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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빨간 꽃신

2020.07.09 22:1307.09

1.

엄마, 나, 발이 너무 아파. 내 신발 좀 찾아 줘. 발이 아파서 못 들어가겠어.

여자 아이의 목소리다. 서너 살 쯤 됐을까. 아주 어린 아이, 늘 똑같은 목소리. 현관문 뒤에서 난다. 이번이 세 번째던가.

아이 신발을 찾아줘야 되는데 그러기가 싫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 찾는 척 하며 신발장을 뒤적댄다. 신발장 안은 상자로 가득하다.

저걸 일일이 열어봐야 하나. 아이의 요청이 성가시기만 하다. 모르겠다. 들어오려면 알아서 들어오고, 못 들어오면 어쩔 수 없지.

방에 돌아가려고 한 발을 디뎠다. 그런데 순간, 목둘레에 무언가가 들러붙은 듯 단단하게 조이며 숨이 막혀왔다.

나는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위로 불길하고 찝찝한 예감이 한 겹 들러붙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침 6시 47분. 남편은 이미 출근한 뒤다. 의붓딸인 유미는 제 방에서 아직 자고 있을 거다.

나는 이불 안에서 꿈을 되새겼다.

설마 또 그렇게…… 아니야, 그럴 리가, 아니야, 차라리 그랬으면……. 이 못된 년…….

마지막 말이 선고라도 되는 듯 치골 뒤가 욱신거린다. 그래, 역시 그런 거였군.

잔뜩 웅크린 채로, 아랫배와 허리가 뒤틀리는 통증을 견뎠다. 문득 요의를 느끼고 안방 화장실로 달려갔다. 옷을 내리고 변기에 앉았다.

의지와 관계없이 선혈이 쏟아져 내렸다. 변기 안이 시뻘겋다. 실리콘 같은 허여멀건 덩어리도 둥둥 떠 있다.

가엾은 내 새끼. 미안하고 안타까운 가운데 묘하게 후련하다. 그걸 내려다보는데, 누가 화장실 문을 쿵쿵 두드린다.

엄마, 엄마! 뭐 해? 나 배고파!

딸아이 유미다. 타이밍을 맞춰도 꼭…….

유미야, 엄마 볼 일 보는 중이야. 배도 아프고, 오래 걸려. 그러니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미가 문을 두드리며 앙칼지게 외친다. 빨리 나와! 나 배고프다고!

얄밉다. 착한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아이다. 언제부터 ‘엄마’가 이렇게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단어였던가.

일단 통증은 진정된 것 같다. 내 몸이며 변기며 피가 튀고 묻은 곳을 휴지로 벅벅 문질러 닦고 변기 레버에 손을 갖다 댔다.

이대로 눌러야 하나? 그럼 내 새끼도 정화조로 떠내려가는 건데? 그럼 어떡해. 건져서 장례라도 치러줄래?

유미의 발길질과 악다구니가 생각의 흐름을 막는다. 나는 변기 물을 내리고 나가 아이에게 아침을 차려줬다.

식욕이 없어 내 건 안 차렸다. 딸아이는 나더러 왜 안 먹느냐고, 배가 아프다더니 괜찮으냐고 묻지도 않는다.

반찬이 맛이 있네, 없네, 옷이 마음에 드네, 안 드네, 불평불만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회사에 전화해 휴가를 냈다.

나도 초등학교 3학년 때 패션에 저렇게 유난을 떨었었나. 유미는 방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는 책가방을 둘러메고 현관에 섰다. 엄마, 뭐 해? 이러다 늦겠어.

나는 양해를 구했다. 유미야, 엄마가 지금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시현이네 엄마한테 태워 달라 하면 안 될까?

아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발을 굴렀다. 미쳤어? 그 똥차를 또 타라고? 얼마나 냄새나는지 알아?

하지만 언제 또 복통과 출혈이 올지 몰라 나는 운전하기가 겁났다. 아이를 겨우겨우 설득해 택시에 태워 보냈다. 아이는 끝끝내 구시렁거렸다. 나 택시기사한테 납치당하면 다 엄마 책임이야.

아이가 어질러 놓은 방 안 꼴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 옷을 개켜 서랍에 차곡차곡 넣는다.

친구들이 보면 혀를 찰 테다. 아이가 잘못하면 따끔하게 가르치는 게 엄마의 도리라고. 초등학교 3학년이면 엄마 사정도 이해해 주고, 소소한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줄 아는 나이라고. 넌 걔가 네 친딸이라도 그렇게 떠받들어 모실 거니?

나는 고개를 젓는다. 엄마란 사랑과 희생으로 자식을 품는 존재 아닌가. 게다가 나는 아이에게 못된 계모로 비치고 싶지 않다. 언젠가는 아이가 내 노고를 알아줄 것이다.

또 한 차례 통증과 출혈이 찾아왔다. 진정된 후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했다. 내 자궁은 지난주까지 품고 있던 태아와 태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로써 세 번째. 의사가 습관성 유산이란다. 정밀 검사를 해 보자고. 나는 생각해 보고 말씀 드리겠다 하고는 병원을 나섰다.

길가에 샛노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엄동설한을 버티고 돋아난 꽃들이 기특하면서도 미련해 보인다. 한 달 뒤면 바람에 쓸려 사라질 운명인데 뭐 하러 저렇게 아득바득 피어날까. 눈물이 핑 돈다.

남편한테 유산 소식을 알리고 마트에서 미역국과 햇반을 사 들고 돌아갔다. 집에 가니 답장이 와 있었다. 엄마한테 얘기했어?

내 엄마가 아니라 자기 엄마를 뜻하는 거다. 내 몸이나 기분이 어떤 지에는 관심 없고 자기 엄마가 걱정되나 보다.

아니. 난 답장을 보내고 미역국에 햇반을 말아 먹은 뒤 낮잠을 잤다.

 

2.

낮잠은 오래가지 못 했다. 시어머니의 전화 때문이었다.

이번 태몽은 분명 아들이었는데 참 아깝게 됐다, 그러게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지 않았니, 일은 적당히 하고 퇴근 좀 일찍 해라, 밥 좀 제대로 해 먹어라. 말이 많다. 대학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자, 한약을 지어 먹자 호들갑을 떠는데 나는 그냥 네, 네 하다 끊었다.

친구들이 놀란다. 21세기에도 아들 타령하는 시어머니가 다 있냐고. 남편이 외동이고 부모는 어머니 한 분뿐이라 결혼 전에 걱정해주던 친구들이다.

외동 아냐. 누나가 있었대. 나는 그렇게 항변했었다.

결혼을 결정하고 시어머니에게 인사드리러 갔을 때 유미를 처음 봤다. 유치원생이라고 했다. 그 전엔 존재조차 모르던 아이였다. 죽은 누나의 딸이라고. 누나가 있었다는 사실도 그 날 처음 알았다.

끄집어내기 싫은 가족사인가 보다 여기고 넘어간 게 화근이었다. 아이답지 않게, 남편의 첩이라도 보듯 독기 오른 눈으로 날 째리던 유미의 모습에 눈치 챘어야 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내가 임신하자 시어머니는 진실을 털어놓았다. 유미는 남편이 사별한 전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고. 자긴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우리가 데려가 키우란다. 나는 그제야 남편이 제 친구들 모임이나 집안 경조사에 나를 한사코 데려가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됐다.

남편은 아무 말도 없었다. 늘 그런 사람이다. 불리할 때면 입을 다물고 자기 엄마를 내세운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사기 결혼 당했다며 노발대발했다. 당장 이혼하라고 난리였다. 나는 앞날만 생각하자며, 뱃속 아이한테 언니가 있으면 좋은 거 아니냐며 달랬다.

그 때만 해도 나는 남편을 사랑했다. 아니, 그랬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 기만당했지만 이혼이 답은 아니다. 인생의 고비마다 찾아오는 태클을 매번 외면할 거냐. 이혼은 지는 거, 실패하는 거다. 부부는 허물을 덮어주며 사는 거다. 뱃속 아이를 아빠 없는 아이로 키우지 않겠다는 것 또한 내 생각이었다.

엄마 없는 아이를 내치는 일도 나쁜 짓 아닌가. 내 양심과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동화에 나오는 못된 계모 따위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착한 계모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잘 커가던 뱃속 아이는 갑자기 성장을 멈췄다. 생명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수술로 아이를 제거하고 여느 산모들처럼 몸조리를 해야 했다.

두 번째 아이를 변기에 흘려보내고, 세 번째 아이도 흘려보냈다. 시어머니의 주장과 달리, 의사는 내 잘못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면역학적인 이유로 내 몸이 임신을 유지하지 못 하는 걸 거라고. 나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런데 죄책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얼까.

나는 혼자서 결론 내린다. 아이들은 자기를 원하지 않는 엄마를 떠나간 게 아닐까. 애초에 내 몸이 그렇게 생겨먹은 이유가 내 마음을 반영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안겨 준 건 유미다. 최선을 다해 그 애를 돌보면서도 나는 매순간 절감한다. 나한테는 엄마로서의 성정이 조금도 없다. 나는 아이라는 종족이 싫다. 내 사랑과 에너지는 일을 향한다. 나는 그것이 분산되기를 원치 않는다.

남편은 내가 이기적이란다. 차라리 잘 됐다, 둘째는 포기하고 유미 하나만 키우자는 내 말에 남편은 또 나더러 이기적이라고 나무란다. 착한 줄 알고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못된 여자란다.

웃겨. 나한테서 도대체 뭘 봤기에?

엄마가 그랬어. 네 관상도 그렇고 손금이나 사주팔자도 남편 보필 잘 하고 아들 여럿 낳을 팔자라고. 나랑 궁합이 좋다고. 남편이 분하다는 듯 말했다. 홀딱 속았지.

속은 건 난데. 조용히 중얼거리자 남편이 굳은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뒤 유미의 방에서 두 사람이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3.

청명한 하늘로 훌쩍 날아올라 파랗게 녹아버리고 싶다. 아찔한 아카시아 향에 흠뻑 젖어 나른하게 스러질 것 같기도 하다.

배낭에서 생수를 꺼내 목을 축이는데, 유미가 제 아빠와 깔깔대며 계곡물을 튕기고 장난을 친다. 그러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샐쭉해서는 고개를 돌린다. 산행오기 싫다고 툴툴대더니 아직도 앙금이 안 풀렸나.

근데 제 아빠랑 저렇게 신나게 노는 건 또 뭔데. 그걸 보니 이상하게 짜증이 솟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정이 안 가고, 나한테 정을 주지도 않는 아이다.

저거 무슨 엘렉트라 콤플렉스 아닌가 싶다가도, 유미가 내 친딸이었으면 부녀의 다정한 모습에 내가 이리도 모난 심정을 느꼈을까,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하는 자책에 조소가 나왔다.

모처럼의 산행인데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과 딸에게 정상에서 보자고 통보하고 일어섰다.

한참 뒤, 나는 더위에 지치고 길을 잃고 말았다. 목이 무척 말랐지만, 생수는 이제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몸을 많이 움직여서인지 벌써 배까지 꼬르륵대고 있었다.

괴이한 일이었다. 분명히 잘 다져진 등산로로 올라가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수풀과 나무가 우거졌을까. 눈 뜬 채로 잠든 것처럼 중간 기억이 통째로 사라졌다. 더위를 먹은 걸까?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이정표도 길도 없다. 전화기는 통화권에서 이탈됐다는 표시만 뜨고 작동되는 것은 시계뿐이다.

길이 아닌 곳을 헤매려니, 발에 걸리는 것도 많고, 얼굴을 찌르는 것도 많다. 벌레는 또 왜 이리 달려드는지. 보통 고역이 아니다.

느낌 탓인가, 자꾸 걸어서인가, 더위도 훨씬 심해진 것 같았다.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러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탈진해 쓰러질지도 모른다. 때 이른 삼복 더위였다.

희미한 물소리가 들리기에 내려가 봤다. 덤불 아래 계곡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물을 함부로 마시다가 기생충 걸린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당장 목말라 죽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물은 의외로 시원했다. 갈증이 해소되니 생뚱맞은 욕구가 일었다. 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등산로에서 떨어져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도 없을 텐데. 나는 속옷만 걸치고, 커다란 웅덩이에 몸을 던졌다.

더위에 달아오른 몸이 식으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머리까지 푹 담그고 목욕과 수영을 즐겼다.

한참을 그러다 극심한 배고픔이 느껴졌다. 밖으로 나가 물을 대충 짜고 턴 다음 옷을 입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등산화가 안 보이는 거다. 체력 단련 좀 해 보겠다고 거금 주고 장만한 빨간색 등산화가 말이다.

바위 뒤로 넘어갔나, 계곡물에 빠졌나. 산에서 금방 눈에 띌만한 색인데, 샅샅이 찾아봐도 없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맨발로 산을 다니다간 금방 다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수도 없다.

난감해하는데,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덤불이 흔들리더니 웬 남자가 불쑥 나타났다.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시대착오적인 차림새 때문이었다.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했는데, 희한하게도 하얀, 하지만 오랫동안 빨거나 손질하지 않아 지저분하고 남루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남자가 발에 신은 것은 검정 고무신이고, 등에 진 것은 지게였다. 머리는 입대를 앞둔 사람처럼 빡빡 밀었고, 눈 주위만 보면 젊은 것 같은데 얼굴의 반을 덮은 수염 때문에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느 암자의 스님인 걸까?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의 시선이 내 발에서 멈췄다.

신발이 없어졌네요. 나는 공연히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남자가 지게를 내려놓더니 거기에 쌓인 나뭇가지 사이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정고무신이었다.

남자용인지 내 발보다 한참 커서 질질 끌며 걸어야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감지덕지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이 근처 절에 계세요? 전화 좀 빌려 쓸 수 있을까요?

남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자길 따라오라 했다. 도와줄 게 있으면 도와주겠다고. 목소리를 들으니 젊은 사람인 것 같았다.

남자는 앞을 가로막는 가지와 수풀을 낫으로 치며 길을 텄다. 나는 상당히 지친 데다, 고무신이 자꾸 벗겨져서 빨리빨리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배는 꼬르륵거리다 못 해 천둥을 치고 있었다. 달랑 생수 하나 챙기고 나머지 음식은 남편 배낭에 넣은 게 죽도록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4.

끝없이 이어지던 나무와 수풀이 뚝 끊기고 채소밭이 나왔다. 채소밭 뒤에는 마당, 그 뒤에는 조선시대 배경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초가집이 한 채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호박, 가지, 버섯 같은 것들을 멍석에 한가득 펴 놓고 말리고 있었다. 마당 왼쪽 구석에 쳐 놓은 울타리 안에서는 닭과 병아리들이 돌아다니고, 오른쪽 구석에는 우물이 있었다. 굴뚝에서 부연 연기가 새어나오는 걸 보니 부엌에서 밥이라도 짓는 모양이었다.

실례합니다. 나는 쭈뼛쭈뼛 마당에 들어서며 웅얼거렸다.

오른쪽의 부엌으로 보이는 곳에서 여자아이 하나가 튀어나왔다. 유미처럼 초등학교 3~4학년 정도로 보였다. 한 번도 빗은 적이 없는지, 기다랗고 시커먼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지고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었다.

아이는 반가운 건지 놀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날 뚫어져라 쳐다보다 엄마! 하면서 부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년이, 또또! 할머니라 부르라니까! 어느 여인의 지청구가 들려왔다.

잠시 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여인이 아이와 함께 나왔다. 머리를 뒤로 모아 쪽진 모습이었다. 여인도 여자 아이도 남자처럼 불결한 한복과 촌스런 검정고무신 차림이었다.

여인은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구석구석 관찰했다. 무례한 시선에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전화를 쓸 수 있는지 물었다.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 했다.

한국형 아미시(Amish)들인가? 청학동은 여기에서 수백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피로와 배고픔으로 기절하기 일보직전이었으니까.

죄송하지만 저 밥 좀 먹을 수 있을까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내 말에 여인은 반색했다. 사례 따위 필요 없다며 내 팔을 끌어 툇마루에 앉히는데, 손아귀 힘이 어찌나 억센지 친절이 친절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여인이 사라지자 여자 아이가 와서 들러붙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지저분했다. 얼굴이며 손이며 며칠 째 안 씻은 게 분명했다. 기다란 손톱 밑에 까만 때가 껴 있었고, 머리와 옷에서는 퀴퀴한 냄새도 났다.

내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물러나면 아이가 다가오고, 물러나면 아이가 다가왔다. 아이는 꼬질꼬질한 손으로 내 옷이며 배낭을 허락도 없이 만지고 뒤져댔다. 내 립스틱으로 툇마루를 칠하는 모습을 보니 단단히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내 처지가 처지인지라 아무 소리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남자는 웃통을 벗고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세수를 하고 있었다. 평생 육체노동으로 다져진 데다 식성이 좋은지 백두급 씨름 선수를 연상시키는 몸매였다. 그가 뭐라고 외치자 아이가 가서 그의 등에 물을 끼얹어줬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은 샤워시설도 없나? 집이 워낙 작아서, 구조라고는 툇마루에 나란히 붙은 방 두 개와 오른쪽 끝의 부엌이 다였다.

우물에는 나지막한 나무 지붕이 씌워져 있었는데, 지붕을 네 개의 굵은 통나무 기둥이 받치고 있었다. 기둥에는 기다란 쇠사슬이 매달려 바닥까지 흘려 내렸고, 흙바닥 위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곧 밥상이 나왔다. 차려진 것은 삶은 감자, 삶은 닭, 열무김치였다.

음식은 재질이 뭔지 모를 시커멓고 얼룩덜룩한 금속 식기에 담겨 있었다. 수저도 마찬가지라, 저걸 입에 넣어도 될까 의심스러웠다. 식욕이 확 달아났지만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고 다독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상에 둘러앉았다. 여인이 말했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처자가 복이 많네. 오늘 중복이라 닭을 잡았다오.

나는 닭고기를 뜯다 말고 갸우뚱했다. 중복? 아직 5월밖에 안 됐는데? 아무리 현대 문명과 담을 쌓아도 그렇지 날짜까지 마음대로 세나?

여인한테 물었다. 이렇게 깊은 산속에 살면 불편하지 않느냐고. 여인은 불편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얘기가 진행되자 아랫마을 사람들을 흉보기 시작했다. 그 인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기 와서 산다는 식이었다.

아랫마을이라니, 이 도립공원 매표소 주위의 상가를 말하는 건가? 나는 여인이 말하는 내용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여인의 말투와 표정이었다. 아까까지 내가 느끼던 위화감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눈썹 사이의 깊은 주름과 일그러지는 입꼬리, 순간순간 번뜩이는 눈빛. 악독해 보이기까지 한 그 모습이 나한테 친절을 베풀 때보다 훨씬 자연스러웠다. 아까는 초보 배우의 어설픈 연기처럼 부자연스러운 인상이었다.

식사를 마치니 긴장이 풀어지며 졸음이 쏟아졌다. 이대로는 도저히 산을 내려갈 수가 없었다.

나는 염치없게도, 툇마루 구석에서 잠깐 눈 좀 붙이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5.

엄마, 이 여자 서른다섯은 돼 보이는데.

뭐 어떠냐. 그 정도면 아직도 한창이다. 궁디가 실한 게 애만 잘 낳겠구만. 내가 순득이 낳을 때만 해도 마흔이었어.

이 아줌마가 이제 우리 엄마 되는 거야, 엄마?

이년아, 할머니라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

여인의 호통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세 사람이 툇마루 옆에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해가 져서 마당에 검푸른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아아, 이런, 죄송합니다. 전 이만 가 봐야겠네요. 정말 실례했습니다.

여인이 억센 손으로 내 팔을 움켜쥐었다. 야밤에 가긴 어딜 가. 그러다 다쳐. 밤 되면 산짐승이 나온다고. 자고 가.

아니에요. 그렇게 폐를 끼칠 순 없어요. 나는 배낭을 메고 검정고무신을 꿰어 신고 헐레벌떡 마당을 벗어났다. 그러다 몇 걸음 못 가 고무신이 벗겨지며 넘어지고 말았다.

것 봐. 무리라니까. 자고 내일 아침에 가. 여인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질질 끌었다. 그 나이에 어떻게 이토록 힘이 넘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나는 저녁까지 얻어먹고 말았다. 꽁보리밥에 호박잎과 여름 배추 같은 것들로 차린 밥이었다. 상을 물린 뒤 여인과 여자 아이와 함께 한 방에 들었다.

부엌 바로 옆의 방이었다. 좁은 방에 사람 셋이 들어가 부대끼니 굉장히 후덥지근했다. 문 좀 열자 하니 여인은 모기가 들어와서 안 된다 했다. 너무 덥다고 푸념하자, 여자는 모름지기 몸을 따뜻하게 해야 애가 잘 들어서는 법이라는 면박이 돌아왔다. 그 말에 시어머니가 떠올라 입안이 씁쓸했다.

여인도 여자 아이도 저고리며 치마며 훌훌 벗어던지더니 속바지만 입고 이불에 누웠다. 나는 잘 알지도 못 하는 사람들과 속옷차림으로 밤을 보내고 싶지 않아 등산복을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여자 아이가 옆으로 온다. 이름이 순득이란다. 옛날 얘기 해 줘, 옛날 얘기 해 줘. 아이는 자꾸만 졸랐다.

유미가 어릴 때 재우기 전 읽어주던 그림책 내용을 몇 개 얘기해 줬다. 순득이는 너무 재미있다며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무덥고 답답하고 냄새가 났다. 나는 아이가 나를 놓아주고 저 멀리 떨어져 누웠으면 싶었다.

그 상태로 잠이 들었나 보다. 나는 질식할 듯 헉헉대다 눈을 떴다. 숨 막히는 더위였다.

옷이 땀에 절어 피부에 찰싹 들러붙었다. 순득이가 여전히 나를 안고 있었고, 아이의 머리카락이 내 목을 휘감고 있었다. 아까 머리에 이가 기어 다니는 걸 본 것 같은데. 느낌 탓인지 온몸이 근지러웠다.

탄식이 나왔다. 내가 대체 여기에서 이 사람들과 뭘 하는 건가. 산짐승이 나오든, 발을 다치든 산을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을 메고 고무신을 질질 끌며 마당을 지났다. 어디선가 삐거덕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두 방문이 얌전히 닫힌 것으로 보아 뒷마당에 지어진 뒷간 문이 열리는 소리인 듯 했다. 아까 볼일을 보러 갔다가 그 비위생적인 몰골과 악취에 경악했던 곳이다.

텃밭 옆길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

이 집 사람들은 만 하루도 안 지났는데 다들 반말이다. 홱 돌아보니 남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저러고 자다가 뒷간에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불빛이라곤 처량하게 떠 있는 달에서 쏟아지는 것뿐이지만 보일 건 다 보였다. 하지만 내가 스무 살짜리 숫처녀도 아니고 남자 나체에 놀랄 군번인가. 상대도 내 눈길을 민망해하지 않는다.

나는 신세 많이 졌다고, 안녕히 계시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저벅저벅 발소리 뒤로 남자가 덮쳐왔다. 나는 그의 굵은 양팔 안에 갇히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놔요! 놓으라고요! 소리 지르며 있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남자의 근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남자가 나를 제 방으로 끌고 갔다. 꼭 닫힌 장지문이 지옥을 향한 입구인 것만 같았다.

옆방 문이 빼꼼 열리고 여인과 아이가 내다봤다. 도와주세요! 외쳤지만 방문이 쾅 닫히고 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오, 제발, 누가 내 머리에서 그 기억을 지워 준다면 영혼을 바쳐도 아깝지 않으리라! 나는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능욕당하고 말았다.

남자는 제 물건으로 나를 쑤셔대는 내내 웅얼거렸다. 같이 살자고, 아들을 낳아달라고.

남자의 고약한 구취와 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자의 육중한 몸이 내 가슴과 배를 무지막지하게 짓눌러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래에서는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끊임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내 주먹질과 비명에 남자는 따귀를 날렸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구토가 올라왔다. 악몽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씨물을 토해내고 밖으로 나갔다. 활짝 열린 방문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이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몇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방관하며 고고하고 초연하게 빛나는 별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방금 나한테 벌어진 일이 현실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 뭘 어떡해야 할지도 몰랐다. ‘증거확보’와 ‘신고’ 두 단어가 뇌리에 맴돌았지만, 비이성의 극치에 내던져진 나에게는 의미가 와 닿지 않는 단순한 음절의 나열에 불과했다.

그저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싶었다. 두 눈을 꼭 감자, 맞물린 눈꺼풀을 비집고 눈물이 흘렀다.

밖에서 철컹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돌아왔다. 그를 보자 모든 사고가 중단되며 경직돼 버렸다. 나는 공포에 질려 방구석으로 기어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우악스러운 손이 내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건가. 그는 내가 자비를 애걸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목둘레에 서늘한 것이 철컥 채워졌다. 쇠로 만든 올가미였다.

올가미에는 기다란 쇠사슬이 연결돼 있었다. 그 끝은 우물로 이어져 있으리라. 나는 끝 모를 절망 앞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헨젤과 그레텔이었다. 이들은 날 잡아먹으려는 마귀였다.

 

6.

나는 노예가 되었다.

낮에는 물을 길어 올리고, 밥을 짓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텃밭을 가꾼다. 휴식도 주말도 주어지지 않는다.

해가 질 무렵이면 피로가 내리눌러 머리가 무겁다. 삭신이 녹아 부서지지만 쉴 수가 없다. 웅복이라는 남자의 씨받이가 돼야 하는 탓이다.

나는 강제로 그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잠자리를 거부하면 주먹이 날아온다. 그의 노리개로 혹사당하는 일은 매일 당하는데도 매 순간이 고통스럽다.

여인은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라 했다.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렇게 해 줄줄 알고? 나한테 어머니는 우리 엄마 하나뿐이다.

어머니란 사랑과 희생으로 자식을 품는 존재 아닌가? 저 여인은 본인이 내 어머니가 되겠다고 해 놓고는 사랑과 희생은 나한테 강요한다. 내 엄마는 물론이고, 그토록 얄밉던 시어머니까지 그리울 지경이었다.

직장 일에만 열심이고 가사는 소홀히 했던 나는 모든 것에 서툴렀다. 말년이라는 이름의 저 여인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매사에 잔소리를 들이부었다. 순득이를 야단칠 때 쓰던 회초리를 나한테 휘두를 때도 많았다.

예전에는 가정 폭력 당하는 사람들이 왜 당하고만 있을까 의아했었다. 이제는 이해가 된다. 그냥 무기력해지고 마는 거다. 무기력과 우울이 이성적 사고도 탈출에 대한 희망도 다 마비시켜 버린다.

폭행과 노동에 지친 내가 그나마 숨을 돌리는 시간은 뒷간에 갈 때뿐이다. 쓴웃음만 나온다. 시궁창 같은 내 처지에 딱 어울리는 곳 아닌가?

아무리 생각해도 달아날 방도가 없다. 통화권 이탈인데다, 전화기는 배터리가 다 돼서 꺼져버렸다. 유선 전화도 없고, 저 세 사람 말고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인즉, 우체국 집배원조차 오지 않는다는 거다.

게다가 내 목에는 쇠사슬이 연결돼 있다. 쇠사슬의 길이는 딱 뒷간과 텃밭까지만 아우르는 길이다. 더 이상 발을 뻗으면 목이 조여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다.

무쇠 올가미는 내 목을 항상 감싸고 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겁탈을 당할 때에도.

한 번은 우물 기둥에 연결된 쇠사슬을 온힘을 다해 잡아당긴 적이 있었다. 꿈쩍도 안 했다.

올가미를 풀 열쇠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사슬을 기둥에서 떼어낼 수가 없다면, 기둥을 자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끼며 톱 같은 도구는 웅복이 철저히 관리한다. 부엌 식칼로 기둥을 자르는 건 바위에 계란치기나 다름없다.

내가 우물에서 물을 긷다 말고 쇠사슬을 멍하니 쳐다보니 순득이가 옆에 왔다. 물 아깝게 뭐 하는 짓이냐는 말년의 핀잔을 들어가며 매일 씻겨준 덕분에 얼굴과 손이 뽀얗다. 아침마다 빗겨주고 땋아주는 머리가 허리까지 늘어져 달랑거린다.

학교도 안 가고 하루 종일 집에서 놀고 살림을 돕는 아이다. 아이가 장기 결석하면 학교 관계자가 찾아올 만도 한데 아무도 순득이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는다. 출생신고는 했는지 의심스럽다.

말년과 웅복은 순득이의 교육에 관심이 없다. 내 덕분에 순득이는 그나마 한글과 숫자를 읽고 쓰게 됐다. 공책이나 연필이 없으니 우리 수업은 흙바닥과 나뭇가지를 칠판과 분필 삼아 이루어진다.

세상사며 인간사에 대해 이런 저런 지식을 알려주면 순득이가 나보고 똑똑하다며 감탄한다. 아이는 산 아래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 질문이 끝도 없지만 대답해주는 일은 늘 즐겁다. 경청하는 아이의 눈망울이 눈부시도록 초롱초롱한 까닭이다.

아이는 나보고 착하다고도 한다. 사실 난 착한 여자가 아닌데. 착한 엄마는 더더군다나 아니고. 하지만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할머니와 아빠에게 꾸중을 듣고 이틀이 멀다하고 매질을 당하는 아이의 눈에는 내가 상대적으로 착해 보이긴 할 것이다.

나를 향한 무한한 존경과 신뢰. 부모가 아이에게 받는 가장 큰 선물 아닐까. 나는 순득이한테 엄마라 불리는 게 좋다. 이 노예로서의 삶을 꿋꿋이 이어가게 하는 단 하나의 버팀목이다.

엄마, 엄마는 우리 버리고 도망가지 마. 순득이가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다 문득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엄마 도망갔니?

순득이는 툇마루에서 낮잠을 자는 말년을 쳐다보며, 아니, 하다가 이내,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엄마가 참 많았는데 전부 도망갔어.

도망갔다고? 순간, 마음속에 희망이 싹텄다.

어떻게 도망갔는데? 내 물음에 순득이는 우물을 가리켰다. 이 안으로. 다 이 안으로 도망갔어. 어떤 엄마는 내 동생도 데려갔다. 남자애였는데, 그래서 할머니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몰라. 엄마랑, 아니 할머니랑 아빠는 못 보게 했지만 난 알아. 여기 고무신이 놓여 있었는걸. 물이 더러워질까 봐 벗어놓고 들어간 거야.

왈칵 욕지기가 일었다. 나처럼 잡혀온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던 거다. 게다가 모두 자살함으로써 이 지옥을 탈출했다.

앞으로 물을 마실 때마다 우물 속에서 허옇게 퉁퉁 불은 여인들의 시체가 눈앞에 떠오를 것 같다. 애꿎게 목숨을 잃은 어린 아이의 울음이 환청처럼 고막을 울렸다. 몸서리가 쳐졌다.

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생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갈망보다도 탈출과 생존을 향한 소망이 더 크다.

웅복과 말년을 없애 버릴까. 그 생각도 여러 번 해 봤다.

과연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난 아직 닭도 못 잡는데. 천장에서 떨어지는 벌레를 모아서 볶아 먹곤 하는데 나더러 잡아서 볶으라면 나는 기겁하며 도리질을 하고 만다. 남의 생명을 해함에 있어서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은 천지 차이다.

세월이 흐르자 월경이 끊겼다. 신발을 찾아달라는 아이가 꿈에 나타났다. 나는 뒷간에서 선혈과 덩어리를 쏟아냈다.

월경이 시작됐다. 세월이 흐르고 월경이 끊겼다. 모든 것이 반복됐다. 몇 번인지 세다가 잊어버렸다.

 

7.

말년의 구박이 나날이 심해진다. 이제 나는 살림이 손에 익어 그걸로 타박 듣는 일은 없다. 심지어 살아 있는 닭 모가지도 비트는데. 도망가려 꿈틀대는 애벌레들도 거리낌 없이 냄비에 던져 넣고 달달 볶는다.

말년이 날 못살게 구는 이유는 내가 아들을 낳지 못 해서다. 못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이젠 나도 헷갈리지만.

웅복은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거라며 투덜댄다. 그러면서도 매일 밤 나를 덮친다.

희번덕거리는 눈빛은 아들 욕심보다 다른 욕구가 더 크다는 걸 알려준다. 괴물 같은 놈이다. 내 다리 사이에 작두가 달렸으면 싶다.

올가미 좀 풀어 달라 애원하면, 아들 낳으면 풀어준단다. 이거야말로 선녀와 나무꾼 아닌가.

아들을 낳아주고 올가미가 풀린대도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칠 수 있을까? 신발이라고는 툭 하면 벗겨지는 고무신 한 켤레 뿐인데. 말년의 발도 순득이의 발도 모두 내 것보다 작아 그들의 고무신을 신을 수도 없다. 내 날개옷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쯤에서 나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등산화를 잃어버린 게 아니다. 도둑맞은 거다. 내가 계곡에서 물놀이하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웅복이 그것을 숨긴 게 틀림없다.

도대체 어디에 숨겼을까? 아니면 그냥 버렸을까?

등산화도 못 찾고, 아들도 못 낳고, 웅복과 말년을 증오하는 세월이 꾸역꾸역 굴러갔다.

온 산에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던 날, 순득이의 속곳에 피가 비쳤다. 아이는 가슴도 봉긋해지고, 아이와 어른을 구분 짓는 털도 나기 시작했다.

순득이는 부끄럽다며 이제 혼자 씻는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눈빛이 서늘하고 깊어졌다. 말수도 줄어들고 잘 웃지도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것이다.

내가 도대체 여기에 몇 년을 붙잡혀 있었던 걸까. 머릿속으로 계산하는데 말년과 웅복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다. 조만간 아들 볼 수 있겠다며 기뻐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나는 잠시 멍하다 기함하고 말았다. 설마…….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추하고 더러운 현실.

웅복은 이제 나를 내버려둔다. 나와 웅복이 지내던 방에 말년이 들어오고, 웅복은 옆방으로 옮겨갔다.

이들이 정말 인간이 맞는가. 믿겨지지가 않는다. 치가 떨린다. 두 모자는 사람의 형상을 한 악마들이었다.

하지만 그 불쌍한 아이를 내버려두라고, 너의 그 흉악한 물건은 나한테만 휘두르라고 외칠 용기는 없다. 웅복에게 매질 당할 것이 두렵기에.

한편, 그가 날 찾지 않음에 내심 안도하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이런 나 자신을 속으로 꾸짖고 또 꾸짖는다. 순득이가 네 친딸이었다면 지금처럼 손 놓고 있을 거냐고.

나는 스스로 변명하고 만다. 내가 항의한들 저들이 눈 하나 깜짝할까. 나만 구타당하는 게 아닐까.

내가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동안 순득이는 눈에 띄게 침울해졌다. 그걸 눈치 챈 사람도 신경 쓰는 사람도 나뿐이다.

순득이가 밭에서 일하다 말고 훌쩍대고 있으면 말년이나 웅복의 호통이 날아든다. 정신 차리고 사람 구실, 여자 구실 제대로 하라는 거다.

말년의 설교가 이어진다. 너희는 복 받은 거야, 이년들아. 나는 철들기도 전에 종으로 팔려갔어. 위로 언니가 줄줄이 여섯인데 당연하지, 암.

누구를 향한지 모를 원망도 쏟아낸다. 나는 아들 낳을 수 있는데, 아들도 버젓이 낳았는데 기어이 날 쫓아내? 짐승만도 못 한 놈들. 우리 웅복이가 왜 지 아들이 아니야? 벼락 맞을 연놈들 같으니.

말년의 울분은 순득이를 향한 질책으로 마무리된다. 이년아, 니가 내 젖을 그리 탐내서 애가 안 들어선 거 아니냐. 돼지 같은 년. 네년만 아니었으면 번듯한 아들 하나 더 낳는 건데. 에이, 쓸모없는 년.

나는 그제야 순득이가 말년을 엄마라 칭하는 이유를 알게 됐다. 말년이 왜 자길 할머니라 부르라 야단치는지도.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괴물들인가.

 

8.

하루 종일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세상이 생명의 기운을 잃어가고 있다. 나도 마른 낙엽이 되어 저 바람에 부서지고 싶다. 최소한 이 올가미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리라.

웅복이 나무를 하러 가고 말년이 뒷산에서 도토리를 줍는 사이, 나는 순득이를 설득했다. 순득아, 도망가. 이렇게 살 필요 없어. 넌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야 해. 도망가서 경찰에 신고해. 네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면 경찰들이 와서 할머니랑 아빠를 잡아갈 거야.

순득이는 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두려워했다. 안돼요. 할머니랑 아빠가 그랬어요. 마을에 내려가면 순사한테 잡아간다고. 잡혀가면 화냥년 되는 거라고.

이 아이는 순사가 뭐고 화냥년이 뭔지는 아는 걸까. 나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며 순득이를 달랬다. 이제 순사 같은 건 없어. 시대가 바뀌었거든. 대신 경찰이 있지. 나쁜 사람 잡아가고 착한 사람 지켜주는 좋은 사람들이야. 경찰들이 우릴 도와줄 거야. 순득아, 지금 우리가 이 모양으로 사는 거, 이게 바로 화냥년이야. 마을에 가면 넌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사귈 수 있어.

꽃신도 있어요? 순득이가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묻는다. 예전부터 빨간 꽃신을 신어보고 싶다던 아이다. 딱 한 번, 아빠를 따라 장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봤다는 거다.

그럼, 물론이지. 꽃신뿐인 줄 아니? 멋진 옷도 많고, 머리도 예쁘게 자를 수 있어.

엄마가 처음 여기 왔을 때처럼 말이에요?

그래, 맞아.

순득이는 드디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엄마, 나 마을에 내려가서 그 경찰이란 사람한테 도와달라고 할게요. 엄마를 풀어달라고 할게요.

텃밭을 지나 숲속으로 사라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오후 늦게 말년과 웅복이 돌아왔다. 순득이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은 길길이 날뛰었다.

웅복은 흰자위가 다 보이도록 눈을 까뒤집고 나를 때렸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였다. 고무신, 빨래방망이, 싸리비…….

그가 낫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지자, 이번에는 말년이 달려들어 발길질을 해댔다. 얼굴이고 배고 부위를 가리지 않았다.

이년이 남의 대를 끊어놓으려고 환장을 했나, 눈깔 멀쩡한 년이 애 하나를 못 봐? 이 쓰잘머리 없는 년, 맷돌에 갈아버려도 시원찮을 년! 말년은 씩씩대며 거품을 물었다.

나는 눈두덩이 터지고 코피를 쏟아도 좋았다. 부디 순득이가 무사히 산을 내려가 경찰에 신고하기만을 바랄뿐이었다. 그러면 나도 순득이도 이 지옥을 나갈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애타는 바람은 허무한 실패를 맞닥뜨리며 산산 조각나고 말았다.

컴컴한 밤, 순득이가 제 아버지 손에 머리채가 붙잡혀 끌려왔다. 우리는 두 모자에게 함께 맞았다.

순득이가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아빠, 한 번만 봐 주세요, 진짜 한 번만 봐 주세요. 엄마가 시켰어요. 엄마가 마을에 내려가서 순사를 데려오라고 했어요.

나는 아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종용한 게 사실이니까. 오히려 미안해해야 하는 쪽은 나였다.

순득이는 맨발이었다. 발에 찔리고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끌려오는 길에 신이 벗겨졌는데 아빠가 내버려두라 했단다. 어디서 벗겨졌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아이의 성장에 맞춰 고무신을 구해오던 웅복은 이제 고무신 따위 없을 거라고 엄포를 놨다. 아이는 다시는 도망가지 못 할 것이다.

순득이와 내 몸에 물든 구타의 흔적들은 한 달이 지나서야 자취를 감췄다. 우리는 통증으로 끙끙대면서도 말년의 송곳 같은 눈초리를 감내하며 집안일과 밭일을 해나갔다.

김장을 끝낸 다음날이었다.

말년이 아침부터 싱글벙글한다. 태몽을 꿨다는 거다. 커다란 낫이 품에 턱 박히는 꿈이었단다. 아들이 틀림없다며 순득이를 칭찬하는데 아이는 들은 체 만 체 했다.

해가 바뀌었다. 산천에 각양각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폈다.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비탄과 설움이 가득한 마음속에 계절 변화에 대한 감상이 들어올 자리가 있으랴.

무심하게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잎이 무성해졌다. 순득이의 배가 급속도로 불러왔다.

말년은 순득이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확신을 더 깊게 가졌다. 배가 나온 모양이 그렇단다.

난 아이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작은 몸에 비해 배가 너무 많이 부푼 것 같았다. 혹시 쌍둥이를 밴 것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잔인하게도, 웅복은 그런 아이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매일 밤 집요하고 추악한 소음이 흙벽을 타고 넘어왔다.

순득이의 우울과 히스테리가 날로 심해졌다. 방안에서 웅크리고만 있고, 어쩌다 아는 체를 하면 발정 난 암캐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날을 세웠다.

아이는 나를 원망할 때가 많았다. 내가 아들을 못 낳아서 자기가 그렇게 됐다는 거다. 나 때문에 고무신을 잃어버려 도망갈 수가 없다는 거다.

아이는 나를 미워했다.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아이는 제 아버지와 할머니를 보는 것과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봤다. 그 독살스런 눈빛이 말년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하나뿐인 동지를 잃고 말았다.

나도 스스로를 원망했다. 애초에 이 산에 산행을 오자고 한 것, 남편과 딸아이와 떨어져 혼자 산을 오른 것, 남의 호의를 무작정 받아들인 것, 전부가 후회만을 낳았다.

남편은 아직도 날 걱정하며 찾고 있을까. 날 잊고 유미와 단둘이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나 같은 못된 년이 아닌 착한 여자를 새로 만났을까.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아줬을까. 우리 부모님은 나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새지 않았을까. 여전히 건강하실까.

회환과 그리움이 무심결에 사무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곤 했다. 그럴 때면 유미한테 읽어주던 전래 동화가 떠올랐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

내가 가사와 육아를 등한시하고 출산을 기피해 이런 벌을 받는 걸까. 무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무를 먹은 소는 사람으로 돌아가 깨달음을 얻고 개과천선했다.

나한테도 그런 기회가 올까. 나한테 그 무는 뭐란 말인가.

 

9.

깨달음도 개과천선도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도 허망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오직 소멸하기만을 바랐다.

가족들 품으로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돌아간들 이곳에서 겪은 악몽을 잊고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지도 못 한 삶의 고통이 다시금 등장해 내 인생을 장악하지는 않을까.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니까. 크기가 큰지 작은지의 차이일 뿐.

생명의 탄생부터가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가. 지금 순득이의 모습처럼 말이다.

아이가 느낄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안 된다. 진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게 괴롭다. 도와주고 싶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아이를 배기만 했지 낳아본 적은 없으므로.

순득이가 너무 아프다고,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넋을 놓고 웅얼거린다.

말년은 코웃음 치며, 엄살 부리지 말라고 한다. 멀쩡하게 애를 둘이나 낳은 사람이 여기 있다며, 자기 엄마는 애를 일곱이나 낳았다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배에 힘이나 주란다.

순득이는 가냘픈 아이다. 어찌어찌 용을 써서 힘을 줘 봐도 다리 사이로 선혈만 흐를 뿐, 진행이 극도로 더디기만 하다. 전전날 아침부터 시작된 진통이 만 이틀을 넘기고 다시 아침을 향해가는 이 시각까지 이어진다.

밖에는 종일 비가 내리다 그친 뒤였다. 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데다 눅눅한 습기가 뒤엉켜 방안 공기가 말할 수 없이 답답했다.

순득이는 온몸이 피땀으로 젖었다.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져 자길 죽여 달라 했다.

말년이 순득이 다리 사이에 자꾸만 손을 넣어보고는 뭔가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한다. 이때쯤이면 애가 나와야 되고, 최소한 머리 정도는 만져져야 된다면서.

문이 꽉 막혔어. 말년이 중얼대며 일어선다.

어딜 가나 싶은데, 다시 나타난 말년의 손에 시퍼런 식칼이 쥐어져 있었다. 팔랑이는 호롱불빛이 말년의 얼굴에 기괴한 음영을 드리웠다. 어둑한 허공을 뚫고 두 눈동자가 허옇게 빛났다.

칼은 왜……. 나는 말을 채 끝맺지 못 했다. 저걸로 말년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어차피 이 년은 못 살아. 애나 구해야지. 아들이잖아. 말년이 말하며 순득이 옆에 앉았다. 자신이 처한 운명을 깨달은 순득이는 바들바들 경련하며 신음하고 있었다.

나는 머릿속이 백지가 돼 버렸다. 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봐도 엄청난 난산이었다. 의사를 불러오거나 순득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한 순득이도 뱃속 아이도 잘못될 것이 틀림없다.

두 해결책 모두 가능성이 떨어진다. 전화도 없는 이 산골에서 의사를 어찌 부를 것이며, 저 지경인 아이를 데리고 야밤에 산길을 어떻게 내려간단 말인가.

하지만 가만 내버려두면 말년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만다. 그것만은 피해야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은 지켜주고 싶었다.

말년이 순득이의 둥근 배에 칼끝을 갖다 대는 순간, 나는 말년을 밀쳤다. 말년이 칼을 놓치고 욕설을 뱉으며 쓰러졌다. 나는 말년을 내리누르고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순득에게 도망가라고 눈짓했다.

웅복이 옆방에서 자고 있었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말년이 아들을 부르려고 애를 쓰고 나는 그걸 막고, 그러다 말년이 바닥에 발을 쿵쿵 찧었다. 그 소리에 웅복이 깼는지 옆방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순득이가 엉금엉금 기어 방을 빠져나간 뒤였다.

웅복을 막으려고 나가는데 말년이 더 빨랐다. 내 뒷덜미를 잡더니 머리끄덩이를 와락 낚아챘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나는 말년에게서 내 생식기와 부모를 욕보이는 온갖 상스러운 말을 몇 분만에 다 들었다. 매질도 함께였다. 거친 주먹과 발이 부위를 가리지 않고 퍽퍽 내리찍었다.

습관처럼 맞고만 있던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오냐, 어차피 죽기로 한 거, 나도 네년 좀 쳐 보고 죽자.

나는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년에게 덤벼들었다. 말년이 놀라서 두 눈이 커졌지만 곧 거세게 반격했다. 쇠사슬이 철컹대는 소리가 방안을 울리고, 우리는 한 몸이 되어 방바닥을 굴렀다.

머리카락이 뽑히고 옷고름이 뜯겼다. 코가 터지고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밖에서는 웅복이 뭐라뭐라 고함을 지르며 물건을 부수고 난리가 났다.

잠시 뒤, 문전에 시커먼 그림자가 우뚝 섰다. 웅복이었다. 한 손에 낫을 들고 있었다.

이 멍청한 년들! 그가 외쳤다. 순득이가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해? 이 쓸모없는 년들! 낫끝이 우리를 향해 날아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피했지만, 말년은 제 아들을 믿었나 보다. 멀뚱히 쳐다만 보는 말년의 가슴팍에 낫이 퍽 하고 박혔다.

말년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 했다. 크게 뜬 두 눈과 헤벌어진 입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불 꺼진 아궁이 같은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방바닥에 고였다.

나는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갔다. 동쪽 능선 위로 햇귀가 비쳐 올라왔다. 빗물은 땅바닥에 모두 스며들었다. 그 위로, 방에서 우물까지 붉은 궤적이 이어져 있었다.

우물로 달려갔다. 핏자국은 우물 벽에 묻은 것을 끝으로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순득아! 우물 안을 향해 외쳤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어스름한 햇빛이 지붕에 가려져 우물 안은 시커멓기만 했다.

밤마다 옆에 누워 옛날 얘기를 해 달라 조르던 아이. 한없는 찬미를 담은 눈으로 나를 보던 아이. 엄마를 구해주겠다고 산을 뛰어 내려간 아이. 내 이기적인 방관 때문에 무참히 짓밟힌 아이. 보통의 가정에서 자랐다면 아이돌에 열광하며 친구들과 깔깔대고 있을 아이.

열다섯 살 소녀의 짧고 가련한 삶은 이토록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 통렬한 비애가 해일처럼 덮쳐왔다. 나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눈물이 순식간에 마르며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웅복이 낫을 까딱대며 방을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턱대고 달렸다. 발이 진흙에 푹푹 빠졌다. 열무, 시금치, 상추들이 발에 차여 부서졌다. 흙속에 숨은 돌과 나뭇가지가 발바닥을 찔렀다. 그 통증은 웅복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지 못 했다.

몇 초 뒤, 목이 턱 하고 걸리며 발이 멈췄다. 순간적으로 가해지는 압통에 기침을 컥컥거렸다. 뒤돌아보니 우물 기둥과 내 목 사이에 쇠사슬이 일직선으로 팽팽하게 이어져 있었다.

웅복이 외쳤다. 네년이 도망가 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경박스럽게 껄껄대더니 쇠사슬을 잡아당긴다.

나는 발뒤꿈치를 땅에 박고 버텼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금세 앞으로 고꾸라져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올가미에 턱이 짓눌리며 머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얼굴이 진흙에 처박혀 코와 입 안으로 흙이 튀어 들어오고, 돌멩이와 나뭇가지가 지나가며 할퀴어댔다.

마침내 멈췄을 땐, 땅바닥에 휩쓸린 피부에 생채기가 가득했고, 옷은 진흙 범벅이었다. 나는 진창에서 뒹군 고깃덩이와 같은 꼴이 되어 웅복의 고무신 앞에 엎드려 있었다.

네년을 어떻게 할까. 그가 중얼거렸다.

 

10.

나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웅복에게 밥 해 주고 몸을 대 줄 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새벽에 눈을 뜬 후 밤늦게 잠들기 전까지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오로지 두 개의 생각에만 사로잡혔다. 이 지옥을 탈출하자. 그 전에, 순득이를 그렇게 만든 이 악마를 없애버리자.

제 엄마를 직접 죽이고 딸을 간접적으로 죽인 이 인간은 끼니때가 돌아오면 꼬박꼬박 밥을 얻어먹고 밤이면 밤마다 제 욕정을 해소하기 바빴다.

여느 때처럼 남자의 밑에 깔려 능욕 당하던 밤이었다. 나는 그가 자기만의 쾌락에 빠져 헉헉대고 있을 때 내 목에서 이어진 쇠사슬을 야금야금 끌어 모았다.

이윽고 절정에 다다라 그가 무아지경에 빠진 순간, 나는 그의 목에 쇠사슬을 휘감아 잡아당겼다. 내가 요 며칠간 웅복의 눈을 피해 상상하고 연습하던 동작이었다.

웅복이 끅끅거리며 쇠사슬을 풀려 안간힘을 썼다. 나는 사슬을 그의 목에 감고 또 감고 여러 번 감았다.

그의 손이 축 늘어졌다. 나는 그의 귓가에 대고 외쳤다. 네놈이 훔쳐간 내 신발, 어딨어? 어디 숨겼냐고!

그는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저었다. 나는 놈의 따귀를 후려쳤다. 당장 내놔! 죽기 싫으면!

웅복이 손가락을 들어 방문을 가리켰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귀를 바짝 갖다 댔다. 그는 간신히 ‘섬돌’이라고 했다.

그의 목에 감긴 쇠사슬을 내버려두고 나갔다. 툇마루 아래 섬돌 위에는 검정 고무신이 두 켤레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발로 휘휘 차서 내던졌다.

바위덩어리나 다름없는 섬돌은 엄청나게 무거웠다. 웅복이라면 이걸 번쩍 들었을지도 모르나, 나는 툇마루에 앉아 두 발로 그것을 미는 수밖에 없었다.

섬돌의 위치가 조금씩 변하자 어느새 바닥에 파인 구멍이 보였다. 그 안에 있었다. 내 빨간색 등산화가.

얼른 주워 신었다. 누가 빼앗기라도 할까 봐.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멀쩡한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올가미를 풀 열쇠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없었다. 웅복이 그새 숨이 끊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얼굴이 시뻘겋게 팅팅 붓고, 눈알은 뒤로 허옇게 돌아가고, 혀가 길게 삐져나온 모습이었다.

나는 내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신발을 찾기 전에 열쇠의 행방부터 물어볼 것을.

시체에서 쇠사슬을 푼 뒤 집 안팎을 뒤졌다. 수색은 몇 주를 이어졌다.

집안 살림과 집기를 탈탈 털고, 부뚜막과 아궁이를 뒤졌다. 마룻바닥과 방구들을 뜯어내고, 들보와 서까래를 헤집었다. 우물 벽은 물론이고 뒷간까지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열쇠는 아무 데에도 없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나는 그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깊은 좌절감에 빠져들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그토록 원하던 자유를 마침내 얻었지만 반쪽자리 자유에 불과했다.

그리고, 외로운 이유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철천지원수들이 사라지고 없음에 환호하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스톡홀름 증후군의 일종인 걸까.

나는 철저히 혼자다. 이곳은 고립된 세상이다. 이곳의 존재와 나의 감금에 대해서 그 누구도 모른다.

게다가 집 주변은 시체 천지다. 웅복은 순득과 말년의 시신을 뒤뜰에 묻었다. 그가 땅을 팔 때 나는 흙 속에 묻힌 백골 사체를 여러 구 목격했다.

웅복의 시신은 죽을 때 모습 그대로 방에 있다. 나는 그의 더러운 몸에 손끝 하나 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더 더러워지고 있다. 그의 시신이 썩는 냄새가 장지문과 흙벽을 뚫고 나와 집안에서든 밖에서든 강렬하게 진동하고 있다.

희망도 탈출구도 가족도 없는 삶. 시취와 시체들에 둘러싸인 삶. 즐거움도 기쁨도 말살된 지 오래고 고독과 고통만이 존재하는 삶. 그렇다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뭔가.

나는 소멸하기로 결심했다. 그것만이 내가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었다.

그건 나 자신을 단죄할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순득이가 그 처참한 나락에 떨어져 몸부림 칠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던가. 뭘 하지 않았던가. 나도 그 아이의 고통에 일조한 죄인이요 악마였다.

유서 따위는 쓰지 않기로 했다. 발견될 가능성이 희박하기에. 그런 걸 쓰다가는 세상에 남은 미련을 못 버릴 것 같기도 했다.

우물 옆에 서서 안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멓게 그늘진 수면 위로 초췌한 여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순득아, 그리고 이름 모를 가여운 여인들아, 나와 함께 하자꾸나.

우물 벽을 타넘고 앉았다. 빨간 등산화는 벗지 않았다. 이것은 나를 훨훨 날아오르게 할 날개옷이다. 내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할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다.

나는 아래로 뛰어내렸다.

 

11.

내가 눈 뜬 곳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병원이었다.

남편은 내가 실종됐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지만 그들은 나를 찾지 못 했다.

나를 발견한 사람은 허리가 굽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호호백발 할머니였다. 도립공원 매표소 근처에서 딸이 식당을 운영하는 분인데, 산나물을 뜯으러 산을 자주 오르신다고 했다. 그 분의 불법적인 행위 덕분에 내가 구조된 것이다.

할머니는 빨간 등산화가 날 살렸다고 했다. 그게 산속의 아주 오래된 우물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단다. 초록색 잎사귀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선명하게 보였다고.

나는 그 우물 속에서 발견되었다. 이미 물이 마른 지 오래고 흙먼지와 나뭇가지와 낙엽들로 가득한 그 안에 내가 쓰러져 있었다는 거다.

옷은 내가 우물에 뛰어든 당시 입고 있던 소복이 아닌 등산복 차림이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내 생명의 은인에게 사례하며 물었다. 우물 주변에 초가집과 쇠사슬이 있지 않았냐고.

할머니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그가 전설 같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할머니가 어렸을 때, 마을 여인들이나 여자 아이들이 산에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단다. 마을 어른들은 산군이 색시 삼으려고 잡아가는 거라며 여자들이 산에 오르지 못 하게 했다.

그래도 생활고에 시달려 산을 오를 수밖에 없는 여자들이 있었다. 실종자는 끊임없이 발생했다.

결국 경찰이 나섰다. 그들은 산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의 증언에 따라 그 주변을 수색하다 초가집과 텃밭을 발견했다.

경찰들은 경악했다. 그곳이 공동묘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뒤뜰에서 성인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백골 사체 일곱 구와 부패가 진행 중인 여자의 시신 두 구가 발견됐다. 어린아이나 태아의 것으로 보이는 백골 사체도 네 구 있었다.

초가집 안에서는 부패가 상당히 진행된 남자의 시신이, 우물 안에서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여자의 시신이 나왔다고. 그 여자의 시신은 목에 무쇠 올가미가 채워져서 우물 밖의 쇠사슬과 연결돼 있었다고 했다.

당시는 과학 수사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시신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었단다. 다만 마을 사람들은 그게 누구인지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었다.

당시로부터 30여 년 전, 어느 가문에서 종살이를 하던 말년이라는 여종이 있었다. 그 집안 며느리가 아이를 낳지 못 해 시부모들에게 은근한 눈총을 받던 중에, 주인 아들과 정을 통하던 말년이 아들을 낳았다.

말년은 내심 그 며느리 자리를 자기가 꿰찰 것으로 기대했으나 아들과 함께 쫓겨나고 말았다. 며느리의 집안이 보통 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핏덩이와 함께 길바닥으로 내몰린 말년은 구걸을 하고 다녔다. 주로 공략한 집은 딸만 있거나 아이가 아예 없는 집이었다. 아들을 낳아주겠다며 밥을 얻어먹고 몸을 팔던 말년은 일대 여인들 사이에서 공공의 적으로 떠올랐다. 결국 마을에서마저 내쫓기고 말았다.

그 아들 이름이 웅복이라 했었던가.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네, 맞아요.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씁쓸한 시선을 나눴다.

퇴원하던 날, 나는 병원 근처 재래시장의 한 한복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빨간 꽃신을 한 켤레 구입했다.

할머니께 부탁해 함께 산에 올랐다. 할머니는 여러 번 다닌 길이라며 능숙하게 우물을 찾았다. 뜻밖에도 우물은 등산로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내가 수년간 감금돼 착취당하던 초가집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덤불과 나무가 가득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얼핏 돌무더기 같아 보이는 우물만이 남아서 내가 겪은 일이 환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우물 안에 꽃신을 던져 넣었다. 순득아, 잘 가. 지켜주지 못 해 미안하다.

 

12.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트라우마는 조금씩 희석되고 있다.

당시의 일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며 식은땀을 흘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이 실제가 아니라 잠깐 꾼 악몽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킨다.

남편은 내가 겪은 일을 언제나 시큰둥하게 듣는다. 내 죄책감이 만들어낸 꿈이란다. 이제 정신 좀 차렸냐며, 가정에 신경 좀 써 보라고. 나는 쇠사슬을 구해 와 그의 목에 감아버리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회사에 출근하고, 가사를 등한시한다. 바뀐 게 있다면 피임을 한다는 거다.

무를 먹고 다시 사람으로 탈태했지만 ‘개과천선’하진 않았다. 평생 할 집안일을 그 때 다 했는데 쳐다보기도 싫은 게 당연하지 않을까. 살림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신혼 때 큰 열락을 안겨준 남편과의 잠자리도 갖가지 핑계를 대며 피하고 있었다. 그것도 살림의 일부 같기만 했다. 너 이거 이혼 사유 되는 거 알고 있냐, 남편이 물으면 나는, 알아, 이혼하려면 하든가, 하며 응수했다.

남편이 고자질한 모양이었다. 시어머니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찾아와 나를 설득하고, 협박하고, 읍소하기까지 했다.

나라고 왜 남편과 내 유전자를 반반 물려받은 자식을 낳아서 키워보고 싶지 않으랴. 하지만 무언가가 내 번식 본능을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조건을 내걸었다. 유미를 데려가시면 병원 가서 검사 받고 원하시는 아들 낳아드리겠다고. 나이 많고 애 딸린 홀아비 새 장가 보내기 싫으시면 내 말대로 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유미와의 신경전이 날이 갈수록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가슴이 도드라지는 게 눈에 띄기에 브래지어를 사러 가자고 했다. 아이는 제 가슴을 내가 왜 신경 쓰냐며 성희롱 어쩌고 불쾌해하더니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돈이나 달라고 했다.

얼마 뒤에는 빨래를 돌리는데 아이 팬티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어쩔까 고민하다가 생리대 사는 데 쓰라는 메모와 함께 돈 봉투를 유미의 책상에 올려뒀다. 아이는 돈을 내 얼굴에 던졌다.

시현이네 엄마는 시현이가 생리 시작하니까 축하한다고 파티를 열어줬다, 엄마는 돈만 벌어오면 다냐, 친딸 아니라서 무시하는 거냐. 아이는 바락바락 대들었다. 그걸 본 남편이 못된 계모 운운하며 나를 몰아세웠다.

단순한 중2병은 아니었다. 저녁 내내 일언반구도 없다가 제 아버지가 밤늦게 퇴근하니 그제야 저러는 걸 보면 말이다. 모든 일이 이런 식이어서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인정한다. 나는 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저 아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이는 영악할 정도로 모든 걸 알고 있다.

엄마를 잃고 아빠마저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는 심리도 이해한다. 그걸 생각하면 아이가 안쓰럽다. 하지만 그걸 왜 내가 희생하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가.

이 가정에서 나는 들러리다. 남편과 유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정이다. 나는 이 가정의 구심점을 나와 남편과의 관계로 끌어오고 싶었다.

시어머니의 채근에 유미와 남편은 눈물의 이별을 해야만 했다. 남편이 날더러 나쁜 여자라고 욕하고 유미가 날 찔러죽일 듯 쳐다봐도 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병원을 들락거리며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임신을 시도했다. 산부인과 의사가 예상한 대로 면역학적 문제였다.

마흔이 다 된지라 자연 임신이 될까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애가 들어섰다. 나는 면역력을 낮추는 약물을 투여하며 임신을 유지시켰다. 어느덧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배가 불렀다.

새벽에 꿈을 꿨다. 상당히 오랜만에 꾸는 꿈.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현관문 뒤에서, 귀여운 목소리의 어린 아이는 나한테 감사하고 있었다. 엄마, 나 신발 찾아줘서 고마워. 꽃신 너무 예쁘다. 정말 마음에 들어. 나 이제 엄마한테 갈 수 있을 것 같아.

현관문 외시경으로 내다보았다. 그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밖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빨간 꽃신을 신은 아주 작은 여자 아이가 서 있었다. 내가 우물에 던져 넣은 그 꽃신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문을 열었다. 아이의 맑은 눈망울이 영롱하게 빛났다. 엄마, 보고 싶었어.

오랜만이구나. 내가 웃어보이자, 아이가 활짝 웃으며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나는 눈시울이 시큰해져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날 산부인과에 가서 확인하니 뱃속 아이가 딸이라고 했다. 의사는 이대로 임신이 잘 유지되면 분명히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을 거라며 축하한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은 매우 기뻐하셨지만, 손녀가 하나 더 생길 거란 소식을 들은 시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나한테 임신 중절을 권했다. 지금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 다음번 아이를 낳을 때에는 내가 너무 나이가 많다, 게다가 아이가 셋이나 된다, 그때도 딸이면 어쩌느냐면서. 나는 완강히 거부하며 이번이 내 마지막 출산일 거라고 못 박았다.

대가 끊긴다고 난리다. 뭐 대단한 집안이라고. 분명 윗대에서 족보를 사서 지금 그 성씨를 가졌을 확률이 99%일 텐데. 내가 중절은 불법에 살인이고 중절 강요하는 게 이혼 사유 되는 거 아느냐 물으니 두 사람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날, 시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거다. 몸이 안 좋아 검사를 받아 보니 암이라고. 이제부터 치료에 집중해야 하니 유미 좀 데려가 키우란다.

아, 그러세요? 쾌차하시길 빌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따위 얄팍한 술수에 놀아날 줄 아느냐, 그게 내 생각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역대 가장 큰 부부싸움을 하고 말았다. 남편은 나한테 이기적인 년이라고 고함을 지르며 핏대를 세웠다. 어떻게 그렇게 너밖에 모를 수가 있어! 너네 엄마 아빠가 암이라는데 내가 아, 그러세요, 쾌차하시길 빌게요, 이딴 소리나 하면 네 마음이 어떻겠어!

결국 나는 미안하다 사과하고, 시어머니한테도 싹싹 빌었다. 시어머니는 암이 아니라며 실토하고는, 유미를 데려가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뱃속 아이는 지우는 게 좋겠다는 거였다. 나는 유미를 데려오겠다는 것만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오한이 들며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왜 그런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내 목을 친친 감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새벽에 꿈을 꿨다. 비슷한 꿈. 하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엄마, 신발 좀 찾아줘. 여기까지 맨발로 걸어와서 발이 너무 아파. 들어갈 수가 없어. 어린 아이가 아닌 십대 소녀의 목소리였다.

현관문 외시경에 눈을 대고 내다봤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문밖에 서 있었다.

소녀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고 덥수룩했다. 한 번도 빗지 않은 것처럼 헝클어지고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었다. 얼굴까지 덮고 있어 내가 보는 게 앞인지 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치맛자락에는 시뻘건 얼룩이 여기 저기 묻어 있었다. 피. 저건 피다.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소녀는 빨간 꽃신을 신고 있었다. 아니다, 그냥 발이 빨간 거다. 다리 사이에서 흘러내린 피가 발을 덮은 것이다.

소녀가 발을 질질 끌며 걸어왔다. 발뒤꿈치 뒤로 빨간 궤적이 기다랗게 그어졌다.

소녀가 점점 다가와 외시경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엄마, 나 문 좀 열어 줘. 나는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섰다.

덜컥덜컥 문고리가 흔들렸다. 나는 사력을 다해 그것을 꼭 붙들었다.

소녀가 앙칼지게 외치며 문을 두드렸다. 엄마, 뭐 해? 문 열어. 엄마!

저리 가! 너 같은 딸 필요 없어. 넌 내 딸이 아니야. 내 딸은 내 뱃속에 있다고! 나도 소리를 지르며 필사적으로 문을 잡아당겼다.

나는 왜 꽃신 안 주는 거야? 엄마 미워! 나도 꽃신 달라고! 엄마가 안 주니까 내가 만들었잖아! 얼마나 아팠는지 알아? 아니야. 빼앗아 버릴 거야. 엄마 딸이 신은 꽃신, 내가 가질 거라고!

나는 문을 사수하는데 온 힘을 쏟느라 아무 말도 못 했다. 기필코 막아야 했다. 이번만은 지켜야 했다.

그때, 목둘레에 싸늘한 것이 철컥 채워졌다. 안 돼, 왜 이런 일이 또!

무쇠 올가미에 연결된 쇠사슬을 남편이 잡아당기고 있었다. 못된 년, 이기적이 년, 저 혼자밖에 모르는 년, 천벌을 받을 것이다! 눈알을 희번덕대며 낄낄대는 모습이 악귀 같았다. 나는 문고리를 놓치고 질질 끌려가고 말았다.

달칵, 현관문이 열렸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빨간 발이 비집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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