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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탑승객

2016.09.07 15:5209.07


1.


“그 여자애는 단지 수신자였고, 그놈들은 그 애의 몸에 들어온 탑승객이었을 뿐이야. 그놈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고. 하지만 그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지. 의심의 여지가 없어. 이제 내가 그들의 탑승객이 되어 버렸으니까.”


석양이 해변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차츰 짙은 그림자가 땅 위를 덮고 있었다. 백사장에 주저앉아 모래 알갱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황지안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워졌다. 멀어져가는 태양의 아래에서 보는 그의 얼굴은 슬픔에 가라앉아 있었다. 적어도 심해의 깊은 곳에 잠긴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표정, 그 얼굴이 야릇히 말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김동률은 손에 쥐고 있던 담배의 마지막 부분을 가슴 깊이 빨아들였다. 남은 꽁초를 바닥으로 떨어 뜨리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담뱃재의 불꽃을 보았다. 사그라드는 그 불꽃들이 그에게 이상스러운 불길한 인상을 전했다.


“그러니까 너는 단지 메시지를 받았단 것일 뿐이지.” 동률이 소매춤 안으로 담배갑을 집어넣으면서 지안에게 다시 물었다.

“너는 수신자였고, 놈들은 탑승객일 뿐이지만,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리고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도저히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손님을 네 몸에 태웠다, 그것뿐이지?”

“그래 맞아.” 황지안은 왼손에 한 움큼 쥐고있던 모래알갱이를 모조리 바닥으로 쏟아내면서 말했다.

“처음에 그들은 그 소녀의 아버지를 제물로 택했지. 다음에는 소녀가 선택된 거고, 이제 내 차례가 온거지. 다음에는 누구에게로 갈까? 어쩜 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그의 손아귀에서 모래들이 모두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자신의 손을 펼쳐 모래자국들이 엉켜 붙어 있는 손바닥을 응시했다. 그는 보통 사람들처럼 반대손을 왼손과 함께 비벼서 그것을 털어 내고 싶은 맘이 간절히 일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로써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의 왼손은 붕대속에 깊게 감추어져 있었다.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왼손에 무엇인가를 숨겨두어야만 했다. 결코 꺼내어서 보여줄 수 없는 어떤 무엇을.


“그 소녀 얘기를 다시 해봐.” 동률은 백사장의 한편에 있는 조그만 둔덕의 경사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 지안의 휠체어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둔덕 너머에서 백오십 미터쯤 떨어진 작은 야산의 능선 위로 반쯤 만월이 슬며시 떠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 소녀가 자네의 병원에 입원하고 난 후로 시작된 일이니까. 그러니 그 얘기를 다시 해보란 말이야.” 지안은 휠체어를 끌고 오는 동률을 향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쳐다보았다. 애처로운 눈빛이었다. “벌써 수백 번은 반복한 얘기잖아. 그 얘기를 꼭 다시 들어야해?”


“그래야지. 자네가 정말로 이 해안가에서 일어난, 젊은 남녀 열여섯 명이 실종된 사건의 진범이라 주장하는, 자네의 이야기가 얼마나 믿을만한지 판단할 수 있으니까.

“내가 아니야. 그들이 나의 몸을 빌려서 한 행동이라고 몇 번을 말하지 않나. 그들은 내 몸을 통과했을 뿐이야.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하지만!” 동률은 목소리의 톤을 높이고 있었다.

“너의 말이 맞다면, 자네는 분명히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거야.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어” 동률은 만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더욱 짙어지면서 바람도 함께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성난 파도가 육지를 향해 공격적으로 달려들다가, 물러나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능선을 따라 휘몰아치면서 야산의 소나무들을 세차게 떼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럼 이야기를 해주지.” 황지안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강헤령이란 여자 아이가 나를 찾아왔을 때부터, 그러니까.”

“아니, 그보다 조금 이전의 이야기가 필요해. 그 소녀의 아버지란 사람이란 인물 말이야. 자네가 헤령에게서 전해들은 그의 우주 여행 경험담부터.”


동률은 지안을 부축해 일으켰다. 오른손과 두 발을 자른 몸이 이렇게 가볍게 느껴진단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불행이 시작된 이후로 지안의 몸은 나날이 수척해져만 갔다. 그는 휠체어에 지안을 앉히고, 야산 아래의 불빛이 보이는 마을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저 산에 묻었다는게 사실이야?” 동률이 물었다.

“그래. 내가 기억하는 안에서는.”

“손 하나와 두 발이 없는 몸으로 말이지?”

“여전히 믿지 않는군. 하긴 믿기지 않는게 당연하지. 하지만 믿을 수 밖에 없을걸. 곧 믿게 될거야.”

“그래. 일단은 믿어보도록 하지. 무덤을 찾을 수 있다면, 자네의 말은 진실일 수 밖에 없을테니까.”


지안은 동률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다는 것 때문에 야속하진 않았다. 그 조차 자신이 겪고 있는 불행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겪고 있는 그 모든 불행, 그 모든 고통, 그것은 사실도 아니었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 현실은 붕대 속에 가려진 어둠속에 숨어 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눈으로 그 어둠을 볼 수 있기까지 했다. 그 어둠은 언제나 가려움, 참을 수 없는 가려움과 함께 왔다.


* * *


강헤령이 동률의 송정특수 종합병원으로 긴급입원 된 것은 네 달쯤 전이었다. 그녀는 구조차에 실려 응급실에 들어 올 때부터 온 몸이 망신창이였다. 더는 어찌 손을 쓸 여지가 보이지 않던 상태였다. 어떻게 수습해낸 것인지 황지안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응급 환자를 진단하기 위해 새벽 네 시에 정신과 의사가 호출되는 일은 없다. 지안이 정신과 원장으로 제직한 16년여 동안 겪은 처음이자 유일한 사건이었다.


그녀의 자해는 단지 손목에 사무용 칼날을 긋는 아이들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팔목 절단을 시도하고 있었다. 살점은 도륙당한 것처럼 뜯겨져 나가고, 피는 고장난 펌프에서 뿜어져 나온 것처럼 하얀 잠옷을 시뻘겋게 적셔 놓았다. 하지만 무뎌진 부엌 식칼로 뼈를 잘라낼 수는 없었다. 단지 좌완신경의 일부분을 뜯어낼 뿐이었다. 척골의 경상돌이 툭 튀어난 부분까지 수차례 찔러댄 듯 보였지만, 신경계가 완전히 떨어져나간 상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해골과 다름없이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을 그녀는 줄기차게 잡아 뜯어내려고 하고 있었다. 반대 손으로 찌부러진 오른팔의 피부를 찢으려는 시도를 멈추려 하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두 명의 여간호사가 그녀의 왼팔을 붙잡고 있음에도 힘에 겨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경안정제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마취제는 그녀의 혈액안으로 전혀 침투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끝없이 몸부림치며, 고통에 겨워 울부짖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의 절규처럼 들리지 않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병동 전체를 잠식하듯 울리는 가운데 ‘내 몸속에 그 놈들이 있어! 내 몸속에 그 놈들이 있다고!.’ 라고 아우성치는 그 한 마디를 지안은 지금까지도 기억했다.


아코니튬 나펠루스를 투약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 지시는 총무원장인 동률의 입에서 나왔다. 지안은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마취제 성분의 종류에 그런 이름은 없었다. 그것은 독약이었다. 바곳 혹은 가시투구꽃이라는 식물에서 추출되는 독약. 아주 일정한 경우에만 진통의 효과를 위해 소량의 성분을 사용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다른 성분의 약과 혼합해 독성을 중화시키는 방법만이 허락된다. 단 1그램만 투약해도 성인 남성 한명을 골로 보낼 수 있는 그런 약이었다. 때문에 지안은 어떻게 동률이 그런 지시를 내리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동률의 지시는 확고했다.


“이런 끔찍한 발작을 진정시킬 방법은 하나 뿐이야. 신경계의 끝자락을 완전히 잘라버려야 해. 고통이 느껴지는 발작부위의 신경망과 다른 신경계간의 교감을 마비시키는 거야. 동물마취제를 써 볼 생각까지 했어. 하지만 그건 더 위험한 짓이야.”


지안은 여간호사 한명이 주사바늘에 보라색 시약병을 투입하는 것을 보았다. 주사기 한 가득, 거의 치사량이었다. 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동률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헤령의 몸부림이 워낙 거셌기 때문에 다섯 명의 간호사들이 모두 달려 들어야 겨우겨우 팔다리를 끈에 묶을수 있었다. 극도의 흥분 상태였기에 정맥을 찾기도 힘들었다. 아주 힘겹게 주사바늘이 들어갔고, 보라색 용액이 혈관으로 투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헤령은 한동안 잠잠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숨소리만이 그녀의 맥박이 아직 뛰고 있단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안정된 상태는 결코 오래가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들 그것을 보았다.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처럼 붉어져서 부풀어 오르는 검은 혈관, 마치 고무튜브에 펌프기를 꼽아서 급속으로 공기를 주입하는 것처럼, 주사바늘이 꽂힌 주변의 피부들의 팽창해 오르고 있었다. 지안과 동률 둘 다 뭔가 끔찍한 부작용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현 상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주사바늘이 들어간 정맥 부분의 혈관이 가장 끔찍한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핏방울이 조금 새는 듯했다. 이윽고 누런 고름이 조그만 벌레를 발로 밟아 터져버린 내장처럼 상처 부위에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상처는 조금씩 틈이 벌어지면서 악성 종양이 솟구치는 것처럼 불거졌다. 그리고는 그 상처 안에서 마치 신체 속에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뜨는 것처럼 볼록하게 툭 튀어 나오는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새까만 돌기가 솟구친 것을 똑똑이 보았다. 그것은 흉악한 생명체의 검은 눈처럼 보였다. 온통 새까만 흑막에 덮여 있었다. 그것의 정확한 정체는 그들도 모른다. 어쩌면 눈이 아닐수도 있지만, 눈처럼 보였다. 인간의 것이 아닌,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도 아닌, 지금까지 인류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종의 생명체의 사악한 의지가 담긴 눈처럼 보였다. 그 흙빛의 동공이 이 세상을 향해 사악한 적개심을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은 모두 느꼈다.


“그것은 눈이 맞아.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세상에 대한 순수한 증오와 적의만을 갖고 있는 그런 생명체의 눈이었어. 자네는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수긍할 수 밖에 없어. 그 눈들이 나를 보고 있는 게 느껴지니까.”

“대체 언제부터였지? 그때 그 팔에서 툭 튀어나온 그 눈을 본 그때부터였나?

“그보단 조금 후였어. 내가 본격적으로 그 애의 정신상태를 진단하기 시작할 때부터였어. 처음에는 나도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했어. 아크로토모필리아(신체절단성애)와 조현병적 망상이 결합된 희귀성 정신질환의 하나일 것이라고 진단했지. 우리가 처음에 봤던 그 끔찍한 신체적 반응은 판단불능으로 제외해두고 말이야.”


불빛에 완전히 가까워졌다. 인적 없는 마을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실 그곳을 마을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거창했다. 단지 여름 휴양기에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해 몇 채의 별장들이 듬성듬성 들어선 소규모 주택 단지 불과한 것이었다. 휴가는 끝났고 이제 이 해변에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오직 황지안 혼자 이곳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


"자네도 카이저 16호가 이륙했던 날을 기억하지? 전 세계 사람들이 흥분과 기대감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봤던 그날 말이야.”

“그래. 기억해.” 동률은 라이터의 불을 키며 대답했다.

“아폴로 16호가 달탐사에 성공한 이후로 가장 위대한 우주 탐사 계획의 첫 시도라면서 온 세계가 열광했지. 한 달 가까이 전 세계 방송사들이 언플을 해댔고, 결국 온 세계로 실시간 중계됐지.”

“헤령의 아버지가 그 우주선에 타고 있었어. 카이저 탐사대의 물리분야 자문이었지.”


황지안의 시선은 모닥불이 타오르는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궤적을 따라 흩날리는 불꽃의 음영을 그는 묵묵히 바라보았다. 불길 뒤에서 너울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쫓아가는 시선운 고독한 사색가가 관조에 빠져 있는 듯한 눈길였다. 언뜻 춤추는 그림자 너머에서 붉은 색채의 뒤에 숨어 있는 검은 무엇이 동률의 눈에도 보이는 듯도 했지만, 동률에게 결코 친근한 느낌은 아니었다.


“강호성씨는 전문훈련을 받은 우주비행사는 아니었어. 하지만 천재적인 물리학자였지. 항성간 우주통신 이론의 연구 분야에 있어 아주 혁신적인 이론을 발표했다지, 물리학에 관해서 문외한인 나로썬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지. 그저 그가 자신의 이론에 코데사(ko-desa)라는 이름을 붙였단 것밖에는 몰라.”


코데사, 동률도 그 이름은 익히 들어본적 있다. 워낙 언론에서 크게 언급해대서, 그 명칭 하나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념의 정확한 원리는 역시나 난해했다. 동률이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미국의 웨스트버지니아에 있는 우주 무선 전파망원경과 비슷하다는 것뿐이었다.


“그걸 뭐라고 하더라. 그린뱅크망원경이라고 우주 과학을 다루는 신문 기사에서 본 것 같은데.” 잠시 한숨을 돌린 후에 지안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 맞아. 정확히 말해서 Green Bank Telescope라고 하지. 100년 전에 나사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규모에선 세계최대라고 한다는군. 하지만 기술적인 면에선 강호성씨와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아컴시티의 미스캐토닉 대학에 있다고 하는 아레보 망원경이 훨씬 진보적이래.”


지안은 잘려나간 손목이 다시 가려워진 듯 바지춤에 대고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려움증을 쫓아내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였다. 괴로움에 일그러진 그의 표정은 참으로 안쓰러웠다

“담배 한 대만 빌려 줄 수 있겠나?” 지안이 모닥불에서 고개를 돌려 동률을 향해 그 처량한 얼굴을 보였다. “담배라도 피워야 이 아픔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


동률이 지안의 남은 손에 담배를 주며 불을 불여줬다. 지안은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 후에 하얀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내가 들은 정보는 거의 헤령에게서 직접적으로 들은 얘기들로 채워져 있어. 누가 물리학 박사의 딸이 아니랄까봐, 그녀의 과학적 지식은 경이로울 수준이더군. 물론 우리 같은 평범한 일반인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럴 밖에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담배를 너무 깊게 마셨기 때문인지 다소 콜록거렸다.


“DESA란 Deep Space Antena란 뜻의 축약어야. 말그대로 원거리 무선 우주 통신망이란 뜻이지. 지금까지의 원거리 우주 통신이 지닌 기술적 한계점은 광할한 우주 전파를 수신하는 것만 가능햇을 뿐, 지구에서 보내는 전파를 우주의 어느 지점까지 정확하게 도달시키진 못하고 있었어. 그런 중에 강호성씨가 제안한 최신이론은 학자들을 열광시켰다더군. 그는 전파간 통신에서 중력장의 효과를 적용하는 방법에 큰 오류가 있음을 발견했다는 거야. 그는 그것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더군. 그런 장황한 수학적 이론은 설명해봤자, 큰 의미는 없을거야. 나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것을 자네라고 딱히 알겠나?”


“물론 내 관심도 학문적 토론은 아니야”

동률은 담뱃불을 비벼 끌만한 것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한쪽 손을 절단한 이후로 지안은 금연에 완전히 성공한 것인지, 재떨이로 쓸만한 것을 전혀 준비해두고 있지 않았다. 그는 빈 맥주병에 재를 떨어뜨리고 침을 한 방울 흘려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그 소녀와 자네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심리적이고 신체적인 변화야. 대체 어떤 끔찍한 질병이 자네들 사이에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걸까?”

“나도 모르지.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렇게 긴 과정을 되풀이 하는 건지도. 이 질병은 헤령의 아버지가 지구에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됐으니까. 어쩜 우주선이 토성궤도로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인지도, 아님 그 망할 토성인지 타이탄인지 하는 지랄 맞은 별에서부터 직접으로 온 건지도 모르지. 누가 알겠어?


그는 담배 꽁초를 바닥으로 그냥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모닥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빛에 반사되어 아른거리는 그의 얼굴은 더욱 노쇠해보였다. “아마도 이...... 이후로는.” 지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는 유인탐사선을 우주로 발사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야 해. 우주탐사 계획의 목적이라는 게 대체 뭐지? 지구 밖의 세계에 대한 탐험이란 거창한 목적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따져보면 외계생명체가 있는지 찾아내려고 혈안이지 않아? 외계인을 찾기 위해 이런 법석을 떨지 아니냔 말이야. 우주탐사에 참여하는 모든 기획사들 전부가 그런 싸구려 흥미만족을 위해 값비싼 목숨들을 대가로 희생하고 있어, 우리는 대체 뭘 보려고 하는 거지? 뭘 얻으려고 이런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황지안은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동률은 가능하다면 그의 심정을 억누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스스로 절제하기를 기대하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카이저 16호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살아 돌아온 사람은 강호성, 그 사람 한 명 뿐이었어. 언론에서는 우주선이 불시착했다느니, 착륙 직전에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았다느니 헛소릴 해댔지만, 나는 진실을 다 알아. 헤령이 모든 것을 다 내게 말을 해줬어. 그 남자가 우주 공간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다 알아. 하긴 말해봤자 누가 믿어줄까? 자네조차 지금 나를 믿지 못하고 있잖아. 하지만 곧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될 거야. 모든 사람들이.”


지나친 긴장이 그의 몸을 다시 떨게 하고 있었다. 특히 두 팔의 요동이 지나쳤다. 결박을 해야만 겨우 진정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보다 확실한 방법은 진정제를 투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나친 투약이 그의 몸을 어디까지 망가뜨릴지 도무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2.


기대가 크면 실망도 또한 큰 법이다. 그래서 실망 하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했고, 그것의 크기는 무한이었다. 많은 것을 기대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무엇을 원한 것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뜻이다. 미스캐토닉 대학의 천문과학부가 토성궤도에서 수신된 우주전파에서 어떤 문자적인 메시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그것은 단순히 우주 자기장의 한 종류에 불과할 뿐임을 수차례 언론에 밝혔음에도, 그리고 카이저 탐사대의 목적은 지적생명체나 외계문명의 발견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거듭 재확인 했음에도, 대중의 전반적인 열망은 대게 그런 것이었다.


밤바다의 바람이 무척 차갑고 거칠게 느껴져서, 동률의 어깨는 다소 움츠려 들었다. 마지막 가을 태풍이 곧 상륙할 것이라는 예보가 떠올랐다. 먹구름들 사이로 간혹 내비치는 만월을 볼 때마다, 동률은 침묵이 주는 무기력한 위안을 떠올렸다. 또한 피할 수 없는 공포가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음이 느껴졌다.


동률은 자기 자신에게 반문해보기도 했다. 그때 자신이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주변 세상은 소란했고, 사람들의 대화에서 카이저 탐험대가 이야기 소재로 등장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였지만, 정작 자신의 일상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변함없이 바빴다. 하루마다 수백 명이 입원하는 대학병원의 원장이 겪는 일상이 똑같이 반복될 뿐이었다. 수백 건의 보고서를 읽어야 했고, 수십 장의 입원 승인서에 사인을 했다. 매일 수십 명이 죽어서 병원을 나갔고, 출생신고서와 사망확인서를 행정 당국에 전송하는 보고서에 서명을 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주탐사선과 자신의 삶은 전혀 다른 세상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자신도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 지구의 한계를 초월해서 다른 곳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 비록 자신의 삶에 직접 관여하지 않지만 그런 류의 상상에는 꿈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 기대감은 다른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생각해보면 다른 이들의 심정도 다름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지만 보다 나은 삶, 다른 희망. 그 꿈이 여지없이 실망으로 돌아선 이유도 지극히 단순했다. 별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2068년에, NASA에서 달 탐사 100주년 기념 계획을 발표하면서 야심차게 출발했던 보먼 18호가 제2차 달 착륙을 시도했던 그 날, 그 달은 승무원 셋의 목숨을 암석과 이끼만 가득한 얼음대지 속에 묻어버렸다. 그로부터 11년 후 러시아 제국의 야심찬 부활에 대한 대외 선전적 성격이 짙었던 마스 플레이션 유인선이 화성 궤도에 접근하기도 전에 통신이 마비되고, 연락이 단절된 때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원거리 우주 탐사 계획은 줄기차게 시도됐다.

 

카이저 탐사선이 지구를 떠나 토성궤도의 근처까지 접근해간 18일 동안, 지구로 전송되어온 사진과 동영상들은 하나 같이 보통 사람들의 기대와 무관한 것들이었다. 그것은 무한한 어둠속에서 방랑하는 별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황량하고 공허한 검은 사막일 뿐이었다. 그 어두운 황무지 사이에서 드문드문 빛나는 유성체들이 전송하는 이미지의 뜻은 일반인들의 기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럼 대체 무엇이 그런 엄청난 열광을 이끌어냈을까? 독립 이후 100년의 역사동안 경제성장 외엔 이렇다한 대외적 과시거리가 없어 왔다는 국민적 열등감이 근원이었을까? 우리의 기술력으로 최초의 우주탐사선을 출발시킨 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 그것도 단 한 번도 인류의 발길이 닿은적 없는 미지의 별, 토성을 향한 탐험대를 조직한 것에 대한 자부심?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던 달을 이제 더는 쳐다보기가 싫어졌다. 그것은 만월의 간사한 속임수일 뿐이었다. 사악한 달은 죽음의 정상위에서 무엄하게 군림하고 있을 뿐이었다. 먹구름이 저것의 간사한 얼굴을 가려주면 좋을 것만 같았다. 헤령의 발작은 항상 만월이 떠오르는 주기로 강도가 극심해졌다. 만월이 뜨는 날에 가까워질수록 고통의 세기 또한 강해졌고, 만월이 지나면 가라앉기를 반복 해왔던 것이다. 달이 완전한 원형에 진입했다가, 조금씩 벋어나는 그 삼일이 지나면 모든 발작은 물러나고, 믿을 수 없는 평온이 찾아오곤 했다. 이제 동률은 만월이 물러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신이 논리와 과학적 사고가 아닌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무엇인가를 소망해보는 경험은 거의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 밤의 달은 해변 위에 장엄하게 솟아있었다. 어느 누구의 대적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 * *


“강헤령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어선 안 돼.” 새벽빛이 지안의 얼굴을 비췄다. 초췌하고 창백한 납빛이 구름에 가라앉은 어두운 햇살에 떠올랐다. 생기 없는 그의 눈빛이 동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이는 격리병동에 갇혔어.” 동률이 답했다. 그는 세 번째 맥주 병을 두 모금째 비우고 있었다. 안주로 삼을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속이 쓰려왔다.

“평생 거기서 나오지 못할 거야.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진 모르겠지만, 16살만에 모든 인생이 거기서 끝나버린 거야”

“그것으론 부족해. 그 아이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그 아이는 이제 리예의 딸이야. 고대의 종족의 일원이야.”


리예. 고대의 종족.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더 원(Elder One)’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미국 학자들은 이미 미지의 존재들에 대해서 나름의 연구를 진행해왔고, 일정한 명칭을 붙여두고 있었다. 그것이 천문과학 팀이나 고생물학 연구자들이 아닌 고전문학 문헌학 연구자들에게서 진행되고 있었단 사실이 너무나 뜻밖이긴 했지만 말이다. 동률은 석 달 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질문이 떠올랐다. 미스캐토닉 대학의 고전문학 석좌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그의 계정에 글을 남겼었다. 그는 헤령에 대해서 묻고 있었다.


‘미스캐토닉 대학은 오래전부터 카이저 사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탐사대의 주축이었던 천문과학부가 아닌 고전문학부를 담당하고 있는 제가 이런 관심을 표한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시기도 하실 겁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저희 고전문학부는 천문과학부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엘더 원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지면에 자세한 이야기를 하긴 힘들겠습니다. 또한 말해준다 해도 전혀 믿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카이저 16호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호성씨가 일가족을 몰살하고 자살해버렸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유일한 생존자인 그의 둘째 딸인 강헤령이 당신의 병원에 입원했단 것이 사실입니까? 응급실로 구조되어 올때부터 자신의 몸에 심각한 자상을 입혔단 풍문이 사실인지요?’


“고전문학부는 카이저 탐사계획이 기획될 때부터 천문과학부에 간섭을 했었다더군.” 동률이 말했다.


“자네는 헤령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겠지. 그들은 토성탐사 계획에 대해서 초기부터 격렬히 반대해왔다는 사실말이야. 유인우주선을 보내는 짓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미치광이 취급은 그들이 받아야 했지. 21세기에 고대 금서를 들먹이며, 첨단과학의 영역에 제동을 걸려했다는 시도 자체가 멍청하게만 보였을 거야.”


카시니 1호의 엔진이 꺼져 버린 것은 2017년, 3년 후에 2호의 엔진이 꺼져버렸다. 그 후부터 60여 년간 인류의 눈길이 토성을 향한 적은 없었다. 토성은 인류에게는 풀 수 없는 미지의 별로, 그리고 인류와는 무관한 별개의 운명을 지닌 별처럼만 여겨졌다. 적어도 위성 타이탄에서 송출된 것으로 여겨지는 어떤 불가해한 메시지를 지구인들이 수신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우주자기장이 아니었어.” 지안이 말했다. “어떻게 그것을 말로 설명할 수가 있을까? 우주자기장이란 우주를 아주 목적 없이 떠도는 전파들이 간혹 지구 곳곳에 설치된 우주 안테나에 불규칙하게 수집되는 것을 뜻해. 하지만 그때 수신된 전파는 달랐어. 우주 전파가 어떤 궤도에서 정확하게 지구를 향해 송출되는 경우는 그 이전에는 절대 없었어. 마치 궁수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듯이, 그것은 타이탄에서 지구를 향해 송출되었던 거야.”


하지만 그들은 언론에 그런 사실을 공표하기를 거부했다. 과학자들의 세계는 항상 가설로만 둘러싸여 있으니까. 의심은 그들의 기반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고전문학부는 이미 그 때부터 무엇인가를 짐작하고 있었다. 특히나 호지슨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불안한 꿈에 시달렸다고 한다. 문헌학부 교수로 살아오면서 그토록 불안한 꿈을 꾼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다.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직후부터 그 꿈이 대학의 희귀장서 보관실에 봉인된 어떤 고대의 금서와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동률이 지안에게 물었다. “네크로노미콘이란 책에 대해서 들어보았나?”


동률은 지안의 초췌한 눈길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도 못지않게 흐릿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몸속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자기를 노려보고 있다는 지안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 * *


그것은 삼차원의 영상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책을 읽을 때조차, 그 책을 읽는 다른 이의 눈이 있었다. 헤령은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을 때의 첫 충격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소름끼치도록 오싹했다. 날짜를 세진 않았다. 아빠가 조난된 우주탐사선에서 구조되어 집으로 돌아온 난후, 하지를 막 지난 첫 번째 보름 때부터 였을 거라 짐작될 뿐이었다. 그 이상한 눈의 시선은 만월의 주기와 관계가 깊었다. 마치 달의 눈을 통해 세상 전부를 내려다보고 싶은 듯이, 만월이 떠오르면 자신의 검은 눈을 치켜뜨는 것이었다. 가려움은 항상 잠복해 있었다. 미칠 듯이 가려웠다. 피부속에서 알 수 없는 괴생명체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감각이 자기를 점점 장악해오고 있는데, 그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더 큰 괴로움이었다.


아빠는 자기방속에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우주 탐사 이전에는 일 때문에 보기 힘들었던 얼굴을, 이제는 자기 내면에 파묻혀서 더는 볼 수 없었다. 밤이 깊어져도 방의 불을 키려고 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거울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거울만 쳐다보면 헛것을 보는 전형적인 정신병자가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아빠가 느꼈던 고통을 모두 이해하게 됐다. 눈을 감을 때마다 지옥이 보였다. 아빠가 직접 보았던 그 지옥을 이제는 자신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아빠가 토성의 이심 궤도로 진입할 때부터 겪었던 일을 모두 보았다. 이계의 생명체들끼리 공유하는 기억의 전이였다.


아빠는 타이탄의 북반구에서 회오리치는 폭풍의 눈을 향해 초소형 우주 안테나를 쐈다. 더 정확히, 그가 기획하고 설계한 마이크로 우주 전파를 폭풍의 눈 너머에 있는 세계를 향해 발신했던 것이다. 코데사에 잡히는 수신 전파는 없었다. 토성 저편에서 아무런 응답도 오지 않았다. 카이저 호는 타이탄 궤도를 이틀 더 비행한 후, 코데사 프로젝트를 잠정적인 실패로 결론 내렸다.


하지만 폭풍의 눈을 가장 가까이서 본 탐사대원들은 그 영상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탐사대원 모두가 공감했다. 코리는 그 풍광이 마치 심연의 한복판에서 휘몰아치는 그랜드캐니언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마이크는 폭풍의 중심부에 떠 있는 검은 눈이 지옥을 향해 입을 벌린 심연의 입 구멍 같이 보인다고 했다. 누구보다 강호성 자신의 실망이 컸다. 그가 코데사 프로젝트의 총책이었으니. 그는 코데사의 분광기에 스캐닝된 영상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식물이나 생명체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광물로 짐작되는 흔적은 드문드문 나타났다. 하지만 표면의 풍속이 965킬로미터로 짐작되는 그 어마어마한 풍동을 향해서 내려갈 순 없었다. 어느 정도는 충분히 예상한 결과였다. 외계문명과의 교신이란 하나의 가설일 뿐이었다. 카이저는 우주탐사 역사상 가장 머나먼 별을 향해간 최초의 유인선이라는 성과를 달성했다. 행성 궤도를 휘감는 맹렬한 풍속에 휩쓸리지 않는 탄탄한 선체를 완성해낸 것 또한 성과였다. 그러나 실망감과 패배감을 넘어서는 두려움의 감정이 그들을 옥죄어 왔다. 그들 모두가 보아선 안 될 것을 보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 검고 사악한 눈, 불의 고리와 같던 소용돌이, 그 주변에서 들려오던 것처럼 느껴지는 요란한 북소리는 착각이라 믿으려고 애써도 현시처럼 생생했다. 모든 승무원들이 잠들 때마다 그런 것을 꿈에서 보았다. 호성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들이 미스캐토닉 대학의 연구팀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과 고전문학부 간에 토성탐사 계획을 두고 미묘한 알력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고전문학부의 경고는 아무 힘도 없었지만, 그들은 줄기차게 요구했다. 타이탄의 중심부위를 항해중이더라도, 그것을 눈으로 보려 하지 말 것, 코데사를 발신할 계획을 가능한 재고할 것, 설령 어떠한 메시지를 응답받더라도 즉각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말 것. 그들은 그런 것을 요구했다. 천문과학부의 입장에선 재고해볼 가치도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타이탄에서 온 우주 전파를 수십 차례나 스캐닝해서 잡아낸 음성 주파를 예측하고 있었단 사실은 다시 생각해봐도 충격이었다. 어떻게 그들은 그 소리를 알고 있었을까?

‘크툴루 파탄.’


고전문학부는 이 문장의 뜻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단지 그것이 결코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될 주술적 문장이라고만 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극소수의 언어학자와 문화학자들만이 그 뜻을 알고 있으며, 절대로 암송하거나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고 했다. 천문과학팀은 그 경고를 미신적인 헛소리로 일축했다. 대학 전체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이제 모두가 그 주문을 듣고 있다. ‘이아, 이아, 크툴루 파탄.’ 조용하고 느린 음성으로 들려왔다. 마치 머나먼 저편의 세계에서 들려오는 부름처럼. 헤령에게도 그들의 부름이 들렸다. 헤령은 그들이 보여줬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카이저호의 탐사대원들은 기술 결함으로 조난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광기에 휩싸여 서로를 죽였다. 지구에 착륙하기 훨씬 이전부터 카이저호에 살아남은 사람은 헤령의 아빠 한사람 뿐이었다. 모두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의 눈으로 동료들을 보았다. 증오의 눈으로 이전까지 친구였던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 자신의 감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들의 인간적 감정은 이미 우주선과 함께 실종되고 없었다.


***


두려움은 그저 만화책을 보는 평범한 밤에 찾아왔다. 아빠가 집에 돌아온 후 첫 번째 찾아온 보름밤이었다. 뻔한 만화책이었고, 수십 번도 봤던 내용이었다.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소녀, 연쇄살인마, 울창하고 고적한 숲속에 숨은 피에 굶주린 흡혈귀들. 만화책은 헤령에게 남다른 힘을 갖고 있었다. 현실 밖으로 나오면 만화속의 캐릭터들은 생명력이 없었다. 만화 밖에 있는 세상 속의 진짜 악마들에 비하면 나약하고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캐릭터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었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의 힘에 불과할 뿐이었다. 늑대소녀는 만화 밖으로 나오면 옆집 할머니가 키우는 푸들 강아지만 봐도 오줌을 지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이 그들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늑대소녀, 무한하고 공허한 어둠속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악하고 교만한 시선, 헤령은 그 움츠러든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보고 있던 만화 장면속에는 늑대들에게 겁탈당하는 소녀가 있었다. 보름 동안 소녀는 자신의 내면속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야수적인 본성과 맞서 싸워야 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었지만, 점점 그녀는 그것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기의 본연적 감정임을 이해하게 된다. 마침내 보름달이 뜨는 밤에 소녀는 변한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소녀는 악의 화신으로 부활하는 자신을 기쁨에 충만한 감정으로 맞이한다. 소녀는 양치기의 지팡이를 지고 한 무리의 사냥개들을 이끌고, 달이 떠오르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그 개들은 지옥에서 데려온 늑대들이다. 소녀의 손에는 손가락 마디마다 해골 얼굴이 장식된 반지가 박혀 있다. 그것들 전부 갓난아기의 뼈로 만들어진 것이다.


헤령은 소녀의 순수하게 사악한, 감정 없는 눈이 자기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눈으로 만화속의 소녀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상황을 이해하게 된 순간 표현할 수 없는 소름이 끼쳐왔다. 헤령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펼쳐보았다. 오른손이었다. 손가락을 굽히는 마디마디에 붉은 종양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만화속의 늑대소녀가 멋진 보석장식으로 수놓은 그 마디 부위마다 자기에겐 흉측하고 소름끼치는 것이 생겨나고 있었다. 창밖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왔다. 창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백한 만월뿐이었다. 생기를 잃은 싸늘한 인상만을 전해오는 차가운 빛이었다. 그 침묵하는 시선에서 그녀는 자신을 음탕하게 바라보는 사악한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헤령은 천천히, 유심히 자신의 손을 다시 한편 살폈다. 가려움이 차츰 밀려왔다. 낯설고 더러운 생명체가 자신의 손속에 들어온 것만 같았다. 손가락 끝부분부터 빨갛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아주 작은 빨간색 동그라미가 지문이 있는 그곳에서 생겨나고 있었다. 모든 손가락의 마디 부위마다 불긋케 물들어 오르고 있었다. 구역지기가 올라올 것만 같이 징그러운 느낌이엇다. 검지를 입에 갖다 대 그것을 깨물었다. 순간, 어떤 것이 목구멍이 타고 넘어 들어왔다. 목구멍이 막히고 가시가 박힌 듯이 뱃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반강제적인 의지로 토악질을 해댔지만, 그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헤령은 미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몸서리쳤다. 이제 더는 그녀가 자기의 육체의 주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썩기 시작하는 생선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숨도 잠들지 못한 첫 번째 만월의 밤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아빠가 왜 자기 방밖으로 나가길 그토록 거부하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이 그녀의 아빠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빠가 두려움에 떨면서 의학사전을 뒤적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마치 눈앞에서 곧바로 보이는 것처럼 생생한 장면이었다. 아빠는 의학사전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책에 적힌 내용이란 아무 병이나 다 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그런 종류의 병들 뿐이었다. 헤령은 새벽녘에 이르러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들었다.


깨어나자마자 손에 붕대를 둘둘 감았다. 구급상자에 들어있는 소량의 붕대는 별 쓸모가 없었다. 빨갛게 물든 손가락 부위마다 시커먼 눈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이 세상을 내다보는 그 시선이 소름끼치도록 전해졌다. 그들은 어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만화속의 악마들이 빛을 증오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감정이었다. 그들은 감정은 모순적이었다. 그들은 아직 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엔 유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그들에게 낯선 세상을 노려보고자 했다. 헤령은 그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통해 새 생명을 얻고자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몸에 탄 탑승객이었고, 그녀의 몸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가길 원하고 있었다.



방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밥먹으러 오라는 엄마의 말도 무시했다. 오늘밤에도 만월이 뜰거란 사실이 그녀를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으로 해가 지고 어둠이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손에 생겨난 모든 눈들이 아빠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빠의 방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아빠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빠의 몸속에 들어있는 그들이 그 영상을 그녀에게 전송해주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커다란 식칼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왼손이었다. 칼끝이 오른손의 손바닥에 자라난 검은 눈을 겨냥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눈들이 혐오의 눈길로 아빠를 노려보고 있었다.


팔목이 잘려나가는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모두가 함께 느끼는 아픔이었다.모든 눈들에게서 일그러진 혐오의 감정을 볼 수 있었다.


헤령은 단숨에 아빠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이 잠겨있었지만, 그녀의 오른손은 세 번 만에 문잡이를 부셔버리게 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겨났는지, 그녀 자신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보름 만에 다시 본 아빠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의 형체가 아니었다.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빠가 다시 식칼을 쥔 손을 들어올렸다. 다른 눈을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 헤령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왜 손을 뻗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절망에 일그러진 아빠의 몰골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각도에서, 다른 위치에서, 아빠를 보여주는 눈이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생겨난 검은 눈이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빠의 일그러진 내면을 비추고 있었다. 발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 황급히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엄마였다. ‘이쪽으로 다가오지마. 엄마. 여기에 오면 안돼.’ 헤령은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자기만이 하는 생각이 아니었다. 아빠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눈들이 모든 생각을 시각적으로 변환시켜 보여주고 있었다. 손을 뻗쳐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본능이 그녀의 생각을 거부하였다.


손바닥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엄마의 얼굴을 그 검은 눈이 보여줬다. 그 눈이 보여준 다음 장면은 아빠의 방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촉수였다. 아득한 심해에서 서식하는 것 같은 흉측한 문어의 다리 같은 것이 엄마의 발목을 낚아챘다. 헤령은 엄마가 아빠의 방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이 엄마를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소름도, 혐오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같은 감정조차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모두 사라져버렸음을 깨달았다. 방안에서 꿈틀거리는 촉수들이 희미한 빛에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무언극을 하는 그림자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들이 엄마의 블라우스를 찢는 것을 보았다. 좌절과 공포의 깊은 늪에 빠져 질러대는 엄마의 비명과는 다른 비명들이 방안 곳곳에서 들려왔다.


헤령은 이층의 언니방으로 달려갔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삼학년인 언니에게 헤령은 언제 철이 들지 모르는 아이였다. 언니가 그녀에게 하는 모든 행동과 말투에는 빈정거림이 섞여있었다. 더욱 싫은 것은 자기 자신이었다. 언니가 빈정대는 지적을 할 때 마다 맞서 싸울 논리가 떠오르지 않은 자신이 싫었다. 싸울 용기조차 없는 자기가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언니를 향해 그 손을 뻗은 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침대 아래 숨어 있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서 끄집어 낸 행동은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질려 벌벌 떨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언니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던 그때의 감정은 누구의 것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열여섯 해동안 같이 살아오면서 쌓아왔던 기억과 감정의 공유는, 그 순간에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여자가 징그러운 해충처럼 보일 뿐이었다.


언니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을 때, 검은 눈은 만월의 시선을 보여줬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달이 지금 오직 이 집안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이 그들과 그녀를 모두 기괴하게 만족시키고 있었다. 방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널부러져 있는 어여쁜 여자의 나체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묘한 흥분감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느낄 수 있었다. 어디에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섯 살 난 남동생은 벽장 속에 틀어박혀 울고 있었다. 그 아이도 더는 남동생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이 아이가 징징 거리지 않았던 때가 떠오르지 않았다. 때를 쓰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얻어냈다. 무엇이든 용서받았다. 어리다는 특권 하나만 믿고 기어오르고 닦달하는 이 아이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도 해충일 뿐이었다. 그녀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검은 눈을 뻗었다.


시간은 그저 덧없이 흘러갈 뿐이었다. 헤령은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원하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아빠도 줄곧 이런 행동을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빠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건들을 앞에 두고 몇 시간씩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숟가락, 담배, 술병. 그런 것들을 앞에 두고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했다. 그들이 아빠의 몸에 탑승했을 때부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하는 행동이었다. 그들에게 낯선 세상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변화시키길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평범하고 익숙한 세상을 그들의 장소로 바꾸고 싶어 했다. 낯설고 기괴한 영상이 가득한 섬뜩한 흉가 같은 곳으로 말이다. 그들의 뒤틀린 욕망은 마침내 성취감을 이뤄냈다.


갑자기 모든 눈들이 다시 아빠에게로 쏟아졌다. 아빠의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 최후의 저항을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다시 아빠를 보았을 때, 아빠는 넝마처럼 찢겨진 엄마의 시체를 앞에 두고 절규하고 있었다. 아빠의 손이 다시 식칼을 쥐었다. 그가 자신의 목을 찌르려 하고 있었다. 그 행동을 막고 싶은 욕구는 동시에 그들과 함께 느껴졌다. 하지만 그 때의 감정은 그들의 욕망과는 달랐다. 모든 눈들이 아빠를 향해 보내는 증오의 감정과는 다른 감정이 일었다. 그 순간에서야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순간에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냉소와 증오의 눈으로 아빠를 노려보는 그들과 함께.


3.


가려움. 미칠 듯한 가려움. 그놈들이 몸속을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 수십 마리의 기생충이 몸안의 이곳저곳을 이리저리 기어다니고 있는 느낌. 가장 심한 곳은 팔이었다. 하지만 긁어선 안 된다. 긁을수록 더 많은 눈들이 생겨난다. 그놈들이 이 세상을 엿보고 싶어한다는 요구였다. 아직은 그들에게 낯선 어둠을 익숙한 어둠으로 바꾸고 싶다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 이 세상을 보여줄 때마다, 지안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끔찍한 지옥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들이 세상의 빛에 적응할수록, 지안은 지옥의 어둠에 익숙해졌다. 빛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어둠이었다. 우주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악마의 성전을 그놈들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인류보다 더 길고 오래된 지옥의 제단이 그의 몸속에 들어있었다. 그 제단의 기둥위에 싸늘한 시선으로 이 행성을 내려다보는 폭풍의 눈이 보였다. 토성이 그 눈으로 이 행성의 인류를 모두 엿보려고 하고 있었다. 지안에게 토성의 사악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 거대한 암흑의 눈두덩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지구를 그는 보았다. 푸르고 푸른 타원의 공을 삼켜버리는 진흙 구덩처럼 시커먼 눈. 지구는 그저 눈깔사탕을 씹는 것처럼 토성의 위속에서 허물어졌다. 그런 영상을 보면서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지안은 비명을 질렀다. 그런 꿈을 꿀 때마다 영혼의 한 조각을 잃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영혼의 전부를 그들에게 흡수당할 것이다. 그들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는 걸까? 지금으로선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여기서부터 어디로 가야돼?” 동률이 뒤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지안을 고개를 들어 짐칸의 창밖을 살펴보았다. 오른쪽으로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낯선 이유는 그의 눈으로 이곳의 풍경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이유는 그의 몸을 이용해서 그들이 이곳을 찾아온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갈림길이었다. 비포장도로로 진입하는 지점이었다. 경사가 미친 듯이 앞과 옆으로 불규칙하게 이어지는 곳, 조그만 언덕들이 머리와 머리를 잇대면서 맞부딪치듯이 맞물리는 곳, 등산객들도 찾지 않는 깊숙한 곳이었다.그 산은 높지 않은 야산이면서도 안으로 들어갈수록 제법 울창한 숲을 형성하고 있었다.


“왼쪽으로 들어가. 더 들어가면 계곡이 있어.” 지안이 대답했다. 지안은 가끔 동률의 운전 실력을 비웃었다. 쉰 이 넘은 성인답지 않게 운전대만 잡으면 소녀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묵묵히 있었다. 그의 2059년형 사륜구동차는 자같밭을 달리는데 거침이 없었다. 돌밭길을 성큼성큼 디딜 때마다 요란한 덜컹거림이 전해져왔다. 소음과 진동이 다시금 지안의 의식을 희미한 경계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상상과 꿈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깊은 잠에 들 때마다 보이는 영상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인간과는 달랐지만 인간과 비슷한 형체들, 넝마처럼 너덜한 검은 수의를 치렁하게 걸친 형체들, 그들의 검은 천 밖으로 튀어나온 손과 발에는 물갈퀴가 붙어 있었다. 그 시커먼 형체들이 거석 기둥의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날 죽여야 돼.” 동률은 지안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잠꼬대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무덤을 찾는 게 먼저야.” 동률이 대답했다.


사륜구동차의 요란한 진동을 느끼면서 지안은 화성을 상상했다. 아직 인류의 발길이 닿아본적 없는 별,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도 암석과 자갈 밖에 볼 수 없는 황무지의 별. 화성을 인간이 탐험한다면 지금과 같은 기분을 느낄 것 같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인류가 그 별을 꿈꿔온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화성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저 붉은 죽음의 별일뿐이었다.


다시 그들의 형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들 중의 한 명이 물갈퀴 달린 손으로 제단위에 놓인 책을 펼치는 장면이 떠올랐다. 기괴한 도형과 이상한 기호로 가득한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담은 책이었다. 그 자가 책의 한 페이지에 적힌 주문 비슷한 것을 암송할 때, 지안은 그 기괴한 음성을 듣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개구리와 도롱뇽 같은 생명체가 인간의 음성을 발성하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차토구아 크툴루 파탄. 그나 바담피스 아포라고몬.”


동률은 하마터면 운전대의 손을 놓을 뻔했다. 급브레이크를 밞았을지도 몰랐다. 지안이 잠결에 중얼거린 그 주문, 그것이 지옥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있는 암흑의 존재들이 보내는 메시지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스캐토닉 대학의 호지슨과 이메일을 교환하면서 그는 헤령과 지안이 암송하는 그 해괴한 주문의 뜻을 계속 물었다. 하지만 호지슨은 결코 그 말들의 의미를 해석해주길 거부했다. 만약 당신이 그 뜻을 알게 된다면 결코 제 정신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란 이유였다. 미쳐버리거나 광증을 거부할 방법은 자살 외에는 없을 것이라면서.


대신 호지슨은 지안이 보내는 전문의 내용을 확인시켜 주며, 그들의 중얼거림이 단순한 헛소리가 아님을 확신시켜 주었다. 이를테면 “판클루 글루나파”라는 문장 뒤에 “크툴루 리예”라는 문장이 따르지 않는지, “흐즐롱퀴”로 시작하는 발음하기 힘든 긴 단어 뒤에는 항상 “차토구아”라는 단어가 뒤따르는지 묻는 식이었다. ‘크툴루, 차토구아. 그런 이름들은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될 것들에게 붙여진 이름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이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는 아닐테지만요.’ 호지슨에게서 가장 최근에 받은 이메일의 내용이 떠올랐다.


먼 바다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렸다. 해변너머로 폭풍우를 담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번개가 물위로 하나둘씩 내리쳤다. 하지만 동률의 몸이 떨려오는 것은 자연의 그런 현상과는 무관했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의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알 수 없는 것, 설명할 수 없는 존재들이 두려움의 원인인지도 몰랐다. 동률은 한 번도 이해 한적 없는 감정이었다. 과학에 대한 신념이 생긴 후부터는 더욱 확고해졌다. 그에게 미지란 단지 아직 이성의 영역이 닿지 않은 분야일 뿐이었다. 불가해란 아직 과학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세상에 대한 명칭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믿을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자그마한 계곡이 나타났다. 가느다란 폭포가 떨어지는 곳이었다. 짙은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워서 조금 음침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을 빼면 세상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폭포일 뿐이었다.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허리도 잠길 것 같지 않은 작은 연못이 지키고 있는 이런 별 볼일 없는 곳에 열여섯 구의 시체를 묻어둘 수 있을까? 동률이 부삽을 들 때부터 지안은 예감할 수 있었다. 놈들은 그의 몸에 탑승했고, 언제든 그 몸을 이용할 수 있다. 그를 이용해서 그 사람들을 죽였으니, 그를 이용해서 그들의 시체를 옮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항상 붕대 속에 놈들을 숨겨두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자신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지속되는 요구를 영영히 뿌리칠 수만은 없었다.


동률은 삽질을 한참동안 해보지 않은 듯했다. 그래도 자갈덩이를 겉어내고 축축한 모래알갱이까지 파헤칠 수 있었다. 서투른 삽질이 계속됐지만, 자갈덩이를 한참 동안 파헤쳐도,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없잖아.”


동률은 진흙으로 축축해진 부삽을 집어던졌다. 얼굴이 온통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진흙더미가 만든 언덕쪽으로 걸어가서 털썩 주저 앉아버렸다. 몹시 지쳐보였다. 비를 가득 담은 먹구름이 계곡을 완전히 덮기 시작했다. 지안은 굳이 시체를 찾겠다면 해가 지기 전에 찾아야 한다고 그를 재촉했지만, 폭풍우가 잔뜩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시간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놈들이 내 몸을 이용해서 옳긴 거야. 내가 잠든 동안에 말이야.”

“너한테는 한쪽 팔이 없고, 두 다리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걸을 수조차 없잖아. 그런 몸으로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매장하고, 파헤치기 까지 했다고?”

짙은 먹구름 아래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동정심이 가득했다. 지안은 휠체어 바퀴를 천천히 밀면서, 사륜구동차의 운전석으로 끌고 갔다. 그는 반쯤 열린 창문너머로 손을 뻗어, 운전대를 만지작거렸다.


“그건 자네가 이 차를 움직이는 거랑 비슷해.”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마음만 먹으면 이 차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잖아.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겠지만, 맘만 먹으면 사람도 죽일 수 있어. 그거랑 똑같아. 그들은 내 몸에 탑승했고, 내 몸을 이용해서 어디든 갈 수 있어. 그놈들은 내 몸에 탄 탑승객들이야. 이제 내 몸을 조종하고 있지. 날이 갈수록 나는 나 자신을 지키기 힘들어. 요즘 들어선 거의 꼬박 하루를 내 정신이 아닌 상태로 보낼 때도 있어. 잠이든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 동안에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 정신이 들어보면 그 외딴 오두막집에 있을 뿐이야. 멍하니, 휠체어에 앉은 채로.”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자. 지안아.”

“자네도 내 몸속에 무엇이 들어와있는지 알고 있어. 그런데도 해줄 수 있는 말이 그것 뿐이야?”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자네가 살인범이 될 수는 없어.”

“자네는 나를 죽여야 해. 그 사람도 자네에게 경고를 하고 있지 않은가? 보름달이 네 번 뜨기 전까지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동률의 눈모양이 자신도 모르게 휘등그레졌다. 그는 결코 지안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준적이 없었다.

“다알아. 내안의 그들이 자네의 생각을 다 읽어서 나에게 보여주고 있어. 자네는 나를 봐야 정확히 봐야돼. 내가 아직도 인간인지 봐야 한다고.”


지안은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그가 쓸 수 있는 손은 하나 뿐이었지만 모든 매듭이 단선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었다. 온 몸을 감은 붕대들이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


헤령은 눈을 떴다. 꿈속에서 달이 지나갔다. 보통의 달이 아닌 토성의 영혼 주위를 스쳐가는 달, 타이탄이었다. 토성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눈을 꿈뻑거렸다. 타이탄이 토성 궤도를 네 번 비행하고, 토성의 눈이 네 번째 끔뻑거렸을 때, 그녀는 이제 자신이 완전히 토성의 눈으로 모든 우주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까마득한 우주를 아무 목적 없이 떠도는 모든 행성들을 볼 수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 지식도, 빛도, 이름도 없이 굴러다니는 무한대수의 별들 중에 푸르스름한 빛을 띤 하나의 별이 있었다. 지구였다.


헤령에게 그것은 볼품없는 조그만 별일뿐이었다. 배구공처럼 걷어차면 아무 곳으로나 튕겨 나갈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녀는 자신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 이 별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자신의 손이 가재의 발처럼 커다란 집게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충동 때문에 손을 뻗쳤고, 그 충동은 지구라는 별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고통과 아픔을 듣게 했다. 지구에 속한 모든 것들이 처절하게 울면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성가시고 짜증나는 비명일 뿐이었다.


그녀는 집게손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지구의 양쪽 경사가 움푹 찌그러졌다. 바람 가득 담긴 튜브를 터뜨리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지구는 두 조각으로 찢어져버렸다. 양쪽으로 박살난 두개골처럼, 시뻘건 피가 흘러나오는 장면은 뜻밖이었다. 포도주가 가득 담은 유리병이 깨져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어두컴컴한 우주의 벽면 한구석을 적시고 있었다.


헤령은 다시 눈을 떴다. 놀라움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기에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더없이 편안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폐쇄병실에는 창문이 없지만 그녀는 먼 곳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만월이 자신을 포근한 시선으로 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감금병동에는 화장실도 샤워시설도 없었다. 심지어는 창문조차 없었다. 우주 저편의 머나먼 곳에 있는 존재들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이미지를 전송하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제 저녁 네 번째 보름달이 떴다는 것을.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볼 필요가 없었다. 눈들이 모든 세상을 다른 차원으로 보여주면서, 그녀는 이제 인간이란 대상조차 사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의 논리적 과정을 모두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하는 유추나 직관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말이다.


감금병동을 감찰하는 오늘의 당직관은 그럭저럭 괜찮은 남자였다. 그는 사십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자기 관리에 무척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적당한 키에 나이답지 않은 피부의 탄력, 군살없는 몸매등은 완벽한 정도는 아니어도 비슷한 나이대의 이성에겐 충분히 어필한만 했다. 하지만 헤령에겐 그뿐이었다. 그는 아직까지 연상의 남자에게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알수 있었다.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그녀의 몸에 침입해온 이후로, 지금까지 타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단 1초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의 관심조차 아니었다. 그저 생각이 보여질 뿐이었다.


그녀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그 남자의 정신이었다. 정신을 지배하고 장악하는 것은 보는 것과는 다른 능력이었다. 감지기로 타인의 뇌파 신호를 읽어낼 순 있지만, 그것을 라디오의 주파수로 변환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고 황량한 우주라는 사막에서 무수한 별들이 하나의 거대한 눈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당직관은 헤령을 처음 봤을 때 그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여동생이 있었다. 헤령과 비슷한 시절에 병치레가 잦았다. 아주 닮은 것은 아니었지만 선량한 눈매가 여동생과 닮았다. 얼굴에 가득한 피칠, 특히 입가 주변의 핏덩이는 끔찍한 사고의 현장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의 것으로만 보였다. 그 피가 방금 젊은 남자 의사의 목을 물어뜯어서 생겨난 것이란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목덜미가 줄기째 찢어져 그 의사가 긴급 수혈을 받고 있단 주변의 이야기도 거짓말은 아닌 듯 했다. 어쨌든 지금 그녀는 감금병동의 가장 깊숙한 곳에 은폐되어 있다. 909호 병실, 사람들은 그녀를 909호의 괴물이라 부른다. 문주위로 하얀 커튼을 쳐서 병실 안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햇살 하나 들어올 창문조차 없는 완벽한 감금실이었다.


그런 곳에서 지금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틀림없이 들리고 있었다. 억제대를 차고 있는 괴물이 살고 있는 방안에서 누군가 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두려웠지만 밀려오는 호기심을 감당할 수도 없었다. 지금껏 909호에 갇힌 여자가 정말 괴물인지 직접 확인해본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난 보름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본적이 없었다. 감금병동에 갇힌 환자들 모두가 치유불능의 광증을 앓고 있다는 점에선 똑같은 처지였지만, 유독 그녀에게만 어떤 외출도 허락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하루에 네 번 허용되는 화장실 출입 시간과 사흘에 한번 있는 샤워조차 자신이 아닌 특별 관리인이 동행하는 상태에서만 가능했다. 그래서 감독관들중에서 그녀의 상태를 직접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괴물이란 단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럼 대체 909호에는 누가 있는거지?’


그가 커튼을 열어젖혀 문 상단의 책가방만한 유리창살 너머로 불빛을 비추며 들여다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꿈에서도 만나본 적 없는 아리따운 소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침대위에 앉아 있었다. 다리는 양 옆으로 벌어져 있었고, 왼 손은 다리 사이의 그 부분에, 오른손은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은 이제껏 어느 여자도 그에게 보여준 적 없었던 달콤하고 음탕한 유혹의 눈길이었다. 그 어두운 방안에서 욕정 가득한 음탕함이 관능적인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 있었다. 문을 열어젖히고 있다는 사실 또한 눈치 채지 못했다.


단지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뿐이었다. ‘날 보러 와. 아저씨. 그동안 나를 보고 싶었잖아? 어서와.’ 그녀의 음성이 실제로 들린 것인지, 아님 그렇게 들리는 듯한 착각인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단지 그 희고 축축한 얼굴을 어루만졌고, 하와를 유혹했던 붉은 사과 같은 입술에 입을 포개었을(하지만 실제의 그 입술은 납덩이같은 칙칙한 잿빛이었을) 뿐이었다. 세상 누구와도 나눠본적 없는 격렬하고 달콤한 키스를 주고받았다. 그의 손은 팽팽하고 육각적인 몸 이곳저곳을 더듬고 있었다. 마침내 다리 사이로 그의 손이 들어갔을 때, 그 움푹한 곳의 부드러운 축축함에 모든 감각을 내맡기고 있을 때였다.


무엇인가 그의 목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뱀의 독니처럼 날카로운 것이었다. 혀와 혀를 간지럽히고 있을 때도, 그리고 손으로 몸을 더듬는 동안에도 듬성듬성 끈적끈적하고 흐물흐물한 살갗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런 불쾌감도 없었고 오히려 흥분을 고조시키기만 했다. 이제 그의 몸을 유린하는 것은 죽음의 차디찬 손이었다. 그 거칠고 쭈글한 손이 안과 밖에서 그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서도 뭔가 다른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죽음보다 더한 통증이었다. 상어의 이빨 같은 것에 물린 사람이라면 느껴보았음직한 그런 아픔, 그 차갑고 냉습한 고통의 실체를 보기 위해 시선을 내렸을 때 그가 본 것은 이미 잘려나간 자신의 손목이었다. 그는 쓰려져서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뒹굴었다. 속수무책의 공포감이 비명조차 지를 수 없게 했다. 잘려나간 손목에서 솟구치는 피를 본 순간에는 고통조차 차츰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희뿌연 어둠 너머에서 그가 눈으로 본 것은, 그녀의 다리 사이 음부, 그곳에 자라난 눈이었다. 그 눈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감시하는 것처럼 악의를 내뿜고 있었다.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자신이 지옥의 눈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4.


“자네는 나를 잘 알아. 내 안에 있는 그것들이 편집증적 망상 환자들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말이야. 내 속에 있는 ‘그들, 그것들, 그놈들.’은 결코 망상이 아냐. 놈들은 내 몸속에 들어있는 실존체들이야.”


거센 바람에 나풀거려서 지안이 풀고 있는 붕대는 고르게 떨어지지 않았다. 폭풍이 점점 거세게 계곡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마지막 매듭이 풀리는 순간에 동률은 침을 삼켰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해두고 있었다. 지안의 몸속에 그의 것이 아닌 다른 신체가 숨겨져 있단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매듭에서 해방된 지안이 몸에 자란 그것들은, 모든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온 몸에 솟아난 오돌토돌한 돌기, 두꺼비처럼 축 늘어난 피부, 종양이 자라난 부위마다 시커먼 흑막이 덮인 그 눈, 검은 눈이 생겨나 있었다. 이제야 동률은 지안이 그간 겪어왔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마음과 싸우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소매춤안으로 넣었다. 그는 러시아제 권총을 손으로 매만졌다. MP 446의 최신형 버전이었다. 하지만 차마 총을 꺼내들 수 없었다. 그가 지안과 함께 보낸 26년간의 추억이 그런 행동을 막고 있었다. 그 오래된 우정을 지난 두달여간의 기억과 차마 맞바꿀 수는 없었다.


“도망가. 나를 쏠 수 없다면 도망가. 어서 도망치란 말이야.” 그런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그것이 실제로 지안이 하는 말인지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는 도망치는 행동조차 불가능하게 했다. 지안이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손바닥에 자란 커다란 검은 눈이 자리 잡혀 있는 끔찍한 왼손이었다. 그의 왼손은 기형적으로 재생되어 있었다. 사람의 손이 아닌, 가재나, 게, 등의 어류나 양서류의 손을 연상시키는 그런 것으로 말이다.


지안에게는 눈앞에 선 남자가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남자와 이십 년 넘도록 우정을 쌓아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남자는 단지 징그러운 해충일 뿐이었다. 물론 그 자신의 본심은 아니었다. 그들이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동률은 비명을 질렀다. 손을 뻗어 총구를 겨냥했지만, 총성은 단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손이 거대한 뱀의 몸통처럼 동률을 향해 뻗어왔다.


동률은 그제야 등을 보이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갈밭은 뜀박질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몇 걸음 뛰지도 못하고 그는 돌무더기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뒹굴 거리며 검은 손아귀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죽음의 손은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앗다. 검은 손이 동률의 얼굴을 비춰졌다. 오직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공포를 목격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죽음의 손이 그를 덮치기 전에 공포감이 그를 질식시켰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비명을 질렀지만, 이윽고 내리친 번개가 그의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마지막으로 검은 손이 보여준 것은 하늘이었다. 시커먼 먹구름이 사방을 집어삼킨 검고 어두운 하늘이었다. 폭우를 잔뜩  담은 검은 하늘이 이 끔찍한 현장을 지켜본 유일한 증인이었다.



지안은 정신을 되찾자마자 결심했다. 오래전부터 틈틈이 해오던 생각이었다. 가끔씩 그들도 피곤을 느끼고 잠에 들 때도 있음을 느껴왔다. 하지만 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놈들도 지쳤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폭우가 한바탕 지나간 직후였다.


그는 폐차된 고물덩어리 같이 망가진 동률의 시체를 보았다. 슬픔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지만, 그 자리에 감상이 들어찰 여유는 없었다. 어둠은 계곡 주위를 완전히 뒤덮었고, 거친 돌바닥은 비에 젖어 축축했다. 지안은 그 축축함과 미끄러운 감각이 전해올 때마다 평안을 느꼈다. 물에 젖은 돌바닥을 미끄러져서 기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정신은 아직까지 그 감각이 온전한 자신의 것은 아니란 사실까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눅눅함과 축축함이 주는 평온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육체가 기대하고 있던 감각 같았다.


그는 미끄러져 산을 내려갔다. 두족류의 촉수 같은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먹구름 사이로 간간이 만월의 얼굴이 내보여질 때가 있었다. 지상의 모든 광경을 흡족한 듯 지켜보면서.


오두막에 도착하자마자 화로에 불을 지폈다. 온 몸이 석고칠을 한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그들이 깨기 전에 일을 마쳐야 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 위해 창문을 모두 닫고 커튼까지 가렸다. 달과 그들과의 교신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돌덩어리 같은 몸을 끌고 가서 차고에 있는 모든 휘발유통을 방안으로 옮겼다. 화로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 곳곳에 휘발유를 뿌려댔다.


차츰 몸 안에서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그들 또한 이상한 조짐을 느끼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불쾌한 오존 냄새가 방안을 가득히 에워쌌다. 그들조차 싫어하는 불쾌감을 지안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마지막 휘발유통을 머리에 들이 부었다. 그리고 화로로 다가갔다. 주저 없이 양팔을 불길 속으로 집어넣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고,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들과 함께 지르는 비명이었다. 일그러진 증오와 악의의 시선으로 자신을 비추는 다른 눈들이 보였다. 지옥을 연상시키는 불구덩이 속에서 그들도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단 사실을 깨닫는 첫 순간이었다. 그는 단테를 떠올렸다. 지옥편의 1부에서 단테가 세 번째 벼랑에서 본 영원한 화염 속에서 형벌을 받는 죄인들을 묘사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영원은 있어선 안 된다. 오직 지금 이곳이 끝이어야 한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마지막 매듭의 끈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의 몸속에 있는 그들과 똑같지만 다른 신체를 점유한 강탈자들이 어딘가에 있었다. 그는 그 신체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그놈들도 이곳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들이 장악한 육체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그것도 아주 빨리 오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걷는 자리마다 불길이 따라왔다. 오두막의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기둥이 쓰러지면서 천정이 무너졌다. 짧은 순간 하늘의 틈새가 열린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악의 번뜩이는 거대한 눈이 떠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그가 목격한 마지막 광경이었다.


***


호지슨은 아컴시티 데일리 라인을 두려움에 떨면서 읽어내려 가고 있었다. 수전증을 앓는 그가 아니었지만, 두 손이 떨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그곳은 미국 동부 시간으로 새벽 네 시였다. 창밖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천둥소리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울려 퍼졌다. 이미 신문 속보를 읽기 전에 인터넷 뉴스 채널과 거의 모든 지역 방송 채널들이 긴급편성으로 한국의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곳은 폭우와 번개가 아닌 거대한 악의가 큰 주먹이 되어 지상을 향해 난타를 퍼부은 것 같은 끔찍한 광경이었다. 대체 어떤 사악한 힘이 세상을 이토록 처참한 몰골이 될 정도로 두들겨 팰 수 있다는 말인가? 호지슨은 티비 화면속의 광경을 믿을 수 없어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 힘의 실체에 대해선 짐작 가는 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예상이 현실로 다가올 날이 올 것이라 믿지는 않았다. 믿음과는 상관없이 그 날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거부했다. 그만큼 그 힘의 실체는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화면속에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구급차들은 레이서들이 운전하는 것처럼 화면속을 급질주하면서, 급회전하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구급차들이 한 장소에 밀집된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가 살아온 육십 여년의 세월동안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자연재해의 대참사 현장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그 자신이 직접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현장도 오늘의 대참사와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그것이 인류 종말의 전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눈앞에서 보고 있는 장면들이 인류보다 더 오래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의 재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현장임을, 두려움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백 사십 년 만에 처음으로 네크로노미콘의 전 페이지를 구독한 인물이었다. 완벽한 번역과 주해를 하진 않았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세상의 종말을 좀 더 앞당기는 숨겨진 주인공이 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의 세상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런 일을 맡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선배들이 부분적으로 해석한 보고서에도 오늘과 같은 날이 올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


그는 미스캐토닉 천문과학부가 환호성을 지르던 그 날 새벽, 머나먼 외우주에 있는 별의 주인이 눈을 뜨는 것을 꿈속에서 보았다. 그곳은 우리 인류가 토성이라고 부르는 별의 본래 이름, 시크라노쉬가 있는 곳이었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게슴츠레한 눈망울을 굴리는 두꺼비 같은 모습의 신이 있었다. 양쪽 어깨에는 박쥐 같은 날개가 달려 있고, 온 몸은 기름에 젖은 축축한 털투성이였다. 역시 게슴츠레하게 살짝 벌린 입속에서 곰팡이 같은 균류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듯 한 혀의 끝이 보였다. 그 꿈속에서 눈앞의 그 흉측망칙한 것이 커다란 입을 벌리면서 자신을 공격하려는 시늉을 취한 순간,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깨어났다. 온 몸이 식은 땀에 젖어 있었다.


대학에 출근하고 나서야 자신이 꾼 꿈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천문과학부의 소식은 순식간에 대학 전체에 퍼져 있었고, 사람들을 들뜬 기대에 젖게 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해 있는 문헌학부의 교수진들의 감정은 전혀 달랐다.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과 같은 꿈을 꾼 친구도 몇 있음을 알게 된 순간 공포의 크기는 더 커졌다. 보다 덜 민감한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는 불안에 밤새 시달렸다고 했다.


거대한 천둥소리가 그의 정신을 다시 바짝 차리게 했다. 티브이 화면속에서 현지에 파견된 한국계 CNN 아나운서가 보도진들이 전한 소식을 긴급 번역한 브리핑을 정신없이 읽어나가고 있었다. 몸조차 가누기 힘든 폭우속에서 마이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폭우속에서 모자이크 처리로도 지우기 힘든 피의 흔적이 보였다. 모든 빗방울들이 피를 머금은 진홍빛을 띄고 있었다.



헤령은 자주빛 바다를 보고 있었다. 지는 해가 해변에 물들여 놓은 색이었다. 해변 너머의 붉은 빛과 백사장 너머 능선의 초록빛이 보기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조화의 정점은 오른편의 산줄기 끝자락 쪽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밤의 그림자였다. 어둠의 색채가 이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경계선을 그곳에 그어놓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이미 경계 너머로 넘어갈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그녀는 자신이 죽인 사람의 수를 곰곰이 헤아려보려 했지만,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족히 1500명은 거뜬히 넘을 것 같았다. 산술적으로 헤아릴 수 없는 수치의 대학살을 벌이면서도 한 사람의 얼굴만은 똑똑히 기억에 남았다. 고교 동창생인 같은 학반의 최우등생이었다. 언니만큼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뛰어난 아이였다. 헤령은 그년이 자신의 뺨을 때린 사건을 기억에서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기말고사 시험이 채점이 끝나고 학점이 발표된 그날, 막 퇴교를 할 때였다. 그년은 갑자기 역사 과목 시험지를 헤령 앞에 내밀었다. 유일하게 헤령이 그년보다 학점을 높게 받은 과목의 시험지였다. 그년은 다짜고짜 헤령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니년이 내 시험지를 커닝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사과해. 넌 바로 내 뒷자리였잖아.’ 그런 이유였다. 당연히 사과할 수 없었다.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년의 손뼉이 헤령의 뺨을 후려쳤다. 오른뺨이 얼얼했다. 눈에선 물샘이 핑하게 고였다. 주위에선 아무도 자신을 동정해주지 않았다. 키득대면서 박수를 쳐대는 아이들도 있었다. 두 번, 세 번 손이 계속 뺨을 후려쳤다. 결국 참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 때에도 아무도 나서서 말려주지 않았다. 비웃음 소리만이 더 크게 들려왔다. 그 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그년이 헤령의 시험지를 찢어서 자신의 머리위에 뿌려댄 것 같은 기억만이 남아있다.


그년이 카페에 있었다. 무엇이 좋은지 절친들과 키득거리면서, 비열한 눈동자를 굴리면서 비열한 웃음을 그곳에서 짓고 있었다. 헤령은 붉은 촉수로 변한 머리칼의 한자락을 후려쳐서 유리창을 깨뜨렸다. 카페안의 사람들이 모두 비명을 질렀다. 그년과 그년의 친구들도 겁에 질려서 각자 자기 앞의 의자와 책상 속에 숨어 들려 했다. 헤령은 머리칼을 뻗어 그년의 발목을 잡아채서 자기 쪽으로 질질 끌고 오게 했다. 전율이 온 몸속으로 휩쓸려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헤령은 붉은 촉수로 그년이 입고 있던 옷을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버린 후에, 사정없이 후려쳤다. 비명의 크기가 커질수록 힘의 강도를 높였다. 비명이 끝난 후에 헤령은 뜬 눈으로 허공을 보고 있는 그년의 얼굴을 보았다. 입가에는 침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얼굴을 다시 머리칼로 후려치자, 부서진 벽돌처럼 안면이 함몰되어 버렸다.


그때부터 경찰차와 군용차량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보도의 한 블록을 차량들이 바리케이드를 세워서 차단하며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눴던 광경도 생각이 났다. 헤령은 머리칼의 한자락 끝에 감겨져 있던 러시아제 권총을 그들을 향해 집어던졌다. 병원의 원장의가 허공에 난사했던 그 총이었다. 그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였는지, 경찰과 군인들이 일제 사격을 가하면서 총구에서 불을 뿜었지만, 그녀의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은 부드러운 자극일 뿐이었다. 머리칼을 휘두를 때마다 차가 휩쓸려 나가고, 사람이 튕겨 나가고, 사람의 비명이 들렸고, 누군가의 목이 꺽여진 듯한 기분이 들었고, 누군가의 배를 그 촉수로 꿰뚫은 느낌이 들었다. 그 뿐이었다. 하늘에서 아주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 길래, 손을 뻗어 벌레를 잡는 것처럼 후려쳤다. 하늘에서 추락한 것은 군용 헬기였다.


모든 것에 싫증을 느꼈을 쯤에야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그녀의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 나뒹굴고 있는 것은 고물이 된 병장기들과 군용차량들, 그리고 좀비 게임에서 총을 맞고 뻗은 것처럼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 뿐이었다. 어떤 여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듯, 길가에서 부서진 몸을 질질 끌며 기고 있었는데, 그년의 절친중 하나였다. 헤령은 다시 머리칼을 휘둘려서 그년의 발목을 낚아챘다. 그리곤 맨홀 뚜껑을 열고 구멍안으로 뛰어들었다. 발목이 낚인 그년도 끌려들어왔다. 그년은 착지부터 좋지 못해 맨홀에 빠질 때부터 목이 꺾여버렸다.


헤령은 그 시체를 머리에 감고 하수도를 헤엄쳤다. 캄캄한 하수도였지만 그녀에게는 그곳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빛이 보였다. 더 큰 희열을 만끽할 순간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마침내 해가 바다 너머의 어둠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녀가 그토록 사랑하는 기울어져 가는 만월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만월 또한 못지않게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다 저편에서, 머나먼 우주의 저편에서, 그리고 아득한 심해의 한 곳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의 존재는 아득한 멀리 있지만, 그녀에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인간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에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도, 후회도, 미련도, 심지어는 기쁨조차 아니었다. 그저 떠나는 것일 뿐이었다.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떠나는 것과 똑같을 뿐이었다.


헤령은 미지의 해저를 향해서 헤엄을 쳤다. 수많은 머리칼과 두 팔과 다리를 이용해서, 그녀는 리예의 깊은 심연을 향하여 나아갔다. 지상에 있을 때보다 훨씬 기분 좋고 평온한 호흡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 그녀는 헤엄쳐갔다. 불멸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심해 속의 리예가 있는 곳으로. 거석과 원기둥이 즐비한 도시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신들이 있는 곳으로. 한편으로 어머니 슈브 니구라스와 아버지 요그 소토스가 있는 외우주의 머나먼 차원으로. 저 먼 곳에서 그녀를 부르고 있는 존재들의 소리가 이제 가까이, 더 또렷이 들려왔다. 이아. 이아. 크툴루 파탄. 이아. 리예 크툴루 파탄.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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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dHatter 16.09.18 21:02 댓글

    러브크래프트 좋져 ㅎㅎ

  • MadHatter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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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인스머스의눈 16.09.25 06:44 댓글

    우수작으로 선정되고 싶은 맘은 없지만, 그래도 좀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싶은데, 코즈믹 호러가 중요시하는 우주적인 장엄함을 살려보려니 도무지 150매 이하 줄이기가 힘드네요. 이것도 역량의 부족인가.

  • 인스머스의눈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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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dHatter 16.09.25 10:59 댓글

    어.... 제가 평할 입장은 안 되고;; 그냥 느낀 점을 말씀드리면 한 이야기에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분량이 증가하는 거 같아요,

    예를 들어 '우주에 나갔다 왔는데 손에 눈이 자라 있었다!'는 소재는 스티븐 킹이 i am the doorway에서 써먹었는데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래사장이고 나오는 사람도 대화 속에서 언급되는 사람을 제외하면 둘 뿐이라서 분량이 적어요.

    러브크래프트도 장편인 광기의 산맥은 온통 설명 투성이지만 에리히 잔의 선율은 걍 '한 명이 다락방에서 다른 한 명을 관찰했다'는 게 다인데도 마지막 장면은 굉장하죠!

    그냥 나오는 사람을 좀 줄이고 가지치기를 좀 하면 분량이 줄지 않을까 싶네요// 그게 힘든 거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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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인스머스의눈 16.10.01 21:25 댓글

    러브크래프트 소설중에서 분량이 적으면서 임펙트 강한 단편들은 대부분 크툴루 신화의 코드에서 살짝 빗겨간 작품들인데, 크툴루 신화의 코드들을 모두 담으면서 150매라는 기준선에 어떻게 맞출까, 저로썬 참 고민이네요. ㅎㅎ 크툴루 신화의 연속선에 있는 소설들을 계속 쓰고 싶은 건 제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야망인지라...... 가상공간, 미지의 접근물(책, 유물등), 불가해한 존재, 이런 코드들을 조합하면서 단편을 쓸려면.....아.....어떻게든 해결해봐야죠. 플롯상에 단점이 있다는 건 저도 느끼고 있던 부분인지라, 날카로운 지적을 해주셔서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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