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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 바이칼 Baby - 5

2017.08.23 22:3708.23

최 고려

 

이르쿠츠크 사람들은 얼음을 녹여 쓴다. 허드레 물은 집근처 눈이나 얼음을 쓰지만

식수만큼은 맑은 얼음이라야 했다. 그래서 얼어붙은 앙가라 강의 얼음을 잘라

집으로 나르는 일은 이르쿠츠크 남정네들의 중요한 일과였다.

얼음 수레를 밀고 가던 최 고려가 비틀거리며 썰매를 끄는

빈사지경의 장교와 조우한 것은 시가지가 붉게 물드는 황혼 무렵이었다.

이르쿠츠크 사람이라면 누구도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상부상조하며 살아간 19c의 데카브리스트들이 남긴 명예로운 전통이었다.

 

수레를 팽개치고 황급히 부축해 집안으로 들였지만

탈진한 사내는 이내 숨을 거두었다.

타티아나 로스토바와 삐에르라는 아기 부모의 이름만 남긴 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썰매를 끌고 온 지친 생명은

기름이 다한 심지처럼 스르르 꺼져갔다.

이지적이지만 슬픈 눈매의 사내는 수염에 맺힌 고드름이

다 녹기도 전에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눈을 감았다.

썰매 위에 쌓인 모피더미 속에서 아직 피조차 씻지 못한 갓난아기를

발견한 최 고려의 아내는 기절할 듯 놀랐다.

서둘러 물을 데운 그녀와 최 고려는 아기를 조심스레 씻겼다.

아기를 위해 생명을 바친 젊은 아비의 시신 옆에서 치르는

첫 목욕은 성스러운 세례의식처럼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붉은 군대와의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가이다는

이르쿠츠크를 수소문해 옴스크 피난민들의 생존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바이칼에서 태어났다는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냈다.

최 고려라는 이름의 조선인은 아기를 찾아온 가이다와 장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기의 사연이 궁금했다는 키 작은 사내는

옴스크 피난민들에게 일어난 비극을 들려주자 말을 잊고

한 동안 눈물만 흘렸다.

낳자마자 죽은 산모의 아기가 빙설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죽은 사람들 외투를 모아 두텁게 깔고 덮은

썰매에 실은 아기를 시내까지 겨우겨우 끌고 온 젊은 아버지는

구조되자마자 탈진해 쓰러졌다고 했다.

 

세상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본 가이다와 장교들의 눈에

눈물이 그득 괴여갔다. 하나같이 눈시울이 붉어져 성호를 그은

장교들은 일제히 손을 모아 기도했다.

“ 아, 마리아님,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

처참한 주검들 사이에서 새 생명을 탄생시킨 오묘한 섭리에

감동한 그들은 하나같이 몸을 떨고 있었다.

 

죽음 속에서 태어난 생명의 소식은 향수에 젖은 병사들의

여린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고향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저마다 흐느껴 운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자기 몫의 금화에서 한두 개씩을 내놓았다.

순식간에 수천 개의 로마노프 금화가 쌓여갔다.

동사자들의 품을 뒤져 지갑과 귀금속을 찾으려 하던

가난한 병사들이 가엾게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소중한 금화를 아낌없이 던지는 모습에 가이다는 깊이 감동했다.

그리고 금을 나누어주기 잘했다는 생각에 새삼 뿌듯해졌다.

바이칼에서 실어온 황금은 열차은행이 보관하고 있다.

군자금으로 반을 남긴 가이다는 나머지를 4만여 병사들

통장에 입금시켰다. 그리고 코사크들이 지녔던 금화들 또한 나누었다.

그래서 모든 병사들이 황금 통장과 함께 댓 개씩의 금화도 가지게 되었다.

 

가이다는 장교들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다.

모아준 금화를 어떻게 아기에게 전할 것인가?

이미 공산주의 세상인 러시아에서 아기의 금화를 지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믿을만한 어딘가에 맡겨 나중에 아기가 갖도록 하자.

근데 어디다 맡기지?

40도짜리 보드카를 끼고 사는 러시아인들은 도무지 믿음이 안 간다.

게다가 살벌한 적백내전의 와중 아닌가?

혹시라도 줄을 잘못 섰다간 언제 잘못될지 모르는 살얼음판 세상이다.

러시아인끼리 한창 으르렁대는 판국이니 차라리 외국인이 낫겠다.

지금 아기를 보호하고 있는 최 고려는 조선인이다.

그리고 독립투사라 했다.

역시 식민지 출신이며 독립을 꿈꾸는 그들에게 조선이야기는 남의 일 같지 않았다.

“ 우리,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만나보세.”

 

27세의 최 고려는 이미 아기이름까지 지어놓고 있었다.

덕범, 일부러 ‘범’ 자를 넣었단다.

“바이칼의 얼음지옥 속에서 살아남다니...!

신령님의 가피 없이는 어림도 없지요...암 어림도 없지.

자고로 호랑이란 신령님의 심부름꾼, 그러니 범자는 반드시 넣어야 합니다.”

아기를 위해 목숨을 던진 젊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감동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최 고려의 열변에 말없이 눈길을 교환한 장교들은 끄덕였다.

 

“좋은 이름이군요. 그런데 러시아 이름도 하나 지어주는 게 어떨까요?

애틋한 부정父情을 생각해서라도...”

‘난 그 양반 성도 모르는데... ’

당황한 최 고려는 망설이며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볼수록 사랑스런 모습.

숨을 거두던 순간 사내가 남겼던 희미한 미소가 그 얼굴에 겹쳐 보인다.

음, 아마도...!

이윽고 최 고려는 주억였다.

그렇게 해서 아기는 세르게이 로스토브 스탄케비치라는

스타일리쉬한 이름을 얻었다.

가운데 이름은 모친을 따랐고 스탄케비치는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김 알렉산드라의 성에서 따왔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편안히 잠든 아기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한 장교가 뚜벅 말했다.

“백군장교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감추는 게 좋겠습니다.

 세상이 하도 뒤숭숭 하니... ”

 

이미 흠뻑 정이 들어버린 조선인 부부는 아기를 키우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오히려 누가 빼앗아갈까 잔뜩 겁먹은 눈치를 본 장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가이다와 장교들은 준비해간 3백 개의 금화와 양피지 문서 한 장을 주고 갔다.

금화는 체코군단의 선물견본이고 문서는 그 보관증이니 잘 간수하라는 말과 함께...

1919년 1월이었다.

 

다음 해 9월,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보스톡에서 일본으로 간 체코 군단은

니이가타에서 1개월의 휴가를 보냈다.

그리고 미국을 거쳐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한 조국은 이제 어엿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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