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나는 우주

2017.07.22 17:3107.22

 

1.

수연이는 말이야, 딱 A형일 거 같아. 안 그래?

 

동의를 구하듯 남자는 일행을 돌아보며 외쳤다. 다 졸아 버려 바닥을 드러낸 어묵 탕, 정신없이 널브러진 젓가락과 휴지, 수북이 쌓여있는 소주병. 학교 앞 이름 모를 한 술집에서였다. 누군가는 말없이 소주잔을 훌쩍이고 또 누군가는 말없이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걸로 답변을 대신했다. 이미 이 공간에서 언어의 실체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A형 맞지? 꼭 A형들은 이럴 때 말이 없더라. 아, 미안. 오해하지 마. 네가…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단지… 좀 친해졌으면 싶어서 그런 거야. 우리 지금 몇 번째 모임이지 세 번째? 네 번째? 하여튼 몇 번이나 됐는데 조용히 있더라고. 구석에서 가만히. 우리가 과제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말 좀 해야 하는 거 아냐. 혹시 뭐 다른 이유라도 있어? 말해봐. 괜찮으니까.

 

남자의 말. 자세. 내뱉는 숨 모든 게 싫었지만 더 구역질나는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수연은 반쯤 남아 있는 맥주를 입가로 가져갔지만, 미지근한데다 맛이 없어 인상만 찌푸려졌다. 남자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이번 강의에 대한 불만을 하나씩 허공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2.

교수는 칠판에다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라는 말을 크게 써놓더니 강의 계획을 읽어나갔다. 조원 구성은 자유. 명단만 제출하면 그 팀은 수업에 참석할 필요 없음. 대신 과제와 기말 시험으로 학점 부여. 과제는 매주 한 번씩 조원들끼리 모여 밥을 먹은 다음 인증 사진을 자신에게 보낼 것. 기말 시험은 모임에 본인이 참여. 거기서 이야기 나눈 것, 분위기 등을 토대로 학점 부여.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숨 소리가 강의실을 뒤덮었다. 재빨리 사람을 선점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어쩔 줄 몰라 교수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꼭 조를 구성해야 합니까.

 

네. 만약 다음 주까지 명단을 제출하지 않으면 제가 임의로 짜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진전이 없으면 수업에는 오셔야 합니다. 얼굴이라도 봐야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 뒤에도 평가 기준이 불분명하다, 의의에 대해 알고 싶다란 말이 강의실을 오고갔으나 수연은 모든 걸 차단하고 신장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피곤함을 처리하지 못해서 이렇게 된 거다. 그날 늦잠만 자지 않았어도 이 강의를 수강할 일이 없을 것이다. 모든 건 네 탓이다. 그러자 신장이 말했다. 아니다 이 모든 건 술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간의 탓이라고. 네가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니까 이렇게 된 거라고 화살을 돌렸다. 그리고 그 화살은 몇몇 장기를 돌아다닌 끝에 날카로운 창이 되어 온몸을 돌아다녔고, 수연은 늘 그랬듯 몸을 웅크린 채 자기 혐오에 침식되었다.

 

 

3.

언제부터 장기를 상대로 말을 걸기 시작했을까. 그날의 하늘도, 들판의 꽃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손톱을 물어뜯거나 머리를 긁적이는 것과 같은 동작이었다. 이상하다고 느낀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몸을 웅크린 채 장기에게 말을 걸고 있자, 지나가던 반 아이 한 명이 뭐하냐고 물어왔다. 순간 대답을 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자 그 아이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이상한 걸까. 내 행동이 이상한 걸까. 왜 물어본 거지.

인식 뒤에는 비교와 이해.

수연은 시간을 들여 반 아이들을 관찰했다. 화가 나는 일이 있다. 소리를 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다. 웃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우울한 일이 있다. 힘든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모두 다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타인에게 전파하고 있었다. 나는 뭐가 다른 걸까. 한 조각의 작은 용기를 꺼내어 옆에 앉아있던 아이에게 물어봤다. 저기 있잖아.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돼? 그러자 그 아이가 놀란 듯 고개를 돌리며 옆의 아이에게 말했다. 와, 수연이가 먼저 말을 걸었어. 처음이야 처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비웃었던 게 아니었다. 무엇이든지 처음은 놀라기 마련이다. 만약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갔다면 수연에겐 다른 우주가 펼쳐졌으리라. 하지만 수연은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학교에서 나온 걸로 그 우주에서 도망쳤다.

 

 

4.

수연아 미안하다, 내가 말이 좀 심했어.

 

남자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가게 앞 붉은 색 전등이 그의 감정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냐. 괜찮아. 나야말로 미안.

 

수연은 괜찮아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자신의 윤곽이 흐릿해짐을 느낀다. 괜찮아와 미안해. 모든 곳에서 도망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주문.

남자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음 주는 더 잘 지내자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돌아가서 남자는 말하겠지. 소심한 애가 모임에 있는데 골치 아파 죽겠다. 그래도 내가 노력하고 있다. 교수에게 잘 좀 얘기했으면 좋겠다 라고. 주문의 후유증이다. 도망칠 수 있는 대신에 나라는 인간은 남의 손에 의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조용하고 소심한 여자애. A형. 폰 한 번 안 쳐다보는 걸로 봐서 친구도 없는 거 같다. 중고등학교 때 왕따였겠지. 혹시 부모가 이혼한 거 아냐?

다음 모임까지 앞으로 6일하고도 19시간. 아, 세상이라도 무너졌으면.

 

 

5.

혈액형 남자는 모임 때마다 수연에게 말을 걸었다. 그에겐 낙오자라는 말이 입력 안 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그 모든 걸 뛰어넘어서라도 좋은 점수를 받고 싶은 걸까. 또 아니면 교수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걸까. 자의식들이 만들어낸 선문답은 오늘도 줄을 지어 발밑을 헤매고 있었다. 수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채 디지털 세상에 몸을 던진 남자, 계속 맥주잔에 소주를 들이 붓는 여자, 멍하게 안주만 섭취하며 시간을 흘러 보내는 남자, 풀린 눈으로 혈액형 남자를 쳐다보고 있는 여자 0 1 0 1 0, 1…….

이들과 내가 다른 건 무엇일까. 왜 혈액형 남자는 나보고만 뭐라고 하는 걸까. 나만 바뀌면 뭐든 게 바뀐다고 생각하는 걸까.

생각은 언어를 만들어내고 언어는 조각조각 이어져 감정을 창출해냈다.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감정을 수연은 맥주로 억지로 밀어냈다. 어떤 의견을 내서 깎이고 반목당할 바에야 맛없는 맥주를 위에 공급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래서 말인데, 수연이가 기말 때 교수한테 발표했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 남자는. 수연은 모임 시작한 뒤로 처음, 남자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혈액형 남자는 수연을 한 번 바라보더니 방긋 하고 웃었다.

 

이 강의의 의의가 뭘까. 곰곰이 생각하다 아는 선배한테 물어봤는데 별 거 아니더라고. 결국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거야. 고작해야 교양 과목인데, 머리 아파 할 필요 없었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누가 발표를 하면 좋을까 고민해봤는데…… 역시 수연이 너밖에 없는 거 같다. 괜찮지?

 

너밖에 라는 말에 밤새도록 반문하고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멋대로에 예의도 없고 생각도 없다. 왜 그림으로 그린 듯한, 무례한 인간이 내 앞에 있는 걸까. 손에 든 맥주병으로 저 인간의 머리를 내려친 다음, 이쑤시개로 눈을 찔러버리면 이 세계를 끝내버릴 수 있을까.

수많은 행동이 수연의 머릿속에서 빛처럼 다가왔다 먼지처럼 사라졌다.

 

오 괜찮다 그거.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자가 마지막 남은 소주를 입에 들이 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시동 걸린 엔진처럼 하나하나 입을 열기 시작하는 인간들. 추임새가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것처럼 자연스레 들려왔다. 좋은 생각이다. 괜찮은 거 같다. 나도 아는 선배한테 물어보겠다……. 수연은 머리가 아파왔지만 주변의 분위기는 축제라도 맞이한 것처럼 달아올랐다. 공통의 적, 공통의 목표, 공통의식…… 변방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자들이 기회라며 수연에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태어난 곳, 취미, 이 학과로 오게 된 이유, 남자친구 여부 등등. 수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고 하이에나들은 더 잘 됐다며 수연을 왕으로 추대하기 시작했다. 왜 사람들은 무언을 긍정으로 인식하는 걸까. 나는 왜 내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걸까. 평생을 옥죄여온 질문이 띠처럼 이어졌지만 늘 그래왔듯 고개를 더 숙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평생 난 이렇게 살다 죽겠지.

 

 

6.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라는 말을 아세요?

아뇨 처음 들어요.

니콜 크라우스가 쓴 사랑의 역사란 소설에서 나온 구절이에요. 그 뒤로는… 장기에게 말을 걸게 되더라고요. 나는 타인들에 의해 구성되는데 나는 그 무엇도 만들 수 없나… 싶어서. 결국 제 자신 밖에 안 남더라고요.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누나요.

제가 궁금한 점에 대해서요.

답변은 잘 해주나요.

네. 근데 도움은 하나도 안 돼요.

그래요?

네. 모두 저한테서 태어난 녀석들이다 보니.

 

 

7.

모임은 전과 같았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여자, 디지털 세상에 빠져있는 남자, 여자, 남자. 그리고 쓸데없는 말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혈액형 남자와 수연까지. 다만 안도라는 두 글자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가 다 처리해주겠지. 적당한 말들과 적당한 술로 허영심을 채우고 자존감을 구축한 뒤 사진 찍고 헤어지길 반복. 수연은 돌아오는 길, 가로등 아래 서서 온몸을 부딪치고 있는 벌레 무리를 보았다. 결코 닿을 리 없는 빛을 향해 몸을 불태우고 있는 하루살이들. 수연은 그런 벌레마저도 부러워 미칠 것만 같아 무리들 사이로 다가갔다. 손을 뻗었지만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죽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이라면 나를 없앨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연은 떠올렸다. 다리를 움직여 낭떠러지로 간 다음 자기 자신을 밀어버리는 모습을. 몇 번이 아니라 수백, 수천 번 떠올리고 실행했다. 끝이 없는 우주, 끝이 없는 세계, 끝이 없는 나. 계속해서 나를 없애고 밀어버리고 말소시켰다.

 

부우웅

 

날갯짓 하는 소리와 함께 이름 모를 벌레 한 마리가 수연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아, 돌아왔다. 극도의 상실감이 수연을 덮쳤다. 죽기 위해 움직이는 것도 한 걸음의 발자국. 자살도 하나의 표현.

수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길을 걸었다.

 

 

8.

사람이 싫어요. 무서워요. 제가 뭘 잘못 했는데 사람들은 그런 시선과 눈으로 날 쳐다보고 매도하죠. 말을 꺼내면 눈치 없다고 타박하고 말을 꺼내지 않으면 음침하다며 뭐라고 수근 거려요. 제 말이 잘못된 걸까요. 제 언어는 이곳에서 쓰이는 언어가 아닌가요. 왜 제 말은 나가기만 하면 사어로 치환되는 걸까요. 타인과 저는, 다른 우주에 사는 걸까요.

 

 

9.

발표 날이 되었다. 혈액형 남자는 걱정 말라는 듯 밝게 웃으며 수연을 다독거렸다. 말을 나누고 싶지 않아 대충 고개를 끄덕거린 수연은 맥주 대신 물을 위로 집어넣었다. 술은 교수가 오면 마시기로 했다.

소주를 컵으로 마시던 여자는 입이 심심한 지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동아리 선배도 이 수업을 들었는데 별 거 없었대. 대부분 다 학점도 잘 받았다고 하고. 뭐라더라. 기말 때도 그냥 교수 분위기만 잘 맞춰주면 된다고 했던가? 주량도 평범하다고 했고.

 

평범한 게 몇 병인데?

 

두 병?

 

두 병이 평범하냐… 아, 너한테는 그럴 수도 있겠네.

 

혈액형 남자도 비슷한 어조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고, 술만 마시지 않았을 뿐이지 조금씩 분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긍정의 언어를 토해내고 있었다. 그 말들이 자신들을 단단하게 지켜줄 것처럼. 끊임없이 쌓여가는 성벽 속에 수연은 억지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난 땅콩 접시. 조금씩 쏟아져 있는 물. 어두침침한 조명. 시끄러운 음악 소리.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해내고 있는 남자와 여자. 인간과 인간. 구역질이 날 거 같아 물을 계속해서 마셨다. 빙글빙글. 세상이 돌아간다.

 

장기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머 글처럼 이름을 다 빼버리는 건 어떨까?

PPT가 아니라 현장 발표잖아. 그럼 말을 하는 건 어때? 동의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발표자로 선정했다고.

그럼 여태껏 왜 가만히 있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래.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너 나랑 장난하니?

그럼 발표할 거야?

몰라.

저 앞의 재수 없는 남자는 뭐라고 하던데.

이런 논조로 이야기하면 된데. 이 학교에 들어와서 아는 사람도 없었고 조금 쓸쓸했는데 이 강의를 듣게 되면서 아는 사람이 늘어 좋았다고. 즐겁다고. 이 관계가 앞으로 어떤 식으로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이 추억은 이어가고 싶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준 교수님께 감사하다……라고.

싫다. 정말.

그러게.

그냥 지금 나가버려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나갈 수 있었으면 진작 나갔겠지 그리고 네가 나였다면 진짜 지금 나갔을 거 같아? 뒤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면서도?

아니 못 나가.

그렇겠지?

 

 

10.

수연은 1학기 마지막 시험을 위해 학교에 나왔다. 오픈 북인데다 강의실도 넓어 구석진 곳에 가 적당히 종이를 채운 다음, 밖으로 나왔다. 매미 소리와 아스팔트에서 올라온 복사열이 수연을 덮쳤다. 가만히 서 있어도 호흡이 가빠져와 최대한 그늘을 찾아다니며 발을 옮겼다.

 

결국 그날, 수연은 발표하지 않았다. 외부 요인에 의해서였다. 교수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술과 함께 잡담을 이어나가기 시작했고, 이쪽이 더 이득이라 판단한 사람들은 교수의 기분을 상기시키는데 힘을 모았다. 교수는 흥에 취했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은 개인사를 언급하며 속에 있는 걸 뱉어냈다. 점수는 알아서 줄 테니 신경 끄라는 말과 함께. 아마 이 때문에 별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으리라. 수연은 알 수 없는 안도와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인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위로 집어넣었다. 그것만이 이곳에서의 존재 이유라며.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지쳐, 나무 밑으로 숨어 숨을 잠시 돌리기로 했다. 크게 호흡하자 열기가 몸 안으로 가득 들어왔지만 그래도 햇볕 아래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열에 빼앗겼던 감각이 조금씩 되살아나자 물소리가 들려왔다. 인공 연못을 향해 떨어지는 물이었다. 집중해서 쳐다보니 잉어가 눈에 들어왔다. 녹색의 바다에서 잉어는 힘겹게 수면을 향해 입을 뻗어 호흡하고 있었다. 뻐끔뻐끔. 이상할 정도로 입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구역질이 날 거 같아 억지로 발걸음을 옮기자, 피할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길 너머로 혈액형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매일 쓰고 다니는 모자, 건들건들한 움직임. 모든 걸 안다는 듯이 움직여대는 저 재수 없는 입까지도. 틀림없이 그 인간이 맞았다. 말을 걸어야 할까, 아니면 그냥 가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무시하고 싶지만 그대로 지나치다 남자가 말을 걸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혈액형 남자가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수연은 어찌할 줄 모른 채 움찔거리다 손을 살짝, 뻗었다.

 

아… 안녕….

 

혈액형 남자는 수연을 한 번 흘깃 쳐다보더니 그냥 그대로 지나쳤다. 완벽하게 무시당했다.

 

 

11.

저는 감정과 장기가 연결되어 있어요. 비장과 질투. 쓸개와 오만. 대장과 분노. 소장과 절망. 간장과 자책. 신장과 분개. 위와 초조. 방광과 원망. 폐와 우울. 삼초와 기대. 심장과 외로움. 이렇게.

이 모든 것을 다른 차원에 보내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이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요. 어떤 제가 있을까요. 그곳에서의 나는 조금 더 타인에게 손을 뻗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내일의 저도 알지 못하는데 다른 우주의 저는 어떻게 아나요.

 

부우웅

 

정신을 차리자 저번의 그 가로등이었다. 더 늘어난 벌레 아래로 못 보던 쓰레기봉투가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자 여기저기 찢겨져 주황색의 걸쭉한 액체를 뿜어내고 있었다. 역한 냄새가 주변을 물들어가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바람. 끝없이 흐르는 땀. 영원히 생겨날 거 같지 않은 자존감까지.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쉰 다음, 중얼거렸다.

 

역시 난 내가 제일 싫어.

 

 

 

 

 

romaeg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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