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

 

올해로 쉰이 넘은 버닝험의 생각은 완고했다. 그의 주장에 다양한 예를 들며 반론을 펼친 직원들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외려 어떤 직원들은 버닝험의 이야기를 듣고 결혼 생각을 접어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어떤 직원들은 어떻게든 버닝험의 고집을 꺽으려고 시간이 날 때마다 그에게 이 주제를 가지고 말싸움을 걸곤 했다.

 

버니는 버닝험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부류의 젊은 직원이었다. 버니는 적극적으로 버닝험을 몰아붙여서 그의 생각을 바꾸려는 공격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결혼을 하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라는 그의 생각을 대화 중간에 은근슬쩍 비추면서 버닝험의 신경을 긁어놓는 편이었다.

 

버닝험은 버니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결혼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입장을 전파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은 감자칩 때문에 회사 유니폼 밖으로 뱃살이 튀어나올 것처럼 둥글납작하게 생긴 버니는 느릿하고 여유로운 말투로 버닝험의 가시 돋힌 주장을 흘려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버닝험은 버니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 건지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버닝험도 버니와 붙어서 함께 일을 3년째 하고 있자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버니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한들 다 퉁겨져 나갈 것이 뻔하니 괜히 진을 빼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것.

 

그날도 버닝험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를 따라 버니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수행하고 있었다. 푸른색으로 빛나는 버닝험의 눈동자는 재빠르게 좌우로 오가며 계기판을 살폈다. 각종 버튼과 표시기로 어지럽게 도배가 된 계기판은 버닝험과 버니가 타고 있는 회사 화물선의 각 부위가 정상이라는 신호를 발하고 있었다. 아광속 엔진은 광속의 20% 수준의 속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우주에 부유하는 먼지로부터 선체를 보호하는 보호막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화물칸도 적절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버닝험은 계기판을 확인한 후 앞쪽의 창을 보았다. 화물선에서 유일하게 나안으로 우주를 볼 수 있는 두터운 강화 유리창 너머에는 칠흑같은 우주를 배경으로 별무리가 내뿜는 가느다란 빛이 천천히 뒤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버닝험은 머리 위쪽에 있는 마이크를 입 가까이 잡아당겨서 말했다.

 

"이클립스3호, 마젠타 행성 출발 후 7일 15시간 10분. 별다른 이상 없음. 목적지에는 5일 하고도 3시간 후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됨."

 

버닝험이 정기 운행 기록을 마치자 그의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연신 감자칩을 입에 쑤셔넣고 있던 버니가 킬킬대며 말했다.

 

"회사에서 운행 기록 확인도 잘 안하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기록하고 있어요?"

 

"할 건 해야지. 월급은 그냥 받나?"

 

버닝험은 자신을 보며 빙긋이 웃고 있는 버니가 한심하다는 듯 툭 쏘아 붙였다. 하지만 버니는 개의치 않는 듯 자기 몸만큼 커다란 과자봉지에 한쪽 손을 집어넣고 다른 손으로는 의자 밑에 있는 캔을 집어들었다. 그 캔에는 한 손에는 회중시계를 들고있고 다른 손으로는 엄지손가락을 자랑스럽게 치켜들고 있는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버니가 그 캔을 따서 입으로 가져가려고 하자 버닝험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그에게 말했다.

 

"우리 화물칸에서 빼온 건 아니지?"

 

버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는 손사래를 쳤고 감자칩 몇개가 공중에서 춤을 췄다. 버니는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녜요, 이건 마젠타 행성에서 출발하기 전에 제 돈 주고 사온거예요.

 

"적당히 마셔. 도대체 몇 캔이나 사온거야? 일주일 내내 마시고 있으니 화물칸에서 가지고 온 거 아니냐고 그런거지."

 

"48캔들이 한 묶음이요. 이제 이거 하나 남았어요."

 

버니는 보라는 듯 캔을 들고서 버닝험의 얼굴 앞에 흔들어댔다. 캔에서 사르사파릴라의 독특한 향이 흘러나와 버닝험의 코를 찔렀다. 그러자 버닝험은 몹쓸 것이라도 본 듯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버니는 다시 한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형님은 루트비어 냄새도 못 맡으면서 어떻게 우리 회사에서 일을 한대요?"

 

"캔으로 되어 있으니 냄새 맡을 일도 없지. 그것 좀 치워!"

 

버닝험은 버니를 향해 손을 휘둘렀고, 버니는 그런 버닝험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킬킬대며 캔을 의자 밑으로 숨겼다. 버닝험은 아직도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는 듯 손을 휘적댔다. 마치 그렇게 하면 화물선의 밀폐된 작은 조종실에서 냄새가 쉽게 가시기라도 한다는 듯.

 

버니는 다시 침착해진 버닝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버닝험은 루트비어 캔인줄 알고서 반사적으로 몸을 반대쪽으로 옮겼지만 그가 내민 것이 작은 사진인 것을 보고서 이내 다시 버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버닝험은 버니가 건낸 사진에 얼굴을 가까이 대었다. 사진에 찍혀 있는 것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젊은 미모의 여성인 것을 본 버닝험은 고개를 돌려 버니를 쳐다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버닝험의 표정은 갑자기 화물칸에서 튀어나온 우주 바퀴벌레를 본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인생관을 버니가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버닝험이 노골적으로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버니가 자신이 사귀고 있는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결혼할 거라고 자랑하듯 말한 것이 벌써 다섯번 째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확신에 찬 말과는 달리 버니가 결혼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자랑을 늘어놓는 버니를 버닝험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한참을 말없이 버니를 쳐다보던 버닝험은 자신의 표정이 전달하는 의미를 버니도 충분히 알았다고 생각이 들자 지금껏 몇 번이고 그에게 주었던 진심어린 충고를 다시 전달하기로 했다.

 

"버니, 내가 몇번이나 말했듯..."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버닝험의 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버니는 잽싸게 그의 말을 잘랐다.

 

"좀 더 자세히 봐요. 이번에는 다르다니까요."

 

버니의 말에 버닝험은 앞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고서 버니가 건넨 사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사진 속의 여성의 흰 뺨에는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선이 있었다. 그 선의 한쪽 끝은 가로로 뻗어나가 귀 뒤쪽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은 세로로 뻗어나가 목 아래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선을 본 버닝험은 사진에서 시선을 돌려 더욱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버니를 쳐다보았다. 그 선은 인간과 똑같은 외형을 가진 로봇을 구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법적인 표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자네, 결국 사람과 결혼하는 건 포기했구만? 그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이건 뭐야?"

 

버닝험의 말에 버니는 킬킬거리며 대답했다.

 

"매번 다른 행성으로 배달하느라 자주 보지도 못하는 남편을 두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 이렇게라도 할 수 밖에요. 최신 모델이라 사람이랑 완전히 똑같아요."

 

태연자약한 버니의 반응에 버닝험은 기가 막혔다. 버니가 결혼을 못하는 것은 직업 때문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건강에 문제가 심각할 것이 뻔한 그의 터질 듯한 뱃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닝험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은 버니가 결혼이라는 헛된 망상을 쫓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망상을 로봇으로 구체화 시키려는 어처구니 없는 그의 생각이었다. 결혼에 관심 자체를 두지 않던 버닝험으로서는 이 미친 아이디어가 현실적인지 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버닝험은 사진을 버니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로봇이랑 결혼하는 게 가능은 해?"

 

"알아보니 법적으로 인정해주는 행성이 있더라구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제가 형님이랑 같이 일하면서 형님이 젊었던 시절에 결혼해서 뼈빠지게 고생했던 이야기를 어디 한 두번 들었나요? 별거다 이혼이다 양육비다 뭐다... 그러니 저도 나름 결론을 내린거라구요. 예쁘장한 로봇과 한평생 보내면 별 문제 없지 않겠어요?"

 

버니의 말에 버닝험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잠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생각하던 그는 차분한 어조로 달래듯 버니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한 결혼은 사람이랑 한다는 게 전제였지 로봇이 아니었다구. 기계덩어리랑 평생 같이 산다고 뭐가 좋아지나?"

 

"외롭지 않잖아요."

 

버니는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투로 대답했다.

 

"저 사진 속의 여자 머리 속에는 제조사에서 만든 인공지능이 들어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그럼요. 진짜 사람처럼 반응한대요."

 

"내 말이 그거야. 진짜 사람이 아닌데 왜 돈을 들여 저런 로봇을 사서 결혼을 할 생각을 하냐구. 외로우면 자네 컴퓨터에 인공지능 모듈을 사서 끼워넣어도 돼. 진짜 사람처럼 얘기도 할 수 있어."

 

"그렇긴 한데... 그게 진짜 사람 같지는 않잖아요."

 

버니는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그런 반응이 버닝험의 신경을 더 긁어놓았고, 버닝험은 붉은 얼굴로 목소리를 높혔다.

 

"자넨 인간성을 포기하고 싶나?"

 

"신부가 될 로봇은 우리 목적지 행성에 주문을 해 놨어요. 도착하자마자 소개시켜 드릴게요."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뭔 놈의 결혼이야, 결혼은! 그것도 로봇이랑!"

 

"아, 외로워서 그렇다니까요. 진정 좀 하세요, 형님."

 

버니는 버닝험의 코 앞에 루트비어 캔을 가져다 대었다. 버닝험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뒤로 뺐고 버니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연신 킬킬대며 웃었다.

 

"내 참..."

 

버닝험은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그 때 계기판에서 붉은 색 빛이 번쩍였다. 곧 화물선이 경유할 행성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신호였다. 화물선은 속도를 줄인 후 행성의 중력을 이용해 스윙바이 한 후 광속의 2% 속도로 목적지를 향해 운행할 예정이었다.

두 사람의 손은 계기판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고 그 손놀림에 보답이라도 한다는 듯 화물선은 아무런 문제 없이 천천히 속도를 줄여 스윙바이 할 중계 행성으로부터 만9천 킬로미터 거리까지 접근했다.

 

***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서 안도하고 있던 버닝험에게 버니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형님, 뭐가 있는데요?"

 

"뭐가?"

 

"200킬로미터 전방에서 구조신호가 나오고 있어요."

 

버닝험은 몸을 기울여 버니 앞쪽에 설치된 모니터를 보았다. 거기에는 레이더가 잡아내는 구조신호를 컴퓨터가 문자로 변경한 내용이 표시되고 있었다.

 

- 여기는 알파카15호의 구명정이다. 구조를 바란다.

 

버닝험은 능숙하게 버니에게 지시했다.

 

"지금 상황을 물어봐. 구명정에 누가 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버니의 손이 몇차례 계기판 위에서 오가며 버닝험의 말대로 구명정에 신호를 보내었다. 하지만 모니터에 표시되는 회신은 알파카15호에서 사출된 구명정이 구조를 바란다는 같은 내용이었다. 모니터를 보는 버니는 등의 털이 쭈볏 서는 것만 같았다. 이 구명정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없을 것이라는 본능적인 직감 때문이었다.

 

"형님, 별로 예감이 안 좋은데요. 그냥 가시죠."

 

버니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버닝험은 그의 어깨를 찰싹 때리며 대꾸했다.

 

"통신장치가 고장났을 수도 있지. 어떻게 구조신호를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

 

버닝험은 자리에 앉아서 조종간을 잡고서 엔진 스로틀 레버를 위로 올렸다. 화물선이 천천히 전진한지 몇분 되지 않아 조종석 앞쪽의 강화 유리창 너머로 천천히 회전하는 작은 주황색 구명정의 모습이 드러났다. 버니는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몇 번이고 통신을 시도했지만 구명정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구조해달라는 말뿐. 로봇과의 결혼을 떠들어댈 때의 여유는 어디론가 사라진 버니와는 달리 버닝험은 침착하게 화물선 외부에 달린 매니퓰레이터를 조종해서 구명정을 화물선에 도킹시켰다.

 

버닝험과 버니는 화물선의 좁은 통로를 지나 구명정이 도킹된 출입문으로 향했다. 로봇과의 결혼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흥분하던 버닝험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뒤를 따르던 버니는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버닝험이 들으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형님, 하지 말죠. 네, 형님? 예감이 안 좋아요."

 

"시끄러워. 로봇과 결혼하는 건 예감이 좋던? 총이나 똑바로 잡아."

 

버닝험의 말에 버니는 허리춤에 꽃혀 있던 광선총을 마지못해 꺼내들었다. 버닝험은 한 손으로는 광선총을 잡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출입문 손잡이를 잡아 젖혔다. 공기가 새어 들어가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자 어떤 형체가 보였다.

그것은 어떤 남자의 형체였다.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가진 이목구비가 또렷한 이 젊은 남자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서 자신을 구조한 버닝험과 버니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총을 앞으로 겨누었던 버닝험과 버니는 이 남자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는 푸른색 선을 보고 나서는 천천히 총을 아래로 내렸다. 상대가 로봇인 것을 알게 된 버니도 조금 침착을 되찾은 듯, 버닝험 뒤에서 젊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로봇에게 그 로봇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내릴 수 있는 명령어를 외쳤다.

 

"그 자리에서 정지. 소속과 임무를 밝혀라!"

 

여느 로봇이라면 자신의 제조사, 인증번호, 소속된 단체명과 자신에게 부여된 업무가 무엇인지 줄줄이 읊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로봇의 반응은 달랐다. 로봇의 멍한 표정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울음이 나올 것만 같은 표정으로 바뀌더니 버닝험에게 달려들어 그를 얼싸안았다. 갑작스러운 로봇의 반응에 버닝험이 총을 다시 들어올리기도 전에 로봇은 속사포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이예요! 한달이나 저기 갖혀 있었는데 이대로 죽을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로봇의 몸이 아니었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죠. 산소와 식량도 다 떨어졌는데 말이예요!"

 

"잠깐만, 이거 왜 이래?"

 

버닝험은 로봇을 떨쳐버리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우악스럽게 그를 안고 있는 기계의 힘을 감당해낼 수 없었다. 구조된 감격에 취해서 버닝험을 안고 있던 로봇은 그의 관자놀이에 버니가 광선총을 들이대면서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이런 저런 말을 주절거렸다. 자신의 행동에 따라 광선총에서 고열의 플라즈마가 뿜어져나올 것을 알게된 로봇은 잽싸게 두 손을 위로 들었다. 그리고 적대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버닝험과 버니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입을 다물라는 버닝험의 경고에도 로봇은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버니는 입을 다물지 않으면 쏘겠다고 하며 광선총의 안전장치를 풀었지만 로봇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듣게되자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버닝험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

 

로봇의 이야기인즉 이런 것이었다.

 

로봇은 자신이 로봇이 아니라 알파카15호의 파일럿인 존 스미스라고 했다. 알파카15호는 두달 전 인디고 행성에서 어떤 화물을 싣고 출항해서 미슬토 행성계의 바이올렛 행성의 궤도에 위치한 우주정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해 도중에 화물칸 안에서 이 로봇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화물 목록에는 없던 로봇이 화물칸 출입구에 떡하니 서 있으니 스미스는 아연질색할 수 밖에. 다행이도 작동은 하지 않기에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에 어떻게 할지 생각하기로 하고서 화물칸에 다시 눕혀놓았다. 그런데 잠이 들었다가 일어나니 자신이 그 로봇이 되어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화물칸 안에서 깨어난 그는 화물칸 안에 있는 콘솔에 화물칸 비밀번호를 입력해서 문을 열 수 있었다. 곧장 조종실로 간 그는 충격적이게도 조종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육체를 발견했다. 맥박도 뛰지 않고 호흡도 하지 않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며 갖은 수를 써보았지만 다시 육체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알파카15호의 컴퓨터는 유일한 승무원의 생체신호를 감지할 수 없자 배가 탈취되었다고 판단하여 모든 기능을 정지했고 별안간에 로봇이 된 스미스는 배를 몰 수 없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구명정을 타고 탈출했다는 것이었다.

 

"로봇이 되었기에 구명정에서 한달이나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산소도 식량도 없었는데 말이예요."

 

로봇은 자신의 이야기가 정말이라는 듯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야기를 마쳤다. 하지만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은 버닝험과 버니는 총을 잡은 손에 힘을 줄 수 밖에 없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버닝험과 버니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로봇이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공지능에 문제가 생겨서 자신을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니 무슨 뚱딴지 같은 일을 벌일지 모를 일이었다.

 

버닝험과 버니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본 로봇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아요, 내 말이 말도 안된다는 걸요. 그 쪽 두 분이 절 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전 진실을 말한 거예요. 제 이름은 존 스미스이고 불가타 행성 출신이예요. 알파타15호의 파일럿이고 두달 전에 인디고 행성에서 그랑블루 사에서 화물을 인계받아서 배달 중이었다구요."

 

"그건 한번 확인해보지."

 

버닝험은 마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자 버니가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저 말을 믿어요?"

 

"조용히, 버니. 그리고 로봇 넌 다시 구명정 안으로 들어가."

 

버닝험의 말에 로봇은 울상이 되었다.

 

"지금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려는 건가요?"

 

"아냐. 그 쪽 말이 사실인지 확인할 때까지는 구명정 안에 들어가 있어. 산소가 없어도 괜찮잖아? 구명정은 매니퓰레이터로 잡고 있을테니까 걱정하진 말고. 대신 허튼 짓하면 바로 우주로 떠나보내 버릴거야."

 

버닝험의 딱딱한 말에 로봇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출입문 바깥으로 나섰고, 버닝험은 잽싸게 출입문을 닫았다. 출입문을 고정하는 커다란 걸쇠를 걸고 나서야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버닝험은 버니를 보며 말했다.

 

"자네 이러고도 로봇과 결혼하고 싶나?"

 

버니는 버닝험의 말이 지독한 블랙유머라도 되는 듯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버닝험도 자신이 내뱉은 말이 알고보니 정말 위트가 넘치는 펀치라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처럼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는 곧 긴장감이 어렸다. 화물선의 끝 쪽에서 허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조종실로 돌아가 스윙바이 항법 준비를 해야 했다.

 

화물선은 별다른 이상 없이 예정된 코스를 밟고 행성의 중력을 이용해 가속했다. 아광속 엔진에 걸린 부하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화물을 인계할 때쯤이면 해소가 될 것이었다. 보호막이나 화물칸에도 문제가 없었다. 유일한 문제라면 외부 매니퓰레이터에 달려있는 저 구명정 뿐.

 

버니는 마젠타 행성에서 출발할 때 다운로드 받았던 인근 행성계의 출항기록을 살피다가 억하는 감탄사를 냈다. 버닝험은 떨리는 손으로 모니터를 가리키고 있는 버니를 보며 물었다.

 

"왜 그래?"

 

"그 로봇이 한 말이 사실이예요, 형님. 한달 전에 인디고 행성에서 알파카15호가 출항한 기록이 있어요."

 

"그렇다고 그 로봇이 진짜 존 스미스라는 얘긴 아니잖아."

 

"무슨 말이예요?"

 

버니는 겁을 먹은 표정으로 버닝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버니를 보며 버닝험은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저 로봇이 알파카15호에 있었는지 아니면 최근 출항기록을 가지고 거짓말하는지 어떻게 알아?"

 

"형님, 저 로봇은 소속을 말하라는 명령에 따르지도 않았잖아요. 그리고 로봇은 거짓말 못하게 되어 있잖아요."

 

"인공지능이 맛이 간게 분명해."

 

버닝험은 딱 잘라 말하자 버니는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무말 하지 못하는 버니를 보며 버닝험은 살짝 우쭐해졌다. 로봇과 결혼을 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자신에게 따박 따박 대꾸하던 버니가 꼼짝 못하는 것을 보니 통쾌하기도 했다. 버닝험은 이 기세를 몰아 버니가 결혼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확실하게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자네가 결혼할 로봇도 저렇게 되면 어쩌나? 갑자기 이상해지면 어쩌냐구."

 

"그러지 않길 바래야죠."

 

버니는 풀이 죽어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계는 고장나게 되어있지. 로봇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못하게 만들어졌지만 저 로봇을 보라구.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잖아."

 

"그런데 저는 결혼할 로봇이 스스로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더 좋을거 같아요."

 

"뭐야?"

 

버닝험은 버니의 말에 고함을 쳤다. 버니는 자신의 말에 스스로가 자신감을 얻은 듯 다시 배실 배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저야 더 좋죠. 진짜 사람과 결혼한 것 같을테니까요."

 

"그럼 자네 로봇 부인이 태연스레 거짓말을 늘어놔도 괜찮다는 말이지?"

 

"어... 그건 아니예요. 그냥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죠."

 

"자기가 진짜 여자라고 생각하는 로봇이라면 거짓말도 늘어놓겠지. 내 전처처럼 말이야. 여자들은 다 거짓말쟁이라구."

 

"제가 만난 여자들은 다 절더러 거짓말쟁이라고 그러던데요?"

 

"자네 뱃살만 좀 빼면 거짓말쟁이라고 그러진 않을걸세."

 

버닝험의 말에 버니는 밖으로 드러나 있는 비대한 뱃살과 배꼽을 유니폼을 내려서 가리며 키득거렸다. 버니는 이제 불안한 감정은 다 떨쳐버린 듯 여느 때처럼 명랑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모니터를 가리키며 버닝험에게 물었다.

 

"형님, 그럼 이건 이제 어쩌죠?"

 

화물선 외부를 비추는 모니터에는 커다란 매니퓰레이터에 단단히 고정된 채로 화물선에 도킹되어 있는 주황색 구명정이 표시되고 있었다. 버닝험은 모니터를 흘낏 보고서는 별 거 아니라는 투로 대답했다.

 

"일단 목적지까지는 가지고 가보자구. 거기 행성 경찰에 구명정 채로 넘기면 되니까. 원래 로봇의 주인을 찾게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버니는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그런 버니를 보더니 버닝험은 조종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서 눈 좀 붙여. 조종실에는 내가 있을테니."

 

"네, 형님."

 

버니는 감자칩 봉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비대한 몸을 이끌고 조종실 밖으로 나서서 좁은 통로를 따라 작고 푹신한 침대가 놓인 화물선의 유일한 휴게실로 향했다. 버니는 감자칩을 몇개 더 입에 쑤셔넣고 나서야 안대로 눈을 가리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미치광이 로봇 때문에 잔뜩 긴장을 한 탓인지 머리가 배게에 닿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버니는 너무 오래 잤다는 느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머리 맡에 놓아둔 시계 알람이 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깬 건지도 몰랐다. 버니는 안대를 벗고서 시계를 보았다. 잠이 든지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얼마 자지도 못했기에 다시 잠을 청했을 터였지만 깊게 잠이 들었기 때문인지 정신이 또렷했다.

 

계속 침대에 누워있기 보다는 조종실로 가서 버닝험과 교대를 하던지 아니면 의자에 앉아서 좀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버니는 침대 가에 놓아두었던 감자칩 봉지를 집어들고서 조종실로 향했다. 좁은 복도는 버니가 흥얼거리는 음정 박자 하나 맞지 않는 노래로 가득찼다. 하지만 버니는 조종실 문 앞에 도착하자 입을 앙다물어야 했다. 살짝 열려 있는 문틈으로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버닝험의 신발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벌컥 문을 열어젖힌 버니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만 같았다. 버닝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형님!"

 

버니는 크게 외치며 버닝험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버닝험의 몸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축 늘어진 채 버니가 잡아끄는대로 휘청거릴 따름이었다. 버니는 사색이 되어 그의 가슴에 귀를 대어보았지만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젠장!"

 

버니는 재빨리 버닝험의 웃옷을 벗긴 다음 벽에 달린 제세동기를 끄집어내어 그에게 연결했다. 전기가 전선을 타고 버닝험의 가슴에 충격을 줬지만 버닝험의 심장은 다시 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정신없이 버닝험의 가슴을 압박하던 버니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버니는 천천히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두발자국 뒤로 뒷걸음질치고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시선을 맞추었다. 그 눈빛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가 아는 형님의 눈빛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의 그것이기도 했다. 몇 시간 전까지 자신을 존 스미스라고 소개하던 그 로봇이 조종실 문어귀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버니의 오른손은 허리춤에 가 있었다. 그의 손은 광선총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고 엄지는 로봇이 눈치채지 못하게 안전장치를 풀러 사격모드를 연속발사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로봇도 버니의 의도를 알아챈 듯 그의 눈은 버니의 얼굴과 그의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었다.

 

로봇은 자신은 버니를 해칠 의도가 없다는 듯 천천히 손을 들면서 입을 열었다.

 

"버니, 나야."

 

"젠장, 뭐야?"

 

로봇의 말에 버니는 화들짝 놀라며 광선총을 빼들고 로봇을 겨눴다. 로봇은 자신의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듯 더 높게 손을 들며 말했다.

 

"버니, 놀라지마. 나라니까?"

 

부들거리던 버니의 몸과 숨을 몰아쉬던 소리가 잦아들었다. 버니는 총을 내려놓지 않은 채 로봇에게 말을 걸었다.

 

"형님이라구요?"

 

버니에 말에 로봇은 반갑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나라고! 내가 이 젠장할 로봇이 되어버렸어!"

 

로봇의 손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오자 버니는 총을 다시 고쳐잡았다. 그러자 로봇은 화들짝 놀라며 다시 손을 높게 들었다. 버니는 떨리는 왼손으로 이마에서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어... 어떻게 된거예요?"

 

"나도 몰라! 네가 자러 간 사이에 나도 깜빡 잠이 들어버렸어. 그런데 일어나니 저 빌어먹을 구명정 안이더라구. 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서 이리로 온 거야."

 

"구명정과 연결된 출입문은 안쪽에서 걸어잠궜잖아요. 어떻게 연 거예요?"

 

"보고도 몰라? 내가 로봇이 되었다니까! 억지로 잡아당기니까 열리더라구."

 

로봇은 머리 위로 쳐든 팔을 보라는 듯 흔들었고 버니는 의심에 가득찬 눈으로 그 팔을 쳐다보았다. 사람과 같은 피부 안에는 튼튼한 강철 골격이 자리잡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한다면 반대편에서 출입문을 억지로 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로봇이 버닝험이 말한 것처럼 인공지능에 이상이 생겨서 헛소리를 하고 있는거라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버니는 생각했다.

 

버니는 갈라진 목소리로 로봇에게 물었다.

 

"정말 형님이라면 대답해봐요. 제가 아까 전에 형님한테 뭘 건네줬죠?"

 

로봇은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리며 조종실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으로 얼굴이 흥건해진 버니는 숨을 몰아쉬며 로봇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주목했다. 로봇의 시선이 바닥에 향한 순간 버니도 바닥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자기가 아까 버닝험에게 보여주었던 여성 로봇의 사진이 떨어져 있었다. 버니는 재빠르게 고개를 들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로봇에게 시선을 옮겼다.

 

"버니. 아까 네가 보여준 건 저 사진이야."

 

"저 사진을 보여주며 무슨 얘기를 했어요?"

 

"사진. 여자... 그렇지. 결혼 이야기를 했지."

 

로봇은 기억을 더듬는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로봇이 정답을 말하긴 했지만 버니는 여전히 로봇을 신뢰할 수 없었다. 버니는 다시 한번 로봇에게 물었다.

 

"형님, 결혼이 무슨 의미죠?"

 

로봇은 버니를 지긋하게 바라보며 대꾸했다.

 

"난 답을 알고 있어. 하지만 자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군. 내가 제대로 답하더라도 날 의심할 거 아냐?"

 

"얼른 대답해요, 형님!"

 

버니는 왼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서 총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 모습을 본 로봇은 머리 위로 쳐들었던 팔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예상하지 못한 로봇의 반응을 보고서 버니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총을 든 그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꼼짝마! 다시 손 들어!"

 

"버니. 이럴 시간 없어. 화물선이 이대로 가면 저 앞에 보이는 소행성에 충돌할지도 몰라."

 

로봇은 손을 들어 버니 뒤쪽에 있는 강화 유리창을 가리키며 담담히 말했다.

 

"웃기지 마!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버니는 로봇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는 조종실 유리창과 계기판을 등지고 있어서 화물선 전방 상황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버니는 로봇이 자신을 해치기 위해 블러핑을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버니. 내가 왜 거짓말 하겠어? 설사 내가 버닝험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위험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것 같은데. 전방에 소행성이 있다고!"

 

"허튼 수작 부리지 마!"

 

버니가 뒷걸음을 치며 고함을 치자 그것이 마치 무슨 신호라도 되는 듯 버니 뒤쪽에 있는 계기판에서 충돌 경보음이 울렸다. 놀란 버니가 반사적으로 계기판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로봇은 버니 쪽으로 몸을 날렸다.

 

***

 

버니는 눈을 떴다. 그는 조종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조종실 천장에 달린 붉은 색 비상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동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된거지?'

 

버니는 몸을 일으켰다. 항상 입에 남아있던 짭짤한 감자칩의 풍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뱃살 때문에 찌뿌둥한 허리와 엉덩이께가 가뿐한 느낌이었다. 똑바로 서자 갖가지 불길한 색으로 빛나며 경고를 보내고 있는 계기판이 버니의 눈에 들어왔다. 버니는 계기판이 보내는 신호를 보자마자 화물선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젠장!'

 

버니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계기판에 달라붙었다. 엔진, 보호막, 화물칸, 통신모듈, 항법 컴퓨터... 어느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화물선이 미리 입력된 코스를 따라 제대로 항해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버니는 화가 난 나머지 손으로 계기판을 내려쳤다. 그러자 꽝하는 커다란 금속성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며 계기판이 우그러들었다.

 

깜짝 놀란 버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감자칩 기름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두툼한 손은 온데간데 없었고 푸르스름한 선이 그어져 있는 매끈한 인공피부로 만들어진 손이 보였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려고 자신의 두 손을 번갈아보던 버니의 시선은 자신의 발 아래에 있는 두툼한 손으로 향했다. 그 기름지고 두툼한 손은 광선총을 단단히 쥐고 있었고, 그 손은 굵은 팔에, 굵은 팔은 비대한 뱃살이 눈에 띄는 몸통에 연결되어 있었다. 버니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는 자기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서 조종실 유리창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아까 전까지 자신을 버닝험이라고 주장하던 로봇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버니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싸매고 몇 시간을 고민했다. 그의 주변에는 배터리가 떨어진 제세동기가 나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는 윗옷을 벗고서 누워있는 버닝험과 버니의 육체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버니는 그의 육체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로봇의 몸으로 들어오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목적지로 가서 도움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엔진과 비상탈출용 보트가 있던 화물선 후미는 무언가 커다란 물체에 부딪힌 듯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통신 모듈도 고장이 난터라 근처 행성에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버니는 계기판이 내는 경고음을 듣고서 고개를 들었다. 계기판에 있는 어떤 램프가 붉게 빛나면서 선내 산소 농도가 위험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버니는 숨을 크게 들이마셔보았다. 하지만 숨을 쉰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버니의 새로운 코는 그가 인간이었을 때와 같이 작동하지 않았다. 숨을 쉴 수 없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버니의 시선은 계기판 아래쪽 자신의 자리에 달려있는 모니터로 향했다. 거기에는 화물선 아래쪽에 달린 매니퓰레이터가 붙잡고 있는 주황색 구명정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화물선에게 닥친 위험을 운 좋게 피한 듯 구명정은 멀쩡해 보였다.

 

버니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는 계기판을 조작해 구명정을 붙잡고 있는 매니퓰레이터의 집게를 놓았다. 그리고 화물선의 좁은 통로를 지나 구명정으로 향했다. 그는 구명정의 해치를 열고서 어두운 실내로 몸을 집어넣었다. 구명정의 실내등은 아주 희미해서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버니는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새로운 눈은 1룩스도 되지 않는 어두운 실내를 환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니는 구명정 벽면에 붙어있는 콘솔을 두드려서 조난신호를 발생시켰다.

 

- 여기는 이클립스3호의 구명정이다. 구조를 바란다.

 

버니는 구명정 바닥에 엎드려 몸을 웅크렸다. 그는 조난신호를 받고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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