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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죽음을 두려워하다

2012.12.25 01:5012.25

우리의 삶은 강이다
죽음이라는 저 바다로 흘러드는.
귀인들도 곧장 그곳으로 가서,
힘이 빠져 숨을 거둔다...

-만리케의 노래


  일찍이 대궁정에서 연금술과 비전학에 대한 깊은 조예와 신비스러운 지식을 시연해 보임으로써 신사 숙녀 분들의 흥미를 끈 바 있는 <마술사 남작>은 지난 모월 모일 파문선고장을 든 이단 심문관들이 들이닥치기 전 왕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이후 <운하 도시>에서 남작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은 것으로 보아 불경한 신교도들이 묵인하고 있는 자연주의자들의 <대학>에 몸을 위탁했으리라는 추측이 떠돌았다.
  한편 한 때 국왕 폐하께 여러 가지 흥미로운 연금술적 장난감을 진상하여 총애를 얻은 바 있는 <마술사 남작>이 어떻게 파문 선고를 받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그보다 더 모호한 추측들만 무성했는데, 그가 선보이는 재주들은 비록 경이로울지 몰라도 경건한 신자들-주여 우리 영혼을 보우하소서-은 그 아래 깔려 있는 자연과 그를 창조하신 우리 주님에 대한 모독적 태도에 몸을 떨었고 소위 ‘시연회’ 도중 몇몇 심약한 귀부인들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어떤 끔찍한 감정에 빠져 실신하는 소동도 곧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궁정의 소식통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왜 그가 파문당했느냐가 아니라 왕가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파문을 강행하여 남작을 종교재판에 회부하려 했는가 였다. 궁중의 비밀스러운 암투는 이따금 이와 같이 겉보기만으로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의 형태로 수면 위로 떠올랐기에 국왕 폐하의 총애와 부귀영화를 구하려는 무리들은 어떻게든 이런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애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마술사 남작>이 미처 챙길 틈도 없이 달아나느라 실험실에 남아있을 수집품들과 연구 자료였다. 남작의 수집품은 이미 전설적이어서, 그가 귀국한 직후 공개했던 작은 동물원은 너무 큰 인파를 몰리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동양적이고 이교도적인 전시물들이 군중을 불안에 떨게 해서 시장의 정중한 권고를 받아들여 더 이상 일반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한 바 있다. 단지 호사가 뿐 아니라 아무리 경건한 교인이라 해도 그가 수집한 보석 표본이나 광맥을 표시한 지질학 지도, 젊음을 가져다준다는 비약, 이성의 주목을 끄는 향수와 같은 물건들에 관심이 동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남작은 저 불경한 자연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고 ‘대학’에 그가 쓴 논문이 소장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무튼 <마술사 남작>은 신비학의 대가이자 그런 부류의 물건들이 거래되는 암시장의 큰 손으로 유명했고, 그의 감식안과 박식함이 재산과 명성에 더해져 그의 수집품들은 진짜라는 보증이 붙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럴싸한 가짜를 팔아넘겨 보려던 사기꾼 일당이 톡톡히 그 값을 치르고 시궁창에 얼굴부터 거꾸로 처박힌 채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벌써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누구누구 백작이나 무슨 무슨 공들이 저마다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목적으로 남작의 수집품을 조금이라도 빼돌리기 위해 경비병들의 특출난 신앙심을 시험에 들게 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뿐 아니라 국왕 폐하의 신사들(저자 주 : 국왕의 명령에만 따라 움직이는 비밀요원들을 통칭하는 말)도 남작의 수집품 목록을 입수하고 비밀리에 활동에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으니 이 사건이 얼마나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소동에도 불구하고 종교 재판소는 당초의 결정을 고수하고 모든 수집품은 증거로 압수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한동안 암시장에서는 남작의 수집품 중 하나였다는 꼬리표가 달린 물품이 급증하며 더 큰 혼란이 벌어졌다. 물론 그 가운데 대부분이 가짜였기 때문에 여러 신사 분들이 드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서두르다가 큰돈을 고스란히 날렸다는 이야기들이 쉬쉬하는 가운데서도 여기저기 한담거리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유출된 것이라고 주장되는 물품 중 분명히 진품인 것도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다름 아닌 그 유명한 <라이덴병의 소인간>이었다.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성질을 지닌 전기력을 붙잡아 모았다가 손을 대면 전기 충격을 주어 구경꾼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털을 곤두서게 만드는 라이덴병은 한 때 자연주의자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전기력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미 대중적으로도 상당히 알려진 바 있다. 한편, 소인간은 생명력의 화학적 기원을 찾는 연금술의 비원으로 말똥과 정액을 수은을 비롯한 이런저런 연금술적 재료들과 섞어 만들었다고 하는 못생긴 난쟁이 형상의 물건인데 실제로 그것이 살아나게 했다는 이야기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남작의 소인간은 비단 연금술 뿐 아니라 최근 진일보한 전기력과 자기장에 대한 지식을 응용해서 만들어졌다.
  외견상 <라이덴병의 소인간>은 일반적인 라이덴병처럼 밀봉된 유리병 끝에 쇠고리가 불쑥 튀어나와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 내부에는 소금을 비롯한-자연주의자들은 소금이 만물이 생명을 주는 원소라고 주장했으며, 그 근거로 불경스럽게도 ‘빛과 소금’을 언급했다- 모종의 연금술적 성분이 함유된 액체가 가득 차 있고 그 한 가운데 바로 그 ‘소인간’이 매달려 있다. 이 소인간은 쇠고리와 연결된 금속제 뼈대와 신경을 유기적인 재료가 감싼 형태로, 그 조제법을 이곳에 일일이 옮기지는 않겠지만 이 분야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독자라면 이미 그 방식은 연금술 연구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그리고 대개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는 사실에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남작은 화학적 반응과 전기력을 융합하는 대담한 시도를 통해 이른바 유사-생명 반응에 근접한 성과를 거두는 쾌거를 올린 바 있다.
  당시 시연회의 주제는 전기력과 생체 전기의 관계였는데, 남작은 자신의 소인간을 꺼내기 전에 먼저 처음 발견되었을 때 꽤나 물의를 일으킨 바 있던, 절단된 개구리 다리의 근육을 전기력으로 꿈틀거리게 만드는 실험을 선보였다. 비록 비위가 약한 신사 숙녀들은 일찌감치 퇴장했으나 이 실험에 관한 소문은 사교계에 상당히 퍼져 있었으므로 호기심이 강한 신사 분들은 직접 전극을 대고 개구리 다리가 몸을 찾아 버둥대기라도 하듯이 펄떡거리는 광경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 다음 남작은 웃으면서, 특유의 놀라울 것이 없다는 듯 한 말투로 다음 실험을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신뢰할 만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전에 생명력이라고 불리던 현상은 생체전기로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전능하신 주님께서 아담을 빚으실 때 그 코에 숨결을 불어넣으신 것이 아니라, 건조한 날씨에 마른 가죽을 비볐을 때 따닥거리는 정전기 같은 전기력을 손끝에 대서 전도시켰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물론 전기학은 최근에 발전되는 중의 학문이라, 아직은 생체전기처럼 섬세한 것보다는 번개의 힘이나 혹은 저 시끄러운 증기 기관을 대신할 동력처럼 그 강력한 힘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체 전기 역시 전기적인 현상인 만큼, 전기학적 면에서 생리학에 접근하는 것으로 우리가 생명 반응의 비밀에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발언에 생명은 전능하신 주님의 영역이라는 점을 들어 불경하다고 항의하며 퇴장한 몇몇 경건한 신사 분들 때문에 약간의 소동이 일었다. 남작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육신인 질료와 영혼인 본질이고, 생명 현상으로 그 둘을 결합하심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생명 현상을 모사하려는 유사-생명 반응이 불경하다는 주장은 마치 성냥으로 불을 켠 다음 자신이 불을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반박하였다. 이 논쟁 후 몇몇 신사들이 더 퇴장하고, 가장 대담한(용기는 분명 교인의 덕목이므로 단지 불경하다고만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신사 분들만이 남아 그 다음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남작은 미리 화학전지들로 충전시켜두었던 다른 라이덴병들을 가져왔고 엄숙하게 병을 기울여 <라이덴병의 소인간>의 쇠고리에 접촉해서 대전시켰다. 두 쇠고리 사이에서 튄 불꽃은 흡사 생명력이 전달되는 것처럼 보였다. 목격자들은 대전이 일어나는 순간부터 소인간이 움직임을 보였다고 단언했다. 덩어리 같은 형상의 소인간은 그 뭉툭한 사지를 연금술 액체 속에서 움직이고 버둥댔으며 분명히 생명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참가자들은 숨조차 죽이고 이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 직후에 가장 용감한 신자라 해도 깜짝 놀라 뒤로 주저앉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라이덴병의 소인간>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소리는 지상 위를 거닌 적이 있는 어떤 생물의 목소리와도 닮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러 작가들이 문학적 재능에 의지해 묘사한 바 있는 지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이 최후의 심판이 어서 닥쳐오기를 갈구하는-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목소리도 아니었으나, 모든 참석자들은 그것이 작디작은 소인간이 공포에 질려 내지르는 비명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소리를 비명이라고 생각하니, 짤막한 사지를 버둥거리는 것도 목전에 당도한 파멸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온 몸을 뒤흔들어대는 것처럼 보였다.
  할 말을 잊은 채 해쓱해진 참석자들의 표정을 보고 남작은 장갑을 벗어 손가락을 라이덴병의 쇠고리에 가져다 댔다. 파직 소리와 함께 방전이 일어나자 소인간의 움직임이 멈추고 비명소리도 뚝 그쳐 버렸다. 남작은 손끝을 문지르고 장갑을 다시 끼면서 너무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서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했다. 물론 모든 신사 분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 교인다운 태도로 너그럽게 남작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러고 방금 본 일이 도대체 무슨 현상이냐고 묻자, 남작은 평소에 비하면 약간은 난처해 보이는 태도로 설명했다.
  “제가 만든 소인간은 본질인 영혼이 없이 오직 질료만으로 만들어졌고, 거기에 전기력을 이용해서 유사-생명 반응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소인간은 완전히 방전되어 유사-생명 반응이 사라질 때까지 비명을 지르고 몸을 뒤틀어대지요. 이 현상을 관찰하고 나서, 저는 지금보다 더 젊고 무모했던 시절 동방 여행을 떠났을 때 인도에서 마주쳤던 한 종교의 교리가 떠올랐습니다. 그 교리에 따르면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에 집착하게 되고, 그로 인한 공포로 몸부림치면서도 그 모든 것이 생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종교를 창시한 성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일깨우고, 집착을 끊어버려 고통도 두려움도 없는 평온에 이르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더군요.
  이 소인간도 전기력을 얻고 화학적 성분과 유사-생명 반응을 일으켜 살아났을 때, 그 미약한 이성은 유리병 안에 갇힌 자신의 짧은 생이 공기 중으로 차츰 방전되는 전기력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완전히 전기력이 사라져서 유사-생명 반응이 끊어질-말하자면 ‘죽을’-때까지, 죽음이 닥쳐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지요. 아마 화학반응만으로 만들었다면 그렇게 빠르게 생명력이 떨어지지 않을 테니 그처럼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너무 이단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참가자가 억지로 입을 열어 어색하게 침묵을 깼다.
  “생 자체가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면, 어떻게 평온에 이른단 말입니까? 그 종교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기라도 하는 건가요?”
  “저 역시 그 종교의 승려를 만났을 때 비슷한 질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승려의 말에 따르면 생에 대한 집착을 놓고 죽음이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더군요. 이 소인간도 자신의 유사-생명 반응이 금방 끝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그런 깨달음을 얻기에는 이성의 용량은 제한적이고 대전되어 있는 시간은 너무 짧기 때문에 그 짧은 생 역시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겠지요.”

  사실 남작의 불경스러움에 관한 일화는 이 한가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물품으로 인해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없어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섬뜩한 물건은 진짜인지 아닌지 너무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고 게다가 단지 발상이 문제였을 뿐 어느 정도 연금술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있다면 제작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 복제품들이 거래되기 시작했다. <라이덴병의 소인간>에 담긴 이단적 의미를 좌시할 수 없었던 종교 재판소는 또다시 이단 심문관들을 파견했고, 약사 몇 사람이 기소되어 화형당한 후에야 남작의 소인간이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일은 사라졌다. 그러나 물건이 이미 많이 풀려버린 만큼 ‘살아나면 죽음이 두려워 비명을 지르는 난쟁이’에 대한 소문은 일반 대중 사이에도 널리 퍼졌고 대중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가슴 아파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그 넓은 지식으로 마그누스(大)라는 칭호를 받은 알베르투스 주교였다. 그는 대중들 사이에서는, 진흙인형의 이마에 어떤 문자를 새겨 넣어 생을 부여해서 조수로 부리고 그 문자를 지워서 도로 진흙으로 돌려놓았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연금술 뿐 아니라 신비학, 비전학, 천문, 점성술, 고대 문자 등에도 밝았기 때문에 종교 재판소의 젊은 신참들은 그를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이단 심문회의 주교들은 종종 그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흔들림 없는 신앙심은 잘 알고 있었기에 함부로 비판하지 않았다.
  주교는 그 시연회 자리에도 있었거니와, 남작과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고 생명 현상의 본질에 대해서도 깊은 토론을 벌이곤 하였다. 주교는 비록 남작이 지금은 교인들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의 본질은 선하며 그 그칠 수 없는 탐구심은 결국 교회와 국왕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한 주교는 궁정의 소식통들이 알지 못하는 교회 내부의 더 깊숙한 속사정도 알고 있었는데, 겨울이 다가오며 노교황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며 추기경단 내에 인 다음 교황을 추대하기 위한 움직임이 남작의 파문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각 파벌들은 저마다 자신의 말들을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 가운데 원론적인 교리로 회귀하자는 수도회 출신의 급진파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좌충우돌 날뛰는 것에서 파벌들과 그와 연결된 왕국들도 나름대로 얻을 것이 있었으므로 종교 재판소의 화형대가 불타오르지 않는 날이 없는 것을 방관했다. 남작의 이단 판정은 이 급진파가 부상하면서 남발하기 시작한 이단 판정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주교 역시 급진파의 공격이 자신과 같은 상대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주교들에게도 밀어닥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단순히 안타까워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주교는 비밀리에 그의 신앙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추기경을 방문하여 조언을 구했다. 두 사람은 주위를 물리치고 빛이 내리쪼이는 성당의 안뜰을 천천히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주교님이 저를 방문하신 이유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주교님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교님은 지금 이단적인 학문에 지나치게 가까이 갔다고- 그래서 공격받을 만한 여지를 스스로 초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주교님은 이미 자연주의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주교회의 안에서 유명합니다. 게다가 이번의 소인간으로 소동을 일으킨 남작과 교분이 있는 것을 문제 삼는 분들도 많구요.”
  “추기경님, 저는 단지 우리 주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본떠 아담을 지으실 때 말씀이신 지혜 역시 우리 안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우리를 자동인형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지으신 세상의 경이를 알아보고 구석구석에서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진정 찬양받으실 분이 누구인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지으셨다고 믿습니다.
  이성이 없는 동물들은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행동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타고난 대로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주님께서 그 눈을 밝게 해 주셨기 때문에, 새의 날개가 바람을 가득 받을 때 부풀어 오르는 앞가슴 뼈의 형상에 주님께서 창조하신 경이가 깃든 것을 볼 수 있고, 헤엄치는 물고기의 겹겹이 겹친 비늘이 그 어떤 조선공의 솜씨보다 더 훌륭하게 물살을 가르고 나가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저는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계획하신 광대하고 위대한 조화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주님을 찬양하며, 또한 우리가 그 조화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이해하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지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좋은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주교님께서는 자연주의자들, 혹은 그 남작이 보이는 불경스러운 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단 심문회는 남작이 그의 소인간에 대해서 이단적인 해석을 덧붙였다는 신뢰할 만한 증언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습니다.”
  “일부 자연주의자들의 언동이 경건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경이에 압도당한 나머지 그 광경을 볼 수 있도록 눈시울을 열어주신 분을 찬양하는 것을 잊은 것뿐입니다. 이성은 주님께서 예비해주신 불빛과 같고, 우리는 그 불빛으로 무지라는 암흑을 몰아냅니다. 길을 더듬어 찾다가 마침께 그 길이 주님께 이른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주님의 은혜가 우리와 계속 함께 해왔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불은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불을 잘못 다루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만으로 ‘보라, 이것은 위험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불을 모두 꺼 버리고 암흑 속을 걸어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주님의 은혜가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추기경님께서 힘써주셔서 주교회의의 다른 형제분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제가 부족한 솜씨로나마 이성을 우리 주님을 증거하고 찬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주교님의 지식이 다방면에 걸쳐 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니, 다른 분들을 설득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군요. 하지만 어떻게 이성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화공이 모든 솜씨를 다해 주님의 영광을 증거하는 벽화를 그리고, 음악가들이 모든 솜씨를 다해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저는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조화가 더 큰 조화를 드러내는데 쓰이는 것을 보이고자 합니다.
저 역시 소인간이나 자동인형과 같은 유사-생명 반응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예가 있고, 남작과 여러 차례 토론을 벌인 바 있습니다. 저는 남작의 소인간이 그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질린 이유는 그것이 단지 질료인 물질에만 국한되었을 뿐이고 아무 목적도 없이 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제 추기경님께서 지지해 주신다면 저는 정밀한 태엽장치와 톱니바퀴를 이용해서,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하는 행성의 움직임과 천구의 회전을 계산하며 칠층천에 가득 찬 영광을 찬양하는 자동 기계를 제작하려고 합니다. 그 기계 역시 태엽에서 동력을 얻는 유한한 것이겠지만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만큼 더 높은 것에 대한 열망이 그 기계의 한정된 이성을 채울 것이고 두려움이 아닌 기쁨에 차서 자신의 책무를 다할 것입니다.
  그에 더하여, 일반 대중 역시 그 모습을 보고 사람의 솜씨로 살아있는 것나 다름 없는 것을 만들 수 있다는데 놀라겠지만, 그것이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모습에서 누가 그 솜씨를 지어주셨는지,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간을 지으셨는지를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추기경은 허락했고, 주교는 돌아와서 작업에 착수했다.

  설계를 하는 동안 죄를 씻고 천국에 가기 위해 충분한 후원금이 모여들었고, 가장 뛰어난 기술자들과 장인들이 고용되었으며, 온 교인의 관심이 쏠렸다. 설계가 끝나고 부품이 모두 완성되기 까지는 3년이나 걸렸는데, 그 과정을 일일이 묘사해서 독자 여러분을 지겹게 할 생각은 없다. 그 설계는 너무 복잡했기 때문에 전체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교 본인뿐이었다. 작업 내내 천사가 주교의 귓가에서 영감을 속삭여주어 마치 복음사가들이 복음을 받아 적듯이 도면에 옮겨 그렸으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작업에 참여한 명공들도 자신이 조립한 부분의 작동 원리는 알 수 있었지만 다른 부분과 어떤 식으로 이어지는지는 완전히 알지 못했다.
  이 장치가 작동하는 것을 글로 설명하는 것은 마치 어떤 그림을 글로 설명하려는 것만큼이나 소용없는 일인데, 음악은 오직 연주할 때에만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고 혀끝에서 느껴지는 맛은 그 어떤 것도 사람의 말로 완전히 형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장치가 주님을 찬미하는 방식은 수만 개의 톱니바퀴가 찰칵, 찰칵하고 움직일 때 맞물린 톱니바퀴들이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찰칵, 찰칵하고 움직이며 동력이 지렛대와 도르래 장치와 철사와 무게 추와 회전축에 일제히 전달되면 그 모든 부품들이 윙 울고 파르르 떨고 휙 뒤집히고 팽글팽글 돌고 정해진 각도와 길이만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교가 도면을 그릴 때와 같은 영감이 이 펜 끝에도 와 닿기를 기원하며 그 장치를 묘사하면 다음과 같다.
  사실상 그 장치에서 가장 경이로운 부분은 동력이나 기관구조를 설계하는데 적용된 천재적이면서도 단순한 착상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정밀하고 복잡한 기술들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단지 같은 장인들만 알아볼 수 있기에 생략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면 단순히 기능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시계였고, 그래서 <주교님의 시계>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을 단지 시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최후의 만찬>을 단지 벽화라고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계’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태엽장치 동력부에서 전환된 전기력으로 유사-생명을 얻는 작은 계산 장치로, 주교는 그 부분을 ‘예배실’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 장치가 수행하는 역할을 생각하면 매우 적절한 명칭이었다. 예배실은 자유의지에는 미칠 수 없는 아주 제한된 용량의 이성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전체의 복잡한 기관 구조를 제어하기에 충분했다. 예배실은 동력부의 회전을 응시하면서 매 초가 지나가는 것을 세고 시간의 흐름에 대해 명상하면서, 그에 알맞은 장치들을 경건하게 작동시켰다.
  그 결과 <주교님의 시계>는 단순한 태엽장치만으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작동 양상을 보일 수 있었다. 시계는 그가 인지하는 시간의 흐름을 모든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기에 주교가 말했듯이 ‘행성이 운행하고 천구가 회전하는’ 광경을 나타내고 있었다. 일곱 개의 큰 궁륭이 칠층천을 나타내고, 행성들과 12궁의 별자리들이 실제 운행과 똑같이 천구면을 따라 움직였다. 한쪽에는 은으로 된 달이 차고 이지러지며 모습을 보였고, 다른 한 쪽에는 금으로 된 해가 동지부터 하지까지의 일출 지점에서 떠올라 칠층천을 가로질러 움직였다. 이에 따라 지상 세계를 묘사한 기반부는 계절들의 변화를 반영해서 서서히 바뀌었다. 각 요일은 창세기의 일곱 날에 이루어진 창조의 형상을 번갈아 나타내는 것으로 표시했다. 기반부에는 모든 성인의 축일 달력을 따라 해당하는 성인의 일화가 표시되었고, 교회력의 절기에 따라 작은 장식적인 형상들이 나타나 성스러운 신비를 표현했다. 가장 중심부에 늘어선 60개의 작은 천사 상들이 매 초마다 뒤로 돌아섰고, 60초가 지나면 그 원의 밖에 서 있는 천사 상들이 날개를 하나씩 펼쳤으며, 1시간이 지날 때마다 열두 사도들이 나타나고 천사들은 종을 울렸다.
  뿐만 아니라 기계 안에 설치된 공기관과 풀무와 금속판와 망치들을 작동시키면 시간과 절기에 따라 예배실의 작은 이성이 기억하고 있는 제각기 다른 성가들을 연주할 수 있었다. 오르골 장인들이 이 모든 악보를 일일이 금속통과 원반으로 만들려고 했다면 아마도 이 기능만을 위해서도 장치는 교회 전면을 덮는 파이프 오르간보다 더 커져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배실은 모든 성인의 통공과 축일이 갖는 의미를 명상하고 그로부터 솟아오르는 순수한 기쁨을 바탕으로 기억을 되살려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많은 기록 장치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장치 전면부의 모든 형상들이 예배실로부터 동력을 조금씩 얻어 움직였기 때문에, 예컨대 칠층천의 별들은 천천히 회전하고 지상의 잎사귀들은 손짓하고 앞뒤로 움직이는 물살 사이의 물고기들은 꼬리를 흔들어서 그 전체가 조화롭게 움직이며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작은 세상처럼 보였다. 이 모든 것을 태엽장치와 톱니바퀴만으로 구현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일이었지만, 유사-생명 반응으로 태어난 작은 이성이 각 기능을 조율하고 감독함으로써 구조를 획기적으로 간략화하고 음악을 연주하듯 복잡한 제어를 달성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거대한 작품은 한 미사에서 성령의 은사를 받고 크게 감동한 선왕이 후사한 기부금-그의 영혼이 천국에 들기를-으로 건설된 왕도의 대성당 정면에 설치되었다. 마침내 그 기계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이 작동하는 광경을 보기 위해 교인 세계의 사방으로부터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국왕 폐하와 귀족들, 대공들, 귀부인들 역시 주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경이를 목격하고 증거하기 위해 참석해서 이 광경에 한층 더 은총을 더했다.
  광장에 연단이 설치하여, 장치를 공개하고 축복한 뒤 특별 미사를 거행하는 순서로 식이 진행되었다. 운집한 군중들은 기대에 차서 올려다보았고, 마침내 천이 풀리고 주교의 역작이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탄성을 질렀다. 그것이 움직이는 광경은 흡사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것과 같았고, 너무도 진짜 같아서 세상 전체가 그 안에 압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많은 숙녀 분들이 감격으로 실신하고 수도 없이 많은 향수병들이 코 밑에 대어지고 수도 없이 많은 신사 분들이 수도 없이 많은 손수건을 건넸으며 아마 그 중에서는 틀림없이 수도 없이 많은 비밀스러운 손길도 오갔을 것이다. 감동한 군중들의 눈에는 매 초마다 변화하는 거대한 장치와 그 앞에서 진행되는 미사가 마치 천상의 것처럼 보였다. 한편 이 걸작품을 완성한 주교 역시 감동에 차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지으신 인간 이성이 이룩해낼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고 신앙과 이성이 화합하는 증표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여기에서 멈추어 섰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시간은 어떤 장애물도 허락지 않고 무심하게 거침없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기에 그 다음 순간 벌어진 사건은 어떻게 해서도 피해갈 수 없다. 비극의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었고 그 모두 인간의 이성으로 예측할 수 있는 한도를 벗어나 있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각 기계 장치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사건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거침없이 불어났고 마침내 전체를 재앙으로 몰고 갔다.
  계속된 노고에 지친 나사공이 깜빡 조는 바람에 기운 나사가 휘어져버렸다. 금을 탐낸 장인이 일부를 빼돌리고 섞어 넣은 다른 재료 때문에 경도가 달라진 부품이 뒤틀렸다. 반대파의 누군가가 하급 기술자에게 금화를 듬뿍 쥐어주며 톱니바퀴 하나에 쐐기를 괴어 넣으라고 사주했다. 정확한 전체 설계를 알지 못한 시계공들이 각 부분끼리 조립하는 과정에서 빼먹은 연결쇠가 벌어졌다. 멋 훗날 진공관 계산기에도 마찬가지 재난을 불러일으킬 나방이 기어들어왔다가 회전축에 끼어서 그 부분의 회전 속도가 다른 곳에 비해 약간 느려졌다. 한 도제가 자부심에 가득 찬 나머지 무게 추에 몰래 새겨 넣은 서명 때문에 균형이 미묘하게 깨졌다. 설계 도면을 받아 적던 주교의 귀에 영감을 불어넣던 천사들 중 하나가 잠깐 기침을 하는 바람에 숫자 하나가 잘못되었다. 여기에 쓰지 않은 다른 사건들 역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작은 오차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의 낙숫물에 대성당의 대리석이 부식되었다든가, 지나가는 비둘기가 날갯짓을 했다거나, 먼 지방의 종소리에 농부들이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거나, 등등 그 모든 오차들을 새는 것 역시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모든 원인들이 결합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처음에는 모두 동시에 움직이던 군무들 중의 일부는 아주 약간 느려지고 일부는 아주 약간 빨라졌다. 박자가 어긋나면서 동력 전달부가 지속적인 힘을 받으며 점점 더 불균형이 강해졌다. 처음 설계했을 때와 다른 충격파가 기계 장치 내부를 강타하고 세밀하지만 약한 부품들이 먼저 영향을 받고 제어추들이 망가졌다. 점점 회전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며 부드럽게 찰칵거리던 소리들이 날카로운 소음으로 변해 강론하던 신부를 당황시켰지만, 당황한 것은 아마도 예배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어장치가 파손된 장치 내부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져 그가 감각하는 것처럼 시간이 실제로 흘러간다면 한 사람의 일생은 라이덴병의 소인간이 방전되기 전까지 걸리는 시간에 불과할 지경이었고, 우주 전체가 늙어가는 것도 한순간이었을 터였다.
예배실의 작은 이성은 압도적인 시간의 흐름 앞에서 공포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최후까지 자신이 설계된 목적을 저버리지 않고 오직 기도에 의지하며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다. 종을 울리는 천사들은 종을 마구 연타했고 열두 사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접혔다가 펼쳐졌으며 칠층천과 황도궁이 맹렬하게 돌아갔다. 지상부와 천구의 모두 엄청난 속도로 작동해서 그 모습은 흡사 요한의 묵시가 지상에 풀려난 광경과도 같았다. 그에 더해서 예배실이 두려움을 이기고자 계속 노래했기 때문에 풀무가 공기관에 쉼 없이 공기를 불어넣고 망치가 금속판을 부서져라 두들기며 엄청나게 빠른 성가가 날카로운 소리로 쩡쩡 울렸다. 설계 당시 예상했던 작동 속도를 벗어나며 장치 내부가 부서지는 금속의 파열음이 더해져 혼란을 한층 더 가중시켰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했던지, 어떤 신사 분은 “세상의 모든 시계들에게 최후의 심판이 닥쳐온 것 같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연이은 굉음의 대합창에 놀란 군중들은 사방으로 도망치고 참관하러 왔던 귀인들도 모두 퇴장했기 때문에 미사는 중단되었다. 주교와 시계공들이 기계를 멈추려고 시도했으나, 기계 안은 윙윙대며 날뛰는 날카로운 칼날들의 소용돌이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어서 아무도 동력부까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시계-예배실이 울부짖는 소리가 며칠이나 계속되자 주민들은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기에 폭도로 돌변할 태세였다. 결국 시계공들은 대성당에 장치를 고정하던 접합부를 파괴했고, 마지막까지 소름끼치도록 시끄러운 비명을 질러대던 ‘시계’는 광장의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며 최후의 단말마를 내뱉고 조용해졌다. 그 짧은 생이 끝나기 전까지 시간의 격류에 휩쓸려 무한한 공포에 질렸을 가엾은 예배실의 작은 이성에게 평안이 깃들기를.

  이와 같은 대참사는 교회도 피할 수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되게 했을 뿐 아니라-특히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운 성난 군중들로부터- 입 놀리기 좋아하는 불경한 이들의 표적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인간의 이성으로 설계한 장치로 주님의 영광을 증거하려 했던 주교의 야심찬 기획은 정반대의 효과를 낳고 말았다. 우매한 군중들 사이에서는 “남작이 만들던 주교님이 만들던 살아난 것들은 모두 죽음이 두려워 발버둥치더라”는 모독적인 소문이 흉흉하게 떠돌았다.
  급진파는 부쩍 기세를 얻었고 교회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킨 잘못을 물어 주교를 종교 재판에 소환할 기세였으나, 그들의 짧은 이성 역시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 시계에 대중의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추기경단회의의 봉인이 뜯기고 새로운 후계자가 어부왕의 반지의 주인이 되었다. 파벌들은 합의점을 찾은 데 만족했고 각 왕국들도 제각기 지분을 얻었으므로 더 이상 소동은 필요 없었다. 급진파 주교들은 제각기 조용히 주교회의에 소환되었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여러 갈래이며 어느 산 속의 수도원 혹은 시골의 교구에서 그 열정을 전파하라는 조언을 듣게 되었다.
  이 모든 사건들이 라이덴병이 방전되듯 휙휙 빠르게 지나가는 동안, 주교는 뒤로 물러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안들이 마무리되고 난 후에 주교는 다시 비밀리에 그의 스승을 방문했다. 신성한 안뜰을 거니는 동안 주교도 추기경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면담시간이 끝나기 직전 고요를 깨뜨린 것은 주교였다.
  “추기경님, 허락하신다면 저도 좀 더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주님의 종으로 봉사하고 싶습니다. 짧은 지식이 제 눈을 가렸고, 제 자신의 오만이 제 귓가에서 저를 부추겨 저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사제로써 이와 같은 행동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추기경은 한동안 주교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부드럽게 웃으며 주교의 팔에 손을 얹었다.
  “주교님, 주교님이 얼마나 충실하게 주님께 봉사하고 있는지는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은 이처럼 아름답기에, 거기에 잠시 매혹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지요.”
  “이번 일이 있고서야 저와 자연주의자들이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만드신 분이 아니라 그분이 만드신 것에만 정신이 팔리고, 자기도 솜씨를 부려 모사한 다음 자신이 그 분과 동등해졌다고 의기양양해진 것입니다. 동산의 뱀이 이 열매를 먹으면 지혜를 얻어 주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을 때 덥썩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주교님. 이것은 단순히 주교님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주교님이 그 장치를 제작하겠다고 했을 때 허락한 것은 주교님이 그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있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이성의 빛이 얼마나 짧은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우리 자신의 이성뿐이기에, 겸허하게 자신의 판단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오롯이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이들은 그다지 흔치 않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물었습니다. 한 포기 들국화를 치장하시듯 인간의 이성 또한 주님께서 주신 것에 지나지 않으니, 진정 지혜 있는 이는 영광을 그분께 돌리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동인 것을 압니다.
  자연주의자들은 이성의 빛에 감탄한 나머지, 그 빛이 허락한 거리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금방이라도 훅 꺼져 버리면, 측량할 수 없는 어둠이 그들을 휘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혼비백산할 겁니다. 그들이 이룩한 모든 것이 헛되고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며 이전세대가 기억됨이 없듯 그들 역시 잊히리라는 것을 알고 나면 가련하게도 어둠 속에 무력하게 홀로 남겨진 채 절망에 빠지겠지요.
  그러나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다시 찾는 것을 더욱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어둠 속으로 불을 치켜들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면, 마침내 길 잃은 양을 보듬어 안고 다시 그의 인도로 이끄시겠지요. 그제야 우리들은 그분께서 치켜드신 불 아래에서 우리의 빛은 아무것도 더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쁘게 그분만을 따를 수 있을 겁니다.”
  주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삶을 주신 뒤 죽음을 함께 주시듯 짧은 광휘와 아울러 깊은 어둠 또한 창조하신 주님의 신비가 그를 사로잡아 오싹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기경은 미소 지었고, 주교에게 말했다.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그대의 죄를 사합니다. 형제여, 당신에게 주어진 불빛으로 계속 주님과 교회에게 봉사하도록 하세요.”
  주교는 추기경과 함께 기도문을 암송하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물러났다. 안뜰을 떠나기 전 잠시 돌아보았을 때 내리비치는 빛이 눈을 부시게 해서, 주교는 흡사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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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탄절을 기념하여 약간은 종교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어조로 써 보았습니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확실히 실존 인물이고 민담에서 '마술사 주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제 세례명도 거기서 따왔습니다만 이 글에서 묘사한 내용은 분명 완전히 허구입니다.
  한편 제 종교적 지향을 물으신다면 제가 가장 종교적이었던 기억은 훈련소에서 기독교-천주교-불교 3종교간 협정의 결과로 인한 초코파이-몽쉘통통-오예스의 삼위일체를 영접하고 느꼈던 환희였기 때문에 비록 어렸을 적에 세례를 받긴 했지만 그 부분은 글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
  글을 쓸 수 없게될수록 사소한 착상이 부글거리면서 끓어오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작은 글들이 연달아 생각 아래로 거품을 일으키면서 튀어오르면, 그 느낌들이 모두 이 글처럼 그렇게 대단할 것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쓸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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