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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작스러워진다

2017.08.05 10:4208.05

 

국이 묽다. 두 번 떠먹어도 묽다. 하지만 국이 묽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너는 식판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바닥에 눈이 묶인다. 복도만 보고 걸어도 퇴식구까지 갈 수 있다. 안 보고 걷는 일에 익숙해지면 된다. 퇴식구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아주머니의 위생모를 보면 외로워진다. 눈뜨고 감을 때까지 교실이든 집이든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사라지려 한다. 도서관에 들러 서른 전 죽은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 수업 시간에도 읽는다. 빠짐없이 읽는다. 선생님이 부르면 엎드린다. 일어나지 않는다. 엎드린 채 타인의 기대를 부수는 게 너로 향하는 길인 걸 알게 된다. 너는 벽으로 변한다.

  옥상에 자물쇠가 달렸다. 아이들은 여름방학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급진적인 대통령이 당선된 해였고 웰빙이 삶의 가치로 부상했지만 학교는 달랐다. 학교는 어른의 세계였다. 선생은 학생이 어른스러웠으면 했고 자주, 닥치는 게 좋았다. 아이들은 교칙에 따르며 반항하고 싶었는데 그런 까닭에 어디든 왕따가 생겼다. 그게 너다. 너는 보이지 않는 장소에 숨어 죽는 법을 터득해간다. 가을이 오면 책걸상의 그림자가 책상에 엎드린 네 등처럼 납작해진다.

  5분이 가면 5분이 왔다. 5분이 지난 줄, 몰라도 왔다. 그렇게 끝없이 연결된 시간의 고리를 잡고서 너는 종종 반강제로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잡긴 잡았으니 어디든 도착하겠지만 끝에 사람이 산다고 생각하면 속이 울렁였다. 너는 눈이 무서웠는데 그렇게 까맣고 반짝이는 기관과 마주칠 때마다 고속버스가 달리는 사거리 한복판에 선 기분이었다. 사람은 어떻게 눈을 보고 말하는지, 개나 고양이도 눈을 보고 말하는지, 눈을 보면 답이 나오는지 궁금했지만 누구든 거리낌 없이 보는 시대에 그런 걸 묻는 것이 가능한가 싶었다. 지난해 가을부터 너는 반의 공식적인 왕따로 자리 잡았기에 너의 답답함을 눈치채고 먼저 안부를 묻는 친구도 없었다. 어째 친구 한 명도 없나 싶어 억울해지면 화장실로 들어가 이를 갈았다. 변기에 앉아 어금니가 조금씩 닳아지는 동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이를 갈면 턱이 뭉쳐 주먹으로 문질러야 했고 통증은 고스란히 네 몫으로 남았다.

 

  기생충을 만난 날도 턱이 아팠다. 떡볶이집에서 막 한 접시가 나온 참이었다. 아이들이 가게 건너 30m 전방에 주차된 택배차 뒤로 뭉쳐있었다. 여자애와 남자애 둘이었다. 남자애 하나가 사막에서 붙잡힌 패전국 병사처럼 양팔이 뒤로 포박돼있었다. 여자애가 치마 주머니에서 손을 빼 주먹으로 남자아이의 얼굴을 갈긴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남자애는 얼굴이 부어도 나무처럼 고요하다. 저놈은 사는 법을 아는군. 너는 무심히 떡볶이를 씹는다. 그리고 클래식이 흐르는 레스토랑에 앉아 세상을 구할 신은 하나님이라고 믿는 부모님 앞에서 어스레하게 웃는 저 여자애를 상상해본다. 여자애가 무릎에 놓인 냅킨을 접었다 펴고 접었다 펴면서 눈 감고 기도하는 가족 몰래 조롱하는 걸 떠올린다. 반대로 가난한 여자아이의 모습도 생각해본다. 공시에 낙방한 게임중독자 언니와 어젯밤 좁은 방에서 잠잘 자리를 다투느라 입술이 터진 여자아이의 얼굴을.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여자애가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람마다 배경이 다른데 누가 누굴 괴롭힌다고 욕해도 될까. 쟤가 쟤를 때린대서 너도 때리진 않겠지만 너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다.

  네가 반 접시를 다 먹기도 전에 소동이 끝난다. 아이들이 흩어진다. 담벼락에 구겨진 남자애가 천천히 일어나 교복을 턴다. 살이 터져 눈꺼풀이 부었다. 내일 아침엔 저 자리에 멍이 들고 붓기가 커질 거다. 남자아이는 봉고차 밑으로 빨려든 가방을 줍는다. 가방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고 좌우를 살핀 다음 저벅저벅 걸어 곧장 떡볶이 가게로 온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쟁강거린다. 처음 본 아이다. 처음 본 아이인데, 플라스틱 의자를 빼 너와 맞은편에 앉는다. 수저통에서 포크를 뽑아 네가 주문한 떡볶이를 찍어 먹는다. 우적우적 씹는다. 맛도 모르고 씹는다. 씹히는 대로 씹는다. 너는 네 몫의 포크만 본다. 이윽고 아이의 건조한 목소리가 어색한 침묵을 깬다.

  뭘 봐. 씨발 년아.

  아이는 컵을 들고 일어선다. 입에 든 걸 뱉는다. 분홍색 침이 떡볶이와 섞여 나온다. 떡볶이가 떨어질 때 컵 안의 물이 밖으로 튄다. 어째 그걸 보고도 무섭지 않아서 너는 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흉터가 많은 얼굴이다. 아이들이 무심코 밟고 내려온 놀이터의 미끄럼틀처럼. 의도하지 않은 상처도 받은 대로 새겨지는 걸까. 아름답게 때리면 아름답게 흉이 지려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남자애가 컵을 놓고 한쪽 어깨로 가방을 두르더니 나가버린다. 너는 식물이 되고 싶다. 식물이 되면 저 아이 얼굴 흉터를 세지 않아도 될 테지. 그게 네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거다. 가방을 들고 나간 모습이 네 뒷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 저 아이는 어째서 한쪽 다리를 절며 걷는지, 왜 이리도 질문이 많아지는지 생각하는 시간도 줄 텐데. 너는 속으로 1부터 100까지 센다. 그걸 세 번 반복한다. 주머니에서 사천 원을 꺼내 식탁에 놓는다. 남자애가 쓰러져있던 담벼락으로 간다. 차바퀴에 책이 깔려있다. 150매 남짓한 짧은 중편 소설이다. 책 표지에 컴퓨터용 싸인 펜으로 3학년 2반 기생충이라고 적혀있다. 너는 표지를 쓰다듬고 가방에 넣는다. 도서관 쪽으로 걷는다.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바뀔 때 책의 시대는 갔고 더는 도서관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고 느낀다.

 

  수학은 하는 애만 했다. 아이들 중 절반이 잔다. 진도가 빠르거나 너무 느려서 아무도 듣지 않는 수가 허공에 돈다. 너는 샤프로 교과서 귀퉁이에 삼각형을 그리다가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남학생의 텅 빈 등에 관심이 쏠린다. 너는 저 뒷모습을 본 적 있다. 멀리서 봐도 기생충이다. 기생충은 삼학년 이반이지. 책에 그렇게 적혀있었으니까. 그런데 가방이 보이지 않는다. 빈손이다. 저 애 가방은 누가 챙길까. 문득 교과서 밑에 깔린 소설 속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제가 두려워하는 건 권태예요.’

너는 금방 잊는다.

 

  등굣길 마을버스 라디오에서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가 어젯밤 일어난 동네 사건사고를 전한다. 고양이가 차례로 살해된다는 소식이다. 망치 같은 둔기에 두개골이 함몰된 고양이를 누군가 아파트 화단과 노인정 뒤뜰에 버린다는 내용. 사연을 소개한 아나운서는 출연자로 초대된 범죄심리분석관한테 정신이상자가 범인 아니겠냐고 묻는다. 사이비 종교 신자가 고양이를 제물로 바친 뒤 몰래 투기한 거라는 소문도 돈다. 교실에서는 연쇄살인범의 정체를 추측하는 이야기가 지루한 오후의 자습시간을 삼킨다. 너는 지우개를 굴리며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빠짐없이 듣는다.

 

  겨울이 온다. 책을 들고 공원으로 간다. 간밤 내린 비로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한 벤치에 골라 앉는다. 거기서 가로등이 꺼질 때까지 기다린다. 불이 꺼지면 한 여자가 산책로에서 걸어오기 때문이다. 너는 축축한 벤치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약속이나 한 듯 그녀가 온다. 주말엔 빠지지 않고 온다. 그래서 너도 오게 된다. 어떤 의무감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비에 젖은 콘크리트 담벼락처럼 축축한 기운으로 둘러싸여있다. 그녀 손에 감긴 쇠사슬이 한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댄다. 사슬 끝에 묶인 고양이는 가슴 줄을 조금만 채도 옆으로 쓰러질 것 같다. 고양이의 꼬리가 부러진 안테나처럼 가볍고 뻣뻣해 보인다. 여자가 멈춘다. 네가 앉은 쪽으로 반 바퀴 돈다. 너는 책에 손을 얹고 여자를 못 본 척한다. 소설 속 문장만 읽는다. 죽인 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 그래도 여자가 어디쯤 섰는지 느낄 수 있다. 오 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여자가 말한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다친다.

  작은 바위다. 밑이 어둡다. 위는 회색이고 아래는 호수에 담갔다 뺀 것처럼 검다. 달과 달 뒤편처럼 두 개의 어둠으로 나뉜 바위가 산책로와 자전거 길을 가른 화단에 숨어있다. 여자가 손에 감은 사슬을 푼다. 줄이 풀릴 때 고리가 처지며 조약돌끼리 비비는 소리가 난다. 여자는 나무를 안아 사슬로 두른다. 흐느적거리는 고리의 끝을 줄 사이로 통과시켜 헐거워지지 않게 단단히 묶는다. 어딘가에 붙박인 느낌이 들자 고양이가 등을 곧추세우며 물러난다. 사슬이 팽팽해진다. 여자가 화단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바위를 주워서 던진다. 바위가 포물선으로 날아간다. 고양이는 날아온 바위를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움푹 팬 산책로로 돌이 굴러 빠진다. 여자는 잘못 던진 곳으로 간다. 가서 끙하고 신음하더니 돌을 다시 줍는다. 던진다. 이번에도 고양이가 허리를 비틀어 간신히 피한다. 힘이 약했다. 여자는 손에 맺힌 땀을 허벅지에 닦고 숨을 몰아쉰다. 잘못 구른 바위는 겨울 산처럼 고요하다. 여자가 중얼거린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안 된다.

  여자가 움직이는 걸 보고 고양이는 나무로 후다닥 뛰어오른다. 이번엔 돌을 쥔 채 그대로 달려 고양이의 이마를 찍어 내린다. 고양이가 모래포대처럼 나가떨어진다. 나무에서 등부터 떨어져 움직이지 않는다. 여자는 기지개켜듯 손가락을 쫙 펼치고 그 손으로 관자놀이에 맺힌 땀을 톡톡 찍어 누른다. 너는 손톱으로 책 모서리만 찌른다. 여긴 아무도 없고 너는 다 봤다. 하지만 저걸 네가 죽인 건 아니다. 우려낸 것도 아니다.

  고맙다.

  여자가 산책로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고 원래 가던 길로 걷는다. 여자는 저번 주에도 고양이를 죽였다. 검은 고양이었는데 머리가 깨져 눈알이 상한 생선처럼 튀어나왔었다. 너는 가방에 책을 넣고 지퍼를 잠근다. 고양이의 곁을 지날 때 스마트 폰으로 비춘다. 아가리에서 삐져나온 혀가 팔걸이의자에 걸친 손처럼 축 늘어져 있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 너는 쪼그려 앉아 죽은 고양이를 한참 바라본다. 여자가 돌아오기 전에 주차장으로 간다. 야간 당직을 서는 경비는 이어폰을 끼지 않고 스마트 폰으로 스트리밍 포르노를 본다. 남자와 여자가 5분 남짓한 영상에 나와 섹스한다. 박고 받는다. 박히면 도로 친다. 섹스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는 듯이. 무엇이든 호흡을 잘 맞춰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기본적인 일조차 말이다. 경비 부스를 지날 때 너는 핸드폰에서 울려 퍼지는 여자의 가쁜 숨만 생각한다. 죽지 않았으니까 죽지 않았다 해도 믿어줄 사람은 없겠지. 두려움은 없다. 권태만 있다. 두려움은 없다. 권태만 있다. 너는 어제 읽은 문장을 말하면서 걷는다.

 

  집으로 가는 길 육교에 선다. 발밑으로 사라지는 자동차를 본다. 세상은 빠르고 자연 같다고 느낀다. 초원에서 가장 많이 희생되는 쪽은 덜 자란 새끼들이다. 한국에서 아이는 어른이 되기 전까지 갈 곳 없이 방치되곤 한다. 네겐 독립할 자금도 용기도 없다. 그래서 앞으로도 죽고 싶어진다. 너는 스무 살 전에 자살할 거라고 마음먹는다. 날마다 그렇다. 한 것도 없는데 일찍 죽어도 될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만 믿으면 살인자도 천국으로 가고 불교는 지난 생의 과업에 따라 개나 돼지로 다시 태어난다는데 어디 가지 않고 허무한 끝은 없을까. 허공에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 입으로 삼키면 동그라미만큼의 세상이 사라지는 것처럼. 단순한 끝. 그런데 끝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기생충은 끝을 잘 아는 놈이었다. 적어도 다른 애보다는 많이 아는 것 같았다. 기생충이 교내 야구부의 등신으로 피곤한 학교생활을 이어가는 걸 너는 우연히 알게 된다. 지각해서 얼차려를 받은 날이었다. 과학 선생이 때릴 때 쓰는 도구가 있었다. 대걸레 자루를 부러뜨린 것이었는데 지각생은 반으로 돌아가기 전 복도에 집합해 일렬로 서서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맞았다. 네 차례가 되자 너는 너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를 갈았다는 이유로 신발장을 잡고 다섯 대 더 맞았다.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지각 한번 했다고 이렇게 맞아도 되나 싶었다. 그래서 교실로 가지 않고 아래층에 있는 화장실로 내려가 문부터 잠갔다. 아침 조회시간이 끝날 때까지 좌변기에 앉아 이를 벅벅 갈다가 복도가 조용해졌을 때 슬그머니 기어 나왔다. 그 시간에 학교에서 갈만한 곳은 옥상밖에 없었다. 옥상과 연결된 문은 열려있었다. 옥상이 폐쇄됐다는 소문은 거짓인 것 같았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자 아이들은 잘 가지 않았다. 옥상으로 나가니 물탱크 뒤로 누군가 다리를 쭉 뻗고 앉아있었다. 옥상은 공부를 포기해 대학도 포기한 기생충의 아지트였다. 기생충이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욕부터 했다. 욕은 했지만 널 보고 안심한 표정이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봄방학까지 이 주 정도 남았을 때다.

  어떻게 왔냐.

  죽으러 왔다.

  어떻게 죽냐.

  떨어지면 죽지.

  죽는 게 쉽냐.

  쉬울 거 같다.

  그럼 죽어봐라.

  기생충은 야구공을 튕기며 운동장만 본다. 어디 해보라는 듯이. 막상 죽으려니까 다리가 후들거려서 너는 난간에 오르는 대신 기생충의 옆으로 가 앉는다. 기생충은 욕만 할 줄 아는 놈이다. 진짜 센 애들은 조용히 패니까. 너는 중학생 때 친구였던 아이들한테 둘러싸여 맞은 적 있다. 아이들은 웅크릴수록 때렸다. 너는 맞다가 죽지 않으려면 흐트러져야 한다는 것을, 숨이 막히지 않아도 가쁜 척 굴어야 한다는 것을, 척도 못하면 척하다 죽고 그렇게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것까지 배웠다. 15살에 말이다. 기생충이 철봉 근처에서 야구 경기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야구공이 옥상 바닥에 퉁. 퉁. 튕겼다가 기생충 손으로 되돌아간다. 공이 바닥에 닿으면 퉁. 퉁. 하고 네 몸도 같이 울린다. 너는 네 속이 파이프처럼 비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야구 잘해?

  아니.

  못해?

  아니.

  뭐가 진짜냐. 잘한다는 소리야 아니면,

 왜 자꾸 묻는데?

  기생충이 다리 사이로 침을 뱉더니 야구공을 쥔 손으로 운동장을 가리킨다. 기생충의 손끝에 공 던지길 기다리면서 좌우로 방망이를 흔드는 타자의 모습이 겹친다.

  잘 봐. 저기 방망이 든 놈 보이지. 쟨 이번에 죽는다. 왜 죽냐. 눈치가 없어. 야구 잘하려면 눈치가 빨라야 하는데 저놈은 그렇지 않다. 봐. 파울이지? 이번엔 스트라이크일 거다. 휘두르자마자 아웃될 거야. 야구 잘하는 새끼는 누가 어디로 던질지 알고 쳐. 육감이랄까. 그런 게 몸에 뱄거든. 배워서 되는 것도 아냐. 그냥, 가진 거야. 그게 있어야 원하는 만큼 뛸 수 있어.

  넌 육감이 없는 편이구나.

  뭔 개소리냐?

  그럴 것 같아서. 아니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잠깐 쉬러 온 거다.

  옥상까지 말이냐?

  그렇다.

  가까운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가 10분 간격으로 뜬다. 봄과 이어진 겨울 하늘이 높다. 기온이 오르자 도로에서 날아든 비둘기가 옥상 물탱크와 에어컨 실외기 곳곳에 둥지를 틀었다. 갓 태어난 새끼와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가 빽빽 운다. 옥상의 침입자가 된 너흴 경계하면서. 기생충은 무릎을 시옷 받침처럼 꺾어 앉고 그 위에 팔꿈치를 댄 채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구경한다. 마지막 주자가 아웃되자 비둘기가 우는 둥지로 간다. 가서 부리로 격렬하게 쪼아대는 어미 새를 밀친다. 초라한 둥지에서 몇 알씩 훔친다. 훔친 알을 옥상 난간 끄트머리에 세운다. 알을 뺏긴 어미는 울지 않고 남은 알을 다시 품는다. 이런 상황을 자주 겪어서다. 하지만 도로 아닌 옥상에서, 길고양이 아닌 인간한테 알을 뺏긴 적은 처음이다. 그래서 어떻게 반격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기생충이 주머니에서 새끼손가락만 한 굵기의 노란 고무줄을 꺼낸다. 고무줄의 끝을 엮어 그물망을 만든다. 그물망에 야구공을 넣어 공이 빠지지 않게 묶고 남은 끈을 손목에 둘둘 돌려 말아 쥔다. 그리고 어릴 때 요요를 갖고 놀던 것처럼 야구공을 바닥에 몇 번 튕긴다. 기생충이 알을 둔 난간으로 간다. 가서 던진다. 야구공이 난다. 고무줄이 늘었다가 줄면 얼룩도 새털도 붙지 않은 어린 알들이 난간 아래로 떨어지거나 깨진다. 너는 야구공에 눌려 금이 간 알을 수거해 주머니에 넣고 표면을 쓰다듬는다. 조금씩 식어가는 알들이, 이제부터 죽기 시작한 알들이 모두 아작 났구나. 아작. 그래서 너는 아작스러워진다.

  옥상에 떨어진 비둘기 똥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어린 새가 자라면서 몸에서 빠진 솜털과 새똥이 뭉쳐 사막의 회전초처럼 굴러다닌다. 개교해 한 번도 수리하지 않은 난간은 운동장 쪽으로 불안하게 기울어 섰다. 옥상에 있는 모든 것이 봄 햇살에 익어간다. 옥상은 아름답지 않지 않은 곳이다. 옥상이 아름답지 않아도 너는 옥상으로 간다. 봄이 와서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아서 겨울과 봄 사이로 좁아 드는 계절을 느끼고 싶어서 기생충이 있어서 봄은 깊어진다.

  너 사람 죽일 수 있냐.

  기생충이 알을 네 개쯤 깼을 때다. 기생충은 답 없이 고무줄에 끼운 야구공만 던진다. 그거 이미 깨졌다 해도 던지느라 바쁘다. 너는 다시 묻는다.

  너 사람 죽일 수 있냐.

  기생충은 깨진 알만 또 깬다. 갑자기 분위기가 침울해졌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툭툭 턴다. 계단으로 내려갈 때 뒤에서 붙잡는 소리가 들린다.

  칼 있으면!

 

  칼은 어디든 있다. 얄팍해서다. 칼은 숨기라고 발명된 것 같다. 잘 갈아 은밀한 곳에 감춰라. 함부로 썰거나 찌를 수 없게. 누구든 간단히 찾아 쓸 수 없게. 알맞은 곳에서 알맞게. 그래서 칼은 세탁용 가루비누 속에 숨어있다. 두 번째 장롱 서랍 밑에도 있다. 낚싯대나 공구 상자처럼 필요 없지만 언젠가 꼭 쓸 것 같은 물건이 잡동사니가 되어 들끓는 베란다에도 있다. 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리면 새벽 6시라는 뜻이다. 너는 그때 눈을 뜨지만 일어나지 않는다. 문밖에서 여러 소리가 난다. 너는 부엌으로 나가지 않아도 아빠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다. 아빠는 커피믹스를 즐긴다. 아침엔 늘 커피를 타 마시고 출근한다. 너는 커피를 즐기지 않지만 아빠가 왜 커피를 좋아하는지 알 것도 같다. 커피믹스는 카페에서 파는 아메리카노보다 달다. 달면 친근하고 친근하면 마음이 놓인다. 그게 아빠의 행복이다. 시거나 떫은 커피는 공장으로 출근해 12시간씩 근무하는 아빠한테 위로가 못된다. 삶이 고달프면 먹는 거라도 달달해야 한다. 혀가 얼얼해져서 단맛이 쓴맛처럼 느껴질 정도로.

  현관문이 열린다. 닫힌다. 다른 세대와 이어진 복도로 난 창문이 흔들린다. 창문이 흔들리면 네 방 벽도 같이 울린다. 너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1부터 100까지 센다. 그걸 세 번 반복한다. 부엌으로 나가 김칫국물로 얼룩진 식탁 구석에서 썩어가는 식빵봉지를 든다. 식빵에 핀 곰팡이를 뗀다. 남은 걸 먹는다. 입안에서 죽이 된 빵이 죽고 있다. 퍽퍽한 식감이 끈적끈적해지고 있다. 너는 죽는 걸 죽일 때까지 죽인다. 방으로 돌아와 의자 등받이에 걸친 가방을 든다. 가방 깊숙이 손을 찔러 넣어본다. 미리 갈라둔 등받이 패드에 숨겨놓은 칼이 만져진다. 너는 차가운 칼을 꺼냈다가 도로 넣는다.

 

  이제 시작해야지. 이제 안전해져야지. 누구든 괴롭히면 죽여줘야지. 단지 사는 것만으로는 살지 못하게 해야지. 하지만 누구부터 죽일까. 죽이고 싶은 애들이 너무 많은데. 기생충이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죽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기생충이 등교하지 않은 게 일주일이 넘었다. 점심시간마다 옥상으로 올라가 봤지만 기생충은 보이지 않았다. 음악실이나 미술실, 과학실 창문에 붙어 불 꺼진 내부를 샅샅이 훑어도 구석에서 야구공 튕기는 소리는커녕, 성난 취객의 발길을 피해 과학실의 반쯤 깨진 창문으로 숨어든 고양이가 우는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기생충이 등교하지 않으니 길고양이를 죽인 범인이 기생충이라는 소문도 돈다. 남자애들은 교실 뒤에 모여 그 새끼가 정확하다고 말한다. 씨발 새끼. 그렇게 찌질한 짓을 몰래 하고 다닐 놈은 기생충밖에 없다면서. 너는 아이들의 화제가 기생충에서 너로, 또 다른 아이로 건너뛰길 기다린다. 새 교실을 배정받는 봄이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쉽게 달아오르고 피곤해진다. 그래서 너는 모두 듣고 흘릴 수 있다. 너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화장실로 간다. 문고리부터 걸고,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아 책을 읽는다. 113쪽부터 읽지 못했다. 돌려줘야 하는데. 가방을 뒤지면 칼이 나올 텐데. 선생님들이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할지도 모르는데 기생충은 왜 안 올까. 너처럼 멍청한 애도 멀쩡히 학교에 다니는데 말이다.

 

  가사시간 인기 없는 조의 깍두기로 낄 때마다 돈이 많았으면 했다. 너는 과도로 사과껍질을 깎는다. 칼이 미끄러져서 껍질이 중간에 툭 끊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깎는다. 우리말로 사과라든가, 영어로 애플이라든가, 다른 나라에서 다른 말로 불리는 열매는 언제부터 팔렸을까. 처음 사과를 모아다 이게 사과니 먹고 싶으면 돈을 달라고 한 사람이 누굴까. 지금은 귤이라고 불리는 열매나무 밑으로 가서 사과를 한 개 주고 귤을 두 개씩 따간 사람이 누굴까. 그렇게 바꾸고 바꿔서 더 많이 먹은 사람은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았을까. 그러니 최초의 부자. 최초로 부자가 된 사람은 너만큼 외로웠을까. 어제 읽은 소설 속 작가는 부잣집 도련님인데 죽었다. 그런 걸 보면 돈은 죽을 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죽고 싶은 날이 돈이 있을 때보다 많아진다. 너는 다른 조원이 토끼모양으로 썬 사과를 접시에 담아 제출할 때까지 기다린다. 네가 썬 사과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어젯밤 너는 일기장을 꺼내 일기를 지웠다. 너는 항상 연필만 썼다. 펜으로 쓰면 화이트로 지워도 뒷장에 흔적이 남았다. 그렇다고 볼펜으로 글씨를 뭉개긴 싫었다. 죽을 땐 완벽하게 사라지고 싶었다. 무덤에 유언이나 비석을 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훗날 누군가 우연히 무덤을 발견해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읽으면 부끄러울 것 같았다. 21세기에 태어난 사람이 아 이 사람은 20세기 사람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항상, 매우, 부끄러웠다. 너는 지우개로 어제 쓴 일기를 지우며 조금씩 아닌 곳에서 조금씩 아닌 것처럼 살다가 죽는 너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조금씩 살고 이렇게 지우고. 다시 조금 살다가 지우면 태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지게 될까. 자궁벽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붙었다가 떨어져 무언가 이룰 새도 없이 사라진 수정란처럼.

 

  늦은 밤 너는 학교에서 빠져나오다 운동장에서 훈련하는 야구부를 본다. 투수가 무릎을 끌어 올리고 어깨를 뒤로 빼 공을 던진다. 타자는 공이 어디로 튈지 알아야 한댔지. 몸이 휘는 모양새를 보고 공의 경로를 추정해야 한다고도 했다. 육감이 달리면 게임이 안 된다면서. 기생충이 그랬다. 그럼 야구는 눈치가 팔 할인 게임인가. 발이 느린 사람은 같이 놀 수도 없는 걸까. 태생적으로 둔하면 태생적으로 제외될지 몰라. 어떤 무리에 끼든 말이다. 어쩐지 이 말이 네게도 적용되는 듯해 너는 걸음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기생충은 정말 야구부였다. 기생충은 파울 라인과 가까운 곳에서 얼쩡대고 있었다. 공이 담벼락까지 날아가면 헐레벌떡 뛰어 공을 주워오는 게 기생충의 일이었다.

  야.

  삼루수다. 홈에서 오른쪽으로 하나둘 세 번째 위에 섰으니 삼루수가 맞다. 삼루수가 공을 주은 기생충한테 ‘야.’라고 부른다. 기생충이 웃는다. ‘야.’라고 불린 건 처음이다. 그런데 포수도 ‘야.’라고 부르고 투수도, 야구방망이를 든 타자도 ‘야.’라고 부른다. 기생충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다. 아이들이 ‘야.’라고 불러줘서 그렇다. 기생충이 공을 주워 홈으로 들어온다. 몇몇이 손뼉을 치며 비열하게 웃는다. 삼루수는 야구공이 담긴 이동용 수레로 가서 공을 빼 던진다. 공이 난다. 기생충이 피한다. 몇 개는 허벅지에 맞는다. 기생충이 계단 위로 도망친다. 도망치다가 국기게양대 근처에서 너와 마주친다. 공이 계속 날아온다. 종종 센 것도 있다. 네가 그걸 다 보고 있어서 기생충은 평소보다 더 씩씩거린다. 기생충과 가까워지자 뒤에서 아이들이 섹스하라고 외친다. 구호처럼. 외치고 또 외친다. 외치고 외쳐서 섹스라는 단어가 섹스럽지 않아질 때까지 외친다. 너는 기생충이 가까워졌을 때, 그래서 공이 날지 않고 섹스라는 구호만 교정에 울릴 때 가방에서 칼을 꺼낸다. 기생충의 가슴팍으로 칼을 퍽 밀어 안긴다. 엉겁결에 칼자루를 쥐게 된 기생충이 당황하지 않은 척 소매 속에 칼을 숨긴다. 너는 아이들이 붙기 전에 따라오라고 말한다. 네가 오래서 너희는 간다. 너희는 교문으로 나갈 때 뒤에서 누가 공을 던질까 봐 지그재그로 걷는다.

  기생충은 네 뒤에 붙어 누구든 재수 없으면 찌르겠다고 중얼거린다. 너는 기생충이 품은 칼만 생각한다. 대형마트 식기코너에서 투명한 플라스틱 포장지에 싸였다가 어느 날 집으로 반입된 신선한 칼만 생각한다. 칼은 아직 쓰인 적 없다. 그래서 너는 살았고 어쩌면 피가 묻지 않아 네 곁에 머문 칼만 생각하며 걷는다. 너희는 공원 주차장으로 간다. 경비 부스가 비었다. 천장의 조명등이 켜진 걸 보면 경비는 화장실에 갔거나 공원 근처 갓길에 불법 주차된 차를 단속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을 듯하다. 너는 빈 부스를 돌아본다. 기생충이 엉겁결에 널 따라 고개를 돌려 너희가 지나온 길을 바라본다. 누가 뒤따르길 원하는 것처럼. 그래도 없다.

 

  너희는 열심히 걷는다. 네가 여자를 기다리는 곳까지 간다. 얼마 전 고양이가 죽은 자리는 다른 곳보다 짙은 빛깔로 얼룩져 있다. 저기서 고양이가 많이 죽었다. 하지만 너는 그걸 기생충한테 말하지 않는다. 핸드폰 시계로 밤 11시가 넘었는데 가로등이 꺼지지 않았다. 너는 기생충에게 가로등 밑에 서 있으라고 한다.

  거기 있다가 누가 오면 찔러.

  ……

  알았지?

  공원이 밝은 탓일까. 산책로에 덮인 나무 그림자가 기생충의 배짱을 빼앗은 것 같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고 너는 벤치에 앉아 지켜볼 생각이다.

  무서워?

  아니.

  무섭지?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짧게 말해?

  너는 기생충만 두고 벤치로 간다. 가로등이 꺼지지 않았는데 여자가 온다. 너는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본다. 팔자주름이 깊은 삼십대 여자다. 기생충이 쾅 하고 땅을 밟는다. 겁 많은 치와와가 산책로에서 마주친 진돗개를 향해 먼저 짖듯. 너. 돌아봐도 뒤는 어둠이다. 도망칠 곳은 없으니 물러날 공간이 없다는 걸 증명해봐라. 여자는 기생충만 본다. 기생충이 쥔 칼이 아니라 기생충의 뺨에 핀 확장된 모세혈관만 본다. 너는 113쪽을 펼치고 손을 얹는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책을 읽을 것이다. 가로등이 꺼지지 않아 여자의 입술을 끝까지 읽을 수 있다.

  움직이지 마라. 움직이면 다친다.

  여자가 치마 주머니에서 주먹만 한 돌을 꺼낸다. 뿔소라처럼 생긴 우윳빛 석영이다. 여자가 제자리 뛰기 선수처럼 도약해 기생충의 이마를 돌로 찍는다. 기생충이 뒤로 쿵 넘어간다. 여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그녀는 단단하고 긴장 어린 표정으로 돌아선다. 차갑고 텅 빈 눈이다. 공을 던진 투수가 포수의 가죽 글로브에 담긴 공을 천천히 알아보는 것처럼.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지 확인하는 공모자의 미소. 너는 여자와 눈이 마주칠 때 울지 않으려고 얼음을 생각한다. 얼음. 처마에 달린 고드름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 조각나는 풍경만 생각한다. 그래도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 사이 여자는 지난번처럼 나뭇가지를 밟고 어둠 속으로 떠난다. 여자 손에서 떨어진 돌이 산을 뚫어 만든 터널처럼 깊은 산책로로 뱅그르르 구르며 우아한 소음을 남긴다. 너는 기생충 곁으로 가서 쪼그려 앉는다. 가방끈으로 손바닥을 툭툭 친다. 죽어가는 고양이가 꼬리로 땅을 치듯. 그리고 본다. 끝까지 본다. 네가 보지 못한 만큼 본다. 약한 사람을 보는 건 이렇게 쉽구나.

  병신새끼.

  울면 안 된다. 울면 맞았다. 우는 애는 약했다. 약한 애를 때려야 강했다. 때리지 못하면 아팠다. 그래서 왕따는 좁은 복도에서 다른 아이와 몸이 닿지 않으려고 웅크린 채 다녔다. 학교에서 그걸 감수할 아이는 드물었다. 그래도 왕따가 필요했다. 아빠는 개 같은 곳에서 개 같은 일을 겪어도 참았다. 머그잔에 막걸리를 부어 마시며 개 같은 일을 겪는 게 돈 없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아빠도 공장에서 왕따일까. 왕따라서 집에 오면 저렇게 말이 많아지는 걸까. 방문 너머로 아빠의 푸념이 들릴 때마다 너는 바람에 마음이 잘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네 마음은 뼛속까지 베였다. 그곳엔 아작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아작. 마음이 아작 날 땐 모두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는 친구들 앞에서 얼마만큼 찌르고 욕하고 어떻게 침을 뱉고 돌아서려 했는지, 그런 상상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 세본 적도 많다. 자살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서 너는 왜 개 같은 일을 견뎠을까. 어쩌면 죽기 전에 누가 죽는 걸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미워할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 죽어서도 안전할 것 같아서.

  나는 도와주지 않을 거야. 얼마나 괴롭든 아프든 피를 흘리든 내버려 둘 거야. 너는 일어서야 해. 기어서라도 병원에 가야 해. 혼자 가지 못하면 죽어야 해. 그래야 하는 거야. 다 그렇게 사니까.

  기생충은 말이 없다.

 

  뉴스 진행자가 라디오 아침 뉴스로 어젯밤 사건사고를 전한다. 이건탁. 열아홉 살이고 주엽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다. 공원을 순찰하던 경비가 산책로에 쓰러진 학생을 발견해 119에 신고했으나 구급차에 오를 때까지 의식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오늘 새벽에서야 의식을 되찾아 뇌진탕 증세로 치료받고 있다. 아이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을 열지 않아 부모가 애타게 목격자를 찾는다. 3일 전 밤 11시 이후 호수공원에서 교복 입은 남학생을 목격한 사람이 있으면 일산병원으로 연락해 달라. 부모가 기다린다.

 

  여자는 과도를 든 채 움직이지 않는다. 모퉁이에서 나타난 너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본다. 네가 긴 복도를 걸어 병실과 연결된 미닫이문의 손잡이로 손을 뻗을 때까지. 네 머리카락, 베이지색 리본과 교복, 무릎을 살짝 안으로 굽혀 걷는 자세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데도 그렇다. 그래서 너는 여자를 무시해버린다. 병실로 들어가니 창가로 돌아누운 기생충이 보인다. 6인실이다. 침대 머리맡에서 양반다리로 앉아 화투 점을 치던 할머니가 힐끗 고개 돌리더니 다시 점괘로 정신이 팔린다. 너는 기생충이 누운 침대로 간다. 팔을 접어 괸 꼴이 오랫동안 볕을 쬐지 못한 고양이처럼 푸석푸석해 보인다. 기생충이 고개를 돌려 누가 왔는지 확인하고 창밖만 본다. 너는 제자리에서 오랫동안 기다린다. 해가 조금씩 기운다. 기생충이 조그맣게 웅얼거린다.

  너 내가 죽었으면 했지.

  ……

  크게 다쳤으면 했잖아.

  기생충이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는다. 너는 기생충의 가녀린 발목만 본다.

  저걸, 어디서 봤더라. 봄도 겨울도 아니었는데. 비가 온다더니 하늘만 높아서 내일부터는 뉴스 대신 구름을 봐야겠다고 다짐한 날이었는데. 실수로 우산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 새벽에 내린 비가 녹아든 보도를 재미 삼아 툭툭 치며 걸어 다니고 하늘은 높았다. 사실 내가 옥상에서 그걸 다 본 건 네가 보고 싶어서였고 실내화 위로 비죽 튀어나온 네 발목이 새순을 씹어 먹는 어린 사슴의 뒤통수처럼 매만지고 싶게 생겼었는데. 바람이 쌀쌀해 교실로 내려가고 싶었던 적도 많았지. 하지만 기생충이 자꾸 공을 튕기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렇게 많이, 그토록 답 없이 부서진 알들을 누가 묻을까 싶어서. 비둘기는 묻지 못할 테니까. 그녀의 죽은 알들을 말이다. 잘 자라다 갑자기 뺏긴 목숨 말이다. 네가 너도 모르게 깡그리 잡아 죽인 것들 말이다. 네가 장난으로 죽인 것들 말이다. 네가 몰랐지만 미안해해야 하는 것에게 누군가는 대신 사과해야 했으므로.

  너는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기생충의 책이다. 기생충이 책을 받는다. 두 갈래로 갈라진 표지 귀퉁이를 만지며 우물쭈물 말한다.

  죽일 수 있었는데. 못 죽여서 미안해.

 

  여자가 접수처에서 부리나케 달려와 손부터 잡는다. 너는 낯선 여자에게 손이 잡혀 바닥만 본다. 베이지색 에나멜 단화에 글루건 본드로 붙인 리본이 덜렁덜렁하다. 손은 차고 아귀가 세다. 이 사람이 기생충 엄마일까. 건탁이라는 아이의. 여자가 말한다.

  사람은 만나면 만나. 살면 또 만나는 거야. 그러니 꼭 만나. 알았지.

  너는 속으로 ‘네.’라고 답한다.

 

  다음엔 죽이자. 사라지기 전에 죽이자. 잡으면 쥐고 점점 꽉 쥐기만 하자. 병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다. 병원 로비로 가로지를 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너는 회전문을 밀고 나온다. 버스정류장으로 달린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가 화단에 앉아 담배 피우는 노인과 우연히 눈이 마주친다. 노인은 처진 목울대를 꿀떡이며 손을 떨고 있다. 너는 노인이 쥔, 너무 많이 피워 곧 사그라질 꽁초에 시선이 뺏긴다. 노인은 죽는다. 아이도 죽는다. 누구든 죽는다. 그게 삶이고 지나가는 버스도 10년 뒤엔 폐차될 거다. 너는 상실에 익숙하다. 하지만 죽는 건 개 같다.

  건널목에서 너는 어금니를 간다. 너만큼 죽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거, 네가 사는 이유는 그런 사람과 마주 보기 때문이라는 것. 집으로 가는 버스 라디오에서 너는 너와 닮은 사연을 듣는다. 너는 죽지 못한다. 밤을 겪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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