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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짜다.





*본편 이후*

이승에서의 날들에 난 야만국가의 사또와 그의 사주를 받은 아전 모리배들에게 윤간당한 뒤 살해되었다. 그들은 내가 마을에서 곱다고 놀림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날 끌고 다니다가 그렇게 만들었다. 난 10대 중반 남자였다.

명부의 염라대왕들과 판관들이 내 호소를 들었다. 난 사또와 일당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 했다. 그러자 날 맡은 염라대왕이 준엄하게 말했다.

“좋다. 네가 원한을 풀 수 있도록 해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네가 원한을 풀어 그들을 죽이는 순간 넌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소멸되어 사라진다. 결코 무를 수 없는 이 계약을 받아들이겠느냐?”

“하겠습니다, 나리!”

난 이승으로 돌아가 헤매었다. 넋의 힘이 약한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기도 했고 가위를 눌러보기도 했고, 정신병에 걸린 환자들에겐 환각으로서 드러나 보기도 했다. 그렇게 수소문해 결국 사또 근처를 맴돌았다. 사또의 수호 귀신은 강인해 보여서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난 모든 것이 흩어지고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저승에 온 것인지 난 알 수 없었다.

난 흐린 안개 속 빛살에서 요동치는 수많은 그림자들을 보았다. 그림자들은 온갖 사물들의 모양새였고 서로가 서로를 통과해 다녔다. 난 사람의 형상을 한 그림자들 사이에 섞여 들었고 갈라진 조각들이 온 방위를 점한 기괴한 공간 속을 떠다녔다.

난 나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고 쏟아지는 말들을 들었다. 말들은 내 눈앞에 글자의 형상으로 요동쳤다. 그 말들은 내가 뒤엉킨 기억들의 잔영에 불과하고, 한때 있을 수 있었던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하고 있었다.

난 창조왕 아자토스가 괴우주에 쏟아낸 영혼들의 뒤엉킨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는 복수에 성공하고 소멸되어 이승도 저승도 아닌 이곳 멸혼계에 떨어졌는데 그 정보가 이곳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지러지면서 그 부산물로 난 존재하게 되었다 했다.

난 가짜인 거였다. 이곳 멸혼계는 우주적 정보가 변질되어 사라져 무로 돌아갔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온갖 가능성들이 뒤엉켜 있는 혼돈의 영역이기도 하다 했다. 무는 가능성조차 없는 것을 뜻하기에 그렇다고 했다.

“난 억울해! 난 슬프고 아픈데 내가 가짜라는 이유로 이곳에 박혀 있어야 한다니! 나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때 찬란한 빛이 비추면서 젊고 아름다운 한 여인이 곱게 차려 입고 나타났다. 그녀가 누구인지에 관한 정보가 내 마음 속으로 폭격되었다.

그녀는 최고위 신선 중 하나인 무녀왕 바리데기였다. 바리데기는 멸혼계를 발견하고 질서를 부여한 존재이자 저승의 유력한 통치자들의 일원이었다. 바리데기는 강력한 신선인 무장승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들을 낳았고 이들은 모두 염라대왕들에 속해 있었다.

바리데기를 만나자 이전에 없었던 행복한 느낌이 치밀어 올랐다. 난 바리데기에 의해 보정되어 진짜에 가까워졌다.

지금 난 바리데기의 인도로 황천에서 복락을 누리면서 살면서 환생을 기다리고 있다. 괴우주의 황천과 천당에서의 삶은 같지만, 다른 점은 황천은 반드시 언젠가는 환생해야 하는 넋들이 머무는 곳이고, 천당은 환생이 의무가 아니라는 점이다. 천당이나 황천에서 태어났다면 그냥 천인 계통으로 그곳에서 살면 되지만 말이다. 이왕 환생하려면 적어도 천인이어야 좋겠지만 내 환생은 내가 가짜였기에 별 속에서 맴도는 불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가짜 티를 벗게 된다면 감지덕지할 일이다.


[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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