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꽤 예전에 썼던 글을 올립니다.
학교 수업 시간에 가상으로 자기소개서를 써오라는 과제를 받고 쓴 글이지요.

아마 스완윅의 원소 시리즈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원소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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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이름은 헬륨입니다. 나는 푸른 털을 가졌기에 버림받았습니다. 처음 먹은 어미의 젖에서는 비린 금속 맛이 났습니다. 어미고양이는 곧 죽었고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였습니다. 갓 태어난고양이를 직접 물에 빠뜨려 죽이고 싶었던 열살난 남자아이가 날 상자에 담아 들고 갔지만 대신 자신이 급류에 휘말렸습니다. 나는 종이상자에 넣어진 채 골목 어귀에 버려졌습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그 날 어떤 여자아이가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외꺼풀의 검은 눈이었습니다. 잠깐 혹은 오래 눈을 마주치면서 우리는 바람이 멈추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여자아이는 곧 어떤 어른에게 손이 잡혀 갔고 내 몸은 조금씩 얼어갔습니다 ....

.... 내가 인간이 된 후에, 나는 그 여자아이를 다시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겨울날 세상의 끝에서 조금씩 얼어가던 푸른 고양이입니다. 내 낡은 박스 옆에 그녀도 함께 버려져 있었지요. 시간이 지나고 지금 그녀는 다시 내 옆에 있습니다. 비 소리가 들리는 지하방입니다. 막 시작된 가을장마 속에서 나는 고수풀을 잔뜩 넣은 쌀국수를 먹습니다. 늑대소녀인 그녀가 우리에 갇힌 채 신경질적으로 왔다갔다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언제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갓 끄집어낸 따끈한 심장을 입에 물고 왔습니다. 나는 우리를 향해 얼굴을 들이밉니다. 어서 그녀가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오는 날 쌀국수를 먹다보면 섹스가 하고 싶어지니까요. 그녀의 이름은 리튬입니다.



* 헬륨 helium
무색의 기체 원소. 원자번호 2, 원소기호 He, 원자량 4,003. 희가스류 원소의 하나로 그 스펙트럼선에 의하여 태양에서 발견. 녹는 점 -272.2℃, 끓는점 -268.9℃. 화학적으로는 전혀 다른 원소와 화합하지 않는다. 밀도가 작으므로 기구용의 가스로 이용되며 액화점이 낮아 액체헬륨은 극저온한제로 사용된다.

리튬 lithium
알칼리 금속의 첫 번째 원소. 원자번호 3, 원소기호 Li, 원자량 6.941. 고체의 단체 중에서 가장 가벼워 비중 0.534, 녹는점 180.5℃, 성질은 알칼리 토류금속과 비슷. 상온에서 물을 분해하는데, 반응성은 칼륨(K)이나 나트륨(Na)처럼 격렬하지 않다. 염색반응은 심홍색.




2.
나는 회화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다만 로메인 브룩스의 그림을 볼 때면 마치 내가 그린 듯한 착각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나는 로메인 브룩스가 아니고 그녀는 나탈리 바니가 아니지요. 우리는 가난하니까요. 1920년대의 부르주와 예술가 커플처럼 잔디밭에서 사포식의 의례를 치르는 대신 우리는 밤마다 폐공장에 가서 부품들을 훔쳐옵니다. 함께 훔치던 중학생이 경찰의 발포로 죽었습니다. 6발의 총알을 맞은 몸은 경련하듯 꿈틀거렸습니다. 리튬이 사준 그의 새 운동화가 피로 검게 변하자 그녀는 미친 듯이 웃었습니다. 1997년의 일입니다. 내가 인간이 된 첫 해였습니다.

리튬. 나는 불법체류자야. 나는 고양이였고 어디에도 내 출생등록은 없어. 경찰에 잡히게 되면 난 바다 너머로 쫓겨나고 다시는 널 보지 못할 지도 몰라.

숨이 턱에 닿도록 달아난 그날 밤 우리는 덜덜 떨며 처음으로 서로를 안았습니다. 다음날 눈을 뜨자 더러운 이불 아래 구겨진 로메인 브룩스의 그림이 보였습니다. PC방에서 프린트해온 조악한 종이질의 자화상입니다. 회색 바다 옆에 짙은색 코트의 여자가 쳐다보고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그 그림을 주어 벽에 핀으로 꽂아놓았습니다. 헬륨, 너는 이 여자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

우리는 그 후로도 밤마다 부품들을 훔칩니다. 그 사건 이후 오히려 경찰 단속이 뜸해졌으니까요.


3.
리튬은 우리가 처음 만난 날에 대해 기억하지 못 합니다. 사춘기가 된 후부터 그녀는 늑대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 이전의 기억은 흐릿하다고 했습니다. 늑대로 변한 리튬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리튬이 사납게 도시를 뛰어다니는 모습을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인간들이 점령한 공간이고 거기에 늑대소녀인 그녀가 있을 곳은 없습니다. 리튬, 이대로 가다간 너도 언젠가는 중학생처럼 총에 맞게 될꺼야.
상관없어. 리튬은 맑게 웃었습니다. 뛰어다닐 수 없다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잖아. 리튬을 넣을 우리를 사오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리튬이 언제 늑대가 되고 언제 인간으로 돌아오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기간은 주기를 따르지 않고 점점 더 늑대로 있는 시간은 길어집니다. 나는 지금도 아주 추운 밤이면 고양이로 돌아갑니다. 올해는 내가 인간이 된 지 칠년째 되는 해입니다. 나는 여전히 로메인 브룩스의 그림을 좋아하고 여전히 공장지대의 지하실을 떠돕니다. 하지만 이곳에 영원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경계 저편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찬 바람 속에 함께 버려진 채 눈을 떴습니다. 갇힌 리튬이 발톱으로 바닥을 긁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하실 벽에 글자를 새깁니다. ‘언젠가, 당신들의 악몽이 될게’ 어두운 가을장마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hybris
댓글 3
  • No Profile
    hybris 07.07.15 10:39 댓글 수정 삭제
    비번을 잃어버려, 수정이 안되는군요. 이런.
    아마 원소시리즈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라는 모호한 문장이 아니라 (;;)
    분명히 원소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았겠지요.
  • No Profile
    가루가루 07.10.23 23:49 댓글 수정 삭제
    아!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No Profile
    하나씨 08.04.27 02:33 댓글 수정 삭제
    아,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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