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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가을장마

2020.06.17 11:4906.17

"다녀올게 아빠."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어딜 간다고 그래?"

 

아닌 게 아니라 비가 너무 왔다. 투두둑 연신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의 기세가 쉽게 꺾일 것 같지 않았다. 검정색 커다란 우산을 챙겨든 나를 아빠는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쏟아지는 가을장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혜주 만나기로 했다고 얘기했잖아요."

"이 빗속에 거길 꼭 가야 하겠니?"

"아빠!“

"알았다. 조심하고. 걘 어떻게 아직도 거기 사는지 원."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연지군 수암리에 관해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혜주라는 사람을 빼고는.

 

아빠는 수몰지역 보상업무 담당자로 그곳에 배치됐다. 내가 중학교 2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다녔으니까 약 2년 반 정도 거기 살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빠는 남아있었다면 진급이 유력했다. 하지만 일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그곳을 서둘러 떠났다. 나는 당시 아빠가 못마땅했다. 그때, 나는 막 사랑에 눈을 뜨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혜주네 식구들이 이사를 왔다. 무심하게 길을 지나다 1.5톤 용달에서 내리던 혜주를 보고 나는 감전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애의 하얀 얼굴과 길쭉한 손가락, 종아리 위에서 나풀거리던 플레어스커트가 각인된 이후, 도무지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초등학교부터 나를 돌봐주신 할머니가 '너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셨을 정도로 표가 났다.

 

"너, 나 기억해?"

"혜주니? 혜주 맞아? 이거 실화인 거야?"

"응. 기억하는구나."

"와! 와! 당연하지. 어떻게 잊어?"

 

혜주에게서 예상치 못했던 카톡이 온 날, 내 안에는 십 수 년 전의 그 느낌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뜨겁고 날카롭고 아득하고 간질간질한. 동시에 가슴 한쪽이 멍이든 것처럼 아프게 아렸다. 긴긴 날들, 나는 왜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던 걸까? 혜주의 카톡 프로필은 회색빛 실루엣. 사진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너 이번 여름에 휴가 갔었어?"

"휴가?"

"응. 휴가."

"뻔하지. 못 갔어. 난리 통에 다 취소됐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혜주가 선수를 쳤다.

 

"나 보러 올래?"

"당연히 봐야지. 어디 살아?"

"나 아직 연지군에 살아."

"정말이야? 이사 안 하고?"

"문득... 너 보고 싶더라."

 

내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키다리가 넓은 보폭으로 걷는 것처럼 혜주는 휙휙 진도를 나갔다. 눈앞에 혜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안경에 김이 서렸다. 내가 당황해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거짓말."

"왜, 못 믿어?"

"응."

"내가 그렇게 바람둥이 같아?"

"뭐?"

"나 키스한 거, 네가 처음이었어."

 

마을 뒷산 초입에 서있던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밑도 끝도 없이 여러 주제를 오가는, 중요할 것도 없는 여고생들의 수다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깔깔대며 즐거워했다. 어스름이 내리던 때, 혜주는 살며시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나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을 거칠게 쉬었다. 그걸 들킬까봐 얼굴이 또 달아올랐다. 혜주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다 가만히 살짝 자기 입술을 나에게 포갰다. 보드랍고 촉촉하고 따뜻한 느낌이 났다. 혜주의 냄새가 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대로 죽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다다음주면 휴가 낼 수 있을 것 같아."

"오는 거야?"

"응. 그럼. 네가 지금 나를 가지 않을 수 없게 했잖아."

 

혜주에게 내가 가장 필요했을 때, 나는 떠났다. 보상절차가 진행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변했다. 하루하루가 달랐다. 살던 집도 논도 밭도 누구의 소유냐가 중요해졌다. 멱살잡이가 벌어지는 일이 잦았다. 혜주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그 무렵이었다. 활짝 웃고 있는 영정 앞에 혜주와 엄마가 나란히 앉아있던 장면이 기억난다. 조문 오는 사람은 없었다. 장례는 산 사람들의 잔치니까. 혜주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었다.

 

혜주 엄마는 더 많이 일을 하고도 더 적게 돈을 받았다. 나는 할머니를 졸라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갔다. 나는 차마 전학 간다고 말을 하지 못했다. 떠나기 전날 사실을 알렸을 때 혜주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떠났지만 혜주는 나를 보내지 않았다. 떠나는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너 차 있어?"

"아니."

"벌이가 신통치 않은 거야?"

"뭐? 신통치 않아 실망한 거야?"

"응. 많이."

"푸하하. 뭐야, 너?"

"면허도 없는 거야?"

"나 운전은 잘 해, 근데 서울에선 차 있는 거 불편해.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차 빌려서 오면 안 되니?"

 

나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 '통화하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혜주는 꼭 차를 타고 와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수몰되면서 사람이 다녀 만든 옛길들은 모조리 잠기고 끊겼다. 이왕이면 좀 멋지고 커다란 차를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댐이 완공된 뒤엔 연지군 수암리에 가본 적 없다.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고향을 떠났을 것이다. 나지막한 지붕의 집들도, 집 앞 텃밭도, 경운기가 오가던 좁은 포장길도 다 물에 잠겼을 것이다. 그런데 혜주는 아직 거기 산다고 했다. 아마 이주한 읍내 다른 마을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차가 별로 막히지 않은 편이었는데 꼬박 5시간이 걸렸다. 연지군은 서울에서 멀었다. 조바심이 났다. 톨게이트를 나가 도로표지판에서 ‘연지군’ 글씨를 읽었을 때, 이미 날이 컴컴해져 있었다. 가뜩이나 지형이 달라졌고 비까지 내려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빗물 반사 때문에 차선도 잘 안 보였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라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조수석 창문을 쿵쿵 쳤다. 고개를 돌렸는데 어둠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생각하는데 뭔가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엔 반대편, 운전석 쪽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다행이 차 문은 잠겨있었다. 확인을 해야 하는데 목이 뻣뻣했다. 이를 악물고 왼쪽을 돌아봤다.

 

백발의 할머니가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움찔했다. 갑자기 뒤에서 ‘빵빵’하고 자동차 경적소리가 울렸다. 왜 출발하지 않느냐고 재촉하는 거였다. 머리 위 신호등은 파란 불로 바뀌어 있었다. 할머니가 또 사라졌다. 어리둥절하다 가속 페달을 밟으려는데 차 앞으로 갑자기 두 사람이 지나갔다. 하마터면 칠 뻔했다.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할머니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유 이 할망구는 비 오는데 왜 집을 나가고 지랄이야. 다시 묶어놔야지 안 되겠네."

 

할머니는 팔순잔치에나 입을 법한 진달래 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식구인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끌려가면서도 할머니는 자꾸 내 쪽을 돌아봤다.

 

혜주는 읍내에 함께 다니던 여고 정문 앞으로 오라고 했다. 추억이 깃든 장소였다. 먼저 끝난 사람이 기다려주던 곳. 우리는 자매 같기도, 연인 같기도 했다. 둘 다 다른 형제가 없었고 마을에 뿌리가 없는 외지인이었다.

 

학교는 찾기 어렵지 않았다. 나는 정문 앞에 차를 세웠다. 우산을 쓰고 차 밖으로 나갔다. 간판은 그대로였지만 교문은 붉게 녹이 슬어 있었다. 학생이 줄어 폐교가 된 모양이었다.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멋을 내려고 입은 베이지색 바지가 흉하게 젖었다. 흙바닥을 튕겨 올라온 빗방울 때문이었다. 차에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섰다. 두어 걸음을 걷다가 나는 넘어질 뻔 했다. 오른 발에 뭔가 물컹한 걸 밟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고양이었다. 고양이의 시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뭔가 둔탁한 것에 얻어맞은 듯 주둥이 쪽에 피가 잔뜩 묻어있었다. 서늘한 기운이 발을 타고 올라왔다. 치워줄 용기는 없었다. 나는 다시 차로 뛰어갔다.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왔어?"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혜주였다. 혜주가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뭐야, 왜 이렇게 놀라는 거야.“

 

나는 죽은 고양이를 밟았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깜짝 놀랐잖아. 차에는 언제 탔어?"

"살짝 탔지. 골려주려고. 너 교문 앞에 와있는 거 봤어."

 

혜주는 흰 블라우스에 짙은 남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앞머리는 눈썹 위에서 찰랑거렸고 뒷머리는 단정하게 고무줄로 묶었다. 곱게 피어나던 여고시절, 그 시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곧장 건너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혜주는 변한 게 없었다.

 

"밥 먹었어?"

"너는?"

"내가 말했던 찻집 가자. 거기 빵 진짜 맛있거든."

"이름이 뭐야? 너무 깜깜해서 네비 찍고 가야 할 것 같은데?"

"아, 거기 아직 안 나올 거야."

"그럼 네가 안내 할 거야?"

"그럼. 여기가 조수석 아닌가?"

"뭐야, 이 아재 개그는."

 

혜주는 고양이랑 아주 친했다. 그 때문에 대놓고 ‘재수 없다’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뒷산에서 고양이 5마리와 함께 내려오는 걸 봤다‘는 전설 아닌 전설도 돌았다. 혜주는 내가 그 얘기를 해주자 킬킬거리며 자기가 보호를 받고 있는 거라고 말했었다. 마을사람들이 외지인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혜주 쪽이 더 심했다. 혜주 아빠는 집도, 땅도 없었다. 그런데 혜주 엄마는 젊고 예뻤다.

 

라디오 음악방송 중간에 날씨 얘기가 나왔다. ‘가을장마는 여름장마보다 전체 강수량은 적지만 짧은 시기에 집중적으로 비가 쏟아지는 경우가 많아서 피해도 더 커질 수 있으니까 각별히 유의하셔야겠습니다. 57분 기상정보였습니다.’

 

자동차의 와이퍼가 우적을 감지하고 격하게 움직였다. 앞 유리창과 고무가 마찰하면서 생겨난 소리가 둘 사이, 침묵의 공간을 간신히 채우고 있었다.

 

혜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나 좋아했어?"

"응. 그랬던 것 같아."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글쎄…"

 

혜주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질문은 무거웠다. 나는 혜주를 사랑했다. 그렇지만 반문해야 했다. 내내 잊고 있었다면, 그게 사랑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 '서울에 와서 뒤쳐진 공부를 따라잡느라, 외환위기 때 집안 사정이 크게 나빠져서, 등록금을 버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이런 이야기들을 변명으로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혜주 이외에 다른 사람을 사귀어본 적은 없다.

 

"그렇게 말할 자신은 없는 것 같아."

"그래... 내가 연락했으니까."

"…"

"괜찮아. 이렇게 왔으니까."

 

혜주의 손가락이 지나갔다. 차가운 기운이 손목을 스쳤다.

 

"손이 많이 차네. 너 옷을 너무 얇게 입었어."

"…"

 

상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굵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혜주가 예고 없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온 몸이 비에 젖어있었다. 얼굴은 창백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혜주를 방에 들였다. 젖은 옷을 모두 벗겨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내 옷을 입혔다.

 

그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혜주를 안았다. 혜주는 내 품에 안겼다. 조금 뒤부터 울기 시작했다. 입을 꼭 다물고 울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서울에서 사업한다는 오씨네 큰아들이 마을에 찾아왔던 날이었다.

 

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아빠는 ‘서울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오른손으로 혜주의 차가운 왼손을 잡고 싶었다. 잡고 싶었지만 도로 상황이 너무 나빴다. 어둡고, 빗방울은 굵었다. 두 손 다 핸들을 잡고 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안해."

"뭐가?"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어. 이런 부탁을 하는 데까지."

"뭐? 여기로 부른 거?"

"응."

 

내가 알던 혜주가 아닌 것 같았다. 혜주는 주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저하거나 겁을 내고 물러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노골적으로 혜주 엄마에게 추파를 던지는 동네 어른에게 '나이 값을 하라'며 쌍욕을 하는 그런 아이였다.

 

"뭐야 혜주! 딴 사람이 되었네. 철 든 거야?"

"그랬을 수도.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 사실 그동안... 너무 춥고 외로웠어."

 

나는 고개를 돌려 혜주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말을 듣고도 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나를 보는 혜주가 행복하게 웃었다.

 

그 때였다. 자동차가 뭔가에 부딪쳤다. 핸들이 꺾이며 차가 돌았다. 중앙선을 넘었다. 산비탈이 눈앞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혜주의 왼손이 내 오른손을 잡아끌었다. 그곳은 마을 북쪽 귀퉁이에 있는 폐가였다. 툇마루를 가운데 두고 두 개의 방이 붙어있는 시골집이었다.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혜주는 사라졌다. 어디선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방 창문 너머로 어둠속에 사람 형체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툇마루에 올라 작은방 문을 열었다.

 

나는 입을 막았다. 거기에 피투성이가 된 혜주가 있었다. 한쪽 눈이 부어있었다. 입에는 재갈을 물고 있었다. 손과 발은 노끈으로 묶여있었다. 바닥에는 고양이 시체들이 흩어져있었다. 혜주를 따랐던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한 명이 더 있었다. 남자였다.

 

"재수 없는 년. 그냥 한 번 주면 될 걸. 일이 아주 복잡해졌잖아."

 

남자가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있었다. 남자의 얼굴과 팔에 날카로운 상처가 여러 개 있었다. 고양이가 할퀸 상처였다.

 

폐가는 사람들이 여간해선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무녀가 목을 매달았던 집이었다. 북쪽 끝집, 나지막한 언덕으로 가려진 곳이었다. 큰 소리가 나도 마을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얘기 안 하든? 니 엄마가 안 주고 X나게 버티다 니 아빠 그 꼴 됐다고?"

 

남자가 혜주에게 다가섰다. 혜주가 몸부림쳤다.

 

"좀 가만히 있어. 빨리 끝낼 테니까."

 

남자가 혜주를 뒤집은 뒤 무릎으로 넓적다리를 짓눌렀다.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정환아, 정환이 여기 있니?"

 

남자는 벌떡 일어났다. 먹이를 앞에 두고 돌아서야하는 짐승처럼 얼굴을 흉하게 일그러뜨렸다. 바지를 추키고 툭툭 털더니 방을 빠져나갔다.

 

"새벽에 수문 연댄다. 어서 가자."

"네"

 

혜주는 정신을 잃었다.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저항하다 탈진한 것 같았다. 나는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너무 두려웠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목에 힘을 줘 공기를 짜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박을 빨리 풀어야 했다. 달아나야 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멀어지기만 할 뿐 손이 닿지 않았다.

 

혜주야! 정신 차려 혜주야! 혜주야!

 

‘쏴’하는 소리가 났다. 흙냄새가 훅 풍겼다.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을장마였다.

 

수문이 열렸다.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콸콸 작은 방 안으로 넘어 들어오고 있었다. 혜주가 겨우 눈을 떴다. 다리가 잠기고 가슴과 목으로 물이 차올랐다. 아무 대응도 할 수 없는 공포에 눈동자가 뒤집어졌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혜주는 코로 물을 연신 삼켰다. 머리가 끄덕끄덕 했다. 빠른 속도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 . .

 

나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이선아씨?"

"...“

 

간호사는 사무적인 말투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전달했다.

 

"교통사고가 났었어요. 충격으로 정신을 잃으신 것 같은데, 별 이상은 없습니다. 보호자를 부를 상황이 못돼서. 원무과에 꼭 들려서 진료비하고 입원비 계산 하고 가셔야 합니다."

"네."

"아 그리고, 경찰이 올 거예요. 손보사에서도 몇 번 왔다 갔어요."

"네."

 

그때까지 나는 내가 들이받은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혜주는 어떻게 된 걸까? 카톡을 확인했는데 새로운 메시지는 없었다.

 

"저... 간호사님, 혹시 사고 때문에 저랑 같이 온 다른 여자 환자는 없었나요?"

"있었어요. 아! 아니, 아니 여자 말고 남자요. 그 분은 DOA, 도착하셨을 때 이미 사망하셨어요. 아 이건 제가 해 드릴 얘기 아닌 것 같고. 자세한 건 경찰서에서 들으세요."

 

혜주 얘기가 아니었다. 간호사 표정으로 보아 내가 사람을 친 게 맞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가 왔다.

 

"힘드시더라도... 지금 경찰서로 가시죠. 만약 거부하신다면 긴급체포 할 수도 있어요.“

 

사람이 죽었다. 47세 남자 오정환. 내 조서는 형사가 아니라 반장이 받았다.

 

"이선아씨, 여기 내려온 이유를... 다시 한 번 설명해주시겠어요?"

"다시요? 어… 고향 친구가 보고 싶다고 내려오라고 연락을 했어요."

"아 그래요... 혹시 지금... 어지럽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나요?"

 

형사반장은 내 말을 듣고는 연신 뒷머리를 긁었다. 옆집 아저씨처럼 넉넉한 인상을 갖고 있는 분이었다.

 

"아… 카톡을 보여드릴께요."

"네? 카톡이요?"

"네."

 

형사반장의 쭉 찢어진 눈이 송아지 눈동자만큼 커졌다. ‘카톡으로 옛 친구가 연락한 게 그리 놀랄 일인가?’ 나는 그 반응에 더 놀랐다. 나는 혜주와 나눈 대화의 마지막 대목을 보여줬다. 반장이 그걸 보자마자 전화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뺏기지 않았다. 친구와 나눈 속 깊은 대화를 공개할 수는 없었다.

 

"참... 이해가 안 되네요. 저 형사생활 20년도 넘었는데... 정말 이런 건 처음 봐요."

 

순간, 나는 내가 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혜주는 어디로 도망갔느냐?'고 물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선아씨가 말한 친구 분, 그 분 오래 전에 죽었어요."

 

나는 들고 있던 종이컵을 떨어뜨렸다. 믹스커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상태를 보고 반장은 조사를 멈추고 119를 불렀다. 병원으로 다시 갈 정도는 아니었다. 30분쯤 지나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집으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빠를 부를 수도 없었다. 그냥 경찰서에 있겠다고 했다. 계속 조사를 받겠다고 했다.

 

"그분… 10여 년 전에 행방불명 됐는데... 작년에 사망이 확인됐어요. 가뭄에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면서요. 참 신기하죠? 어떤 미친놈들이 무당이 숨겨놓은 돈을 찾겠다고 그 폐가를 뒤지다 사람 뼈가 나온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차로 친 남자 말이에요, 아무래도 그 친구 분 죽음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고운 진흙에 묻혀있어서 피해자 옷가지에서 기적적으로 미량의 DNA가 검출됐는데... 오씨의 것과 일치해요. 어제 차에 받혀 숨지면서 신원을 확인하려고 채혈을 했는데 일이 이상한 쪽으로 튄 거죠."

 

나는 너무 기가 막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너무 춥고 외로웠다'고 한 혜주의 말이 계속 귓가에 울렸다.

 

"이선아씨는 아마... 벌을 받더라도 무겁지 않을 겁니다. 과실이 적어요. 조사하면서 피의자한테 이런 얘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요. 뭐 사건이 워낙 이상한 사건이니까. CCTV를 봤더니 그 오씨가 숲에서 나와서 차를 향해 곧장 뛰어들더라고요. 귀신이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달렸어요. 부검의도 그런 건 처음 봤다 하더군요. 교통사고 직전에 야생동물의 공격을 받은 것 같다고 해요. 양쪽 각막이 패이고 피가 흘렀으니까 길에 뛰어들 당시 아무 것도 안 보였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겨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것 같았다.

 

"그 집, 그야말로 풍비박산이네요. 같은 날 오씨네 어머니도 아침에 곱게 한복을 차려입더니 요양보호사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집을 나갔대요. 비를 많이 맞고 폐렴에 걸려 오늘 내일 하신다던데...“

 

나는 형사반장에게 내가 알고 있던 사실 하나를 더 말했다. 혜주 아빠가 폐가에서 숨진 채 발견되던 그때에도 동네에 오 씨가 나타났었다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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