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크고, 무겁고, 무서운 것

 

내가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거나 아무런 연락이 없다면 그때 날 찾으러 와. 그전까지는 아무도 내려오지 말도록.”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정기연락은 꼭 하셔야 합니다. 만약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기는 날엔 회장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저 행성으로 최정예 부대가 파견될 수도 있습니다.]

나라고 아버님 생각을 모를 것 같나. 동생이 아니었다면 저 행성은 이미 초토화됐어. 행성채굴선으로 조각조각을 냈겠지. 하지만 아버님은 동생을 꼭 데리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네. 스물한 살 때 집을 나간 녀석을 찾으시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 게다가 어머님께서도 이 일이 성사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네. 그분을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아.”

[도련님 몸도 생각하셔야지요. 곧 회장 자리를 물려받으실 분이 아닙니까.]

그건 내가 아직 회장이 아니라는 얘기지. 이보게 클리프, 동생은 저기서 혼자 십 년을 살았어. 십 년. 상상할 수 있겠어? 영상에서 보았던 그 크고 무겁고 무서운 것들이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행성에서 대화 상대도 없이 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바이탈 사인에 따르면 동생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어. 난 고작 일주일이야. 그것도 길어야 일주일이지. 당장 오늘 오후에 동생을 데리고 귀환할 수도 있어. 그러니 다시 한 번 정중하게 부탁하건데, 누구도 내려올 생각하지 마. 십 년 만에 만나는 동생에게 약속을 어기는 거짓말쟁이 형으로 낙인찍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궤도에서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클리프 아웃.]

 



우주탐사의 선구자라 불리고 있는 행클리블랜드 회사에서 개발한 최신식 1인 탐사선이 대기권을 뚫고 내려가는 동안 필은, 많은 것을 상상했다. 행성 궤도에서 20인이 상주하고 있는 함선의 지휘를 맡고 있는 클리프는 자신이 타고 있는 탐사선과 마찬가지로 행클리블랜드 회사에서 만든 최신식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다. 그에게 상상할 수 있냐고 물었지만, 로봇은 상상할 수 없다. 저 행성에 있을 동생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 어떤- 어떤- 어떠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질문들이 클리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물음표. 미지의 것이다.

클리프에게 저 초록 별은 그저, 지구의 중생대 시절을 지배했던 거대한 파충류들이 뛰어다니는 놀이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시간이 아주 오랫동안 흘러왔다고 했다. 운석 충돌도, 화산 폭발도, 큰 지각 변동도 없이 아주 평온하게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공룡이라 불렸던 녀석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이다. 그런 행성에 사람이 홀로 십 년을 살아온 것은 기적과도 같은 확률 싸움에서 항상 이긴 것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게 말해 놓고도, 클리프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프로그램에 의한 감정 표현이었지만 필도 그가 느끼는 불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전지전능하지 않는 이상 매일을 기적과 싸워 이길 수는 없으니까.

행클리블랜드 회사는 저 행성을 자원 개발용으로 등록해 놓았다. 그리고 은하정부로부터 승인받았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저 행성에는 소멸되어도 별 문제가 없는 존재들이 있다는 얘기다. ‘공룡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다른 행성에도 있다. 지적생명체가 있는 것도 아니며, 우주적 차원에서 보호해야 할 이유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람이 이주해서 살 수도 있겠지만 지리적인 문제로 인해 항로 개척을 할 필요성도 없었다. 다시 말해 아주 외딴 곳이다. 초록 별 주변 행성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박테리아가 전부다.

그래. 녀석은 일부러 그런 곳을 찾아간 거야.’

상상의 끝에서 십 년 전의 동생이 필을 맞이한다. 기억나는 건 뒷모습이다.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나갔던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건 행성 궤도에 방치된 우주선을 발견했을 때였다. 당시 동생의 우주선을 인양한 업체의 보고서에는 내부 폭발에 의한 동력로 파괴.’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었다. 행성으로 내려갈 준비를 마친 후 스스로 우주선의 동력로를 부순다? 젊은 날의 치기다. 필은 윗니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이 깊어지면 자연스레 나오는 버릇이다. 이성적이라면 언제,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두어야 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동생은 아버지가 구입한 저 초록 별에서 죽을 생각이었다.

꽤나 비싼 자살법이로군.’

그런데 왜 하필 저 별이었을까. 동생이 할 수 있는 자살 방법은 많고 많았을 텐데. 필은 메인 화면에 인양 업체가 넘겨준 보고서를 띄웠다.

로봇 항목이 아예 없군. 어차피 우주선 자체를 고철로 팔았을 테니 거기에 포함되었을 수도 있지만.’

소형 우주선 한 척이 수용되는 크기의 함선을 홀로 운행한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동생이 타고 간 것은 어릴 때 회사 임원들에게서 선물로 받은 구형 우주선이었다. 함교에서 버튼 하나만 누른다고 원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는 최신식 우주선이 아닌, 기관실과 함교의 정교한 소통이 오가야 실수(혹은 실패) 없이 초공간도약이 가능했다. 애초에 죽으려 한 사람이니 그건 별 상관없을 수도 있겠지만, 행클리블랜드의 본사가 있는 항성계와 이곳은 꽤 멀다. 정말로 원해서 이곳까지 오려고 했다면 적어도 로봇을 대동했을 거라는 게 필의 추측이었다.

아버지와의 다툼 이후로 사람과 대화하는 일 자체를 끔찍이도 싫어하게 된 동생이었다. 동행한 로봇이 있다면 우주선과 마찬가지로 구형일 가능성이 높다. 인공지능의 향상으로 실제 사람과 같은 대화가 가능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그렇다면 십 년의 생존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적어도 열 대 가량의 로봇이 그와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대기권 돌입이 끝나자 사고의 연결이 끊어졌다. 화면에 행성 전체를 스캔한 데이터와 지도가 펼쳐진다. 조종간을 잡고 천천히 선수를 돌리며 동생이 있을 방향으로 움직였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건 십 년 전 위성으로 받은 데이터였다. 이곳으로 내려오기 전에 동생과 마지막으로 나눴던 메시지에는 붉은색 지붕을 찾아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붉은색 지붕이라. 붉은색 유성 페인트는 그 아이가 요청한 물건 중 하나였다. 그게 구 년 전의 일이었다. 각종 의료 장비와 약품을 보내 준 것도 그즘이었다.

 



훗날 자녀에게, 과장을 조금 더 보태서 바람이 100년쯤 일해서 쌓아 올렸을 거라는 얘길해 줄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적란운 아래를 통과하자 선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어 급하게 조종간을 조작해 하강했다. 높은 곳에서 붉은색 지붕을 단번에 찾을 생각이었지만 지도를 확인하니 얼추 비슷한 위치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구름으로부터 멀어지자 선체는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나침판을 기준으로 북쪽은 필이 지금까지 왔던 방향이었다. 군데군데 늪이 있고 수풀들이 잔뜩 우거진 지대였다. 그곳을 지나오면서 공룡의 모습은 한 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꽁꽁 숨었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위성사진에서는 하늘을 날고 있는 개체도 쉽게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구름만이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라고 여길 때쯤 고령의 수목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구역의 끄트머리 경계선에서 붉은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멀리서 봐도 확연한 붉은색이었고, 카메라를 확대해도 어김없이 붉은색이었다. 그것도 십자가 모양이었다. 설령 동생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흔적이라는 건 분명했다.

캡슐형 가옥인가?’

행클리블랜드에서 개발한 조립식 캡슐형 가옥은 언제 어디서나 설치할 수 있는 조립식 가옥이다. 강한 바람에 집이 굴러갈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소재를 사용해 만들었지만 지반이 단단한 곳에 고정 핀을 박아 설치하면 안전하다. 우주여행자나 초기 이민자를 대상으로 삼아 판매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강도 면에서는 딱히 자랑할 만한 게 없지만 그래도 비와 모래 폭풍은 막을 수 있다. 필이 자신의 말끝에 의문 부호를 붙인 것은 통나무를 가지고 엉성하게 만든 집의 일부에 캡슐형 가옥이 거북이 머리처럼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까 보았던 십자가는 캡슐형 가옥의 지붕에, 거북이로 말하자면 이마의 위치에 그려져 있었다.

무작정 내려가는 것보다 경계를 하는 게 좋을 듯하여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절벽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도 2층 건물 높이 정도는 돼 보였다. 캡슐형 가옥의 입구는 절벽 쪽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출입하는 건 어려울 듯했다. 엉성하게 지어 놓은 통나무집은 입구가 어디인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비록 캡슐형 가옥의 입구는 절벽을 향해 있지만, 상식적으로 사람이라면 절벽에 출구를 두진 않을 것이다. 절벽의 반대편 쪽에 공터가 보였다. 인위적으로 만들었는지 그 주변에만 나무가 없었다. 딱 소형 우주선이 하나쯤 내려앉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별 탈 없이 착륙을 마친 후 컴퓨터로 공기의 성분을 분석했다. 호흡의 유무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착륙할 때의 충격으로 독소를 내뿜는 식물이 주변에 있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 때문이었다. 분석은 금세 끝났다. 당연히 호흡에는 지장이 없었고 미지의 성분이나 독소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우주선의 엔진을 대기 상태로 전환하고 조종석에서 빠져 나가려던 찰나에, 필은, 무엇인가를 봤다. 분명히 방음이 되어 있기 때문에 들리지 않겠지만 무슨 소리도 들은 듯했다. 수풀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도난방지 시스템 가동.”

그리고 화물칸으로 갔다. 클리프가 신신당부하며 챙겨 준 게 있었다. 도장이나 장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시험품이지만 안정성만큼의 확실하다는 레이저 대물 라이플. 제 아무리 큰 도마뱀이라 할지라도 이거 한 방만 맞으면 오금을 지리며 도망갈 거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이걸 맞고도 도망을 갈 수 있다면 말이지.”

우주선의 선체에 구멍을 뚫을 수 있을 만큼의 화력을 지닌 라이플이다. ‘한 명의 병사가 우주선을 추락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휴대 무기가 필요하다.’는 군의 의뢰를 받아 만든 무기였다. 그리고 필의 아버지는 이 의뢰를 받은 후 레이저 대물 라이플의 화력에 견딜 수 있는 방어막 개발도 진행시켰다. 레이저 대물 라이플의 군 납품이 시작되면 블랙마켓을 통해 방어막 생성기를 판매할 계획이었다. 군에 대항하는 게릴라든지, 누군가에게 밉보인 회장이라든지, 너무나 사랑받는 나머지 소유욕이 지나친 정신병자에게 쫓기는 스페이스 스타라든지.

백 년간 얼린 얼음 속에 갇힌 것처럼 차가운 라이플의 총신을 잡은 순간, 방금 전에 본 그림처럼 선명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필은 머리를 흔들어 그 이미지를 떨쳐내려 했다. 왜 지금에 와서야 갑자기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그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우주선 바깥의 공기를 처음 폐에 담는 순간, 구역질이 나올 뻔했다. 살짝 숨을 멈췄다가, 폐 안에 있던 모든 공기를 내뱉은 다음 다시 바깥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현대의 인간에게 알맞도록 정제된 공기가 아닌 온갖 부유물들이 섞여 혼합된 대자연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냄새였는데, 신록의 짙은 향기가 마치 그를 한입에 삼켜 버릴 것처럼 자신의 거대한 존재를 뽐내는 중이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군.”

일단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우주선의 꼬리 쪽으로 이동했다. 그쪽 방향에 아까 보았던 통나무집이 있다. 숲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에, 부스럭 거리던 소리를 들은 듯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주선의 메인 컴퓨터와 연결된 휴대용 단말기를 조작해 주변을 스캔했다. 내리기 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파충류의 징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단순히 벌레일 가능성이 높았다.

후우. 하는 수 없이 필은 등에 메고 있었던 레이저 대물 라이플을 제대로 파지했다. 파충류가 어떠한 모습으로 진화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행성에서 안심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이지 않았다. 크고, 무겁고, 무서운 것뿐만 아니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보통 사회적으로 약한 존재란 떼를 지어 힘을 내기 마련이다. 처음 봤을 때 확실히 제거하지 않는다면 분명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다.

통나무집과는 거의 백 미터쯤의 거리였다. 약간의 경사가 있는 거리를 삼백 미터쯤 걸은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무렵 숲이 끝나고 절벽의 모습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에야, 그게 통나무집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상공에서 보기에 조악했던 그 집은 집이 아닌 우주선이었다. 그래. 상식적이란 면에서 생각해 보자면 당연한 일이다. 필과 마찬가지로 그의 동생도 우주선을 타고 내려왔을 것이고, 우주선은 동력만 멀쩡하다면야 여행자가 생활하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는 주거지다.

통나무집의 표면에 손을 갖다 대자 방해전파를 받고 있는 영상 화면처럼 홀로그램이 흐릿해졌다. 행클리블랜드에서 생산한 우주선이었다. 오른쪽으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우주선의 출입구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주선의 표면에 계속 손을 갖다 댄 채로 오른쪽 방향으로 이동했다. 문을 열기 전에 뒤를 한 번 확인한다. 아무도, 아니 아무것도 없었다. 문 안쪽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총을 계속 조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잠깐 필의 머릿속에 박혔다. 사고 회로에 정밀한 수술이 요구됐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의 얼굴에 총구를 겨눌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드는 게 과연 필요한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 그의 얼굴을 잔뜩 찌푸려 놓았다.

천천히 바닥을 향하는 총구가 도중에 멈춘다. 몸에서 발산되는 열 때문에 총신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목에서 느껴지는 이 차가운 감촉은 분명 총신과 같은 재질의 물체였다. 필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상대에게 말했다.

난 네가 행클리블랜드에서 생산된 로봇이라는 걸 알고 있다. 넌 나를 해치지 못해. 네 보안 프로토콜에 걸린 조항들은 내가 고안한 거니까.”

상대가 아무리 구형 로봇이라 할지라도 사용한 AI의 기본 토대는 최신 로봇과 똑같다. 행클리블랜드의 로봇 AI에는 오너 일가를 해치지 못하게끔 설정한 조항들이 입력되어 있다. 필을 제외한다면 이 사실을 아는 건 행클리블랜드의 오너인 필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동생뿐이다. 그러한 항목을 입력하던 과거를 상기하기가 무섭게 필은 오금이 저렸다. 지금 이 로봇은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건 프로그램 상 불가능한 일이다.

차가운, 아주 차가운, 더 없이 차가운 금속의 표면이 필의 볼에 다가왔다. 목을 누르고 있는 칼날의 감촉과 똑같은 게 그의 볼에 닿았다.

[당신이 필립 롭스 행클리블랜드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의 형제분이시죠.]

그래. 잘 알고 있군.”

필은 두말하지 않고 라이플의 손잡이에서 손을 놓았다. 목에 걸린 멜빵끈 때문에 라이플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무게 때문에 몸이 잠시 주춤거렸다.

[이곳까지 오시는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동생 분을 만나러 오시는 것치고는 경계심이 대단하시더군요.]

구형 로봇의 음성에는 뚜렷한 형체가 있는 적의가 숨어 있었다. 칼날이 닿아 있는 경동맥의 울림이 사고 회로를 압박한다. 이 로봇의 AI는 완전 초기화 상태였다. 수백만 년의 세월을 로봇에게 쥐어 준다 할지라도 최소한의 양심이 태어날 리 없다. 그게 바로 로봇을 제어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로봇은 진화의 대상이 아니다. 통제하고 조종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이곳에 위험한 파충류들이 많다고 하더군.”

[아니요. 이곳에서 가장 위험한 종은 바로 당신입니다. 제게 주어진 권한으로 당신에게 조속한 퇴거를 명령하고 싶지만쉽지 않겠지요.]

지금 로봇이 고민하는 것인가?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필은 재빨리 놀고 있는 혀를 굴렸다. 이 로봇에게 동생이 최고 결정권자라면 자신의 생존여부는 동생을 최우선으로 찾는 것에 달려 있었다.

내 동생은? 칼은 어디 있지?”

위이이잉-. 우주선 입구의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그와 동시에 필의 목덜미를 누르던 차가운 적의도 사라졌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우주선 안쪽 입구에 동생이 서 있었다. 구형 로봇에게 살해 위협을 받은 것보다도 더 큰 충격이 필의 뒤통수를 후렸다. 자신의 기억력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처음 깨달은 문장가처럼 종이 위에서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머뭇거리듯, 입을 벌린 채 말을 꺼내지 못한다. 바보처럼 보이는 형의 모습에 칼은 수줍게 웃는다.

칼은 십 년 전의 모습과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이 행성에서 자생하는 식물들 중 고르고 고른 것을 덖어서 만든 차라고 내주는데 향이 무척 좋았다. 필이 이게 젊음의 비결이냐고 묻자, 칼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맑은 공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이런 환경이 몸에 잘 맞는 것일지도 모르죠.”

각종 의약품과 인공 장기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많이 늘긴 했지만 태생적 한계는 극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칼은, 필립이 기억하는 십 년 전과 전혀 다를 것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십 년의 세월을 증명하듯 다른 천을 덧대 이곳저곳을 기운 의복과 달리 칼의 육체는 시간과의 약속에서 길이 엇갈린 것처럼 보였다. 회사에서 지금껏 수집한 칼의 바이탈 사인이 꾸준히 일정했던 이유가 이제야 이해됐다.

필은 입안이 메마르는 것을 느꼈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 온도가 적당하군.’을 생각한 다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지, 아니면 별로 관심도 없는 이곳의 생활에 대해 물어봐야 할지를 고민했다. 칼은 분명 가족이었지만, 십 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못한 가족이었다. 차를 내려놓는 동작 사이에서 고민을 끝낸 필은 일단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이곳에 잘 적응한 거 같아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괴감에 빠졌다. 이건 십 년 전에 말했어야 했다.

. 회사에서 계속 신경을 써 주니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

혀끝에 취사선택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이 맴돈다.

저 로봇은-”

가넷입니다.”

뭐라고?”

이름 말입니다. 가넷입니다.”

. 그래.”

형님의 어머니께서 좋아하셨던 보석이었죠.”

아차. 혀끝을 깨물고 말았다. 예상하지 못한 한 방이었다. 자신에게 살의를 가지고 접근했던 저 로봇처럼, 동생 역시 처음부터 웃음 뒤에 송곳을 숨기고 있었다. 필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때도 말했지만, 네가 그렇게 화를 낼 일은 아니었어.”

그때도 말했지만, 형님의 어머니입니다. 어떻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머니의 결정이었으니까.”

아아- 그래. 필은 오른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떻게 우리는 십 년 전과 다른 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을까. 그의 말을 끝으로 동생은 집을 나갔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십 년 전의 일을 복습하는 꼴이군.”

이곳에 오신 이유는 뭡니까.”

대충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아마 네 생각이 맞을 거야.”

칼은 날숨에 온갖 사유를 담아 허공에 흩뿌렸다. 십 년의 세월 동안 쌓인 갖가지 감정들이 조각난 채 방황하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우주선 바닥에서 거절의 낱말들이 모래사장을 이루고 있다.

회장이로군요.”

아버지께서는 너를 꼭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회사 임원들은 후계자 문제 때문이라고 말하더군.”

형님이 계시잖습니까.”

맞다. 그리고 회사 임원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아우님의 어머니지.”

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머님이요?”

십 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아버님의 건강은 많이 악화되었고, 네가 사라진 이후 아우님의 어머님은 회사 권력을 붙잡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셨어. 그리고 지금은 네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지.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널 꼭 데리고 갈 생각이다.”

이곳도, 십 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마침 조종석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문이 열리면서 가넷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손에는 몇 종류의 다과가 담긴 접시에 담겨 있었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접시를 조심스레 올려놓는 모습을 보면서 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많은 일이 있었겠군.”

널 데리고 갈 수 있는 방법은 많다. 그중 하나라면 저 로봇을 우주연방관리국에 신고하는 거지. 인공지능을 해킹한 로봇은 수거 대상이니까. 그리고 그 로봇을 만들거나 소유한 사람도 엄벌에 처하거든. 넌 있어도 되는 장소를 잃고, 널 아버지처럼 따르는 로봇도 구하지 못할 거야. , 또 죽고 싶니? 사라지고 싶니?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다. 지금 네 주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건 어른들의 비지니스니까.

필은 실없이 웃었다. 자신의 뱃속에서 허락도 없이 자꾸 낼름거리는 이성의 혓바닥을 잘라 버리고 싶었다.

저 로. 흠흠. 가넷의 AI를 완전초기화했던데.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 건가?”

사람에게도 세뇌교육을 필수로 하자고 하시죠.”

무기를 들고 날 위협했다. 걱정할 만한 이유가 있어.”

[손가락이었어요.]

다과를 내려놓은 후 칼의 뒤에 서 있었던 가넷이 재빠르게 말했다.

가넷. 난 분명 형님을 안전하게 모시고 오라 말했을 텐데.”

[알아서 잘 오셨죠. 그러니 여기에 앉아 있는 거고요.]

가넷.”

칼이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가넷은 팔짱을 끼고 벽을 쳐다봤다. 사람으로 치자면 아마도,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서 이를 악물고 있을 것이다.

[알아요. 나도 알아요. 아마도 아버지 외의 사람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러겠죠. 하필이면 그게 행클리블랜드에서 온 사람이고.]

그만.”

[아뇨. 더 해야겠어요. 행클리블랜드의 회장이 아버지를 찾는 이유야 뻔하죠. 또 새로운 뇌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자사의 인공지능 시스템을 더욱 발전시키고 싶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표본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믿을 수가 없고. 그래서 후계자를 핑계로 아버지를 찾고 있는 거예요. 저 불쌍한 사람은 그것도 모르고 왔겠죠. 정말로 아버지의 어머니께서 자기 아들을 꼭 찾고 싶어 한다는 것만 믿고요. 이미 했던 이야기잖아요.]

점점 소리가 커지는, 그러니까 언성이 높아지는 가넷의 목소리가 신기해서 가만히 듣고 있었던 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동생을 쳐다봤다. 칼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미 했었던 이야기라고?”

[물론이죠. 아버지께서는 다 예상하셨어요. 회사가 노리고 있는 것은 아버지 당신의 뇌일 거라고. 겸사겸사 제 데이터도 얻어 가면 좋겠죠.]

지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네요. 전 당신의 어머니, 에를린 인디애나가 스무 살일 때의 뇌를 완벽하게 복사한 AI예요. 유일무이하죠.]

스무 살. 필의 어머니가 결혼을 발표하기 전이었다. 에를린 인디애나는 우주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두뇌를 지닌 과학자였고, 그녀가 연구하던 건 로봇의 AI 분야였다. 에를린은 사람처럼 사고할 수 있는 인공지능을 꿈꾸었는데, 그에 대한 연구비를 지원했던 게 행클리블랜드였다. 당시 행클리블랜드는 개인 항해가 가능한 우주선 개발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 계획의 핵심은 로봇으로 이루어진 선원으로 우주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AI가 필요했다.

행클리블랜드 회장은 에를린이 꿈꾸는 로봇 AI 개발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다면 오로지 자신의 회사에서 제조되는 로봇에게만 장착하겠다는 조항도 납득시켰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러하듯, 에를린 역시 개발과 사용은 엄밀히 다른 분야라고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사람과 다를 바 없는 AI의 완성 이후로 에를린은 자취를 감추었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자택에서 더 나은 인공지능의 개발을 위해 연구 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달랐다.

[에를린은 과학자가 아닌 자신을 남기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마지막 결정을 하기 전에 날 만든 다음 아버지에게 맡겼죠. 자신의 결정을 끝까지 반대한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도 알잖아요? 지금 행클리블랜드가 제조하는 AI의 중추를 제어하는 소프트웨어는 나노머신이 분해한 에를린 박사의 뇌라는 걸.]

제길.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야 칼의 뇌가 필요하다는 거지?”

그건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입니다.”

칼은 가느다란 왼손 검지로 이마의 정중앙을 꾹 눌렀다.

“2년 전에 남성 어른을 기본으로 하는 OS가 나왔습니다.”

클리프 모델이지. 아직 클리프 모델이 오류를 일으킨 적은 없어.”

, 그렇죠. 표면적으로는. 그런데 문제가 발생할 겁니다.”

발생할 문제라고?”

클리프 모델은 지배자가 된 자의 뇌를 표본으로 AI로 만들었기 때문에 영원한 복종이라는 걸 모릅니다. 형님이 만든 보안 프로토콜로 억제하고 있다 할지라도 언젠가는 인간을 배신할 겁니다. 그게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본성이니까요. 어머니. 그러니까 제 어머니는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클리프 모델에 적용된 OS를 전부 수정하려는 계획을 세운 거죠.”

잠깐. 잠깐 기다려 봐.”

필은 그제야, 자신의 동생이 그저 단순히 사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이곳으로 도망친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털이 뽑힌 조류가 된 것처럼 닭살이 돋았고, 혼란으로 가득 찬 머리는 뱃속의 의무감을 내뱉으려고 구역질을 유도했다.

클리프가 단순히 구형 OS의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한 게 아니라고?”

형님.”

칼은 나무 껍질이 입안에서 부드러워질 때까지 묵묵히 씹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불렀다.

회장을 마지막으로 직접 본 게 언제입니까?”

.”

그의 침묵을 대답 삼아, 칼은 계속 말을 이었다.

“2? 3? 4? 마지막으로 들었던 음성이 정말로 회장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필의 눈에 보이는 건, 자신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있는 가넷의 편평한 얼굴 표면뿐이었다.

 



우두두둑. 흥이 겨워 두터운 유리창으로 튀어 올라 부딪치는 자갈들이 내는 소리처럼, 우주선 표면을 두들기는 소리가 이어진다. 칼이 가넷을 쳐다보자 그녀는 창문 가로 가서 햇볕을 가리기 위해 내려놓았던 직사각형의 천을 거둔다.

하늘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처럼 이 구역에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저 멀리 먹구름 너머로 보이는 햇빛은 너무나도 눈부셔서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는 무엇인가를 심장 속에 뿌리는 듯했다.

[적란운이 이동한 거 같습니다. 예상보다 하루 빠르군요.]

그래. 날씨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건 지금 이 시대에도 불가능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형님. 아무래도 돌아가시는 시간을 미루어야 할 거 같습니다.”

왜 그러지?”

이곳의 비는구름은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름에 가까이 접근하거나 내리는 비에 닿는 기계는 오작동을 일으키며 멈춥니다. 구름이 이동할 때까지 하루나 이틀 정도 기다리셔야 될 겁니다.”

칼의 설명에 필은 자신이 가져온 통신 장비를 살펴보았다. 전원은 정상적으로 켜져 있었다. 필이 칼을 슬쩍 쳐다보자 동생은 어깨를 으쓱였다. 한 번 확인해 보라는 뜻이었다. 통신 장치를 작동시키자 전파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잡음을 토한다. 마치 광범위한 방해 전파가 주변에 깔린 듯했다.

그래. 구름에 가까이 갔을 때 우주선의 상태가 이상하긴 했다.”

대기권 진입 이후의 일이었다. 거대한 적란운 가까이 갔을 때 선체가 까닭없이 심한 진동을 일으켰었다.

구름을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면 틀림없이 추락했을 겁니다.”

필은 가넷을 쳐다봤다.

이 안은 괜찮은 건가?”

[비에 맞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필은 자신의 뇌를 다독였다.

비에 맞지만 않으면 괜찮다는 말이지.”

다르게 말하면, 비에 맞으면 문제가 된다는 얘기다. 필의 중얼거림을 잡아낸 가넷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세라믹으로 코팅된 얼굴 표면이 마치 일그러진 것처럼 주름이 졌다. 필은 몸을 뒤로 젖혀 한 바퀴를 구르며 등받이가 낮은 의자에서 빠져나왔다. 대포에서 발사된 포탄처럼 앞으로 튀어나오는 가넷을 향해 의자를 걷어찬 그는 문 옆에 기대어 서 있는 레이저 대물 라이플을 집었다.

가넷은 자신의 단단한 신체로 날아온 의자를 뚫었다.

칼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 숨겨 놓았던 핸드건을 꺼냈다.

필은 레이저 대물 라이플을 조준하고 발사했다. 아주 높은 곳을 향해.

붉은빛이 우주선을 뚫고 하늘로 치솟는다.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구름과 하나가 되더니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비상한다. 흔적을 남긴 꼬리를 추적하여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면 지붕이 뚫린 우주선이 있다. 그 구멍 속으로 비가 거침없이 쏟아져 들어간다.

아슬아슬했군.”

칼날처럼 변한 가넷의 손이 필의 가슴에 닿아 있다.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은 필의 피부를 뚫고 피를 머금는 데에 성공했지만 그 이상 나아가지는 못했다. 0.1초라도 더 늦었다면 분명 심장이 뚫렸을 것이다.

필은 자신의 위에 뚫린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빗물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은 두 사람에게도 고마워했다.

무슨 짓입니까.”

필은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가넷을 밀어냈다. . 둔탁한 소리를 내며 가넷은 균형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는 천장의 구멍에서 쏟아지는 비를 피해 내부 쪽으로 조금 더 들어왔다.

나라면 쐈을 거다. 이 로봇이 맞든 말든. 어차피 맞아도 상처 하나 나지 않았겠지만.”

형님!”

네 말은 아마 다 맞을 거다.”

?”

레이저 대물 라이플의 총구가 움직인다. 먹잇감을 포착한 뱀처럼 빠르게 바닥 위를 기어가는 그림자가 가넷의 머리 위에서 멈추었다.

어머니, 아버지, , 그리고 네 어머니에 대한 얘기. 다 맞을 거다. 그 얘길 모두 들으니 떠올랐는데, 거기에 내 이름은 없더군. 난 아직 괜찮은 모양이야.”

필이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손에 들고 있는 위험한 물건은 거기에 그대로 내려놔. 난 너를 데리고 갈 거다. 아무래도 그게 내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인 거 같군.”

 



문이 열리지 않았다. 칼은 친절하게 수동 개폐 방법이 있다는 걸 알려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레이저 대물 라이플로 문을 날려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칼이 가지고 있었던 핸드건은 압수당했다. “맙소사, 화약총이라니.” 필은 경악을 하더니, 최근 회사에서 군납을 시작한 신형 핸드건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숲을 지나칠 쯤, 대화가 끊겼다. 칼이 큰 소리를 내며 필에게 돌진했다. 느닷없는 행동이었지만 충분한 거리가 있었기에 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찰칵. 레이저 대물 라이플은 침묵했다. 그제야 그는 이곳의 가 단순히 전자기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칼이 들고 있던 화약총의 존재도 납득이 갔다.

수갑 때문에 팔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지만 칼은 충분히 잘 싸웠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연과 상대해 온 사람답게, 이빨을 쓸 줄도 알았다. 그러나 상대는 충분한 시간과 자본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필은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칠 이유가 없었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뭐든지 배울 수 있었다. 그에게는 각종 격투기 자격증은 물론, 사범 자격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몸통 박치기를 맞아 발목을 삔 사람처럼 비틀거리긴 했으나 금세 균형을 잡고 반격을 가한다. 레이저 대물 라이플을 막대기처럼 양손으로 잡고 올려치자 칼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꺾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개머리판으로 복부를 가격했고, 자연스레 아래로 내려온 머리를 무릎으로 걷어 올렸다. 당분간 칼은 일어서지 못할 듯했다.

지랄 맞은 비군.”

필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건을 꺼내 쓰러져 있는 칼을 향해 발사했다. 타앙! 깜짝 놀라 핸드건을 떨어트릴 뻔했다. 땅에서 천둥을 쏘아 하늘로 올려 보낸 것처럼 소리가 정말이지 무시무시하게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

칼은 감았던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본다. 방금 소리로 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방금 결정했다. 내 우주선으로 돌아가면 널 장기항해캡슐에 넣을 거다. 필요한 건 살아 있는 네놈의 뇌니까, 굳이 깨어 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전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무릎 관절도 아작을 내고.”

지금 해 주면 안 됩니까?”

고대의 양아치 새끼들은 죽일 상대가 있으면 야산으로 끌고 가서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게 만들었다더군. 어서 일어나 걸어.”

다시 걸었다. 비스듬히 내려가는 경사였지만, 오백 미터쯤 되는 길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아주 긴 백 미터였다. 사방에서 무엇인가 튀어나올 것처럼, 빗방울이 떨어지는, 우수숙, 우수숙, 우두둑, 두두둑, 스르륵, 온갖 소리들이 집요한 바퀴벌레처럼 귓구멍으로 들어왔다.

좋은 우주선이군요.”

필은 자신의 우주선을 보고 감탄하는 칼을 거칠게 밀어 외벽에 갖다 붙였다. 신경이 너무 곤두섰는지 우주선의 문을 열기 위해 조작하는 손이 부들부들 떤다.

삐이익. 도난 방지 시스템 가동.

제길.”

정말로 지랄 맞은 비다. 센서가 고장 난 것인지 암호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입력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동 개폐를 하려던 찰나, 살아 있는 그의 센서가 무엇을 감지했는지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하게,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긁고 미끄러지듯, 아주 조그마한 마찰음을 내며 다가왔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목표만을 노리고, 능숙한 사냥꾼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주시했다. 그리고 상대의 움직임이 경직된 찰나, 살아 있는 경계경보가 막 울리려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총알처럼 튀어나가 필을 제압했다.

카아악.

손톱인지 발톱인지, 아니면 칼인지, 창인지, 이빨인지 뿔인지 모르는 것이 필의 어깨를 관통하고 우주선의 외벽까지 박혔다. ! ! ! 몇 번이나 총이 발사되었지만 등 뒤에 있는 것을 제대로 맞추기는 어려웠다. 필이 발버둥을 칠수록 등 뒤의 존재는 강한 힘으로 서서히 그의 등을 짓눌렀다. 마치 햄버거를 한입에 먹으려고 꽉 누르는 주먹처럼- 패티가 조각나지 않게끔 조심하는 섬세한 힘 조절이 있었다.

고통 사이로, 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토. 그만 눌러요. 사람 터지겠네. 당신 발톱에는 마취 성분이 있으니까 곧 기절할 겁니다. ,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럼 이제 천천히 빼요. 죽으면 아주 곤란하니까. 무리로 돌아가기 전에 폭포에서 꼭 발톱 씻어요.”

파충류와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대체 어떻게? 마취 이야기는 진짜인 듯했다. 지옥불에 발을 담근 것처럼 어깨에 난 상처가 화끈거렸지만 아무런 동작도 취할 수 없었다. 몸은 중력에 의탁을 하고, 정신은 나락으로, 시야는 빗물을 머금은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그 위로 칼의 목소리가 빗줄기처럼 쏟아진다.

형님. 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신을 잃기 전까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조금 말해보도록 하죠. 전 형님을 장기항해캡슐에 넣을 겁니다. 생명보호장치가 형님을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겁니다. 비가 그치면, 위에서 사람이 내려올 거고, 형님을 회수할 겁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가겠죠. 어머니는 아주 기뻐하실 거예요. 이렇게까지 순순히 명령을 수행한 사람이 자기 아들이라는 게 자랑스럽겠죠. 아아- 형님. 잠에 저항하지 마세요. 더 이상 깨어 있지 않아도 됩니다. 중요한 살아 있는 형님의 머리 안에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 그만, 주무세요. 아참, 만나서 정말 즐거웠습니다.”

 

어둠이 다가온다.

크고, 무겁고, 아주 무서운 어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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