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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분신

2017.06.17 21:1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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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땅이 울리는 소리에 수진이 눈을 떴다. 수진은 눈을 비비며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찾았다. 책상 끄트머리에 올려놓은 스마트폰. 땅울림 때문에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잡았다. 이윽고 땅울림이 불길한 잔향을 남기고 잠잠해졌다. 방안에 오래 맴돌던 울림도 사라져간다.

수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6시 20분.

찌르르르릉.

스마트폰에서 지진경보가 날카롭게 울리기 시작했다.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수진은 학교의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수진은 최근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해진 걸 느끼고 있었다. 학교에서 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불쾌한 시선을 받을 때가 있었다.

마치 신기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어쩌다가 탄 지하철에 좌석 한 줄이 가득 차 있으면, 그 중 한 명 정도는 수진을 보고 있는 그런 상황이 빈번했다.

짜증나. 흘끔흘끔 하고, 대체 왜 나를 쳐다보는 거지? 이유가 있으면 대놓고 말하는 게 편한데.

수진은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참아냈다. 무선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꽂았다. 대중적인 가요가 흘러나왔다.

학교에 있을 때는 더 비참한 기분이었다. 자기보다 연하의 남자애들에게서 시선을 받을 때는 견디자는 마음이 무색하게 울컥 눈물이 났다. 몸 구석구석까지 훑어보는 시선을 마주하는 건 가슴 한구석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과 비슷한 것이었다.

가슴 안쪽이 몹시 아파서 수진은 앞섶을 움켜잡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교실로 갔다. 교실 문 위쪽에 2-4라고 적혀있다.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나자 교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수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수군대던 목소리가 일순간 딱 멈췄다.

수진은 걸음을 움츠렸다.

뒤에서 인기척과 발걸음 소리가 났다. 교실로 들어오려는 것을 막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수진은 교실 안을 둘러봤다. 꼼꼼히 살피니 의외로 자신을 신경 쓰는 사람은 네다섯 명밖에 없었다.

깊게 호흡을 내쉬었다. 목깃까지 잠근 셔츠의 단추가 갑갑하게 느껴져서 단추를 끄르며 수진은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시선이 느껴졌지만 수진은 자리로 돌아가 교과서 위로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시선을 견딘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여전히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

어차피 선생님이 들어오면 그때부턴 자신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스스로를 더 고립시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사귀는 것이 서툰 수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2학년이 되고 1개월 조금 못 미치는 기간. 꽤 친해졌다고 생각한 교우들인데, 지금은 모두가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이렇게 까지 눈길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시작된 건 대강 한달 전부터인 것 같다. 그때부터 조금씩 전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서야, 마치 ‘그날’을 기점으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거라고 알려주려는 것 같은 상황이지 않은가.

자신이 피해자이고, 사회적으로 자신이 좀 더 이런 일에서는 유리할 거라는 건 알아도, 역시 직접 가서 따지거나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은 막연히 겁이 났다. 게다가 막상 증거가 있는 게 아니다. 이상한 취급을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피해망상이라던가, 그런 단어로 매도당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찾아왔다. 같은 반 학생들이 수진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수진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교실을 나섰다. 바람이라도 쐬어야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밖을 걷고 있자 체육수업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가는 1학년들과 우연찮게 마주쳤다.

무시하고 빨리 지나치려고 하는데 순간적으로 어떤 남학생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수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1학년 무리가 왼편으로 지나쳐갈 때 수진은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수진의 귀로 남학생들의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저 누나 되게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어?”

“우리 주위에도 저런 사람이 있구나.”

수군거림이 이어졌다. 들으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진의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다.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 한편만으로도 대화를 하는 남학생들이 자신을 훑어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선. 저 시선이 불쾌했다. 수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크리스탈이…….”

“맞아, 크리스탈…….”

“크리스탈……”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들리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걸어 다닐 기분이 들지 않았다.

모든 수업을 마치고 학교 건물을 나서는데, 한 남학생이 수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는 비쩍 마른 남학생이었는데, 반은 다르지만 같은 학년이라 얼굴은 기억한다.

남학생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왔을 쯤, 일진패거리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애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몇 번 대화를 한 적도 있지만 그다지 친하게 지내지는 않는다.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저기, 수진아. 저기서 애들이 부르는데 같이 가줄래?”

심부름꾼이었다. 수진은 남학생의 어투나 분위기에서 얘의 뒤에 있을 애들을 떠올렸다. 누군지는 안 들어봐도 뻔하다. 수진은 불안감을 느꼈다.

수진의 입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바빠.”

그리고 의지력을 발휘해 간신히 발걸음을 옮겼다.

남학생이 잠깐만! 이라며 뒤에서 소리쳤지만, 수진은 못 들은 척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쫓아올 생각까진 없는지 따라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이야 잠시 넘어갔기는 하지만,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나도 왕따라도 당해야 하는 걸까.

집에 돌아오는 사이 수진은 자신을 불렀던 남자애에 대한 생각은 잠시 한편으로 밀어뒀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출근을 하시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다. 요즘 부쩍 일에 집중하신다는 느낌이 든다.

수진은 어두컴컴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오전에 스치듯 들었던 ‘crystal’을 검색해보았다.

보석이나 크리스탈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 또는 캐릭터에 대한 것 밖에 나오지 않았다. 짐작하고 있던 일이라 실망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런 검색어로 무슨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누구 한 명을 붙잡고 물어봐야 하나. 그 방법이 가장 빠른 길일 것이지만, 성격상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일에 대해서건 아무런 해결방안도 마련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불편한 마음으로 잠을 청한 뒤 수진은 알람소리에 맞춰 일어났다.

버스 시간 때문에 수진은 대체로 아슬아슬한 시간에 등교해야 했다. 가장 빠른 배차시간에 맞춰도 어느 정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교실에 들어서면 대부분이 등교를 한 상태다.

수진은 복도를 걸었다. 바깥쪽 창문에 서리가 끼어있는데, 그에 반대되는 따가운 햇볕 때문에 난반사가 일어난다. 그러고 보면 근 몇 년 사이에 사계절이 뚜렷하다는 말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고작 4월인데도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꽤 따갑게 느껴졌다.

그래서 눈을 찌푸리며 걸었다. 복도에는 사람이 몇 없었는데, 그 중 한 명의 얼굴이 눈에 꽂혔다. 어제 자신을 불렀던 남자애였다. 그 애를 본 순간 수진은 어제 있었던 일을 그날 처음으로 떠올렸다.

가슴 한 구석에 무거운 추가 내려앉은 느낌이 들었다.

혹시 또 불리는 건 아닐까. 아니면 이미 우리 반 교실에 와서 기다리는 건 아닐까. 에이, 역시 그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돌아다녔다. 불안감 때문에 어깨가 뻣뻣해졌다.

하지만 남자애는 수진과 눈을 마주치고도 그냥 지나쳐갔다.

의아해하며 수진은 남자애를 돌아보았다가, 정말로 이미 교실에 와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도망쳐야 할까.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몸에 안 좋은 것 같다고 전화를 한다면 일진들과 만나지 않아도 된다. 걔네들도 자꾸 피하다보면 끈질기게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한 해결법이다.

하지만 이것도 몇 주는 피해 다녀야 먹히는 방법이다.

수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애초에 나쁜 일로 불렀다고도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애들과 얽히기 싫은 마음에 괜히 혼자 착각하며 겁낸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교실로 향하는데, 막상 교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냥 평소 보던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몇몇 시선.

다른 종류의 불쾌감이 내면에서 솟아올랐지만, 내려놓은 짐이 더 커서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째서 아무 일도 없는 걸까. 학교를 안 왔을 리는 없다. 지각이나 수업불참에 대한 징계가 상당히 강한 학교다. 걔네들도 일진이라는 타이틀을 지니긴 했지만 딱히 무조건 반항적으로 행동하는 성향도 아니다. 그냥 얌전한 성격들이 아닐 뿐이지 그렇다고……그나저나 왜 걔들을 옹호하고 있는 거지.

수진은 새삼 사람의 나약함이란 것에 대해 자각을 하게 되었다. 평소에 위협적이다가 조금만 잘해줘도 인상이 확 바뀌다니, 평소에 좋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면목이 없어진다. 그런 사람은 없지만.

왜 아무도 자신을 부르지 않는지 등등에 대한 의문은 1교시를 끝낸 후의 쉬는 시간에 풀리게 되었다.

수업이 마치자마자 같은 2학년 한 명이 수진을 찾아왔다. 이서영이라는 이름으로, 여자 같은 이름이지만 남자다. 그래도 여자인가 싶은 면도 있게 꽤 중성적으로 생기긴 했다.

서영은 수진을 눈을 마주친 후 손짓으로 수진을 교실 밖으로 불렀다.

중간에 주위를 둘러봤는데, 이상할 정도로 아무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서영은 꽤 멀리 걸어가더니 과학실 복도 앞에 멈춰 섰다.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서영은 일진그룹에 속하는 여자애 이름을 말하며 질문했다.

“어제 걔가 불렀다면서?”

어떻게 알고 있을까?

엄밀히 말하자면 그 애가 부른지 어떤지는 몰랐지만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영은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뭐, 곧장 본론을 말하자면, 그 일은 내가 말해뒀으니까 별 일 없을 거야.”

“아, 응…….”

그 일? 수진은 속으로 반문했다. 하긴, 그 애가 자신을 부른 건 일이 있기에 부른 것이긴 하겠지만, 정작 ‘그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수진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찌됐건 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일이라는 건 서영이 해결해준 듯하다. 수진은 다소 경계심을 풀고 서영의 말을 기다렸다.

서영은 다시 속으로 말을 고르다, 이내 가벼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뭐, 그렇게 됐어.”

서영은 수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리를 떠났다.

끝인가? 수진은 교실로 돌아가는 서영을 돌아보았다. 서영을 붙잡고 싶었지만, 캐 물을 용기가 솟아나지 않는다. ‘서영’이라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서영은 기이한 소문을 두른 남학생이었다.

흥미를 느끼는 사건이 있는 곳에 나타나서, 어느 순간 개입하게 되더니 금방 사건의 진상을 꿰뚫어본다는 기이한 소문이 있다. 탐정이라던가, 존재 자체가 괴담이라던가, 그런 기이한 소문이다.

물론 이서영이 실제로 특별히 어떤 사건에 개입했거나 다른 활약을 한 적은 없는 걸로 안다. 사실 이 소문은 꽤 높은 기수의 졸업생들도 아는 이야기로, 이 학교가 남학교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냥 괴담 속 인물과 우연히 이름이 같은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하고.

몽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진인 애도 고분고분 말을 들을 정도라면 확실히 현실적인 영향력을 가진 애이긴 했다.

2교시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수진도 서영에 대한 생각을 한편으로 미뤄두고 교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면 서영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불명확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때 거센 진동이 수진의 몸을 덮쳤다.

“앗!”

쿠구구궁, 하고 땅이 울렸다. 서영은 복도 가운데에서 멈춰 섰다가 주저앉았다. 무리하게 서있으려다 넘어지는 것보단 올바른 선택이었다.

땅은 얼마간 흔들리더니 곧 진동이 잦아들었다. 복도와 교실 여기저기서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다. 진동이 사라지자 귀를 찌르는 그런 소리가 학교 안을 가득 채웠다. 규모가 작은 지진이 지나갔구나. 서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교실로 돌아갔다. 지진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가슴이 두근거려 심란해졌다.

 

1

서영을 만나고 난 후 왠지 계속 ‘그 일’이라는 것이 신경 쓰였기에, 수진은 시선에 대한 것도 겸해서 의문을 풀기 위해 적당히 물어볼 만한 사람을 생각해봤다.

단박에 심부름꾼 역할을 했던 남자애가 떠올랐다.

그 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가장 만만해 보이는 데다 어차피 그 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사람이 서영이나 날 부른 그 애 혹은 그 애의 그룹 애들, 그리고 그 남자애 정도밖에 없었다.

남자애는 그 애의 반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진은 남자애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려갔다.

건물 외곽의 그늘이 진 곳. 앞쪽에 있는 자전거 주차장에 학생들이 타고 온 자전거들이 세워져 있다. 주차장 옆에는 따로 공간을 만들어 남는 의자나 책상, 그리고 폐지를 담은 박스를 쌓아놓았다. 그 외에는 한산한 공간이다. 수진은 매점에서 사온 바나나 우유를 남자애에게 내밀었다. 반대쪽 손에는 자기가 마실 우유가 들려있었다.

수진이 입을 열었다.

“마셔.”

“아, 어.”

남자애가 어색해하는 투로 대답했다. 우유에는 빨대까지 꽂혀있었다.

둘은 나란히 건물 벽에 기댄 채 우유를 쪽쪽 빨았다. 남자애는 그런 와중에 계속 수진의 눈치를 살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수진이었다. 수진은 서영에게 들은 이름을 입에 담으며 물었다.

“저기, 혹시 전에 나를 왜 불렀는지 알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남자애가 얼굴을 펴며 대답했다. 그래도 여전히 어눌한 어조였다.

“그게, 네가 ‘크리스탈’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던가, 그걸로 불렀던 거야.”

익숙한 단어에 수진은 흠칫 몸을 떨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크리스탈이라는 거. 보석을 말하는 건 아닐 건데.”

남자애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수진이 크리스탈의 의미를 모를 거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크리스탈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존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학교에 있는 학생들 열 명 중 한 명은 알 것이다, 라는 게 남자애의 생각이었다. 그 열 명 중 한 명인 학생들이 흘끔흘끔 수진을 쳐다보는 광경을 몇 번 본 적도 있다.

그렇게나 다들 쳐다보는데 아직도 몰랐구나.

아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다.

“크리스탈은 앱 이름이야. 앱 속에 나오는 캐릭터 이름도 크리스탈이고.”

“앱? 어떤?”

“잠깐만 있어봐, 나도 갖고 있어.”

한 달 전쯤에 뜨기 시작한 앱인데, 그런 말을 하며 남자애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 위로 몇 번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고는 수진에게 내밀었다.

수진은 캐릭터라기에 게임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자애가 내민 스마트폰에는 더러운 방을 비추고 있는 화면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사진이야?”

“VR(Virtual Reality)방송이야.”

그 말에 수진이 스마트폰을 움직였다. 스마트폰이 돌아가는 각도대로 화면 안의 풍경이 움직였다. 360도 카메라 기능이다.

VR방송이란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인물로 꾸민 방송을 말한다. 지상파에서는 전혀 쓴 적이 없고 주로 유튜브에서 쓰인다. 게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영화에 비유하자면 게임이 스토리영화고 VR방송은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에 빗댈 수 있다.

“버튼을 조작해서 움직일 수도 있어.”

옆에서 남자애가 끼어들며 말했다. 화면 한편에 반투명한 조작키가 있었다.

“침대로 가봐. 컴퓨터 앞에 없는 거 보면 지금 자고 있을 거야.”

수진은 조작키로 카메라를 움직였다. 침대로 향하자, 사람이 누워있는 게 보였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이불이 딱 사람 크기로 부풀어 있었다.

자고 있는가보다.

수진이 이불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캐릭터가 크리스탈이야?”

“응. 근데 지금은 자고 있는 게 아니라 음악을 듣고 있는 모양이네.”

“음악?”

남자애가 손을 뻗어 스마트폰의 볼륨을 올렸다.

그러자 앱의 사운드가 수진의 귀에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리스탈이 이어폰을 끼고 듣고 있어도 뭘 듣고 있는지는 들을 수 있게 돼있어.”

크리스탈은 노래를 듣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노래가 귀에 익숙했다.

“이런 우울한 곡밖에 안 들어.”

남자애가 그렇게 말했다. 크리스탈을 향한 명백한 비웃음이 남자애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뭐라 대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수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돌아보자 수진은 굳은 얼굴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말을 못 들었나? 그런 생각에 남자애가 다시 수진을 불렀다.

“저기, 수진아?”

수진이 남자애를 돌아보았다.

“으, 응? 왜?”

수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남자애는 조심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크리스탈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지금은 이불 속에 있어서 안 나오려나봐. 불면증이 있다는 설정이라 하루에 3시간? 그쯤 밖에 안 자거든. 그것도 제대로 자는 게 아니라 저렇게 피곤을 덜어내고. 뭐, 어쨌든 가상의 존재니까 저런 설정인 거지.”

남자애가 화면을 건드렸다. UI창이 떴지만 조작키 말고는 어떤 커맨드도 없었다.

“그냥 크리스탈을 보는 것밖에 없는 콘텐츠야. 인터넷 BJ같은 거지. 그냥 폐인처럼 사는 여자애의 일상을 계속 보여주는 것 밖에 없어. 딱히 얘가 우리들한테 말을 거는 것도 아니고. 음, 저기, 일반인이라면 이게 뭐가 재밌는지 모를 수도 있는데, 요즘 넷에서는 이런 게 인기야. 자기보다 못한 삶을 사는 존재를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거나, 또 생각지도 못한 창의적인 병신 짓을 하는 걸 보면서 웃는 거.”

남자애가 나름대로의 분석도 말해주었다.

수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 반응했다.

“어쨌든 얘가 이불 밖으로 나오면 알게 되겠지만, 얘의 얼굴이 너랑 많이 닮았어.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똑같이 생겼어. 동영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래서 크리스탈의 모델링이 널 보고 한 게 아닐까 얘기가 돌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너랑 닮았으니까 다들 보게 되는 거고.”

말을 마치고 남자애는 수진의 눈치를 살폈다. 수진은 어쩐지 불안해하는 기색을 보이며 빨대에 입을 대고 있었다.

바닥을 드러낸 우유곽 안에서 빈 소리가 울렸다.

수진이 빨대에서 입술을 뗐다. 빨대 끝이 잘근잘근 씹혀있었다.

“응, 고마워, 알려줘서.”

수진은 먼저 걸음을 뗐다. 남자애와 헤어진 후, 수진은 앱을 다운받았다.

사용자마다 다른 화면이 보이는 건 아닌지, 남자애의 폰으로 봤을 때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 나타났다. 크리스탈은 아직 그 얼굴을 드러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자 다른 반 애들은 보이지 않고 급우들은 모두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아 있었다. 노트를 꺼내는 걸 보니 수업종이 울렸던 모양이다. 언제 울렸던 것일까. 그것도 몰랐을 정도로 정신이 팔려있었던 건가.

수진도 시간표를 확인하고 노트를 켰다. 교과서가 모두 종이책에서 e북으로 넘어갔기에 가방은 가벼워져서 좋았다.

수업 중, 크리스탈이 신경 쓰여 몰래 책상 아래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VR영상은 스마트폰을 움직이지 않으면 화면도 한 방향에 고정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크리스탈은 조작키로도 카메라를 움직일 수 있었다. 360도 카메라로 찍은 게 아니라 방 자체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증거였다.

마침 침대에서 크리스탈이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벗어둔 옷을 주섬주섬 집고 있는 것이었다. 이불이 젖혀진 부분으로, 크리스탈이 속옷도 입지 않은 상태라는 게 보였다.

크리스탈이 이불에서 나와 곧장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몇 주는 감지 않은 것인지 산발을 넘어서 눅눅해져 축 가라앉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이였다. 하루 이틀 청소를 안 한 것이 아닌 듯 빠진 머리카락이 의자에 한가득 끼여 있고, 바닥에는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수진은 크리스탈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으로 카메라를 옮겼다.

놀랄 정도로 마른 여자애였다. 그러고 보면, 방은 더럽지만 과자나 음료수병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가상의 존재니까 그런 건 전혀 상관없잖아.’

얼굴을 봤을 때는, 마음의 준비를 했던 만큼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왜 크리스탈을 보고 자신을 의식하는지 확실히 깨달을 수 있는 얼굴이었다. 크리스탈의 얼굴은 수진과 똑같았다. 크리스탈이 조금 더 마르긴 했으나 수진도 원체 마른 체형이라 둘의 생김새에 큰 차이는 없었다.

크리스탈은 구부정한 자세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컴퓨터 게임을 클릭한다. 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일어났는데 스트레칭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브래지어와 팬티는 얼마나 빨지 않은 건지 여기저기에 더러운 자국이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 모니터에서 나오는 창백한 불빛 때문에 크리스탈이 더욱 초췌해 보인다.

수진은 기분이 나빠져서 앱을 종료했다.

크리스탈은 꽤 유명하다. 수진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왜 인기를 얻고 있는 건지. 딱히 재밌는 걸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더러운 여자애일 뿐인데.

그건 그렇고, 크리스탈은 왜 자신과 닮은 것일까. 크리스탈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집에 돌아와 의자에 몸을 맡길 즈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수진은 예뻤다. 수진은 보편적으로 미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런 유형은 아니었는데, 그건 수진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수진이 보편적인 미녀였다면, 그리고 만약 크리스탈의 디자인을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보편적인 미녀로 만들었다면야 우연히 겹치었으려니 납득했을 것이다.

실제로 어찌됐건, 수진은 앱을 만든 회사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우연일 가능성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크리스탈이 자신처럼 생긴 것이 우연의 일치더라도 자신이 실제로 피해를 입고 있으니 따질 이유야 충분했다.

크리스탈을 만든 회사를 알아본 후 전화를 했다. 얼마간 기다리니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알림이 떴다. 다시 걸어보았지만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긴, 받을 거면 처음 전화했을 때 받았겠지.

수진은 숙제를 하는 중간 중간에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한 시간에 네다섯 번을 걸었지만 그때마다 빈번하게 받을 수 없다는 알림을 들었다.

크리스탈이 사용자들에게 엄청나게 인기여서 바쁜 건가.

이런 회사에 대해 잘 모르는 수진은 막연히 그런 생각도 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숙제를 끝내고 기지개를 켰다. 문득 둘러보니 방안이 더러운 것 같아 청소를 하고, 1시간만 하자고 생각하며 시작한 온라인 게임도 끄고 나니 마땅히 할 일이 남아있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았다. 요즘 의자는 좋았다. 중학생 때만 해도 직접 돌려야 했는데, 요즘은 버튼만 누르면 알아서 회전하는 의자가 나왔다. 속도도 조절할 수 있다. 고등학교로 올라가며 새 출발하는 기념으로 바로 이 의자를 샀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이 감기듯이 회전한다. 스마트폰을 툭툭 건드려 전화를 걸었다.

빙글빙글. 1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스마트폰은 여전히 책상 위에서 공허하게 송신을 계속 했다.

크리스탈 회사에 메일도 보내놨지만 그쪽은 수식확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늦어, 내일 연락해보기로 하고 수진은 의자에서 내려와 침대에 몸을 맡겼다.

 

2

배는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먹어둘까 해서 수진은 매점으로 향했다. 크리스탈의 마른 몸이 의식 되었던 걸지도. 그런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어제는 저녁이라 안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한동안 울리다가 자동으로 꺼졌다.

여전히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며 복도를 걸었다. 그러던 중 창가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는 남자애를 발견했다.

남자애는 수진을 발견하자 표정을 밝게 바꾸며 몇 걸음 다가왔다. 그리고 어눌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정말 소심한 애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수진아 안녕.”

“응. 왜?”

남자애가 살짝 다가왔다.

“저기, 도움이 될까 해서 알아본 건데.”

남자애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 크리스탈을 만든 회사, 지금은 망하고 없어졌대.”

순간 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회사와 연락할 수단은 끊긴 셈이다. 왜 전화를 받지 않는지에 대한 해답은 되었다.

회사가 망했으니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을 거다. 회사 건물에 찾아가는 방법도 글렀다. 게다가 아무리 정보시대라고 한들 직원들 개개인의 번호 같은 것이 인터넷에 돌아다닐 일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에 휩싸여있을 때, 남자애가 말을 이었다.

“응, 그리고 좀 더 알아보다가 알게 된 건데, 인터넷 지인의 지인이 그 회사에 다녔었대. 뭔가 알아보고 싶으면 내가 소개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수진은 무심코 남자애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남자애가 주춤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너무 빤히 들여다 본건가, 그런 자각을 하면 수진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남자애의 말이 진실일지 생각했다. 수진은 남자애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흐리멍덩한 얼굴이다. 남을 속일 수 있을 만한 인재는 아니다. 그럼 남자애의 말이 사실이라고 보고, 남자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일이 쉽게 풀린다. 수진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일단 고맙다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남자애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해지면 그때 부탁할게.”

수진은 그렇게 말하며 남자애의 전화번호를 받았다.

점심시간, 수진은 남자애를 찾았다. 직원이었다는 사람에게 연락해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적당히 문자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일이 잘 풀린다는 생각에 수진은 느긋해져 있었다.

수업 중에 고민해본 결과, 상대를 직접 만나기는 껄끄럽다고 생각했다. 만약 크리스탈의 외모가 자신을 노린 악의적인 모델링이면, 그런 짓을 한 회사 직원을 만나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타고난 낯가림이 원인이었다.

쉬는 시간. 남자애에게 연락처를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하니, 회사직원이 꼭 직접 만나고 싶어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크리스탈의 외모를 바꿔달라는 건 꽤 큰 문제일 테니 증거가 필요한 거겠지. 그리고 이번 주말에 만날 수 있데.”

학생인 우리들을 배려한 것인가? 나쁘지 않은 날짜다. 벌써 목요일이니까. 그나저나 회사는 언제 망한걸까.

의문을 입에 담았다.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쉽게 대답이 돌아왔다.

“벌써 두 달 전이래.”

“두 달?”

그때면 1월 끝 무렵이다. 한참 전이잖아.

“시간 끌 것도 없으니 토요일에 만나기로 하자.”

목요일과 금요일을 꾹 참으며 보냈다. 금요일에는 초조해서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러면 안 된다. 성적을 떨어뜨릴 수는……. 금요일 저녁까지 안절부절 못하다가 수진은 토요일을 맞았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늦게 잠들었는데도 평소보다 개운하게 깼다. 이런 적은 예전에도 몇 번 있었다. 사람은 3시간만 자도 되는 것인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평균 8시간의 수면시간을 안타까워하지만, 대게 이렇게 잠을 적게 자는 생활을 이어가면 긴장이 풀렸을 때에 15시간씩 자버리게 된다.

아무래도 좋을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외출준비를 했다. 사적인 이유로 밖에 나가는 게 오랜만이다. 옷을 꺼내보니 유행이 지났거나 수수한 옷들뿐이었다.

오후 1시. 시내의 옷가게에서 나오며 수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이 부실정도로 화창한 날이었다.

올 때 입었던 옷은 종이가방에 넣어두었고, 지금 수진은 과감하게 하얀색으로 통일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옷은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주위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피부가 따갑게 느껴지는 건 햇볕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수진은 등을 곧게 폈다. 으슬으슬한 날씨가 몸에 긴장감을 주었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딱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남자애가 카페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 한 남자는 입구로부터 등을 보이는 위치에 앉아 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남자애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수진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진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자 남자애가 남자를 소개했다.

“이퀘이션 님이야. 크리스탈 만든 회사에서 인턴으로 있으셨대. 그리고 이쪽이 제가 말한 여자애에요.”

“이퀘이션(equation)?”

수진이 반문했다.

“넷상에서 쓰는 닉네임이야.”

남자애가 대답해 주었다.

수진은 이퀘이션이라 불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방정식이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격의 남자였다. 회사원이라기에 30대를 생각했지만 그리 나이차가 많이 나지는 않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수진은 주춤했다. 자신도 닉네임을 생각하는 게 좋았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급조하자니 머리가 안 굴러갔다.

“김수진이라고 합니다.”

“본명?”

“네.”

이퀘이션은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그도 본명을 밝혔다.

“나는 방정식이라고 해.”

“본명이신가요?”

남자애가 농담을 던졌다. 정식이 피식 웃었다. 그 덕에 이후에는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메뉴를 정하거나 수진의 새 옷이 어울린다거나 본론에는 들어가지 않은 채 소소한 얘기를 했다. 주문한 케이크가 와서 잠시 대화가 끊어졌을 때에서야 정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너, 크리스탈 닮았다.”

단번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수진이 그늘이 생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애가 끼어들었다.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져가요.”

“우리 앱 중에선 가장 흥한 셈인가.”

“어떻게 해주실 수 없나요? 캐릭터를 바꾼다던가. 이렇게까지 생긴 게 똑같으면 문제가 더 생길 지도 몰라요.”

정식은 잠시 대답에 뜸을 들였다.

“그것에 대해 하는 말인데, 사실 회사가 망해서 어쩔 수 없어.”

“왜죠?”

“회사가 망했으니 이제 앱에 대한 권리가 허공에 사라졌어. 서비스야 진즉에 종료했지. 아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파일을 받아서 설치했나본데, 그렇게 퍼지는 건 우리가 통제할 수 없어.”

“크리스탈이 저랑 똑같이 생긴 건 우연인가요?”

“우연?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렇게 알게 됐으니 손은 써볼게”

이후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나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에 대한 문답이 이어졌다. 그러나 막상 한숨 돌리고 생각해보면 딱 부러지는 결론은 얻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며 수진은 정식이 한 말을 되짚었다. 계산을 끝내고 문 앞에서 헤어지기 전, 정식은 이렇게 말했었다.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일단 걱정하지 말고 있어줄래? 당사자에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연예인의 스캔들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는 거잖아. 크리스탈도 비슷한 앱들이 생기면 잠잠해질 거라 생각해.”

저런 식으로 말하니 꼭 그냥 내버려두겠다는 듯이 들렸다. 그러면 자연스레, 피해자의 문제가 아닌 피해자를 보는 3자의 동정심이 사라질 거라고.

“처음 기획할 때에도 기껏해야 2, 3개월 앞선 기획이라고 생각했었어. 우리가 안 만들어도 그쯤 지나면 이런 걸 내놓는 사람이 나올 거라는 거였지.”

수진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묻기로 했다.

“어떻게 이런 방식의 게임을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그냥 음침하게 사는 애를 보기만 할 뿐인 건데.”

“왠지 모르게 이런 게 유행할 거라는 감이 있었대. 원래는 육성시뮬레이션 게임이었어. 회사가 망해서…….”

정식은 잠시 말을 끊었다.

“사실 잘은 몰라. 난 인턴이었거든. 기획은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고.”

“그럼 혹시 기획을 한 분의 연락처는 알 수 있을까요?”

“미안. 그건 말해주기가 어려워.”

수진은 더 물어보지 못했다.

정식은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떠났다. 뒤늦게 알아차렸지만, 남자애를 통해 연락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정류장에 도착했다. 타고 갈 버스가 10분 뒤에 올 예정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변호사라던가 그쪽으로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남자애가 말했다. 그것은 수진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알지도 못할 뿐더러, 자신이 이런 걸 해버리면 부모님도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불법공유라는 건 변호사를 알아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부정만 하고 있는 것도 한심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불편한 마음을 안은 채 집에 도착했다. 구두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부모님은 아직 오시지 않았다.

식탁에 밥이 차려져 있기에 옷을 갈아입고 먹기로 했다.

방안으로 들어가는데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수진은 걸음을 멈추고 거울 앞에 섰다. 좌우로 몸을 움직이며 옷태를 살폈다. 손으로 옷자락을 나풀거려보며 흰옷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 크리스탈과는 다르지.

 

3

그 이후로 남자애도 수진과 같이 조사에 동참했다. 둘은 방송에 단서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교대로 24시간 동안 쭉 감시해보기로 했다.

하기는 주말에 해야겠지만 장소를 정하는 것에선 막혔다. 24시간 감시하려면 둘 중 한 명의 집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체면을 생각해본 후, 자신이 도움을 받는 입장이라는 생각에 수진이 남자애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남자애는 주말 오전에 수진의 집으로 찾아갔다. 수진은 꽤 고층 건물의 12층에 살고 있었다.

수진의 집 거실로 들어서며, 또래 여자애가 사는 집에 온 건 처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집에는 방문이 많았다. 거실을 지나 그 중 한 곳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여자애의 사진이 남자애의 눈에 들어왔다.

‘수진이가 저렇게 웃을 수 있었구나.’

남자애의 시선이 한동안 사진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수진은 눈길도 주지 않고 사진을 지나치곤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남자애가 급히 따라갔다. 너무 두리번거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방으로 들어설 때 눈으로만 안을 훑어보았다. 아담한 방이지만 물건이 거의 없고, 청소를 잘해 놓아 좁다는 느낌은 없었다.

컴퓨터가 커져있었다. 거의 유일한 전자기기여서인지, 왠지 이것만 눈에 띄는 듯 했다.

꽤 오랫동안 쳐다본 탓인지 수진이 어물쩍 입을 열었다.

“오래전부터 쓰던 거야.”

컴퓨터로 크리스탈을 실행하고는 VR기어를 연결했다.

수진의 입장에서도 남자애를 초대한 건 처음이라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둘은 크리스탈을 관찰하는 것으로 기분을 가라앉히려 했다. 실제로 우중충하기 짝이 없는 콘텐츠라 기분은 금방 진정되었다.

둘은 번갈아가며 크리스탈을 관찰했다. 한참 시간이 흘렀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을 셈이었지만, 스토리가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라도 5시간을 보면 지칠 수밖에 없다. 수진이 먼저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몸을 일으키고 화면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아무래도 크리스탈을 보는 것이 찝찝했다. 자신과 얼굴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탈은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려 해도, 역시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이런 불쾌한 행동을 하는 것은 기분이 나빴다. 같은 이유로 남자애가 크리스탈을 보고 있는 것도 불편했다.

수진의 차례일 때였다.

“누가 크리스탈 역대급이란 걸 올려놨어.”

뒤에서 남자애가 말했다. 크리스탈이 유명하긴 하지만 일반인들이 챙겨보는 앱은 아니다. 재미를 위해 각본을 짜거나 지시를 내리는 일 없이, 그저 크리스탈의 일상을 보여주는, 리얼리티를 중시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앱을 실시간으로 보는 사람들은 몇몇 소수들로, 크리스탈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수의 사람들이 뽑아낸 짤방으로만 크리스탈을 즐긴다. 영상의 편집을 시청자에게 맞기는, 전형적인 비즈니스 콘텐츠다.

볼 게 워낙에 많아진 시대라 사람들은 짧은 시간 만에 즐길 수 있는 걸 찾는다. 프로그램 하나를 진득하게 앉아서 다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크리스탈의 인기는 이런 대중의 니즈 때문일 것이다.

남자애가 글을 클릭했다.

“나도 보자.”

수진이 VR기어를 벗고는 남자애 옆에 앉았다.

수진은 남자애에게 바짝 붙어 폰을 들여다보았다. 스크롤을 내리니 동영상 파일들이 나왔다. 맨 위에 것을 재생했다.

익숙한 방안 풍경이 나왔다. 모니터에서 쏟아지는 창백한 불빛이 어두운 방안에 녹아들고 있다. 크리스탈의 옆얼굴이 보인다. 얼마나 감지 않았는지 번들거리며 뭉쳐있는 머리카락이 의자 뒤로 늘어져 있다.

카메라가 점점 크리스탈에게 다가간다. 헤드룸을 잘라내는 거리까지 다가온다.

화면에 꽉 차듯이 크리스탈의 얼굴이 비춰질 때, 갑자기 크리스탈이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의자에서 일어난 것이다. 카메라가 크리스탈을 쫓는다.

크리스탈은 방문으로 다가간다.

처음 보는 장면이라 수진은 집중했다. 크리스탈의 동선은 침대와 컴퓨터 앞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크리스탈이 문을 열었다.

수진은 거실이 나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거기엔 하얀 방이 있었다.

하얀 방? 수진은 의문을 느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카메라가 크리스탈의 등을 뒤따랐다.

하얀 방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화장실이었다. 하얀 타일이 형광등 빛을 반사하고 있어 그런 착각을 했던 것이다.

문지방 앞에 화장실용 슬리퍼가 놓여 있다. 하지만 크리스탈은 자연스럽게 슬리퍼를 신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는다.

카메라가 문을 통과해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다.

벽면에는 몸을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크기의 욕조가 있고, 그 외에 세면대와 샤워기, 변기가 있는 화장실이었다.

크리스탈은 변기로 다가간다. 변기로 가서 할 일이란 몇 가지 없다. 크리스탈이 변기에 앉는다. 뭘 하려는 지가 더 명확해진다. 크리스탈이 운동복바지를 팬티와 함께 무릎께로 내렸다. 가랑이 사이가 과감 없이 드러났다. 시선이 있다는 걸 알 리가 없으니 크리스탈은 자연스럽게 일을 보기 시작한다.

쪼르륵 하고 물소리가 났다. 크리스탈의 몸집처럼 가는 물줄기였다. 그 소리가 얼마간 이어지더니, 물줄기가 똑, 똑, 똑, 하고 방울져 떨어진다. 소변은 더 나오지 않지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뭘까 싶을 때, 크리스탈의 입에서 끄응, 하는, 힘주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힘을 주고 있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가 크리스탈의 얼굴 앞으로 다가간다. 전후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크리스탈의 표정을 살피려 한다. 그러다가 밑으로 쓱 내려가더니, 변기 밑을 뚫고는 변기 안쪽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구도가 나왔다.

“…….”

수진은 아무 말도 입에 담지 못했다. 꾹 다문 입술이 미미하게 떨렸다. 남자애는 아까 전부터 수진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눈치 없이 계속 영상을 틀어놓고 있었다. 계속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거 지금 시청하는 사람들 모두 봤겠다. 다시 눈치 없이 그런 소리를 했다. 갑자기 수진이 스마트폰을 잡아채서 집어던졌다. 스마트폰은 벽에 세게 부딪히고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수진이 집어던진 스마트폰은 꽤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멀쩡했다. 요즘 물건 잘 만드는 구나, 약간 감탄하며 남자애는 집으로 돌아갔다.

미안한 일인 줄은 알고 있지만, 혼자 남았을 때 남자애는 다시 그 게시글을 찾았다.

[삭제된 게시글입니다.]

남자애는 다른 사이트를 찾아다녔다. 새벽 4시쯤 되었을 땐 졸음이 몰려왔다. 뻐근한 눈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창백한 빛이 창으로 비춰들었다.

고요한 기분이었으므로 남자애는 수진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은 왜 수진을 도와주려고 하는가. 부당한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이 싫어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사실 수진에 대해 호감이 생긴 게 크다.

예쁘다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호감을 가진 적은 없었다. 아무 일 없었다면 그렇게 아무 인연 없이 3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탈에 대해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원조교제라던가 그런 뉘앙스의 무언가가 떠올랐다. 안 좋은 길로 빠져든 게 아닌가. 이런 애가 실제로 같은 학교에, 가까이에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연유로 크리스탈의 모델이 된 것일지 추론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수진이가 크리스탈에 대해 모른다는 걸 알게 되고, 크리스탈에 대해 알려주게 되면서 이것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탈 문제를 해결해야지. 해결할 수 없더라도 상관없다. 어쨌든 같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해결방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뭔가가 진척되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 있다면 유대가 짙어질 수 있다.

앱을 켜놓고 노트를 꺼냈다. 크리스탈은 의자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잠시 눈을 붙인 것이리라. 볼륨을 높이자 새근새근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카메라를 돌려보면서도 의식은 아까 전에 봤던 영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노트에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나갔다.

방에 하나 밖에 없는 문을 열자 화장실이 나왔다. 이런 구조의 집은 없다. 하지만 혼자서 살 것이라면, 이런 구조의 집이라도 상관이 없다.

컴퓨터는 2020년에 출시된 기종이다. 언제 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시된 직후에 샀다면 5년 전 일이다.

방의 넓이는 크리스탈의 체격과 걸음을 계산해보면 나온다.

널브러진 옷을 살펴보면 나오는 상표도 적어둔다.

“…….”

뭔가 진척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4

학교에 오니, 몇몇 애들의 시선이 왠지 더 들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진은 머뭇머뭇 걸음을 옮기며 교실을 가로질러 자기 자리에 앉았다. 1교시는 영어시간이라 이동수업이었다. 영어 특성화 교실로 가기 위해 연필을 챙겼다.

이번 수업은 원어민 교사가 가르치는 수업이었다. 교과서나 문제지는 종이책에서 태블릿pc로 대체된 지 오래지만, 외국에서는 태블릿pc로 하는 수업뿐만 아니라 학생이 직접 연필을 쥐고 필기하는 수업도 병행한다고 한다. 아날로그 감성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이기도 하고 감수성 함양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수진은 교실을 나섰다. 그때까지 시선이 계속 수진을 쫒아왔다.

기분 나쁜 시선이었다. 힐끔힐끔 하는데도 끈덕지게 눌어붙었다.

왜 더 심해진 걸까, 그런 의문을 품으니 자연스레 주말에 봤던 동영상이 떠올랐다. 수진도 다시 그 영상을 찾아봤었다. 최근에 올라와서 퍼지기 시작한 영상이다. 남자애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도 영상을 본 것이다.

수진은 멍하니 살짝 벌리고 있던 입을 꾹 다물었다. 등골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그 영상을 봤다는 건가. 그 영상을…….

수업시간 중에는 시선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은 수업에 집중하거나 딴청을 부렸다. 수진은 나름대로 수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Try to introduce yourself in English. Let me give…….”

미국계 교사는 영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내용은 영어로 자기소개를 써보는 것이었다.

수진은 한귀로는 수업을 들으면서 한편으론 다른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처한 일들,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 자신이 해야 할 일들.

‘원래 모두 금방 빠져들었다가 금방 빠져나가. 그게 피해자에 대한 위로가 되는진 모르겠지만.’

남자애가 해준 말이다. 남자애는 그리 말하곤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왜 이 순간에 그 애가 떠오르는 거지.

수업이 끝났다. 아예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그 길이 우연찮게 남자애의 교실을 지나치는 길이었다. 주말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스마트폰을 집어던졌는데 멀쩡하려나? 걱정되었다. 경황이 없어 무작정 던진 터라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 사과하러 가자. 그런 생각을 가지고 복도에서 남자애의 교실을 들여다보았다.

남자애가 있었다. 마침 복도 쪽을 보고 있어서 손짓을 보냈다.

 

둘은 자연스럽게 얘기가 새어나가지 않을 만한 곳으로 움직였다.

우선 전에 있었던 일을 사과부터 했어야 했는데, 머리가 복잡해서 말할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애 쪽이었다.

“사실 도와줄 사람을 구했어.”

“도와줄 사람?”

수진이 자연스레 반문했다. 전에 만났던 정식 같은 사람인가, 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일이 이렇게 퍼져나간다는 데에 조금 언짢은 기분도 들었는데, 남자애가 곧바로 이에 대해 사과했다.

“너한테 허락도 없이 네 일을 말한 거 미안해. 하지만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야.”

수진은 기분이 누그러졌다.

“아냐, 미안할 것 까지는. 근데 그 사람이 누군데?”

“실은 예전에 한 번 부탁한 적이 있었어. 일진 애들이 날 시켜서 너를 부르려고 했을 때, 서영이에게 부탁해서 말려달라고 했어. 그때 이후로 부탁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서영. 수진은 속으로 그 이름을 한 번 입에 담아보았다. 실제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다.

“서영이랑은 방과 후에 만나자고 했어. 어때, 시간 괜찮아?”

“응, 괜찮아.”

셋은 카페에서 모였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려면 뭐라도 시켜야 해서 수진은 가장 싼 커피를 주문했다. 그것도 만만찮은 가격이다. 최근 들어 돈을 너무 많이 쓰는 건 아닐까? 얼핏 그런 생각을 하며 수진은 서영을 살펴보았다.

먼저 중성적인 외모가 눈에 띈다.

커피가 오기를 기다리며 수진은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그리고 알아낸 사실들에 대해 서영에게 설명했다. 말을 하는 사이 의도치 않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상황인데 자신도 그러니까 괜히 부끄러웠다.

서영이 크리스탈에 대해 모른다기에 크리스탈 앱을 켜서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든 게 끝나자 서영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에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을 죽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진은 기대감을 안은 채 서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진은 이윽고 서영이 눈을 뜨며 한 말에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글쎄, 잘은 모르겠는데."

"아, 그래……."

그때 서영이 지나가듯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크리스탈의 모델이 너일 거라고 했는데, 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모델일 수는 없는 건가?”

수진은 멀뚱히 서영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가만히 듣던 남자애는 왠지 서영의 말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다. 수진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어.”

남자애가 중얼거리자 서영이 반문했다.

“왜?”

“아니. 별거 아냐. 다른 사람이 모델이라면 이 상황이 너무 공교로워서.”

남자애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크리스탈에 대해 알아보려고 웹서핑을 좀 했었어. 크리스탈 닮은꼴 이라는 류의 제목으로 사진이 꽤 있었는데, 수진이를 봐서인지 어느 것도 크리스탈과 닮아 보이지 않았어.”

수진은 남자애를 돌아보았다. 그런 것도 알아봤을 줄은 몰랐다. 고맙다고 말할 일이었으나 남자애의 행동이 꺼림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남자애는 수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수진을 돌아보더니 빙긋 웃었다. 수진도 웃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떨렸다.

이후 얘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일어나기로 했다.

“지금 가기에는 커피 값이 아까운데.”

남자애가 옆에서 투덜거렸다. 수진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할 말이 더 있는 건 아니었다. 셋은 카페를 나섰다.

20분 후 남자애는 혼자 학교로 돌아갔다. 그는 사실 희미한 위화감을 감지하고 있었다. 수진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지나쳐서 물어보지 않은 점이 있었다. 물어보지 않기로 한 이상 혼자서 알아낼 방법을 궁리했었는데, 카페를 나오기 직전에 그 방법이 생각났다.

학교는 하교가 끝난 시간대지만 3학년들이 남아서 자습을 하고 있었다. 학교가 개방이 되어 있었기에 남자애는 곧장 본관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자전거 주차장과 창고를 겸한 개방된 공간이 있었다. 그곳 한구석에 폐지를 담아둔 박스가 있었다. 아직 안이 덜 차있는 박스가 가장 최근 것이었다.

원어민 교사는 매 학기마다 자기소개 작문을 새로 시켰다. 학기마다 담당하는 학생이 바뀌기 때문이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남자애는 원어민 교사의 수업을 안 받게 되었으나 그 사실을 1학년 때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세절되어 너덜너덜한 것들을 치워두고 잡다한 폐지들을 뒤적이다가 영어수업 때 쓴 것들을 발견했다. 남자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슥 둘러본 후 다시 폐지뭉텅이를 빠른 속도로 훑었다. 그리고 수진이 쓴 작문을 발견했다.

자기소개라는 것은 일부러 튀려하지 않는 한 대체로 비슷한 형식을 띄기 마련이다. 즉 보편적인 문항이 존재한다는 건데, 그 보편적인 자기소개에서 늘 빠지지 않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가족관계다.

자기소개를 읽는 남자애의 눈에 곧장 한 이름이 들어왔다. 김수정. 수진의 자기소개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 그리고 짐작치 못한 한 인물인 김수정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수정은 수진의 언니였다.

남자애는 소름이 머리끝에서 발끝으로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김수정……그랬구나. 너무나 단순하지만 그래서 크리스탈이었어.”

 

다시 정식과 만나기로 했다.

“그래……장소는 전에 만났던 그 카페면 되겠지?”

처음에 정식은 거절했다. 짜증을 내는 듯한 어조로 이 일은 곧 해결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수정에 대해 언급을 하자 망설이다가도 결국엔 승낙했다.

한편 수진은 마음이 불편해진 상태였다. 남자애가 언니에 대해 말하고 난 이후부터 이 감정이 지속되었다.

남자애가 잡은 약속이지만 남자애는 수진도 불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역 앞에서 만나 목적지 까지 같이 걸어가는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한참이나 그러다가 남자애가 우물쭈물하며 끝까지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있잖아. 언니가 있다는 거, 어떻게 된 일이야?”

수진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왜 그런 걸 이제와 묻는 거야?”

“알고 나서도,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묻지 않으려 했었어."

"그럼 묻지 말지 그랬어."

"그러려고 해도 자꾸 신경이 쓰였어."

"묻지 말지 그랬어."

수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수진이 우뚝 멈춰 섰다.

“역시 못 가겠어. 가기 싫어.”

그렇게만 말하고 수진은 그대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잠깐만, 수진아!”

수진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곧장 걸음을 옮겼다.

잡으려고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신 수진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길 한가운데에서 수진에게 소리쳤다.

“수진아, 내가 꼭 해결해줄게!”

수진은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돌아섰다. 정식이 어디까지 알고 있을지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언니에 대해 얘기한 순간 드러낸 기색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보여준 것이 그가 아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만나기 싫었다.

남자애에게서 언니가 크리스탈의 회사와 관련이 있을 거란 얘기를 듣고 난 후, 메신저를 확인하자마자 수진은 곧장 언니의 방을 뒤졌었다. 사소한 메모에서부터 두꺼운 책들까지 하나씩 꺼내어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사원증이라던가. 또는 VR과 관련된 글이 인쇄된 용지, 서적들. 심지어 크리스탈에 대한 얘기까지 노트에 메모되어 있었다.

언니는 크리스탈을 만들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작단계에선 크리스탈이란 이름이 아니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안절부절 못하다가 다시 언니의 방을 뒤져보았다. 확인했던 것들도 다시 확인했다. 언니가 또 무슨 악의적인 장난을 나에게 치는 걸까. 사소한 단서라도 잡기 위해 몇 시간이고 언니의 방을 헤집었다.

그러던 중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터폰 스크린을 확인하자 현관문 앞에 남자애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수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거의 한밤중이었다. 정식을 만나러간다고 한 게 ‘네다섯 시간 전’인데…….

 

수진은 침대에, 남자애는 의자에 앉았다. 남자애는 정식에게 들은 내용을 요약해서 말해주었다.

수진이의 언니, 즉 김수정은 자신보다 선배였고, 크리스탈을 만들고 있었다. 자신은 도중에 입사해 크리스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모델링으로 삼은 건 회사 소속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작업할 캐릭터로, 당연하게도 러프단계에서는 현재의 크리스탈과 닮은 모습이 아니었다. 이런 음침한 콘셉트의 게임도 아니었다. 애초에 지금 나온 결과물은 게임이라고도 할 수 없다. 크리스탈이란 이름도 아니었다.

수정은 크리스탈을 만들던 중 행방불명되었다. 어느 날 출근을 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도 아무도 받지 않았다.

수정과 상관없이 회사는 게임을 완성하기도 전에 도산했다.

이후 회사 명의로 크리스탈이라는 게임이 나타났다. 수정과 닮은 모습이라 처음에는 수정이 만든 게임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이름부터가 크리스탈. 즉, ‘수정’이었으니까.

남자애가 말을 끝냈다. 네 언니에 대해서는 대강 밝혀졌지만 언니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남자애는 그렇게 정리했다.

“네 언니가 한 짓이란 거, 혹시 알고 있었어?”

“……아니, 하지만 중간에 알게 되었어.”

수진이 무척 침울해 보여 남자애는 질책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언니랑은 사이가 안 좋았어. 언니는 활발하고 인간관계도 넓고 그러는데 예전에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거든. 언니 입장에선 내가 동생인 게 부끄러웠던 것 같아. 그렇지만 얼마 전에 실종되기도 했고. 왠지 잘 됐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언니에 대해 빨리 잊어버리려고 했어.”

사실 언니는 자기를 괴롭혔다던가, 사이가 안 좋았었다던가. 나를 무시했다던가, 수진은 그런 얘기를 늘어놓게 되었다.

“죽어서도 날 괴롭히는 거야.”

남자애는 중간 중간 맞장구를 치며 수진의 얘기를 들었다. 수진은, 말해놓고 보니 후회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진정한 친구가 생긴 것 같다고 느꼈다. 고민이 있을 때는 털어놓으라느니 상담을 해보라느니 하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이런 얘기를 대체 누구에게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크리스탈을 보며 옛날 생각이 났었어.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는 일부러 활기차 보이려 친구도 사귀고 그랬지만…….”

말을 하던 중 뜨거운 게 가슴에서 북받쳐 올랐다. 얼굴에 열이 확 몰리는가 싶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수진은 훌쩍이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수진은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남자애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등을 두드려주었다. 머뭇거리느라 두드리는 것도, 그저 슬쩍 닿았다가 뗀 것도 아닌 어중간한 행동이었다. 아이보리색 스웨터의 감촉이 푹신푹신해서 과연 느낌이 전해질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동작이라도 왠지 수진은 느낄 수 있었다. 별로 잘 알지도 않은 사이였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고마워, 넌 정말 좋은 친구야. 그런 생각을 전하려 고개를 돌린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애의 시선과 딱 눈이 마주치고 수진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한편 남자애는 자신을 바라보며 가만히 굳어 있는 수진을 보며,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보면 이럴 때 자상하게 대해줄 수 있어야 여자들이 상처받지 않는다던데……안아줘야 하나?

수진은 몸을 떨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방금 전까지 뜨겁던 머릿속이 급격한 온도차를 느끼게 했다. 얼음물을 들이 부어도 이렇게 싸늘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애가 등을 두드리던 손을 더 뻗어 수진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뒤로 물러서려 했는데 퇴로가 막혔다.

수진은 본능적인 혐오감에 몸을 웅크렸다. 수진이 말했다.

“자, 잠깐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남자애에게 들렸을지 모르겠다. 밀어내고 싶었는데 너무 딱 달라붙어 있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눈앞에서 남자애가 눈을 감고 입술을 내밀었다. 쿵, 하고 가슴 한구석에서 뭔가가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남자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명확했다.

“미, 미안. 저기, 나는 너한테 그런 감정은 없어서…….”

아까전보다 조금 더 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남자애는 눈을 뜨고 몸을 뒤로 물렸다. 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갑작스럽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남자애는 세상이 무너진 듯한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도 수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애의 얼굴이 비에 젖은 강아지의 얼굴처럼 불쌍하게 변했다. 볼살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그리고 수치심과 절망감이란 감정이 질척하게 얼굴에 떠올랐다.

수진이 느끼는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나름 호감이 있는 상대이기에 충격이 더 컸다. 전혀 그런, 좋아한다던가 하는 기미가 없었는데, 어떻게 가장 방심하고 있을 때 이럴 수가 있을까.

쫓기듯이 집을 나선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둘 다 그럴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남자애는 아쉬움이 어린 눈빛으로 한 번 등 뒤를 돌아보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12시가 다 되어가는 한밤 중. 돌아가는 길에 남자애는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어땠는데?

무심코 물어본다.

그냥, 뭐, 크리스탈이랑 비슷했어. 학교도 안 가고.

수진은 부끄러워하며 말끝을 흐린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수진은 어색해지는 분위기에 어깨를 으쓱하며 깊게 숨을 내쉰다. 자신은 그런 수진의 어깨를 감싸 안아 다독여준다.

그런 좋은 분위기로 상황이 적당히 흘러갔을 지도 모른다.

남자애도 결코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남자애는 수진이 스스로를 크리스탈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단 걸 눈치 챘다. 크리스탈은 어떤 식으로건 수진의 인격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평소 도움을 준 것도 있고, 적당히 분위기가 잡힌 상태에서 다정하게 대하면 고백타이밍이 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 후회하고 있을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고등학생들 끼리 서로 사귄다거나 그런 짓들은 꼴사나운 거라고 생각했었다.

좋은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그러고 보면 수진과 사귄다고 해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크리스탈 때문인지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슬슬 따돌림을 당할 기미가 보인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 수진이 받는 스트레스를 자기가 감당해야 하지 않은가.

게다가 더 심각한 문제가 따로 있다. 남자애는 수진의 방에 들러보고 나서야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수진의 방에 있는 물건들이 크리스탈이 가지고 있는 것들과 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방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수진의 방에는 창문이 없었어. 그럼 크리스탈의 그 창문은 뭐였을까. 커튼이 있던 자리는.’

남자애는 수진의 방과 크리스탈의 방이 이것저것 비슷해도 의심을 확신으로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방금 전 방을 나오며 알았다. 아무리 물건을 버리고 바꾸어도 벽지까지 바꿀 수는 없었으리라는 걸. 그것을 보고 혹여나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있었다.

남자애는 아파트 뒤편으로 돌아갔다. 화단. 이제는 아무도 가꾸지 않는 곳이다. 그러고 보면 이 아파트 단지, 규모나 겉은 꽤나 화려하지만 정작 사람이 없다. 아마 지진 대비 설계나 그런 것이 부실했던 게 아닐까. 자신이 유치원에 다닐 즈음에 그런 안전성 관련 문제로 한창 떠들썩했었다. 이 단지도 10년 전만 해도 꽤나 가치 높은 단지였을 텐데.

수진의 방이 있을 만한 곳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이곳에서는 밋밋한 벽면 밖에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탈의 방이었다면 창문이 있었겠지.

한편 수진은 남자애를 돌려보낸 후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형광등은 방을 공허하게 비추지만 수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몸이 덜덜 떨렸다. 수진은 침착해질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렇게 있었다. 깊게 생각해보면 이런 남녀 간의 일이야 또래 사이에서는 흔한 일이다. 그래도 수진은 견디기 힘들었다.

 

다음날, 수진은 교실로 들어섰다.

막상 학교에 와보니 친구가 없었다. 결석했다는 것이 아니다. 친구라 생각했었는데 친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괜히 울컥해서 눈앞이 흐려졌다.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있을 때마다 우는 것도 고쳐야 하는데…….

고등학생이 되며 이제는 바뀌기로 마음먹었었건만, 그렇게 힘내서 노력했던 것들이 사실은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저 애들을 탓할 게 아니다. 내가 진심이 아니었던 거다. 전력을 다해 마음을 주지 못했던 거다. 친구란 그런 거니까……그러지 못한 내 잘못이다.

이 지경이 되자 혹시나 누군가 한 명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한 명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이서영.

별로 잘 알지도 못한 사람의 얼굴이 왜 떠오르는 걸까. 도움을 잠깐 받기는 했지만……그런 걸로 치자면 남자애에게 더 많이 도움 받았지.

쉬는 시간이 되면 교실 안에 있기 답답해서 밖으로 나갔다.

테니스장 쪽에는 테니스 매트로 족구를 하러 나온 남학생들이 있었다. 수진은 멀찍이 돌아가듯이 그곳을 지나쳤다.

기온은 낮으면서도 햇볕만은 따뜻한 날이다. 지퍼를 꽉 잠근 패딩 채로 몸을 웅크리고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이렇게 껴입고 걷고 있으면 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집에 있는 보일러가 낡은 것이었어.

아니면 고장 났었던 건지도 모른다. 초등학생쯤이었으니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나이가 아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만’이다.

오래전 일도 아니라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보일러를 틀어도 물이 차가웠다. 어렸을 때라 피부가 민감해서 인지도 모르겠으나, 어머니는 따뜻하다고 해도 수진에게는 차가웠다. 안 그래도 손발이 찬데 그 상황에서 찬물로 씻는 건 더 싫은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보일러를 틀어도 물이 따뜻해지기 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었으리라. 부모님은 물을 충분히 데우자니 가스비가 아까웠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 시절 수진은 씻기 싫어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인지,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했다. ‘선배들이 너 머리 좀 감고 다니래’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순진하게 정말로 선배들이 그러는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말한 그 아이는 권위를 빌려 말하면 더 알아듣겠거니 했던 거겠지.

쉬는 시간에 뜬금없이 여럿이 몰려와 마구 때리더니, 잡으려고 하면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기껏 괴롭히는 거면 실내화에 압정을 넣는 정도는 했어야지, 라고 생각하는 건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인가. 만약 내게 그 애들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죄와 벌’처럼 후회하지는 않을 텐데.

하지만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가 잘 오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에 원하는 게 있다면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여태까지의 삶을 통해 배운 것이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수진은 불현듯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수진은 곧장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을 찾아온 수진에게 서영이 한마디 툭 던졌다.

“전의 그 문제는 해결이 됐어?”

수진은 고개를 젓고 말했다.

“네가 의문점만 던져놓고 내뺐잖아.”

“난 그거면 해결된다고 봤는데.”

수진은 속으로 뜨끔했다. 혹시나 표정에 드러났을까 급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모두 알고 있는 건가?

도리어 그렇다면 나를 도와줄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 알고 있다면, 그렇기에 자신을 이해해줄 수 있을 지도.

그러나 서영의 행동은 수진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6

어젯저녁, 남자애와 서영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수진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뒤편 공터였다. 울타리와 바깥과의 고저 차이, 그리고 나무들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둘은 우연히 마주쳤다. 남자애가 모종삽으로 혼자 땅을 파고 있을 때 서영이 도착했다.

남자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시선으로 멀뚱히 서영을 바라보았다. 서영으로서도 이곳에 남자애가 있다는 것은 의외의 사실이었다. 아파트 단지 주위를 슬슬 둘러보듯 걷고 있는데 마침 딱 마주친 것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애였다.

“어쩐 일이야?”

“너랑 같은 이유가 아닐까.”

서영이 모종삽을 들어 올려보았다.

둘 다 2천 원짜리 모종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남자애도 거의 막 시작한 참이라 둘 다 한참동안 파야했다.

서영이 물었다.

“제대로 된 위치를 파고 있는 거겠지?”

“최근에 흙을 한 번 뒤집어엎은 흔적이 있어. 내가 시골에 산 적이 있어서 잘 알아. 아무래도 분리수거라던가, 이것저것 잘 안 되니까 처리하기 번거로운 것들을 자주 묻게 되거든.”

남자애는 혹시 서영이 못 알아들을 까봐 사족을 달았다.

“집에서 키우다가 죽은 개나 고양이 시체 같은 것들 말이야. 이런저런 이유로 죽지. 늙거나, 사고가 나거나.”

팔이 뻐근해서 모종삽을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다만, ‘시체를 묻는 살인자는 얼마만큼의 땅을 팔 것인가’는 모르겠다. 그런 건 본 적이 없으니까.”

퍽, 퍽, 하고 때리듯이 모종삽을 박아 넣었다. 흙이 튀었다. 좀처럼 목표로 한 것이 보이지 않고, 깊이 팔수록 더욱 파기가 힘들어졌다. 삽날이 돌멩이에 부딪힐 때는 손목이 찡 하고 울렸다. 힘들다고 쉬려고 하면 언제 끝날지 보이지 않는 작업이다. 남자애는 계속 흙을 퍼냈다. 손바닥 표면의 세포들이 터지는 느낌도 든다.

“수진이네 언니는 직장 내에서 인기가 많았대. 후배로서는 싹싹했고 선배로서는 착실한 사람이라더라. 예쁘기도 했고.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는 유형이었는데, 아무튼 남몰래 수진이네 언니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대.”

서영은 말없이 들었다.

“리더십도 있고, 실력도 확실하고 똑똑하고 자상한데다가……들은 대로 말하는 건데, 이것만 보면 그 형은 아마 수진이네 언니를 좋아했던 것 같네.”

남자애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을 이어가다보니 입안이 마르며 체력이 쭉쭉 떨어졌다.

시간도 확인하지 않고 결과가 보일 때까지 땅을 팠다. 남자애 혼자였으면 못 했을 수도 있었으나 서영이 있다 보니 끈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남자애가 여태까지 웅크리고 있었던 근육을 풀어주려 고개와 허리를 뒤로 쭉 젖혔다.

“에구구…….”

남자애가 일부러 신음소리를 냈다. 남자애가 모종삽을 내려놓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와 버렸네.”

그것은 애써 하는 태연한 척이었다. 서영은 입을 다문 채 팔짱을 꼈다. 남자애가 다시 허리를 펴며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인기척은 없었다. 해가 저물 무렵이지만 네온사인과 가정집의 불빛들 때문에 주위는 밝았다.

고개를 돌려 깊은 구덩이를 다시 내려다보자, 불빛을 본 눈이 잠시 동안 어둠을 응시하지 못했다. 잠시 후 어둠에 익숙해지며 구덩이 안에 묻혀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썩어가는 머리였다.

“운 좋게 바로 머리가 나왔네.”

남자애가 그렇게 말하곤 서영을 돌아보았다. 서영은 아까 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의 대부분이 흙에 가려져 있었다. 어째서 죽인 사람을 묻을 때조차 반듯이 눕혀놓은 것일까. 자신이라면 얼굴을 아래쪽으로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을 제대로 봤다면 토했을 지도 모르겠다. 냉정하자 생각해도 몸이 견디지 못하는 상황도 있으니까.

모종삽만 갖고 있어서 흙을 털어낼 수 없었다. 손으로 털어내자니 시체에 맨살이 닿는다는 점 때문에 꺼려졌다.

남자애가 말했다.

“용케도 이만큼 팠구나.”

팔을 넣으면 팔꿈치까지 들어갈 깊이였다.

“실종되었을 때 죽었다고 치자면……더 추울 때라 땅이 얼었을 텐데.”

서영이 고개를 끄덕이곤 시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이 시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팔을 뻗더니 삽끝을 세워 얼굴 위의 흙을 살살 긁어냈다.

남자애는 허리를 펴고 서서 시체의 모습을 관찰했다. 보다보니 크리스탈과 닮은 것 같다. 생김새도 그렇고 게다가 몹시 마른 몸이다.

남자애가 입을 열었다.

“다시 묻을까?”

남자애가 서영을 살폈다. 어차피 앞으로 어떡할지는 서로의 동의가 있어야 정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신고하기 싫다고 하더라도 서영이 신고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서영이 말했다.

“이번엔 내가 물어 볼게. 왜 여기에 온 거야?”

“수진이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 뭔가 해결해주고 싶어서일 거야.”

“나는 호기심 밖에 없어.”

이기적인 대답이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는 기색도 없었다. 그렇지만 남자애는 몰랐던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나도 호기심 때문인 것 같아. 아니, 분명 호기심 때문이야.”

심리 이기주의다. 인간의 동기란 결국 그 단어로 모두 정의되는 걸지도 모른다. 둘은 다시 시체 위에 흙을 덮었다.

모종삽을 그 자리에 놔두고 남자애가 말했다.

“그럼 나는 수진이 집에 가볼게. 이퀘이션 형한테 들은 얘기도 전해줘야 하니까.”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졌다. 남자애는 아파트로 올라가며 생각했다. 자신의 삶이 이로 인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사건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삶의 방향에 영향력을 끼칠 것인가. 시체를 처음 본 탓인지 심장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쿵쾅거렸다.

 

“도와줘.”

“이미 다 끝난 일인데, 뭘 더 도와달라는 거지?”

서영의 말에 수진이 얼굴을 찡그렸다.

“뭐가 해결됐다는 거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수진으로서는 당연한 반박이었다. 크리스탈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해결된 건 없다.

그렇지만 서영은 수진을 돌려보냈다. 이번에는 남자애가 찾아왔다.

 

7

“잠시 걸으면서 얘기할까.”

그런 얘기가 나와 남자애와 같이 복도를 돌아다니는데, 남자애가 뜬금없이 이런 얘기를 꺼내놓았다.

“수진이는 왜 언니를 죽인 걸까?”

서영은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꼭 수진이가 죽였다고 생각해?”

“이제 와서 헷갈리게 하려고? 너 솔직히 처음부터 전부 알고 있었지?”

서영은 순순히 수긍하면서 첨언했다.

“전부는 아니야.”

“처음부터는 맞나 보네.”

실제로 서영은 처음부터 수진이 그녀의 언니를 죽인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야? 혹시 이 사건에 대해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어? 아니면, 직접 연관이 있는 건가?”

사건에 대해 이래저래 알아내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모르는 점이 많았다. 그런데 서영은 처음부터 이 사건에 대해 얼마만큼은, 최소한 지금의 자신만큼은 파악하고 있었던 듯 보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찾지 못한 사건의 조각들 중 하나가 서영이라는 가능성에 닿게 되었다.

남자애는 서영을 대답을 기다리며,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일지 살폈다.

“수진이의 언니는 초등학교 때 처음 봤었어. 그때 그 누나가 6학년이었는데, 둘이 자매라고 꽤 소문이 나있었지. 수진이 언니가 6학년이니까 수진이를 괴롭히면 그 누나 친구들한테 불려간다거나 그런 얘기였어.”

서영이 꽤 평범한 학교생활에 대해 얘기하자 남자애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누나가 중학교로 올라간 후론 만난 적이 없지만, 수진이가 6학년이 되자 둘이 다섯 살 터울만 없었으면 무척 닮았을 거라는 걸 알게 됐지.”

남자애는 계속 얘기해보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누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알게 되었고……크리스탈을 보자마자 그것이 그 누나의 짓이라는 걸 알았어. 나는 딱히 영능력자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행세를 할 수 있을 만큼 그쪽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냐. 단지, 사건을 보면 이것은 그런 식으로 접근해야만 풀리는 문제인거지."

남자애는 의심쩍은 시선으로 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애는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무작정 영에 대해 부정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구차하게 해명할 게 아니라 사건의 전말에 대해 얘기하지. 그러면 내가 개입할 구석이 없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서영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크리스탈이라는 앱 자체에 대해선 네가 보여주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이런 이상한 사건은 당사자 뿐 아니라 관련되려 하는 사람들마저 위험하게 되기 마련이라……굳이 개입하진 않았지. 그야 이상하다고는 했지만 특별할 건 없는 사건이잖아? 그냥 누군가가 죽고 원혼이 저주를 한다는 그런 평범한 사건이니까.”

남자애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그러나 듣고 보니 그럴법한 이야기다.

“크리스탈을 만든 게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원혼이라는 건 알았지. 그리고 크리스탈에 의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존재가 수진이라는 걸 보면, 죽은 이유가 수진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어.”

서영이 남자애를 바라보았다. 마치 ‘여기까지는 문제없지? 계속 설명해도 될까?’라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수정의 죽음에 대해 알았다면, 복수가 목적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그런데 왜 깊게 관여하게 된 거야?”

“남의 부탁은 거절하지 않는 편이거든.”

“왜?”

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애는 평생 그 말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지만, 그런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서영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수진은 어디서 언니를 죽였을까? 가까운 곳부터 둘러보자고 생각했어. 수진이네 언니의 마지막 목격정보가 2월 25일 19시경 집근처 편의점에 찍힌 카메라였거든. 그쯤에는 보충수업주(週)고, 수진이라면 하교를 해서 진즉에 집에 있을 시간대지.”

남자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실종일지도 모르는’ 정도의 사건이다. 그야 다섯 살 많다면 성인이니까. 그리고 동네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의 정보들 쯤은 2020년에 들어서면서 지역 경찰서 홈페이지이나 지역신문 쪽을 살펴보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되어있다.

“일부러 멀리 나가지는 않을 테니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봤어. 그래서 찾아보기 시작했지. 그리고 그러다 알게 된 사실이 있어. 아파트에 지진설비가 잘 안 되어 있다는 점이지.”

지진설비? 남자애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실은 남자애도 알게 모르게 아는 것이었다. 아파트에 거주자가 많이 없었던 걸로 봐서 건물에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왜 지금 그 얘기가 나오는 걸까.

서영의 설명이 이어졌다.

“수진이가 사는 아파트의 5,6,7층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살지 않는 층이야. 인기가 없는 층이었던 거지……6층을 둘러보면 603호의 현관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걸 볼 수 있을 거야.”

남자애로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이었다.

들은 내용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하며 남자애는 서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벽에 금이 가있는 자국을 메운 흔적이 보였어. 예전에 일어났었던 몇 번의 지진들 중 하나 때문에 현관문 자체가 우그러진 거겠지. 덕분에 잠금장치가 박살났을 거고, 그걸 임시로 땜빵한 게 그 자물쇠였으리라고 봐. 못 들어가게 하려는 셈이었겠지만……자물쇠를 여는 법 정도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지.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거고, 머리핀 정도야 여자애라면 한두 개쯤 갖고 있잖아.”

남자애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서영의 말 속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너도 열어봤구나? 머리핀이건 뭐건 구해서. 자물쇠는 열기 쉬우니까.”

따라 하기가 쉬운 지 어떤지는 직접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잠시 내려가서 클립을 사서 다시 올라갔어. 문을 열고 들어갔지. 안에는 몇몇 가구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빈집이니까. 이상한 점은 바닥에 뭔가 크고 무거운 걸 끌어온 듯한 자국이 있다는 거였지. 먼지를 밟고 들어서며, 과연 내가 수진이라면 이 집의 어디에서 사람을 죽였을지 생각해봤지. 그래서 가장 안쪽 방으로 들어갔어.”

가장 안쪽 방. 남자애는 뭔가가 번뜩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을 크게 뜨며 작게 소리쳤다.

“수진이 방도 가장 안쪽 방이었어!”

“그건 공교로운 일이네.”

서영은 무대에 오른 사람이 반응 좋은 관객에게 그러듯 빙긋 웃었다.

“우연이지 싶은데…….”

논리적인 설명이 쭉 이어졌다.

“내 생각에는 가장 들키지 않을 만한 곳이 그 방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거든. 어쨌든 그 방에 가보니 침대가 있었어. 침대를 받치는 네 기둥 중에서 오른쪽 위에 있는 기둥에 엄청나게 흠집이 많더라. 그걸 보고 예전에 세웠던 가설이 떠올랐지. 어쩌면 그 누나는 이곳에서 살해당하기 전에 일정기간 이곳에 감금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이를테면 끈으로 손을 묶은 후, 그 끈을 침대 기둥에 묶어두면 움직일 때마다 기둥에 조금씩 흠집이 생기지.”

남자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가둬둔 걸까? 어차피 죽일 거였으면 가둬둘 필요는 없었을 텐데.”

“글쎄. 확답은 못하겠지만, 사람을 죽이는 게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쉽지만은 않았던 거겠지.”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남자애는 자기가 치기어린 말을 했다고 자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남자애였다.

“어쨌건 결국에는 살해하고, 시체를 끌어다가 뒤편에 묻었다는 거네.”

“그렇지. 그리고 그 방은 크리스탈 앱에 나오는 방과 면적이 똑같았어. 가구가 없었을 뿐이지. 다만 한 가지 명확히 다른 점이, 창문이 없었다는 거야. 그게 힌트가 되어 뒤편 화단으로 갔다가 너와 마주쳤어.”

긴 말을 끝낸 후 서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명이 끝났다.

이래저래 맞아 들어가는 설명이었지만, 한 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 점이 있었다.

“잠깐.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 방에서 수진이네 언니가 죽었다는 걸 알 수 있었던 거야?”

그것은 포괄적인 의문을 내포하는 질문이었다. 어느 정도 추측을 할 만한 증거야 있었겠지만, 혹여나 수진의 언니가 그 방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이에 대해 서영은 수수께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답을 들려주었다.

“크리스탈 앱을 켜놓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쭉 올라가봐. 그럼 알 수 있어”

남자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서영은 더 설명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수진은 학교를 마친 후 집으로 향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도 그런 생각만을 반복했다.

‘서영이가 언니에 대해 아는 걸까? 어째서 그럴 수가 있지…….’

창문이 있던 자리로 내려다보면 아파트 단지 뒤쪽에 있는 화단. 이제는 아무도 가꾸지 않는다. 그곳에다가 묻었다. 묻고 난 이후로 한 번도 찾아갔었는데, 멀찍이서 보고는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그 이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앱에서처럼 정말로 방에 창문이 있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천천히 올라가다가, 6층에 도달할 즈음에 수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6층에는 아무도 살지 않으니 엘리베이터가 멈출 리는 없을 것이다.

예상한 대로 무난히 6층이 지나갔다.

수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하고는 반사적으로 크리스탈 앱을 띄웠다.

한편 남자애는 서영을 말대로 방과 후 수진의 집으로 향했다. 수진과 마주치지 않도록 학교 근처에서 시간을 죽이다가 출발했다.

미리 크리스탈을 켜놓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2층.

크리스탈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그냥 크리스탈이 있을 뿐이다.

혹시 자신이 못 본 곳에서 뭔가 일어나나 싶어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크리스탈의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없는 시간대이기 때문인지 엘리베이터를 중간에 멈춰 세우는 사람은 없었다.

3층.

쭉 올라가보라고 해서 마지막 층을 눌러놓기는 했는데, 일단 6층까지는 금방이었다.

4층.

5층.

마침내 6층.

치직!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화면에 노이즈가 팍 생겼다. 너무 놀라서 순간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7층.

화면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순간 일어난 기기문제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스스로 부정했다. 이게 서영이 말했던 크리스탈을 켜고 올라가보라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

더 생각할 것 없이 8층에서 내렸다. 새로운 뭔가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고양되었다. 비상계단을 통해 6층까지 뛰어 내려가자 다시 크리스탈에 노이즈가 생기기 시작했다.

6층 통로를 따라 걸어가자 이윽고 노이즈가 서서히 선명해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떤 영상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애는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 근처에서 크리스탈 앱을 켜면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한다. 엘리베이터에 탄 채 올라가다보면 그 층을 지날 때 이벤트 알람으로 크리스탈 앱에 노이즈가 발생한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속으로 되짚어 보니 목적지는 명백했다. 둘러보니 6층에서 현관문에 자물쇠를 달아놓은 방은 한 곳 밖에 없었다.

남자애는 자물쇠를 여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못 열건 없어보였다. 살펴보니 잠겨 들어가는 부분인 쇠막대에 세 개의 톱니가 있었는데, 아마 이걸 자물쇠 안에 끝까지 밀어 넣은 게 아니라 마지막 톱니만 살짝 걸쳐놓은 것 같았다.

자물쇠를 잡고 약간 힘을 줘서 확 당기니 자물쇠가 풀렸다. 남자애가 유독 힘이 세거나 한 게 아니라 애초부터 적당히 모양새만 그럴듯하게 자물쇠를 걸어놓았던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하면서도 낯선 집이 나왔다. 익숙한 것은 구조였고, 낯선 것은 분위기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서영이 말했던 ‘무언가가 끌린 자국’이 보였다. 그곳에는 주변에 비해 먼지가 얇게 쌓여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자 발자국이 보였다.

서영이 왔다간 자국으로 보였다. 서영이 마냥 안락의자형 탐정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약간 안도하게 되는 기분도 느껴졌다.

수진의 방 쪽으로 가야겠다. 남자애는 곧장 가장 안쪽 방으로 향했다. 방 구조가 똑같다. 침대만 달랑 하나 있는 허한 방이라 몹시 넓어보였지만 방의 크기는 크리스탈의 방과 같았다.

스마트폰을 들었다. 카메라로 침대 쪽을 비추자 화면에는 다른 영상이 잡혔다.

크리스탈 앱이 VR에서 AR로 바뀐 모양이다.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두 사람이 영상 속에 나타났다. 영상이 잡히는 것과 함께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진과 수정이었다.

“왜 이런 데로 데려온 거야?”

“으응. 그야 언니랑 조용히 얘기하고 싶어서…….”

수진은 등 뒤로 장도리를 들고 있었다. 장도리가 이 방안에 처음부터 있었을 리는 없다. 미리 계획된 범죄다.

수정이 등을 보인 순간 수진이 장도리로 수정의 머리를 내리쳤다.

화면이 전환된다.

“왜,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응……살려둘 생각은 아니었는데, 하지만 오히려 잘 됐네. 언니는 더 고통받아야해.”

수정은 손발이 묶인 채 침대 모서리에 고정되어 있다. 우스꽝스럽게도 마우스 선으로 묶어 놨다.

“자, 목마르지? 금방 죽으면 안 되니까 마셔.”

수진이 물이 담긴 페트병 입구를 수정의 입에다가 갖다 대었다. 수정은 고개를 돌렸다. 물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수진의 의도대로 행동하기 싫었던 것이다. 그걸 본 수진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페트병 입구를 다시 갖다 대었다. 수정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주었다. 수진의 얼굴이 더 험해졌다. 나중에는 페트병 입구를 무작정 들이밀었다. 이미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안중에 없었다. 수정의 머리채를 붙잡고 억지로 입에다가 밀어 넣었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수정이 이를 악물며 끝내 입을 다물고 있자 수진은 발작적으로 페트병으로 수정의 관자놀이를 후려치고는 페트병을 집어던졌다. 이미 물이 다 흘러내린 상태라 빈 통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물은 수정의 앞섬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수진이 분이 나는 듯 소리를 질렀다.

“아악! 그래, 마음대로 해봐! 언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차피 언니 구해줄 사람 없어. 아무리 지랄발광해도 위아래 층에 아무도 없어서 아무도 못 들어!”

수진은 그렇게 말하더니 방을 나갔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듯 화면이 전환되었다. 수정은 야위어 있었다. 처음 보았던 건강하고 긴장감 어린 신체는 온데간데없이 비쩍 말랐다. 그 모습이 어쩐지 크리스탈과 닮아있다고 남자애는 생각했다. 수정은 참을 수 없는 갈증 때문인 듯 군말 없이 물도 받아 마신다.

수정이 페트병을 다 비우자 수진은 품에 숨겨두고 왔을 장도리를 꺼내들었다. 남자애는 수진의 표정을 보기 위해 침대 건너편으로 빙 둘러 이동했다. 이제 수진이 정면으로 보이고 수정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수진은 입을 꾹 다물고 결의를 한 듯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장도리로 수정의 발가락을 내려찍었다.

“아아악!”

수정이 비명을 내질렀다. 수진은 입을 꾹 다물고 계속 내려쳤다. 핏물이 튄다. 발톱이 부서져 떨어져나간다. 수정이 한껏 무릎을 끌어당기며 발가락을 오므리지만 수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계속 내려쳤다. 수정이 비명을 높였고 수진은 가해자면서도 울면서 때렸다. 남자애는 여태껏 슬픈 가해자라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수진은 수정 앞에 서있었다. 몸을 숙이고는 수정을 살폈다.

이윽고 몸을 일으키고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

기다렸지만 말이 이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 음절 뱉은 것도 의미 없이 낸 목소리였을 것이다.

수진이 선을 풀었다.

화면이 전환되었다.

수진은 어디서 구해온 것인지 커다란 박스를 들고 와서는 수정의 몸을 이리저리 접어 상자 안에 넣었다. 그리고 금방 사온건지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밧줄을 풀어 상자를 십자 모양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 후 한 줄로 길게 뺀 남은 부분을 잡고 상자를 끌어당겼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수진은 힘겹게 방을 나갔다.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걸 보고 있자니 현관문을 연 후 끙끙 거리며 문턱을 넘어 상자를 밖으로 끌어당겼다.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남자애는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섰다. 수진은 자물쇠를 잠그고 있었다. 쇠막대를 자물통 안에 끝까지 밀어 넣는다. 톱니가 모두 맞물려 잠겨 들어갔다.

수진은 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해본 후 또 끙끙거리며 상자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방금 전 거실에서 눈치 챈 사실이지만, 밖은 한밤중인 듯 어두웠다. 밤거리의 불빛들만이 창을 넘어 희미하게 주위를 비쳐주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없는 시간대를 노린 듯 했다.

화면 속 엘리베이터는 6층에서 멈춰있었다. 수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버렸다. 현실에서의 엘리베이터는 다른 층에 머무르고 있어서 남자애는 따라갈 수 없었다.

남자애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껐다.

팔을 쭉 내리고 멍하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잠시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뭉쳐있던 긴장감이 얼마간 해소되는 듯 했다.

크리스탈 앱을 켜놓은 그 순간부터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아파트를 나올 즈음에는 여독이 풀리듯 어깨가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그래서 남자애는 좀 더 냉정하게 이 사태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남자애는 이 잔악무도한 범죄 앞에서 고민했다. 지금 본 게 전부 사실이라면 자신은 수진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네가 저지른 범죄의 진상을 알아냈다며 룰루랄라 뛰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한참 고민하며 남자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는 녹화한 동영상을 확인했다.

수진이 수정을 감금하고, 죽게 내버려두고, 시체를 유기하려고까지 하는 영상. 방금 전 자신이 본 영상이 제대로 찍혀 있었다. 사건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이다 보니 영상이 안 찍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일단 이걸로 말을 걸어보자’

가슴 한 편에 망설임이 존재하고 있었다. 친구라도 범죄를 저지르면 신고해야 한다. 징역을 살건 인생이 파탄나건 신고할 것이다……역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자애는 수진에게 보여줄 게 있다고 한 후, 바로 자신이 녹화한 영상을 보여주었다. 수진이 순순히 자신의 죄를 자백해주길 바라고 한 행동이었다. 수진은 영상을 확인한 후에도 한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대체, 이건…….”

“서영이가 알려줬어. 크리스탈앱을 켜놓고 네 아파트 6층에 가면 실행되는 거야.”

수진은 눈을 크게 떴다. 많이 놀란 듯 안색이 창백했다.

수진은 그 후 한동안 핏기가 없는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손도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식은땀이 나는지 연신 치마에 양손을 문질렀다.

그러던 중 수진이 문득 표정을 굳히더니 남자애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야,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뭐?”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악의적이야. 언니가 실종된 건 맞지만 아직 죽었는지 어떤지 알 수 없는데!”

수진은 답답하다는 듯 남자애에게 바싹 접근하더니 다그치듯 말을 쏟아냈다.

“뭔가 조작을 한 거야. 요즘은 기술이 뛰어나잖아. 누군가가 눈으론 구별이 안 가는 가짜 영상을 만든 거야. 작은 화면이니까 더 구별이 안 되는 거야.”

수진은 떨리는 눈으로 남자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런 건 경찰에 가서 말하지 그래?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판독을 맡기면 되겠지.”

수진이 뒤돌아보았다. 서영이 있었다.

수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앞뒤를 포위하고 있는 남자애와 서영을 번갈아 보다 돌연 고개를 푹 숙였다.

뭘 하나 싶어서 남자애가 떨어져서 보고 있자니, 수진으로부터 희미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소리가 시린 공기를 넘어 전해지기 시작했다.

울음소리였다.

우는 거야? 남자애는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라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진은 계속 울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흐느낌이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우윽……흐으윽…….”

뚝, 뚝, 하고 물방울이 푹 숙인 고개 안쪽에서 새어나와 수진의 발치에 떨어지고 어깨가 들썩였다. 이제 와서 위로해줄 수도 없는 일이라 남자애는 앞으로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옳은 선택이었는지 수진은 이내 혼자 감정을 추스르고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몹시 차분한 어조였다.

"다들 그래. 누가 죽으면 생전에 대단히 착한 사람이었다고 포장하지. 언니는 쓰레기였어. 겉으로는 착한 척, 뒤에서는 나를 장난감처럼 취급했어. 괴롭힘 당하면서 내가 점점 더 소극적이고 사회부적응자로 커 가는데, 그에 반해 언니는 훨씬 더 사교적이고 유능한 사람으로 자란거야. 계속 있다간 언니가 날 죽일지도 모를 일이었어. 심지어 언니는 죽어서까지 나를 괴롭히잖아.”

남자애는 수진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무게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수진은 울어서 부은 눈으로 남자애와 서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 친구지? 제발 눈 감아줘. 언니를 죽이긴 했지만, 딱 한 번뿐이야. 앞으로 누굴 더 죽일 일도 없어. 살인자들을 교도소에 보내는 건 교화하려는 의도지? 나 괜찮아. 다른 사람을 죽일 일이 없어. 세상에 도움이 되게 착하게 살려고 노력할게. 응? 게다가 언니가 죽었는데 나까지 살인자 취급을 받을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해서 누가 좋아지는데? 아무도 좋아지는 사람 없어. 그냥 나만 불행해지는 거야. 학교에도 괜히 소란을 일으키는 거고, 부모님도 슬퍼하실 거고. 그런데도 이 일을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야. 그치? 그렇잖아?”

수진은 오들오들 떨며 필사적으로 둘에게 매달렸다. 수진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람이 둘이었기 때문이다. 남자애는 그런 수진을 사이에 두고 서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서로에게 간섭을 하지 않기로 둘 사이에 대화가 오고갔었다. 결정은 수진이가 하는 말을 듣고 나서 알아서 판단하자고. 자신에게 의지하려는 남자애에게 서영은 그것을 일깨워준 것이다.

남자애는 생각했다. 결국 수진의 죄를 밝히느냐 묻어두느냐다. 선택을 미뤄둔다는 것은 ‘묻어둔다’를 선택한 것이다. 못 본 척 넘길 수가 없는 선택지였다.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은 이런 걸 원했던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떤 상황을 원했던 걸까. 그 생각을 하니 스스로 안일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을 보여주면 수진이 담담히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고 자수할 거라 생각했다. 그 외의 상황이 된다면 어떡할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이 옳은 일일까? 확실히 수진이가 앞으로 다른 사람을 또 죽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 것이라는 것만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사실을 묻어둬도 될까? 그러나 용서해줄 사람이 이미 없는 상황이라면 처벌이라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니, 악의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나서 다시는 남을 해치지 않겠다고 회개해버리는 행동을 긍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네가 정말 착하게 살려고 한다면 그건 죗값을 받고 나서도…….”

“제바아아알!”

수진이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매달렸다.

남자애는 주춤했다. 도움을 구하는 눈길로 서영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서영이 대답했다.

“나는 알리지 않을 거야. 그래도 수진이랑은 나름 친한 사이인데, 전혀 모르는 사람을 죽였다고 그것 때문에 친구를 신고할 수는 없어.”

남자애는 순간 번개를 맞은 듯 몸이 굳었다. 서영이 한 말은 자신이 가졌던 막연한 생각을 단번에 정리했다. 살인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확한 이유의 맞은편에 바로 이런 망설임이 있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자신은 수진과 친해지고 싶다. 수진이 수정을 잔혹하게 죽이는 모습을 봤다고 해도, 진실인지 거짓인지와 상관없이 결국 화면안의 일이었다. 결국 아무리 수진이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를 떠올려도 자신의 감정은 속일 수 없었다. 수정이 죽었다는 사실 따위, 결국 남의 일인 것이다.

남자애는 결론을 내리고 수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수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남자애는 헛기침을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네 얘기를 듣고 생각해봤는데, 네 언니가 너한테 너무 심했던 것 같아.”

수진은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표정에 완연했다. 그런 수진에게 남자애는 자신의 생각을 더 들려주었다.

“네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미안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너한테는 죽는 것보다 더 괴로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수진이 반색하며 밝아진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언니 때문에 내 인생이 꼬였었어. 사실 앱에서 나오는 건 내 중학교 때 모습이랑 비슷한데, 그것만 봐도 알겠지만 언니가 악의적으로 날 조롱하려고 그러는 거야. 정작 내가 그렇게 자란 건 언니 때문인데…….”

“응, 알아. 넌 잘못 없어.”

남자애는 한동안 수진을 달래주었다. 수진은 품안에서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자신을 보듬어주고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사람을 항상 바라고 있었다.

수진은 남자애와 같이 교실 쪽으로 돌아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잠시 비틀거리기도 했으나 얼굴에 홍조를 띄울 정도로 즐거운 기색이었다.

 

남자애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경찰서에 녹화한 영상과 자신이 파낸 수정의 시체를 찍은 사진을 문자로 전송했다. 수진에게 한 말은 거짓말이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범죄를 도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신고하기로 했다고 해서 수진의 눈앞에서 바로 전화를 걸 수는 없는 일이다.

전송이 완료된 걸 보고 남자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감당하지도 못할 사건을 겪은 것 같아.”

“깊이 고민할 거 없어. 눈을 뜨면 각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을 테니까.”

옳은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남자애는 크리스탈앱을 켜보았다.

그러자 잠시 검은 화면이 나오더니, 실행이 되지 않고 꺼졌다. 마치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알려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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