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종의 기원

2011.02.10 00:0202.10

그가 좀비가 되었다. 좀비가 된 사람들은 격리되고 있었다. 그 사이 삼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좀비가 되었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그가 기껏해야 삼백 명 안에 들어가야 했을까. 승연은 이제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승연의 눈앞에 있는 건 그다. 그에게 다시 연락이 왔을 때 승연은 나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삼백 명 남짓한 좀비들은 발목에 추적 장치를 단 채 풀려났다. 그 뉴스를 보고 삼십 분 후에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말로 그에게서 연락이 온 걸까. 혹시 나도 좀비가 되진 않을까. 함부로 좀비들과 접촉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좀비들이 폭력적 행동을 하면, 금방 경찰이 출동한다던데. 한참을 망설이던 승연은 집 앞 파출소 바로 옆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조금도 변한 게 없는 듯한 그가 나타났다.

얼굴색이 좀 거무죽죽하고
냄새가 지독하고
목덜미 근처에 핏덩이가 뭉쳐있는 것만 제외하면.

“그 피는 안 없어지는 거야?”
“우어.”

아마, ‘어’라는 뜻이겠지. 그는 묵묵히 눈앞에 있는 커피잔을 내려다봤다. 마시지 않느냐고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이제 그가 먹고 싶은 건 나나 저 점원같은 사람일 것이다. 지금 나와 대화를 나눈 건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시체다. 말을 하고 있지만, 시체다. 그의 발목에 빨간 빛이 반짝이는 발찌가 달려있었다. 우리는 얼떨결에 들어오자마자 출구 쪽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이 카페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문이 반쯤 열렸다가, 그를 보고 다시 닫힌다. 가게에서는 안쪽으로 옮겨달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지만, 점원도 무서워서 다가오질 못하고 있다. 자기들끼리만 한참을 수군거린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쪽 테이블로 걸음을 옮기는데, 걸음은 놀랍도록 느리다. 점원들이 뒷걸음질 쳤다. 사실 승연도 뒷걸음질 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즈어, 스아람, 안 즈압아, 머거요.”

사람은 아니다. 좀비들의 먹이가 되는 건, 유기된 시체들의 살점 조각들이라고 했다. 도로 살아나지 못하도록, 다지고 잘라내서 섞인, 햄버거 스테이크 같은 시체들. 그걸 이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승연도 의문이었다.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도 남자와 고기를 먹지 못했는데. 죽고 나서야 이제 함께 육회라도 먹을 수 있다니. 승연은 잠깐 웃었다. 그러다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대체 좀비랑 같이 뭘 먹는단 말인가. 언제 날 덮쳐올지 모르는 남자가 아니었던가.

그는 승연의 안부를 물었다. 승연은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그가 좀비가 되어 사라지고 나서 승연은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친구들에게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했다. 좀비라니! 승연은 이 슬픔을 전시거리로 놔두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일그러뜨리면서 참 우습다고 했다. 승연은 가만히 그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냉소적이었고, 타인에 대해 따뜻한 남자였다. 그는 죽었는데.

“좀비가 된다는 건, 죽어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거구나.”

그는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전에에도오 그래앴지 무어어…….”

카페에서 나오면서 승연은 남자를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집앞까지 오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 그는 느릿하게 승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물렁하게 부은 듯한 손가락이 느껴졌다. 승연은 손목을 뒤틀어서 살짝 손을 빼냈다.

승연은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시작했다. 온몸에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샤워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승연의 머릿속엔 그 냄새가 남아있었다. 승연은 한참 방을 청소했다.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열정적으로 걸레질을 하다 보니 휴대폰이 울렸다. 그였다.

[나는 잘 들어왔어. 오랜만에 보니까 좋더라. 다음에 또 볼 수 있지?]

글씨들은 냄새도 느릿한 말투도 전해주지 않았다. 승연은 마음이 놓였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연구실에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꽤 전도유망한 문화인류학도였다. 고고학보다는 종교학이나 사회학에 관심이 많았다. 박물관에 취직하기는 힘들어보였지만, 승연은 그런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는 시체였다. 시체에게는 시체에게 걸맞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그는 느릿한 손으로 하수처리장에서 일했고, 쓰레기폐기장에서 일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좀비를 두려워했다. 승연도 마찬가지였다.

귀여운 이미지로 인기 있는 아이돌 멤버가 좀비 공익광고를 찍었다. 요즘 선배가 보이질 않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느릿한 걸음으로 고개를 숙이고 나타난 청년을 보고 반가움에 달려가서 끌어안는다. 어? 냄새가…… 그녀가 손으로 코를 틀어막는 순간, 좀비 청년은 목을 덥썩 물어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주의사항을 읊는다. 지독한 냄새가 난다면 가까이 다가가지 마세요. 걸음이 느리고 목소리가 굼뜬 것도 좀비의 특징입니다. 좀비는 여러분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시체입니다. 현혹되지 마세요.

광고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줄기차게 나왔다. 지하철에서도 전광판에서도, 포스터로도 나왔다. 하지만 좀비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아버지, 딸, 친구, 애인을 보고 끌어안는 사람들은 슬프게도 다시 깨어났다. 몰라서 당하는 걸까. 승연은 의심스러웠다.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냄새는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그들이 좀비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어머니들이 제일 문제였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죽은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가 봉변을 당하는 건 대부분 어머니들이었다. 뉴스를 보면서 승연은 자신이 지나치게 감상적이진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다음에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수갑을 차고 대머리가 되어있었다. 손목에도 발목처럼 똑같이 빨간 불이 반짝였다. 더욱 좋은 성능이라는 그 추적장치였다. 좀비가 위험한 행동을 했을 때는 심박수를 측정해서 가장 인접한 경찰서에 바로 연락이 간다는. 머리도 반짝거렸다. 머리 뒤쪽에 까만색 글씨가 찍혀있었다. 얼핏 주민등록번호처럼 보이는 작은 숫자들.

승연과 그는 또 집 앞 파출소 옆 카페에서 만났다. 승연은 차마 남자친구가 좀비가 되었다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아주 음습한 구석자리에서, 그는 천천히 말했다.

“이일, 으을, 아주우, 마않이, 해.”
“밥은 잘 먹고 다녀?”

말을 뱉어놓고 보니 인간을 갈아서 만들었다던 스테이크가 떠올라서 승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깐 망설였다.

“요즈음…… 바압이…….”

그러다가 다시 웃었다.

“그치마안, 괘앤찮아아.”

승연과 그는 밤 열 시가 될 때까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여전히 지적이었다. 그와 이야기 하는 시간은 두 배 이상 걸렸다. 그는 말이 느렸고, 승연은 참을성이 있는 편이었다. 냄새만 어떻게 된다면 참 좋을 텐데. 그는 헤어지고 나서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또 문자를 보내왔다.

[너랑 만나면 참 좋아. 고마워.]

승연은 가슴이 서늘했다. 여전히 그는 좋은 사람……시체였다.

며칠 후,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승연은 놀라서 핸드백을 떨어뜨렸다. 좀비였다. 좀비는 파란 옷을 입고 승연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승연은 비명을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좀비는 우어어, 신음소리를 내더니 손을 뻗어서, 대걸레를 집어 들었다. 넘어진 승연을 보고는 느릿하게 씩 웃었다. 좀비는 자신의 배를 가리키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안, 자압아 머억어…….”

여자 좀비였다. 오십 대 정도 되어보였다.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승연은 걸어가는 좀비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머리 뒤쪽에 새까만 글씨가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핸드백을 집어들고 휘청거리면서 화장실을 나왔다. 넋이 나가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자 옆자리의 장 대리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무슨 일이야?”
“아…… 화장실에서 좀비가 나왔어요.”
“아.”

껄껄 웃더니 장 대리는 청소 아줌마들이 모두 교체되었다고 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시체들은 정말 일을 잘 했다. 여자 좀비가 남자 화장실에 있어도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탈의실이건 여성 휴게실이건 상관없었다. 그들은 시체였다. 그들에겐 충실하게 말을 따르게 만들 숫자들이 머리에 붙어있었고, 수갑이 손목에 붙어 있었고, 발찌가 발목에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한숨 놓았다. 좀비에게선 지독한 냄새가 났지만, 좀비가 지나간 자리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좀비 둘이 엎드려서 느릿느릿 바닥을 닦고 있을 때, 승연은 또각또각 힐 소리를 내면서 그 옆을 태연히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가도 문득 승연은 그들이 식사로 제공받을 인육 스테이크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잠깐 그의 얼굴과 그의 지독한 냄새가 떠올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건은 벌어졌다.

복사물을 가져가던 장 대리는 발을 헛디뎠고, 종이들이 바닥에 쏟아졌고, 장 대리는 허겁지겁 종이들을 줍다가 손을 베었고, 피가 났고, 옆에 있었지만 아무도 의식하지 않았던 작은 좀비 하나가 장 대리의 손가락으로 달려들었다. 장 대리는 소리를 질렀고, 사람들은 당황해서 뛰어나왔고, 사람들이 112에 전화를 했고, 그러나 아무도 좀비에게 다가서지 못했고, 추적 장치에서는 시끄럽게 경보음이 울렸지만 15분이 지나도록 누구도 출동하지 않았고, 장 대리는 손가락을 물렸고, 사무보조원 서아름 씨가 날카로운 비명을 이 분쯤 질렀고, 좀비는 꿀꺽꿀꺽 장 대리의 손가락 세 개를 먹어치웠고, 그 때 경찰이 왔다.

경찰은 기절한 장 대리와 좀비를 떼어놓았고, 장 대리에게 수갑을 채웠고, 한 사람이 좀비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이 미친 시체년이!”
“바압…… 며치일 째…….”
“말대답이냐?”

경찰은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냈다. 피슈웅, 푸샤앙, 생전 처음 듣는 효과음과 함께 좀비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좀비의 머리가 날아가기 직전, 좀비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 근육이 움직이는 게 너무 느렸기 때문에 승연은 서글픈 눈동자만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승연은 그녀가 언젠가 화장실에서 만났던 좀비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안 잡아먹는다고, 서툴게 말하던 목소리.

“아니, 뭐라고 말하려는 거 같은데, 죽여버리면…….”

한 과장이 나서서 입을 떼자, 경찰은 웃으면서 총을 홰홰 내저었다.

“원래 죽어있었습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죽인 게 아닙니다.”

경찰보다 조금 느리게 의사가 도착했다. 기절한 줄 알았던 장 대리는 죽었다.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는 검진을 받고, 장 대리는 들것에 실려 내려갔다. 장례식은 없을 것이었다. 장 대리는 죽은 채 어딘가에서 숨을 쉴 것이다.

그날, 승연은 그와의 약속을 취소할까 고민했다. 뜯겨나간 장 대리의 손가락과 이름 모를 좀비의 서글픈 눈이 자꾸 왔다 갔다 했다. 버스를 타고 약속장소로 가는 길에도 승연은 계속 고민했다. 끊임없이 속보가 나왔다. 서울시 강서구에서 지나가던 노인이 좀비에게 습격당해, 서울시 성북구에서 지나가던 중학생이 좀비에게 습격당해, 대구시 달서구에서 지나가던 고등학생이 좀비에게 습격당해, 부산시 동래구에서 지나가던 50대 남자가 좀비에게 습격당해, 광주시 북구에서……. 현장에서 녹음된 좀비의 목소리는, 끝까지 들리지 않았다.

바…… 푸샤앙
바아…… 푸샤앙
바아읍…… 푸샤앙
바우압…… 푸샤앙

승연은 낮에 죽었던, 아니 머리가 분쇄당했던 좀비를 떠올렸다. 밥, 며칠째. 틀림없이 좀비는 그렇게 말했다. 승연이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도 버스는 승연을 싣고 끊임없이 달려서, 끝내는 집 앞 파출소 옆 카페에 승연을 내려놓았다. 약속시간이 십 분 지나있었다. 고민하면서 승연은 카페 문을 열었고, 늘 있던 자리에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지 않았다.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승연은 왜 지금까지 집에 가지 않았는지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를 기다리기 위해 두 시간이나 기다리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승연이 커피값을 계산하기 위해 카드를 꺼내들었다. 동시에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카페 안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지독한 냄새가 문제가 아니었다. 승연은 온 몸이 떨렸다. 그에게 다가갔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그가 승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몇 사람들이 뛰쳐나갔다. 누군가 그에게 숟가락을 집어던졌다. 한 남자가 울음을 터뜨린 젊은 여자를 한쪽 팔로 얼싸안고 그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카페 직원 중 한 사람이, 그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고 변명하려고 했지만, 도리어 욕을 얻어먹었다.

“배……고파…….”

그의 얼굴 근육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기 때문에, 승연은 겨우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승연은 그를 부축했다. 살 썩는 냄새와 썩은 피비린내가 같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파출소가 코앞이었다. 다행히 승연의 집도 코앞이었다.
문이 열렸고, 그는 코를 킁킁거렸다.

“오……랜만…… 집…….”

승연의 집이 오랜만이라는 건지, 집이라는 곳에 와 본 게 오랜만이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의 피는 사람 피처럼 새빨갛지 않았다.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 승연은 피가 눌어붙은 옷가지들을 가위로 잘라냈다. 시꺼멓게 덩어리져 흘러내리는 피를 승연이 다 닦아내고 나자, 그는 나지막이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그가 새로 배정받은 곳은 건설현장이었다. 안전장치는 없었다. 떨어져서 다치면, 총탄이 날아왔다. 사흘 째 식사가 누구에게도 지급되지 않았다.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들은 죽을 수 없었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쓰러졌다. 쓰러진 좀비들에게는 총탄이 날아왔다. 그는 일하지 않겠다고 했다. 모두가 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은 일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총탄을 장전하고 전화를 했다. 여분의 좀비가 없었다. 총탄을 쏘아선 안 되었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느릿하게, 그는, 단,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까지 말했을 때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는 걸음이 느렸고, 더 말할 수 없었고, 죽은 사람이었다. 경보장치가 울릴까봐, 맞으면서 그는 머리로 구구단을 외웠다. 구구단을 외우면서 겨우겨우 여기까지, 그는 숨어왔다. 12단까지 외웠다면서 살짝 웃다가,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괜히 그의 손가락 끝을 물 묻힌 수건으로 닦고 있다가, 승연은 가슴 한 구석이 약하게 떨렸다. 승연은 좀비만큼이나 천천히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시체는 따뜻했다.

입사 시험에 떨어졌던 날, 하루 종일 승연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걸어도 승연은 날카롭게 물어뜯었다. 그는 하루 종일 어색하게 웃었다. 바래다주겠다고 집까지 따라온 그는, 현관에서 승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따뜻했다. 승연은 울음을 터뜨렸다. 콧물까지 묻히면서 몇십 분이고 울어댔다. 승연이 울다 지칠 때쯤,

그는 승연에게,
승연은 그에게,
입 맞췄다.

승연의 입술이 시체에 닿는 순간, 심장박동을 기준으로 울린다는 그 경보장치가 울렸다. 삐용, 삐용, 삐용, 날카로운 경보음은 천천히 멀어져갔다. 좀비는 느렸다. 아주 느릿한 그의 혀가 느껴졌다. 그에게서는 여전히 썩은 냄새가 났다. 흔히 키스가 달콤하다고 말하는 건, 실제로 달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승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시체는 심장도 뛰고 피도 흘렀다. 따뜻하고 딱딱한, 그의 중심이 느껴졌다. 승연은 아까 흐르던 그 썩은 핏덩어리가 그의 혈관에 몰리는 걸 떠올렸다. 더 매섭게 경보음이 울렸다. 아주 먼 곳에서.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승연은 그를 쓰다듬었다.

“문 열어, 820208029718!”

그가 몸을 떨었다. 승연은 스웨터를 벗고,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안 엽니다.”

총소리가 내쳐들렸다. 현관문 잠금장치가 부서졌다. 총을 앞세우고 경찰들이 우르르 밀어닥쳤다.

“82,”

꽤 윗사람으로 보이는 경찰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입장했다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820208029718은 비명을 지르면서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승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를 돌아봤다.

“아가씨,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아저씨야말로 제 집에서 뭐하시는 거죠?”
“지금 경보장치가 울렸습니다. 저희는 아가씨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금 상황을 보시면 모르시겠어요? 제 사생활은 보호하지 않으셔도 되나요?”

몇몇 경찰들이 멈칫거리더니 뒷걸음질 쳤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경찰은 승연을 설득하려고 했다. 공익을 위해 그를 데리고 가야 하며, 그는 당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승연은 가택 침입죄로 고발당하고 싶냐고 소리를 높였다. 경찰은 나이 어린 아가씨가 겁도 없다고 승연을 다그쳤다. 승연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옷도 못 입고 있는데 계속 이런 얘길 하고 싶냐고 경찰을 다그쳤다. 경찰은 이런 냄새가 나는데 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고 승연을 비난했다. 승연은 사생활이 이 나라엔 없느냐고 경찰을 비난했다.

경찰은 현관문을 나섰다.

“아가씨, 우린 아가씨를 보호하려고 이러는 겁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우리를 부르세요. 집 밖에 서 있을 테니.”

경찰들이 우르르 나가고, 그는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승연은 다시 그를 끌어안았다.

밤새도록 경찰들은 정말 집 앞에 서 있었고, 종종 집 안까지 심심한 경찰들의 잡담 소리가 들어왔다. 저런 놈이랑 뭘 하고 싶나, 별 희한한 페티시즘도 다 있다니까,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좀비가 있다는 것부터가 이미 이상하지만, 껄껄껄.
경보음은 더 세게, 오랫동안 울렸다. 아무도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동이 트기 직전, 승연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식칼을 꺼내서 허벅지 위쪽을 살짝 베어냈다. 입술 안쪽에서 비릿하게 피 맛이 났다. 그는 허겁지겁 아주 얇고 작은 그 살점 조각을 씹어 삼켰다. 그가 좀비가 된 이후로 본 가장 재빠른 동작이었다.
경찰들이 방으로 다시 뛰어 들어온 건 아침 7시. 그가 승연의 반지하방 창문으로 도망친 지 두 시간이 지난 후였다.

몇몇 좀비들의 추적 장치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건 추적 장치뿐이었다. 절대로 해체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던 추적 장치는 해체된 채 발견되었다. 물론 어떤 추적 장치는 좀비의 뜯겨나간 발목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좀비는 발견되지 않았다. 발견된 열다섯 개의 추적장치 중에는 820208029718의 것도 있었다. 발견된 추적 장치는 열다섯 개였지만, 없어진 좀비는 삼백 여명이었다. 물론 이제 일하는 좀비는 삼천 명이 넘었다. 삼백 명이 그렇게 큰 숫자는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좀비 특별 예산안을 추진했다. 중소기업 살리기 방안의 일환으로 중소기업에 좀비들을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좀비들 덕분에 GDP가 올라가고 수출이 잘 되고 있으며 중소기업들이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연일 들려왔다.

그래도 사람들은 집에 일찍 다녔다. 그게 그렇게 쓸모가 있진 않았다. 직장에서도, 거리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좀비들은 사람들을 덮쳤다. 그런 좀비들은 대체로 아무 말도 못하고 경찰에게 끌려갔지만, 혹여 배고파의 ㅂ이나 밥의 ㅂ이라도 내뱉었다간 바로 총탄이 날아갔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냥 꾸준히 좀비가 늘어날 뿐이었다. 아주 조금씩. 사라진 좀비 삼백 여명의 몽타주와 인식번호가 뿌려졌다.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며 다녔다. 그렇지만 사라진 좀비도 꾸준히 늘어났다.

승연은 저번 달 생리를 건너뛰었다는 걸 오백 여명의 좀비가 사라졌을 무렵 깨달았다. 생리불순이겠거니, 계속 넘기고 있었는데. 승연은 퇴근 후 산부인과, 라고 다이어리에 쓰다가 펜을 멈췄다. 그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시체였다. 생명이 없는 존재가 생명을 낳을 수가 있나? 퇴근 후, 승연은 산부인과에 가는 대신 약국에 들렀다.

두 줄이 선명했다.

출근길에 승연은 행진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팻말에는 좀 어색하지만 또렷하게 글씨가 박혀 있었다. ‘좀비들을 때려잡자’ ‘사람 살기도 벅찬데 좀비 살리기가 말이나 되나’ ‘모든 좀비들을 불태우자’ 얼마 전에 좀비 특별 예산으로 지원받은 제지기업이었다. 팻말들 뒤로 도끼를 든 사람들이 뒤따랐다. 아마도 좀비 대신 잘렸을 사람들은 제지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차들은 좀비처럼 느리게 기어갔다. 사람들의 함성이 커지자 버스 기사는 라디오를 틀었다. 쾌활하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제지공장 철문이 벌컥 열렸다.

배를 저어 가자 험한 바다 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한 좀비가 끌려나왔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도끼로 좀비의 머리를 쪼갰다. 뭉친 피가 꿀럭꿀럭 쏟아져 나왔다.

산천 경개 좋고 바람 시원한 곳 희망의 나라로

좀비들이 우르르 끌려나왔다. 누군가가 한 좀비의 머리를 날렸다. 다른 좀비가 한 남자의 다리를 깨물었다.

돛을 달아라 부는 바람 맞아 물결 넘어 앞에 나가자

다리를 물린 남자가 겁에 질려 넘어졌다. 좀비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누군가가 뛰어들어서 무술이라도 하듯이 좀비 머리를 세 개나 한 번에 날렸다. 좀비들이 울부짖었다. 한 좀비는 다리가 떨어졌다. 그러자 도끼를 든 손을 물었다. 아우성이 몰아쳤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

길이 뚫렸다.

버스기사는 폭풍처럼 차를 몰았다. 승연은 회사에 도착해서야, 회전문에 비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아침 드라마에서 본부인한테 한 대 얻어맞은 내연녀처럼 마스카라가 뚝뚝 번진 얼굴이었다. 화장을 고치고 사무실로 들어가자, 복사기 옆에 처음 보는 좀비가 서 있었다. 젊은 여자 좀비였다. 사람들은 좀비에게 서류들을 가져다 줬다. 좀비는 기계적으로, 이미 기계 그것인 것처럼 복사기를 돌렸다. 늘 복사기를 돌리던 서아름 씨가 토라져있었다.

“뜬금없이 웬 좀비에요. 사무실 공기도 탁해진 거 같아요.”

좀비는 마네킹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오직 쿰쿰한 냄새만이 좀비의 존재를 증명했다. 점심시간에도 아무도 좀비에게 밥을 먹으라고 권하지 않았다. 저녁시간에도 아무도 좀비에게 퇴근하라고 하지 않겠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 무렵, 한 과장이 승연의 책상을 살짝 두드렸다. 복도에서 한 과장은 봉투 하나를 승연에게 건넸다.

“딸 같은 아가씨한테 내가 주기가 영 껄끄러워서 말야.”

서아름 씨는 여전히 툴툴거리고 있었다. 복사기를 돌리고 시세를 체크하고 필요한 자료를 프린트해서 나눠주는 일 정도라면 좀비의 느린 손으로도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가 그걸 다 할 수 있다면 상고를 졸업하고 바로 회사에 취직한 서아름 씨에게 남는 일은 과장님이나 부장님한테 커피 타 주는 일 정도다. 회사로서는 전혀 필요 없는 일.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승연은 배를 감쌌다. 이제 겨우 2주가 지났는데. 한 과장은 다행히 보지 못했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던 한 과장은 잘 부탁한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돌아갔다.

승연은 서아름 씨가 휴게실로 들어갈 때 벌떡 일어났다. 담배를 물던 서아름 씨는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요.”

승연은 담뱃불을 붙여주고는, 가만히 봉투를 건넸다. 서아름 씨의 커다란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그렁거렸다.

“제가 좀비보다 못한 게 뭐에요? 전 냄새도 안 나고, 위험하지도 않아요. 일도 훨씬 빠르게 잘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서아름 씨는 월급을 받아가잖아, 라고 승연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서아름 씨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죄 지은 사람마냥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터졌다. 서아름 씨의 울음소리가 복도 너머까지 한참 동안 들렸다.

침울하게 자리에 앉는데, 휴대폰이 반짝였다. 문자메시지를 열기가 무섭게 승연은 휴대폰을 책상 밑으로 숨겼다. 번호는 달랐지만 틀림없이 그였다.

[잘 있지? 만나러 갈게]

서아름 씨가 대성통곡을 하며 짐을 싸서 나갔다. 얼마 안 있어 퇴근 후에 잡혀있었던 회식이 취소되었다. 퇴근할 때쯤엔 비가 내렸다. 승연은 우산이 없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냅다 질주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사람들은 너도나도 정신없이 떠나갔다. 승연도 뛰려고 준비자세를 취하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맨홀 뚜껑이 살그머니 열렸다. 맨홀에서 작은 손이 한들한들 움직였다. 만나러 갈게. 승연은 조심스럽게 맨홀 뚜껑 쪽으로 다가갔다. 안쪽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불쑥, 손은 승연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하수구 냄새는 오백 명이 넘는 좀비들의 지독한 냄새도 덮어버렸다. 승연은 하수구 밑에 악어가 살고 있다는 오래된 도시 전설을 떠올렸다. 수많은 좀비들이 천천히 손에서 손으로 승연을 옮겨서 하수구 바닥에 내려놓았다. 승연은 너무 많은 좀비들에 지레 겁먹고 도망치려고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좀비들은 웃고 있었다. 좀비들의 느린 얼굴 근육은 웃는 얼굴에서도 쉽게 바뀌지 않았다. 볼이 핼쑥하게 들어가서 해골처럼 보이는 좀비가 웃는 얼굴로 나지막이 얘기했다.

“아안쪼옥……으로 쭈욱…… 있으을 거에에요오…….”

하수구 안쪽에,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기대어 있었다. 승연을 발견하자, 그는 느릿하게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승연은 그의 손을 살짝 뿌리치던 저녁이 생각났다. 뭐가 하수구 냄새고 뭐가 그의 냄샌지 구분할 수 없었다. 승연은 그의 손을 잡았다.

“나 임신했어.”

그는 가만히 승연의 배에 손을 얹었다.

사람의 코는 상황에 빨리 적응하는 기관이다.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지만 승연은 온전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승연은 냄새나는 좀비들과 하수구에 둘러앉았다. 고양이들과 둘러앉은 것처럼, 비쩍 마른 좀비들은 안광만 형형하게 빛났다. 그때 좀비 두 명이 어깨에 시체 한 구를 걸머지고 왔다. 선량하게 생긴 노인이었다. 어디 뭉개진 부분도 없이 깨끗한 것으로 봐서는 나이 들어서 평안하게 간 듯 했다.

"오느을…… 묻으은…… 무더엄……."

그는 손도끼를 꺼냈다. 닭도리탕을 만드는 것처럼 쾅, 시체를 내리찍자, 발목이 잘렸다. 발목부터 한 뼘 씩, 그는 차근히 시체를 모두 잘라냈다. 두 명 당 한 조각 꼴로 시체가 배분되었다. 그들은 사이좋게 시체를 나눠먹었다.

"이거 먹고, 배고프지 않겠어?"
"밖…… 좀비……보다느은…… 후어얼씨인…… 나아……."

막 묻힌 시체나 유기된 시체 몇 구 정도만 있으면, 이 좀비들은 배를 불릴 수 있었다. 몇몇 좀비들이 목숨을 걸고 공동묘지에 가거나, 영안실에 갔다. 때때로 돌아오지 못하는 좀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식사는 여전히 제대로 배급되지 않고 있다고 했다. 식사가 배급되지 않는 이상, 좀비들은 사람들을 습격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고개를 들고 결연하게 말했다.

“우우리이, 모오두우, 좀비이…… 조옴비이로 만들……려고…….”

승연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좀비들은 피곤하지 않다. 잠들지도 않는다. 죽여도 상관없다. 어차피 죽어있는 시체들이니까. 배가 고프겠지만, 인간을 잡아먹는 좀비를 굳이 먹여야 할 필요도 없다. 끊임없이 일할 수 있고, 끊임없이 괴롭힐 수 있다. 일하다가 쓰러지고 죽어가는 좀비들이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다. 사회는 좀비들을 짓밟고 장족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인구의 반 이상은 좀비가 되고 나서야 이 좀비들의 굶주림은 겨우 끝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드을으은…… 인가안을…… 주욱이지이 않고오도…… 배 안 고픈…… 그런…… 세상을…… 만들……"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승연은 가만히 배에 손을 얹었다.

“이 아이는 어떻게 하지?”
“네에가아 하아고시프으은대로오.”

그는 승연을 들여다보았다. 차분하고 단호한 눈이었다.

좀비들은 승연 집 앞의 맨홀 뚜껑을 열어주었다. 빗방울은 더 굵게 내렸다. 찐득하게 묻어있던 하수구 찌꺼기가 빗방울에 씻겨 내려갔다. 좀비냄새와 하수구냄새도 함께 씻겨 내려갔다. 승연의 집 앞에는 여전히 파출소가 있었다. 승연은 파출소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신발을 벗었다. 맨발에 찰박찰박 빗방울이 닿았다. 춤을 추듯 물웅덩이를 내달렸다. 승연의 걸음에 맞춰 뱃속이 울렸다.

도끼를 든 사람들은 더 이상 이상한 풍경이 아니었다. 좀비를 죽이는 건 사람을 죽이는 것과는 달랐다. 물론 청소를 하고 있던 좀비의 목을 베어버린다면 청소 회사에 물품을 파손한 데에 대한 배상은 해야겠지만. 분노한 사람들은 수시로 모여서 닥치는 대로 좀비들을 고용한 회사에 쳐들어갔다. 좀비들은 목이 잘리기도 했고, 잘린 목이 내걸리기도 했고, 광화문 광장 한 가운데에서 화형당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저항하는 좀비에게 물리는 사람은 죽는 좀비보다 훨씬 많이 생겨났다. 좀비의 수가 많은 회사일수록 더욱 그런 현상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좀비들은 돌격해 오는 사람들을 역으로 좀비로 만들기 위해 덤벼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좀비를 말살하려고 도끼를 꺼내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불러오는 승연의 배에 도끼가 꽂히지 않은 건 천만 다행이었다. 배에 좀비라고 쓰여 있지 않다는 사실에 승연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감사했다.

어느 날 아침, 승연은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사람을 해고하고 좀비를 고용하는 악덕기업들을 분쇄합시다.'
'이 날만은 주변의 좀비 청소에 함께 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내일 모레였다. 함께 모여서 갈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달라고.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시민 광장이었다. 승연은 메일을 휴지통으로 분리했다. 퇴근하기 한 시간 전에, 승연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여자 목소리였다.

"언니……."

서아름 씨였다.

"저, 모레, 회사 갈 거예요. 사람들이랑."

승연은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아름 씨, 그러지 마요."

"우리 회사, 공장에선 훨씬 더 많이 쓰고 있대요. 사무보조원들은 벌써 다 좀비로 바뀌었다면서요."

"그러지 마요, 아름 씨. 좀비들이 나쁜 게 아니에요. 그 사람들도 먹고 살려고, 시키는 일 억지로 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그러지 마요. 거기다가 요즘엔, 좀비 죽이려다 다들 좀비 되고 그러잖아요. 뉴스도 안 봐요? 아름 씨, 제발 그러지 마요."

"차라리 좀비가 되죠, 뭐. 그러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승연이 여보세요, 라고 내뱉으려는 찰나, 나직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돌아왔다.

"그러면, 밥도 주고, 집도 있잖아요."

하수구의 좀비들이 떠올랐다. 밥이라고 외치다가 숨져간 수많은 좀비들의 얘기를, 지금 해 줘야 할까. 승연에겐 퇴근하기 전에 끝내야 할 서류가 아직 있었다. 서아름 씨는 계속 흐느꼈다. 이제 승연의 배는 완연하게 둥글었다. 한참 뒤에 겨우 한 마디가 더 돌아오고 전화는 끊겼다.

"언니한텐 얘기하고 싶었어요. 저, 집세를 계속 못 냈거든요."

그날, 광장에서부터 정문까지 좀비 경비들은 빽빽하게 줄 서 있었다. 까만 옷을 입고,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느릿하게 몸을 움직이면서. 출근 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몰려왔다. 양측 전사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여기저기 좀비들의 머리가 나뒹굴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물려서 나뒹굴었다. 몇몇 직원들이 휴게실 창문에 붙어 섰다. 저걸 어떡해, 아이쿠. 승연은 한숨을 쉬면서 커피를 들이켰다.

좀비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거리자,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리더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기름에 적신 횃불을 흔들면서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쳤다.

"좀비 놈들을 불태웁시다!"

함성이 높아졌다. 승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피가 치마에 엎질러졌다. 뾰족하게 깎은 파이프가 한 좀비의 이마에 박혔다. 좀비는 이마에 파이프를 박은 채 울부짖었다. 서아름 씨는, 파이프를 손으로 꼭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승연은 휴게실 창문에 밀착해서 붙어 서 있었다. 좀비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쓰러졌다. 파이프를 붙들고 있던 서아름 씨는 얼떨결에 파이프와 함께 원을 그리다가, 좀비 경비들 사이에 떨어졌다. 한 좀비가 으르렁대면서 서아름 씨의 목을 물었다. 서아름 씨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이 괴물들이!"
"떨어지지 못해, 이 개새끼들아!"

서아름 씨 주변 몇몇 좀비들의 목이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사람들은 서아름 씨의 발을 잡고 질질 끌어냈다. 서아름 씨는 기절한 것 같았다. 그 사이 좀비 경비들은 다시 전열을 갖췄다. 아스팔트 바닥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사람들이 회사에서 등을 돌리고 주저앉았다.  더 이상 회사로 진입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횃불을 든 남자의 주도로 몇 마디 구호를 더 외쳤다. 한 순간, 소리가 사라졌다. 횃불을 든 남자가 흠칫 뒤로 물러났다. 정신을 차린 서아름 씨는, 눈을 까뒤집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킨 속도보다 더욱 느리게 서아름 씨의 입술이 벌어졌다.

"으……어어!"

서아름 씨는 다시 좀비들을 공격하려는 것 같았지만, 발이 느렸다. 아주, 느렸다. 좀비처럼. 목덜미에 뭉쳐있는 핏덩어리. 서아름 씨는 고개를 돌려서 횃불을 든 남자에게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이 45도 정도까지 올라갔을 때, 남자가 소리쳤다.

"이 좀비를 잡으세요! 불태웁시다!"

순식간에 서아름 씨는 파이프에 매달렸다. 서아름 씨는 고개를 양쪽으로 휘저으면서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서아름 씨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너무 컸다. 서아름 씨는 광장으로 들려나갔다. 소리들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휴게실은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릴 듯이 조용했다. 아주 멀찍이서 소리들이 들렸다. 서아름 씨는 여전히 파이프에 매달려 있었지만, 표정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함성은 기름과 불을 던졌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서아름 씨가 엄지손톱만한 불덩어리가 되었다. 함성소리가 다시 커졌다.

승연은 눈을 감았다.

배에 두 손을 가만히 얹었다.

눈을 뜨자, 한 과장이 승연의 배를 빤하게 보고 있었다. 보름달 같은 배였다.

다음 날, 집 밖으로 나가려고 문을 열자 수많은 플래시가 터졌다. 좀비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게 사실이냐는 질문이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인간의 아이를 낙태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던 산부인과 의사들이 승연의 집 앞에서 피켓을 들었다.

“괴물을 죽여라! 사람을 위해 기술을 사용하라!”

사람을 잡아먹는 좀비들의 사진이 승연의 집 앞에 흩뿌려졌다.

서아름 씨 대신 들어온 좀비가 조용히 승연에게 하얀 봉투를 건넸다. 승연은 봉투를 받았다. 봉투를 옆에 둔 채, 승연은 서류 작성을 끝냈다. 퇴근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승연은 약간 휘청거렸다. 배 뿐만 아니라 가슴도 그 사이 눈에 띄게 불어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봉투를 뜯었다.

부서명, 성명, 직위, 주민등록번호, 해고 날짜는, 일주일 뒤였다.

해고 사유는 경영난이었다.

첫 면접에서 떨어졌을 때, 그는 승연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승연은 자기 팔을 쓸어내렸다. 참 춥구나. 승연은 맨홀뚜껑을 살짝 밟아 보고서는, 종종걸음으로 지하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플랫폼에서 승연은 해고통지서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려다가, 마침 지하철 쓰레기통을 비우는 좀비의 손에 있는 쓰레기통에 해고통지서를 넣었다. 좀비의 오른손가락은 엄지와 검지밖에 없었다. 승연은 좀비를 봤다. 장 대리였다. 장 대리는 승연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쓰레기통을 탈탈 털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다, 그는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배고파……."

승연은 뒷걸음질 치다 넘어질 뻔했다. 숨이 막혔다. 엄지손톱만한 불덩어리가 울컥 가슴에서 솟구쳤다. 지하철에 타자마자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승연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승연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승연은 도로 앉으라고 손짓해보였다. 아주머니는 억지로 승연을 자리에 눌러 앉혔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홀몸도 아닌 사람이…… 엄마가 슬퍼하면 애한테도 안 좋아요."

승연은 핸드백에서 휴지를 꺼내 코를 풀었다.

퇴직금을 받은 다음 날, 승연은 오랜만에 오전 열한 시에 일어났다. 대학 때 이후로 이렇게 늦게 일어나 본 게 언제였더라. 승연은 쇠 지렛대를 들고, 고양이들이 다니는 집 옆의 틈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작은 맨홀 뚜껑이 있었다. 뚜껑을 열자, 누군가 승연에게 손을 뻗었다. 승연은 토끼굴로 떨어지는 앨리스처럼 사뿐히 그 팔 안으로 떨어졌다. 어두워서 아직 얼굴들이 보이지 않았다. 승연을 안은 팔은 따뜻했다. 승연은 그 팔을 붙잡고 속삭였다.

"당신들과 함께 하고 싶어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얼굴이 보였다. 그였다. 잠시 뒤에 맨홀 아래에선 처음으로 이 맨홀에 살겠다고 주장한 사람을 물어야 할 것인가, 물지 않을 것인가를 두고 거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으래……도…… 같이…… 하려며언…… 물어야……."
"무울었다아가…… 뱃속…… 애애기…… 다아치……면,"
"그래도…… 우리이라앙…… 가앝은…… 조옴비……."

승연을 둘러싼 공방을 한참 지켜보던 그는 손을 들었다.

"너……느은…… 조옴비……가…… 되고 시잎……어?"

승연은 좀비가 되면 집도 있고, 밥도 준다고 외치던 서아름 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안 되어도 될 거 같은데. 나는 당신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으니까. 저 위에 있는 사람들도, 벌써 다 좀비인데 뭐."

좀비들은 느릿하게 술렁거리고, 느릿하게 조용해졌다. 승연은 멍한 표정으로 배를 만지다가, 빙그레 웃었다. 조금 느린 듯, 뱃속이 움직였다. 그가 승연의 손을 잡았다. 승연은 힘주어서 손을 꽉 잡았다.


이윽고 모든 좀비들은 맨홀 뚜껑을 열 준비를 마쳤다. 바깥의 사람들과 연락을 맡고 있는 사람이 조심스럽게 하수구를 빠져나갔다. 여전히 하수는 흐르고 있었지만, 맨홀 뚜껑들은 더 이상 그 하수를 조용히 덮고 있진 않을 것이다. 내일 지하는 열릴 것이다. 세상이 뒤흔들릴 것이다. 사람들은 일을 멈출 것이고, 좀비들과 함께 거리를 내달릴 것이다. 모두를 좀비로 만들려고 했던 그들은 자신들이 환상을 보는 줄만 알겠지. 무기들을 손에 들고, 바쁘게 움직이던 좀비들은 서로 눈이 마주치면 숨 가쁘게 웃었다.

"내애일."
"내애애일."

하수구의 밀도 높은 공기 속에서, 승연은 그에게 기댔다. 그가 승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애일."

승연은 내일이라고 대답하려다, 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꼈다.

엉덩이가 축축해졌다. 배 아래에서 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승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너구나. 그가 애타게 승연을 불렀다. 그의 얼굴이 흐릿했다. 뱃속이 점점 뜨거워졌다. 승연의 배는 생명과 죽음 사이, 작은 틈에서 맹렬하게 꿈틀댔다. 틈이 점점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

제목을 바꾸려고 여러모로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서 그냥 올립니다. 성석제의 첫사랑도 있고 투르게네프의 첫사랑도 있는 것처럼 소설 제목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수줍은 기대로. (…)

댓글 9
  • No Profile
    티아리 11.02.10 07:15 댓글 수정 삭제
    정말 좋은 글입니다. 지식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조차 사람을 노예인 양 부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대변해도 모자랄 총학생회가 오히려 그들을 탄압하는 이 부조리한 현실 사회에도, 하수구 아래의 좀비들이 일으킬,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 세상을 위한,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혁명이 일어나는 "내일"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 No Profile
    미로냥 11.02.14 11:38 댓글 수정 삭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목도 잘 어울리고 좋아요!!
  • No Profile
    앤윈 11.02.15 00:20 댓글 수정 삭제
    두 분 다 감사합니다. 조금 더 일찍 봤으면 좋았을텐데.

    티아리님, 혹시라도 이 글을 오늘 네 시 전에 보신다면 오후 네 시에 있는 홍익대학교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집회에 같이 가자고 권하고 싶어요. 저에겐 스마트 폰(!)이 있으니 계속 확인해 볼게요. 아니면 트위터 @annwn_으로 연락해주셔도 좋구요. 함께 내일을 만나러 갑시다 (야!)
  • No Profile
    티아리 11.02.15 04:28 댓글 수정 삭제
    이런, 죄송합니다.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제가 해외에 거주하는 중이라 참가할 수가 없네요. 마음으로나마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매번 글로만 돕고 싶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해 그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제발 좋은 결과로 끝났으면 좋겠어요.
  • No Profile
    화룡 11.02.15 05:58 댓글 수정 삭제
    제가 지금까지 읽어본 좀비물 중 단연 최고라고 하고 싶네요. 엄밀히 말해 좀비를 공포의 대상으로 보는 전통적인(?) 좀비물은 아니지만. 화자가 좀비를 바라보는 시선이 점차 변해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서 정말 감정을 이입하면서 봤습니다.
    좋은 글 보게 해 주 셔서 감사합니다.
  • No Profile
    HK 11.02.17 22:04 댓글 수정 삭제
    좋은 글입니다... :) 잘 읽고 갑니다.
  • No Profile
    나기 11.02.19 11:37 댓글 수정 삭제
    우와, 정말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 No Profile
    이지호 11.02.27 00:44 댓글 수정 삭제
    분명히 좀비물은 맞는것같은데 좀비물이 아닌것같은?
    약간 사회풍자물같기도 한것같고요
    글은 잘읽었습니다 앤윈님짱이요!
  • No Profile
    앤윈 11.03.02 05:22 댓글 수정 삭제
    다들 감사합니다. 기분 짱이에요, 전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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