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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INA - 불안한 동행

2020.12.16 01:1212.16

이나가 뛰어간 곳으로 트라나는 우물쭈물하였다. 함성 소리가 커지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빠져 비명을 질렀다. 트라나는 집 밖으로 나와 천장을 보았다. 밝은 태양이 부수어진 구원자의 등껍질 사이로 빛을 비추고 있었다. 화살들이 날아와 땅으로 박히고 횃대들이 쓰러져 불길이 번진다. 트라나는 마을 사이를 뛰며 이나와 타냐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널브러진 횃대에 트라나는 발이 걸린다. 그녀는 넘어졌고 그녀의 위로 구원자의 껍데기 조각들이 덮친다. 트라나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말았다.

 

트라나는 부드러운 털의 간질거림으로 눈을 떴다. 늑대의 얼굴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다. 트라나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커다란 회색 늑대가 몸을 일으키자 산산조각 난 껍데기 조각들이 땅으로 흘러내렸다. 늑대는 트라나의 얼굴을 보고는 몸을 홱 돌린다. 트라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무렇게나 버려진 검을 주워든다.

 

베스의 회색 갈기가 빨갛게 물이 든다. 베스가 뒤를 돌고 트라나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작은 단도를 뽑으며 베스는 트라나를 내려다보았다.

 

[인간들을 모두 잡아, 놓치지 마!]

 

양 하나가 창을 들어 소리를 지른다. 수인들이 마을 깊숙이 내려와 밧줄로 인간들을 묶고 있었다. 수인 하나가 트라나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다.

 

[뭐해, 꼬마 애를 잡아야지!]

 

베스가 달려오는 수인의 팔을 붙잡아 반대로 비틀어 꺾는다. 베스가 트라나를 옆구리에 끼어 달려간다.

 

[이거 놔, 살려줘요!]

 

트라나의 발버둥을 꽉 잡고서 베스는 이나를 찾으려 애썼다. 베스의 옆구리에서부터 트라나의 등에까지 붉은 피가 온 곳으로 번진다. 수인들이 마을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다. 베스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고개를 바쁘게 돌렸다. 인간 하나가 쏜 화살이 베스의 갑주에 날아와 박힌다. 활시위가 당겨진다. 베스는 인간을 노려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활시위를 놓으려는 인간의 몸이 황소가 휘두르는 망치에 맞아 바닥으로 나뒹군다. 한쪽 뿔과 기다란 흉터를 가진 산양, 훌터가 울음소리를 내며 베스가 있는 곳으로 내달리고 있다.

 

베스가 트라나를 내려다본다. 트라나는 고개를 한껏 올려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내었다. 베스가 눈을 감았다 뜬다. 수인들의 행군이 가까워지고 있다. 베스는 트라나를 어깨에 이고 인간들의 거대한 둥지 바깥으로 내달렸다.

 

수인들과 인간들이 부딪히는 검 사이로 베스는 밖으로 환하게 비추어지는 햇살 쪽으로 내달렸다.

 

 

 

 

 

 

 

 

 

짙은 먼지가 가라앉은 폐허 위로 토끼 수인은 자신이 잡은 연약한 실크 천을 붙잡은 채 미소를 지었다.

 

[똑똑하지 않아요?]

 

아슬아슬하게 걸친 나무 뼈대를 밟고선 인간의 발이 떨린다.

 

[벨바 님.]

 

[왜 그러시죠?]

 

훌터가 목덜미의 털을 흔들며 말하였다.

 

[슬슬 추적해야 합니다.]

 

[그렇죠, 금방 끝납니다.]

 

훌터가 뒤로 물러나 자리를 비켜준다. 벨바에게 붙잡힌 여사제가 울먹이며 애원한다.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은덕을 베풀어 주셨으면서.]

[왜 이렇게 변덕을 부리시는 겁니까?]

 

여사제의 몸이 무너진 사원의 밖으로 매달린다. 벨바의 팔을 붙잡으며 입술을 깨문다. 벨바는 그 모습이 즐거운 듯 입가로 웃음을 흘렸다.

 

[전 이런 게 좋아요.]

 

무너진 나무 뼈대를 헛디딘 여사제의 발이 다급하게 좌우로 흔들린다.

 

[걱정말아요, 당장은 놓지 않을 테니.]

 

[대체 왜!]

 

여사제의 흐느끼는 소리로 수인들이 고개를 든다. 날카로운 창대들이 사원 아래로 금방 발을 굴릴 준비를 하고 있다. 떨어지는 먹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창대들이 고개를 올리고 한 곳을 노려보고 있다.

 

[당신 인간들을 몰래 빼돌리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당신 인간들을 몰래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대체 왜.]

 

여사제의 실크 천이 벨바의 손에서 주르륵 미끄러진다. 여사제가 발끝으로 버티어 섰고 천 아래로 물줄기가 뚝뚝 떨어진다. 꽉 깨문 입술로 피가 흐른다. 벨바는 그런 여사제의 모습이 즐거웠다.

 

[그야, 내가 재밌으니까.]

 

여사제의 몸 절반이 미끄러져 상체가 기운다. 벨바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이런 학살극은 흔치 않으니까.]

 

여사제에게로 눈을 마주하며 벨바는 마지막으로 말하였다.

 

[그렇지 않아요?]

 

벨바의 손이 실크 천을 아래로 떨어트린다. 인간 하나가 높이 솟은 창대의 끝으로 수십 조각이 난다. 수인들의 위에서 마법사가 손을 올린다. 수인들이 발을 구른다. 올그가 군대를 이끌어 둥지 밖으로 깃발을 펄럭였다.

 

포프 마을의 깃발을 앞으로, 수인들이 남은 인간들을 잡기 위해 마을에서 마을로. 숲에서 숲으로, 오솔길에서 땅 속까지 쉬지 않고 울음을 울었다.

 

 

 

 베스는 구원자에서 멀리 떨어진 숲으로 도망쳐 나무에 기대었다. 피가 넘쳐흘러 허벅지와 종아리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베스의 피를 뒤집어 쓴 트라나는 우뚝 서서 베스에게 말하였다.

 

[절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베스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잡으려 애를 썼다. 몸을 일으킨 회색 늑대의 발이 옆으로 고꾸라진다. 트라나를 보며 베스는 중얼거렸다. 트라나는 그것을 보지 못했고 덩치 큰 늑대의 비릿하고 역한 냄새의 상처를 외면하였다.

 

[당신도 절 마녀에게 팔 건가요?]

 

눈앞이 까매진다. 베스는 쉰 목으로 울음을 내었다. 트라나에게 그 소리는 낯설었고 두려움을 주는 울음이었다. 트라나는 죽음을 싫어했다. 베스의 빨간 피가 눈보라에 덮인 오두막의 한 가족들에게로 번진다.

 

베스가 눈을 감고 트라나는 멀리 달아난다.

 

 

 

 

올그는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마을들로 직접 울음을 울었다. 마을의 전사들이 올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검은 물소는 그들의 손을 하나, 하나 맞잡아주었다.

 

[정말 끝이로군.]

 

인간들의 둥지에서 선봉으로 수인들을 이끈 나르가 올그에게 손을 내밀고 서로 맞잡는다. 훌터는 혼자 중얼거렸다.

 

[자네 아들이 선택을 했네.]

[이젠 돌이킬 수 없겠어.]

 

포프의 문양이 새롭게 그려졌다. 그곳엔 수인과 그들의 세계만이 존재할 것이다. 아주 가끔의 제물들과 함께. 전쟁에서 길을 이끈 토끼, 벨바가 올그에게로 가 감사인사를 남기었다. 훌터는 팔짱을 낀 채로 모두 지켜보았다.

 

커다란 전쟁과 학살극의 끝에서 마법사, 벨바는 지루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훌터는 그녀의 얼굴을 마법사로서 느끼는 여유로움이라 생각하였다.

 

[제 얼굴에서 좀 티가 나죠?]

 

[마법사님!]

 

수인들과 섞여 있는 벨바와 똑같은 모습을 한 그녀의 몸이 훌터의 옆으로 선다.

 

[어떻게?]

 

벨바가 고개를 기울이며 태연하게 춤을 추었다 당황한 표정의 훌터에게 벨바는 그의 귀로 속삭였다.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벨바의 하얀 털들이 윤이 나게 빛이 난다. 조각으로 기워놓은 아슬아슬한 옷 사이로 속살들이 비친다. 훌터는 눈을 돌리며 외쳤다.

 

[물론입니다!]

 

벨바가 속삭인다.

 

[그럼 하나 부탁하죠.]

 

빙글 돌고 도는 향기, 적갈색의 눈과 입가로의 미소.

 

[베스, 그녀를 도와요.]

 

[그 여자 말입니까?]

 

[네, 찾아서 그녀가 가고자 하는 길로 이끌어줘요.]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벨바가 깡충깡충 뜀박질을 뛰며 멀어진다. 훌터의 눈앞으로 손가락을 입에 대고서 눈 한쪽을 감는다. 그녀의 분신이 사라지고 수인들 사이에서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벨바가, 훌터가 있는 곳을 쳐다보고 있다.

 

쉿.

 

벨바는 무표정한 얼굴로 비밀을 당부하며 수인들 사이로 모습을 감춘다.

 

 

 

 베스가 눈을 뜬다. 밧줄이 어깨에 묶여있고 다리가 흙길 위로 질질 끌려가고 있다. 베스가 고개를 돌린다. 흰색의 머리칼이 힘에 겨운 신음을 내며 베스의 몸을 등에 지고 있었다. 반쯤 땅으로 끌려다니며 베스는 머리를 짚었다.

 

흰색 머리칼의 트라나가 풀썩 주저앉는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가 눈을 뜬 베스를 바라본다.

 

[약속하나 해요.]

 

베스는 눈을 감은 채 상처를 매만져보았다. 잎사귀와 짚들이 상처 부위에 덧대어져 묶여 있었다. 천 자락이 손에 잡힌다.

 

[다 나았다고 공격하지 않기로.]

 

베스가 고개만 돌려 그녀를 본다. 트라나의 옷소매 부분이 모두 뜯어져 있다. 다시 천 자락을 매만진다.

 

[약속해줄 거죠?]

 

베스가 눈을 감는다. 대답 없는 커다란 회색 늑대를 트라나는 어깨에 짊어 메고서 다시 길을 걸었다. 작은 몸집의 여자는 얼마 못가 다시 주저앉았다. 베스는 팔을 뻗어 땅을 짚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금방 넘어진다. 몸으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꼼짝없이 누워있게 된 베스는 강제로 다리를 구부려 일어나려 하였다. 상처가 벌어져 잎사귀 안으로 핏물이 흘렀다. 베스가 다시 쓰러진다.

 

[걱정 말아요, 마을까지는 보내 줄 테니까.]

 

트라나는 수인들이 일구는 밭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작물을 덮는 커다란 천을 훔쳐 몸 전체를 감쌌다. 어설픈 변장이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구원자가 습격당했고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베스를 보며 트라나는 기도하였다.

 

[당신도 절 도와주세요.]

 

베스와 트라나는 수인들의 마을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해가 저문다. 여관의 구석에서 트라나와 베스는 말없이 따뜻한 음료를 홀짝였다. 주위를 흘깃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해가 안 돼요.]

 

트라나는 온 몸을 두른 작업용 천을 살짝 내려 베스를 바라보았다.

 

[왜 저를 구해주신건가요?]

 

베스는 의자에 기대어 숨을 밭게 뱉고 있었다. 베스가 트라나를 보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발톱을 꺼내어 탁자 위로 글씨를 새겼다.

 

이나.

 

[이나를 아세요?]

 

베스가 숨을 내쉬며 눈을 감는다. 핏방울이 아래로 흘러 바닥으로 고이고 있다. 트라나는 상처가 난 베스의 허리를 손 대보았다. 따뜻한 핏물이 잎사귀 아래로 크게 번진다. 베스의 팔이 아래로 축 늘어진다.

 

[괜찮아요?]

 

트라나가 베스를 흔들며 속삭인다.

 

[여봐, 뭐야?]

 

옆 탁자에 앉아 있던 수인 하나가 트라나가 있는 곳으로 다가온다. 트라나는 팔을 천 안으로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수인은 베스의 의자 아래로 고인 핏물들을 보며 그녀를 흔들었다.

 

[젠장, 심각한 것 같은데.]

[의사라도 불러야겠어.]

 

트라나의 몸이 더욱 움츠러든다. 여관에 있는 수인들을 모으려는 그를 베스가 잡는다. 수인이 베스를 돌아본다. 그는 베스를 아는 눈치였다.

 

[포프의 생존자.]

 

여관의 모든 이들이 베스에게로 눈을 돌린다. 수인들이 일어나 그녀를 둘러싼다. 그녀를 두고 수군거리는 말들. 그녀는 포프의 잊혀진 전사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인간 마법사와 같이 일하는 늑대새끼.]

 

뒤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벨바께서 말씀하셨어!]

[저 늑대가 인간들을 빼돌렸다고!]

 

[인간과 붙어먹어 우리 마을을 멸망시킬 거야!]

 

[우리가 받은 사명을 져버린 늑대새끼!]

 

베스가 일어나 트라나를 가린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수인들을 똑바로 바라본다. 가장 처음 그녀를 알아본 수인이 그녀의 얼굴에 대고 말하였다.

 

[올그가 인간들을 사냥한다고 하였지.]

[포프의 자식들과 함께.]

 

베스가 발톱을 꺼낸다. 그녀가 자신의 앞으로 선 수인의 목덜미에 발톱을 들이밀었다. 뒷걸음을 치는 그를 따라 수인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었다. 그녀에게로 검과 창들이 겨누어진다. 트라나는 구석으로 천을 감싸 쥐어 눈을 감았다. 그들이 모른 채 지나가주기를 바랐다.

 

하마 수인이 장검을 휘둘렀고 베스가 발톱으로 검을 막는다. 철퇴를 휘두르고 검과 발톱이 부딪힌다. 베스는 잎사귀로 번지는 상처를 안고서 여관에 있는 모든 수인들과 싸웠다. 탁자가 부서지고 의자가 날아간다.

 

검이 박힌 시체가 쓰러지고 발톱으로 부서진 갑옷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진다. 트라나가 공중으로 뜬다. 베스가 그녀를 안고서 여관을 나선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걸음의 뒤로 여관은 수많은 수인들의 시체로 비릿한 피 냄새를 풍겼다. 곧 여관을 본 주민들이 종을 울렸고 베스는 신음을 내며 다시 내달렸다. 베스의 회색 갈기가 붉게 물들어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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