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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검을 사랑했다. 그리고 검술을 사랑했다. 스스로 검술을 펼치는 일도 좋아했지만 타인이 펼치는 검술을 감상하는 일을 더욱 좋아하였다. 좋은 술보다 아름다운 정인의 미소보다 검술을 보는 일을 사랑했다.
 사내는 예물을 들고 이름난 무관이나 강호를 떠도는 무사들을 찾아다녔다. 가져간 예물을 두손들어 바치고, 그들의 검술을 감상하곤 했다. 그의 살림살이는 넉넉한 편은 못되었지만, 곤궁한 처지또한 아니었기에 그럴만한 여유는 있었다. ‘검을 익히는 길이 있는데 어째서 검을 감상하는일에 시간을 쏟느냐, 그러지 말고 스스로 검을 대성해 봄은 어떠하냐’ 권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만 사내는 서화를 그리는 사람이 있으면 감상하는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 말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남루한 무사가 사내의 집에 찾아왔다. 무사는 남루하지만은 않았다. 굶주려 있었다. 죄송하지만 검을 애호하시는 분이 맞으시냐며, 제가 일주일 이상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다고 한끼의 식사를 베풀어 주신다면 그간 공부한 검술을 보여드리고 싶노라 청했다. 그리하여 사내는 무사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무사는 걸신이라도 들린 양 음식을 먹었다. 곧 검술을 펼쳤다.

 무사가 펼친 검술은 여덟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무사가 펼치는 검술을 본 뒤에 사내는 크게 놀랐다. 전반부의 일곱 초식은 어째서 이 무사의 행색이 남루한가를 증명하듯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마지막 일초식 만큼은 이제껏 사내가 견식하였던 그 어느 초식보다 기기묘묘하고 미려했다.
 사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무사에게 물었다.
‘소생은 평생을 검술 감상하는 일에 소일하였으나, 아직 귀하의 여덟 번째 그 초식만한 검술을 감상하였던 일이 없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묻고 싶사온데, 귀하는 대체 어디에서 그 마지막 한초식을 얻으신 것 입니까?’ 
 무사는 선선히 대답했다.
‘방랑하던 중 어느 산에서 고인을 만났사온데 그 분께서 어찌되서인지 저를 마음에 들어하시어 일초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의 검술은 빈말로라도 뛰어나다 말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분의 일초로 죽을 고비를 넘긴적이 많았습니다.’ 
‘그 일 초식 이외에 그분에게 배운 것이 혹시 더 없습니까?’
‘저 또한 그 이후 몇 번을 그분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그분께서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께서 이르시길 이 검법은 천하삼십육검이라는 검법으로 모두 서른 여섯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사온데 이따금 타인에게 가르칠 때는 오직 일 초식만을 베풀어주신다 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저 또한 그분께 일 초식만을 배웠을 뿐입니다.’
 이 다음에 나올 사내의 질문은 당연했다.  

“제가 어디에 가면 그 분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무사는 입을 다물었지만, 사내는 잠자코 몇 냥의 은자를 내밀었다.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면 애초에 이야기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무사는 은자를 받았다. 그리고 고인을 만난 위치를 이야기해 주었다. 

 사내는 짐을 꾸렸다. 이제껏 갖추던 예물보다 더욱 정성스럽게 예물을 준비했다. 고인의 거처가 있다는 산자락의 아래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포목점을 찾아가 옷을 새로 맞추고 의관을 깨끗히 정돈했다. 그런 뒤에야 고인이 살고 있다는 초옥을 찾았다. 예물을 바치고 공손히 예를 표하는 사내에게 고인이 말했다.

"노부가 가진 재주는 하찮은 것이고 남들에게 가르칠 만한 것이 못 되네."
"소인은 검술을 배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한번 보고자 합니다. 먼 곳에서 왔습니다. 귀인은 다시 한번만 생각 해주십시오."

 엎드려 사정했으나 고인은 예물도 받지않고 초옥의 문을 닫았다.
 사내는 힘없이 등을 돌렸다. 수천리 길을 되돌아갔다. 수천리길을 걸어온 고생에 소득이 없던 것을 벌충하기 위해 귀로에 오르는 와중에 유명한 문파와 무관들을 찾아가 검술을 감상하였다. 그러나 떠돌이 무사가 보여주었던 일초에 갈음할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 사내는 않았다. 철저히 앓았다. 이래서 사랑은 증오보다 강하고 치명적인 것이리라. 눈을 감으면 그 최후의 일초가 떠올랐고 눈을 뜨고 밥을 먹을 적에도, 심지어 뒷간에 갈 적에도 검이 그려내었던 유려한 잔영은 머리 한켠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사내는 하루하루 비쩍비쩍 말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는 생각했다. '아, 내가 정성이 부족했던 것이었구나. 과거 명검을 만드는 장인아래서 공부하던 도제는 스승이 쇠를 식히는 물의 온도를 알려주지 않자 손이 잘릴것을 알고도 물통속에 손을 넣어 그 온도를 확인하였다지 않는가? 나는 천하에 다시 없는 검술을 감상하려 했으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보이지 않았다.'
 결단을 내리자 망설일건 없었다. 사내는 다시 길을 떠났다. 몸은 가벼웠다. 따로 예물을 챙기지 않아서 였다. 길을 떠나는 사내의 행낭 속에는 검도를 걷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양손의 무명지 두개가 들어있었다.

 "지난 번에는 귀인을 몰라뵙고 제대로된 예물을 챙기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검을 훔치려는 자가 아니라 천하에 다시 없는 귀인의 검술을 견식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제 양손의 손가락 두개를 자름으로 그것을 증명해드렸으니, 혹여나 귀인께서 부족하시다면 저의 두 손목도 모두 거두어 가 주십시오."

 엎드려 절하는 사내에게 노인은 쯔쯔 혀를 찼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중 노인이 말했다.

 “자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알겠네. 그만 고개를 들게, 내가 천하삼십육검의 몇초를 보여줄테니.”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노인은 벽에 걸려있던 고풍스러운 장검 한자루 빼 들었다. 잠시 사내 앞에서 숨을 고르더니 사내가 그토록 꿈에서도 원하던 것. 그토록 기다려 왔던 천하삼십육검의 초식을, 검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장중한 검무를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다. 진실로 아름다웠다. 그 검은 강하되 순리에 맞아 거스르지 않았고, 부드럽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갈라놓는 것 같았다. 멀리 있는 산의 풍경을 가르고 구만리 너머 구름의 허리를 베었다. 높은 하늘을 갈랐다. 마침내는 태양을, 태양에서 내리쬐는 빛살마저 베어 내었다.
 검이 그려내는 궤적이 그친 뒤에도 사내는 황홀경에 젖어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잊었다. 온몸이 검무의 바다 속으로 그 중 가장 깊은 심해로 잠수 한것과 다름 없었다. 부유에는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뒤에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떤 사내가 노인에게 말했다.

 "귀인께서는 어째서 나머지 열 여덟초식을 보여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천하 삼십육검은 모두 서른 여섯초식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닌지요."
"그렇네 이것은 천하삼십육검 전반부의 열 여덟초식이네."
"후반부의 열 여덟초식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노인은 말 없이 사내를 보았다.

"내 이번에 너무 많이 보여주었네. 자네는 내년에 다시오게. 그때 내가 이 다음의 일 초를 보여주겠네." 

 사내는 그렇게 했다.

 검을 사랑하던 이 사내는 일 년마다 예물을 들고 노인을 찾았다. 노인은 그때마다 단 일 초식만을 펼쳐보였다. 애원하고 사정해보아도 노인은 일초를 펼치고 매정히 문을 걸어닫았다. 일년이 그리고 다시 일년이, 그렇게 십오년이 지났다. 세월은 하염없이 흘렀다. 

"오늘은 어째서 반초식만을 보여주시는 겁니까. 일 초를 보여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사내가 물었다. 노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뒤의 삼초 반식은 아직 완성이 되지 않았네."
"대체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천하삼십육검은 인체를 노리는 서른 여섯방위를 먼저가 점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봉하는 것이 원리일세. 나는 전반부의 열여덟방위를 점하는 법을 만들고 익히는 것 만으로 천하에 적수를 만나지 못하여 은거하였으나, 자네의 정성을 보아 다시 연구에 들어가 매년 일초씩을 만들었네. 하지만 마지막 삼초 반식. 천하산산 천하무궁 천하도도 천하유유의 삼초반식만은 머리속에 있을 뿐 아직 몸으로 펼칠 수 가 없어."
"그렇다면... 그렇다면 대체 언제야... 나머지 삼초 반식을..."

 노인은 피로한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겠네. 내 언젠가는 이 검법을 완성할 날이 올테지만 그 날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어."

'기다리게.' 초옥의 문을 닫으며 노인이 말했다. 
 사내는 기다렸다. 기나긴 기다림이었다. 일년은 이년이 되고 삼년이 어느새 오년이 되었다. 추수가 끝나는 매년 겨울에 사내는 노인을 찾았으나, 노인은 그때마다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을 할 뿐 반초의 검식도 완성하지 못했다. 
 세월은 유수히 흘렀다. 눈을 감으면 분명해지는 궤적은 시간이 지날 수 록 또렸해졌다. 이제 눈을 감지 않아도 노인이 펼친 검식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검을 사랑하는 사내는 검을 사랑하는 일외에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내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사내가 광증이 돋았다 했다. 대저 칼이란 사람의 몸을 상하게하고 피를 빨아들이는 요물이라 성현들조차 늘 경계하였는데, 어찌 평범한 사내가 그 흉악한 물건의 마력을 이겨내겠느냐고, 사내는 칼을 사랑하다 칼날에 몸이 아니라 제 마음을 상하고만 것이라 수근거렸다. 검을 잊자. 결심한 일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검은 계속 보였고 잊혀지지 않았다. 기갈이 절망이 되어갔다. 
 사내는 폐인이 되었다. 사내의 친구들은 왼종일 하늘을 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사내를 찾지 않았다. 아비가 몰하는 그 순간에도 사내는 검을 보았고, 어미가 청정수 앞에서 사내의 정신이 돌아오길 기도하는 순간에도 검을 보았다. 소담한 아홉칸 기와집이 허름한 초가집으로 바뀐날 아내는 아이를 버리고 떠났다. 청년이 된 사내의 아이는 집을 나간 후 다시는 들어오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무정히도 흘렀다. 삼 초 반식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사내는 매년 겨울에 봉두난발을 한 체 지팡이를 짚고 수천리길을 걸어 노인을 찾았다. 노인은 여전히 노인이었으나 젊었던 사내는 노쇠하여 노인이 되었다. 두 노인 중 한 노인이 고개를 저으면 다른 노인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린체 기나긴 수천리길을 되돌아갔다. 

 세월이 흐르는 속도가 빨라졌다.
 
 어느날 사내는 죽음을 직감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여명은 많지않았다. 시야는 흐릿했고 삭정이 같은 무릎 관절은 두다리로 일어서 한걸음 떼는 일 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수천리 길을 걸어가는 일은 언강생심이었다. 
 그러나 미망이, 집망이 사내를 움직이게 했다. 지팡이로 땅을 디디고 한 걸음을 천리길처럼 힘겹게 걸었다. 부연 안개처럼 눈앞에 나타나는 천하삼십육검의 궤적을 헤치며 이제는 자기 집처럼 익숙해진 초옥에 이르렀다. 초옥의 문을 두드렸다. 헌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혹시 그 노인이 죽은 것은 아닐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기다렸다. 문 앞에서 계속 기다렸다. 문을 열고 노인의 죽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자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일지도 모르기에 사내는 문을 열지 못했다. 그가 사랑하여 걸어온 길은 절망을 밟아온 길이었다. ‘내 모든 것을 던졌는데 끝끝내 보여주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 남은 여명은 반각의 분도 되지 못했지만 사내는 그에게 주어진 최후의 시간이 다 할때까지 망설이기만 했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에, 사내는 초옥의 문을 밀었다. 초옥은 씻은 듯 깨끗했다. 벽에 걸린 검이 없었다. '아아 다행이다 노인은 여행을 떠났거나 아직 어딘가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죽음이 한발 앞까지 다가온 와중에도 사내는 안도스러웠다.
 그때 사내는 세걸음 떨어진 탁상위에 놓여있는 한 통의 봉서를 발견했다.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일까. 혹시 나에게 보낸 것은 아닐까. 사내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세걸음. 단지 그 세 걸음을 걷는 일이 고되고 지난했다. 수십년 세월의 기다림을 반복하는 일만큼 힘겨웠다. 밭은 기침을 내쉬며 검을 사랑하던 이 사내는 마침내 떨리는 손으로 봉서를 열었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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