을 소재로 다루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와 시간여행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과학이니 SF니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 형사도 흥미가 끌릴 만큼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던 것이 인상에 남았었다.

특히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이동할 적에 공간도 함께 이동하며 결국 지구의 공전 때문에 우주공간에 내던져질 수 있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 기억난다. 문득 진짜 타임머신이 있다면 이런 사건은 단박에 해결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세상이라면 더 이상 경찰이 필요 없을 지도 모른다. 나쁜 일이 생기면 시간을 되돌려 해결하면 될 테니까. 어쩌면 그런 일을 전담으로 하는 경찰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경찰의 힘이 필요한 세상이 올 수도 있을까.

원래 자리로 책을 되돌려 놓으며 형사는 잠시 동안의 망상도 함께 집어넣었다.

***

유림은 벌어진 컵라면 뚜껑 위에 손을 올린 채 생각에 잠겼다. 따뜻한 증기가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실 때까지 앉은 채 그녀는 미동도 않았다.

“안 먹어요? 그러다 라면 불 텐데.”

그런 유림이 들으라는 듯 기철은 일부러 소리 내어 라면을 흡입하며 말을 걸었다.

“아빠는... 두려워 하셨어요.”

“예?”

불쑥 튀어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라면을 먹던 기철의 손길이 멈추었다.

“혼자 유학 가는 걸 말이에요. 세상의 온갖 위험 속에 홀로 내보내기엔 이르다고 생각하셨죠. 어리니까, 여자니까 그리고 앞을 볼 수 없으니까. 눈이 보이지 않는 조건은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늘 말씀하셨으면서. 막상 내가 유학 이야기를 꺼내니까 곧바로 저의 장애를 들먹이셨죠. 그건 내 약점이고 그래서 반푼이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런 뜻은 아니셨을 겁니다.”

“그래요. 하지만 그때 전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이제 나도 어엿한 성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아빠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게 충격이었죠.”

어딘가 틈으로 한 줄기 훈풍이 밀려들었다. 멀리에선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속에는 젖은 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바깥은 조용했고 또한 깊은 숲 속이었다.

“화가 났고 반항심이 일었어요.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어요. 나를 향한 아빠의 걱정은 당연한 거였죠. 그리고 세상은 내가 접하고 알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죠. 그렇지 않나요?”

기철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유림은 마른 입술을 안으로 말아 침을 적셨다. 하지만 입 안도 이미 바싹 말라 있어 맘처럼 되진 않았다.

“아빠는 시간여행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나와도 종종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았었죠. 시간여행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원리로 작동할지. 그런 주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파고드는 학자들도 있다는 거 알아요?”

유림은 고개를 들어 창문으로 추측되는 사각형의 빛을 바라보았다.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상대적으로 시간이 천천히 흘러요. 광속으로 여행을 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미래를 향해 시간여행을 하는 샘이죠. 저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아니죠, 아직 그렇게 빠르게 이동하는 방법은 없어요. 시간을 거슬러 물질을 이동시키는 데에는 현실적 제약들이 많아요. 그래서 창작자들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물질이 아닌 수단을 이용한 시간여행을 고안했어요. 예를 들어 사람의 정신만 이동시키는 거죠. 기억이나 정신을 정보의 형태로 미래나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거죠. 그렇게 되면 질량을 가진 물질이 가지는 물리적 제약을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왜 그런 얘길 하는 거죠?”

마침내 다시금 입을 연 기철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분위기가 달랐다.

“처음부터 이상했거든요. 간밤에 태풍이 지나갔다고 했죠?”

“그래요.”

“그리고 전 아침에 계곡 근처에서 발견됐고.”

“맞아요.”

“아까 뉴스에서 10시라고 했었죠. 그럼 절 찾아서 이곳으로 옮긴 건 많아야 두 시간 전이란 얘기에요. 바깥 공기는 아직도 습하네요. 아마 태풍이 지나갔었다는 건 사실이겠죠. 하지만 그런 와중에 계곡에 쓰러져 있었다면 나는 흠뻑 젖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로 옮겨지고서 몸이 말랐다 쳐도 그동안 정신을 잃고 누워있었으니 바닥에 닿은 쪽은 아직 축축했겠죠.”

“글쎄요. 실내가 바깥보다 훨씬 건조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죠.”

상대의 목소리엔 진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설픈 변명을 꺼내는 사람의 당혹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철은 이 대화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유학 얘기를 꺼냈다고 하니까 물었죠. 아빠한테 그랬느냐고. 그리고 결국 허락을 받지 못한 점도 그쪽이 먼저 말을 꺼냈고.”

“그게 어때서요? 유학이라면 아무래도 학자인 아버님에게 먼저 물어봤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허락 여부야 이야기의 톤이나 흐름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고.”

“합리적인 추측이란 거군요.”

“당연하죠. 아님 내가 전부 알고서도 모른 척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기철은 화를 내지 않았다. 긴장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대화를 계속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의 끝이, 유림의 결론이 궁금한 사람처럼. 손 안에 구슬을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바깥으로 튕겨 나가길 기대하는 아이처럼.

“컵라면은요?”

“컵라면, 그러고 보니 왜 안 먹고 있어요. 이제 퉁퉁 불었겠네.”

“아까 컵라면을 나한테 줄 적에 손을 잡았죠. 분명 내 손을 잡아서 쥐어줬어요.”

“그게 어때서요?”

“보통은 그런 식으로 주지 않겠죠. 그냥 앞에 두면 알아서 먹을 테니까.”

“그래서 신경을 썼잖아요. 유림 씨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저도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났어요. 개중엔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을 처음 대면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죠. 그런 경우 무의식적으로 평소처럼 행동하기 마련이에요. 십중팔구, 컵라면을 제 앞에 두고서 나중에야 얘길 해주죠.”

앞으로 모은 양 손을 꼭 주먹 쥐면서 유림이 말했다.

“난 그렇지 않은 쪽일 뿐인 거죠.”

“아니요. 눈이 보이지 않으면 갑작스런 스킨십에 민감해요. 뒤에서 누가 갑자기 잡아당기거나 끌어안을 때 그쪽도 당황스럽죠. 마찬가지에요. 그걸 아는 사람은 그래서 행동이 조심스러워지죠. 예를 들어 무언가를 내 손에 쥐어줄 적에도 물건을 내 쪽으로 가져오는 게 아니고 나를 물건 쪽으로 안내해주는 식이에요. 특히나 뜨거운 컵라면처럼 위험한 물건이라면 더더욱. 그걸 모르는 사람에겐 제가 미리 그렇게 해 달라 부탁하기도 하고요.”

이번엔 기철도 무어라 대꾸를 하지 않았다. 유림은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혹시나 하는 의심은 점점 커져서 선명한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림은 섣불리 그 의심을 뱉어낼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 설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개중에 보다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요. 당신은 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나를 대하는 요령이 생길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그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더라도…….”

유림은 주저하며 말끝을 흐렸다. 흐음, 저편에 앉은 기철이 깊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몸을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

두 명의 형사가 탄 승용차는 국도를 달리고 있었다.

“실종된 오유림 말입니다. 가출 전력이 있다면서요.”

운전대를 잡은 후배의 말에 형사는 고개만 까닥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럼 이번 일도 실종 보다는 단순 가출일 가능성이 높은 거 아닙니까?”

후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다시 물었다.

“미국 유학을 가려고 했다는 군, 오유림 말이야. 그 문제로 부녀간에 언쟁이 있었나봐. 딸은 홧김에 몰래 집을 나와 버렸고. 무작정 돌아다니다 사고를 당했나 봐. 횡단보도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차에 치였지. 목숨은 건졌지만 그때부터 장애가 왔다는 거야.”

“사고로 눈이 먼 겁니까?”

조수석의 형사는 갑갑하다는 얼굴로 후배를 곁눈질 했다.

“거실에 있던 졸업사진 못 봤어? 눈은 선천적으로 그랬던 거야.”

오상일의 거실 한 면이 온통 책으로 도배된 서재라면 반대편은 딸 유림의 물건을 놓는 공간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사진과 상장들이 딸의 역사가 전시된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사진 속 오유림의 시선은 언제나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카메라의 위치가 어딘지 알더라도 그쪽을 향해 시선을 보내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일 터였다.

“그럼 장애란 건 무슨 말씀이신지…….”

“사고로 머리를 다쳤어. 그때부터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고.”

“기억력이요?”

“선행성 기억상실이라고 예전 일들은 기억을 하는데 사고를 당한 시점 근처로 새롭게 생긴 일들은 계속해서 잊어버린다나. 왜 영화에서 나온 거 있잖아. 시간이 지나면 처음으로 기억이 리셋 되는.”

“햐, 정말 그런 병이 있네요. 난 가짜로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해하는 후배와 달리 형사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상일과 나눈 이야기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서였다. 그는 딸에게 벌어진 사고가 온전히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사고가 있던 전날의 기억으로 되돌아간대. 부모는 아침마다 그런 딸에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연기를 하면서 살았고. 그 집은 말 그대로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면서 살았다고. 딸이 혼란스럽지 않게 하려고 말이야. 그런 오유림이 갑자기 사라졌어. 그러니 단순 가출로 보긴 힘들다는 거지.”

“엄청나네요, 그 집도. 그런데 처음 가출을 했을 적에 사고가 난 거라면 대체 얼마동안 그러고 살았다는 겁니까. 제법 예전 일이었던 것 같은데.”

조수석 시트에 몸을 묻으며 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6년이야. 6년 동안이나 그러고 살았어. 믿어져?”

***

‘너 혼자 뭘 제대로 할 수 있다고 그래!’

유학을 가고 싶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던 딸에게 호통을 치던 자신을 오상일은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을 바라보던 딸의 얼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지금까지의 삶을 모두 부정당한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매일처럼 생각했어.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거실 소파에 앉은 상일은 딸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날 밤으로. 그 애랑 싸우기 전으로 말이야.”

막무가내로 집을 나간 딸은 가본 적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차에 치였다. 응급실에 실려 간 후에야 집으로 연락이 왔었다. 긴급 수술을 위해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사고를 당하면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는 소식에 상일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병상을 지키며 의식불명의 딸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상일은 생각했다. 유림이 그 건널목을 건너지 않았다면. 사고 운전자가 교통신호를 지켰다면. 2시간 떨어진 도시에 굳이 딸이 가지 않았다면.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자신이 모진 말로 상처를 주지 않았더라면. 유학을 허락했다면. 딸이 내민 인생 계획에 조금 더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면. 후회는 수없이 많은 IF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상일은 그 후회를 숨기며 야비한 거짓 위에 매일을 세워 올렸다.

“여보, 내 스스로가 제일 경멸스러웠던 게 뭔지 알아?”

주방 식탁에 앉은 아내를 돌아보며 상일은 말했다.

“그 애가 깨어났을 적에. 정말로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거야.”

***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과거로 가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과거를 바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다시 돌아온 현재는 이미 역사가 바뀐 후잖아요. 존재하지 않는 일을 바꿀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니면 시간여행자만은 두 가지 기억을 모두 갖게 되는 걸까요?”

기철은 유림의 의문에 답하는 대신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런 모순은 근본적으로 과거를 바꾸는 일을 막고 있어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결과가 원인을 바꿀 수는 없다는 거죠. 전 그것이 시간에 어떤 의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인간이 멋대로 건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보안장치 말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거죠.”

자꾸만 가빠지는 호흡을 진정시키며 유림은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기철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방 안을 오가며 얘기하고 있었다. 실내는 좁았고 둘 사이의 거리는 단 몇 걸음으로 순식간에 줄일 수 있는 정도였다.

“조금만 더 들어줄래요. 참고 들어보면 흥미로울 테니까.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역사를 바꾸려는 시간여행자의 꼼수에요. 일단 원인이 되는 일을 바꿀 수는 없어요. 근본적인 문제 자체가 해결되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동인도 사라지니까. 그렇다면 원인에서 최종적 결과까지 이어지는 사건의 고리에서 헐거운 지점을 찾아봐야 하는 거죠. 처음의 원인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그래서 미래의 결과로서 시간여행의 동인이 발생 가능한 지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그럼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볼게요. 아주 무책임한 인간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죠. 술에 취해 운전을 하면서 신호마저 무시한 채 좁은 사거리를 내달릴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다 기어이 사고를 냅니다. 피해자는 사고로 큰 후유증이 남았고 그로 인해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도 평생 상처를 안고 힘겹게 살아야 했어요. 불행의 연쇄작용이 일어난 거죠. 그대로라면 끔찍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죠.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피해자는 이후에 또 다른 사건에 휘말려요.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눈치 챈 스토커가 그것을 이용해 그녀를 납치 감금하는 일이 벌어진 거죠.”

기철의 목소리는 이제 몇 발자국 앞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유림은 손발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녀는 안간힘을 다해 목소리를 짜내야 했다.

“난 여기에 며칠이나 있었던 거죠?”

“그래요, 추측이 맞았어요. 6년 전 사고로 오유림 씨는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어요. 하루마다 기억이 리셋 되면 이전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리게 된 거죠. 당신이 여기에 온 건 오늘로 3일 째에요.”

숨통이 꽉 죄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이 밀려왔다. 유림은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때였다. 팔뚝 근처에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악! 뭐예요?”

다시 지팡이를 집어 들고서 유림은 저항을 해보려 했다. 하지만 전신에 빠르게 무력감이 퍼져나가며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솜처럼 축축 처지는 몸을 애써 지탱하는 가운데 점점 아련하게 멀어지는 기철의 목소리를 유림은 끝까지 쫓으려 애를 썼다.

“사고를 일으킨 운전자는 한심한 인간이었어요.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고 가벼운 처벌만 받았죠. 피해자 가족들의 이후 일들 같은 것엔 관심조차 없었고요. 그러다 결국 자신도 교통사고로 죽었답니다. 인과응보였죠. 하지만 수 십 년 후에야 그것을 알게 된 후손은 달랐어요. 선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우연히 듣고서 죄책감에 시달렸죠. 그래서 사건 이후 피해자의 상황을 수소문했죠. 덕분에 스토커에게 납치 감금된 일도 알게 됐고.”

“무... 무흔... 헛소히...”

유림은 무어라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도 혀도 맘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우습게도 순간 그녀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아빠와 나누었던 ‘똘이’에 관련한 얘기들이었다. 똘이는 결국 동생을 구할 수 없을 터였다. 똘이 자신이 원인이자 결과였으니까.

“그리고 기사를 하나 발견했어요. 스토커에게 유괴된 시각장애인이 극적으로 구조된 사건이었죠. 그녀는 산 속에 버려진 건물에서 극적으로 발견됐어요. 태풍으로 무너진 시설을 복구하러 찾아온 인부들에게 말이죠. 유괴범은 근처 계곡에서 시체로 발견됐어요. 익사였죠. 불어난 계곡물에 휘말려 실족사를 한 것으로 추정했죠. 사망시점에 좀 모호한 구석이 있었지만 아무튼 수집된 증거들을 보면 그가 범인이란 건 확실했어요.”

이제 유림은 손가락 한 마디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청각만이 미미하나마 기능을 할 뿐이었다. 지이잉, 어디선가 기계가 작동하는 작은 소리가 들린다.

“구출된 피해자는 이전에 앓고 있던 기억장애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어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납치 사건 과정에서 받은 충격이 기적적인 부작용을 일으켰을 거라고 추측했죠. 하지만 장애를 앓던 6년의 기억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어요. 감금당한 동안의 일들도 사라졌으니 어찌 보면 다행인 지도 모르죠. 거기에 더불어 선천적으로 기능 하지 못했던 시력이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했죠. 그건 당시 과학으로선 설명할 길이 없는 또 하나의 기적이었죠. 손상되거나 발달하지 못한 시신경까지 복구하는 의료용 나노머신이 개발된 것은 그 후로 80년이나 더 지난 후의 일이니까.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으면 아마 미친놈 취급하면 도망쳤겠죠? 내 목소리 들려요?”

유림은 기철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투여된 약물은 그녀를 깊은 잠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의 뇌에 저장된 오늘의 기억은 지난 6년간 그랬던 것처럼 휘발될 것이다. 그녀에게 벌어진 사건의 진실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수 십 년 후, 어느 영리한 천체물리학도가 선조의 악행을 알고서 옛 기사들을 뒤적이기 전까지. 그리고 그가 시간여행의 꼼수를 찾아낼 때까지 말이다.


-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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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규 16.02.20 17:48 댓글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보여준 소설이네요. 처음의 남자의 정체가 시간 여행자 였음을 추측케 하도록 하여놓고, 중반부에와선 납치범으로 생각 되겠금 하더니 다시 시간 여행자라고 밝혀 지네요. 재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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