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객잔에 사람이 좀 많다. 나는 점소이 꼬마를 잡았다.
  
"여봐. 지금 여기 식사할 자리가 있나?"
  
 꼬마는 내 얼굴을, 내 모양를 빤히 본다. 손에 쥔 내 쇠스랑 까지도. 새삼 샅샅히 훑는다.
  
"자리야 만들면 있겠죠. 그런데요 손님."
  
 얕보는 눈빛이다.
 
"돈이 있으신지?"
  
 쥐새끼 같은 놈. 괘씸한 놈이다. 당장이라도 이 놈의 머리통을 쥐어박아줄까 싶다.
 쥐어박는 대신 나는 전낭을 뒤적거렸다. 급한 대로 동전 몇 문이 잡힌다.

"이거면 되는대로 되지 않겠냐?"

 꼬맹이 놈은 심드렁히 끄덕인다. 

"그거면 되는대로는 되겠지요, 하지만 손님이 많아서 자리가 없어요. 합석을 해야 할거에요."
"합석이야 나는 괜찮다만..."

 꼬맹이는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요 맹랑한 점소이의 뒤를 따라갔다. 
 안내 받은 탁자는, 겨우 두사람이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좁은 탁자다. 거기에 웬 마흔 살쯤 먹은 중놈 하나가 앉아있다. 
 꼬맹이 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스님, 여기 이 사람과 합석 해야겠는데요."

 봐라. 얼마나 건방진가? 이 분이나 이 어르신이라는 말도 있을텐데 이 사람이 뭔가.
 어쨌든 빡빡 깎인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놈이 중얼거린다.

"합석이라... 좋은 일이요. 암 좋은 일이지."
  
 게다가 이 중놈. 언뜻보니 형편없는 땡추같다. 거지도 입지 않을 찢어져 기운 가삼에는 땟 국물이 번들거리는데, 땅딸막한 몸뚱에는 피둥피둥 살이 올랐다.
 앉으며 내가 말한다.

"국수 두그릇. 그리고 만두. 만두에는 마늘을 많이 넣어라."
"차도 가져 오너라. 사람이 많다지만 너무 오래 기다렸다."

 중놈도 말한다. 차라. 꼬라지는 우스워도 근본이 중이긴 한가 보다. 팔자 좋게 찻물을 들이킨다는 것을 보면.
 꼬마는 대답도 않았다. 고개만 까닥거리고 사라졌다.
 어색한 침묵. 입이 근질거린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중놈에게 묻는다.

"저어... 스님... 여기 이 사람들이 모두 내일..."
  
 중놈이 빤히 나를 본다. 나는 더듬더듬 말한다.

"그... 천하오절을 뽑는다는, 화산영웅연에...참가하는 협객들입니까?"
"뭐, 다는 아닐거고, 참가하는 사람이야 몇 명 있겠지. 대부분은 구경꾼들일 겁니다. 협객은 아무도 없을 거고."

 그럼 다행이다만...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이곳이 비록 작은 객잔이긴 하지만 이렇게나 발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가득한데.

"그래도 여기는 사람이 많군요."
"많기는? 오히려 적은 편이지. 이 근방엔 달리 객잔도 없는걸. 여기 있는 사람이 사실상 전부라고 봐도 되요. 화상영웅연이니, 다 개가 씹질하는 소리지. 막상 가보면 참가하는 사람은 열 서넛 안 돼."

 이상하다. 땡추놈이 욕을 해서 이상하다는건 아니다. 

"아니, 그럴 수 도 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열 서넛이요?"
"그럼 이 촌구석 마을잔치에 달리 뭘 기대했나? 보아하니 시주도 참으로 어리숙하시군 그래. 나이도 젊은 양반이 어찌 이리 세상 물정에 어둡소? 어디 산골에서 농사만 짓다 오신 거요?"

 제기랄. 기분이 상한다. 그까짓 게 모른다고 세상 돌아가는 일이 어떻다 말할꺼린가. 
 게다가 난 '생긴게 어리숙하다.' 거나 '물정 모르게 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 산골에서 농사만 지었냐는 말은 오늘 처음 듣지만 듣고 보니 좋지는 않은 말 같다.
 억지로 표정을 관리한다. 그랬거나 말거나 돌중 놈은 계속 말했다.

"화산영웅연이니 천하오절을 뽑니, 이름은 거창하지만 천하오절들이 모이던 진짜 영웅대회는 수백년 전에 끝난 일야. 내일 하는 영웅연이니 뭐니 하는 것은 여기의 현장이 제 여흥으로 벌이는 일이지. 겨우 상품으로 소 한 마리를 걸고 벌이는 놀이판인데. 천하영웅들이 무어가 한가하여 마을 사람들이나 구경 오는 잔치에 참가하겠소?"

 동네 놀이판이라. 그렇다면야 안심이다. 나는 자꾸 입속에서 맴돌던 말을, 처음부터 묻고 싶던 말을 묻기로 한다.

"저... 스님. 우승하는 사람에게는 소 한 마리를, 아주 큰 황소를 준다는게 사실이지요?"

 중놈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네까짓게 무슨 황소를 꿈꾸냐는 듯. 아니면 이런 촌놈이 있긴 있구나 얕보는 표정.
 그래도 나는 확실히 묻는다.

"진짜로 주지요?"
"예.줘요, 진짜 줍디다."

 그러다가 점소이가 왔다. 이쪽엔 국수와 만두가, 중놈 쪽에는 한 주전자의 찻물을 놓았다. 
 나는 더 말할 것 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점심께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참이었다.
 그런데 잠깐, 이거 어이가 없다. 
 지금 눈앞의 중놈이 주전자에서 따라 마시는 것. 이거는 찻물이 아니라 희뿌연 탁주가 아닌가?

"아니 스님, 스님이 술을 마십니까?"
"이게 곡차야. 곡차."

 꿀꺽꿀꺽 탁주를 따라 마시는 모양이 영락없는 땡초, ‘돌중’이다. 
  

"그나저나 혹시 시주도 내일 참가하시려고?"
"...예."

 돌중은 그새 한잔을 더 따라 쭉 들이킨다. 장단을 맞추듯 식탁도 탁 두들긴다.
  
"하기는 시주의 체격이 훌륭하오. 힘깨나 쓰게 생겼다는 소리 들으셨겠소. 팔척 장부가 따로 있지 않겠소."

 암! 맞는 말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어깨도 넓은 편이고 키도 남보다 한뼘 반은 크니까.
 물건도 실한 편이고.

"그래도... 참... 그...무기가."

 말을 끌던 돌중은 의자에 기대어 놓은 내 쇠스랑 가리켰다. 난 얼굴이 붉어지는걸 느꼈다.
  
"그... 차암... 쇠스랑이 시주의 무기요?"

 이자식, 땡초 주제에 쓸데없이 말이많다! 그러나 '쇠스랑.' 이 말은 사실이어서 좀 껄쩍지근 하기도 하다.

"보시오, 스님. 무기라는 것이야 어차피 쓰는 사람 나름이 아니겠소? 쇠스랑이 아니라 똥치는 작대기를 든대도 작대기 보다는 작대기 든 사람이 중요한거 아니겠소?"
"그렇긴 합디다."

 이놈 돌중도 말뽄새가 시원찮다. '그렇긴 합디다'라. 그렇다면 그런거고 아니라면 아닌게지, ‘그렇긴 합디다.’는 또 뭐냐. 것 두 저따위로 눈을 뜨고서는!
 나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또렷히 말했다.

"대사님. 대사님께서는 척가군을 아시오? 척가군의 원앙진을 아시냔 말이요."
"척가군?"

 돌중의 눈이 동그레졌다. 그럼 그렇지. 가슴을 좀 핀다.

"그래, 바로 그 척가군이요. 왜놈들을 수천이나 때려 죽인 척가군 말이요. 우리 증조부께선 거기 척가군에서 당파를 쓰셨고. 조부께서 증조부께 당파쓰는 법을 배웠고, 우리 아버지는 조부께, 나는 우리 아버지께..."
"척가군의 당파술이 시주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법인가보군! 쇠스랑은 당파와 비슷하니, 시주는 쇠스랑을 들고 척가군의 당파술을 펼치려는거고!"
"바로 보셨소!"

 이거야 말로 우리 집안의 자랑이다. 척가군은 천하무적이었다. 그럼 당연히 척가군의 천하무적의 당파술 또한 천하무적의 당파술이 아니겠는가!

"흥!"
  
 콧방구 끼는 소리. 명백히 나를 겨냥한 소리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 맞은 편의 탁자를 쏘아보았다. 거기 앉은 놈이 만만한 놈이면 한 방 때려줄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그놈이 그냥 만만한 놈이 아니다. 관복을 입은 포두다. 머리에 전립을 쓴데다, 복식도 제대로 갖춰입고 있다. 허리춤에 굵은 포승도 차고 있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어떻소? 이래도 스님은 내 무기를 쇠스랑이라 무시할겁니까?"
"흠..."
  
 돌중은 턱을 긁었다. 
  
"아무래도 내가 시주를 얕잡아 본것 같소. 빈승의 실수요."

 우쭐한 기분이 든다.

"무얼요."
"이 빈승의 고향은 말이요. 강남이요. 항주 근처인데, 바다가 가깝소. 즉, 빈승 또한 척가군과는 약간의 인연이 닿은 셈이요."
"그건 어째서 그렇지요?"
"강남에는 왜구들이 자주 쳐들어오거든. 시대가 바뀌고 척가군도 사라졌다지만, 왜구를 상대하는데 척가군의 원앙진이 사라질리 있겠소? 

 그럴싸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정말로 그럴싸하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주억거리는데, 돌중이 불쑥 일어선다. 의자위에서 뭉게고 있던 동그란 방석같은 걸 집어든다.

"이걸보시오 시주. 이것이 무언지 알겠소?"

 코앞까지 불쑥 내민다.

"글쎄요... 제가 워낙 견문이 좁아서..."

 정말 모르겠다. 언뜻 보기엔 골풀로 짠 방석 같은데. 그러기엔 또 나무 덩쿨 같은걸로 얽혀있어서 방석 같지도 않다. 방석으로 쓰기에는 편안해보이지도 않고. 

"강북에선 이래. 다들 그러지. 이것이 등패요. 내가 직접 만든 것이지. 빈승은 계도와 등패를 쓰거든. 강북에선 등패를 등한시 하니까 보여줘도 잘 몰라."

이거는 나한테 억울한 소리다. 나도 등패가 뭔지는 안다. 돌중 놈의 방석을 등패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 이 방석이 나무로 짜여 있다는 것 외엔 등패라 볼 건덕지가 없어서다. 크기도 딱 방석만큼 작을 뿐더러, 모양새도 조잡하기 짝이 없다.
멍청한 돌중 놈은 그런 줄도 모르고 의기양양 말한다.

"하지만 강남은요. 그러니까 우리 해안사람들은 달라요. 보쇼. 왜구들이 쓰는 칼은 쌍수도인거라, 그 길고 무거운 칼로 상투높이까지 들어서 쌔리 친단 말이지."

...이 돌중놈 이제 보니 사설이 너무 길다.
 어쨌든 돌중은 신이나는지 손날을 세웠다. 민둥민둥한 머리 위까지 손날을 치켜들더니. 휙! 휙! 두어 번 치는 모양을 보였다. 꼴값이다.

"이것을 당파로도 쳐낼 수야 있겠다만, 당파보단 등패가 막기 쉽소. 등패가 아니라 칼이나 창으로 막아봐요. 어떻게 되겠소?"
"어떻게 됩니까?"

 진짜 예의상 묻는다.
  
"어떻게 되긴? 부러지지요. 한칼, 딱 한칼에 두 동강이 난단 말요."
"칼이 부러져요? 그럼 몸은 어떻게 되지?"
"두 쪽이 나지. 배꼽까지 말요."
"왜놈들 칼이 그리세요?"
"물론이지, 괜히 왜구들이 왜구들인가?"

 나는 사람이 배꼽까지 쪼개지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쉽게 상상이 안 된다.

"헛소리! 말도 안되는 소리야!"

 곁에서 아주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옆을 본다. 옆의 탁자에 뺨에 긴 칼자국이 있는 사내가 앉아있다. 얼핏 보아도 칼밥 깨나 먹은 낭인으로 보인다. 
 그는 사람 팔뚝만한 대도를 등에 두르고 있다.
 돌중의 얼굴이 화난듯 벌게진다. 

"시주는 빈승의 말의 어디가 거짓이라는게요?"
"칼로 칼 부수기가 그리 쉽소? 칼은 무게가 가볍소. 스님말처럼 단칼에 배꼽께까지 두쪽을 내는건 쉽지 않단말이요!"

 돌중이 콧방구를 낀다.

"흥! 시주는 아무것도 모르는거요. 왜놈들이 쓰는 쌍수도는 말이요. 무게가... 자그마치... 열근이 되오!"
"열근이라도 그렇게 쉽게 부숴지나? 거짓말은, 거짓말은...쯔쯔"

 돌중이 얼굴이 폭발할 듯 달아오른다.

"빌어먹을! 내가 잘못말했소! 왜놈들 칼은요. 열근이 아니라 스무근이오! 아니 사십근이 넘소! 길이는 팔척이 되고."

 어떻게 보아도 거짓말이다. 
 낭인의 생각도 나와 같나 보다. 그는 피식 웃었다.

"사십근이면 그게 칼인가? 쇠기둥이지! 이것봐, 여기들 좀 보시오!"

 객잔의 시선들이 낭인에게 모인다.

"이봐들. 이 땡추는 볼 것도 없이 거짓말쟁이가 아닌가? 무슨 왜놈 칼이 무게가 마흔근이되고 길이가 팔척인가? 왜구들은 체구가 작고 힘도 약해서 쥐새끼보다 못하오. 왜구 떼가 무슨 기운들이 그리 세서 사십근짜리 칼을 휘두른단 말인가?"
  
 그리 말하고 낭인은 통쾌히 웃었다. ‘암. 그렇지. 왜놈들은 쥐새끼만도 못하지!’ 맞장구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누가보아도 완벽한 낭인의 흐름이다.
말이 막힌 것인지, 분노해서 그런 건지 돌중은 말하지 않는다. 손을 부들부들 떨고만 있다.
그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중의 말은 거짓이 있었다. 왜도의 길이는 삼척이 못되고 무게도 열근을 넘지 않는다. 겨우 다섯근이 될까."

사위가 빠르게 조용해졌다. 말한 사람은 포두였다. 적어도 지금 이 비좁은 주루에서 포두보다 강한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낭인들의 칼이 가볍건 무겁건, 포두가 차고 있는 허리춤의 포승과 관복보다 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증거로 누구하나 발디딜 틈 없는 이 객잔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다닥다닥 합석을 한 탁자들 중에서도 포두만큼은, 저 차가운 눈의 포두 한사람만은 하나의 탁자를 온전히 혼자서 왕처럼 독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놈들이 쌍수도로 칼을 조각내고, 사람을 쪼개놓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렇소! 그렇소. 포두님의 말이 사실이요. 빈승이 착각을 해서 사십근이라 말하였소. 사실 왜놈들 칼은 다섯근이요. 두 쪽이 나는건 사실이고!"

 돌중이 신나는지 추임새를 넣었다. 포두는 차갑게 웃을 뿐 대꾸도 하지 않고 코웃음 쳤다.

"능포두님의 말은 사실이오? 능포두님이 직접 보았소?"

머뭇거리며 칼자국 낭인이 물었다. 능포두라. 포두의 성이 능가인가 보다.
능포두는 머리를 까닥거린다.

"사실이다."
"나는 믿지 못하겠소. 일격에 검과 사람을 두 쪽을 낸다는 건... "

 포두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루는 개미새끼 기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

"어떻게 되는지 알고싶나?"
  
 냉막한 목소리. 일어선 포두는 남달랐다. 나는 새삼 포두를 훑어보았다. 이제 보니 관복을 빼고도 무시할 상대가 아니었다. 나이는 서른 대여섯 일까, 키는 나만했고 몸피는 가늘었지만 외소하다기보다 잘 닦아낸 칼처럼 단련되어 보인다. 
 또한 허리춤에 찬 칼도 다섯 근의 무게는 되어 보였다.
 칼자국 낭인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깐다.

"...칼로는 당할자가 없다는 능포두께, 아니 북협께 누가 감히..."

 포두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그는 나직히 말했다.
  
"감히 북협을 입에 담지마라."

 칼자국 낭인은 입을 다물었다. 시선을 피했다. 포두는 차갑게 웃으며 천천히 앉았다. 
 낭인은 잠시 굴욕을 곱씹는가 싶더니, 도망치듯 주루를 빠져나갔다.
 술집은 차츰 왁자해졌다. 그나저나 북협이라?

"북협이라면 옛날의 곽정 대협을 이야기하는 걸 텐데... 그런 별호가 붙을 정도라면 저 포두도 평범한 자는 아닌게로군."
"시주, 시주는 방금 곽정 대협의 이야기를 하시었소?"

 돌중이 가쁘게 말한다. 우거지상이던 얼굴이 단박에 밝아져있다. 희로애락이 이렇게 쉽게 드러나서야 이 돌중 놈, 금생에는 해탈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스님께서는 곽대협을 좋아하시는가 보구려."
"당연한 일이지! 내 일생 곽대협을 흠모해왔소."

 자뭇 흥이 난 듯 돌중은 탁자를 쾅 내려친다.

"동사, 서광, 남승, 북협, 중신통! 오절은 하나같은 천하 영웅들이지! 그래도 가장 훌륭한건 북협야. 곽대협께선 양양성의 성루에서 몽골오랑캐에 맞서 삼년을 싸우셨지. 그날에 우리 한족은, 그리고 대송은 얼마나 당당하였소? 곽대협의 손짓에 몽골 놈들이 개미떼처럼 흩어질때 우리 한인들의 가슴은 또 얼마나 통쾌하였느냔 말이요.“ 

‘그렇지!’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 또한 대명의 척장군. 척장군의 원앙진에 왜구들이 으깨어질 때는 한인들의 가슴이 그 얼마나 뜨거웠는가?"

 옳은 말이다. 과연 척장군께선 얼마나 훌륭하셨는가?

"금세에 곽대협이나 척장군 같은 그런 영웅들이 있다면 오늘날처럼 오랑캐의 나라에서 한인들이 고통 받는 날이 왔을까? 참으로 답답한 일이지!"

 이것은, 이것은 미친 소리다! 이거야 말로 경을 칠 소리가 아니냐.
 바로 지금 돌중의 뒤에, 그 오랑캐 나라의 포두님이 앉아 계시지 않느냔 말이다!
 급한대로 돌중의 발을 밟는다. 마구 밟는다.

"왜 그러시오 시주?"

 포두는 돌중의 등 뒤에서, 그러니까 맞은편의 탁자에서 기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침착히 말했다.
  

"...대사님. 어째서 그런 소릴 합니까? 송은 사라진지 오래가 아닙니까? 이제는 우리도 황상의 대은대덕을 입고 사는 백성들일테구요."
"흥!"

 포두는 코웃음 친다. 자꾸 쓰게 웃는다. 고약한 사람 같으니. 치도곤 한번 내볼 기회가 사라진게 그리도 아쉬운가?
 나는 그치지 않고 돌중의 발을 꾹꾹 누른다. 그제야 눈치를 챈 것인지, 돌중은 어름어름 웃으며,

"물론이지요. 물론이지요. 헤헤."

 거듭 말한다.




 화산영웅연이 열린다는 대회장은 화산의 중턱, 아니 중턱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초입쯤에 있었다. 아무튼 이게 지금 중요한건 아니고.
  
"안돼! 돌아가!"
  
 붓을 든 포쾌가 소리친다. 나는 복장이 터질 것 같다.
  
“아무리 동네 싸움이라지만, 너같은 놈이 비무는 무슨 비무? 안돼! 구경이나 해!"
“글쎄, 이걸로 당파술을 할거라니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당파술이란 말이요!”
  
 버럭 외친다. 포쾌가 실눈을 뜬다.
  
"뭐? 자네 뭐하는 집인데?"
"농사 짓소!"
"안 돼!"

 천하에 이런 못되먹은 놈이 어디있냔 말이다. 백리길을 더 걸어 이까지 왔는데 돌아가라니.
욕이라도 쏴주려는데 돌중이 팔을 들어 슬쩍 나를 밀어낸다. 점잖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보게 포쾌 어르신. 이 사람이 싸우고 싶다지 않은가. 그리고 싸움이라는게 짝수가 맞아야 하는 거야. 싸우는 사람이 많아서 나쁠거야 뭐 있겠나."
"싸울사람 사람 많아. 짝수는 지금도 맞고."

 포쾌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내 쇠스랑을 가리켰다.

"아무리 그래도 쇠스랑이 뭔가? 공연히 사람들 웃음거리나 되겠지. 현장이 직접 참관을 한다구. 날더러 왜 저런 어중이떠중이를 데려 온 것이냐면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느냐구."

 몇 번 더 실갱이를 해 보았지만 포쾌는 완고하기만 했다. 쇠스랑이 뭐가 어떻다고.
 나는 힘없이 돌아섰다. 우승자에게 소를 준다고 해서 온것인데, 쌩돈을 써가며 자그마치 나흘길을 부지런히 걸어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예까지 나는 뭐하러 온것인가.
온몸에 기운이 쪽 빠진다. 돌아갈 길만 깜깜하다.
 쇠스랑을 질질 끌고 걷는 나를 따라오며 돌중이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사람이 이거 밖에 안 돼? 쳇, 화산영웅대전이라더니 동네 씨름판과 다를것이 없네."
  
 괜히 대회장을 둘러보며 내가 뿔퉁거린다. 아닌게아니라 사람이 없다. 이름만 거창하지 구경꾼이봐래도 끽해야 백 명 넘으려나. 이따위 작은 잔치에서 사람을 가려 받다니.
 돌중이 내게 말한다.
  
"나야 참가한다지만, 시주는 이제 어쩔건가?"
"돌아가야지 뭘 어쩝니까! 젠장. 나도 바빠요. 김도 메고 밭도 갈아야 해. 나무도 하고 닭장도 고치고, 새끼줄도 꼬고 또..."
  
 돌중은 되게 딱하다는 듯 나를 본다.
  
"기왕지사 이리된거 구경이나 하지 그러나? 혹시나 내가 소를 타면 자네 여비 쯤이야 안챙겨주겠나?"
  
 그럼 그럴까. 생각하는데, 저편 나무아래에 포쾌 두엇이 있다. 그 곁으로 뭔가 누렇고 커다란 놈이 보인다. 어느샌가 나는 대답도 않고 허둥지둥 달려가고 있다.
황소다.
 울퉁한 큰 눈이 제대로 된 누런 황소다. 덩치도 크고 힘도 제법 잘쓰게 생겼다. 나이는 아마 세살 쯤. 입을 벌려서 이빨을 보아야 알겠지만 한창 기운이 오른 나이다. 물건도 실한 것이, 씨소로 쓰기도 좋겠다.
 나는 황소를 거의 핥듯이 살펴보았다. 멍에를 질 어깨가 내려앉아 있는건 아닌지 터럭사이를 샅샅히 보았다. 혹시나 발을 절고 있지는 않은지, 뿔은 곧고 매끈한지. 
 아이구. 보아도 보아도 예뻐 죽겠다. 

데엥ㅡ!
  
 먼데서 징소리가 들린다. 돌중이 내 소매를 되게 세게 잡는다.
  
"그만 갑시다 시주. 슬슬 시작을 하려나봐."
  
 나는 소맷자락을 붙잡혀 대회장 쪽으로 끌려간다. 자꾸만 황소를 돌아보면서.
  
 둥근 대회장을 싸고, 백성들이 아래에있다. 높은 단생위에 관리 몇이 있고, 좌대에는 현장이 있다. 그놈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연설을 한다.
  
'천하 영웅들이 오늘 이 자리에 모였다, 너희들은 그 옛날 오절과 같이 용맹히 싸워라. 특히 잘 싸우는 자에게는 오절의 칭호를 내려주리라.'
  
 뭐 대강 이런 소리다. 나는 현장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면서도 떠들어대는 현장의 면상은 재삼 세심히 살펴보았다. 
 신기해서다.
  
"어리군, 겨우 열댓살 안먹은 것 같은데, 저렇게 어린 나이에 급제해서 현장이 되다니. 어린분의 학식이 대단한가보군."

 열댓살도 안된 소년이 현장이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그보다 십년을 더 산 나는 이렇게나 꼴이 한심한데.
 돌중은 팽 코를 풀었다.

"학식은 무슨. 산거지."

 시큰퉁한 돌중의 목소리다.

"뭘 사요?"
"관직 말이요. 돈을 주고 샀다니까? 일만 은을 주고 샀대."
  
 그래, 관직은 샀다고? 헌데 이런 자그만한 현의 현장직에도 자그마치 일만 은이 필요한가.
 멍해 있는데 돌중이 조잘거린다.
  
"이 근방 제일의 부자가 이씨 아니겠소? 저 놈이 그 집안 문중 장손인거라. 제기, 일만은이라니... 새파란 놈이 본전 생각을 하는지 백성들 쥐어짜는게 늙은 아전 못잖아. 비싸게 줬으니 아깝겠지. 겨우 소 한마리로 천하오절을 다 모으겠다는 놈인데 말요. 제미랄. 칼잡이들 몸값은 또 왜 이리 싼가?"
  
 돌중의 마지막 말은 처량하게 들렸다. 나는 여드름이 난 현장 소년의 면상을 보며 씁쓸히 말했다.

"그럼 화산영웅연이라는게 결국 저 어린놈 소꿉잔치였구려."
  
 응당 들려올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서, 나는 곁에있는 돌중의 면상을 내려보았다. 돌중은 뭐 이런 놈을 다 보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정말 모르셨소?"

 정말 몰랐다.




 곧 대결이 시작되었다. 대회장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동그란 원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이름이 불린 낭인 두사람이 마주 섰다.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더니 곧장 칼을 부딪쳐 나간다.
  
 그런데 그 대결이라는게 심히 지루했다. 한번 부딪치고 두어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한번 부딪치고 그랬다. 한편이 엉거주춤하게 찌르는 자세를 잡으면 오른 편은 찌르지도 않았는데 미리 피하고 반격하는 자세를 잡는 식이었다.
 하품을 두어번 하고는 내가 말했다.
  
"둘다 왜 저리 엉거주춤하게 싸우는 게요? 무슨 똥이라도 마려운 사람들처럼."
"비무라는게 그렇지 뭐. 다른게 있겠소? 처음보는 사람들이 사생결단 내어서야 무어가 좋다고? 여기가 전쟁터도 아니고." 
  
 그런가 싶다. 하기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죽어라 싸우는게 더 이상하다.

"발놀리는걸 보면 저게 중간은 하는거야. 이런곳에서 마음놓고 시원하게 덤비는 사람은 오히려 하수들이지. 저 치들은 칼 무서운 줄을 아니까 칼한번 부딪치는게 저리 조심스러운거요. 호적수끼리 잘 만난게지. 어이쿠! 조심해야지!"
  
 샤악! 시퍼런 칼날이 죽립 쓴 낭인의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피하는 죽립은 휘청이더니 핑그르르 돌며 다리로 땅을 쓴다. 일어나 자세를 수습한다. 
 하긴 뭐 무기에 몸이 상해버리면 영영 불구가 될 수 도 있는 거니까.
  
"그러면요. 고수들은 어떻게 싸웁니까?"
"그걸 왜 내게 묻소?"

 돌중은 뚱한 낯을 했다.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때다.

"아이쿠! 저걸 어째?"

 비명같은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급히 싸움판으로 시선을 돌린다.
 꽂혔다! 죽립의 허벅지에 두건의 칼이 꽂혀 있다. 시퍼런 검신을 따라. 시뻘건 핏물이 주루룩 흐른다. 챙그랑, 죽립 낭인의 칼이 땅에 떨어진다.
 대강 이렇게 싸움이 마무리 되려나보다.
 현장 소년도 말한다.

"뭐야 끝이냐?"

 현장의 말을 끊듯, 죽립은 끄응.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 뱉었다. 손을 뻗어 칼을 지른 두건의 팔을 단단히 움켜잡았다.
 승리를 예감하던 두건의 안색이 변했다. 대경하여 물러섰다. 아니. 물러서려했다. 대체 어찌 물러설 수 있겠는가? 죽립의 한팔이 자신의 팔뚝을 단단히 틀어잡고 있는 것을! 
  

"이놈!"

 우뢰같은 고함소리와 죽립이 커다란 주먹을 휘두른다. 필생의 힘을 담아 쏘아진 것이 분명한 그 주먹은 사색이 되어버린 두건의 면상에 그대로 쑤셔박힌다! 
 빠악! 거대한 타격음. 딱딱한 것을 마주치는 듯한 소리. 살과 거죽이 아닌, 차라리 쇠북을 두들기는 같은 소리가 울려퍼진다.
 죽립은 다시 한번 크게 휘두른다. 핏물이 크게 흩뿌린다.

"잘한다!"

 이 뜻밖의 저력에, 아니면 유혈사태에 사람들이 환성을 보낸다. 
 두건도 맞아주고만 있진 않다. 칼을 쥔 손목을 마구 비틀어댄다.
  

"아아아악!"

 칼! 그 시퍼런 검신이 죽립의 다리를 마구 찢어놓는다. 먹잇감을 탐닉하는 독사처럼 허벅지속으로 끝없이 파먹으며 기어들어간다.

"저 시주도 참 몹쓸 짓을 했군."

 돌중의 말이다.

"누구말이요?"
"거야 당연히..."

 죽립이 움직인다. 생명줄 같이 붙잡고 있던 두건의 손을 놓아버린다. 두꺼운 양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두건의 얼굴을 감싼다. 굵고 뭉툭한 엄지손가락 두개로 두건의 얼굴을 더듬거린다.  이게 가만 보니까 눈구멍을 찾아 훑는 것이다!

“세상에...”

 두건도 가만히 있지는 않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손을 떨치려 한다. 칼을 놓고, 죽립의 손목을 떼내려도 본다. 
 하지만 쑤실 구멍을 찾은 그 손가락은 인정사정없이 구멍 속을 파고 들어간다.

"졌소! 내가 졌소! 졌소오!!항복이요!"

 손이 멈추지 않는다. 이제 장내는 숨넘어갈 듯 고요하다. 고요한데, 날카로운 두건의 비명소리가 공기를 찢는다. 비틀어 버린다. 
 군중들은 이 끔찍한 광경에 더러 침음하고 더러 신음같은 탄식을 흘린다.

"이봐! 항복이라잖나!"
  
 대회장으로 누군가 탓 달려오른다. 그는 달려나온 기세 그대로 뛰어 오르더니, 죽립의 옆구리를 뻐벙 걷어찬다.
 나무가 두 쪽 나듯 두건에서 죽립이 떨어져나간다.

"빌어먹을! 능포두! 아아니, 북혀업!"

 어딘가서 들려오는 새된 고함소리.

"북혀업! 지금, 지금 뭐하는거야!" 

 나는 높은 좌대를, 현장 소년의 면상을 올려보았다. 소년은 눈썹을 파르르 떨며 여드름이 난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능포두는 꼿꼿히 돌아선다. 

"북협이 아닙니다."

 현장 소년은 발을 쾅쾅 구른다. 바락바락 고함친다.

"제엔장! 그래 젠장! 능포두! 능포두우! 당신 지금 뭘하는 거냐니깐? 뭘하는 거냐구! 왜 재미가 오르는데 판을 깨냐구! "

 능포두는 차게 웃는다.

"초장부터 피를보면 잔치가 망합니다. 모릅니까?"

 당장 말이 막혔는지 현장이 씩씩거리는데 능포두는 느리고 공손한 자세로, 그러나 현장의 심경따윈 고려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돌아섰다. 포쾌들에게 말했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라"

 포쾌 몇이 걸어나온다. 독이오른 현장 소년의 눈치를 살피더니, 결국에는 죽립과 두건을 치료해준다.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맨다.
 어느 포쾌는 두건 앞에서 손가락을 펼치고 있다.

"어때요, 보이오? 눈이 보이오? 둘다 보이오?"

 두건 낭인이 눈을 찡그린다. 천천히 머리를 끄덕인다. '보인데. 보인다는구먼.' 사람들이 가벼운 탄식을 흘린다.

"...저 죽립 낭인도 심보가 참 끔찍하군요. 저 지경이 되어서까지 이기려고 들다니..."

 내 말을 돌중이 받는다.

"아냐. 이긴 건 항복한 시주야. 실력도 그쪽이 나았어. 처음에 얕게 찌른 것. 허벅다리 있잖아. 비무에선 그 정도만 되도 다친 쪽이 먼저 졌다고 해야 해. 상대도 이쪽 사정을 봐주면서 공격을 한 건데."

듣고보니 그럴싸한 소리다.

"달리 보아도 그렇지. 항복한 시주가 나아. 눈깔이 터지진 않았거든. 죽립 시주 쪽은 어떻소? 공연히 벌집을 쑤셔서 자기 다리만 크게 상하고 얻은게 뭔가? 저 다리로 싸울 수나 있을 것 같나? 영영 병신이 되는거야. 차라리 처음에 항복했으면 병신은 면했을 것을... 얼마나 몹쓸 짓인가?"

 돌중의 안목이 놀랍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같은 일을 보고도 알아차리는게 이렇게 다른가싶다.
 절로 머리가 끄덕여지는데 짜증섞인 소리가 들린다.
  
"자네 더 싸울 수 있어?"

 현장 소년이다. 주저앉은 죽립에게 묻는 소리다. 다리병신이 되었다는 돌중의 말대로라면 개같은 질문이다. 죽립 낭인은 입술을 깨물더니, 좌우로 머리를 흔든다. 붕대로 싸매고도 핏물이 벌컥거리는 허벅다리를 부여잡는다. 안색이 창백하다.
 뱃속이 울컥거린다. 광경이 징그러워라기보다, 현장놈의 마음 씀씀이가 더러워서다. 

"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더 싸울 수 있냐는 소릴 하다니..."
"현장도 너무하는군..."
  
 여기저기서 수근거린다. 현장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장 터진다는 얼굴로 고함친다.

"이봐아! 저 놈들은 치워버리고, 다음 영웅을 들라구 해!"

 황당한 놈이다. 앞은 놈이고, 뒤는 영웅이다.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놈이 말하는게 얄밉다.

"현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능포두가 굳은 얼굴을 하고선 죽립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너무 많이 다쳤습니다. 은자라도 댓 냥 쥐어 보내시는게 낫습니다."
"낫다고? 왜?"
"...돌아간 사람들이 나쁜 소리를 하면 내년부터는 아무도 찾지 않을겁니다. 실제 올해는 작년보다 사람이 줄었습니다."

 그럴싸한 소린데 현장이 답을 않는다. 여드름투성이 얼굴을 찌푸리고 수염을, 아직 몇가닥 나지도 않은 고 보드라운 솜털을 문질러댔다.
 그러다 제 곁에 시립해있던 사내 하나를 잡고 꽥꽥거렸다.

"이봐요 중신통! 북협의 생각은 이렇다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때요? 그대도 무인이잖아! 중신통도 북협과 생각이 같소? 으응?"

 중신통이라는 사나이는 쥐처럼 생긴 이마를 찌푸렸다. 힐끔힐끔 현장과 능포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뒤에야 현장의 귀에 뭐라 소근거렸다.
 내가 돌중에게 물었다.

"중신통이라는 저 사람은 뭡니까?"
"작년 우승자가 저잔데, 현장이 중신통으로 삼았대. 요샌 현장집에서 식객으로 빈둥거린다더구만. 꽤 고수라곤 해. 능포두보다는 못하겠지만 꽤 강하대."

 갑자기 돌중은 목소리를 낮췄다. 번뜩이는 눈으로 속삭였다.

"...싸우면 내가 이기네."

 이게 진짜 웃긴게, 진지한 말투라서 웃기다.

"헌데요 스님. 그러면 저 양반이 아니라 능포두가 중신통이 되야 맞지ㅊ않소? 중신통이 오절중에선 최고 강한야 하는건데, 능포두가 저 사람 보다 강할 거라며?"

 돌중이 픽 웃었다.
  
"고 사연이 신통하지. 현장이 그랬대. 북협은 항상 능포두가 맡아야 한다고. 뭐 양양성은 북협 곽정 대협이 지켰으니, 우리 현은 북협 능표두가 지킨다. 이런거겠지. 하긴 뭐 저 정신나간 꼬맹이 마음을 누가 알겠소? 다 자기 마음대로지."
  
 애새끼 소꿉잔치 주제에 괴상한 곡절이 많다.
 낭인에게 주는 은자는 결국 없는 것으로 낙착이 된 모양이다. 포쾌 몇이 죽립낭인을 부축해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저 사람은 이제 뭘 하고 살려나."
  
 씁쓸히 보는데, 돌중의 이름이 불린다. 이 다음 차례가 돌중인가 보다.
 돌중이 일어선다. 어느새 등패와 계도는 꺼내든 체다.
  
“인생이 참 신기하지. 다 사람 사는 재미가 있소. 그럼 시주, 이따 봅시다.”
  
 뭐가 재미있다는 거요? 불쌍하기만 하구먼. 쏘아붙이려는데 돌중은 대회장으로 터덜터덜 걸어간다.
 헌데 어쩐지, 상대인 낭인의 얼굴이 낯익다. 방금 전 돌중이 재미 운운한 일이 이걸 이른 말인가 보다.
 세상일이 한치 앞도 모른다 하더니, 이걸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닌가 싶다. 

“헤헤 시주 참으로 오랜만이오. 보고 싶었소.”

 돌중이 먼저 말한다. 제법 공손한투다.
 어젯밤 왜도의 무게를 두고 다투던 사람. 대도를 든 낭인. 얼굴위에 새겨진 긴 칼자국이 꿈틀거린다.

“..두쪽이 날 땡추로군!”
  
 돌중이 허허 웃더니 차분히 말한다.
  
“무량수불. 시주 세상사가 모두 공수레 공수거라. 인생이 공空하니 은원도 공空이지요, 과거에 메일수록 더욱 세상만 고苦한 법이야. 어제 빈승과 시주 사이에 약간의 다툼이 있었으나 비웁시다. 잊읍시다. 원증회고怨憎會苦를 넘어야 멸성滅聖에 이르는 법. 어제의 은원을 부디 잊도록 합시다.”
“제미... 무슨 소리야?”

 칼자국 낭인이 눈을 찌푸린다. 돌중이 미소 짓는다.

“어차피 비무에 지나지 않는 일. 나도 시주도 크게 상하지 않아야 좋지 않겠소?”
  
 칼자국 낭인이 눈을 빛낸다.

“그렇긴 하지! 우리 서로 다치지 않게 조심하자구! 사이좋게, 안전하게 합시다.” 
“선재로다! 참으로 선재야.”
“그럼 스님 먼저 들어오시겠소? 아니면 한 번씩 돌아가며 공격을 해볼까?”
  
 현장소년이 발을 꽝! 꽝! 구른다.
  
“이봐아, 뭣들 해? 얼른 시작을 해! 얼른, 얼르은!”

 현장 소년은 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기실 둘은 현장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몸을 날리고 있었으니까.
  
"죽어라! 이 땡추야!"
  
 이것이 칼자국 낭인의 진심인 모양. 모가지를 양단할 기세로 대도를 휘둘러간다. 
 중놈의 마음이라 다를리 없다. 등패를 앞세우고 뒤로는 계도의 날을 번득이며 달려든다. 거의 사생결단의 자세로 덤비고 있다. 
 거의 동시에 이뤼진 기습이나, 계도보단 대도가 길다. 꼼짝없이 중놈의 대가리가 먼저 날아갈 판국.
 하나 돌중은 멈추지 않는다. 도리어 대도가 날아오는 방향을, 그 사선死線의 아래편을 향해 족제비 새끼처럼 몸을 던진다.
 싸아악! 서늘한 파공성을 내며 대도가 허공을 가른다. 
 돌중은 퉁퉁한 몸을 땅에 굴리더니 싸악, 등패로 바닥을 쓸며 일어선다.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떨어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선수필승?先手必勝 그렇다지만, 시주는 어째서 이리도 독랄한 공격을 하시었소?” 

 지금 돌중이 저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다.
 칼자국은 대꾸도 않았다. 도리어 좋은 기회가 왔다는 듯, 머리위로 대도를 빙글빙글 돌리며 나불거리는 돌중에게 접근한다. 허리를 비틀어가며 대각으로 내려친다.
 돌중은 여유를 부린 값을 치른다. 다시한번 땅에 몸을 던진다. 시퍼런 대도의 날이 돌중의 장삼자락을 쭈루룩! 찢어놓는다.
  
"니미..."
 
 그러나 돌중도 그냥은 당해주지 않는다. 일어서지도 않고 칼자국의 뒤켠까지 맹렬한 속도로 굴러간다.
 힘껏 휘두른 대도의 관성 탓일까, 칼자국의 대처가 늦다. 종아리께를 뻐억! 시원한 소리가 나도록 걷어차이고 만다.
중심을 잃은 칼자국은 엉덩방아를 찧는데, 그 뒤통수에 돌중의 등패가 냅다 후려 갈겨진다!
 퍼억, 안면을 강타하는 소리가 나며 칼자국이 바닥을 뒹군다. 그러는 와중에도 돌중의 접근을 막기위해서인지, 손에 들린 대도를 미친듯이 마구 휘저어 댄다. 
 효과가 없는 방법은 아니지만, 꼴이 좀 우습다.

"흐흐흐 만지면 커지나니..."
  
 군중을 돌아보며 돌중이 실실 웃는다. “좋소, 좋아!” 군중들 사이에 실소가 터진다. 남자들은 소리높여 크게 웃고, 여자들은 입을 가리고 작게 웃는다. 
  
“닥쳐라 이 땡추야!”
  
 칼자국이 벌떡 일어선다. 망신이 뻗쳐서인지 달아오른 쇠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조금 전 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기세가 흉험해졌다.
 이야얍! 외마디 기합과 함께, 머리 높이께 대도를 들고선 돌중에게 내달린다. 단숨에 일도양단할 기세로.
 헌데 허공을 찢는 대도의 궤적이 중간에 움찔, 바뀐다. 내려치는게 아니라 튕겨지듯 찔러간다!
 돌중 또한 가만히 있지만은 않는다. 한걸음 크게 우방을 내닫는다. 등패를 든 왼팔로 강하게 대도를 내려친다.
 팡! 큰 소리와 대도의 끝자락이 땅으로 꼬꾸라진다. 낭인은 얼른 도를 수습하려한다.
 하나 어느샌지 돌중의 오른발이 얹혀져 있다. 칼자국은 용을쓰며 대도를 빼내려하지만 소용이 없다.
 여기저기서 "좋다!" 하는소리가 터져나온다. 
 돌중이 씩 웃는다.

“이래도 선수무적先手無敵, 아니 선수필승이신가 그래?” 

 다음 순간 돌중이 대도의 너른 도신위를 팟 박찬다. 멍하니 입을 벌린 칼자국의 숙여진 어깨를 밟고선, 한마리 제비처럼 사뿐하게 솟구쳐, 오른다. 
 푸른 하늘. 돌중의 다리에 구름이 걸리었다.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는 광경. 
 빙글 돌아 떨어지는 돌중. 떨어지며 계도를 치켜든다! 웃던 안면은 싹 밀어버리고 추상같은 얼굴이 되어있다.
  

“극락왕생 해라!”
  
쩌렁쩌렁 호통! 칼자국의 정수리에 도광이 번뜩한다! 
손바닥으로 땀이 난다. 이렇게 두쪽이 나며 피분수가 일어나는가 싶은데.
  
따앙ㅡ!
  
 응? 이건 두쪽이 나는 소리가 아닌데.
 보니까 어째선지 허방다리를 짚은 칼자국이 휘청거린다. 몇걸음 인가 앞으로 갈지자 걸음을 짚더니 철푸덕 땅바닥에 꼬꾸라진다. 어정어정 일어나려다 다시 픽 꼬꾸라진다. 대가리가 쪼개지지도 않고, 피분수도 일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해서 생각해 보니 칼자국의 머리를 치고간 게 칼날이 아니라 칼몸인가 보다.
  
"더 할거요 시주?
  
 한참동안 땅에서 비비적 대던 칼자국이 위태롭게 일어난다. 퉤, 퉤! 오만상을 찌푸리며 입안에 들어간 흙덩어리를 뱉는다. 
 이쯤에서 항복하는게 옳지않은가 싶은데, 칼자국은 그럴 생각이 없나보다.
  
"네 놈을 살려두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고함치는 칼자국. 달려오며 마구 대도를 휘두른다. 슉슉슉 몰아칠 때마다 돌풍이 이는 것 같다. 
 하나 돌중은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등패를 들어 낭인을 맞는다. 왜구의 칼을 등패로 막는다는 돌중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등패 쓰는 솜씨가 번개 같았다. 빗발같이 갈겨치는 대도의 도격을 탱탱탱 모조리 좌우로 비껴낸다. 
 그러던 와중. 싹! 서늘한 소리를 내며 계도는 낭인의 좌방을, 낭인의 하초를 후린다.
 칼자국은 이를 악물며 돌중의 머리통을 내려친다.
 내려오던 대도가 일순 멈춘다. 
  
"헤헤."
  
 돌중이 여유만만 웃는다. 하기야 어느새인지 칼자국의 고의춤에 돌중의 손이 불쑥 들어가 있지 않은가.

“이놈 아주 실하구나! 반 잘라내도 남보다 두배는 크겠다.”
  
 계도를 쥔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돌중이 말한다. 폭소가 터진다. 여자들이 높여 웃고, 남자들이 낮춰 웃는다. 
 칼자국 낭인은 흙빛이 된 안색을 하고 얼어붙어었다. 
  
"크지 않소... 전혀 크지 않소...작소... 아주 작소..."

 돌중이 껄껄 웃으며 놓아준다. 칼자국은 대도도 버려두고 얼굴만 감싸쥔체 정신없이 어딘가로 달려간다. 
  
“남승이다아!!”
  
 제미... 깜짝이야. 현장 소년이다. 정신이 나간 듯 좌대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르고 있다. 손뼉까지 짝짝짝 친다. 

“그래! 오절 중에 남승이 승려였잖아! 하하. 그렇지 북협? 그렇지 중신통? 저 땡초가 오늘부턴 남승이다! 남승이다! 남승이야! 하하하하 이젠 동쪽이랑 서쪽만 갖추면 된다구!”

 뭐가 좋은지, 저 혼자 미쳐서 킬킬거린다. 칵칵 기침을 해가며 한참을 웃는다. 
 능포두의 차가운 얼굴과 중신통의 쥐 같은 면상이 찡그려져 있다.

“어때? 나 제법 멋졌나?”
  
 돌아온 돌중이 말했다. 나는 돌중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었다. 
  
“굴러 다니는건 영 그랬지만요, 다음부턴 아주 멋졌소. 최고였소. 헌데 저놈 물건이 그리 큽디까?”

 돌중은 대답 않고 웃기만 한다. 더 물으려니까, 돌중이 턱으로 비무대를 가리킨다.
  
"다음판이 재미있겠어. 중신통이 나온대!"
  
 아닌게 아니라 현장 소년이 부르르 몸을 떨며 핏대를 세운다. 
  
"우와아악, 중신통! 중신통!"
  
 중신통은 인상을 쓰며, 단상에서 뛰어내린다. 중신통이 들고 있는 무기는, 에 어디보자... 창이다! 저 붉은 수실이 달린 짧은 창 두자루가 중신통의 무기인가 보다.
  
"시작! 시자악 싸워엇 중신통! 싸우라구우!"
  
 중신통을 상대는 노인이었다. 초로의 검객이었다. 백발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에, 눈이 내린듯 흰 수염. 하나 허리는 굽지 않았고 자세도 반듯해 보였다. 노인은 칼집을 수평으로 세워 앞으로 하고 칼은 머리위에서 겨누고 있는 자세다.
 반면 중신통은 그냥 산책하다 선 듯 편안히 서 있다. 
 둘은 꽤 오랜 시간동안 서로를 보기만 한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질 않는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지. 저 늙은이 중신통 못잖은 고수야."
  
 돌중이 말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시작해라! 시자악! 뭐하는거야아!" 
  
 현장 소년이 바락바락 악을 쓴다. 쾅쾅쾅! 발도 구른다. 두 사람은 여전히 움직일 생각을 안한다. 
  
"소생 귀하께 청이 있소."
  
 한걸음 물러서서 노인이 말한다. 그 목소리가 노인답지 않게 또렷하고 분명하다.
  
"뭐요?"
  
 중신통이 말한다. 노인이 차분히 받는다.
  
"싸우기 전에 서로의 거리를 알고 싶소."
  
 거리라고? 중신통은 한참이나 대꾸 않는다. 쥐 같은 면상을 일그러뜨리다 쌜쭉히 뱉는다.

“망할 노인네가 욕심도 많군...”

 느린 춤사위처럼. 중신통은 천천히 움직였다. 성큼 오른발을 한발 내밀었다. 덩달아 오른손의 창을 내밀었다. 긴 숨 한번은 족히 내쉴 시간동안 이뤄지는 찌르기. 하지만 기묘하지. 창끝에 매달린 수실은 빙글빙글 맹렬하게도 흔들리고 있다.
 노인은 망설이는가 싶었다.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흔들리는 붉은 수실을 보았다. 돌연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천천히 저의 칼을 마주 댄다.
  
챙..
  
 창의 끝과 칼의 끝이 작은 소리를 내며. 아니 소리도 내지 않으며 부딪쳤다. 중신통은 한걸음 물러났다. 발을 바꿔서 왼발과 왼손의 창을 내민다. 이번에도 아주 느린 속도로.
 노인은 다시 검을 부딪친다. 창끝에 검을 포갠다. 
  
챙..
  
 동전 하나 떨어지는 것 보다 작은 소리.
 당연히 사람들이 야유를 보낸다.

"어이 영감! 뭐하는 거야? 그럴거면 돌아가!"

 허나 초로의 늙은이는 사람들의 야유를 신경쓰지 않았다. 안색 하나 바뀌지 안고 묵묵히 중신통의 창끝에 제 칼을 갖다 대기만했다. 
 두어번 칼을 더 부딪쳤을까. 노인이 서너 걸음 물러섰다.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손을 모아 중신통에게, 현장에게 번갈아 읍했다. 

"현장님, 소생이 겨뤄보니 이분의 기도가 대단합니다. 명불허전임을 알겠습니다. 공연히 더 겨루다 망신을 당할까 부끄러우니, 족함을 알고 물러나기를 청합니다."

 현장 소년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럼 썩 꺼져! 이 늙어빠진 겁쟁이야!"

 동조하듯 다른 사람들도 노인에게 꺼지라는 소리를 한다. 고래고래 대놓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한심한 늙은이라두 그렇지. 저렇게까지 할 필요야 있나 싶다.

"저 늙은이 제법 고수였군."

 돌중이다.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흥, 웃는다. 칼 한번 부딪쳐 보지 않고 돌아가는 저따위 늙은이가 무슨 고순가. 순 엉터리 소리다.
 돌중은 진지한 얼굴이다.

"중신통이라는자. 두 자루 창의 길이가 같은 듯 달랐네. 오른쪽 창이 두 치쯤 길었지. 아마 무게도 크게 달랐을 거야. 수실로 눈을 현혹하고 거리를 수시로 바꿔대니, 저런 기병奇兵을 상대하긴 부담스럽지. 그래서 그냥 가는거야."

 돌중 놈. 칼질을 제법 잘하더니만, 말 지어내기를 더 잘한다. 제가 틀렸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하지.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해서는.
 저따위 늙은이가 무슨 그런 걸 생각했을라구.
 현장 소년은 쾅쾅 발을 굴렸다. 

"젠장! 제엔장! 저 망할 노인네 덕분에 중신통의 싸움을 보지도 못하게 되었어. 나는 중신통의 싸움이 보고 싶었다구! 이봐! 이봐! 이봐! 누구 중신통과 겨뤄볼 사람이 있느냐? 그래, 너! 너! 너어! 한번 중신통이랑 싸워보겠어?"

 현장의 손이 닿은 곳에는 덩치 큰 낭인이 있다. 나보다 너댓살이 많아 보이는 나이. 삼십줄 되어 보이는 고목 같은 덩치의 사내. 부리부리하고 씩씩하게 생긴 그는 오늘의 도전자 중에선 체격이 가장 좋은 사내였다.
 덩치 큰 낭인은 중신통을 보더니 질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창과 중신통의 명성을 저울질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앞으로 걸어 나왔다. 휙! 커다란 창을 휘둘러 비껴들었다.

"장부가 되어 어찌 싸움을 피할까! 한번 시원하게 싸워보겠습니다."

 생긴값 하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다. 아까의 노인보다 백배는 나아 보인다. 
 현장은 좋아라하는 표정을 짓는다. 

"중신통 한번만 더 수고해 줘요. 응? 응? 그럴테지?"
  
 현장 소년이 꽥꽥 말한다. 중신통은 픽, 웃으며 대꾸한다.

"저까짓 놈 상대하는데 뭐 수고랄게 있습니까?"

 중신통이 자세를 잡는다. 헌데 아까와 다르다. 비껴든 창을 향해 다리를 벌려 몸을 낮춘다. 양팔을 교차해서 두 자루 창을 가위처럼 포개어 놓는다. 한 자루 창은 낭인의 머리를, 남은 한 자루로 상대의 하체를 겨눈다.

“시이작! 시자악!”

 현장 소년이 소리친다.

"이봐, 쇠스랑! 자네 어디에 있었나? 내 한참 찾았네. "

 누군가 내 등을 탁 쳤다. 나는 뒤를 보았다. 포쾌 하나가 헉헉거리며 숨을 돌렸다.

“아무튼 자네 운이 좋아. 아주 좋아! 저 망할 노땅이 기권하는 바람에 짝이 안 맞게 되었어. 자네가 이 다음번에 싸워.”
“뭐? 이 다음에 바로 싸우라구?”

 아까 전에는 싸우지 말라고 하더니, 이제와 싸우라는건 뭐냐.
 포쾌는 미안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건드린다.

“사정이 그리 되었어, 아무튼 그리 알라구.”

 따질 틈 없이 사라진다. 돌중이 나를 툭툭 때린다.

"이봐 시주 어쩔건가? 정말 싸울건가?"

 생각도 해볼 필요 없는 질문이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백리길을 더 걸어왔는데!

"그럼 싸우라는데 싸워야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돌아가? 나는 그냥 못가요."

 돌중이 진한 한숨을 내쉰다.

"그러면 일어서게."
"왜?"
"글쎄, 일어서라니깐! 상대가 누군지 미리 알아 둬야지."

 얼결에 일어났다. 돌중은 내 소매를 붙잡고 몇걸음 나를 끌고갔다. 대회장 주변에 있는 낭인들을 가리켰다.

"봐, 저 사람들 중에 하나가 자네의 상대일거야."

 나는 낭인들을 본다. 조금 전까진 그렇구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하나같이 흉악한 놈들로 뵌다.

"거의 칼이나 도를 쓰는 사람들이야. 시주의 쇠스랑이 더 길어. 그러면 시주는 어떻게 해야 되겠나?"

 갑자기 물으니까,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해야 되지..."

 모르겠어서 묻는데, 돌중 놈이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라 입을 열려는데, 대회장 에서 와! 커다란 함성이 들린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승부가 났나보다.
 중신통의 승리다. 덩치 큰 낭인은 창으로 허공을 찌른 체 뻣뻣히 굳어 있다.
 중신통은 낭인의 코앞에 있다. 통나무처럼 굵은 낭인의 목을 중신통의 쌍창이 젓가락질 하듯 자리 잡고 있다.
 낭인은 고개만 까딱하더라도 목 줄기를 베일 형국이고, 중신통은 가볍게 긋기만 해도 피분수가 일어날 판이다. 
 낭인이 고개를 떨군다. 중신통은 쌩 돌아서서 단상위로 올라간다.
 과연. 저 중신통이라는 놈. 생긴건 저래도 실력하나는 대단한 놈이란 생각이 든다. 

"헌데요. 스님이 진짜 중신통이랑 싸워서 이길 수 있소? 보니까 되게 센 거 같은데."
"자네! 자네 지금 왜 이리 태평한가!"

 돌중은 화난 얼굴이 되어있다.

"상대방 다리를 보게, 칼보다 항상 상대방 다리를 봐! 그리고"
"다리? 아버지는 배를 보라고 하셨는데..."

 돌중의 표정이 좀 밝아진다.

"배? 배도 괜찮아. 그래, 배를 보게. 항상 상대의 배앞에 시주의 쇠스랑이 있어야해!"

 다 아는 소린데... 생각하는 동안 포쾌들이 이름을 부른다. 

"저건 내 이름이 아닌데?"
"젠장, 시주 이름을 누가 어떻게 알고 부르나? 빨리나가게! 빨리나가!"

 음. 과연 그렇다. 나는 성큼성큼 대회장을 향해 걷는다. '다쳐선 안 돼! 다치면 병신이 돼!" 돌중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쳇, 재수 없는 소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들어간다. 대회장 한 켠에 선다. 그런데 여기가 좀 그렇다. 막상 서 있으려니까 시끄럽다. 지진이라도 났는지 땅도 흔들린다. 속도 어지럽고.

"이봐! 쇠스랑. 길을 잘못 들었네. 여기 자네 밭이 아냐!"
"저 촌놈을 봐. 다리를 달달 떨고 있어. 야아! 덩칫값을 좀 해라!"

 왁자한 소리. 젠장 씨도 없는 놈들이! 다리를 떨기는 누가 떨었다고 그러나?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다리를 떤적이 없다. 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놀리면서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속에서 불이 확 일고, 얼굴도 화끈히 달아오른다. 어지럼증도 싹 가신다. 
 울컥! 고함친다.

"웃지 마시오! 이 쇠스랑으로 당파술을 쓸거요. 척가군 당파술 말이요!"

 조용해졌나 싶어서 안심하는데, 숫제 무슨 소낙비처럼 폭소가. 아니 광소가 쏟아진다. 남녀노소 집단으로 광증이 돋았다. 내가 몇 마디 더 하려니까,

"긴장하지 말고 몸을 풀어! 손도 풀고 다리도 풀어!"

 돌중의 목소리가 들린다. 음 옳은 소리다. 나는 몸을 푼다. 양손으로 쇠스랑을 잡고 쭉쭉 머리 위로 팔을 뻗어 본다.

"쇠스랑! 씨발 쇠스라앙! 쇠스랑이 뭐야!!"

 꺡꺡대는 기괴한 소리. 현장 소년이다.

"이봐, 이보아! 쇠스랑 저거! 저 새끼 누가 델구왔어?! 너! 너! 쇠스랑 너어 나가. 당장, 다앙장 꺼지란 말이야앗!"

 좌대를 콰쾅! 콰광! 무너져라 굴러대는 현장 소년. 이마께에 핏줄이 돋아있다.
 뒤돌아서 대회장을 빠져나간다.

"아냐아냐아냐 야, 야! 야 너, 너어 쇠스랑! 쇠스라앙! 들어와! 들어와!"

...다시 돌아선다. 헌데 현장 소년이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말한다.

"네가 저 쇠스랑 놈을 두들겨 패! 저 놈을 죽여버려! 두들겨 패면 은자를 준다! 많이 팰 수록 많이 준다!"

 중신통이 거든다.

"...많이 주실 필요도 없을 겁니다. 금방 끝날 텐데요 뭐."

 쳐 죽일 놈들.




상대는 나와 비슷한 또래다. 슬쩍 머리를 숙여봤는데, 인사를 받아주긴 커녕 눈을 빛내며 입맛을 다시고 있다. 진작 달려들지 않은게 용하다.

"싸워어, 싸워엇! 시작해! 시자악!"

 피차 인사나 나누고 있을 사이도 아닌 셈!
 쇠스랑을 비껴든다. 낭인의 배 어림에 놓는다.
 낭인은 쉽게 덤비지 않는다. 나를 노려보며, 좌로 슬슬 걷는다. 쇠스랑으로 낭인의 몸을 겨누며, 나는 우로 옮긴다. 자그마한 원을 그리며 우리는 대회장을 몇 바퀴 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고 하니, 낭인의 장도보다 내 쇠스랑이 두 배가 길다. 즉, 나의 쇠스랑이  배 앞에 있는한 낭인은 영원히 나를 공격할 수 없다. 
 나는 가능한 이 거리를 유지하고 싶고 낭인은 파고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천천히 그려가던 원. 낭인이 흐름을 깬다. 위치는 대각 .좌전방으로 한발 느긋하게 옮긴다. 쇠스랑이 낭인의 느긋한 움직임을 쫒는 순간, 그는 여섯배는 빨라진 속도로, 우측의 대각에 몸을 던진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나라고 가만히 있는건 아니다. 쇠스랑 자루를 짧게 잡는다. 좌측으로 몸을 옮겨 낭인과 멀어지며, 열려진 낭인의 옆구리를 작게 찌른다. 빈틈이 보여선 안되니까 작게. 작게만 찌른다. 대신 빠른 속도로 파바박 찔러간다! 
 젊은 낭인. 몸이 날래다. 잽싸게 물러선다. 물러서는 낭인에게 나는 큰 걸음을 디디며 좀 매섭게 찔러 본다. 낭인은 칼을 움직여 쳐낸다. 
 어느새 처음과 같아진 거리!

 대치국면은 대강 이런식으로 진행되었다. 그것도 꽤 긴 시간동안.

"지루해 죽겠다. 자네들 놀러 나왔어?"

 야유소리가 들린다. 제기랄 지루하면 들어와서 싸우면 될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들어와서, 저 놈 좀 같이 두드려 패던가. 내가 도와줄 걸 모르나? 자기들은 속 편히 구경이나 하는 주제에!
 나도 답답하다. 크게 휘둘러보고 싶고, 시원하게 찔러도 보고 싶다. 창이라면 다른 방식의 공격을, 위에서 치거나 횡으로 치기라도 하겠다만 당파로는 쇠스랑으론 안 된다. 나나 낭인이나 서로 답답한 입장이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처음의 비무. 그 똥마려워 보이던 초장의 싸움보다 재미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다. 구경을 할 때는 몰랐는데 해보니 이 꼴이다.

"칼든 놈 너! 부끄럽지 않아? 쇠스랑 하나 못 이기고 그게 무슨 무사냐!"

 쇠스랑도 좋은 점이 하나있다. 처음에 나를 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낭인을 욕한다는거다. 애비가 어쩌니 안부를 묻는 사람도 있다.
 마침 반가운 소리도 들려온다.

"쇠스라앙! 이봐 쇠스라앙! 너! 네가 저 놈을 두들겨 패! 저 놈을 두들겨 패면 쇠스랑에게 돈을 준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낭인놈이 칼을 고쳐 잡는다. 장도를 옆으로 쥐더니 아래에서 위로, 땅을 쓸어 올리며 올려친다.
 쩡ㅡ소리! 불똥이 튄다. 쇠스랑의 삐죽삐죽한 가지 사이로 끼끼긱 긁으며 장도가 파고든다!

 이때가 당파의 모용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손목에 힘을 준다. 가지 사이에 얽힌 장도를 하늘 높이 비틀어 올려버린다. 삽시간에 배가 열린 낭인. 똥그란 눈을 뜨고 있다. 뭘 그따위 눈으로 보나?
 뻥 걷어 찬다! 뒷걸음치는 낭인에게 쇠스랑을 찔러 넣는다!

슉ㅡ!

 어쭈? 피한다. 피하기만 하는게 아니다. 몸을 돌리며 박차온다. 옆구리에 쇠스랑을 끼고 돌면서 도를 휘저어온다! 

"조심해 시주!"

 앉는다. 칼날은 머리 위를 쌩 스쳐간다. 하나 그 무정한 도는 숨 한번 편히 쉴 기회를 주지 않고 단숨에 방향을 꺽어서 허리를 내리쳐온다!
 냅다 구른다. 굴러서 피한다. 옆으로 구르고 뒤로 구른다. 앞으로도 몸을 던진다. 헌데 망할 놈이 따라오며 땅땅땅! 도를 후려친다. 나는 몸 한번 추스려 보지 못하고 번번히 땅만 뒹군다. 철푸덕 자빠져 버린다.
 이러다 장가도 한번 못 가보고 머리통이 뎅겅 잘릴판이다. 
 젠장, 항복이다. 항복! 항복이라구!

"응?"

 놀란다. 항복이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폭풍처럼 떨어지던 낭인의 칼날이 씻은 듯 그쳤다. 불구대천지 원수라도 만난 듯 몰아치던 놈이, 돌연 연민의 정을 느껴 개심이 했다는 소리냐.
 그럴리 있나! 얼결에 얻어걸린 것인지, 쇠스랑의 잔가지 사이에 낭인의 손목이 끼여 있다.
 일어서면서 훅! 쇠스랑을 잡아당긴다. 묵직한 느낌. 어어어, 신음소리를 뱉으며 낭인놈이 끌려온다. 쌍판데기가 눈앞에 보인다. 무지 못생겼다. 
 잘 걸렸다, 단숨에 받아 올린다. 으자작!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나며 저쪽의 안면이 무너져내리는 감각이 온다.
 얼굴을 싸쥐고 뒷걸음질 치는 낭인. 눈앞에 별이 보이나 보다. 술이라도 쳐먹은 듯 끝없이 뒷걸음친다. 칼을 지팡이처럼 짚고선 안면에선 한없이 핏물만 쏟는다.
 보니까 완전히 맛이갔다.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것도 용하다.

"우와아악! 쇠스랑! 합마공이다! 합마공이야! 뻗어 있다가 공격하는 서독의 합마공이야앗!

 현장 소년이다. 나는 잠자코 낭인에게 걸었다. 마악 칼을 놓치며 쓰러지려는 낭인의 머리통을 쇠스랑으로 후려갈겼다.



"시주, 시주는 정말 타고난 석두로군! 시주는 부모님께 감사드려야하네. 정말 감사해야돼!"

 돌중은 정말 눈에 띄게 감탄했다. 어깨가 절로 으쓱거리지만 아무렇지도 않은척 말해본다.

"나 어땠소? 멋있었소?"
"개뿔! 살아 있는거 감사한 줄이나 알아. 시주는 앞으로 이런데 나오지 마시오. 팔척 장부가 왜 그리 겁이 많소? 그렇게 긴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떨어대서는..."

 혀까지 쯔쯔 찬다. 망할 놈. 기왕 이겼으니 시원하게 칭찬 좀 해주면 좋으련만, 그럴 맘 없나보다. 멋있게 이긴 것도 아니긴 하다만.

"쇠스랑이 서독이다아! 서독 서도옥! 이번에는 오절이 두명이나 나왔어! 북혀업! 중신통! 당신들은 괜찮지? 괜찮겠지?"

 꺡꺡거리는 현장. 짜증이 난다. 나는 내심 아까의 약속을, 언제 돈을 주시는가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현장 소년은 깨끗히 잊었다. 정신나간 소리나 하면서 탕탕 발을 구르고만 있다.

"겁을 먹었다기보다. 저 많은 사람들이 막 욕을 해대니까, 긴장이 되서 그랬지."
"그게 그거지! 그리고 사람이 많기는 무슨?"

 돌중이 입을 삐쭉인다. 새삼 대회장의 인파를 살피더니,

"어? 그새 사람이 좀 불었네."

 한다. 목소리를 낮춰 내게 묻는다.

"그건 그렇고, 서독 시주는 이 다음에도 싸울건가?"

 젠장, 서독은 무슨 서독이냐. 저 따위 현장 놈이 지껄이는 헛소리. 아무리 농담이래도 수치스럽다.

"서독은 무슨! 스님은 그런소리 다시는 입에도 꺼내지 마시오! 그나저나 얼마나 더 싸워야 황소를 주지?"
"이 사람아, 계속 이기는 사람끼리 계속 겨루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그러니까 우승자가 소를 타가는 거고."

 새삼 돌중의 면상이 새롭게 보인다. 이런 놈들이랑 싸워서 이기라는 소리냐.
 한참 만에 말해본다.

"그러면 스님 내가... 그래도 한번은 이겼잖아요. 그러니까 다음판에는 지더라도... 응! 씨암탉 한마리 정도는 받을 수 있는거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싸울 자신이 있다. 시작하자마자 항복해버리면 되니까.
 돌중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다섯번 째 대결은 싱겁게 끝났다. 이긴 사람은 눈썹이 부리부리하고 얼굴이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는 허리의 칼을 뽑지도 않았다. 산보하듯 건들건들 상대에게 걸어갔다. 
 상대 낭인은 의외의 사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내가 코앞까지 다가온 뒤에야 번쩍 정신이 들었는지 칼을 내려쳤다.
 사내는 가볍게 몸을 흔들어 칼을 피했다. 다시, 또 다시 피했다. 훌쩍 뛰어오르더니 상대의 면상을 잡고, 무릎으로 턱을 올려찼다.
 끝이 났다.

 잠깐의 침묵 뒤에 귀가 먹먹해지는 함성이 터졌다. 사내는 세인들의 환호에 답하듯 두 손을 모아 사방을 돌아가며 읍했다. 얼굴만 잘난게 아니라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맵시있는다. 이런 멋있는 놈도 있구나 싶다.
 나는 돌중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스님, 스님! 스님이 저 사람도 이길 수 있습니까? 저 사람 중신통보다도 훨씬 강해보이는데?"

 돌중은 고민을 좀 하다가 답했다.

"...거 당연히... 내가 이기지"

 사내는 손을 들어 환호를 만류했다. 소리가 잦아들었다. 씩 웃던 사내가 좌대 쪽으로 돌아섰다.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생 현장께 청이 있습니다."

 현장 소년은 졸도하는 얼굴이다. 좋아서 실신하는 표정이다. 벌쭉벌쭉 벌려지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청? 무슨 청이오? 돈? 돈이에요? 돈이라면 주지! 아니면 그대 혹시 오절이 되고 싶소? 동사, 서독? 뭐든지 말해보시오 뭐든지요. 내가 다 들어 줄게, 그러니까 뭐든지 말해!"

 사내가 피식 웃는다. 현장은 절박해진 투로 묻는다.

"아니면 중신통? 혹시 중신통이 되고 싶소? 그러면 지금 중신통이 동사를 하면 돼! 아니면 북협? 그래! 북협이 되고 싶어요?"

 사내는 다시 웃는다. 다음 순간 이 멋진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헛소리에 나는 기절초풍하듯 놀란다.

"소생은 북협을 원합니다."

 미친놈인가 싶다.

"그래?"

 현장이 반색을 하며 능포두를 보았다. 

"북협! 아아니 능포두! 괜찮소? 저자에게 북협을 줘도? 능포두가 양보해 주겠어? 응? 응?"

 포두는 대답않는다. 얼음장 같은 눈으로 젊은 사내 쪽을 노려본다.
 굳은 얼굴로 입을 연다.

"...원하는게 북협인가, 이 능모인가."

 사내는 하하 웃는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퍼져나간다.
 손을 모아 능포두에게 길게 읍한다.

"저의 실수 입니다."

 다시 현장에게 말한다.

"현장님. 소생은 능대협에게 일검을 배우길 청합니다."

 억! 곁에서 외마디 소리가 들린다. 돌중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있다.

"나는, 나는 대체 왜 저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능포두우! 능포두웃!"

 현장이 끽꺅댄다.

"겨뤄봐! 겨뤄보아! 아아니, 겨뤄주시오! 겨뤄주시오! 부디 겨뤄주시오!"

 능포두는 말이 없다. 현장은 절박한 얼굴로 능포두에게 사정한다.

"겨뤄봐요! 제발 겨뤄주시오. 부탁 부탁이오!"
"제가 하는 일은!"

 능포두가 입을 연다.

"제 임무는 현장님을 지키는 일입니다. 남과 겨루는 일이 아닙니다."
"...백냥!"

 능포두의 얼굴이 굳는다.

"은 백냥! 아니 아니 이백냥을 주겠어, 어때!"

 능포두의 냉막한 얼굴에 차츰 노기가 어린다. 이상하다. 큰 돈을 준다는데 왜 저럴까.

"얼마를 주시더라도..."
"삼백냥! 아니 오백냥도 줄게! 자 어때?"
"안됩니다!"

 능포두가 소리친다. 놀라운 일이다. 그렇게 차갑던 사람이 이렇게나 열을 올린다는게 신기하게 느껴진다.
 현장 소년은 벌어진 입을 꼭 다물더니 굳은 결심이라도 한 얼굴이 된다.

"좋아! 좋아요 능포두. 은 천냥을 주겠어... 큰 돈야. 정말로 큰돈야 천냥은 받아들이겠지? 이건 아주 큰돈이란걸 알잖아. 그대는 천냥이 얼마나 큰돈인지 알지?"

 은 천냥! 상상도 못할 액수다. 헌데 능포두의 얼굴이 내가 보았던 그 누구의 얼굴보다 붉다. 기뻐서 그런게 아니고 화가나서 그렇다. 달군 쇠보다도 붉다. 이마에서 펄떡거리는 힘줄의 움직임이 여기서도 똑똑히 보인다.

"...싸우지요. 그러나 돈은 필요 없습니다."

 스르릉, 새하얀 검을 뽑으며 포두가 단상아래로 내려선다. 터벅터벅 걸으며 이쪽으로 다가 온다.
 나와 돌중은 일어섰다. 포두가 지나갈 길을 열어 주기 위해서다.

"...내가 당신과 먼저 겨뤘어야 했는데..."

 스쳐가는 그를 보며 돌중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린다. 능포두는 그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계속 걸어가 기쁜 듯 미소지은 사내의 반대편에 선다.

"내가 화난 이유는 현장이지 네가 아니다. 너를 죽이진 않겠다."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곧 다시 웃는 낯이 된다.

"반갑소. 능대협의 이름은 예부터 많이 들었소. 전부터..."

 사내의 인사말은 더 이어지지 못한다.

"겨루지 않을테냐?"

 싸늘한 말투다. 사내는 안색이 변한다. 성이 난 듯 다문체 아무 말도하지 않고 자세를 잡는다. 한 발은 앞으로 한발은 뒤로 비스듬히 뺀다, 몸을 깊숙히 달리기 하듯 낮춘다.
 포두가 말한다.

"...뽑아라."
"나는 나중에 뽑아아 빠르오."

 젊은 사내가 퉁명스레 말한다. 과연 그는 아직 검을 뽑지 않은 체다. 금방이라도 뽑을 듯, 자루와 검을 붙들고만 있다. 딸깍 시퍼런 검신이 드러났다 사라진다. 딸깍딸깍, 사내의 검집이 지면과 수평이 된다. 이따금 드러나는 시린 검광은 시위에 얹혀진 화살처럼, 예정된 질주를 축적된 의지를 토해내고 있다.

"좌수左手군. 먼저 올텐가?"
"괜찮소?"
"나는.."

 답을 듣지 않고 사내가 움직인다. 찌지직! 하늘에 긴 섬광이 그어진다. 뽑으며 쏘아가는 사내의 칼. 내가 본 누구보다도 생물 혹은 물체보다도 빠르다. 좌방으로 우방으로 번쩍거리며 칼을 닦아내리다가,
 쿵! 발을 굴려 미끄러지듯 포두의 뒤로 돌아간다. 전후좌우로 위로 아래로 끝없이 후리고 찌르고 꺽는다. 빛을 찍어내 붓으로 그리듯 현란한 춤사위가 능포두를 감싼다. 검과 검이 부딫치는 음향이, 튀어오르는 불꽃이 끝없다.
 능포두는 작은 원속에 있다. 사내가 펼치는 춤사위의 중앙에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지,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한 발자국의 거리조차 자신의 마음대로 조정 할 수 없는 검광의 감옥 속에서 팔방으로 닦아오는 젊은 사내의 칼을 아무렇지도 않게 피하고 쳐냈다. 등 뒤에 눈이라도 있는지 뒤에서 치는 칼조차 허리를 틀어 가볍게 친다. 
 이들의 궤적은 눈으로 쫒기조차 어렵다.

땅ㅡ!

 큰 소리가 난다. 젊은 사내가 능포두의 곁에서 떨어져 나온다. 사내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밭은 숨을 내쉰다. 가만보니 어깨에 핏물이 솟아 올라있다. 
 도대체 언제 어깨를 상한 것인가? 또 능포두는 어떻게 공격을 했다는 말인가. 뭐가 보이기라도 해야 알 수 있을텐데, 보기에 너무 빠르다. 분명히 보았되 분명히 본 것이 없다. 
 내가 돌중에게 말한다.

"스님! 혹시 능포두랑도 싸워서 이길 수 있소? 아무래도 있잖아. 내가 보기엔 스님보다 훨씬 센 것 같아."

 돌중 놈이 한숨을 토해냈다.

"나라면... 나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 만약 나라면..."

 능포두는 칼을 한번 털었다. 뭍은 핏물을 바닥에 뿌리고 숨을 고르고있는 사내에게 담담히 물었다.

"네 나이 때 나보다 낫다. 뭐 하는 놈이냐."
"포두님은 내가 누군지 모르시겠소?"

 헉헉 거리던 젊은 사내가 돌연 이를 드러낸다. 잠시 생각하던 능포두가 눈을 찌푸린다.

"내가 너를 어찌 아는가?"

 칼을 검집에 꽂아넣으며 일어선다. 꼿꼿히 서서 능포두를 본다.

"포두님은 정말 나를 모르시오?"

 그리고 우리들을, 좌중을 보며 말한다.

"여보! 혹시 여기 있는 분들 중에 나를 아시는 분이 없소?"

 소란스러워진다. '저 사람이 누군가?' ' 나는 모르는데 자네는 혹시 알아?' 다들 수근대지만, 이 젊고 잘생긴 사내를 아는 사람이 없다.
 답답하다. 능포두가 자기를 몰라보는게 서운해서 저렇게 떼를 쓰나본데 지금이라도 잘 지내봅시다. 하고 겸손히 말을 건네보면 될게 아니냐. 
 얼굴도 미끈하게 생긴 놈이 뭐 저리 융통성이 없단 말인가.
 사내는 우리를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우렁우렁 말한다.

"여기 능포두님은, 그리고 여러분들은 내 얼굴은 몰라도 내 이름은 한번 들어 보았을 것이오!"

 멍청한 놈. 그러면 진작 말을 할 것이지, 그래서 이름이 뭔데?
 헌데 그 사내놈이 이름은 말 안하고, 불쑥 주먹을 치켜든다. 
 득달같이 고함쳐댄다.

"이 곽자령을 모르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형제들!"

 한심한 놈. 아무도 자기를 못 알아봐준다며 징징거리더니, 난데 없이 자기 형제를 찾고있다.
 헌데 팍! 누군가 내 어깨를 밀치고 지나간다.

"뭐야?" 

 묻는데 대꾸도 안하고 뛰어간다. 헌데, 이 앞은 대회장인데, 저 사람은 나를 밀치고 어디로 달려가려는 생각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이미 대회장에는 능포두를 덮쳐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도를 빼든 사내들이 사방에서 능포두를 덮쳐갔다. 능포두는 칼을 들었다. 동시에 단도 든 사내의 목 울대가 쩍 벌어지며 핏물이 끝없이 솟았다. 

"피해라 형제들! 포두는 내가 맡는다. 형제들은 현장을 잡앗!"

 벼락 같은 고성, 젊은 사내의 검집에서 검이 뽑혀나간다. 두 번째 사내를 향해 번쩍거리는 능포두의 검을 섬전과 같이 막아선다.
 깡! 깡! 불꽃을 튀기며, 젊은 사내와 포두의 칼이 다시 얽힌다. 
 일그러진 얼굴로 능포두가 고함친다.

"다들 단상에 올라라! 현장을 지켜!"

 포쾌들 몇이 단상을 향해 뛴다. 단도를 든 남자들과 방향이 같다. 두개의 무리가 합쳐지며 으깨진다. 섞여들며 도검이 부딫친다. 딱! 딱! 딱! 딱딱이 소리다. 어느 남자가 딱딱이 두개를 꺼내어 마구 두드리고 있다. 그 소리가 무슨 신호라도 된 양 천하가 쩌렁쩌렁한 함성소리로 가득 차오른다. 

"현장을 잡아라!"
"무기를 버려라! 버리면 살려준다!"

 저편 수풀에서 번쩍거리는 병장기를 든 놈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서슬에 포쾌 몇 놈이 창을 버리며 도망쳐간다. 다른 한편에서도 창칼을 꼬나잡은 놈들이 산등성이를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다. 사람들이 도망치고 있다. 포쾌들도 우왕좌왕 내달리고 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나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는다. 

"시주, 정신을 차려! 여기 싸움 한복판이야. 이렇게 있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네!"

 돌중이 나를 잡아 올린다. 과연 맞는 말이다. 이런 때 일 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발딱 일어나서 주변부터 살피는데 주위가 온통 요란하다.

 단도를 들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남자 곁에 칼을 빼들고 달려오는 사내가 그 앞에서 주저 앉으며 머리를 감싸쥐는 남자아이를 꼭 감싸 안는 여인의 쪽 지은 검은 머리 너머에 손을 잡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남녀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도망치지 마라 앞에서 가로 막는 사내의 뒤에서 칼을 빼들며 무서운 얼굴로 고함치는 어느 포쾌의 벌려진 입을 찢으며 솟구쳐오르는 선득한 창날이 어흥! 핏물을 토하면서 용트림치고 멈추어라 다들 멈추어라 도망치지마라 도망치는 자는 죽이리라 그만 해 하지 마 도망 가 나의 등 뒤에 째지며 솟아오르는 높은 비명 소리가

"정신 차려! 시주 정신차리라니까!"

 돌중이 내 뺨을 철썩철썩 후려갈긴다. 괜찮소. 아 괜찮소 그만 때리시오 스님. 내가 진작 정신은 차리었소. 나는 괜찮소. 하니까 그럼 되었다면서 뭐하냐고 얼른 가자 옆에 나무 하나를 가리킨다. 일단 저기라도 가자면서 뭐하느냐 얼른 움직여! 해서 움직인다. 나무에 아래에 있으니깐. 아 시주 뭘 하느냐고 진짜 정신이 나갔느냐고 빨리 올라가있자고 그래서 나무 타고 위에 발발기어 올라간다.

"일단 여기있세. 잠잠해질 때 까지 기다립시다."
"예 스님, 예. 예."

 이상하다. 왜 내가 난데없이 나무위에 올라와 있나?

"이거, 이거... 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산적들이 쳐들어 왔네! 저 곽자령이라는 놈, 알아주는 녹림 두령일세. 세상에 저리도 젊은 놈인 줄이야..."

 나는 내가 어떻게 여기에 올라와 있는지 묻는건데, 돌중은 도적이 어쩌니 한다.

"무기를 버려라! 도망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그러면 살것이다! 도망치는 놈은 벨 것이다!"

 도적놈들이 고함친다. 그래도 도망가는 사람이 많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세상에나!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말을 탄 도적 여남은 놈이 몰아댄다. 대회장을 크게 싸고 원을 돌면서 토끼몰이 하듯 사람을 모은다. 

"중신통 현장을 지키시오! 다들 단상위로 올라가!"

 호령소리. 능포두다. 그 능포두의 앞에 젊은 사내가 있다. 두령이라는 미끈한 하게 생긴 면상이 파리하게 변해있다. 헉헉 숨을 내쉬며 다시 자세를 낮추고 있다. 검은 검집에 꽂혀있고, 앞으로 쏘아질 듯 축적된 기세도 여전하지만 그 사이 한칼을 더 얻어맞았는지, 어깨 뿐 아니라 허리춤에도 새빨간 핏물이 솟아있다. 
 능포두는 사내와 더 겨룰 마음이 없나보다. 몸을 돌려 단상 쪽으로 박찬다. 

"놈을 막아! 현장 쪽으로 못 가게해!"

 젊은 두령이 소리친다. 목소리 끝이 갈라져있다. 포쾌들과 맞서던 도적 몇이 돌아선다. 창을 뻗으며 막아서는 도적들을 능포두가 양 옆으로 뻥뻥 걷어찬다. 차면서 훨훨 달려간다.
 짧으나 길었을 혈로, 능포두가 단상위에 한발을 올린다. 젊은 두령은 마침내 굽혔던 다리를 팽팽히 신장하며 화살처럼 쏘아져간다. 텅 비어있는 포두의 등을 칼로 후려갈긴다!
 능포두는 돌아서지도 않는다. 한발을 단상에 올린체 그대로 허리만 뒤로 젖힌다. 검이 부딪치며 불똥이 튄다. 곧장 쓰러진대도 이상할 것 없는 아슬아슬한 자세로 정신없이 내려쳐오는 젊은 두령의 칼을 받아낸다.

“형님! 그러다 죽겠소. 같이 싸웁시다.”

 한 자루의 시커먼 철창이 뉘여있는 능포두를 찌른다. 능포두는 고개만 까닥 숙여 피한다. 젊은 두령이 외친다.

"가규! 끼어들지 마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 놈과는 사생결단을 낼 것이다!"

 철창을 내지른 사내. 고슴도치 수염을 한 사내는 멈칫거리다 침을 탁 뱉는다.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헛소리! 우리는 생사를 함께하기로 했는데, 형님이 죽으면 나도 죽어야 하는게 아닌가!"

 말하고 질풍처럼 철창을 부딪쳐간다.
 그런 그들을 맞아들이는 포두는 낙낙했다. 두 명을 상대하고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단상에 한발을 걸친 그 비스듬하고 불안정한 자세로도 쉴새없이 검격을 맞췄다. 후려치고 찔러 들어오는 젊은 두령의 검을, 고슴도치의 철창을 쳐내고 있다.

"능포두우! 이리로 올라와! 내려서 있지 말고 나를 지켜엇!"

 현장 소년이 소리친다. 사방에서 파도치는 도적들, 그 사이에 중신통과 포쾌 몇으로 이뤄진 단상은 기울어지는 배처럼 위태롭게 보인다.

"능포두라는자... 정말로 여간 내기가 아니였군. 나 같은건..."

 돌중의 목소리가 들린다.
 능포두가 벼락 같이 호통친다. 

"중신통, 뭘하고 있소! 현장을 지키시오!"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밧줄하나가 긴 호선을 그리며 허공을 나른다! 좌대 뒤에 웅크리고 있던 현장 소년의 모가지를 물고기 채듯 낚아채간다.
 중신통. 단상위에 펼쳐진 다른 하나의 전장에서 분투하던 중신통은 대경하여 밧줄을 잡으려한다. 하지만 도적들의 창검이 빗발처럼 찔러온다. 중신통은 멀어져가는 밧줄에 접근하지 못하고 반대편으로 멈칫선다.

"빌어먹을!"

 능포두가 고함친다. 기지개 펴듯 위로 양팔을 뻗으며 한바퀴 크게 돌린다. 단지 그 한번의 몸짓으로 내려치던 두령의 칼이, 후려치던 고슴도치의 철창이 튕겨져 나간다.

믿을 수 없다.

 단상을 박차며 능포두의 몸이 높이 비상한다. 뛰어서, 아니 날아서 공중제비를 돌며 젊은 두령의 머리 위를 넘어간다. 발버둥을 치며 질질 끌려가는 현장소년에게 다가간다. 현장 소년을 붙잡는다.
 얼굴을 일그뜨린다.

"계속 잡고 있을거요?"

 젊은 두령이 웃으며 말한다. 현장 소년은 눈알이 튀어나올 듯 시퍼런 얼굴이 되어있다. 그런 소년의 목을 죄이며 파고 드는 굵은 밧줄의 팽팽한 대극에 소년의 발목을 잡은 능포두의 손이 있다. 더 힘을 겨룬데 보아야 교수대나 다를게 없다. 
 무너지듯 무릎 한쪽을 꿇어앉는 능포두. 방금 전 눈부신 비상의 대가는 두령에게 일검을 맞는것으로 대신 한 것인지 왼쪽다리가 온통 피칠갑이 되버린 체다.   
 부르르 떨리는 능표두의 어깨에서 분노가 그리고 절망이 차례로 깃들었다 사라진다. 
 그는 손에 쥔 발목을 힘없이 놓았다. 

"중신통은 대체 뭘하고 있었소... 중신통은 무얼 했느냐는 말이요..."
"나는...!"

 이 말은, 추궁이라기보다 비탄에 가까웠다. 능포두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나름대로는 분투하였을 중신통. 그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능포두는 절룩거리며 일어선다. 달팽이 기어가듯 현장 소년에게 접근하지만, 무정한 창대 여럿이 막아선다.
 젊은 두령이 기세좋게 소리친다.

"무기를 버려라! 버리는 놈들은 살려준다."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마지막까지 싸우던 용감한 소수. 피투성이가 된 포쾌들은 창이나 칼을 힘없이 던졌다. 

"너는 안돼, 나와 싸우자!"

 고슴도치가 철창을 휘두르며 중신통에게 치고 갔다. 사색이 된 중신통은 고슴도치에게 맞서지 않았다. 등을 돌려 반대 쪽으로 쏜살 같이 달렸다. 옆에서 베어오는 도적의 목울대에 단창 하나를 깊숙히 박아주고는 뽑지도 않았다.
 계속 달린다.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도망쳐 간다.
 고슴도치가 쩌렁쩌렁 호통친다.

"쫒아! 저놈은 우리 형제를 많이 죽였다!"

 두두두두, 말에 탄 도적들이 중신통을 쫒아 수풀 속으로 들어간다.

"이봐 거기, 나무위에 두 놈, 너희들은 뭐하는 놈들이야? 내려와! 내려오질 못해?"

 아래에서 도적놈 하나가 소리친다. 소리만 치는것이 아니다. 창대로 내 다리를 퍽퍽 때리고 있다. 

"내려가겠소! 내려가겠소!"

 돌중과 내가 허둥지둥 나무를 타고 내려간다. 내려선 우리에게 산적이 말한다.

"여기서 꼼짝도 하지마, 어차피 다 끝난판이야. 도망가면 진짜 죽어."

 협박이라기보다 당부에 가까운 투다. 나는 머리를 끄덕인다.

"능포두우, 능포두우! 뭘하고 있소? 뭘하고 있어요? 나를 구해요. 나를 구해줘요오!"

 갑자기 캑캑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린다. 현장 소년이 몸부림치고 있다. 능포두는 칼을 짚고 비틀비틀 일어선다. 천천히 숨을 고른다.
 젊은 두령은 발을 들어 현장의 배를 밟는다. 목에 칼을 겨눈다.

"능포두께는 유명한 협객이셨는데 어찌 이런 놈의 아래에 계셨소? "
"도적이 묻느냐."

 승리한 사내, 두령이 껄껄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포두님은 탐관오리의 개가 아니오?"

 흥! 능포두는 차게 웃었다.

"도적이 개를 탓하느냐."

 현장소년이 꿈틀꿈틀 몸부림을 친다. 

"뭐어? 괘씸한 놈! 이 도적놈들아! 나는 탐관오리가 아냐! 능포두! 뭘하고 있어! 나를 구해 주시오! 이 놈이 칼로 내 목을 겨누고 있잖아!"

 능포두는 핏기 없는 얼굴로 쓰게 웃었다.

"다 끝난거요 소가주. 우리가 졌소."

 능포두는 현장 소년을 소가주라 불렀다. 현장소년은 일순 창백해 졌다가. 벌게진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쳤다.

"졌다구? 졌다구? 웃기지마! 그럼 네까짓게 무슨 협객이냐! 대협이냐! 북협이냐!"

 능포두는 말이 없다. 지팡이처럼 칼을 짚으며 비틀비틀 단상에 몸을 기댄다. 피로한 표정을 짓는다.

"이보시오. 능포두. 주인이 부르지 않소, 왜 대답을 안하시오?"

 젊은 두령이 비아냥 거린다.

"니놈이 유명한 협객이라며! 니 놈이 노모가 어쩌니 여식이 어쩌니 하면서 아버지를 먼저 찾아왔잖아! 천냥을 달라며! 천냥만 주면 죽을 때 까지 나를 지켜 주겠다며!"

 현장 소년은 무엇이 분한지 한참동안 숨을 헉헉거렸다.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내가 탐관오리면 니 놈은 탐관오리의 개다! 왜 개가 주인을 못 지키냐! 협객이 왜 약속을 못 지켜! 왜 약속을 못지키냐! 왜 천냥 값을 못하느냐! 부끄럽게 여겨라!"

 능포두는 여전히 말 없다. 그러나 얼굴이 시퍼래졌다. 칼을 쥔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네 말이 맞다. 내가 네 아비를 찾아가 천냥을 받았다. 천냥을 대가로 평생 너를 지켜주겠다고 네 아비와 약속했다. 그 돈을 받아 노모와 여식을 부양했다."
 능포두가 칼을 들어 현장을 가리켰다.

“너는 어리지만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악독하고 더러운 탐관오리다. 이 가뭄에도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착복을 해댄다. 그 쥐꼬리만한 권력으로 남의 소를 빼앗고, 그걸 상품으로 이런 정신나간 잔치를 벌였다.”

 갈라진 포두의 목소리는 상처입은 짐승의 숨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부끄럽게만 여겼었다. 시세가 궁하여 너희 같은 놈에게 은 천냥에 약속을 판 것을 항상 수치스럽게만 여겼다.“

 포두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은 천냥을 탐하여 약속을 하고, 약속한 일을 지키지조차 못하였으니. 서푼어치 되지 못하는 칼솜씨를 천냥의 값으로 속인 셈이 되었다. 나는 더욱 수치스럽게 되었다.“ 
"헛소리! 헛소리잇 그만 집어 치워엇! 능포두 나를 구해라앗!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햇!"

 현장이 악을 쓴다.  

"...이제 봉양할 노모도 없고, 여식도 시집을 보냈다. 안타까운 것은 능가의 대가 오늘로 끊어진다는 것이다. 아! 이 능운비는 죽어서 조상을 뵐 낯도 없는 놈이로구나..."

 말을 마침과 동시에 포두가 움직였다. 포두의 목에 빛살이 번득였다. 아니 그는 빛살보다 빨랐다. 
 고통에 치켜뜬 포두의 눈이 씨뻘겋게 충혈되었다. 하늘을 향한 그의 시선은 내려서서 땅을 보았다. 우리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은 주인을 배반한 칼, 자루를 거꾸로 돌려 주인의 목을 찌른 칼을, 그 미려하게 빠진 새하얀 곡선을 지나 핏줄이 불거진 양 팔뚝을 더듬으며 지나갔다. 단단히 자루를 움켜쥔 주먹에서 멎었다.
 사람들, 산적들조차 침음하여 움직이질 못하고 이 돌연한 광경을 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쓰러졌다. 




"능포두..."

 처음 움직인 사람, 가장 빨리 정신을 추스린 사람은 바로 산적의 젊은 두령이었다. 그는 능포두에게, 시체가 된 몸뚱아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몸을 숙였다.

"나 곽자령은... 북협 곽대협의 후손인 바 오랑캐와 탐관의 만횡을 더는 볼 수 없어 녹림에 몸담은 것이오. 내 아까 귀하를 현장의 개라 한 것은 잘못이었소. 내 오늘 여기에 사내다운 사내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귀하만은 진정으로 사내다웠소..."

 놀랍게도 이 다음이 현장이다.

"나느은!“ 

 그 놈이 새빨간 얼굴로 캑캑거렸다. 번들거리는 눈으로 도적들어게 외쳤다.

"현장이다아! 빌어먹을 놈들아! 역적의 놈들아! 놔라, 놓아라앗!"

 두령은 돌아선다. 현장의 배를 걷어찬다. 펄떡거리던 현장의 몸이 축 늘어진다.
 돌중이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곽자령 저 놈은 어째서 뻔한 거짓말을 하는가. 곽대협은 독자로 오직 약관의 곽파로공을 두셨고, 양양성이 함락되던날 곽대협과 순사하셨거늘 무슨 후대가 있을까? 곽자령은 스스로를 녹림 유일협객이라 자찬하는 자이나, 하는 짓이 다른 산적두목과 다르지 않고. 오만하기로도 평이 자자한 자인데 인품으로야 곽대협의 만분지 일이나 따라가겠는가?"

 나는 미친 돌중의 발을 꾹꾹 눌러 밟았다. 그러다 그 악평자자한 산적두령이 듣기라도 하면 어쩔셈이냐. 응?
 두령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심장이 미친듯 쿵쾅 뛴다! 성큼성큼 걸어온다. 설마 진짜로 들은겐가. 이빨이 딱딱 떨려온다. 
 젊은 두령이 우리앞에 딱 선다.

"너희들은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뭘? 갑자기 뭘 부끄러워 하라는 소리냐.

"네놈들은 오랑캐 놈의 고린전 몇 푼에 이끌려, 천하 오절들의 이름을, 화산 영웅들의 이름을 더럽힌 놈들이다. 찢여 죽여 마땅하다. 한인의 공적이라해도 모자람이 없다."

 준엄하고 거대하며 난데 없다. 천둥같은 헛소리! 완전히 개소리다.
 젠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내가 무얼 했다고 도적의 수괴놈에게 한인의 공적씩이나 되었단 소리를 듣는단 말이냐. 
 갑자기 혼자 여흥이 돋은 것 같기야 하다만, 흥이 돋았으면 오입질을 하건, 오쟁이를 지건 혼자서 해야 할 게 아니냐!
 그러나 어깨죽지가 떨려온다. 등골이 주뼛서고 오줌도 마려워진다.
 아무 말도 못하고 떨고만 있는데, 돌중이 한발 나선다.

"헤헤, 저 또한 오절이니 무엇이니 하는 칭호따위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늘 이곳에 귀한분들이 오신다 하여, 안면이라도 터보고 한 수를 배워볼까 싶었지요. 제 공부에 자신을 가졌으나... 아! 천외천이라... 비루한 중놈의 눈이 오늘에야 개안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십년 공부가 소용없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진한 탄식까지 뱉어낸다. 입이 벌려질 만큼 매끄러운 혓바닥이다. 


"...대인이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칼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대인의 무병장수를 기리며 조용히 독경이나 하고 살까 합니다만..."

 곽자령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돼지 보다 못한 놈. 충의가 뭔지도 모르는, 입만 산 너 땡초의 독경을 내 어디에 쓰겠느냐? 독경은 필요 없다. 지금 네놈을 죽여 버리고 싶으나, 행여 네놈도 불문의 사람이니 세존께서 노하실까 살려두겠다. 그런 줄이나 알거라."

 충의라. 그러는 저는 충의가 뭔지 알아서 도적질을 하는가?

"대인의 대은대덕에 감사드립니다!"

 돌중은 공손히 읍했다.

"너 땡추는 앞으로 남승이라는 이름은 담아선 아니된다. 너같은 개돼지에겐 남저조차 과분하다."

 돌중은 바보라도 된듯 헤헤 웃었다. 양손을 비벼대며 굽신거렸다.

"대인의 말이 옳습니다. 참으로 옳습니다. 남저, 남저 참으로 저는 남저도 과분합니다. 남저로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요."

 비굴함 또한 과분해보였다. 산적들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고, 심지어 산적이 아닌 사람들조차 웃음을 흘렸다. 
 한심한 일이지. 생각하는데, 두령의 손가락이 옆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너 쇠스랑!"

나다! 이번에는 나를 가리킨다.

"쇠스랑! 너는 서독이란 놈이 대체 왜 백타산이 아니라 여기 와 있는게냐?“ 
“나는... 아니, 저는 서독이 아닙니다..”
“그럼 넌 뭐하는 놈이기에 영웅의 별호를 탐한것이냐?"

 억울하다. 내가 탐해서 서독이 된것이냐. 현장이 제 소꿉놀이를 하려고 제멋대로 지껄인게지.
 하지만 입술이 떨려온다. 나는 필사적으로 말한다.

"저는 산에서 화전을 합니다... 제가 왜 여기에 나왔느냐면... 에 제 4대조 어른께서 척가군의 당파수셨고, 조부대 부터 어.. 산에서 화전을 일군 건데, 쇠스랑은 우리 조부 어른께서 쓰시던 것을 재작년에 새로이 벼린 겁니다. 조부님이 쇠스랑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천하무적의 모용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왜냐면 생김새가 당파와 유사하여 공수를 겸장한다고... "

 듣는 두령의 표정이 묘했다. 난 입안이 말랐다.

"왜냐하면 칼은 길이가 삼척이 못되지만 당파의 길이는 육척이 되고 또 가지로 상대의 무기를..." 
"참으로 바보같은 놈이로구나!" 

 두령이 내 말을 끊는다. 못 참겠다는 듯 파하하 폭소를 터뜨린다. 빌어먹을 놈. 대체 뭐가 그리 우스운 거냐. 그만 좀 웃었으면 좋겠다.
 두령의 웃음이 길게 이어진다. 그 웃음은 서서히 산적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이제 천하가 껄껄대는 소리로 쩌렁쩌렁한것 같다. 
 나도 어물거리며 따라 웃었다. 그래야 하는걸 알았다.

"에라이 바보같은 촌놈아, 당파니 뭐니 그런 이야기는 되었다. 되었어. 그래 대체 너 같은 바보는 왜 여기에 왔느냐?"
"...가장 잘 싸우는 사람에게 큰 황소를 준다고 해서... 아시겠지마는 화전이라는 것이 농사가 잘 되지 않아서... 요샌 그 농작물이 말라서 도통... 깻묵이니 잿물이니 모두 써보았지만... 아,아버지는 지력이 다했기 때문이라고.. 땅을 깊게 갈아 엎어야하는데 우리집에는 소가 없다고, 옌장! 송아지라도 있다면 키워라도 보겠다. 그리 말씀 하시던 차에 마침..."

 두령은 더 웃지 않았다. 미끈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작황이니 무엇이니 되었다 되었어. 네놈의 행동이 개같은 짓이나, 뭣도 모르고 행한 촌무지렁이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겠구나. 내 꼴만 우습지."

 이렇게 금방 낯을 바꿀거면 좀전에 그 지랄은 왜 했던 건지.
 아까 잘 싸우던 사내. 고슴도치가 창대를 들더니 우리를 가리킨다. 뭘 하려 그러나 싶어 보니까, 나랑 돌중의 가슴을 쿡쿡 찌른다.
 진짜 좆같은 놈이다.

"형님! 그래 천하오절에 이런 개돼지같은 것들이 숨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 개돼지 놈들에겐 차라리 남저南猪 서구西狗가 어울리겠습니다. 하하!"

 저도 웃고 두령이 웃고... 산적들도 따라 웃는다. 진짜 하나도 안 우스운데, 그게 그리 웃긴가.
 대강 돌아가는 분위기를 봐선 오늘 내 모가지도 붙어는 있을 모양이다.
 과연 두령은 우리에게 흥미를 잃은듯 저편으로 걸어갔다.

"이봐. 이봐. 너, 너 뭐하는거야?"

 한숨이나 쉬면서 멍하니 있는데 도적하나가 내 앞에 선다.

"왜 그러시오?"

 도적이 제 손바닥을 내민다. 뭘 어쩌라는 건지.

"얼른 내놔."
"뭘 말요?"
"전낭을 내라구! 자네 정말 어디 모자란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것 못 봤어?"

 다른 사람들? 주위를 보니까 아닌게 아니라 도적놈들이 돌아다니며 돈을 걷고 있다. 전낭이나 지갑을 걷어가는 것은 물론이고, 아낙네의 가락지를 뽑아가는 놈도 있다. 
 참. 생각을 해보면 두령이라는 놈은 나보다 웃긴 놈이다. 조금 전에 협객 놀이, 판관 놀이를 하더니 결국에는 도적놈 본성을 못 숨긴다.
 쨌든 나는 잠자코 전낭을 풀었다. 도적놈은 내 전낭을 열더니,

"뭐야 순 거지같은 놈이 아닌가!"

 하고 팍 인상을 쓴다. '거지같은 놈이 아니었다! 네 덕분에 거지가 된 것이지!' 쏘아 붙여 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돈은 가져가도 전낭은 좀 돌려주시오. 집에 전낭 만들 천도 없단 말이요."

 산적놈들은 사람들을 모았다. 현장과 관리 몇을 한 쪽에,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쪽에 모았다.
꽁꽁 묶어진 현장 소년은 훌쩍훌쩍 울면서 저편으로 끌려갔다. 
 소년은 고 사이에 얻어터진 것인지 다리를 절었다. 흙투성이가 된 관복이 쭉 찢어져서 맨살이 훤히 드러난다. 관모는 어디다 벗어둔 것인지 없다.
 퉁퉁 부운눈에 연신 눈물을 질금거리는 꼴이 영락없는 어린애다.

 그런 우리를 앞에 도적놈들이 장군님처럼 도열한다. 
 그들 앞에 선 두령, 그놈은 꺼내 입었는지, 뺏아 입은겐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까만 모피하나를 어깨위에 척 두른체다. 
 이렇게 보니 도적놈 두령도 아무나 하는건 아니구나 싶다. 옷이 날개라더니 저 놈의 잘난 면상이 더욱 멋있고 행동거지도 임금님처럼 의젓해 뵌다.
 두령이 기세 좋게 외친다.

"형제들!"

 졸자들이 일제히 젊은 두령을 본다.

"오늘의 승리는 내가 한 일이 조금도 없었다. 모두 형제들의 공이었다! 나는 형제들에게 감사한다."

 말한 두령이 읍한다. 함성이 터져나오지 않고 도리어 산적들의 표정이 엄숙해진다. 아닙니다. 모두 대형의 덕입니다. 겸양을 말하는 자도 있다.
 두령이 말을 잇는다.

"오늘 형제들의 노고에, 드디어 옥에 갇힌 형제들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가놈들에게 서간書簡을 보낼 것이다. 감옥에 갇힌 우리 형제를 현장과 교환하자고."

 산적들이 환호한다. 두령은 웃으며 손을 젓는다.

"덤으로 은자도 두둑히 챙겨 달라고 말해 두겠다."

 산적들의 기분좋은 웃음.

"자, 이제 산채로 돌아가, 형제들을 맞을 준비를 하자."
"그럽시다 형님! 큰 잔치를 벌입시다. 일이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신묘한 계획이었습니다!"

 고슴도치가 크게 웃으며 좋아라한다.
 이 때다. 입때 것 보이지도 않던, 서생놈 하나가 산적들 사이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두령앞에 납작 엎드린다.

"...대형,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십시오. 차라리 현장을 때려 죽여 없이느니만 못합니다..."

 엎드린 서생의 등허리가 달달달 떨리고 있다.
 젊은 두령은 이 서생의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허나 곧 표정을 풀며 호탕하니 말한다.

"현장의 집안은 이 일대를 수대 째 꽉 잡고 있는 토호집안이다. 저들 장손이 잡혀있다는데 당연히 우리 형제들을 풀어주지 않겠느냐?"
"풀어주겠지요! 풀어 줄 수도 있지요. 허나 그랬다는 소문이 납니다. 현이 아닌 조정에서... 대병을 풀어 저희를 쫓으면... 차라리 현장놈을 지금 쳐 죽이는만 못하게 되어버립니다!"

시종 즐겁던 두령의 눈가에 노기가 어린다.

"그리되면 거처를 옮기면 될테지. 유주나 병주로 옮기면 될 일 아니겠느냐? 남해가 있고 북해도 있다. 천하가 이렇게 넓은데 우리 형제들이 기거할 곳이 없겠는가? 끝난 일이니 더는 이야기하지 말자꾸나."

 두령은 오른 손을 치켜든다. 새파란 하늘아래 치켜든 주먹이 굳건하다.

"자, 어떤가 형제들!"

 산적들이 와 함성을 내질렀다. 이놈들 쳐 먹었는지 목소리 하나는 썩 크다.
 여태 조용하던 돌중이 모기만한 소리로 속닥거린다.

"...탐관오리를 지키던 사람은 죽이더니... 정작 탐관오리놈은 살려두네..."

 참말이지 이 돌중은 언젠간 저 주둥아리 때문에 경을 칠 날이 올거다.
 이 때다. 멀리 숲속에서 다그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혹시나 관병이 아닐까?'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도적들은 별로 긴장된 낯이 아니었다. 
 관병이 아니었다. 수풀을 헤치며 나타난 것은 아까 말을 타고간 도적들이었다. 
 그놈들의 말 꽁무니에 쭉 뻗은 피투성이 하나가 먼지를 풀풀 일으키며 끌려다니고 있었다. 밧줄에 매인 발목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가늘게 눈을 떴다. 쥐 같은 얼굴. 쥐 같은 수염, 피에 절긴 했지만 본시 희었을 장포자락.
 중신통이 맞았다.

"오오, 그놈을 잡았구나!"

 두령이 반가운듯 양팔을 벌렸다.

"대형, 이놈이 빠르긴 정말 빨랐습니다."

 말 탄 사내가 씩 웃으며 말에서 내렸다.

"이놈 몸놀림도 제법 신통하긴 하였습니다만 진짜 중신통에는 절반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중신통을 보았다. 그는 이미 인간이라기보다 시체에 가까워 보였다. 이따금 가슴이 들썩거리는 것을 보아 살아 있지만 살기에는 그른 듯 싶다.
 산적들은 피투성이가 된 중신통을 밧줄로 칭칭 묶더니 현장옆에 무릎꿇렸다.
 중신통은 모로 다시 쓰러졌다. 산적들은 중신통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중신통은 몸은커녕 피가 뚝뚝흐르는 자기 머리도 가누지 못했다. 픽픽 쓰러지며 숨넘어가는 소리만 냈다. 산적들은 쓰러진 중신통을 때리고 침을 뱉었다.
 두령은 재미난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 광경을 느긋하게 보더니 우리를 불렀다.

"여봐, 남저南猪! 서구西狗! 일어서라!"
"예,예."

 우리는 주춤주춤 섰다. 돌중이 양손을 비볐다. 나도 연방 머리를 조아렸다. 
 두령이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에 진정한 사내가 있었다. 너희 둘은 저 사내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두어라."

 이는 북협을 이르는 것이다.





 내가 다리를, 돌중이 어깨를 잡았다. 우리는 낑낑거리며 시체를 들고갔다. 
 돌중이 투덜댔다.

"제미랄, 무겁긴 왜 이리 무겁나?"
"...키가 크니까."

 그럭저럭 볕이 드는 곳에 포두를 내려놓는데 문제가 있다. 땅을 파야하는데 삽이 없다. 
 어쩔 수 없다. 손으로 판다. 자갈많은 땅을 파는 일이 무척 더디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됐소. 도적놈들 이제 슬슬 가려는 모양이오."

 문득 돌중이 말한다. 슬쩍 돌아보니, 과연 산적들은 빠져나가는 모양새다.

"소도 끌고 가는군. 시주에겐 아깝게 되었소."

 나는 멀어지는 황소를 보았다. 그 말 대로다. 도적 한 놈이 코뚜레를 잡고 소를 끌고 간다. 
 슬픈 일이다. 
 저 잘생긴 황소가. 화전쯤은 몇 마지기고 갈아엎을 기운찬 놈이, 기껏해야 오늘 도적떼의 저녁식사거리가 되는 것은 진실로 슬픈 일이다.

"저! 저 죽일 놈들!"

 내가 말했다.

"왜 그러시오 시주?"
"내 쇠스랑! 저 죽일 놈들이 내 쇠스랑을 들고가요! 세상에 가져갈 것이 없어서."

 돌중은 허 웃었다. 나는 돌중을 쏘아보았다. 망할 놈. 남은 슬픈데 자기일이 아니라고 웃을건 뭐냐. 

"헌데요. 시주." 

 돌중놈은 밭은 숨을 쉬며 두더지 같은 머리를 긁었다. 포두의 시체를 가리켰다.

"왜 그러오?"
"칼. 이 칼이 말이요. 포두 목에 꽂힌 이 칼이요. 이거 꽤나 좋은 칼이요. 척 봐도 비싼 칼이란 말이지. 지금 어디 숨겨놨다가 나중에 팔면은 소값은 못되어도 송아지 값은 될거요."

 턱없는 소리! 나는 돌중을 노려보았다. 

"무인이잖소. 칼이랑 같이 가게 해 줍시다."
"제미... 하긴 것 두 그렇지."

 나는 얼른 일어났다. 죽은 포두의 어깨를 한발 밟았다. 양손에 힘주어 칼을 뽑았다. 피가 뭍은걸 대충 풀잎으로 닦고 칼집에 꽂아 준다. 썩을 땡추놈이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할까 무서워서다. 
 그러고 몇 번 땅을 더 팟을까, 돌중이 말했다.

"이만하면 되었소. 딸이 있다니 나중에 다시 상을 치러야 할 것인데, 깊게 파면 오히려 문제야. 그만 덮읍시다."

 그럴싸한 소리기도 하고, 몸이 너무 힘들기도 해서 나는 납득한다.
 흙과 자갈, 나뭇잎만으로 이뤄진 뗏장을 포두의 몸에 덮는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을 계속 보기가 좀 그래서 얼굴부터 덮었다.
 다 덮다 말고 돌중이 주섬주섬 일어선다.

"시주는 계속 하고 계시오. 나는 다른 일 좀 해야겠소."

 이 와중에 저는 딴짓을 하겠단 말인가. 왈칵 속이 끓는다. 뗏장이고 뭐고 관두고 일어선다. 이번에야 말로 이 얄미운 땡추의 턱을 한방 돌려 놓으려했건만.

"마하반야아 바라밀다아 심겨어어엉. 과아안,자재에에 보사아아을..."

 돌중 놈. 독경을 한다. 언제 꺼내든 것인지, 목탁도 탁탁탁 두드리고 있다. 허긴, 장례에 독경 쯤은 있어야 되는 법이지.
 살아생전 절간 한번 밟아보지 않은 땡초같더니, 썩 잘 두드린다. 소리에 맞춰 구성진 가락을 쏟아낼 줄도 안다.
 나는 천천히 뗏장 덮는 일을 마무리한다. 발끝까지 거진 다 덮었을 때다.

"옛다. 독경값이다. 대형께 감사 인사 드려라."

 도적의 졸자 하나가 뛰어오더니 뭔가 던졌다. 돌중이 집어들었다. 손바닥 위에 반짝 빛나는 게, 에게 겨우 동전 한문이다. 돌중은 말없이 한문의 동전을 내려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헤헤헤 감사합니다요."

 도적은 이미 없었다. 무리의 꽁무니를 쫒아 달려가고 있었다. 훅훅 뜨거운 바람이 먼데서 불어왔다. 뙤약볕이 덥게 느껴진다. 
 돌중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부르르 몸을 떨면서 사라져가는 산적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돌중을 보기가 미안스러워져 황소와 쇠스랑을 생각해보았다.

"이보시오 서독."

 상념을 부수는 돌중의 목소리다. 그나저나 서독. 서독이라니! 이 와중에 사람을 놀리긴가?
 죽일듯한 얼굴로 노려봐준다.

"뭐어. 농담이요. 농담."

 돌중이 너스레를 떤다.

"니미럴 세상. 천하오절이니 영웅이니 하는 것이 어딨소? 개소리지. 요즘 세상에 천지에 그런것 없다. 덧 없어. 다아 쓸데없어. 제미... 그런게 어딨어."

 질린듯 머리를 내젓는 돌중이다. 
 맞는 말이다. 중신통조차 도적 몇놈을 당하지 못해 피투성이가 되버리는 세상이 아닌가.
 물론 가장 강한건 북협이었다지만.

"시주. 우리도 돌아갑시다. 어디가서 술이나 한잔 합시다."

 술! 이 말이 반갑다. 술 생각은 나도 간절한 바다. 독한 백주를 꽉 채워서 마시고 싶다.

"그럽시다. 헌데..."

 나는 빈 전낭을 생각해본다.

"스님은 돈이 있소? 아까 스님 바랑도 다 털리는걸 봤는데?"
"그게 말이지... 음..."

 갑자기 돌중이 말을 끈다. 글쎄, 요 미꾸라지 같던 놈이 슬슬 시선을 피한다. 
 수상하다.

"죽은 북협말이오, 그 포두 말인데... 아까 묻을 때 보니까, 전낭에 돈이 좀 많았어. 도적놈들도 그 돈은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야. 노모가 죽고 딸은 시집을 보냈다더니, 돈을 쓸데가 없었나봐. 품 안에 은자가 닷냥이나 있던 걸."

 이 말.

 이 말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언제, 언제...? 기어이... 기어이! 훔치셨구려!"

 울컥 돌중의 멱살을 잡았다. 누더기 같은 가사장삼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화가난다. 심장이 입밖으로 나올 것 같다. 당장이라도 이 돌중 놈을 땅에 내동댕이 치고 싶다!
 그러나 돌중은 태연히 말한다. 

"무얼, 우리가 장례는 다 치뤄준 셈인데... 거기에 독경까지 해줬으니 되었지. 고인도 고마워 할거요. 그나저나 은자 닷냥이면, 술한잔 하구두 시주가 송아지를 살 돈이 남을걸. 쇠스랑도 크고 좋은 걸로 하나 사구. 황소값에는 턱도 없지만서두 그래도..."

 뻔뻔한 소리! 내 핑계를 대다니!
 눈앞이 보이지도 않는다. 이번에야 땅딸막한 몸뚱이를 든다. 번쩍 들어서 바닥에 메다꽂는다!

"빌어먹을 땡중아! ...기어이... 기어이! 이 개돼지만도 못한 땡초! 중놈 주제에 술을 쳐 먹는 놈아! 이 빌어먹을 놈아!!"

  돌중은 흙투성이가 된 얼굴을 닦지도 않고 허허 힘없이 웃는다. 
  그 낯짝을 보며 나는 화를 낼 기운이 없어지는걸 느낀다.
  주저 앉는다. 깊은 탈력감에 온몸이 무너져 내려 앉는다.

"자,자 시주 기운차리고 술이나 마시러 갑시다. 오늘은 우리에겐 너무 힘든 날이었잖소. 응? 오늘 같은날 이 남저가 시주랑 술을 마셔야지. 아니면 이 땡추가 뉘와 한잔 꺽을꼬... 응? 자네 송아지도 사야할게 아닌가?"

 돌중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타이른다. 

"시주와 내가 간난신고를 함께 했으니 돈도 시주와 함께 다 써버려야지 않겠소."

 우습게도 이때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눈앞의 돌중은 시체의 전낭을 뒤지고, 닷 근 무게도 되지 않는 왜도의 무게를 열배나 튀기던 놈이었으니까. 
 생각을 해봐라. 닷근 무게를 마흔근으로 불릴 줄 아는 놈이, 그 반대라고 하는 법을 왜 모르겠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포두의 몸에 있던 눈먼 은자가 두세 개 더, 열개라도 더 있다는 법이 왜 없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일이 이 지경으로 미쳐가는데 돌중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게 멍청한 일이지. 내가 좀 어리숙한 편이긴 하지만 그쯤 셈할 줄 알거든.

"갑시다. 안갈거요?"

 그러나 돌중은 따질 틈도 주지 않고, 휘척휘척 걸어간다. 
 빌어먹을... 하기야...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랴!
 나도 일어선다. 돌중의 뒤를 따라 걷는다.

"...예나 지금이나 북협이 최고로군. 개돼지들 보담은 그래도 북협이 훌륭해."

 가만히 읇조려도 본다. 
 돌연 돌중이 돌아 본다. 참말로 이상한 표정. 그냥 내가 알지 못하던 버릇인지, 아니면 내 말이 우스운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저도 나만큼 처량하고 눈이 매운지. 한참동안 코를 씰룩씰룩, 씰룩씰룩씰룩거린다.

 내 등을 세게 탁 친다.

"아암 그렇지!"

 웃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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