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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대 코끼리왕




*본편 이전*

사루는 인간 사내였다.

육중하고 두툼한 몸집을 가진 사루는 자신의 한계를 냉철하게 자각할 줄 알았다. 근육질 거구인 사루는 위압감을 주는 몸에 문신까지 새겨놓았다. 사루는 조각하는데 쓰이는 도구들을 도끼와 함께 챙겼다.

“잘 다녀오세요, 여보.”

도열하고 있는 사루의 처첩들이 사루에게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배웅했다. 사루는 촌장으로 있는 자신의 권력이 오직 억센 무공에서 나온다는 걸 잘 알았다. 사루가 방심하거나 무공을 잃는다면, 마을의 다른 남자들이 사루의 여자들을 강간하고 자녀들을 살육할 터였다. 사루 자신 몇몇 사람들을 죽여 없앴다

사루는 부하들을 위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루가 기한 내에 소득을 내고 돌아온다면 부하들이 자리를 굳건히 할 거라 사루는 믿고자 했다. 사루는 부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했는데, 사실 부하들 가운데서 사루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실세였다. 이들은 사루와 한 배를 탄 동지라고 일단 사루는 생각해두기로 했다. 근처에 마을들이 있었고, 산 몇 개를 넘으면 종주국인 도시국가도 있었다. 그들이 언제든 적으로 돌변해 사루의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고 윤간하며 약탈과 방화를 자행할 수 있었다. 사루는 자신도 그런 욕망에 몸을 얼마든지 맡길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촌장인 사루가 홀로 가는 곳은 늪지로 통하는 길이었다.

사루의 눈에 몇몇 몬스터들이 보였지만, 사루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루를 바라보다가 돌아선 몬스터들은 다행히 그리 강한 부류들은 아니었고 이들은 사루의 전투력을 이전에 알았던 이들이기에 덤비지 않았다.

사루는 거대한 숲에 이르렀다. 사루가 조상 대대로 전해져오는 뿔피리를 불었다. 아름답고 귀가 뾰족한 엘프들이 나무들과 그림자들을 통과하고 투과해 걸어 나왔다. 반정령 반인간이기에 엘프들은 자연 속에 스며들 수 있었다. 활로 무장한 엘프들이 사루에게 다가왔다. 사루는 엘프들이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오래 전에 사루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 때문에 그날 이후로 이 일을 아무 대가 없이 수행해주고 있었다. 하기야 엘프들은 살해되지 않는 한 불로불사인데다 죽더라도 태어난 땅의 나무 아래 흙에서 부활한다 하니, 젊어 보이는 저들 중 상당수가 그 언약을 맺었던 이들일 수 있었다. 사루는 겁도 났지만 그렇지 않아도 넓은 가슴을 더욱 크게 보이도록 내밀었다. 사루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온대 초원 너머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사루가 말했다.

“내가 상아와 독을 얻을 수 있게 해주시요.”

“약속이니 그렇게 하리다.”

한 마법궁수 엘프가 스텝을 밟고 수인을 맺으면서 입술을 달삭거렸다. 엘프의 존재에 공명하여 나비만한 여자의 등에 나비 날개가 돋친 모습인 페어리가 빛 알갱이를 뿌리면서 엘프 둘레를 날아돌았다. 엘프와 페어리를 볼 때마다 사루는 저들을 노예 시장에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엘프는 적으로 삼기엔 위험했고, 페어리는 순간 이동을 했다.

인간의 상체에 말의 하체를 가진 켄타우로이들이 나타났다. 켄타우로이는 엘프만큼은 아니지만 인간만큼의 지능은 충분히 있었고 말 보다 힘세고 빨랐다. 한 켄타우로이가 나서더니 사루를 들어 등에 태웠다. 한 엘프가 사루의 눈에 안대를 씌웠다.

엘프 일행이 숲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정도 달리자 안대가 풀렸다. 사루는 온대 밀림 한가운데 너른 공터에 있는 마법진 한복판에 놓였다. 마법궁수 엘프와 페어리가 사루를 마법진 중앙에 두고 주문을 영창했다. 마법진이 번뜩이더니 풍경이 바뀌었다. 거대한 늪지대였고 마법진은 바위 위에 그려져 있었다.

사루는 곧추 일어섰다.

직립한 도마뱀처럼 생긴 3미터 넘는 키의 리저드맨들이 마법진을 중앙으로 두고 듬성듬성 서있었다. 리저드맨들 사이로 코끼리들이 보였다. 그들은 말하는 코끼리로서 코끼리가 직립한 것 같은 모양새였는데 손은 사람 같았고 발은 코끼리 같았으며 어떤 마법을 부리는지 늪 위를 단단한 땅처럼 걸어 다녔고 발에는 진흙이 묻지 않았다.

말하는 코끼리들이 외쳤다.

“맹약을 맺은 인간 대표가 왔다. 코끼리왕 운크뷰를 영접한다!”

왕관을 쓴 근육질 말하는 코끼리가 사루에게 다가왔다. 다른 말하는 코끼리들보다도 훨씬 큰 소름끼치는 거구여서 이미 몇 차례 만나 봤지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실 운크뷰는 지금의 몸도 본체 보다는 훨씬 작았다.

운크뷰가 말했다.

“가져가라.”

사루가 운크뷰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앞을 보자 상아 2개와 항아리 1개가 놓여 있었다. 사루는 운크뷰에게 절을 한 뒤 상아와 항아리를 등에 맸다. 어떤 언약이었는지는 몰라도 조상이 엄청난 먹거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사루는 마음속으로 감사했다. 사루가 상아를 조각할 수 있는 도구들을 몽땅 가지고 온 것은 그래야만 마을 유일의 상아 조각가라는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항아리에 담긴 독을 화살에 바르는 일은 위험하니까 말단 부하들에게 시킬 작정이었다. 상아는 깎아서 온갖 애장품들을 만들어 도시국가의 호사가들에게 비싸게 팔았고, 독은 적들과 싸울 때 썼다.

사루가 돌아갔다.

말하는 코끼리들은 파라탐 초존재인 모신족의 일부였다. 운크뷰는 모신제국의 장군들 중 하나였다. 운크뷰는 사루의 권속들에게 베푸는 이 연극을 계속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사루야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상아를 조각하고, 맹독을 무기에 묻혀 이익을 보겠지만 운크뷰가 얻는 수익이라곤 상징적인 것이었다.

모신제국의 영역인 이곳에서 인간들의 일부는 사루와 같은 삶의 태도를 유지했다. 그것은 신선계가 제공해주는 영원한 환생 시스템에 안주해 삶을 그냥 흘려보내는 길이었다. 환생에 그저 일생을 맡기고 그대로 원시적으로 본능대로 살다가 가는 삶이었다. 처음엔 그들은 태고의 혼돈을 사랑할 뿐이었지만 지금은 세대 간 지식 전승조차 희미해져 갔다. 운크뷰는 사루의 일족에게 지혜를 주기 위해 이 약속을 일방적으로 정해 베풀었다.

운크뷰는 모신제국에서 옥황상제 산야강 보다 전투력이 강하지만 정치력과 덕성과 이미지 도법은 뒤쳐지는 다섯 명의 모신족 장군 중 하나였다. 그들은 노일, 리기트, 유긴수스, 운크뷰, 꼬리길이였다. 운크뷰는 이곳까지 온 페어리, 페어리 퀸을 바라보았다. 페어리 퀸은 모든 페어리들을 통솔했고 모신제국의 핵심 중 일부였다. 페어리들은 괴우주의 모든 곳을 다닐 수 있었고 그렇게 얻은 정보를 모신제국의 참모총장인 청천제 포증에게 바쳤다. 운크뷰가 페어리 퀸에게 말했다.

“사루를 이곳까지 데려오는 수고를 한 점에 감사합니다, 페어리들의 여왕이여.”

“이 모든 연극을 행하는 모신제국의 조야엔 언제나 존경을 표합니다. 애정과 의무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겠지요. 만약 이 대우주가 궁극적으로 기계가 아니라 신의 피조물인 거라면, 사랑이 없다면 신은 자살하고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되겠지요. 그렇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금언이 있는 거겠지요.”

“하하. 최소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와 같이 인간성을 가진 이들은 결국 스스로를 포기하게 되겠지요. 우리는 서로를 증명하니 다만 서로를 감사해야 할 일만 남은 것입니다.”


[20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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