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꿈속의 숲- 3. 십년 전

2020.04.11 22:0304.11

 

노려보듯이 정수리를 내리쬐던 강렬한 해가 붉은빛이 차오르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가라앉아 하늘도 붉게 물들었다. 

”노인네가 사정도 모르고 와서 괜히 자네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구먼.“

 방이 두 개인 집이라 언니랑 내가 방을 함께 쓰는 것을 보시곤 멋쩍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운경국에 갈 때마다 항상 어르신 댁에서 신세를 지는 데 어르신은 항상 대가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아닙니다. 더 좋은 곳으로 모시지 못해서 죄송하지요.“

”하하, 이젠 흔들리는 배만 아니면 다 별궁이야.“

 어르신은 얼른 들어가 쉬자 하셨다. 우리는 방 안으로 들어가 이부자리를 대충 펼치고 세안을 하고 돌아와 자리에 누워 담소를 나눴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우리 둘은 아이처럼 금방 빠져들었다.
 
 언니는 내 어릴 적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떠돌이 무사들을 쫓아다니며 즐거운 여행을 상상했던 나. 밤늦게 잠 못 드는 나를 위해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어머니. 마음이 맞는다 싶으면 어떤 자인지 묻지도 않고 집으로 데려와, 자는 나를 옆에 두고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던 아버지.
 
 언니를 만나기 전엔 포근하게 감싸주던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나는 눈을 돌리면 알음알음 맺히는 기억으로 빈 곳을 채우며 살아왔다. 이젠 나와 같은 구석이 하나 없는 언니가 썰물처럼 옛날로 나를 이끌고 갔다가 밀물처럼 나의 하루하루를 새롭게 채웠다.
 

 어느덧 등불이 없으면 방 안이 빈틈없이 어둠에 묻힐 만큼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언니는 오늘은 일찍 자자며 자세를 바로 하고 누웠다. 곧 잠에 빠져들었고, 나는 꿈에서도 열심히 책을 필사하고 책을 찾아온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 옆 방에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방 밖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큰소리가 아니었는데도 잠이 깨었다. 그 방에서 나온 사람이 언니가 아닌 어르신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오늘 점심때 어르신의 표정이 떠올랐다. 대충 윗옷을 찾아 챙겨입고 언니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어르신께 갔다.

 어르신은 밖으로 나온 나를 돌아보고는 어색하게 웃으시고 다시 발걸음을 떼셨다. 나는 옆으로 나란히 서서 걸으며 무슨 일이 있으신지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다. 어르신은 술 생각이 나서, 하시고 계속 길을 가셨다.


 어두운 거리에 횃불을 켜놓고 장사를 하는 주막집, 술집이 많이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 술 한잔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떼를 이뤘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들어가 간단한 안줏거리와 탁주 한 병을 시켜 자리에 앉았다.

 밤이 되어도 무더운 습기가 공기를 짓눌렀다. 삼베가 덮지 않은 피부는 금방 끈적해졌고 모기가 더운 피부를 찾아 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성가신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어르신과 단둘이 앉은 상은 여름의 더운 공기 때문인지 무겁고 갑갑했다. 은연 중의 무거운 분위기를 깨준 것은 주모가 들고 온 술과 음식이었다. 어르신은 음식이 나오자마자 술 한잔 들이키시더니 말을 시작하셨다. 

”벌써 십 년이 흘렀단다. 나는 이제야 막 잠에서 깬 것 같은데 말이다.“

 십 년이라는 말이 나오자 나는 어르신의 말의 뜻을 알아채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바쁘게 지내느라 시간이 안 나더구나. 아버지 상 때도 제대로 같이 있어 주지도 못했구나.“

 어르신은 씁쓸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적당한 말을 하려다 목이 메 조용히 어르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 겨우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항상 어르신께 신세만 졌지요. 예까지 오시기도 힘드셨을 텐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어르신은 고맙구나, 하시고 다시 말이 없으셨다. 금세 어르신과 나 사이의 공간은 술에 취한 자들의 흥겨운 노랫소리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그 소리는 우리와 너무 이질감이 커서 이 순간이 누군가의 도술로 만들어낸 환상처럼 느껴졌다.

”정말 정신없이 보냈어. 십 년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야. 그 뒤로 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했는데 어처구니가 없지.“

 어르신의 진심과 아픔이 묻어나오는 소리는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리는 것처럼 가슴을 울렸다. 내 앞에 앉은 사람은 큰 상단을 운영하는 위엄있는 상단주가 아니라 그저 슬픔에 젖은 노인이었다. 

 십 년 전, 나는 어르신께 벌어진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아버지는 답장이 오지 않는 서신을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 운경에서 맛있는 것을 들고 오시던 어르신은 왜 오지 않는지, 왜 이분에게 서신을 계속 보내야 하는지 물어물어 알게 된 일이었다.

 듣기만 해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어르신이 상단의 일 때문에 잠깐 주변국에 나가 있는 사이에 누군가 집 안에 쳐들어와 부인과 하나뿐인 아들, 그리고 시종 몇 명의 목덜미에 송곳니 자국만 남기고서 죽였다고 하셨다.

 수수께끼 같은 죽음은 그저 강도의 소행으로 마무리되었고 상단주 가족의 일인 만큼 대규모의 수사가 벌어졌지만, 무엇도 밝혀지지 않고 끝이 났다.

 결국 어르신이 직접 일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제쳐두고 범인을 쫓았다. 아버지는 그런 어르신을 걱정하셨다. 하지만 아버지와 나는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도 보냈다. 그런 우리가, 내가 어르신을 말릴 수는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네 아버지와 네가 그동안 보내왔던 서신이 보이더구나.“

 어르신의 얘기를 듣고 나니 거의 답장이 돌아오지 않는 서신을 아버지의 부탁으로, 또 가끔은 형식적으로 썼던 내가 너무 창피했다. 그리고 그런 서신으로 위로를 받았던 어르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아팠다. 

”너도 부모 잃고 혼자 힘들었을 텐데.“

 이 말을 마치고 어르신의 눈가엔 결국 눈물이 맺혔다. 십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어르신에게는 생생하게 남아있는 상처였다.

”고맙다, 도이야.“

 얼굴이 여름밤 바람에 열기를 식힐 만큼 뜨거워졌다. 돌아가는 길은 후련했다. 어르신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해 소중한 인연이 더욱 돈독해진 덕이었다. 하지만 시간도 시간이고, 마음이 가벼워지니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에 들어가 다른 일을 할 기운도 없어 바로 자리에 누웠다. 거짓말처럼 눕자마자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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