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추적의 마지막

2017.09.16 04:0109.16

"노숙 생활을 하신 적도 있다고요?"
"네. 오래는 아니고 며칠 정도요. 차도 집도 압류당하고 나니 갈 곳이 없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에게 좀 도와달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 그 때는 자존심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그런 얘기 못하겠더라고요."
"힘들지 않던가요? 갑자기 모든 걸 잃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처음엔 그냥 멍했어요. 잘 데가 없어서 잘 곳을 찾아다니면서도 멍했고요. 큰일났구나,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구나 생각이 든 건 모음역에서 이틀째 자면서였어요."
"그 강동구에 있는 지하철역요?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음, 계기라기에는 좀,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첫 날 코트를 덮고 대충 자다가 둘째 날에는 첫 날에 추웠던 생각이 나서 박스같은 걸 주우러 다녔어요. 그게 이상한 게 시간이 지나있는 걸 보면 분명히 자긴 했는데 계속 피곤한 거예요. 박스도 막상 찾으려니 큰 게 잘 없어요. 평소에 찾아보지도 않았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제가 무작정 찾은 건 아니거든요. 첫 날 주변을 둘러보니까 다들 박스를 세워놓고 주무셨어요. 나중에 그 분들에게 물어봤더니…"

TV 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것은 생긴지 얼마 안 된 습관이다. 아침마다 나를 깨워주던 아내가 사라진 후부터 그랬으니까. 학교 다닐 때는 시간 맞추는 게 그다지 고생스럽지 않았는데 회사에 다니고 결혼을 하면서부터 아침에 혼자 깨는 게 어려웠다. 어느 날은 전날 술자리에서 주는 대로 마시다가 11시에 일어나는 바람에 보고를 못해서 부재 중 전화 19통을 찍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 날로 자명종 시계를 세 개 샀다. 지정된 시각이 되면 TV를 자동으로 켜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TV에도 기능을 설정했다. 이후로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고 나를 깨워주는 목소리가 그리웠다. 자명종보다 TV 소리에 잘 깨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어떻게 그래요. 하하하하."
"아니, 정말 그렇게 된다니까요. 저도 그 전에는 상상도 못했다니까요."
"그럼 그 동안 다른 일은 없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든가."
"글쎄요. 아, 하나 있어요."
"뭡니까? 그게."
"가끔 사람이 없어지는 자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없어진 사람들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자리가 있어요?"
"그럼요. 자리 싸움이 얼마나 치열한데요. 대합실이 크게 있으면 그 중에서 여기서 자는 게 그래도 낫겠다 싶은 곳이 있잖아요. 여름같으면 좀 시원한 곳이라든가, 입구 바로 앞 자리는 피한다든가. 그런데 그 중에 사람이 있다가 없어지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요."
"무슨 이유가 있나요?"
"그게, 그 분들 사이에서도 잘 아는 게 아니래요. 저한테 말해주신 분은 자기만 아는 거라고 했지만. 사실 거긴 별로 좋은 자리 아니거든요. 별로 자리 싸움 벌어지는 그런 데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잔 사람이 다음날 없어졌다는 거예요. 두 명이 그랬다나요."
"자리를 옮긴 게 아닐까요? 좋은 자리가 아니었다면서요."
"좋은 자리로 가려면 그쪽에서 싸우느라 소문이 나고, 시끄럽게 마련인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잖아요. 어쨌거나 로또를 맞았는지 어디 잡혀가기라도 했는지 사라진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저 방송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고 듣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화면 속에서 재기발랄하게 인터뷰를 끌어가는 남자 진행자는 한 달 전쯤 죽었다. 아직까지도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니 자연사가 아니라는 점만은 확실한 듯하다. 저 방송은 작년쯤 나왔고, 게스트로 출연한 남자 배우는 이후로 한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았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시청률이 30%를 넘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들었다. 나는 연예계 소식에 관심이 없지만 회사에 저 사람이 나오는 광고가 들어오고 길바닥이며 인터넷에 저 사람 광고가 안 붙는 곳이 없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다.

새벽같이 죽음을 팔아먹는다. 죽고 싶어서 죽었는지 어땠는지 밝혀진 것도 없고,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도 어딘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저 남자 배우가 새로 작품에 들어간다고 하니 그 홍보의 일환으로 예전 방송을 다시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목소리가 나를 깨운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덕분에 늦지 않게 출근할 수는 있었다. 요즘 하는 일은 출근보다는 교대에 가까웠다. 그냥 서초동 모 처의 차 안에 12시간쯤 있는 게 일이었다. 다선그룹 총수 김수한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은지 반년이 넘어갔지만 홍보실에서 이렇다할 이야기를 내놓지 않아서 그의 집 근처에서 계속 대기하기로 한 것이다. 데스크에서 지시가 떨어졌을 때 최소한 3교대로는 해달라고 했지만 인력이 부족하다는 한 마디는 내 요구를 거절하는 데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초과근무수당을 청구하겠다고 하자 데스크는 그저 웃어넘겼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나는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자리를 지키면 되었다. 그나마 밤샘 야간근무를 하지 않는 것은 내가 말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벌 총수쯤 되는 사람들이, 우리가 나름 위치 선정에 신경을 썼다고는 해도 이처럼 허술하게 시간 맞춰 교대하는 사람들을 몰라보나 싶기도 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대충 들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차 안에 틀어박혀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내 일상을 채우는 것보다는 그렇게 쫓겨나는 게 나을 것 같다.

똑똑

검은 세단. 그나마 이 동네에 서 있기에 이질감은 없었다. 새벽빛을 받아가며 나오긴 했지만 썬팅도 엄청나게 했는지 밖에서는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딸깍 소리가 났고 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오셨어요, 김수진 선배."

내가 차에 탔더니 운전석에 있던 2년 후배 연희가 인사를 한다. 룸미러로 보니 피곤에 찌들대로 찌들었다. 여자들 외모 치장에 별 관심없는 내가 보기에도 꽤나 공들인 얼굴과 헤어, 의상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게 꾸미고 다니던 친구였는데 차 안 칩거 생활을 하자마자 모습이 달라졌다. 블라우스는 후드티로, 스커트는 청바지로, 하이힐은 운동화로 바뀌었다. 화장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머리는 눌린 머리였다. 상황에 따라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여자란 신기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일 없지?"
"네. 드나드는 사람도 없네요. 이 집은."
"그 시간에 누가 오겠냐. 헛짓하는 거라니까."
"뭐가 나올지도 모르잖아요."
"기껏해야 건강이상일 텐데 막말로 건강이상이면 우리가 뭐 어쩌려고. 그게 뭐 중요하다고 이래야하냐."
"하하. 그래도 캠코더가 있어 다행이네요. 덕분에 어젠 좀 자면서 했어요."
"자는 동안 온 사람은?"
"없겠지요. 새벽 세 시에 잠깐 잤는데 누가 있었겠어요. 배터리 나가서 확인은 못 했는데."
"모르는 일이니까 배터리 충전해서 확인해봐."
"네."
"뭐 나오면 연락하고."
"네."

쌍안경을 들어 앞을 바라봤다. 거리가 제법 가까워 쌍안경으로 보는 게 오히려 시야에 방해가 되었다. 쌍안경을 다시 내려놓고 내가 가져온 배터리와 메모리 카드 가방을 열었다. 연희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많이 가져왔어요?"
"많아? 이게?"
"대충 보기에도 20개는 되는데요."
"배터리랑 메모리 카드만 시간마다 바꾸고 잘 거니까 그래야지."
"일 안하세요?"
"일하지. 이거 바꾸는 일. 이래봬도 이거 충전하느라 집에 숨은 콘센트를 샅샅이 다 찾기까지 했는데.
"집에 콘센트가 20개나 있어요?"
"멀티탭 몇 개 샀어. 전기 요금은 못 받아도 멀티탭 값은 회사에 배송비까지 다 청구할거야."

연희는 어이가 없어 보였다. 이해는 간다. 나도 입사 초기에 지금 데스크를 맡은 선배에게 저런 표정을 지어보인 적이 있었다.

"영상 촬영이라 자주 체크해야해서 제대로 잘 수도 없어. 그래서 책도 가져왔어. 이거 봐."

나는 또 다른 가방을 서둘러 열고 그 안에 있던 책 한 권을 꺼내 자신만만하게 연희에게 보여주었다.

"김 선배, 요즘 이직 준비해요?"

두 손으로 잡은 책을 내 쪽으로 돌려 표지를 봤다. 책 제목은 '타로카드의 모든 것'이었다. 순간 나는 당황했지만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뭐, 미래는 알 수 없으니."


그렇게 연희를 보내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들어 짧은 꿈을 꾸기도 했고 잠깐 깨어나서는 목을 뒤로 젖히며 팔을 뻗어보기도 했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으면 다운로드받은 영화를 봤고 영화의 여운이 사라지는 것 같을 때 다시 잠을 청했다. 제대로 일하던 시기에 비해 덜 바쁜 것은 틀림없었다. 일하라고 감시하는 눈도 없었다. 가끔 데스크가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내가 없는 일을 만들어낼 수도, 필요도 없으니 별 일 없다고 말하는 것이 통화의 전부였다.

좁디 좁은 곳에서 하루의 절반을 보내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지루하고 보람 없고 갉아먹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일명 뻗치기를 하다가 무언가 수확을 거두는 일은 제법 있었지만 그것은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하는 입장에서는 이 일을 언제까지 견뎌야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언가 얻으면 좋겠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 것도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해서 철수하면 그 때 무언가 잡히기도 한다. 이 일은 꽤나 피곤하다.

켜놓은 캠코더에 불빛이 깜박거렸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가져온 배터리를 찾으려고 가방을 열었다. 가방에서는 아까 연희에게 보인 타로카드 책이 나왔다. 책을 꺼내 무릎에 놓고 가방 아래쪽에 숨어든 배터리를 꺼냈다. 무릎에서 책이 미끄러졌다. 떨어진 책을 다시 집어드는데 데빌 카드의 설명글이 있었다. 다른 디지털 카메라의 동영상 기능을 켜고 캠코더를 들어올렸다. 메모리카드도 용량이 얼마 남지 않은 채였다. 어제 충전한 것으로 배터리를 바꾸고 영상을 빠르게 돌려봤다.

오후 6시 반쯤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김수한과 면식이 없지만 그럼에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기사에 늘 빠지지 않고 함께 등장하는 사람. 사진이 실릴 때 항상 옆에서 함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이었다. 수행비서라던가. 그랬던 것 같다. 작은 서류가방 하나를 들고 걸어 들어갔다가 7시가 좀 넘은 시각에 나왔다. 그 외에는 드나든 사람이 없다. 연희에게 아직까지 전화가 오지 않은 것을 보니 어제 밤에 찍은 화면에서도 별로 건질 게 없었던 것 같다.

캠코더를 끄고 메모리 카드를 포맷된 것으로 바꿨다. 시간은 마악 8시가 되어갔다. 무심코 앞을 보는데 누군가가 내 앞을 지나가 벨을 눌렀다. 당황스러웠던 부분은 끌차에 무언가를 얹어 가는데, 바퀴가 달렸는데도 꽤나 힘겹게 나른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 저게 뭐지? 어쨌든 문이 열렸고 그 사람은 짐을 집 안으로 날랐다. 디지털 카메라도 이 모습을 메모리 카드에 담아냈다.

들어갔던 사람이 나오기까지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나올 때는 빈 손이었다.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 사람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고 은색 봉고차에 올라타더니 차가 움직였다. 무언가 물건을 운반하고 돌아가는 게 분명했다. 그다지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귀찮다는 게 이유였으리라. 공연히 어떤 일에 말려들 생각도 없었다. 움직이기 싫은 것 외에 움직여서는 안될듯한 기분도 들어 혼란스러웠다. 내 기분을 나조차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밀려오기도 했다. 무엇도 명확하지 않았다. 내게 주기적으로 돈 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해야겠지만 나 개인으로는 피하고 싶은 일. 여기서 내가 어떤 일을 선택할지는 오랜 관성이 결정할 것이다.

숨을 죽이고 데스크의 자리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차례 가는 동안 은색 봉고차는 골목을 빠져나갔다. 부서 전체가 비었는지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아 데스크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도 차로 골목을 빠져나가 은색 봉고차가 지나간 길을 따랐다. 음성사서함 메시지가 나오자 나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은색 봉고차는 대로변으로 나섰다. 나도 그 차를 따라갔다. 사실 나는 마음 속으로 크게 당황했다. 그래야할 것 같아서 따라 움직이기는 했지만 나는 누군가를 미행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은색 봉고차와 나 사이에는 차가 두어 대 있었는데 이 정도로 내가 미행하는 것을 무언가 수상쩍은 은색 봉고차 운전자가 눈치채지 못할지는 의문이었다.

앞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횡단보도 앞에 은색 봉고차가 멈추고 그 다음에는 빨간 소형차, 흰색 중형차, 그 다음에 나도 브레이크를 밟고 섰다.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기에 심호흡을 몇 차례 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처음 하는 것이기는 했어도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는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휴대폰을 들고 최근에 통화한 연락처들을 훑어봤다. 데스크를 제외하고 연락할 곳이 있을까. 화면을 몇 번 내렸더니 연희의 이름이 보였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연희에게 전화를 걸고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렸다. 신호가 몇 번 가는 사이에 신호등은 다시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곧 차 안에 연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연희에게 저간의 일을 설명하고 지금 상황을 데스크에게 알려주라고 했다. 연희가 말했다.
"수진 선배, 제가 선배 휴대폰 위치추적같은 거 걸 수 있어요?"

위치 추적? 따져보면 그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글쎄, 안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동의 절차가 필요할 텐데, 음. 선배, 그럼 가능할 때 한번씩 저에게 현재 위치 찍어서 보내주세요. 지도같은 것 켜서 캡처해서 보내면 될 거예요. 문자든 톡이든 아무거나 다 받을 테니까요."
"그래, 한 번 해볼게. 아직 서초동이고 북쪽으로 가는 중이야."
"알았어요. 회사에는 제가 연락할게요."
"그래."
"선배?"
"응?"
"무리하지 말고 몸조심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5분 후, 은색 봉고차는 신사역을 앞에 두고 좌회전을 했다. 대다수의 차는 직진했고 좌회전을 하는 차량은 많지 않았다. 라이트를 꺼야하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지금까지 라이트를 켜고 왔는데 더 어두운 곳에 접어들어 라이트를 끄는 게 더 수상해보일 것 같아 그대로 따라갔다. 그 차를 따라 두세 번 더 꺾었더니 은색 봉고차와 나 사이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강남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외진 곳이었다. 가로등은 있었지만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높은 건물도 없었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오히려 은색 봉고차가 라이트를 꺼버린 모양이다. 은색 봉고차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적당한 곳을 찾아 주차를 했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려다가 연희의 말이 떠올라 내 위치를 찍어 연희에게 문자 메시지로 전송했다. 차에서 내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직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 보이는 것이 없었다.

똑바로 걸었다. 휴대폰 카메라를 켜 봤지만 내게 보이는 만큼의 빛도 담아내지 못해 뭔가 촬영하는 것은 포기했다. 차 안에 있는 캠코더도 이런 어두운 상황까지 고려한 고급품이 아니어서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휴대폰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조명 삼아 앞길을 비추며 걸었다. 나도 휴대폰 지도에 의지하며 5분쯤 주위를 걸었을까. 은색 봉고차는 찾지 못했다. 미처 지도에 들어가지 않은 어느 골목에 은색 봉고차가 숨어있지는 않으려나.


팔이 아팠다. 평소와 달리 위로 한껏 들어올려진 채였다. 워낙 오랫동안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를 사용한 탓에 어깨가 조금 시원하기도 했다. 그 다음에는 손목이 아팠다. 손목께 피부에 무언가가 닿아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아픈 모양이었다. 살을 파고들었는지 손을 움직여보려고 했더니 통증이 느껴졌다. 손도 차가웠다. 눈은 무언가로 가려졌는지 눈을 떠도 보이는 게 없었는데 그 와중에 손은 창백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가 손가락 끝까지 못 간 것 같은, 둔한 감각에 찬 손. 어릴 때 일부러 손을 하얗게 만들던 장난이 떠올랐다.

머리는 늘 그랬듯 약간 어지러웠고 무언가 단단한 것으로 세게 맞은 것 같은 뒷머리의 통증은 생경했다. 다리는 팔과 달리 약간 벌어져 있었다. 움직이려고 했더니 발목께에 무언가가 걸려 고정된 채였다. 손목처럼 아프지는 않았지만 힘으로 끊어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사태 파악이 되고 나니 누군가 고드름으로 등을 삭 훑는듯 오한이 들었다. 입도 말랐다. 코에서 비릿하게 느껴지는 냄새의 정체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피냄새였다. 병원에서 맡는 소독약 비슷한 냄새가 섞여있기는 했으나 그 정도로 가리기에는 피냄새가 너무 진했다.

주위 상황을 알려줄만한 신체 기관이 보내오는 신호들을 종합해보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일단 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나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피가 진한 냄새를 풍길 정도로 쏟아져 있다. 비교적 조용했지만 특별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메시지는 해석이 되지 않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사람이 있지만 소리 없이 나를 감시하는지는 안대가 씌여진 상황에서 알 도리가 없었다.

늘 알던 것을 더는 모른다는 두려움이 온몸을 감싸자 손을 마구 흔들어보았다. 혹시 묶인 줄이 풀리거나 어딘가 약한 곳이 끊어지기를 기대했다. 마치 수갑을 찬 것처럼 손목이 계속 조여들었다. 손목을 묶은 무언가가 손목 피부를 파고들었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참을 각오가 아니라면 여기서 벗어나기를 포기해야했다. 이 정체 모를 질긴 무언가가 내 피를 더 머금는 일은 피하고 싶어 멈췄다.

"깼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톤이 높게 들려 여자가 아닌가 했다.

"누구세요?"

갑자기 말하려니 입이 말랐는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상냥한 듯한 목소리에 나는 마음을 놓았다. 답을 듣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다.

"깼나 보네요. 어디 아프지는 않아요?"

자신이 누구인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를 걱정하는 말투였다.

"손목이 굉장히 아파요. 그리고 뒷머리가 누구에게 맞은 것처럼 아프네요. 저, 이것 좀 풀어주실 수 있나요? 좀 힘들어서요."

마음이 편해지니 그간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한번에 몰려와 갑자기 기운 한 점 없는 지친 몸이 되었다. 그녀가 나를 풀어주면 우선 어디에라도 잠깐 누워야겠다. 아니, 그 전에 감사인사를 먼저 하는 게 좋겠구나.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요. 김수진 씨? 맞지요? 이 이름. 당신이 내 일을 얼마나 망쳐놨는지를 내가 좀 알아야 하거든요."

나는 그녀의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날 따라왔잖아요. 서초동부터 따라온 것 알아요.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으니 한두 가지는 말씀을 드릴게요. 머리가 아프시다고 했지요? 그건 제가 야구방망이로 당신 머리를 때려서 그런 거예요. 알루미늄으로 된 MLB 야구방망이인데 한 10만 원 정도 주고 제가 샀어요. 참, 이건 중요한 게 아니지. 그걸로 한 번쯤 때리니까 기절하더라고요. 힘조절을 좀 하긴 했지만 어쨌든. 그리고 당신은 휴대폰을 들고 있었는데 그거 보니까 서연희라고 적힌 사람에게 위치를 찍어 보냈더라고요. 보니까 전화도 몇 번 했고."
"저기, 잠깐만요."
"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전부 당신이 한 거라고요?"

정신없이 쏟아내는 그녀의 말에서 이해한 것은 겨우 이것 하나였다.

"아, 네. 그래요. 이 휴대폰 잠금을 걸었는지 아닌지 몰라서 지금 제가 계속 충전하면서 보고 있는데 게임 많이 하시나봐요. 셀카도 꽤 많고요. 아니, 셀카가 많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이랑 사진을 찍지는 않나봐요. 사진이 다 같은 구도로 혼자 나온 것밖에 없는 걸 보니까. 그리고 제가 휴대폰 보면서 짬짬이 다른 것들도 뒤졌는데요. 일단 결혼하셨나봐요. 보려고 본 건 아니고, 지갑에 결혼사진 있는 걸 봤거든요. 아, 보려고 본 건 맞네요. 명함도 몇 장 있던데 기자시고, 자동차 열쇠도 있길래 차도 좀 봤는데 캠코더가 꽤 많아요. 영상 돌려보니까 저도 찍혀있더라고요. 제가 뭐 찍을 게 있다고 찍으셨는지 참."
"저, 처음에 제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걸 당신이 했다는 것 이후로 하나도 못 들었는데요."

나를 도와줄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는 부드럽게 들리던 목소리가, 나를 공격한 사람이라는 말 한 마디에 부드러워서 어디든 찌를 수 있을듯한 칼날처럼 느껴졌다. 전후 사정을 보니 이 사람이 내가 쫓으려던 사람이고 나는 공격을 받아 지금 이 상태가 된 모양인데.

"제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먼저 물어보세요. 어차피 이야기할 시간은 많으니까."

이번엔 어쩐지 뾰로통한 말투였다. 이렇게 된 이상 상황 파악이 우선이었다.

"제가 얼마나 기절해있었지요?"

일을 같이 해보기도 했고 시켜보기도 했지만 연희는 기민했다. 내가 차에서 위치를 보낸 게 마지막일 텐데 그 이후로 나와 오래 연락이 되지 않았다면 연희는 직접 찾아오든 경찰에 신고하든 무슨 수라도 썼을 것이다.

"두 시간 반 정도요."
"그럼 여긴 어딘가요?"
"여기요? 모음역 근처예요."
"강남이 아니고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위치를 알려줬잖아요. 서연희라는 사람. 그래서 다른 데로 옮겼지요."
"……."
"와이프예요? 이 사람? 서연희?"
"아니에요."

아내의 연락처를 갖고 물어도 아내라고는 대답하지 못했겠지만, 연희는 정말 후배 기자일 뿐이다.

"그래요. 거짓말같기는 한데 그건 당장 중요한 건 아니거든요. 대충 보니까 당신은 기자 맞는 것 같아요. 그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당신이 뭘 쫓아서 거기까지 왔냐는 건데, 사실대로 말할 거예요?"
"그걸 왜 묻는 거예요?"
"아니라고 하면 자백제 맞추고 시작하려고요."

이 여자는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달리 저항할 방법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대화 전략을 짜는 게 최선이었다.

"가급적 그렇게 하지요."
"그래요. 나도 약효 퍼질 때까지 기다리려면 귀찮은데 잘 됐네요. 왜 날 따라왔지요?"
"김수한 집에서 나오는 걸 봤어요. 뭔가 나르는 것도 봤고요. 그래서 따라간 거예요."
"아, 나 때문에 온 건 아니었네요. 그럼."
"무슨 말이에요? 그건."
"내가 좀 하는 일이 많아서요. 내가 일하면서 뭔가 꼬리잡힐 실수를 했나 했어요."
"오늘 그 집엔 왜 간 거예요?"
"사람 고기랑 뼈를 좀 달라고 하더라고요. 한 명 썰어서 갖다줬지요. 뭐 무슨 암이라던데 난 그런 거 관심이 없어가지고. 어쨌든 달라는 거 주면 돈은 많이 주니까요."
"얼마나 주던가요?"
"2억요."

기가 막혔다.

"지하철역 있잖아요. 모음역. 거기 노숙자들 많은 것 알지요? 기자쯤 되면 당연히 알겠지. 거기 새로 들어온 노숙자 하나씩 내가 데려오는데 확실히 연고 없는 사람들이 많은지 내가 자주 가서 데려오는데도 아직까지 나는 별 일 없어서."
"그 방송에서 사람 자주 없어진다는 그 역 말입니까?"
"에, 방송에 그런 게 나와요? 그럼 이제 다른 데 알아봐야겠네."
"이미 작년부터."
"그래요? 그 후로도 여럿 작업했는데. 그럼 그냥 있어도 되겠네요."

문제의 정답은 지나치게 단순했다. 기사라는 형태로 답을 내야 했던 어떤 것, 이상한 일들, 궁금한 이야기, 상상 밖의 무엇. 모든 답을 한꺼번에 얻었다. 몇 달은 일을 대충 해도 윗선에서 건드리지 않을 정도의 기사거리가 계속 쏟아졌다.

"그럼 돈 때문에 의뢰받아서 사람들을… 그렇게 하는 겁니까?"
"뭐 그런 경우도 있지만 사람 고기 먹어봤어요? 다른 고기랑은 비교도 안 되게 맛있거든요. 그리고 사람 뼈도 좀 필요해서요."
"왜요?"
"최고급 잉크를 만들어보려고요. 원래 잉크에 뼈 들어가는 건 알지요? 펜 안에서는 액체로, 종이에 적히면 마르게 만들려면 뼈가 필요한데 내가 아직 요령이 없어서, 일단 구해다 실험 중인 단계예요. 아, 물론 보통 펜용으로 만들려면 단가가 너무 세니까 만년필용으로 만들어서 제 브랜드 런칭해다 팔려고 생각 중이에요. 저기 저거 끼고 옷 입으면 팔 하나 다리 하나 없는 걸로 보여서 사람들이 의심을 안 하거든요. 그럼 사람 데려오기 쉬워요. 아, 이렇게 말해도 소용없겠네요. 보이는 게 없을테니."

뒷산에서 나물을 캐다 데쳐먹는다는 투였다. 건조한 듯도 하고 즐거워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아마추어적으로 대처한 탓일게다. 내 휴대폰과 차, 지갑을 살펴보기만 해도 모든 게 드러나는데 그 상태로 순진하게 범죄자를 쫓았다.

나는 기자다.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혹은 진짜 생각을 털어놓게 만드는 일을 많이 해왔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수는 그것을 감추려 했다. 투명하게 그 사람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기는 늘 어려웠다. 연차가 쌓이면서 조금씩 요령이 생기기는 했지만 가끔은 사람들이 꺼내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잡아 끌어내는 게 되려 내 마음의 짐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정말 신기했다. 이 사람이 나를 격의 없이 대하기에 나는 내가 봐도 수상한 사람이었다. 여러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미행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 이렇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니. 그러자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 언론사의 기자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럼요."
"그럼 이 이야기는 전부 보도해도 됩니까? 오프더레코드가 아니지요?"

오프더레코드는 기자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야기가 오가기 전에 확약을 받는다. 대화를 나눈 후에 오프더레코드 여부를 묻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나 역시 이를 알고 있었지만 앞서 들은 이야기가 너무 놀라운 내용이라 형식적으로 물었다.

"오프더레코드요?"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였다고 느낀 것은 내 기분 탓이었을까?

"기사 내려면 회사 가야하는 거 아니예요?"
"물론 지금 당장 가능하다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제가 기자라는 걸 알고도 저에게 이야기를."
"아니요."

그녀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이 일 하다보면 사람 만나기 어렵거든요. 시간도 없고 얼굴 드러내는 것도 안 좋고. 노숙자들 신세 한탄은 들을 만큼 들었고 당신같은 사람 보는 게 오랜만이었어요. 다른 연결고리가 있는지 알아보기도 해야했고 뭐, 나라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니까 말상대가 필요하기도 했고. 난 들을 것 다 들었는데."
"그게 무슨."
"왜 당신이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해가 안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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