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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광야 헤매기

2017.05.21 17:3305.21

서서히 녹음이 쇠하고 음기가 차오르는 초가을 아침이었다. 호영이는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문득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집에서 나와 마을을 정처 없이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길에 유리네 집 근처에서 유리 아빠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와 유리가 정신없이 맞으면서 내뱉는 비명소리, 그리고 유리 엄마가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리가 또 무언가 투정을 부렸겠다 싶었다. 유리의 부모는 유리가 자기들 말을 듣지 않으면 늘 귀신이 들렸다고 하면서 유리를 때리고는 했다. 그 소리에 마음이 착잡해지자 호영은 침잠된 마음을 벗어던지려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렇게 목적지 없이 걷다가 이번에는 형욱이네 집 앞에 멈추게 되었다. 얼굴이 온통 딱지로 덮여버린 형욱이가 자기 집 마루에 앉아 피투성이가 되도록 얼굴을 긁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한 순간 손톱에 살점이 쓸리자 볼을 긁던 손이 피부를 벗겨내면서 뺨 위를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 형욱이의 손끝에서 피가 방울져 떨어졌다. 그러자 호영이는 문득 언제쯤 여정을 떠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그 점에 대해 알아보려는 마음이 동해 덕주네 집으로 향했다.

덕주는 집 마루에 앉아서 짚신을 신은 채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덕주의 얼굴은 심한 곰보라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덕주의 집에서는 특유의 장 냄새가 났다. 장을 실제로 담그는 집은 공동체 내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장을 다 담그면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들이 나눠서 함께 먹는 게 정례였다. 그럼으로써 다른 집의 유익균을 몸 안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방 안에만 있는 덕주가 그렇게 바깥에 나와 있는 것을 보니 호영이는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엄숙한 상황에선 옷매무새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교육받았기에, 호영은 아직 화상이 아물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삼베옷을 쓸어내려 앞섶을 정돈했다. 그리고 덕주에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덕주 누나, 안녕.”

호영의 인사를 듣자 그때까지 꿈속에 잠겨있던 것 같던 덕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덕주의 시선은 먼 산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오늘 지옥을 찾으러 가자.”

 

덕주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난 지팡이를 챙길게, 넌 아이들에게 전해서 먹을 것을 가지고 약속된 시간에 그 장소로 모이라고 해.”

“알았어, 누나!”

명령을 들은 호영이는 곧바로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다. 호영이의 맘은 익냉이 길쌈 기술을 가지고 마을 맘들을 지휘할 수 있어 공동체에서 높은 위치에 있었고, 그런 만큼 다른 사람들은 호영이가 제한 없이 온 동네를 쏘다니는 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에 오늘은 마을 어른들이 한 달마다 정오에 음양합일을 위해 모이는 날이라 죄다 바빴기에, 특히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호영이가 제일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벽곡을 위한 벽곡단을 만들고 채식용 식료 관리를 총괄하는 소영이네 집이었다. 소영이는 머리가 좋기에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사서삼경을 읽고 있어 마을 어른들이 총애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날도 마루에서 뒤틀린 손으로 책을 읽고 있던 소영이는 호영이를 보더니 읽던 책을 집어던졌다.

“때가 된 거야?”

소영이가 이렇게 묻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은 신발을 신고 마루에서 뛰어내려왔다.

“난 동쪽을 돌게, 넌 남쪽을 돌아. 그리고 예전 논의에서 달라진 점은 없지?”

소영이가 말했다.

“응, 아마 없어.”

호영이가 대답했다.

“있어? 없어?”

소영이가 호영이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물었다.

“없습니다.”

호영이가 다시 고쳐 대답하자 소영이는 몸을 뒤로 빼며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좋아.”

잠시 뒤 어른들 전원이 생약성분이 풍부한 천연물로 만들어진 윤활제를 들고 마을 중앙에 집합했을 때, 공동체의 미성년자들 서른 두 명은 북쪽 끝 숲의 와지선에 모였다.

 

간단한 인원체크가 있었을 뿐으로, 여정은 즉시 개시되었다.

호영이는 이제 앞으로 돌아오지 못할 마을을 등 너머로 일별했다. 어른들은 지금 마을의 중심에 모여 정신없이 약도 하고 떼씹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또 불운할 아이가 생산될 터였다.

호영이는 가끔 어른들도 자신들처럼 이곳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언젠가 그 문제에 대해 부모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손의 화상은 그 질문의 결과로 입은 것이었다.

아이들은 친한 아이들끼리 무리지어 산을 타기 시작했다.

 

맨 앞에는 아론의 지팡이를 든 덕주가 자리를 잡았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은 이후로 지능이 저하되었다는 승수였다. 원시의 산은 험했기 때문에 덩치가 큰 남자가 앞에서 길을 터줄 필요가 있었다. 승수 바로 뒤에는 다른 아이들이 있었고, 맨 뒤에 선 무리에 호영이와 소정이가 자리했다.

초입은 소풍 같은 느낌으로, 들뜬 아이들은 잡담을 하고 꺅꺅거리며 떠들어대었다. 오로지 덕주와 호영이만이 현우가 남긴 표식을 찾느라 아무 말이 없었다.

“어울리지 않게 어찌 이리 조용해?”

소영이가 호영이에게 물어왔다.

“현우형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

현우가 처음 선지자로 각성한 것은 열병에 걸렸을 때였다.

 

“환상 속에서, 빛 가운데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어.”

현우는 덕주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을의 어른들은 공동체 바깥에는 지옥이 있으며,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거기서 내려온 괴물에게 잡혀가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고 설명해 왔다. 그것도 그냥 고통이 아니라, 영에게 직접 가해지는 고통이라 육체적 고통의 수백 배, 수천 배로 확장된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술수로 아이들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려 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어. ‘아이야. 만일 네가 보이지 않는 것에만 매달린다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넌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고 말이야.”

이것은 언젠가 현우가 흘려들었던 O.오말리의 말이 변형된 것이었지만 현우에게는 그 사실을 자각할 지식이 없었다.

열병에서 기적적으로 회복된 현우는 그 이후로 한 동안 실어증에 걸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열에 들뜬 뇌가 만들어낸 예수의 말을 내면에서 깊이 숙고하는 과정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현우는 깨달음을 얻었다. 예수가 말한 ‘보이지 않는 것’은 다름 아닌 어른들이 자신들에게 집어넣은 지옥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것을 자각하고 현실을 바르게 보자 현우의 눈에는 피부와 몸이 망가진 채로 학대받는 아이들의 모습이 비로소 들어왔다. 여태까지는 그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본질을 명확히 보고 나니 자신들이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하는지, 부당하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현우는 자신이 받은 계시에 대한 해석을 조금 더 발전시켰다. 그 결과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은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을 경우 계속 이 공동체의 가치를 받아들여 살아간다는 의미라고 파악했다. 단지 자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끔찍하고 부당한 고통을 받는 처지를 지옥 외의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현우는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보았을 때 진짜 지옥은 이 공동체일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 어른들이 ‘지옥’이라는 단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이곳과 전적으로 대비되는, 아주 즐거운 곳이 틀림없을 터였다.

덕주가 이 모든 이야기를 처음으로 전해들은 사람이었다. 소영은 이를 정돈된 언어로 정리해 무리 내에 전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점차 아이들 사이에 자신이 처한 상황이 진실로 좆같은 것이라는 자각과, 어른들의 입으로 ‘지옥’이라 불리는 바깥에는 더 나은 삶이 있을 것이라는 사상이 퍼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지옥을 찾기 위해 현우는 선지자로서 정탐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 즈음 현우는 이미 훌륭한 선지자로서 내적 성장을 이룩해 오로지 단정적인 말 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의심이라는 특성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우 자신은 그러한 맹목성이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기 엄마한테 물려받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여기에서 내가 실종된 것에 대한 소요가 사그라진 후에, 내가 돌아오면 지옥의 입구를 찾는데 실패한 것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성공한 것이야. 그러면 아이들을 모아서 내가 남긴 흔적을 따라 지옥으로 와.”

현우가 사라진지 이미 세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현우의 애인이었던 덕주는 아론의 지팡이를 들었다.

“잠시 조용!”

 

덕주가 아이들의 입을 단속했다. 그 말이 무리 전체에 도미노처럼 번져가면서 점진적인 침묵이 찾아왔다. 호영은 덕주의 시선을 따라가다 나뭇가지에 묶여 있는 낡은 천 조각을 보았다. 그 광경의 인공적인 인상은 그것이 현우가 남긴 흔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징표다!”

소영이 이렇게 외치며 손가락으로 천을 가리켰다. 곧 무리 전체가 웅성거리며 그에 대해 이야기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최초의 사건에 이어 계속해서 나타나는 흔적은 무리 전체를 일종의 종교적 황홀경에 빠지게 했다. 잠시 헤맨다 싶으면 누군가가 명확한 흔적을 찾았고, 무리는 일제히 경탄한 후 그 흔적을 따라 기대와 경이감을 안은 채 신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하나같이 이처럼 마음이 편했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절대자가 놓아 둔 길을 따라 근심걱정 없이 행복이 자리 잡고 있다고 확신하는 방향으로 떠밀려 가는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경험이었다.

소영은 호영에게 모세의 인도에 따라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헤맨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렇게 즐거운데 왜 반목이 생겼던 건지 모르겠어.”

그때 즈음 점점 힘들다는 티를 내던 승수가 본격적으로 불평을 시작했다.

“아, 언제까지 가야 되에~!”

하지만 승수는 거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였고, 덩치도 큰데다 다혈질인 성향도 있어 충돌을 우려한 누구도 함부로 승수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 성향의 남자들이 그렇지만, 승수는 이것을 자기 서열이 높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 받아들였다. 그래서 승수는 점점 더 거리낌 없이 투덜거렸다.

“아이, 씨발 내 말 좀 들으라고오!”

“잠깐! 모두들 멈추자!”

승수의 불평이 임계점을 넘자 덕주가 무리를 멈춰 세웠다.

 

아이들은 혹시나 싸움이라도 나려는 것일까 저어했다. 승수도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다행히 아이들이 우려하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반목하는 대신에 무리는 계곡을 건너 나타난 공터에 자리를 잡고 식량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아무도 자제시키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덕주는 짐을 줄이기 위해 지금 다 먹어치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판단이라기보다는 확신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은혜와 지복만이 존재했고, 음식이 주는 만족감을 통해 그 기쁨을 강화하려는 생각이 무의식의 수준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현세의 고난에 대한 염려는 무리의 관심 밖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이들이 입에 넣어주는 것만 먹던 덕주는 슬그머니 홀로 떨어져 사색을 하다가 호영과 소영을 손짓으로 조용히 불렀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아까부터 흔적이 나타나지 않아. 나부터 그럴 테지만, 너희들이 좀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해.”

덕주의 말을 듣고 호영과 소영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영아, 지옥에 대해 좀 알고 있는 게 있니?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게?”

덕주가 소영이에게 물었다.

“…지옥은 땅속에 있어.”

소영은 머뭇거리다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게 정확히 어디의 땅속인지는 누구도 몰랐다. 지금 자신들의 발밑에도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 특정한 곳에만 존재하는 것인지.

“분명히 입구가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들어가겠어.”

호영이 의견을 내 놓았다.

“그러니 땅에 뚫린 구멍이 있으면 분명 지옥으로 이어지는 걸 거야.”

덕주와 소영은 이 말에 동의했다.

배를 채운 무리는 다시 여정을 떠났다. 한참이 지났다. 그러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점점 지쳐갔다. 해도 저물려 하고 있었다. 경험상 금방 어두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승수는 다시 욕을 내뱉기 시작했고, 배고프고 힘들다고 불평도 했다.

“이런 데 따라오지 말 걸.”

승수가 투덜거렸다.

“너만 힘든 거 아냐! 다 같이 힘들다고! 그러니까 조용히 해!”

참다못한 소영이가 승수에게 쏘아붙였다.

 

“모세가 출애굽한 사람들을 이끌 때 싸움이 난 것도 너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랬던 거 같네.”

소영이 이렇게 말하자 승수가 소영을 노려보았다.

“힘들면 다시 돌아가도 돼.”

덕주가 승수를 타일렀다. 지친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승수는 그 말에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소영이를 상스러운 말로 욕하기 시작했다. 결국 소영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소영이와 친했던 아이들이 승수를 사과하라고 몰아붙였다.

“알았어. 알았어. 사과할게.”

승수는 이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땅에 떨어진 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돌로 소영이의 친구 중 한 명의 머리를 내리쳤다.

 

경악과 침묵이 따랐다.

“지금 뭐하는 거야!”

덕주가 소리쳤다. 승수는 피가 듣는 돌을 들고서 번들거리는 눈으로 덕주를 노려봤다.

승수는 바깥에서 온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열병에 걸리고서 지능이 낮아진 후로도 몸은 계속해서 커왔지만 정신은 어린아이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승수를 정말로 어린아이로 보고, 사고를 쳤을 때 보듬어주는 것은 오로지 엄마뿐이었다. 몸이 성장하면서 성욕도 증가했지만 여자들은 승수를 무시했다. 공동체에 들어와서도, 엄마의 서열이 맘들 중에서 그렇게 놓지 않았기 때문에 승수는 삶에 지친 다른 맘들의 뒷담화 화제로 오르내렸다. 그것이 점차 승수를 울분에 찬 어린아이로 만들어갔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잔인성은 가끔 성인 이상으로 심해질 수 있다.

“왜! 내가! 왜!”

승수는 제대로 구상화되지 않는 언어로 무시당한 울분을 풀어냈다.

“그만해! 승수!”

덕주가 말리려했지만 승수는 덕주를 밀쳐버렸다.

“창녀! 이 창녀! 현우랑 씹했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승수는 그러고서 돌로 다른 아이의 머리를 내리쳤다.

“다들 도망쳐!”

덕주가 이렇게 외치자 그때까지 얼어붙어 있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며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갔다. 덕주와 호영이가 승수를 붙잡고 매달렸지만 승수는 몸을 거칠게 비틀어 둘을 떼어냈다. 소영이가 승수의 무릎을 걷어찼다. 승수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소영이의 계획대로 승수의 다리에는 유의미한 손상이 가해진 것 같았지만 그 대가로 소영이는 승수의 다음 표적이 되었다. 덜컥 겁에 질린 소영이는 울며불며 시내를 건너 도망갔다.

 

그 뒤를 손에 돌을 든 승수가 다리를 절며 쫓아갔다. 덕주가 승수의 뒤를 따라갔다. 호영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셋의 진행방향으로 앞서 간 다음 시내를 건넜다. 그러나 무기도 없이 맨몸으로 덩치 큰 승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사적인 얼굴로 뛰어오는 소영이와 원시적인 분노로 침까지 흘려대는 승수는 이미 거의 코앞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때 저무는 해의 붉은빛에 비쳐 영롱한 분홍색으로 빛나는, 땅의 풀들 사이에서 솟아 오른 막대기가 호영의 눈에 들어왔다. 그 이미지는 호영에게 마치 계시처럼 쏟아져 내렸다.

호영은 망설임 없이 막대기를 잡아 뽑았다. 힘을 줘야 했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소영이를 구하러 돌진했다. 일단 소영이를 곁으로 지나쳐 보내고, 호영은 승수에게 멈추라고 외쳤다. 그리고 들고 있는 막대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달려오는 말에게 창을 들이대는 보병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때 그 일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해가 점차 서쪽으로 저물면서 한 순간 나뭇가지 사이로 강렬한 태양광이 쏟아져 들어와 승수의 시야를 가렸다. 잔뜩 흥분해있던 승수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호영이가 내밀고 있던 막대기 끝에 자기 목을 들이밀었다.

호영이는 승수와 함께 넘어지면서 막대기 끝에 가슴을 얻어맞았다. 그 바람에 마른기침을 하면서 빌빌 기어 다닐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르니 어느새 소영이가 대자로 쓰러진 승수 곁에 와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되었어?”

호영이는 이렇게 물었다. 소영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호영은 소영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모두 끝났어….”

소영이는 이렇게만 말했다. 호영은 한순간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벅찬 감정과 동시에 극심하게 역한 느낌을 받았다. 호영은 아까 전에 먹은 것들을 수풀에 모두 게워냈다.

 

소영이 가만히 다가와 호영의 어깨에 손을 얹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덕주는 멀리서 상황이 마무리된 것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 사이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진 아이들을 전부 찾아 호영이와 소영이가 있는 곳으로 데려왔다. 덕주가 곁으로 오자 소영이는 아무 말 없이 덕주에게 승수의 목에서 뽑아낸 막대기를 보여주었다. 덕주는 막대기를 건네받았다.

그것은 인간의 정강이뼈였다. 살점과 근육이 붙어있었고, 특히 복사뼈 쪽에 남아 있는 살점이 많았다.

덕주는 거기 새겨진 하트 모양의 상처를 알아보았다.

“어! 이거 덕주 누나 발목에 있는 건데!”

덕주 바로 옆에서 정강이뼈를 올려다보던 아이 하나가 외쳤다. 덕주는 그 아이를 잠깐 바라보고는 치마를 들어 올려 발목을 걷었다. 모든 아이들이 주목했다. 덕주의 발목에는 연초로 지져서 하트를 그리고 덕주와 현우의 이름을 양편에 새겨놓은 상처가 있었다. 이리저리 얽고, 반점과 뾰루지가 잔뜩 나 있는 피부였지만, 그 하트 모양의 상처는 다른 상처들에 비해 뚜렷이 부각되어 보였다.

“이거 어디서 찾았는지 기억하니?”

덕주가 호영이에게 물었다.

“그냥 땅에 박혀 있는 것을 뽑았어요. 저기서요.”

호영이로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덕주는 그 말을 듣고 호영이를 잠시 동안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렇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마 네가 지옥을 발견한 것 같다.”

호영이는 덕주와 아이들을 이끌고 막대기를 찾았던 곳으로 더듬어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의 수풀 속에서 현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 시체는 무언가에 물어뜯긴 채였는데, 특히 복부를 중심으로 살이 우물처럼 패여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은 벌레에 먹히고 있기는 했지만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눈을 감고 입은 살짝 벌리고 있어서 꼭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덕주는 그런 현우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한참을 적막히 있었다. 그 사이에 소영이 침착하게 주변을 뒤졌다. 얼마 안 있어, 수풀 뒤에 숨겨진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산의 경사가 시작되는 곳에 나 있는 동굴이었다. 덕주가 다가가 전등을 비춰보니 동굴 안쪽에는 아래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었다. 덕주는 그 길을 살피다 아이들에게로 돌아서서 외쳤다.

“시련은 끝났다! 호영이가 지옥을 찾아냈다!”

골짜기에서 불어온 바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덕주의 길고 헤진 명주치마를 나부끼게 했다. 고대의 선지자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동굴 입구에 서 있는 소영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호영이에게 박수를 보냈고, 아이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호영이는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한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뒷머리를 긁적이고 공손하게 손을 앞으로 모았다.

곧 밤은 왔다.

 

반짝이는 별들이 깨끗한 하늘을 수놓았다. 흑암과 차가운 바람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했다. 한 아이가 어둠 속에서 물어왔다.

“지옥에는 이제 어떻게 가?”

소영이가 대답했다.

“지옥에는 몸을 가지고 갈 수 없어. 영체가 되어서야 갈 수 있지.”

그러면서 소영이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모두들 편안한 마음으로 경청했다. 지금과 같은 시간에, 따가운 천일염 단지에 몸을 담그지 않고 청량한 바람을 맞으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경험은 모두에게 색다른 것이었다.

“어린왕자도 마지막에 저 하늘에 있는 고향별로 돌아갈 때 몸을 버리고 영체가 되어서 돌아갔어.”

소영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이들도 일제히 하늘을 주시했다. 별빛이 아이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오로지 호영만이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무채색과 같은 표정을 보며 두려워했다. 그중 한 아이가 고개를 내려 소영이를 보았다.

“아빠가 영체가 되면 남은 몸은 흙으로 간다고 했어. 이게 흙이야?”

그 아이는 손가락으로 현우의 시체를 가리켰다. 다른 아이들도 일제히 현우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덕주만은 계속해서 하늘을 살폈다. 마치 별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사람 같았다.

“흙은 아니고, 지금 흙이 되어가고 있는 과정이야.”

소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이렇게 대답했다.

“…미혹과 의심은 죄악의 씨앗이다.”

문득 덕주가 소곤거렸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삭임은 무리의 한가운데 마치 웅변과 같이 울려 퍼졌다. 덕주는 여전히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밤하늘 한가운데 수놓아진 신의 비밀스러운 언어를 읽어내는 모습처럼도 보였다. 덕주는 곧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우선 현우의 시체를 보았다. 그 다음으로 질문이 많은 아이의 눈을 마주쳤다. 덕주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으며, 오로지 확신만이 떠올라 있었다.

“이것이 싫으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래?”

덕주는 아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이는 덕주의 눈을 보고는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덕주는 그런 아이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모두들 굴 안으로 들어갔다. 덕주가 맨 앞에 섰다. 왼손에는 야곱의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에는 불이 켜진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는 의심 많은 아이는 미혹에 대한 형벌로서 현우의 정강이뼈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

호영과 소영은 맨 마지막으로 굴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굴 안의 습한 공기를 마셨을 때, 소영은 계속해서 떨고 있는 호영을 꼭 안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호영은 온 몸을 통해 소영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기적과 같았다.

호영은 잠시 눈을 감고 자기가 현우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점차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아까부터 느끼고 있던 감정이었지만, 죄악감이 그 마음을 덮어 역겨운 것으로 바꿔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터였다.

시계 앞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빛을 뒤따라 다시 걸음을 시작한 호영은 자기 머리에서 무언가 얼굴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승수의 피였다.

 

이와 같이 모두가 영원한 지복이 보장될 것이라 기대하며 땅 속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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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전 글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또 새로운 글을 올립니다. 

요즘 잠시 한가한 시기에 바짝 쓰려고 조금 급하게 쓴 감이 있습니다ㅠㅠ

이제 여름이네요. 빨리 가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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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2311 단편 나는 우주 임아란 2017.07.22 0
2310 단편 멸망 이후의 우유 2017.07.20 0
2309 단편 상어밥 해방기 휘리 2017.07.17 0
2308 단편 인간의 신 MadHatter 2017.06.28 0
2307 단편 유통기한 보는 여자 이니 군 2017.06.18 0
2306 단편 분신 목이긴기린그림 2017.06.17 0
2305 단편 문학의 경지 DialKSens 2017.06.15 0
2304 단편 포옹 목이긴기린그림 2017.06.04 0
2303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헬우주 저승의 새로움 니그라토 2017.05.25 0
2302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삶이란 파킹나스 연극인가 니그라토 2017.05.25 0
2301 단편 트랜스 게임 휴머니즘 니그라토 2017.05.25 0
단편 광야 헤매기 MadHatter 2017.05.21 0
2299 단편 꽃게 사가 휘리 2017.05.12 0
2298 단편 연화 MadHatter 2017.05.06 0
2297 단편 목이긴기린그림 2017.04.29 0
2296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있음이라는 동포 니그라토 2017.03.28 0
2295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나는 가짜다 니그라토 2017.03.08 0
2294 단편 괴우주야사 외전 : 늪지대 코끼리왕 니그라토 2017.03.08 0
2293 단편 대우주 자체가 쓰레기 니그라토 2017.03.06 0
2292 단편 친구 망각의글 2017.03.0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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