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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사랑을 쫓는 마지막 밤

2019.02.01 13:5102.01

“보고합니다. 금일로 3719행성의 고등생물군 재설정작업을 본격화 하겠습니다. 예정된 순서도에 따라 최대한 혼란과 고통 없이 신속하게 처리할 것이며… 후발 고등생물군의 생활 보장과 생존 활로 등을 열어주기 위해…”

 중심지에서 살짝 밀리는 곳, 손님이 그다지 많지 않은 한 편의점 귀퉁이엔 이 동네 사람이라면 당연히 오고 가며 한두 번씩 만났을 법한 삼색고양이가 있다. 이 삼색고양이는 배가 고파질 때쯤이면 늘 편의점 유리문 앞에서 서성이며 기회를 엿본다. 누군가가 방울소리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 밖에서 긴 몸을 기울여 기웃기웃 편의점 내부를 살핀다. 팔을 휘저어 뭔가 던지는 시늉을 하면서 삼색고양이를 쫓는 사람도 많았지만 대개 사람들은 삼색고양이의 눈빛에 마음이 녹아서 앞에 쪼그려 앉아 뭔가 먹을 만한 것을 놔주고 가는 일이 많다.
 한 학생 무리가 놓고 간 메추리알 장조림을 물고서 후다닥 건물뒤편으로 몸을 숨긴 삼색고양이는 짭짤한 메추리알을 먹는 중에, 물은 언제나처럼 옆 골목 홀로 사는 노인의 집 수돗물을 받아놓은 빨간 플라스틱 함지박 물을 마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가 평소 삼색고양이의 행동과 삶의 단조로운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엔 삼색고양이에게 새롭고 낯선 고민이 생겼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계기로 인해 자신이 어쩌면 미쳐버린 것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동네 개들이 우스워 보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그 다음엔 상점의 간판 글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읽히기 시작했다. 맞게 읽었는지 확인할 가치도 없었다. 물어보나마다 틀림없는 자신감이 들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엔 현금과 시장 거래의 개념이 차곡차곡 정립되었고, 지나가는 자동차의 내부구조와 프레임의 재질 등을 알게 되었으며 이미 그 때쯤엔 자신이 거리에 돌아다니는 어린아이들보다 지적 수준이 앞서게 되었음을 자신했다. 그리고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내일은 더욱 거대한 지식정보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끊임이 없었고, 걸러지는 과정 없이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는 지식의 홍수 속 저변에서는 또 다른 울림이 있었다. 삼색고양이는 웅크려 눈을 감았다. 매우 크지만 시끄럽지 않았고 한계점이 없는 편안함으로 감싸진 그 울림에 귀를 기울이면서 안심해도 좋다는 위안을 얻었다. 그 길로 삼색고양이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찾아 직원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옥상으로 나갔다. 그리고 여태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확 트인 도심을 시원하게 내려다보았다. 찬바람이 거셌지만 삼색고양이는 개의치 않았다. 다만 알록달록하고 적당한 높이까지 소음으로 메워진 도심을 내려다보며 눈물 한 줄기를 흘려보냈다.

 화장실에서 다리가 저리도록 앉아있던 K는 5분 전쯤 옆 칸에 누군가가 들어온 뒤로 숨소리마저 줄이게 됐다. 부산스런 기척과 함께 두루마리화장지 푸는 소리나 꾸르륵 물 내리는 소리를 기어이 듣기 전까지 안심하기 어렵다는 것을 K는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 망할 오랜 경험 중엔 상당수 사람들이 자신처럼 변비가 고민거리인 경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상황은 적잖이 당황스럽게 흘러갔다. 옆 칸도 마찬가지로 K를 의식하는 것인가 느낄 만큼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환풍기 소리만이 적적함 속에서 제 할 일을 했다. K는 헛기침을 해보거나 핸드폰 버튼 소리를 내보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누굴까? 평균 한 시간에 한 번 꼴로 애인이 전화를 해대는 P라면 파악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다른 부서 사람일까?
 K가 양 손으로 주먹을 만들어 엉덩이 밑에 대고 허리를 펴보려 할 때 드디어 고대하던 소리가 들려오긴 했다. 하지만 원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음 틀어진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을 때 그가 주저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오려는 작은 새의 몸부림 같은 그의 별 것 아닌 고난은 오래지않아 이내 자리를 잡아갔다. 약간 길고 정돈되지 않은 음을 뽑던 휘파람소리는 점차 완성된 가락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기 1분도 되지 않은 때부터 멜로디가 그다지 낯설지 않다는 것을 K는 알아챘다. 하지만 그 익숙한 노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K를 괴롭혔다. 수 년 전 히트했던 가요였을까 외국 민요일까 아니면 어린 시절 잠깐 다니던 교회에서 따라 부르던 찬송가일까? K는 끝내 실마리는 잡아내는데 실패했다.
 K는 생활 속에서 자주 마주치는, 절묘하게 어긋나는 상황에 적잖이 지쳐있는 상태이며 그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는 권태로움에 자신이 저항 없이 빨려 들어가고 있음을 자각했다. 고작 혁대 버클이 제 위치에서 걸린 것 따위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마침 그 순간을 쪼개고 들어오는 짧고 위협적인 파열음이, 마치 준비 없이 듣게 된 칠판 긁는 소리처럼 느닷없이 머리 위쪽에서 퍼졌다. 어딘가에서 튀어 올라 화장실 벽에 달라붙은 채 K를 무심히 내려다보는 것은 회색 먼지를 온 몸에 덕지덕지 바른 고양이었다. 그 난데없고 배려심 없는 털뭉치는 아직 버클을 쥐고 있는 K의 시선을 단박에 끌게 되었다. 뒷골목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심히 고단해 보이는 고양이가 그곳에 있었다. K는 으레 고양이가 힘겨운 삶에서 여유를 누린 적이 별로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했다. 먼지 너덜너덜한 고양이는 모든 발톱을 세워 몸을 고정한 채 오묘한 시선으로 K를 내려다보았다. 흘러가는 시간의 한 토막을 티끌만큼도 주저하거나 위축됨이 없이 고양이는 그렇게 K와 시선을 맞추었다. 윤기 없고 뻣뻣한 털에 너덜대는 먼지를 달고 있는 그 삼색고양이는 화장실의 좁다란 칸막이 위 테두리를 솜씨 좋게 건너가더니 환풍구 달린 천장과 유리창이 만나는 어딘가로 망설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K는 자신이 고양이와 마주하던 그 사이에 옷을 추스른 옆 칸 사람이 내는 물 내림 소리 탓에 정신이 번득 돌아왔다. 옆 칸 문이 열리면서, 까닭은 모르겠지만 그가 화장실을 서둘러 빠져나간다고 K는 생각했다. 그가 누구인지 생각을 다시 더듬기도 전에 이미 발걸음은 따라 나서고 있었다. K는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서 화장실로 막 들어서는 또 다른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고 서로 주섬주섬 사과한 다음 얼른 화장실 통로를 빠져나와 사무실 쪽을 돌려보았다. 모퉁이 옆에 놓인 행운목의 걸리적거리는 잎이 위치상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여겨왔는데 그 성가심이 이어졌다. 하얀 셔츠가 간신히 흘리고 간 실루엣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낼 길은 없었다.

 이 시간쯤 특별한 뭔가가 없다면 사무실 내에 실제 일하는 손은 극소수라는 것을 K는 잘 알고 있다. 물론 K또한 다수에 속해있었다. 언제나처럼 인터넷 뉴스를 뒤적이거나 끝이 돌돌 말려 너덜대는 신문을 눈치껏 뒤적이다가 무심결에 입에서 휘파람이 새어 나갔음을 알았다. 화장실 이후부터 따라붙던 바로 그 노래였다. K는 아주 오래 전 학창시절에 주변 친구들이 워낙 많이 부른 까닭에 유난히 듣기 싫어했던 힙합 가요가 있었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했다가 어느 시점부터 아예 잠재의식 속에서 싫어하기로 마음 굳힌 뒤부터 오히려 그 노래를 더 많이 접하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당시는 싫은 노래를 계속 접해야 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면 지금은 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었다. 달콤하고 친근해서 더 알았으면 좋겠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약을 올리는 것이라 여길 만큼 딱 거기서부터 막혀버리는 답답하고 황망한 경우였다. 가사도 모르고 언제 어디서 듣게 되어 머릿속에 눌러 붙은 것인지 알 방도는 없지만… 친숙한 멜로디 짧은 구간이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반복재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방심하던 때에야 비로소 K는 자신이 휘파람을 불고 있을 만큼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서야 자신이 지금 알 수 없고도 유쾌하지 않은 일에 올라서 있음을 미약하게 느꼈다.
  “야, K! 무슨 노래냐?”
 어느 순간 P가 놀란 햄스터 같은 얼굴을 하고 불쑥 나타났다. P는 입을 오랫동안 벌린 채 웃는 습관이 있는데 본인은 전혀 거기에 대해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충치로 고생 깨나 하더니 어느 때부터 오래 피워왔던 담배도 끊어버리고 성실히 양치하는 습관을 들였으니 그나마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고작 입 벌리는 것 따위로 잔소리 할 필요는 없다고 K는 생각했다. 다만 잉어처럼 벌린 입에서 항상 눈에 들어오는 금니는 솔직히 거슬렸다. P의 금니를 보게 되면 뭔가 집중해오던 것들이 그 기점으로 한 순간에 흐트러진다고 해야 할 만큼 그 금니는 놀랍고도 희한한 마력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K는 앞으로도 얘기해 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에 따라서 그러한 얘기를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금니의 소유자, 밝은 웃음을 미워할 수 없는 P가 감지 범위를 거리낌 없이 뚫고 들어온 것이다. 오랜 직장생활로 터득한 보이지 않는 가상의 데드라인 말이다. 평소에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노래는 고사하고 가벼운 농담 한 번 시도하려면 두뇌 속에서 여러 번 글자를 정리 한 뒤에 내뱉어야만 하는 타고난 소심 쟁이 K는 성격상 당연히 당황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들켜버린 그 순간부터 휘파람소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잦아들었다.
  “어? 뭐냐고 그 노래?”
 K는 대답대신 P를 아주 잠깐 쏘아보게 되었다.
  “나의 그녀가 연결음을 바꿨더라고. 근데 무슨 노래인지 난 당최 모르겠는 거야. 어디서 되게 많이들은 노랜데…”
 K는 P의 얄팍한 계산을 간파했다. 틈나는 대로 애인에게 전화를 해대다가 어느 때 뜬금없이 연결음 노래를 맞춰서 자신의 해박한 음악적 소양을 별 것 아닌 양 뽐내려 하는 심산이 틀림없었다.‘역시 자기는 음악코드가 나랑 맞아’하던가 ’와! 나 이 노래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지?’라며 너스레 떠는 P가 자연스럽게 상상되었다. 말을 던져놓고 K의 대답 따위는 관심 없는 듯 P는 보조개 팬 얼굴로 씽긋 웃어 보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무실 벽의 큼직한 시계 초침은 정각까지 5분여의 시간을 남겨두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매우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이었으나 K는 사색하여 노래의 실마리를 찾는 쪽을 선택했다. 마침 방해가 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K는 알 듯 모를 듯 친숙한 그 멜로디로 자신이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듬으며 빨려 들어가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음의 높낮이나 선율을 땅속에서 가는 줄기 찾아서 캐듯이 마치 능숙한 최면술사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심연으로 내려간다고 여겼다. 물론 어딘가에 다다르면 그곳에 노래 제목이 새겨진 친절한 팻말이 박혀 있거나 아리따운 요정이 귀에 대고 속삭이거나 하는 달콤한 환상에 젖어가면서 말이다.
  “K! 학교 가야죠? 5분만 더 인가요?”
 남자 직원들 사이에 인기 순위로 말하자면 부동의 챔프 자리에서 수년째 내려오지 않는 우리 회사 최고의 퀸카 Y의 모습이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더니 어느 순간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K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으로부터 도망칠 쥐구멍이 없다는 것에 어쩔 줄 몰랐다. 그런 와중에도 Y는 상당히 매력이 넘치는 여자임엔 틀림없겠지만 조금 전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만화 같은 요정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와 정장과 와인이 어울리는 Y. 당당하게 할 말 다 하고 사는 현대 여성 Y. 검정색 안경이 잘 어울리는 Y. 그 Y가 팔짱을 끼고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기댄 채 K를 바라보고 있었다. K는 땅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으나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자각하려 애썼다. 양손으로 뺨을 가볍게 때려 정신 차리고 얼굴을 살폈다.
  “K그날이에요? 기분이 오락가락 한가요? 아까는 저쪽 구석에서 혼자 흥얼대더니…”
 Y가 가리킨 곳은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사무실 출입문 바로 앞 휑한 곳에 마련된 싸구려 둥근 테이블과 의자 몇 개. K는 성격상 사방으로 뚫린 그곳에 평소 앉은 적이 없다. 누군가와 잡담이나 의견을 나누더라도 대부분 엉덩이 붙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K는 그 옆에 서서 팔짱을 끼거나 벽에 기대는 쪽이 편했다. 그런데 그곳에 자신이 앉아 흥얼거렸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가?

 K는 자신의 회사 건물 위치가 마음에 든 적이 없었지만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번듯하고 당당하게 땅에 박혀있는 새 건물 주변은 모든 것이 새것이고 사람들도 당연히 그에 맞게 행동했으며 자신 또한 그 세련됨의 구성원이라는 뿌듯함을 충분히 느끼게 했다. 하지만 건물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수십 년 전 지어진 건물들이 누덕누덕한 빛깔로 너저분하게 줄지어 있었고 꾸역꾸역 스며 사는 그곳 사람들은 언제고 화낼 준비가 되어있다고 K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곳에서 K는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나 여러 일로 산만한 편이었지만 오늘은 또 다른 것까지 더해졌으니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허둥대다가 반대방향 버스를 타게 되었다. 새로울 것도 없고 한두 번도 아니었으므로 그러려니 하긴 했지만 피로감은 어쩔 수 없었다. 한 정거장 거리를 한심한 걸음으로 다시 걸어 돌아오다가 발길을 멈췄다. 어처구니없게도 갑작스럽게 좁아지는 인도. 그럼에도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옹골차게 갖춰진 곳에서 빨강 신호등을 무심히 노려보던 K의 눈에 번득 생기가 돌았다.
  “그 노래다!”
 K는 간혹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아주 작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육상선수처럼 도약해서 벌려 뛰어도 고작 한 걸음 반밖에 되지 않는 좁다란 횡단보도를 단숨에 가로질러 달렸다. 고작 뭔지 모를 음악 하나 때문에 자신이 달리고 있는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태 자신의 삶에서 그런 일은 없었으니 당연히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다. 멍청히 함께 서있던 몇 사람이 K때문에 무심결에 휩쓸려 같이 건너려 하다가 바뀌지 않은 신호를 늦게 알아챘다.
 K는 몸의 중심을 잃을 만큼 속도를 내 달렸다. 미성을 섞은 여유로운 음색으로 정성을 들인 허밍이 주변 공기를 진하게 타고 흘렀다. K가 지금 서있는 삭막한 환경과는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해도 조금도 닮지 않은 음색과 선율.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그 아름다운 선율이 이어지는 곳을 불나방처럼 쫓아 달리던 K는 또 한 번 보행자 신호에 걸려 멈춰야 했다. 이전 상황과 달라진 것은 횡단보도가 좁지 않다는 것과 노랫소리를 내는 주인공이 명확하게 눈 앞에 있다는 것 그리고 조금이라도 주저하게 되면 반드시 놓칠 것이라는 까닭 모를 강한 확신이 찾아 들었다.
 마치 이 세상 돌아가는 것과 관계없다는 듯 뒤돌아선 여자가 그곳에 있었다. K가 마주한 널따란 횡단보도 반대편엔 반듯한 군복차림의 군인과 핸드폰 화면에 얼굴을 들이민 채 삐딱하게 서있는 남자 둘 그리고 서로 어깨를 치며 깔깔대는 여학생들과 옛날식 자전거에 앉아 한쪽 발만 지면에 대고 버티는 노인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각자의 삶과 고민거리를 안고 지내겠지만 보행자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마음들은 같을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뒤돌아선 여자가 있었다. K는 그 노랫소리가 그녀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호 대기 중인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오직 그녀만이 그 선율에 감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런 미약한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노래가 만만치 않은 도시 소음을 가뿐히 무시하고 수십 미터 거리의 반대편에서부터 K의 귀로 달려오는 믿기 어려운 일에 대해 고찰해보기도 전에 신호가 바뀌었다. K가 황급히 치고 나가자 마침 멈추려던 택시 한 대가 과민하게 브레이크를 밟아 짧은 소음을 냈다. K를 향해 흩어져 자유분방하게 걸어오는 사람들과는 반대방향 어딘가로 그녀는 걷기 시작했다. K는 피로감도 잊은 채 그녀의 뒷모습을 쫓았다. 우주공간이 펼쳐지던 영화 속 소행성들처럼 사람들이 K와 여러 번 부딪힐 뻔 했다.
 그녀의 모습이 가까워졌을 때 K는 그녀의 광택 도는 회색 원피스가 낯설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도도한 매력의 뒷모습까지 겹쳤을 때 그녀는 Y가 틀림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2년 전쯤 이었을까 Y가 아주 잠깐만 입고는 어느 날부터는 아예 입은 적이 없던 옷이었다. 무심한 듯 했지만 회사 내 많은 남자들의 말 없고도 대단한 관찰력에서 K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므로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모퉁이 뒤로 돌아가고 난 뒤 그녀의 모습은 홍길동처럼 사라져버렸다. K는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고기 집 앞에서 종이컵을 들고 있는 사람들과 서툰 솜씨로 미용실 앞에 차를 대려는 사람, 허드렛물을 도로에 끼얹으려 하다가 K와 눈이 마주친 사람 그 어디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없는 실내에 유유히 떠있는 담배연기처럼 신비스러운 음악소리가 공기 중에 여유롭게 떠다니다가 가늘게 사라져 버렸다. K는 어린 시절 무지개를 잡기 위해 논밭을 가로질러 정신없이 달리다가 어느 순간 이웃 마을까지 가버렸던 때를 떠올렸다. 함께 놀던 친구들도 처음엔 같이 달리다가 중간에 몇이 떨어져 나가고 최종적으로 자신만 홀로 남았는데, 숨을 고르면서 돌아보니 친구들은 아무도 옆에 남아있지 않았고 무지개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은 채 여전히 먼 곳에 있는 것을 허무하게 지켜보았었다.

 주변이 어두워졌다는 것 말고는 회사 건물에 아무 변화도 없었지만 낮의 건물과는 많이 다르다고 K는 생각했다. Y를 닮은 그 여자에 대한 뭔지 모를 이끌림으로 회사에 다시 들어온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으나 K가 사무실로 통하는 계단에 올라섰을 때부터 사무실엔 아직 누군가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절전에 대한 공지로 사원들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그에 대한 언급을 아끼는 쪽으로 방향을 튼 회사의 운영방침이라도 있는 것인지, 언젠가 업무연락을 통해 비슷한 얘기를 본 적은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런 일에 무신경한 K는 솔직히 내 알바 아니라 생각했었다. 조명은 사무실과 복도 어느 곳에도 꺼져 있지 않았다.
 사무실 출입문 앞 둥근 테이블. 사방으로 열려있고 어떤 때는 믹스커피가루가 흘려진 채로 몇 시간씩 방치되는 곳. K는 다시금 기억을 되돌려보았으나 자신은 노래는 고사하고 무가치한 일로 주목받기 아주 좋은 이런 자리에 절대로 앉을 리가 없는 부류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사무실에 남아있던 사람은 역시나 Y였다. K는 낮의 모습과는 다른 Y의 별 것 아닌 행동이 Y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주변 적막에 대한 본능 섞인 방어적 행동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약하게 읽을 수 있었다. 평소 출입문 쪽에서 들어설 때면 그녀는 항상 야무진 뒷모습으로 기억되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Y가 ㄱ자 구조 책상에서 몸을 약간 튼 채로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K는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당연히 Y의 눈에 띄게 되었다. 조명 탓일까. Y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특별한 자신감으로 무장되지 않은 부류의 남자라 할 수 있는 K는, 지금처럼 평범하지 않은 상황 속의 미인 앞에 인상적으로 등장하기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야단맞기 전의 어린아이처럼 쭈뼛쭈뼛 다가가 놓고는 영화 속 대사 같은 말을 시도하려다 그만 주변 공기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고 말았다.
  “저기…회사 앞 교차로…….멜로디가 그러니까…”
 그제야 K와 눈을 마주친 Y가 고개를 갸우뚱 매력적으로 기울더니 긴 머릿속에 가려져있던 이어폰을 뺐다.
  “어? 퇴근한 거 아니었어요?”
 Y는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K가 재차 자신이 조금 전 동선을 뒤지고 왔던 사유를 장황하게 설명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가뿐하게 무시됐다.
  “아니 뭐 이런…”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뭔가가 Y를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Y는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서 따닥따닥 마우스를 빠르게 눌러댔다.
  “저 혹시… 뭐가 잘…”
  “없어요.”
 Y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잘라 말했다. 능숙한 손으로 마우스를 재차 훑으며 글자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없어요. 확실히.”
 모니터 속엔 알록달록하고 작은 글자들이 질서정연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Y는 마우스 화살표를 이리저리 무의미하게 휘두르며‘없어요…없어 없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K는 그녀가 평상시에도 마우스를 지금처럼 요란하게 사용했는지 떠올려보았으나 아닐 것이라는 가벼운 결론을 지었다.
  “자 봐요. 이거랑~ 이거랑 여기부터 여기 자우림 노래까지 내가 다 아는 노래들인데 중간에 그게 빠졌어요. 그 노래가.”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 퇴근을 미루고, 이왕 여유롭게 인터넷라디오를 틀어놓고 일을 하던 중 Y를 확 잡아 이끄는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말로 담을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해도 좋은 포근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귀와 심장을 넘어 영혼까지 흔들어 울리는 강한 선율도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눈물이 흐르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뻔했다고 말하며 화장지를 뽑아 콧물을 훔쳤다.
 K는 그 노래가 자신이 듣고 불나방처럼 따라온 노래와 같은 노래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K는 방송국에 전화해서 물어보면 어떻겠는가 말하면서 이미 빠르게 화면 하단을 살폈다. 홈페이지 하단 예상했던 위치에 전화번호가 큼직한 보랏빛과 화려한 필체로 붙어있었다. 전화를 받은 누군가는 매우 지친 목소리로 응대했다. K는 조금 전에 방송됐었던 노래 목록을 알고자 한다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중하게 물었다. 뭔가 번득 생각난 듯 Y가 동시에 끼어들어 수다스럽게 말하자 K는 양측의 이야기를 작은 부분 놓쳐버렸다. K는 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막고서 Y의 반짝이는 눈을 보았다. Y는 좀 더 큰 소리로 얘기했다.
  “꿈결에 밀리는 그 때가 가장 달콤하지. 깨어나면 아픈 삶 가운데 있어.”
 K는 지친 상대편의 목소리가 피로감에 절어 있긴 하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책임감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찾아 읽는 사이 방심하여 콧바람을 유난히 크게 내기도 하고 기분에 따라 아주 길게 느껴지기도 하는 30여초를 말없이 흘려보내더니 이윽고 말을 이었다.
  “선생님, 한 시간 전서부터 노래제목 묻는 전화가 아주 많이 왔었는데요… 저는 당연히 도와드리고 싶은데, 그런데 사실 단 한 번도 제대로 말씀 드리지 못했고요… 찾으시는 노래들은 죄다 없는 노래들이에요. 선곡표 올려드린 것 말고는 도와드릴 방법이 없어요. 그러니까요…그런 가사…태어나서 처음 들어봐요…선곡표대로…”
 지친 목소리 뒤로 또 다른 전화벨소리가 울렸을 때 K는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K는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뭔가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Y의 생기 넘치는 눈망울이 마치 깊은 밤 까맣게 변해 귀여움으로 충만한 고양이의 눈과 같다고 생각했다. 고요 속을 달려온 사무실 시계 소리가 점차 커져갈 때쯤 Y가 말을 이었다.
  “가까운 데 가서 한 잔 할까요?”

 여태 알고 지내던 Y의 몸속에 장난기 숨긴 다른 영혼이 잠시 숨어든 것처럼 이질감이 들었지만 K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시선을 피했다. 출입문 양 옆으로 눈길 끌도록 진열된 도자기류 장식품들을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치형으로 쌓아 올린 도자기들 중에는 눈을 부릅뜬 부엉이 부부와 큰 짐을 지고 걷는 당나귀가 있었다. K는 부엉이들이 종 모양처럼 속이 비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까 전에 그…그게 가사인가요? 무슨 뜻인 거죠?”
  “어떤…아! 그거요? 꿈결에 밀리는 그 때가 가장 달콤하지 거기?”
 두 사람은 기분을 이완시키기에 아주 적당할 정도로 컴컴한 어둠과 은은한 오렌지 빛 조명이 어우러진 곳 여러 테이블 중 하나에 마주 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적잖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로 떠들어댔고 더러는 별 일 아닌 일로 열띤 격론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일은 없었다.
 Y는 포크 옆면으로 훈제소시지를 잘근잘근 눌러 썰고 있었지만 눈은 허공을 보며 잠시 굴렸다.
  “뭐…노랫말 다 분석해 가면서 듣나요 어디?”
 K는 빙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당연히 동조하는 것으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적정선을 표현한 것 아닐까요? 음…예를 들면 돋보기로 종이 태울 때 일정거리 벗어나면 불이 안 붙거나 아니면…미니스커트 길이도 이만큼…일정 선 넘어가면 애간장 녹을 일이 없는 것처럼…그 이상으로 벗어나면 기대감도 달콤함도 그리고 환상도 내 것이 아니게 되는…”
 K는 Y가‘이만큼’을 말하며 자신의 허벅지에 손으로 선을 긋는 것을 무심결에 보다가 살짝 눈길을 돌렸다.

 반걸음 가량 간신히 앞서 걸으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반복하는 Y가 중간 중간 상소리를 내뱉는다는 것을 K가 듣고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잠시 멈칫 했지만 뭐 어떠랴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누구의 눈이라도 Y는 실수나 어설픔 등의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당당하고 멋진 여인이라는 것에 이의가 없을 것이다. 도시 하늘엔 시대에 완벽히 적응해버린 잿빛 비둘기들과 땅에는 잿빛 정장을 입고 당당히 걷는 Y같은 부류에 대해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일정한 리듬이 얕은 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잡스런 꿈들처럼 스쳐가는 이미지들을 살려냈고 K는 방관하였다.
 Y가 양팔을 뻗어 담장을 붙들었다. 수십 년 그 자리를 지켜온 낡아빠진 담장의 먼지가 Y의 손바닥에 묻었다. Y의 손가방이 어깨로부터 흘러내리다가 멈췄다. 담장과 마주한 채 속이 불편한 듯 어깨를 들썩이던 Y에게 K는 다가갔다. 등을 두드리거나 아니면 내일만 가도 기억 못할 별 볼일 없는 위로라도 해 준다거나 하는 심산으로 다가가려 할 때 그것이 K를 엄습해왔다. 술은 둘 다 과하지 않았다. 술 때문이 아닐 것이다. K는 언젠가 지금과 똑 같은 상황이 있었다고, 기억이 잠시 헛짚었음을 미약하게 깨달았지만 흘러가는 대로 놔두었다. Y의 행동과 먼지투성이 낡은 담장과 그리고 미끄러지는 손가방이 이미지를 뒤섞어버릴 때쯤 K는 그럴 리 없다고 여기면서도 마치 카페인을 과량 섭취했을 때처럼 찾아오는 기묘한 안락감에 저항하지 않았다. 온 도시와 세상 모두를 조급하지 않게 적시며 확산하는 새로운 공기가 조금 전 자신들 주변을 덮어버리고 달라지는 것 없이 그대로 지나쳐 나아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공기는 빛깔도 없고 투명한, 늘 우리 곁에서 빈틈없이 채워져 있던 공기와 어느 한 부분도 다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같다고 말할 수 없었다.
 K의 등 뒤에서 택시 한 대가 속도를 급하게 줄이더니 중간 차선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곧바로 운전석 밖으로 나온 택시기사는 무슨 일인지 눈물을 참지 않은 채 어린애처럼 울면서 어딘가로 달렸다. 뒤따라오던 차들 중 사납게 경적을 울리는 차들이 있었지만 택시기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뒷좌석에서 내린 여자는 도로 위에서 왔던 길을 태연히 거슬러 걸어갔다.
  “많이 그립고…아플 정도로 그립고 오늘 못 보면 안 되겠는데…”
 K는 대답 없이 Y의 눈을 바라보았다. Y의 까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올라오더니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착각 마세요…당신이 아니니까.”
 Y가 말하며 옅게 웃어 보였다. 당당한 도시 여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진 듯 편안해 보였다. 그저 그리운 누군가를 눈과 마음에 꽉 채웠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말은 조금 불쾌하지만…이해해요. 나한테도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까…예쁜 여자를 볼 때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한 잔 더 할까요?”
 Y의 말에 K는 기꺼이 그리하자고 눈짓했다.
 Y에게 이끌려 도착한 술집 입구는 마치 나무배 갑판 위를 걷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바닥을 구르는 발소리가 경쾌했다. Y는 예전 남자친구와 여러 번 와본 적이 있다며 자신과 그 남자친구와의 추억을 재잘재잘 늘어놓았다.
  “다른 남자들처럼 PC방에서 날밤을 세우거나 뭐 나이트 같은데도 전혀 취미가 없었어요. 저는…좀 혼나야 됐어요…그 친구한테 돈만 많았으면 만점짜리라고 많이 놀렸어요…그냥 만점짜리 맞거든요…그 자체로 말이죠. 저 예쁘다고 집적거리는 놈들 중에 하난 줄 알았죠. 사실 나대신 죽으라 했어도 그 친구는 그냥 죽었을 정돈데…”
 다른 이들은 관심 가지지 않을 구차한 이야기들의 어느 대목에서부터 K는 Y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었다. 사정 봐주지 않고 강력하게 심장을 헤집는 이미지 하나가 K의 생각 한복판을 순식간에 채워 나가고 나머지공간을 모두 맹점으로 만들어 버렸다.
 K는 머릿속을 멋대로 휘젓는 이미지에 거부할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빠져들고 있었다. 제멋대로 분산된 이미지가 창틀에 먼지 쌓이듯이 앉았을 때 혼란의 원점에 돼지녀가 있었다. 돼지녀는 K가 여러 해 전 무료한 시간 때울 때 인터넷 유머사이트에서 봤었던, 돼지인형탈을 쓰고 사진에 찍혔던 얼짱이었다. 폭발적인 인기로 댓글도 제법 많이 달렸었고 거의 찬양에 가까운 예쁘다는 칭찬의 글들이 많았음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녀가 당장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물론 이 주체하지 못할 끓는 마음은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이고 돼지녀는 K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K는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러한 일에 휘말려가도록 손 놓고 지켜봐야 하나 거슬러야 하나 이 흐름에 대해 잠시 사색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다.
  “재미…없죠? 제 얘기가…”
 Y는 말을 건네긴 했지만 당연히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처럼 그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낯선 일 인만큼 두려움도 함께 감당해야 했지만, 혼자만 안고있는 것이 아닌 탓에 그리고 이 진행은 마무리되는 순간까지 그저 사라짐을 향해갈 뿐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K는 대답대신 실내공간을 조용히 보았다. 주인장이 보이지 않은 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놀랄 일은 아니었다. 모든 것 다 팽개치고 어디로 갔을까? 주인장을 미치게 만든 장본인은 누구일까? 그 만남은 성사될까? K는 연결 지어지는 궁금증들을 털어내려 시선을 돌렸다. 카운터의 목조 기둥과 테두리에 꼽힌 작은 메모지들이 미풍에 흔들렸다. 그리고 천장 구석진 곳, 인테리어의 손길이 미치다 말았지만 그 누구도 시비 걸지 않을 만한 곳을 K는 잠시 주목했다. 유별난 사람 말고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만한 그 높이에 고양이가 있었다.
  “왜 그러시죠?”
 고개를 한껏 젖히고 있는 K를 보고 Y가 물었다.
  “저 녀석…저기…삼색고양이…”
 Y는 메뉴판을 살펴 자신들이 먹은 술과 안주 값을 정확히 계산해서 주인장 없는 카운터 위에 올려 두었다. K는 주인장이 돌아와 주섬주섬 돈을 챙길 때 그의 옆에서 방긋 웃고 있는 여인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주인장은 돈 따위보다 더 큰 행복이 옆에 있음에 들떠있는, 순도 높은 행복의 결말을 그려보았다.
 다시금 나무배 갑판 같은 가게 바깥으로 두 사람은 나왔다. Y가 먼저 출발하기 전 K를 돌아보았다.
  “누구를 찾으실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K의 물음에 Y는 약 한 시간 전처럼 눈가에 촉촉이 눈물이 맺혔다.
  “초등학교 시절 앞 동에 살던 오빠…”
 Y는 초등학생 때 두 살 어린 남동생 손을 잡고 아빠의 직장동료에게 서류봉투 하나를 전달하는 심부름을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누나를 잘 따르는 남동생과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면서 도착한 이웃마을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 오빠를 처음 봤다고 한다. 중학교 1학년쯤 된 아이들 여럿이 Y를 둘러쌌을 때 겁이 많던 Y는 그저 남동생을 꼭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아이들은 더욱 짓궂게 굴었고 그 중 하나가 Y의 치마를 들치자 화가 날대로 난 남동생이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했다. 그러나 돌멩이는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고 Y가 말한 그 오빠가 돌에 맞아 눈에서 피를 많이 흘렸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던져봐야 얼마나 세게 던졌겠냐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Y는 당시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가던 돌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게…다인가요?”
 Y는 보이지 않을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시절에 잠깐 스쳐간, 인연이라 하기도 억지스러운 그 오빠를 찾아간다고 한다. K는 자신 만큼이나 Y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휘말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반대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언제 내려왔는지 삼색고양이가 여유롭게 걸어와 두 사람이 서 있던 곳에서 잠시 앉아 기분 좋게 꼬리를 흔들다가 다시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술기운으로 화끈거리는 얼굴에 찬바람이 닿으니 기분이 좋았다. K는 그렇게 터벅터벅 은근한 내리막길을 걸어 대로변에 당도했다. 널따란 횡단보도를 건너고 이 동네를 아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모를 골목길 좁은 계단을 오르면 K의 자취방이 나온다. K는 횡단보도를 중간쯤 건너갈 때부터 발걸음을 다른 쪽으로 인도하려 드는 무지근한 끌림이 밀려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술기운 탓이 아니라는 것도. K는 자신의 많은 부분이 이미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것은 그 이끌림에 저항하려 하거나 필요성 따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다시 그 음악이 주변 모든 입자를 채우려는 듯 여러 곳에서 밀려나왔다. 이제는 더 이상 닿을 듯 잡힐 듯 하는 것이 아니라 범람하는 물처럼 위력적으로 터져 나왔다. 맞은편에서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 다가오던 남자와 때마침 걸려온 그의 전화벨과 음반가게의 대형스피커, 그리고 먼 거리 구급차의 사이렌에서까지 온통 그 음악으로 넘쳐났다. K는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을 둘러싼 힘은 은근히 밀다가 강하게 받치다 하면서 일정한 강약 조절로 K를 왼편으로 이끌었다.
  “어디 해봐.”
 K는 자신의 의지에 힘을 실어 자취방을 오르는 좁은 계단 앞에 당도했다. 그리고 한 발짝씩 오를 때마다, 뼈마디에서 근력이 방심하는 작은 순간마다 여전히 그 힘은 자신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 잡은 잠자리의 날개를 접어 손가락에 끼우고서 무방비한 잠자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일들이 생각났다. 잠자리는 한 마리도 예외 없이 여섯 개 다리를 강하게 움츠렸고 입은 무엇인가 애타게 갈구하는 모양을 냈다. 어린 K는 잠자리가 자신의 이목구비를 볼 수 있을까 궁금해서 잠자리를 얼굴 가까이 대고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지만 그저 빤질빤질한 잠자리의 둥근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K는 지금 자신이 그 때의 날개 잡힌 잠자리가 되어 누군가의 얼굴 앞에서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좁은 계단이 끝나갈 무렵, 익숙한 건물들과 쓸쓸한 공기 속에서 K는 배경과 일치감을 무시하는 듯 한 움직임을 파악했다. 마치 예쁘게 오려낸 종이 인형을 어울리지 않는 배경 앞에 붙여둔 것 같은 모양을 연상하게 했다. 그 작은 움직임이 K를 보고선 가던 길을 멈추고 우뚝 서더니 K가 계단 끝나는 지점에 올라설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돼지녀가 그곳에 있었다.
 돼지녀는 K가 기억하는 사진 속 모습 그대로였다. 2등신 비율로 뒤뚱거리도록 만들어진 의상에 귀여운 돼지머리모양 탈을 썼지만 얼굴은 거의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K는 불과 몇 걸음 앞에 있는 돼지녀를 향해 걸었다. 돼지녀는 발굽으로 표현된 양손으로 입 주변을 가리고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돼지녀의 키는 많이 작은 편이었다. 돼지녀는 수줍게 발만 동동 구르는 모습에서 달라진 것 없이 고개만 들어 K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많이 그리웠어요…”
 K는 어렵게 뱉은 말이었지만 돼지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말귀를 다 알아들은 듯 했으면서도 서있는 모습을 바꾸지도, 다가오거나 피하지도 않았다. K는 가만히 다가가 돼지녀의 인형탈 머리 부분을 손으로 감쌌다. 재질이 고급스러운 봉제인형 특유의 포근한 감촉이 양 손바닥에 퍼졌다. 돼지녀가 K의 행동을 막지 않으므로 K는 편안하게 미소 지으며 인형탈을 조심스럽게 벗겨 올렸다. 귀엽게 표현된 돼지코부분이 K의 팔을 스쳐 올라갔다. 큰 눈망울과 뚜렷한 선으로 그어진 쌍꺼풀. 돼지녀의 눈은 매력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K는 돼지녀의 양 어깨에 떨리는 손을 감추어 올리고서 살며시 끌어당겼다. 곧바로 돼지녀의 어깨가 움찔 움직이더니 양손으로 K의 몸을 밀어냈다. K는 그녀가 뜻대로 하도록 힘을 풀어주었다. K는 다시 한 번 돼지녀를 안으려 다가갔다. 그러자 돼지녀는 한 발 물러섰다. K가 또다시 다가가자 이번에는 여러 발짝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K는 별말 없이 벗겼었던 돼지 인형탈을 돼지녀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돼지녀는 달라진 것 없이 귀엽고 수줍게 다가와 인형탈을 받고 원래대로 머리에 눌러썼다.
  K가 마음에 새긴 돼지녀의 가장 또렷한 이미지는 역시나 인형탈을 썼을 때였다. 이마의 적절한 위치에 걸쳐진 인형탈과 그 아래 수줍게 눈웃음을 짓는 돼지녀의 묘한 미소. 그러나 그 돼지녀는 K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좁은 골목길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언제나 그 공간에 함께 해왔지만 잠시 의식하지 못했던 찬 공기와 멀리서 들려오는 경적음이 일제히 달려오는 착각이 들었다. K는 돼지녀를 눈앞에서 만났던 것이 사실이었을까 믿기지 않아 이내 현실감각을 찾으려 했지만 쉬울 리 없었다. 일찍이 연습할 수 없었던 낯설고 황당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다는 것은 그에 맞서는 내부의 작은 성벽을 쌓게 만들었다. K는 자신이 그 성벽 위에 편하게 앉아서 혼잣말을 하는 상상을 했다.‘자 다음은 또 누구인가?’바로 그 때 돼지녀가 떠나간 곳의 반대방향 어두운 곳에서 또 다른 한 사람의 형체가 눈에 띄었다. K는 자신이 이미 충분히 지친 상태라 생각했지만 자신의 의지가 아닌, 마치 자기력으로 무기력하게 밀려가는 느낌을 받으며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전봇대 뒤편에서 그녀는 모습을 드러냈다. 한 눈에 봐도 이 곳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매우 아리따운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K는 자신의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었고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돼지녀의 모습과 손바닥에 포근했던 인형탈의 감촉만을 되새기며 전봇대 뒤 그녀의 앞을 애써 외면하여 가로질렀다.
  “저기…”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뭔가를 간절히 호소하는 듯 한 그녀의 눈은 제한된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는 중압감에 질려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K는 헛기침 한 번만 남기고 지나치려 했다.
  “3년 전! 3년 전…사랑니 때문에 치과…에 갔었지요?”
 우뚝 멈춰선 K는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도 아찔할 정도로 미인이라 마치 선녀가 내려와 주변을 밝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치과라면…”
 K는 사랑니 뽑던 끔찍했던 기억을 무슨 수로 잊을 수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사거리 2층에 있는…그 치과 간호사이신가요?”
 그녀는 눈은 K를 응시한 채 작게 고개만 가로저었다. 뭣이 그토록 좋은지 입가엔 행복에 겨운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했다. 마치 갑작스럽게 인기가수를 코앞에서 만나버린 철없는 소녀처럼, 그러나 이성적인 대화를 위해 들뜬 상태를 최대한 숨겨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 듯 했다. K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한 마음이라면 지금의 자신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그쪽 뒤에서…대기실 의자 뒤쪽에 앉아 기다렸던 환자였어요. 충치 뽑으러 간…”
 K는 3년 전 치과의 대기실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가당치도 않은 시도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다만 비틀리고 정신없는 지금의 주변상황이라면 충분히 이런 식으로 나타나도 무리 없는 사람이라고만 여겼다.
 K에 대해 맹목적인 기대라도 하는 것일까 그녀의 눈빛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점차 부정으로 흘러갈 가능성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K는 그렇지 않았다.
  “죄송하지만…당신은 아주 아름답고…욕심나지만…저는…”
 K는 아직 많이 남은 아쉬운 이야기를 쏟아야 하는 그녀로부터 슬슬 뒷걸음치다가 아예 달려 달아났다.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졌을 때 K는 뒤돌아보고 크게 외쳤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좁은 계단의 반대쪽에 넓게 펼쳐진 길을 내려 달리니 점차 속도가 붙었다. K는 더 달렸다. 숨이 차올라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길가에 멋대로 주차된 차들을 지나고 구질구질한 주택가를 지나자 환한 간판들이 양 옆으로 빠르게 지나쳐갔다. 횡단보도에 몇 사람이 서있었지만 K는 그대로 횡단보도마저 가로질렀다. 달려오던 차들이 죽일 듯이 경적을 울렸다.
 K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괴로운 몸을 상가 유리벽에 기댔다. 그리고 다시 걸어보려 하다가 주저앉듯이 다리가 풀려 손에 잡히는 입간판을 붙들어 의지해야 했다.
 K는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전자대리점 앞이라는 것을 알았다. 전자대리점 내부엔 물건을 살피는 사람들과 말쑥한 옷을 입은 직원들이 적당히 흩어져 공간을 채웠다. 자신의 모양새가 마치 도심 속 주정뱅이던가 그에 준하는 부류로 보이기에 충분했다고 여겨져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K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크고 작은 고급TV들마다 프랑스요리와 벌새 그리고 하와이 풍경이 펼쳐졌었는데 한순간에 은은한 분홍색컬러도 싹 뒤덮여갔다. 그 분홍색컬러는 모양도 종잡을 수 없이 광적이고 산만한 빛깔로 흔들려 댔다. 곧이어 화면 프레임이 점차 안정되고 멀어져 가면서 나타난 그 분홍색은 돼지녀가 아니고서는 어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것을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다. 돼지녀는 눈밭에 뛰어노는 강아지처럼 귀엽고 천진하게 팔딱거리고 있었다. 대리점 내 모든 TV마다 들어있는, 행복에 겨운 돼지녀가 인형탈을 벗다가 중심을 잃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래도 뭐가 그렇게 좋은 것인지 까르르 웃으며 구르다가 다시 일어났다. 전자대리점 내 많은 사람들이 TV앞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물건 고르는 것에 아예 관심이 끊어져 버린 듯 오로지TV코너로만 하나 둘 몰려들었다. K 또한 전자대리점 바깥에 있다는 것만 다를 뿐 그들처럼 TV속 돼지녀에 시선이 고정된 채 꼼짝하지 않았다. 돼지녀는 진정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독차지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K는 전자대리점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어째서 이 집단 열병 같은 일과 무관해 보이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대리점 출입문 위쪽에 양의 피라도 바른 것인지… 그 사람들은 자신이나 Y 그리고 치과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일도 다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 그들에 대한 속단은 무리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전자대리점 건물 귀퉁이에서 몸 전체가 검정색으로 덮인 고양이가 천연덕스럽게 나오더니 인도 위에 걸터앉았다. 또 다른 곳에서도 고양이가 나와 검정색 고양이에게 다가가 얼굴을 문지르고 지나갔다. K는 고양이가 그 두 마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전자대리점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발아래와 대리점 내 진열장 위에도 있었다. TV앞에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도 꼬리를 흔드는 고양이가 있었다.
 TV화면에 돼지녀 말고 다른 남자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남자 또한 행복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춤추듯이 뛰어다녔다. 남자의 반대편엔 돼지녀가 벗은 인형탈을 아무데나 던지고서 남자의 품에 뛰어 안겼다. 돼지녀를 안은 남자는 회오리처럼 그녀를 안아 돌렸다. 그제야 TV화면에 남자의 환한 얼굴이 잡혔다. 남자의 얼굴은 K의 직장동료 P였다. K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왜…저 녀석이…어떻게…’다시금 살펴봐도 틀림이 없었다. 애인에게 전화를 자주 걸던, 웃을 때 한쪽만 생기는 보조개와 드러나는 금니… P가 분명했다. 그리고 돼지녀가 P에게 안겨있다. 너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사실이었다. K는 유리문 앞에서 그만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아까보다 늘어난 고양이들이 K의 무릎 위를 거리낌 없이 타고 지나갔다. 고양이무리에서 한 마리가 반대방향으로 거슬러오더니 K의 앞에 앉았다. 안면이 있던 그 삼색고양이였다.
  “너였구나. 이리 온…”
 삼색고양이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K의 무릎에 능청스럽게 얼굴을 비비고 그대로 걸어가 어딘가로 사라졌다.
 K는 다시 대리점 내부의 TV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행복한 두 사람의 모습들로 채워진 TV들과 그 앞의 사람들, 그리고 틈틈이 섞여있는 고양이들 또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행복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돼지녀와 P의 진한 입맞춤이 이어지자 동시에 또다시 그 알 수 없었던 음악이 대리점 스피커를 통해 잔뜩 모았다 터지듯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K는 등 뒤에서 몰인정하게 다가드는 거대하고 밝은 빛을 느꼈다. 그 빛은 감당하기 어려운 밝기를 뿜고서 마치 모든 물리학의 법칙을 가뿐히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며 먼 곳 얕은 산자락을 훑고 내려오더니 그대로 수 십Km 거리를 가로질러가고는 알 수 없는 곳에서 멈췄다. TV속에서는 여전히 행복한 돼지녀와 P가 끌어안고 입 맞추기를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의 주변은 이미 하얀 광채로 뒤덮여 버렸다. 땅도, 주변 어느 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순백색 광채로만 빛났다. 그렇게 1분가량 지난 뒤 결국 빛은 두 사람의 모습을 빠르게 덮어갔다. 돼지녀의 분홍색은 순백색과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세탁기 속 빨래처럼 빙빙 제자리를 돌다가 하얀 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P의 금니가 벌려 웃는 입 속에서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멀리 떨어진 곳임에 틀림없었지만 밝은 빛은 제자리에서 묵직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뿌연 수증기 내지는 먼지를 물씬 일으켰다. 희뿌연 그 속에 아직 남겨진 밝은 빛이 서서히 상부로 떠오르더니 마지막엔 크고 탄력적인 힘을 받아 하늘로 솟아올랐다. 여러 곳 유리창에서 그 진동을 받아 깨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무서울 정도의 고요가 엄습해왔다. 번잡함 이후에 밀려와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지는 고요일 것이다.
 K는 일어나 걸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산만한 꿈을 오래도록 꿨으니 반드시 두통과 변비로 질긴 고생을 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꿈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몇 가지나 기억할 수 있을까. 아무려면 어떨까, 몸 한 번만 뒤척이면 내 침대 위 틈만 나면 달아나려 드는 동그란 베개를 찾다가 잠이 깨겠지. 도로의 자동차소음에 눈이 떠지고 탁상시계를 살피겠지. 그러한 마음이 들자 모든 일들을 되든 안 되든 편하게 방관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졌다.
 이상한 음악이 소리를 낼 수 있는 모든 매체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음악은 도시 곳곳 어느 틈도 놓치지 않고 스며들었고 도시민들 그 누구도 당황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다. 이전과는 다른 장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문자적인 설명이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것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슬픔이나 기쁨 등 감정을 고려한 음악이 아닐 것이다. K가 알 수 있는 선은 거기까지였다.
 능숙한 화가가 손에 힘을 빼고서 지우개로 글자를 지워가는 것처럼 K주변 모든 사람들의 모습들이 지워져 갔다. 거기엔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지워짐 하나만 있었다. K는 자신의 하반신도 물리적 힘겨움이나 저항 없이 옅게 지워지고 있는 것을 보고 웃음 지었다. 버스정류장 모니터엔 P에게 푹 안겨 다정히 걷는 돼지녀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은 두 사람의 행복한 뒷모습을 여유롭게 비춰주고 있었다. 세상에 남은 모든 배려를 다 담은 듯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멋진 장면 하나만 남겨두고 두 사람의 모습은 사라졌다. 주변의 모든 음악도 아주 기나긴 여운을 남기며 가늘게 끝나갔다. K는 자신의 몸 많은 부분이 사라져가는 것을 망연히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버스정류장에 고양이 몇 마리가 다리를 꼬고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과 또 다른 고양이가 안경을 벗어 닦는 것을 보았다. K는 자신의 모습이 거의 사라졌을 때 마지막으로 본 것은 두 발로 걷는 고양이들이었다. 그 중에 하나 안면이 있는 삼색고양이는 택시를 잡아타며 사라졌다. K는 택시의 문에‘꿈결에 밀리는 그 때가…’까지만 읽을 수 있었다.

bluespy

과식하는 좋은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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