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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세이브 어쓰

- 2020년생을 위한 스마트 혁명 가이드

 

 

 

세이프티존 화곡 15구역. 까치산터널을 지나는 댕이의 눈으로 한 무더기의 핏빛이 들어왔다.

 

야당은 쓰레기 여당은 버러지

50년 수구 양당정치 박살 내자

소년소녀 진보정권 수립

 

시뻘건 낙서였다. 선득한 색깔에 네임펜 두께의 앙증맞은 글씨체. 댕이는 따릉이에서 폴짝 뛰어 내려 검지로 ‘박살’이라고 적힌 부분을 쓱쓱 문질러 보았다. 색이 묻어나지 않았다. 50년 수구 양당정치라, 2030년쯤에 쓴 건가? 요즘 20세기 스타일의 뉴트로 그래피티가 유행이라던데. 소년소녀 진보정권은 또 뭐야? 괜한 호기심이 발동한 댕이는 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따릉이를 끌면서 터널 벽을 훑어 나아갔다.

세이프티존 화곡 13구역.

 

로봇생산! 노동해방! 직접민주주의!

 

마찬가지의 앙증맞고 짙붏은 낙서였다. 그런데 이게 당최 뭔 말인지. 댕이는 낙서의 각도에 맞게 폰을 기울여서 촬영 버튼을 또깍 누른 다음 안장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세이프티존 화곡 1구역. 되도는 핏빛의 자극이 댕이의 따릉이를 멈춰 세웠다.

 

연락바람 대갈털린소년단한테 손절당한 기념으로 몸 파는 뇬 010-3***-6778

 

역시나 같은 필치의 낙서. 댕이는 반사적으로 폰을 들었다.

 

또깍.

 

촬영 시간은 ‘오늘 19시21분’이었다.

 

*

 

까치산터널을 빠져나온 따릉이는 가양나들목을 지나 월드컵대교 위를 내달렸다. 다리 중간쯤에 다다른 댕이는 여느 때처럼 따릉이를 세우고 비상난간을 잡은 채 다리 밑으로 목을 길게 뺐다. 한강 줄기를 따라 부는 아찔한 서풍에 일렁이는 금빛 물결. 돌아보니 역시나 강 건너편에서 인공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댕이는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9시55분

 

어김없는 출격시간. 매일 이 시간이면 수천 대의 군집드론이 밤하늘로 날아올라 거대한 구 모양을 이루어 한강 서쪽을 밝힌다. 동쪽 광나루에 이어 두 번째 인공달이다. 물론 인공달 없이도 서울의 밤은 충분히 밝았다. 다만 광고판이 포화상태였다. 건물, 버스, 육교에 아파트 벽면까지, 서울에서 광고판으로 쓸 만한 공간은 모두 동이 나 버렸다. 그나마 광고가 붙지 않은 곳이라면 하늘과 한강뿐. 그런데 강물 광고로 효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다. 일단 물결의 일렁임으로 광고 메시지의 가독성이 현저히 떨어졌고, 광고의 노출이 한강변에 국한된다는 점 또한 문제였다. 반면에 하늘은 어떠한가.

 

“하늘은 누구나 고개를 슬쩍 드는 것만으로도 광고 노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캔버스잖아요. 저와 함께 최첨단 광고 시장을 선도하는 거예요.”

 

주식회사 ‘서울야경’의 양 대표는 매일 밤 난지한강공원 야구장 마운드에 우뚝 서서 댕이를 비롯한 20여 명의 드론충전사들을 빙 둘러놓고 열변을 토했다. 동갑내기 양 대표가 그럴 때마다 댕이는 목 근육에 힘을 준 상태로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였다. 아무튼 맞는 말이잖아. 하늘이야말로 최적의 광고판이지. 게다가 사람들이 밤하늘을 더 자주 올려다 보면서 세상이 한결 여유로워진 것도 사실이니까. 그렇게 수긍하고 나면 마치 댕이 자신의 전망까지 밝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비록 드론충전사라는 게 아직까지는 임시직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첫 직장 보다는 낫겠지.

 

*

 

댕이의 첫 직장은 신기루처럼 푸시시 사라졌다. 인천항의 한 물류센터 배송기사 일이었는데, 계절마다 신종 전염병이 창궐할 때면 어김없이 바이러스 배달 논란이 일었다. 결국 물류센터의 한국지사의 모기업의 지주사의 글로벌 사모펀드의 신탁운용사의 이사회라는 곳에서 결단을 내렸다.

 

서울 및 수도권역에서의 전격적인 언택트 무인배송 시스템 도입.

 

보행로봇과 드론을 실은 자율주행 버스가 권역별로 순회한다. 모선인 버스에서 내린 2족·4족 보행로봇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문 앞까지 배송물을 나른다. 하늘에서는 음향 메타물질(acoustic metamaterial) 소재의 로터(rotor, 회전날개)를 단 무소음 드론이 루프탑, 발코니, 베란다의 수취함에 정확하게 물건을 내려놓는다. 배송은 주문 후 10분 안에, 그것도 24시간 내내 주기적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수행된다. 거짓말 좀 보태서 거의 ‘텔레포트(teleport, 순간이동) 배송’ 수준의 완벽한 언택트 시스템. 한낱 잠재적 전염병 매개체에 불과한 인간 따위가 낄 자리는 없었다. 해고 통지를 받은 댕이는 텅 빈 당직실 이층 침대 아래 칸에 누워서 멍하니 위 칸 바닥을 올려다보았다.

 

배송 마감까지 7분… 5분… 1분…

 

근 1년간 주야장천 댕이를 괴롭히던 독촉 메시지가 떠올라 습관적으로 폰을 열었다.

 

 

하지만 폰에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불현듯 집배노조 지부장이던 배송팀장이 당직실을 떠나면서 한 말이 떠올랐다.

 

“댕이 씨, 이제 그 어떤 생산자나 소비자도 우리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아,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쓸모없는 노동은 더 이상 착취의 대상이 아냐, 그냥 폐기의 대상이지. 생산은 이제 인간이 아닌 로봇의 일이야.”

 

댕이는 폰을 배 위에다 올려놓고 꺼슬꺼슬한 침대 바닥에 손톱으로 ‘로봇’이라는 글자를 긁어 파면서 다짐했다.

 

차라리 로봇 밑에서 일하자.

 

인간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기계에게 지시하는 인간과 기계로부터 지시를 받는 인간. 어차피 기계 밑에서 일할 거라면 그래도 좀 더 전망이 밝은 기계 밑에서 일하는 편이 낫겠지. 그나마 드론충전사는 인간의 지시를 받는 기계를 돌보는 ‘인간의 일’이잖아. 그냥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편하지, 라고.

 

*

 

댕이는 고개를 푸드덕 저어 찝찌름한 바닷내가 밴 옛 기억을 떨쳤다. 폰으로 ‘오늘의 드론 광고 편성표’가 전송되었다.

 

21:00~21:30 : SEOUL SAVE EARTH

21:30~06:00 : 인공달 - 기본 포메이션

 

A~Z까지 26개조, 조별로 200대, 총 5,200대의 드론이 야구장 두 개를 가득 매웠다. 댕이가 맡은 X조 드론 200대는 제1야구장 외야 한편 충전도크(dock) 위에서 빨간 불을 끔뻑이며 잠들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하늘을 쌩쌩 날아다니며 흡사 아이돌처럼 칼군무를 추던 씽씽이들이 저렇게 시체처럼 푹 꺼진 모습이라니. 댕이는 안쓰러운 마음으로 오와 열을 지나며 200대의 드론들을 꼼꼼히 살폈다, 충전도크에서 삐져 나온 아이들과 GPS 수신위치가 틀어진 아이들을 바로 잡아주고, 흙잔디를 뒤집어 쓴 아이들의 로터를 털어 주면서, 마치 인큐베이터 안의 신생아를 돌보는 간호사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여기저기서 삐삐 소리와 함께 빨간색 충전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20시 55분 20초. 댕이는 티셔츠 립에 건 핀 마이크로 짧게 보고한다.

 

“X조 충전 완료.”

 

댕이의 인이어로 다른 조의 보고가 연이어 들린다.

 

“Y조 충전 완료. Z조 충전 완료.”

 

20시 59분 30초. 지상관제실로부터 건조한 교신이 전달된다.

 

올 드론스 아 레디 포 테이크오프(All drones are ready for takeoff, 모든 드론 이륙 준비 완료).

 

이윽고 카운트다운.

 

10. 9. 8. 7. 6. 5. 4. 3. 2. 1. 댄스 스타트(Dane Start)

 

깨어난 2,600대의 드론이 일제히 ‘휘윙’, 하는 바람을 일으키며 25미터의 스타트 포메이션 고도까지 떠 오른다. 거기서부터는 개별 경로 비행이다. 드론들은 각기 각색의 빛을 발산하며 각각의 경로를 따라 혼불처럼 둥실둥실 떠오른다.

표고 200미터에 이르자 드론들은 양갈래 편대로 나뉘어 DNA 이중나선 모양으로 꿈틀꿈틀 휘돌아 승천한다. 그러면 상암의 밤하늘과 한강이 오방빛으로 일렁인다.

표고 500미터. DNA는 씨줄과 날줄에서 거대한 큐브의 형태로 키네틱아트와 옵아트를 선보이며 감각을 교란한다.

표고 700미터. 착란하는 빛의 틈새로부터 익숙한 문장이 나타난다.

 

SEOUL SAVE EARTH

 

2,600대의 드론이 알파벳 윤곽을 궤도로 서서히 비행한다. 그 사이에 제2야구장에서 충전 중이던 나머지 2,600대가 불을 끄고 몰래 1킬로미터 상공까지 올라가서 일약 거대한 달로 등장한다.

애초에 인공달의 고도는 표고 200미터로, 기껏해야 북으로는 연신내, 남으로는 부천 북쪽까지만 간신히 보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드론의 비행고도가 표고 1킬로미터까지로 허용되면서 ‘하늘 광고’의 타깃은 강서, 은평, 마포, 양천, 영등포 등지를 아울러 300만 명에 육박하게 된 것이다.

 

“비행 고도가 100미터 상승할 때 마다 광고 타깃이 30만 명 늘어나죠. 다들 아시죠? 우리의 내년 목표가 비행 고도 2킬로미터라는 걸.”

 

마운드 위의 양 대표는 충전사들을 향해 안광을 번뜩이며 손바닥을 힘차게 마주쳤다. 충전사들 모두가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댕이는 건성으로 손바닥을 토닥이면서 저 멀리 인공달을 바라보았다.

 

2킬로미터라… 지금 저 달보다 두 배 더 높이 뜬 달이라니…

 

끝 간 데 없이 아득한 밤의 고도를 눈으로 그리자니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히 그렇게 될 터였다. 양 대표는 서울시 드론 비행 고도 규제 해제의 주역이지 않은가. 본래 여기 난지 야구장은 김포공항 관제권이면서 동시에 국회의사당 인근이라 이중으로 규제를 하는 구역이었다. 양 대표는 그 철통같은 비행금지구역을 해제시키고, 한강 상공 1킬로미터의 영공을 향후 백 년 동안 무상으로 임대받고, 상설 야간비행 구역 지정까지 성사시켜서, 지금의 하늘 광고 사업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서울은 만능백신 시스템을 갖춘 자동 방역 도시입니다. 마스크 없이 이천만 명이 지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마스크리스시티(Maskless City)죠. 21세기 청정 메갈로폴리스에 걸맞은 혁신적인 나이트뷰가 필요합니다. 바로 서울 하늘에 인공달을 띄우는 겁니다.”

 

마스크리스시티 서울. 서울 세이브 어쓰. 양 대표가 생각한 광고 카피는 그대로 서울의 캐치프레이즈가 되었다. 스무 살 풋내기에 불과한 양 대표가 그럴 수 있었던 건 그녀 집안의 힘이 다분했다. 여야를 막론한 양 대표 일가의 인맥이야말로 이 드론 광고 사업의 관건이라는 걸 양 대표도 숨기지 않았다.

 

“기술? 당연히 중요하죠. 드론이 얼마나 빨리·높이·멀리 날고, 배터리는 얼마나 오래 가고, 자율비행 알고리즘은 얼마나 정교한가. 그런데 그런 건 기본이에요. 정작 중요한 건 실행력이죠. 정부를 움직일 인맥. 당연히 부모 인맥을 실력이라고 할 수는 없겠죠. 공정한 경쟁도 아니고요. 그런데 어쩌면 경쟁 그 자체도 문제 아닐까요? 경쟁에 쏟아붓는 그 엄청난 돈과 시간들. 너무 쓸데없지 않나요?”

 

양 대표의 이런 뻔뻔한 태도가 오히려 댕이를 기묘한 기생의 심경으로 이끌었다. 저 정도 힘의 크기라면 나 하나쯤은 넉넉히 품어주겠거니, 나도 저들처럼 백신 걱정없이 서울에서 마음껏 숨 쉬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안온한 느낌. 물론 그저 그런 기분만으로 현실이 바뀔리가 없다는 걸 잘 안다. 저토록 거만한 태도야말로 만능백신 접종권이 보장된 소위 ‘주주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던가.

양 대표 일가는 평생토록 만능백신을 접종받을 수 있다. 양 대표의 소위 786 할아버지가 386 시절에 취득하고, 586 시절에는 고위 공직 자리마저 뿌리치면서까지 지켜내더니만, 결국 686 시절에서야 프리미엄 재건축으로 재탄생시킨 불굴의 알토란 강남 아파트 3채를 담보로 말이다. 양 대표는 자신의 786 할아버지가 당시의 좌파 경제학을 우파적으로 실천한 행동파였기에 이런 성과가 가능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인간 노동의 가치는 떨어지는데 자산 가치는 상승하는 추세. 이야말로 저성장 뉴노멀의 핵심이에요. 피케티(Thomas Piketty)의 실증론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고요. r>g, r은 g보다 커요.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계속 앞서기 때문에 결국 상속자산과 노동임금의 격차는 벌어질 수밖에 없어요. 소처럼 일 해봤자 부동산 같은 불로소득원을 가진 이들을 넘어설 수 없다는 걸 피케티가 데이터로 인증한 겁니다. 피케티는 대안으로 전 세계적인 부유세 동맹 같은 걸 제시했지만, 말 그대로 당위론에 지나지 않았어요. 뜬구름 같은 소리였죠. 행동파였던 할아버지는 피케티의 실증론만을 충실히 따랐어요. 아이들 사교육에 들일 돈으로 차라리 부동산이나 주식을 사서 물려주자. 피케티의 이론대로라면 노동투자보다는 자산투자에 집중하는 게 훨씬 이득일 테니까요. 사교육비를 들여서 자식을 비싼 노동자로 키우느니 건물주나 대주주로 키우는 게 더 낫겠다고 판단하신 거예요. 실생활에서는 피케티의 실증론을 취하고, 피케티의 당위론은 정치적인 명분과 이상 정도로만 활용하신 거죠. 그런 할아버지를 당시에는 ‘강남좌파’라고 했다죠 아마.”

 

피케티고 나발이고 그건 양 대표 같은 주주인들 얘기였다. 댕이처럼 서울에 부동산 담보가 없는 사람들, 그러니까 “배급민”들은 하릴없이 일을 하는 수밖에 없다. 배급민들에게는 서울에서 일하는 동안만 일시적인 서울 거주권과 만능백신 접종권이 주어지니까. 중세의 지주들은 농노를 부려먹기 위해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하는 대신 종신 고용과 무상 주택을 보장했다. 마찬가지였다. 만능백신 시대의 서울 역시 노동력과 거주권을 적절히 관리했다. 부리는 노예의 밥그릇은 쇠사슬 반경 안에 놔둬야 하는 법이니까.

 

*

 

만능백신은 일종의 ‘선행개발(先行開發, advanced development)’이다. 미래에 발생할 신·변종의 바이러스를 예측해서, 그 바이러스를 예방할 백신을 미리 제조하는 기법이다. 다국적 기업 세별바이오는 자체 개발한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생성적 대립 신경망) 기반의 바이러스 진화 예측 알고리즘과 신물질 생성기로 만능백신 시스템을 완성하였다. 매개체인 서울 거주민들의 생태·생체데이터(동선, 의료 기록, 인종, 성별, 나이, 소비 양태 등)와 환경 데이터(권역별 기후, 대기, 인구밀도 등)를 세포 수준의 모사(模寫, simulation)세계에 대입한다. 그러면 GAN 알고리즘을 학습한 모사세계의 생성자들이 경쟁적으로 가상의 바이러스와 가상의 백신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거듭된 모사와 경쟁을 거쳐 다음 달에 유행할 가능성이 높은 서너 개의 ‘이달의 바이러스와 백신’을 채택하는 방식이다. 만능백신 개발에 성공한 세별바이오의 CEO는 이렇게 말했다.

 

“지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온난화로 영구 동토층이 녹으면서 수십 만 종의 고대 바이러스가 풀려 나오고 만 것입니다. 그로부터 말미암은 수억의 신·변종 바이러스가 도시를 덮치면 인류는 속절없이 절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시와 문명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위기 또한 극복할 것입니다. 도시는 언제나 전염병과 전쟁을 치르면서 발전했으니까요. 인류 최초의 문명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소금을 구하기 쉽고 전염병이 번지기 어려운 건조기후대에서 발생했습니다. 19세기 파리는 상·하수도를 정비해서 콜레라나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전염병을 이겨냄으로써 비로소 수백만 명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풍요와 낭만이 넘치던 이른바 벨 에포크 시대였죠. 급기야 20세기 인류는 세계 곳곳에 천만 명이 모여 살아도 안전한 메갈로폴리스를 구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의학기술과 백신의 발전 덕택이었죠. 마찬가지로, 소금과 토목, 그리고 의학에 이어서 21세기의 서울을 전염병으로부터 지켜주는 건 이제 주주인 여러분의 생체데이터와 인공지능입니다. 우리 세별바이오의 만능백신이 서울의 소금이 되겠습니다.”

 

매달 업데이트되는 최신 백신은 구독자인 서울의 주주인과 배급민에게 접종된다. 백신에 함유된 나노봇들이 백신 구독자들의 체내 건강 상태를 수집해서 세별바이오의 시스템으로 전송하면, 만능백신 합성 알고리즘의 생성자들이 가명(假名) 처리된 접종자들의 생태·생체데이터들을 학습해서, 수십 년 치의 개인별·집단별 모의 임상 테스트를 거친 다음, 다음 달 백신 업데이트에 반영한다.

문제는 만능백신의 구독료다. 만능백신은 수 년에서 수십 년 걸리던 백신 개발을 단 며칠 만에 끝낼 수 있다. 게다가 백신의 공급 기간도 영원하다. 무엇보다 만능백신 없이는 도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다. 세별바이오는 만능백신에 가격 따위를 매길 수는 없으니 집주인들이 만능백신의 주주가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집주인들이 세별바이오에 주택과 생체데이터를 담보물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만능백신을 무료로 접종받게 된 것이다.

집이 없다면 댕이처럼 서울에서 일을 하는 배급민이 되어야 한다. 서울에서 살기 위해서든, 만능백신을 접종 받기 위해서든, 어쨌거나 배급민은 일을 해야만 한다. 배급민들에게 일을 잃는다는 건 곧 접종권과 거주권 모두를 잃고 서울 밖으로 추방되어 정글의 야생인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했다. 순식간에 ‘면역인간종’에서 ‘매개인간종’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

 

익숙한 시트러스 향. 댕이의 눈앞에 양 대표가 홀로 서 있었다. 킬힐을 신고 마운드 위에 우뚝 선 채로 자신이 밤하늘에 아로새긴 ‘서울 세이브 어쓰’라는 문구에 한껏 도취한 모습이었다.

 

“아, 완벽해. 서울은 정말 아름답고 안전한 도시야. 서울 시민들은 미래의 병에 대항하는 면역력까지 장착한 완벽한 트랜스휴먼이고.”

 

댕이는 양 대표의 혼잣말을 받아서 시큰둥하게 답했다.

 

“맞아요,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결국 서울은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가 되었고요.”

 

양 대표는 싱긋 웃으며 댕이를 마운드 위로 잡아끌었다. 힐 높이 때문에 같은 높이로 올라섰음에도 댕이는 양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양 대표가 보란 듯이 밤하늘을 가리켰다.

 

“조금만 기다려요. 댕이 씨한테도 금방 집이 생길거야. 서울은 댕이 씨의 도시니까.”

 

5,000여 대의 드론이 발산하는 오방빛을 흡수한 양 대표의 귀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빛과 바람이 오롯이 그녀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일상의 근심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순수하게 아름다움을 탐미하는 천진하고도 도도한 귀족의 자태였다. 댕이는 그저 떨떠름한 미소를 짓다가 양 대표 몰래 시선을 떨궜다. 야구장 곳곳에 방전된 드론들이 벚꽃처럼 나부시 오르내리고 있었다. 쇼를 마치고 충전도크 위에서 쌔근쌔근 잠든 드론들이 힘겨워 보였다. 댕이는 마음속에다 가만히 답했다.

 

아니요. 서울은 주주인들의 도시죠. 대표님의 도시. 대표님은 분명히 고도 2킬로미터를 성사시키시겠죠. 이 불쌍한 녀석들을 어떻게든 하늘 끝까지 올려보내실 테죠.

 

때마침 친구 J에게서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그제 봤던 소울트레인에서 한잔 어떠냐? 오늘은 내가 쏘마.”

 

댕이는 한숨을 내쉬며 답을 날렸다.

 

“그러자. 11시까지.”

 

쇼를 마친 댕이는 부리나케 따릉이를 달렸다. 한강을 건너 다시 까치산터널을 지나는데 아까 본 빨갛고 앙증맞은 낙서들이 슥슥 지나갔다.

 

1구역. 대갈털린소년단한테…13구역. 로봇생산! 노동해방! 직접민주주의!… 15구역. 야당은 쓰레기 여당은 버러지… 그리고 15구역 비상벨 밑에 또 하나의 시뻘건 낙서가 보였다.

 

CORONA SAVE EARTH

 

응? 아까도 이런 게 있었나.

 

알파벳이지만 바로 위 ‘소년소녀 진보정권 수립’과 어딘가 엇비슷한 필체였다. 댕이는 일단 사진을 찍어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터널을 빠져나왔다.

소울트레인에 도착한 댕이. 그런데 J가 보이지 않는다. 11시 22분. 조금 늦었다. 뭐야, 아직도 안 온 건가? 아니면 어디 다른 데로 갔나? 댕이는 복도로 나와 J에게 전화를 걸었다.

 

따르르릉

“네?”

 

낯선 여자아이의 목소리. 순간 댕이는 아, 죄송합니다. 잘못 걸었나 봐요,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어? 그런데 연락처가…

 

까치산1921

 

처음 보는 연락처였다.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데 통화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는 역시 까치산1921. 엉겁결에 전화를 받자 전화가 뚝 끊겨 버렸다. 댕이는 주저주저하다 결심한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댕이 눈앞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안에서 한 여자아이가 뺨에다 폰을 댄 채 물끄러미 댕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가 입을 열자 댕이 폰으로 같은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댕이 씨?”

“… 어…”

 

입을 떼려는 데 뒷덜미에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느껴졌다. 순간 상체가 자석에 끌린 듯 뒤로 홱 젖혀졌다. 댕이는 끔찍한 충격에 아연하여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짐짝처럼 엘리베이터로 밀어 넣는다는 걸 가까스로 느낄 뿐이었다.

 

*

 

매캐한 쑥불 향이 댕이를 깨웠다. 어슴푸레한 하늘 위로 깃털 같은 무언가가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폴폴 흩날리고 있었다. 드론인가?

 

팡!

얍!

 

드론이 아니다. 댕이 머리 위로 셔틀콕이 왔다갔다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 깼다!”

 

반바지 차림의 여자아이가 배드민턴 라켓으로 댕이를 가리켰다. 엘리베이터에서의 바로 그 목소리였다.

 

“풀어줄까?”

 

돌아보니 웬 남자아이가 셔틀콕을 줍고 있었다. 댕이가 뭐지? 하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라? 양손이 네트에 묶여있는 게 아닌가.

 

“아니, 아직은. 협상이 먼저야.”

 

여자아이는 댕이가 묶인 네트 너머로 단호하게 대꾸했다. 협상? 이게 뭔 생게망게한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저것들은 왜 나를 여기다 묶어놓고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거야. 짜증이 난 댕이는 양손으로 그물을 거머쥐고 힘껏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양손의 결박이 북, 하고 그물째로 튿어졌다

 

“어, 풀렸다!”

 

눈이 휘둥그레진 여자아이와 댕이가 서로를 멀뚱히 마주봤다. 댕이 뒤에서 남자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잡아!”

 

퍼뜩 제정신을 차린 여자아이가 주춤주춤 댕이에게 다가갔다. 댕이는 허둥지둥 네트 건너편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반대편 코트의 남자아이가 골키퍼처럼 양팔을 쫙 벌리고 댕이 앞을 막아섰다. 뒤로 돌자 여자아이도 골키퍼 자세를 취하며 라켓을 엑스자로 슝슝 휘둘러 댔다. 댕이가 비실거리며 코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아뿔싸. 사방이 벽이었다. 이런 제길, 입구가 어디야?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소리쳤다.

 

“몰아!”

 

두 아이는 라켓을 휘휘 저어 포위망을 좁혀가며 댕이를 한쪽 모서리로 몰아세웠다. 모서리 끄트머리에는 모깃볼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모깃불께로 몰린 댕이는 안절부절하며 콜록거리다 그만 꽥,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씨발, 그만!”

 

두 아이는 흠칫 놀라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댕이는 기세를 몰아 대들었다.

 

“아니, 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 대체 왜 저를 잡으려는 건데요?”

 

이에 질세라 여자아이가 눈을 부릅뜨고 받아쳤다.

 

“뭐래, 그쪽이 먼저 도망간 거잖아요.”

 

어, 맞는 말이다.

 

“그쵸, 제가 도망을 갔죠. 그런데…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한테 막 그러는 건 아니죠.”

 

여자아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고는 오른 손날로 왼 손바닥을 탁탁치며 맞대꾸를 했다.

 

“뭐래, 우리가 뭘 어쨌는데요? 그쪽을 패길 했어요. 뭐 아니면 쌍욕을 했어요.”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어쨌든! 그만해요. 저는 그만 여기서 나갈테니까.”

“뭐 그러시든가.”

 

댕이는 에잇, 하며 소심한 아기발차기로 모깃불을 툭 차서 흐트러뜨렸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코트 건너편에 녹슨 철문이 보였다. 댕이는 애써 의연한 미소를 지으며 잰걸음으로 후다닥 달려가 문고리를 홱 당겼다.

 

턱.

 

이런, 문고리가 돌지 않는다.

 

틱. 턱. 틱.

 

댕이는 난감한 표정으로 코트 건너편을 보았다. 아이들은 지들끼리 피식거리며 흩어진 모깃불을 발로 그러모으고 있었다. 댕이 입에서 애처로운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저기요… 여기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여자아이는 킬킬거리며 담배 한 개비를 모깃불 더미에 폭 쑤셔넣었다.

 

“그 문 원래 안 열려요. 여기 배드민턴장 문 닫은지 한참 됐어요. 몰랐어요? 여기 재개발 구역이잖아.”

 

그러고 보니 코트 여기저기에 잡초들이 웃자라있었다. 여자아이는 담배를 꼬나물고 머리를 묶더니 댕이를 향해 까닥까닥 손짓을 했다.

 

“일단 얘기 좀 들어보시지. 해치지 않아요.”

 

남자아이는 진흙바닥에 처박힌 나무 의자 하나를 쑤욱 뽑아서 폴대 옆에다 툭 던져 놓고는 흙을 툭툭 털며 댕이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냉큼 앉으라는 고갯짓을 했다. 댕이는 조르르 달려와 척 하니 의자에 앉아 두 손을 가지런히 무릎에 모았다.

 

“준비됐습니다. 말씀하시죠.”

 

*

 

“그쪽은 납치된 게 아니라 합격한 거예요, 우리 조직원으로.”

 

합격? 조직원? 댕이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난 루니, 얜 미니멈. 우린 ‘마룬 인터내셔널’이라는 국제혁명조직의 일원이에요.”

 

루니는 피던 담배로 자신의 왼쪽 종아리를 가리켰다. 꽃과 나비, 그리고 레이스 문양의 타이포그래피로 MAROON이라고 새겨진 문신이 보였다.

 

“마룬 인터내셔널의 서울지부 이름은 ‘코로나 세이브 어쓰’예요. 저기 저 서울 세이브 어쓰 문구를 약간 비틀었죠.”

 

루니의 손가락이 인공달을 가리켰다. 광고 문장의 각도로 보아 댕이가 위치한 이곳이 한강 서쪽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루니의 동공이 쪼그라들면서 입이 헤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먼산을 바라보는 듯한 아련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기계적으로 말을 뱉었다.

 

“저하고 미니멈이 태어날 무렵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난리가 난 적이 있었죠. 그게 우리가 태어나기 직전인 2019년 가을부터였어요. 인간 입장에서야 코로나가 바이러스였지만, 지구 입장에서는 오히려 인간이 바이러스고 코로나가 치료제 역할을 했다는 자각도 있었죠. ‘코로나 세이브 어쓰’는 그 깨달음을 간직한 말이에요.”

 

뇌에 장착한 통신 나노봇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클라우드 브레이닝(cloud braining)’이었다. 루니는 관자놀이를 살짝 눌러 접속을 차단했다.

 

“아무튼 우린 2020년생이에요. 댕이 씨도 그렇죠?”

 

댕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마룬은 모두 코로나가 창궐한 2019년 이후에 태어났어요. 우리의 목표는 혁명이에요.”

 

혁명? 댕이는 그 단어의 아득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현실감을 회복하고자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축 늘어진 그물에 땅은 군데군데 패여서 잡초로 수북한 배드민턴장에서 라켓을 든 동갑내기 아이 둘이 반바지 차림으로 모깃불을 피우며 혁명을 말하고 있다.

 

“혁명의 목적은 리셋이에요. 더 이상 개선이 불가능한 이 20:80의 세습 불평등 계급 구조와 한계에 다다른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완전히 붕괴시켜서 직접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거죠.”

“소년소녀 진보정권 수립!”

 

잠자코 있던 미니멈이 주먹을 불끈 쥐고 느닷없이 구호를 외쳤다. 루니는 셔틀콕을 통통 튕기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마룬은 직접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걸 노동으로 봐요. 사람들은 자신만의 ‘정치의식’을 키울 시간이 없어요. 일을 해야 하니까요. 결국 정당·정치인이 짠 정치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죠. 일하는 시간이 개개인의 정치의식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여유’야말로 문자나 생산수단보다 더 근본적인 기득권이에요. 그래서 진정한 노동해방, 즉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한 거예요. 노동은 결코 숭고하지 않아요. 빠져나와야 할 늪이라고요. 지배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 거예요.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냐고요? 소는 로봇이 키웁니다. 이미 생산의 90%가 로봇으로 대체 되었잖아요. 그런데도 정치인들은 일자리를 문제 삼고 있죠. 웃기죠 않아요? 일할 필요가 없는데 왜 억지로 일을 하자고 아둥바둥일까요. 인간은 이제 소비와 정치만 해도 되는 세상인데 그 노동해방의 자유를 20-30%의 주주인들만 누리고 있잖아요. 한번 생각해 봐요. 댕이 씨가 하는 일은 꼭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일까요?”

 

댕이는 머뭇머뭇 입술을 달싹였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충전사 한 명이 드론 50대를 돌봤지만 지금은 한 명이 200대를 돌본다. 드론의 자동 이·착륙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질 테고, 그러면 충전사 한 명이 돌보는 드론 수도 500대, 1,000대로 늘어날 게 뻔하다. 댕이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자신이 일자리는 파트타임일 수밖에 없다는 걸. 서울에 집을 갖게 되리라는 양 대표의 말이 허황된 꿈이라는 걸. 하지만 반대로, 양 대표 일가의 능력과 배경이라면 드론 수 그 자체를 만 대, 이만 대로 늘릴 수도 있지 않을까? 최소한 파트타임 충전사 자리 하나 정도는 지켜주지 않을까?

 

“로봇생산! 노동해방! 직접민주주의! 로봇생산으로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서, 유권자 개개인 고유의 정치 의식을 키울 여유가 생긴다면, 정당·정치인이 필요 없는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거예요.”

 

루니의 주장에 미니멈이 결연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아무렴, 그리고 일하지 않는 모든 인간들에게 평등하게 자산을 분배하는 게 필요하지. 그러자면 이제까지 양당제 50년 동안 불평등하게 세습한 자산을 리셋해야만 하고. 그래서 혁명이 필요한 거야. 불가항력적인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

 

댕이도 분위기에 휘말려 고개를 끄덕였다. 루니가 미니멈에게 동의의 눈빛을 보내면서 말을 이었다.

 

“혁명은 3단계로 나뉘어요. 혁명의 최종 단계는 세습 자산의 근간인 토지 자산, 즉 땅·건물·주택을 몰수해서 재분배하는 부동산리셋. 직접민주주의제 수립의 전제 조건이에요. 그 전 단계는 전 세계 데이터센터 상공에 EMP탄을 터뜨려 전 세계의 금융기록을 완전히 삭제하는 금융리셋. 문제는 백업 데이터센터 모두를 일시에 공격해야 하고 블럭체인화된 금융기록은 기록이 저장된 개개인 단말기 데이터 모두를 다 지워야 한다는 거예요. EMP 차폐기술도 계속 발전하고 있고요. 이 단계를 위해서 우리 마룬은 EMP 차폐기술을 뚫을 GAN 알고리즘과 EMP탄 투하 기술을 함께 연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 금융리셋의 시험 단계를 바로 우리 코로나 세이브 어쓰가 맡게 된 거예요. 바로 서울의 백신리셋.”

 

루니는 관자놀이를 눌러 클라우드에 접속했다. 검은자가 사라져 하얗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댕이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읊듯이 말했다.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코로나 세이브 어쓰는 서울의 백신리셋 프로젝트, 즉 1단계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마룬 인터내셔널로부터 초소형 EMP탄을 제공받았어요. 그걸 세별바이오 데이터센터 1킬로미터 상공에서 터뜨려서 일시적인 정전으로 시큐리티 로봇, CCTV 시스템, 보안게이트를 무력화 시킬 겁니다. 그 순간 데이터센터에 침투해서 내부 통신선에 해킹라인을 심어 놓고 1킬로미터 밖에서 기다립니다. 시스템이 재부팅이 되는 순간 곧바로 해킹에 들어갑니다. 우린 그렇게 세별바이오의 GAN 만능백신 합성 알고리즘을 빼낼 겁니다. 그리고 그걸 무상으로 퍼뜨릴 거예요. 그러면 서울 밖으로 쫓겨난 야생인들도 만능백신을 접종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서울 상공에다 폭탄을 터트리자고요?”

“정확히는 부천입니다만.”

“그리고 만능백신을 탈취해서 무료로 뿌리자?”

“네. 모든 사람들이 만능백신의 혜택을 받게 되겠죠. 그리고 부가적으로는 우리 마룬의 EMP탄 연구에도 도움이 됩니다. 만능백신 합성 GAN은 차폐물질을 뚫을 새로운 EMP 소립자 구조 개발에도 적용할 수 있을 테니까요.”

 

댕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관자놀이를 누르자 루니의 검은자가 돌아왔다. 눈빛은 간절했지만 목소리는 차가웠다.

 

“드론이 필요해요. 댕이 씨가 돌보는 바로 그 드론들이요. 5년 전 무인드론 택시를 도입하면서 비행고도 설정이 철저하게 제한되었어요. 우린 1킬로미터 높이에서 EMP탄을 터뜨릴 드론이 필요해요. 그런데 서울 항로에서 500미터 이상으로 비행고도를 설정한 드론은 상암동에 떠 있는 광고용 드론 뿐이에요.”

 

혁명이라니. 노동해방이라니. EMP탄이라니. 허무맹랑하면서도 꽤나 그럴듯했다. 댕이는 긴가민가 눈썹을 긁으며 루니에게 물었다.

 

“그런데 제가 드론충전사라는 걸 어떻게 알았죠?”

 

루니가 미니멈을 보면서 난감한 기색을 보이자 미니멈이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떠냐는 몸짓을 보냈다. 루니는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 터널에서 낙서를 찍었죠.”

 

맞아, 그랬지.

 

“그 낙서는 ‘해킹그래피티’예요. 낙서에 미세한 3차원 코드가 숨겨져 있어요.”

 

해킹… 그래피티?

 

“댕이 씨가 폰 카메라로 낙서를 찍는 순간 카메라가 낙서를 OCR(Optical Character Reader, 문자인식)로 인식해서 PDF 문서로 변환하죠. 바로 그 PDF문서가 저장되는 클라우드 계정을 해킹해서 댕이 씨 정보를 숨겨진 해킹 URL로 전송하는 거예요.”

“그 대갈털린소년단이라는 건…”

“그건 그냥 A.I.가 만들어 낸 단어예요. 사람들이 터널 조도에서 가장 관심을 가질만한 단어를 끌어다 만든 거죠. 거기 적힌 전화번호도 해킹넘버죠.”

“저도 그걸 찍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댕이 씨 정보를 꽤 많이 확보했다는 거죠. 맞아요, 댕이 씨 정보를 좀 훔쳤어요.”

 

루니는 뻔뻔한고 단호한 억양으로 말을 마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잠깐만.”

 

댕이는 깊은 숨을 훅 뱉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당신들 남의 사생활을 이렇게 함부로 침해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미니멈이 침을 퉤 뱉으며 댕이에게 다가섰다. 루니는 미니멈 어깨를 달래듯 다독이면서 위악스레 입초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고는 씨근거리는 댕이를 지그시 쏘아보며 조곤조곤 말했다.

 

“해킹그래피티를 만든 목적은 혁명자금을 모으는 거였어요. 낙서에 관심을 보인 꽤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서요. 우린 꽤 많은 주주인과 배급민들을 노예로 거느리고 있어요. 노예로 만드는 방법에는 아주 여러가지 방법이 있어요. 온라인 상태라면 스스로 굴욕 사진을 찍도록 유도해서 몸캠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게 보통이죠. 그렇지만 댕이 씨의 경우는 여기까지 이렇게 모셔왔는데, 그냥 보내드리기가 좀 아깝네요. 무언가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조치를 해드릴 수도 있어요. 약쟁이로 만들어 드리는 게 제일 쉽긴 한데… 물론 댕이씨는 분명 우리 조직원 후보예요. 하지만 원하시지 않는다면야 뭐 어쩔 수 없죠.”

 

댕이는 루니의 협박이 어이없고 두려웠다. 그럼에도 분노가 일었다. 혁명이라고? 경쟁에서 뒤처지고 서울에서 쫓겨나서 병이나 옮기고 이렇게 협박이나 일삼는 야생인들 따위가? 댕이는 발끈했다.

 

“이것들이 이제 보니 완전 양아치들 아냐. 뭐 백신을 무료로 퍼뜨려? 씨발, 어디서 협박질이야, 야생인 확진자 새끼들이!”

 

루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렇다니까. 역시 배급민은 안 돼.”

 

루니가 미니멈에게 턱짓을 했다. 미니멈은 코트 구석에 놓인 까만 비닐 봉다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방독면이었다. 루니와 미니멈은 눈짓을 교환하고 동시에 방독면을 뒤집어썼다. 댕이는 허겁지겁 닫힌 출입문으로 달려가 문고리를 마구 돌려댔다. 루니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모깃불에 뿌리자 쌉싸름하면서도 퀴퀴한 냄새가 삽시간에 코트 전체로 번졌다. 댕이는 부질없이 문고리만 부여잡고 쿨럭거리며 “야생인 확진자 새끼들…”을 연신 뇌까리다 까무룩 눈을 감았다.

 

*

 

이렇게 눈을 감으면 언제나처럼 그 동네다. 그 동네가 어딘지는 모른다. 다만 낮고 허름한 아파트였고, 그 동에 사는 사람이라곤 댕이네 가족 밖에 없었다. 댕이네는 커다란 자물쇠 세 개로 문을 꽁꽁 잠그고 살았다. 창밖은 휑뎅그렁한 벌판이었다. 띄엄띄엄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중 한 그루 아래에는 야트막하게 담을 친 움막이 있었다. 움막에 사는 시커먼 맨발의 아저씨는 등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고개만 들어서 댕이네를 올려다보곤 했다. 댕이는 이 꿈을 꿀 때마다 묘하게 틀어진 아저씨의 자세와 표정을 마주한다. 동시에 댕이는 동생 ‘산이’를 마주한다. 마치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두 팔을 나란히 뻗고 아장아장 댕이를 쫓아다니던 산이. 그리고 신종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미간 깊숙이까지 파고 들어가서 새겨 놓은 N자 모양의 흉터. 그날 저녁 댕이와 산이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가위바위보로 계단 오르기를 하고 있었다. 산이보다 한 층 위까지 올라간 댕이는 층계참 아래로 소리를 질렀다.

 

“가위, 바위, 보. 뭐 냈어?”

“보”

“그럼 난 가위야. 넌 그대로 있어.”

 

댕이는 분명 주먹을 뻗었지만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쳤다. 양심상 두 계단만 더 올라간 댕이가 산이를 향해 다시 소리쳤다.

 

“또 한다. 가위, 바위, 보. 뭐 냈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야! 뭐해?”

 

갑자기 타다닥 하는 빠른 발소리가 들렸고 이내 잠잠해졌다.

 

“야!”

 

댕이는 콩콩 층계를 뛰어내려와 현관 앞에 도달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차장 모서리로 사라지는 그림자와 쿵, 하고 차문을 닫는 소리를 들었을까. 댕이는 그 이상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벙벙히 주차장을 맴돌 뿐이었다. 엄마는 댕이를 나무라지 않았다. 황량한 창밖을 보며 울다 넋을 놓고 사라진 움막 자리만 바라보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옆 동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그게 야생인 짓이라고 했다. 아무리 야생인 사냥을 즐기는 외국인 사냥꾼이라도 아이까지 사냥하지는 않는다며. 아이까지 내다 파는 말종들은 갈 데까지 간 야생인 확진자 연놈들 밖에 없다며. 어차피 경찰은 이런 정글 거주지까지 안 올 거고 그저 스스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며. 댕이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과 산이와 엄마가 야생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며칠 후 나무 아래 움막을 두르던 담장마저 사라졌지만 엄마와 댕이는 여전히 주차장 밖을 나서지 못했다. 처음으로 야생인이 된 그해의 일이었다. 댕이 엄마가 일을 나가던 유흥업소에서 신종 헤르페스 집단감염이 발생하고, 엄마·댕이·산이의 동선과 신상이 털리고, 엄마는 일을 잃고, 가족 모두가 쓰레기 확진자 취급을 받으며, 격리 수용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에서 추방된 첫해.

 

*

 

덜컹거리는 진동이 댕이를 깨웠다. 머리 위 철교로 지하철이 지나고 있었다. 댕이는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멍하니 섰다. 한강을 가로질러 일렬로 길게 이어진 교각에 시야가 어질어질했다. 어디까지가 꿈이었을까. 어디까지가 기억이었더라.

 

05시 36분

 

여의도 쪽에서 트는 먼동에 강물이 불그스름히 일렁였다. 강 건너편은 아직도 휘황찬란한 야경이었다. 빌딩 숲 하늘 길을 따라 반짝이는 새벽 배송 드론과 드론 택시들이 철새처럼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왼쪽으로 상암동 상공의 인공달은 이제 막 오방황색에서 오방청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댕이는 나들목 터널을 지나 당산역으로 걸어나왔다. 역 주변은 꼭두새벽부터 뚜벅이 배급민들로 붐볐다. 역사와 역사 주변의 보도블럭 패널을 밟거나 따릉이 페달을 돌려서 발생시킨 운동에너지를 거치대에 충전하는 방식으로 서울시에 전력을 제공하고 생체에너지포인트를 적립하기 위해서다. 배급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쉴 새 없이 걷고 따릉이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생체포인트로 살 수 없는 단 하나가 만능백신이었다. 반면에 만능백신 주주인들은 힘들여서 생체포인트를 쌓을 필요가 없었다. 세별바이오가 주주인들에게 매달 지급하는 만능백신 주주배당포인트만 해도 생체포인트 평균 적립치의 서너 배를 넘었기 때문이다. 주주인들은 그저 운동삼아 느긋하게 산책하고 여유롭게 따릉이 페달을 밟았다. 세별바이오의 주주배당포인트 정책에 대한 평가는 비등비등했다. 배급민들은 주주배당포인트가 주주인과 배급인들 간의 격차를 벌리는 양극화 정책이며 만능백신은 공공의료를 사유화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주주인들은 자신들의 주주지위와 배당은 공정한 경쟁과 합법적인 상속을 토대로 얻어 낸 정당한 대가라며 옹호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세별바이오의 CEO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기도 했다.

 

“마누엘 카스텔(Manuel Castells)에 따르면 도시의 요체는 ‘집합적 소비수단’입니다. 집합적 소비수단은 소진된 노동력을 충전해서 도시의 생산성을 유지시켜 줍니다. 말 그대로 충전소죠. 주택, 교통, 의료, 교육, 스포츠, 문화, 공동 운송시설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도시의 필수적인 물적 토대임에도 그다지 투자 가치가 높지 않아서 기업이 투자를 꺼리는 부문이기도 합니다. 만능백신 역시 집합적 소비수단입니다. 돈은 안되지만 필수적이죠. 그래서 저희 세별바이오가 과감하게 투자하고 개발한 것입니다. 만능백신 이전의 유착은 말 그대로 극소수의 유착이었습니다. 그 시대야말로 비용의 사회화, 이윤의 사유화를 통해 특정 정치세력이 특정 재벌에게 이익을 몰아주는 시대였죠. 하지만 우리 세별바이오의 주주배당포인트는 완전히 다릅니다. 서울 거주자의 절반인 배급민들은 무료로 만능백신의 수혜를 받습니다. 절반인 주주인의 투자가 있기 때문이죠. 오히려 주주인들이 비용을 부담하고 수혜는 배급민들이 받는 구조 아닙니까. 주주배당은 최소한의 이윤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50:50의 집합적 소비수단 시스템을 과연 사유화나 유착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댕이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느릿느릿 당산역 계단을 올랐다.

 

‘미친 소리야. 만능백신을 퍼뜨리자고? 혁명을 한다고? 세별바이오를 상대로? 이젠 세별바이오가 바로 서울이잖아. 서울은 만능백신의 도시야. 인구 2천만 명이 마스크 없이 모여 살 수 있는 유일한 자동방역도시. 초고층 건물들 사이로 드론 택시가 날아다니는 바늘처럼 뾰족한 스카이시티. 양 대표가 항상 그랬잖아,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상품이자 서비스인 셈이라고, 서울은 마치 보이지 않는 방어막으로 둘러쌓인 거대한 인큐베이터처럼 예측되는 모든 위험을 제거한 멸균의 공기만을 제공한다고. 그래, 양 대표 말이나 카스텔 말이나 결국 같은 얘길 하는 거야. 서울은 가장 안전하지만 가장 비싼 집합적 소비수단의 총체니까. 결국 물려받은 게 없는 사람들은 평생 배급민으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거잖아. 그렇다고 혁명이라니… 그래, 어쩌면 혁명 같은 게 필요할 수도…’

 

댕이는 무언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줄달음치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스크린도어 앞에 섰다. 플랫폼으로 담담한 목소리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세별바이오가 제공하는 만능백신 특보를 알려드립니다.”

 

그러자 댕이의 두 다리가 자동으로 플랫폼 바닥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감염병 예측 알고리즘에 따르면 다음 달에 서울에 유행할 가능성이 있는 전염병은 총 여섯 종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팬데믹급 한 종, 에피데믹급 한 종, 엔데믹급 네 종입니다.”

 

제자리걸음이 점점 빨라지면서 댕이의 심장 박동은 혁명으로부터 멀어져 생체포인트를 쌓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도시방역부는 이번 예측을 만능백신에 반영하여 내일부터 배포할 예정입니다.”

 

댕이는 제자리걸음의 속도를 올려, 거의 내달리듯 발을 구르며 열차를 기다렸다.

 

*

 

협박이 시작되었다. 설정하지도 않은 알람이 새벽 두세 시에 울린다거나, 멀쩡하던 따릉이 계정 비밀번호가 바뀐다거나, 댕이도 모르게 댕이를 찍은 사진이 댕이의 클라우드에 저장되어 있다거나, 그 사진이 회사 직원들 연락처에 공유 직전인 상태로 첨부되어 있다거나. 댕이는 마룬 애들 짓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럼에도 위협감을 느끼진 않았다. 핀트가 나간 ‘댕이의몸캠사진시리즈’는 굴욕 사진이라기 보단 심령 사진에 가까웠고, 새벽 알람은 사나흘에 한 번씩 울렸다. 그냥 딱 귀찮을 정도의 소심하고 어설픈 해코지였다. 하루는 폰을 봤는데 4시 44분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폰을 열었더니 모든 앱의 알람이 숫자 4로 맞춰져 있었다. 어라, 이게 뭐야? 댕이는 4로 가득찬 화면에 그만 풋,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아니 이게 지금 협박인지 썸인지. 혁명을 하겠다면서 이게 뭐야, 라고 비웃으며 앱을 하나하나 여닫았다. 그때 메시지가 떴다.

 

루니 : 로봇생산! 노동해방! 직접민주주의!

댕이 : 자꾸 이렇게 저 괴롭히면 신고할 겁니다.

루니 : … 생각해봤어요?

댕이 : 뭘요?

루니 : 드론이요.

 

댕이는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루니 : 생각있으면 아무 때나 답 주세요. 이게 마지막입니다. 앞으로 괴롭히지 않을게요.

 

댕이 한참을 머뭇거리다 폰을 두드렸다.

 

댕이 : 그런데…

루니 : 말씀하세요.

댕이 : 노동해방, 직접민주주의 다 좋아요. 그런데 그쪽 말대로 그렇게 사람들이 일을 안해도 되고 시간도 남아서 정치도 직접 한다 한들 세상이 평등해질까요? 그런 세상에서도 주주인들은 여전히 배급민들보다 힘이 셀 거 아니에요.

루니 : 그래서 리셋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만.

댕이 : 아. 리셋…

루니 : 만능백신을 무료로 퍼뜨리는 걸로 리셋을 시작하자는 거죠. 생각 안 나요, 혁명의 3단계?

댕이 : 전혀…

루니 : 백신리셋. 금융리셋. 부동산리셋.

댕이 : 아… 혁명의 3단계…

루니 : 기억하세요.

댕이 : 하지만 그쪽이 말하는 리셋은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에요.

루니 :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죠?

댕이 : 투표를 통해서 정당하게 정권을 잡아야겠죠. 그게 민주주의잖아요.

루니 : 어차피 ‘여’ 아니면 ‘야’잖아요. 그 둘은 하나예요. 싸우는 척하면서 서로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유해요. 적대적 공생관계죠. 턱없이 오른 집값을 두고 서로를 탓하지만 정작 상대방 덕으로 불로소득을 벌고, 새로운 세력이 고개를 들면 합심해서 짓밟어왔어요. 그렇게 50년이 아니라 수백 수천 년을 해먹을 거예요. 거기에 저항 할 마지막 수단이 혁명이에요. 공권력은 정의로운 힘이고 혁명은 폭력이라는 인식이 더 폭력적이지 않나요? 체제를 거스르는 걸 불허하는 법을 지키면서 어떻게 그 체제를 무너트릴 수 있죠? 우린 체제도 법도 박살내자는 거예요.

댕이 : 세상이 완벽할 수는 없죠. 불평등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게 마음에 안 든다고 체제를 뒤엎자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그동안 그 체제를 믿고 살아온 사람들은요? 변화나 개혁이라면 모를까, 혁명이라니요. 적어도 공정한 경쟁을 치러서 문제를 해결해야죠.

루니 : 주주인들은 항상 공정을 입에 달고 살죠. 그건 좌·우·여·야를 막론해요. 그런데 댕이 씨처럼 물려받은 집이 없는 배급민이나 우리처럼 서울에서 쫓겨난 야생인들이 어떻게 그 경쟁에 낄 수 있죠? 우린 엄두도 낼 수 없어요. 기껏 만능백신 접종권을 지키느라 서울에서 한 달짜리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못하는 게 우리들 현실이잖아요. 우리 야생인과 배급민들에게 공정은 그냥 ‘차별’일 뿐이에요.

댕이 : 너무 단정적이네요. 서로 의견을 좁혀 가야죠. 불평등이 문제라고 말하는 진보적인 정치인들이나 주주인들도 많아요. 물론 입장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들도 우리 이웃이잖아요. 그런 사람들하고 연대를 모색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루니 : 50년 세습 자산이 만든 20:80의 세상에서는 연대가 불가능해요. 20세기 이전처럼 1% 미만의 극소수라면 악의 기득권으로 몰아서 타도하자고 연대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의 서울에 사는 20~30%의 주주인들은 악마가 아니에요. 댕이 씨 말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익명의 이웃이죠. 이들의 정의는 공정이에요. 하지만 그 공정이란 주주인끼리의 공정이죠. 그들끼리의 정의, 그들만의 진보에 불과해요. 댕이 씨 같은 배급민이나 저희같은 야생인하곤 아무 상관없잖아요. 소위 ‘진보’ 주주인들은 몇 년에 한 번씩 고백성사 보듯 투표소에 들어가 ‘소위’ 진보정당을 찍는 것으로 죄책감을 씻고 나서 다음 선거까지 부동산과 주식에 몰두해요. 그리고 여·야의 대의민주주의가 그걸 엄호하죠. 진보 주주인들은 공정경쟁을 부르짖으며 자신들의 정의를 내세우지만 정작 만연한 세습 불평등에는 눈을 감고 울타리를 쳐서 자신들의 영역을 방어하기에 급급하죠.

 

댕이가 정당하다고 여겨왔던 모든 가치가 일거에 부정 당하고 있었다. 공정, 합리성, 노동, 대의민주주의, 비폭력. 단지 루니가 야생인라는 이유만으로.

 

댕이 : 그쪽은 일종의 언더도그마에 빠진 것 같아요.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식이라면 좀…

루니 : 언더도그마라뇨. 이건 옳고 그름이나 선악의 문제가 아니에요. 생존의 문제라고요. 우리 야생인들은 백신이 필요해요. 댕이씨 같은 배급민들이 일자리가 필요한 것처럼요.

댕이 : 케이크의 크기가 이미 정해져 있고 사람들 입장이 각기 다른데 어떻게 모두가 원하는 만큼의 몫을 가져갈 수 있겠어요. 모든 사람이 서울에 살 수는 없는 거예요. 이미 정글로 변한 한반도 전역에 투자할 여력도 없고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만능백신은 도시를 위한 거예요. 전기도 끊기고 생체데이터를 수집할 수도 없는 곳까지 만능백신을 제공할 수는 없어요. 정 만능백신을 원한다면 일자리를 얻어서 서울로 들어오셔야죠. 그게 지금의 법이니까요.

 

답이 없었다. 댕이는 지친 시선을 폰에서 거뒀다. 갑갑한 심경을 접고 그만 눈을 붙이려는데 진동이 울렸다.

 

루니 : 그거 알아요? 주주인은 사람 인(人)자를 쓰는데 왜 배급민에는 백성 민(民)자를 쓰는지.

댕이 : 글쎄요.

루니 : 백성 민자는 사람의 눈을 창으로 찌르는 모습을 본 딴 글자예요. 고대 중국에서는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의 한쪽 눈을 멀게 해서 저항 못하고 일만 하는 노예로 만들었죠. 저항할 힘은 빼고 일할 힘만 남겨서 딱 부려먹기 쉬운 상태로 개조하는 거예요. 로봇처럼요. 그게 ‘민’이에요. 댕이 씨 같은 배급민.

댕이 : 지금 우리 배급민이 노예라는 건가요?

루니 : 눈이 멀었다는 거예요. 우리 야생인은 적어도 사람 인(人)자를 써요. 아무리 매개인간종이라고 해도 우린 배급민처럼 눈이 멀지 않았으니까.

댕이 : 그래서요.

루니 : 댕이 씨. 지금은 한가하게 토론이나 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 필요한 건 싸움이에요.

직접민주주의 vs 대의민주주의

노동해방 vs 쓸모없는 노동 시간의 전가

무상 백신 vs 유료 백신

천만 야생인 vs 천만 주주인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에요. 댕이 씨 같은 배급민들이 이 싸움에 낄려면 먼저 마음 속에 사람 인(人)자를 품어야 해요.

 

더는 답하지 않았다. 댕이는 그저 옅은 숨을 뱉으며 앱 알람의 4자를 하나씩 지워 나갈 따름이었다.

 

*

 

인사발령 : 드론광고 사업부 → 드론패트롤 사업부

 

댕이는 당혹스러웠다. 드론패트롤 사업부라면 세별바이오와의 합작 사업을 담당하는 곳 아닌가. 이른바 ‘밀경자 색출 사업’. 최근 서울로 몰래 숨어 들어온 야생인들, 그러니까 소위 ‘밀경자들’의 수가 급격히 증가해서 수 만명에 이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당국은 밀경자 색출에 혈안이었지만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던 터. 양 대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국에 희뜩한 솔루션을 제안했다. 세별바이오의 만능백신에 생체 인식 나노봇을 마커로 포함시켜서 드론이 그걸 인식하고 추적하는 시스템. 마커가 감지되면 주주인이나 배급민으로, 마커가 감지되지 않으면 밀경자로 간주하는 ‘야생인 색출 시스템’을 운영하는 드론패트롤 사업부로 가라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 하는 일도 드론충전사 일일 테고, 양 대표가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언가 영 마뜩치 않았다. 댕이는 일단 면담을 요청했다. 면담자는 양 대표였다.

 

“자, 우리 댕이 씨는 뭐가 문제일까요.”

 

한결같이 명랑하고 똑 부러진 양 대표의 목소리가 댕이를 살짝 주눅들게 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누군가를 감시하거나 쫓는다는 게 저한테 맞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 지금 보살피는 X조 드론들하고도 정이 많이 들어서…”

 

양 대표가 느닷없이 손뼉을 치며 깔깔거리는 바람에 댕이의 등이 곧추섰다.

 

“아, 웃기다. 댕이 씨,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거죠? 뭐라고, 드론하고 정이 들었다고요?”

 

양 대표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댕이 씨, 드론이 무슨 반려동물 같은 게 아니잖아요. 쓰고 닳으면 언제든지 버리고, 또 다른 임무를 부여하고, 그냥 그런 로봇일 뿐이잖아. 그리고 어차피 패트롤 사업도 광고 사업이랑 마찬가지예요. 똑같이 인공달을 플랫폼으로 쓸 거니까요.”

“네? 그게 무슨…”

“애초부터 인공달은 멀티미션 드론 플랫폼으로 기획한 프로젝트였어요. 도시 경관, 광고, 운송이 초기 미션이고, 도시 보안, 감시 미션이 넥스트 스텝이었다고요. 파이널 스텝은 역시 밀리터리고요. 수도 방위 드론 부대. 이 모든 미션의 기본 대형과 관제 플랫폼이 바로 저 인공달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양 대표는 창 밖에서 리허설 중인 인공달을 가리켰다.

 

“평소에는 저렇게 광고 미션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밀경자 기동수색을 수행하는 거예요. 수색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인공달 스팟을 서울 전역으로 확대할 거고요. 댕이 씨도 잘 알잖아요, 드론 스팟이 많아질수록 회사 매출이 늘어나는 구조라는 거. 댕이 씨 한테는 오히려 기회인데요. 댕이 씨도 언젠가는 주주인이 되어야죠.”

 

익히 들어 온 얘기다. 드론 플랫폼 호스팅.

호스팅 매출=드론 수×비행시간×비행고도.

드론 수와 드론 스팟이 많아져서 드론이 하늘에 떠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돈을 버는 거라고. 그게 광고든 운송이든 패트롤이든 좌우지간 드론이 하늘에 더 오래, 더 높이 떠 있을수록 돈을 버는 거라고. 드론 플랫폼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늘이라는 비행 공간을 3차원의 항로와 시간대로 잘게 쪼개서 효율적으로 분배하고 임대료를 받는 거라고. 광고주, 배송·물류 기업, 군대와 경찰은 물론 드론 택시 승객까지 모두가 우리의 임차인이라고. 우리의 수익원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하늘이야말로 광활한 다차원의 부동산이라고.

자자손손 내려오는 양 대표 가족의 장밋빛 미래 비전은 지겹게 들어왔고, 대체로 납득했었다. 하지만 댕이는 지금 X조 아이들의 하찮음과 그 비전의 광활함으로 오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게… 아무래도 인권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사실 만능백신으로 생체정보를 모으는 게 과연 온당한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고… 아무리 밀경자들이라고는 해도 그들한테도 인권이라는 게 있는데… 그렇게 사냥하듯이…”

 

양 대표는 정색을 하고 댕이의 말을 뚝 끊었다.

 

“댕이 씨, 정신 차려요. 밀경자들은 야생인들이에요. 야생인들은 과거 인간종에 불과하다고요. 그런 과거 인간종은 전염병을 옮기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아요. 만능백신으로 진화한 우리 면역인간종 트랜스휴먼과 그런 매개인간종을 똑같이 취급하면 안 되죠. 매개체 따위에 무슨 의도가 있겠어요, 자기들도 모르게 옮기는 건데. 인권이나 선악을 논하거나 법적으로 죄를 묻고 자시고 할 게 아니죠. 그건 자유의지가 있는 우리들한테나 해당됩니다. 매개인간종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그저 이런저런 자극에 반응하다 옮고 옮기는 거예요. 그들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사냥의 대상이에요. 그리고 패트롤 사업에 관한 법적 검토는 이미 오래 전에 다 마쳤어요. 백 퍼센트 합법해요.”

“대표님, 합법, 그런 문제가 아니라…”

 

양 대표가 또 한 번 말을 끊었다.

 

“그거 알아요, 도시의 서민 주택이 원래 전염병을 막기 위해 지어졌다는 거?”

“네?”

“도시는 노동자를 필요로 해요. 그런데 정작 사람들이 몰려들면 도시가 엉망진창이 되죠. 19세기에는 산업도시 맨체스터 노동자들의 30%가 동굴에서 살았어요. 그나마 다닥다닥 붙은 주택 중 대부분이 화장실이 없어서 거리는 분뇨로 넘쳐났고, 수시로 콜레라가 돌았고, 절도와 살인이 난무했고, 그 불결한 환경에서 매매춘에, 성병까지,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은 기껏해야 25살 정도였죠. 반면에 당시 부르주아지들의 평균수명이 55살 정도였어요. 노동자의 두 배 이상을 살았으니까, 그 환경의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가시죠? 그러다 전염병이 상류층 저택까지 번진 거예요.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서민 주택을 짓기 시작한 거고요. 위생법을 만들어서 빈민굴을 쓸어버리고 상하수도와 화장실이 딸린 집을 지은 거죠. 그러니까 당시의 서민 주택은 일종의 보건 격리시설이었어요. 애초부터 도시 노동자와 부르주아지는 분리되어서 살았어요. 그 1%의 상류층이 이제 20-30%로 늘어난 거예요. 그래도 변치 않는 게 있어요. 명심해요. 언제나 도시가 최우선으로 하는 건 부르주아지의 건강이에요. 건강 유지의 핵심은 분리와 구별이고요. 그리고 이 사업은 이미 지난 해부터 대동강 인증 진행 중이에요. 상용화는 다음 달부터고요.”

 

대동강 인증은 평양에서 행해지는 실증성 인증이다. 평양은 1천만 명의 인간 샘플이 거주하는 최대 규모의 테스트베드로, 전 세계 기업들에게 인권 문제로 시행 할 수 없는 메트로폴리스 규모의 통제 실험을 제공하고 있었다. 이미 도심 자율주행 실증 테스트, 지하 무인배송 실증 테스트, 그리고 세별바이오의 만능백신 실증 테스트가 대동강 인증을 거쳤다. 그리고 이제 드론 감시 및 수색 사업의 실증 테스트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전 세계의 신기술이 적용된 미래 도시이자 각광받는 글로벌 투자처, 평양. 대동강 자이 한 채가 수십억을 호가하는 이유였다.

 

“서울은 하나의 유기체예요. 자동치유와 자동면역, 자율교통과 자율운송, 그리고 불순물의 침투를 자동으로 감시하고 처리하기까지. 이 모든 걸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자동적인 운영체계죠. 저에게 있어 서울은 그 자체로 작품이에요. 그리고 그 작품의 재료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나와요. 그들의 생체데이터, 생체에너지. 우린 언제나 서울에 접속하고 또 하나로 묶일 수 있어요. 그렇게 도시와 인간이 서울이라는 거대한 트랜스휴먼으로 융합하는 거예요.”

 

양 대표는 두 손을 가슴에 얹고 댕이에게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댕이 씨, 생각 잘 하세요. 이런 얘기하기는 뭐한데, 어차피 충전사 일도 얼마 안 가서 사라질 거예요. ‘자동적’으로요. 댕이 씨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비행 중에 배터리를 충전하는 기술 개발이 한창이라고요. 무선통신망으로 기지국에서 직접 드론을 충전하거나 비행하는 드론들 끼리 상호 충전하는 식으로요. 그렇게 되면 댕이씨 같은 충전사가 할 일이 있겠어요?”

 

그런 비스무리한 얘기는 많이 돌았다, 드론의 자동 이·착륙 기술이 정교해 질수록 드론충전사 일자리는 줄어들 거라는 말. 그래도 설마 드론충전사가 아예 사라질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양 대표는 그 얘길 하는 것이다. 이제야 겨우 충전사를 자기 일이라고 여기고 드론들에게 애정을 쏟게 된 댕이를 향해서, 너의 일이 곧 사라질 거라고, 이해는 커녕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최첨단의 신기술을 들먹이며, 정체불명의 그것이 또다시 너를 대체하게 될 거라며.

 

“그러니까 댕이 씨도 이제부터 슬슬 관리 파트 준비를 해야죠. 패트롤 사업부는 관리 이슈가 많아서 도움이 될 거예요. 이게 다 댕이 씨 생각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댕이 씨도 일자리를 지켜야지. 접종을 받지 못하면 결국 서울을 떠나 전기도 수도도 끊긴 정글을 떠도는 야생인이 될 수밖에 없잖아. 야생인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잘 알죠?”

 

댕이도 잘 알고 있었다. 백신이 없는 서울 밖은 문명의 기반이 소멸한 지대라는 걸. 교통, 상·하수도, 전기, 통신은 물론 의료나 치안 시스템마저 붕괴된 정글. 관광객들이 공공연히 인간사냥을 자행한다는 그곳. 여흥과 장기매매를 위한 살육이 서슴지 않고 벌어진다는 그곳. 동생 산이가 사라진 그곳. 악몽이 머무는 그곳. 순간, 댕이는 대답 없는 산이의 가위바위보 소리를 애써 상상해보았다. 그럼에도 적막한 층계참을 떠올리며 시큰한 코끝을 가만히 눌렀다.

 

“알죠, 제가 댕이 씨 좋게 생각하는 거?”

 

어느새 양 대표가 다가와 댕이의 부슬부슬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만!”

 

댕이가 홉뜬 눈으로 양 대표를 올려다보았다. 양 대표는 움찔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일자리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고요? 다 개소리예요. 대표님이 대표님 일자리를 없애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네, 대표님 말씀대로 언젠가는 세상 모든 일자리가 그렇게 자동적으로 사라지겠죠. 대표님 자리만 빼고요.”

 

양 대표는 얼굴의 근육을 기괴하게 씰룩이며 댕이로부터 멀찌감치 물러서서,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댕이 씨 같은 생각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댕이는 무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 대표는 한 걸음 바싹 다가서서 야멸차게 말했다.

 

“언더도그마. 약자는 무조건 선하고, 강자는 무조건 악하다는 논리.”

 

댕이는 콧마루를 쓸며 스르륵 눈을 감았다.

어렴풋이 만능백신 이전의 서울이 떠오른다. 마스크의 인간들로 가득한 도시의 살풍경. 마스크를 쓰고 헥헥거리며 교문을 향해 달리던 댕이와 친구들. 그 기억만으로 숨이 차오른다. 그 가쁜 감각이 댕이에게 말하고 있었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를. 왜 이리도 서울 집값은 떨어지지 않으며, 어쩌다 세습 불평등의 헬이 공정경쟁의 탈을 쓰게 되었는지를. 주거를 지켜주는 집과, 일자리를 지켜주는 스펙과, 건강을 지켜주는 마스크. 댕이는 불안의 기억들을 되짚는다. 생존 본능이 고조될수록 값이 치솟는 것들. 부풀려진 집값, 과도한 사교육비, 미래의 전염병까지 박멸하는 만능백신. 근심과 불안과 공포에 팔려나가는 집합적 소비수단. 그리고 획득을 위한 경쟁과 차별. 마스크를 쓴 친구 하나가 교문 앞에서 헐떡이는 댕이에게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던 모습이 보인다, 마치 앞으로 치를 생존 경쟁 대비 훈련처럼, 마스크 안에 가둔 숨을 헐떡헐떡 되새김질하면서. 결국 댕이는 뒤쳐졌고 동생 산이는 사라졌다.

댕이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아뇨, 다만 살고 싶은 거예요. 그저 백신하고 일자리가 필요할 뿐이에요. 우리도 죽을 걱정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대표님처럼요.”

 

양 대표는 매서운 눈빛으로 댕이를 노려보았다. 댕이는 그냥 빙그레 웃으며 뚜벅뚜벅 사무실을 걸어 나가 따릉이를 몰았다. 강의 순풍이 살갑게 등을 떠밀었고, 강물 위로 뉘엿뉘엿 내리는 땅거미는 그윽했다. 페달은 가벼웠다.

까치산터널 세이프티존 화곡 13구역.

 

로봇생산! 노동해방! 직접민주주의!

 

또깍.

 

그 앙증맞고 시뻘건 낙서를 찍었다. 그러자 곧바로 댕이의 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까치산1920’.

 

*

 

댕이는 루니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까치산터널 위로 158계단을 올라서니 어두컴컴한 숲길 한편에 으스스한 배드민턴장이 보였고 그 옆 배수로 끝으로 막다른 철망 벽이 나타났다. 철망이 잘린 개구멍으로 기어나가 언덕을 타고 내려가서 미궁같은 골목을 굽이굽이 지나자 잔해가 널린 폐허가 나타났다. 발파지역·출입금지, 라고 적힌 빨간 띠지를 넘어 고꾸라진 미끄럼틀 옆에 놓인 누리끼리한 방제함 뚜껑을 들어올리자 시커먼 땅굴이 드러났다.

 

“올라와.”

 

땅 밑에서 루니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올라오라니, 밑으로 뚫려있는데? 댕이는 목소리에 몸을 맡긴다는 느낌으로 방제함에 몸을 구겨넣었다. 미끄럼틀로 이어붙인 갱도를 따라 빙글빙글 미끄러져 내려가자 널찍한 지저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야. 올라와.”

 

목소리를 따라갔다. 높다란 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삐쭉 내민 두 얼굴이 댕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댕이는 눈앞에서 대롱거리는 줄사다리를 붙들고 허위허위 올랐다. 루니와 미니멈이 힙겹게 올라온 댕이의 팔을 잡아 끌었다.

 

“으허.”

 

댕이는 숨을 내지르며 철퍼덕 엎어졌다. 익숙한 쑥 향기. 아니 여기는 아까 지나온 그 배드민턴장?

 

“맞아. 여기하고 저 아래가 우리 기지야. 폐쇄된 곳이라 이렇게 들어오는 수밖에 없거든. 아무튼 환영해, 마룬 인터내셔널 서울지부 코로나 세이브 어쓰 비밀기지 방문을!”

 

루니는 씨익 웃으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댕이는 엉거주춤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저… 그런데 왜 반말이신지…”

 

루니는 댕이 어깨를 툭 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구면이잖아. 2020년생 동갑이고. 그리고 이젠 우린 혁명 동지니까. 불만이야?”

“아니, 뭐… 그러시든가요. 그래, 그러자.”

“오케이!”

 

루니는 폐허와 숲을 방방 뛰어다니며 기지를 안내했다. 공사용 철근더미와 돌더미는 무기고, 충전기 두어 개가 굴러다니는 텅 빈 관리실은 중앙관제실, 방제함 아래 지저 공간은 숙소, 배드민턴장은 정원. 딱히 비밀기지를 구축했다기보다는 그냥 폐허 속에 몰래 숨어들어서 사는 것 같건만, 아무튼 비밀기지라니까. 루니는 들뜬 목소리로 기지 곳곳을 꼼꼼히 소개했다.

 

“우린 여기를 우리 땅으로 선포했어. 공교롭게도 여긴 광고 드론이 뜨는 상암하고 세별바이오 데이터센터가 있는 부천의 중간 지점이야. 드론을 몰고 갈 때 전폭적인 지원이 가능하지.”

“전폭적으로 무엇을?”

“음… 그러니까…. 그게 무엇이든지. 뭐 식량이나 물이라든가… 아! 그리고 무엇보다, 여긴 천해의 요새라고 할 수 있어. 보다시피 이 높이에서는 도시가 훤히 다 보이잖아. 하지만 적들은 우릴 볼 수 없지, 절대로.”

“당연하지. 여긴 산이잖아.”

“여튼. 공성전에 유리하다는 거지.”

“아, 공성전…”

 

어딘가 소꿉놀이 같은 비밀기지 탐방을 마치고 아이들은 배드민턴장 모깃불에 둘러앉았다. 미니멈은 모깃불 위에 철판을 깔고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구웠다.

 

“수제 불개미호떡. 바닐라맛이다.”

 

미니멈이 불개미가 바글대는 양념통을 가리키며 갓 구운 호떡에 아이스크림을 발라서 댕이에게 들이밀었다.

 

“호두 대신 불개미를 넣었지.”

 

댕이는 호떡 겉에 빼곡히 박힌 불개미들의 사체와 호떡 안에 발린 새하얀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번갈아 보다 눈을 질끈 감고 한입 덥석 베어 물었다. 용기를 내어 입을 우물거리자 알갱이가 톡톡 터지면서 입 안에 고소하고 시고 떫으면서도 달콤한 맛이 감돌았다. 개미가 든 호떡을 먹는 건지 개미가 되어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지. 미니멈이 댕이에게 물었다.

 

“맛이 어때?”

“뭐 그냥, 불개미 맛?”

 

셋은 시금털털한 불개미호떡과 미지근한 맥주를 나눠 먹으며 시시덕거렸다. 얼큰하게 취한 미니멈은 주주인들을 노예로 만든 갖가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무용담을 듣던 루니가 무언가 생각난 듯 불쑥 끼어들었다.

 

“아 참, 얼마 전에 세별바이오 직원 하나를 노예로 만들었거든. 고놈이 우리한테 만능백신에 관한 이런저런 정보를 흘려주고 있었는데, 어제 새로운 사실 하나를 더 불더라고. 자기를 그만 풀어달라면서.”

 

순간 미니멈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댕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루니를 쳐다봤다.

 

“세별바이오가 합성한 바이러스를 야생인들한테 퍼트리고 있대.”

“응?”

 

말인즉슨, 세별바이오가 실제 바이러스와 백신을 동시에 합성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합성한 바이러스는 야생인들에게 퍼트리고 업데이트한 백신은 서울에 공급한다는 얘기였다.

 

“아니 왜?”

“인비트로 시티 계획이지.”

 

미니멈이 호떡을 뒤집으며 답했다. 루니가 관자놀이를 쿡 눌러 클라우드에 접속한 다음 설명을 덧붙였다.

 

“인비트로 시티(In Vitro City)는 일종의 시험관 도시야. 세별바이오와 대의민주주의를 연명하려는 지배자들의 합작품이지. 그들은 만능백신 시스템을 서울에만 적용했어. 예측하기 편리한 도시인들의 빅데이터 중심으로 생체정보를 구성해서 만능백신 A.I.를 도시 편향적으로 학습시켜왔던 거야. 자원의 중복투자를 줄이고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서울에 모든 걸 집중시키고 타산이 안 맞는 나머지 지역은 버린 거지. 이들의 목표는 도시 거주민들의 생체데이터와 도시가 연동되어 굴러가는 완벽한 통제사회야. 사물인터넷을 넘어서 생체인터넷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거야, 소비와 통치를 위해서.”

“소비와 통치?”

“20세기의 산업도시는 노동자들을 적당히 관리했어. 그럴 기술도 없었고, 도시가 인간의 노동과 소비를 필요로 했으니까. 기껏해야 진압이나 협상 정도였지. 하지만 이제 도시는 인간의 노동을 필요로 하지 않아. 단지 인간의 소비만 필요로 해. 그래서 도시가 인간을 더 깊숙히 들여다 보고 정치의식까지 관리하게 된 거야. 정치와 소비 활동을 엔터테인먼트로 만들어서 거기에 몰두하도록. 경쟁과 일자리에 몰두하도록. 시스템을 의심하는 대신에 경쟁자를 혐오하도록. 개개인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지배자들만큼의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정당과 정치인에 매몰되어서 개개인 고유의 정치의식을 싹 틔우지 못하도록. 대의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혁명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한 도시에 몽땅 몰아놓고 생태정보를 실시간 체크하면서 적당한 희망과 적당한 결핍 상태를 적정선에서 유지시키는 거지. 그게 서울의 본질이야. 마치 인큐베이터처럼, 서울은 서울 밖을 위험하게 느끼도록 설계되었어. 바이러스를 합성해서 공포를 부추기고 그 공포를 백신으로 다잡으면서 ‘서울이라는 시스템’에 길들이는 거야. 만능백신 시스템은 서울이라는 거대한 쇼핑몰에 사람들을 가둬놓고 개개인을 소비 단위로 노드화(nodalization)해서 그 소비 접속점의 동선과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해. 마치 자율주행차나 자율비행드론의 경로를 수집해서 도로나 항로의 빅데이터로 활용하는 것처럼, 사람들 하나하나를 관제하는 거야. 그게 바로 인비트로 시티야.”

 

루니는 접속을 해제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어찌보면 예전부터 도시 지배자들이 늘상 벌이던 짓이야. 그 계획의 정점에 지금 세별바이오와 양 대표 일가가 있는 거고.”

 

댕이는 루니의 말을 곰곰히 되새기며 맥주 캔을 휘저었다. 그랬다, 만능백신 이후로 지방소멸이 가속화되었다. 사람들은 안전한 서울로 몰리고 버려진 서울 바깥은 빠르게 정글로 변모했다. 여전히 1천만 명 정도가 정글을 떠돌고 있다. 버려진 자들. 어차피 죽게 될 매개인간종. 배급민들에게 야생인들은 인간이 아니라 감염원이었다. 야생인은 위협을 넘어 공공의 적, 혐오와 박멸의 대상이었다. 배급민들은 모든 걸 야생인의 탓으로 돌렸다. 지방이 정글화 된 것도, 더 이상 일자리가 늘지 않는 것도, 서울에 갇혀 더 많은 생체포인트를 쌓지 못하는 것도, 서울 집값이 계속 올라 주주인이 될 수 없는 것도, 모두 전염병을 옮기고 다니는 더러운 야생인 탓이었다. 이미 서울을 제외한 남한 곳곳이 공공연한 야생인 사냥터다. 특히나 여러 바이러스의 복합 감염으로 기이하게 변형된 돌연변이 야생인 사냥이 인기였다. 외국인 사냥꾼들을 위해서 야생인 사냥 테마파크를 추진하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니까. 정글의 흉흉한 소문과 괴담은 끊이지 않았다. 공기 감염을 피해 아가미호흡을 하며 산다는 남해 아열대의 야생인들. 먹을 게 없어서 서로를 잡아먹거나, 아이를 낳아서 잡아먹는 내륙의 야생인들. 괴수들의 생태계로 변모하는 정글. 댕이는 끔찍한 참상의 이미지에 겹쳐진 산이를 떠올리며 멍하니 말문을 열었다.

 

“요즘… 정글은 어때?”

 

루니는 말이 없었다.

 

“야생인은 돈이 되니까…”

 

기름 두른 철판을 빙빙 돌리던 미니멈의 입으로부터 한숨과도 같은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냥꾼들한테 잡히면 먼저 생체포인트와 기본소득 계정을 털려. 그 정도까지는 뭐 괜찮아. 어차피 정글에서는 돈이 필요없으니까.”

 

미니멈은 뭐라 중얼거리며 철판을 화로대에 건 다음 댕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다음에는 산 채로 장기를 털려. 악독한 사냥꾼들은 신선해야 한다며 산 채로 쓸만한 장기를 적출하거든. 눈하고 간이 뽑힌 상태로 버려진 야생인은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가. 자비로운 사냥꾼을 만난다면 죽임을 당한 다음에 장기를 털리겠지. 하지만 그건 운이 좋은 케이스고. 가장 운 나쁜 케이스는…”

 

댕이는 미니멈의 눈에 비친 자신을 마주했다. 미니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세별바이오에 팔려가는 거야. 모르모트로.”

 

루니가 맥주 캔을 구기면서 미니멈의 말을 받았다.

 

“사실 세별바이오가 야생인들한테 바이러스를 퍼트린다는 건 야생인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야. 배급민들은 콧방귀를 끼겠지만.”

 

미니멈은 아이스크림 통을 박박 긁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모르모트는 갖은 생체실험을 당한 다음 마지막 임상테스트를 위해 정글로 방출돼. 새로 합성한 바이러스와 나노봇을 접종해서 정글에다 버리는 거야, 집단감염률 체크를 위해서. 그런데 야생인들도 바보가 아니거든. 누구도 감염된 모르모트를 돌보진 않아. 결국 버림받은 모르모트는 바이러스로 죽거나, 돌연변이 사냥꾼들한테 잡혀서 박제가 되거나, 다른 야생인들한테 잡아먹히게 돼. 그러니까… 너도… 찾지 마.”

 

댕이는 눈을 지릅뜨고 미니멈을 쏘아보았다. 미니멈은 눈을 깔고 호떡을 뒤집으면서 말했다.

 

“동생 찾는 글 봤다. 클라우드에 적혀 있더라. 그런데 찾지 마.”

 

미니멈은 호떡에 불개미를 탈탈 뿌리며 맥없이 구시렁거렸다.

 

“우리 가족도 다 그렇게 죽었어.”

 

타닥타닥, 불개미 볶는 소리가 났다. 셋은 말없이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SEOUL SAVE EARTH

 

새벽하늘인데도 여전히 인공달이 밝았고, 유려한 오방빛의 문장은 선명했다.

 

*

 

루니의 드론 탈취 작전은 실로 간단했다. 그냥 한 달을 기다린다. 그러면 드론들이 신규 백신 업데이트를 받지 않은 댕이를 야생인으로 인식하지 않겠냐는 것.

 

“드론을 납치하는 게 아냐. 드론이 너를 추격하도록 만드는 거지. 댕이, 네가 일종의 해킹그래피티가 되는 셈이랄까.”

 

그러면서 댕이에게 캡슐 한 알을 건넸다.

 

“미리 마셔 둬. 해킹 나노봇이야. 신원세탁용. 이걸 먹으면 넌 유령이 돼. 드론이 이 해킹 나노봇을 감지해서 너를 신원미상으로 등록하는 순간, 우리가 드론 GCS(Ground Control Center, 지상관제소)서버를 해킹할 거야. 그다음에 네가 X조 드론 중에 한 대를 골라서 EMP탄을 설치해. 그러면 우리가 X조 드론 전체를 공연모드에서 패트롤모드로 바꿀 거야, 해킹이 아니라 자율적인 추격비행으로 보이도록. 드론이 너를 따라가다가 따릉이의 GPS 신호를 추격하도록 목표를 설정하는 거지.”

 

괜찮은 방법이었다. 공연모드에서 광고용 드론은 500×500×500으로 설정된 거대한 3차원 가상 큐브 안에서만 공연을 펼친다. 드론을 가두는 일종의 ‘우리’인 셈인데, 바람이나 오작동으로 드론이 이 가상의 울타리(지오펜스, geo-fence)를 넘어가려는 순간 자동으로 착륙하게 프로그램 되어있다. 그러니까 루니의 계획은 공연모드에서 패트롤모드로 바꿔서 드론을 ‘우리’에서 탈출시키자는 것이었다.

EMP탄 투하는 배송용 드론의 소형 투하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댕이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배송물이든, 선물이든, 폭탄이든, 어차피 드론에게는 똑같은 투하 이벤트일 뿐이야. 다른 건 인간들의 의도지.”

 

그로부터 한 달 후, 드론패트롤 실증 테스트가 대동강 인증을 통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동시에 세별바이오·서울야경 컨소시엄이 서울에서 드론패트롤 사업을 시작한다는 뉴스가 쏟아졌다. 바야흐로 본격적인 야생인 색출이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의 작전도 시작되었다.

디데이인 사업 개시 첫날 19시.

월드컵대교 위로 따릉이 세 대가 맞바람을 헤치며 줄지어 달리고 있었다.

 

*

 

댕이는 겹겹으로 둘러싼 바리케이트를 폴짝폴짝 뛰어넘어 난지한강공원 야구장에 들어섰다. 예상대로 첫 번째 스테이지를 끝낸 드론들이 나선을 그리며 서서히 착륙하는 중이었다. 시간과 착륙지점으로 보아 X조 아이들이 분명했다.

 

“어이!”

 

댕이는 반가운 마음에 그만 저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순간 하강하던 200여대의 드론이 경로를 틀어 댕이를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러더니 반기듯이 댕이 머리 위를 윙윙 맴도는 게 아닌가.

 

“얘들아!”

 

댕이는 X조 아이들을 향해 두 팔을 번쩍 펼쳤다. X조 아이들도 신이 난 듯 댕이를 감싸고 돌면서 LED를 반짝거렸다. 댕이는 X조 아이들이 자신을 반기는 거라고 믿기로 했다. 아마 바리케이트 밖에서 루니와 미니멈이 GCS를 해킹하고 X조를 패트롤모드로 전환했겠지. 설사 댕이를 야생인으로 감지하고 경보를 보내는 거라도 뭐 상관없었다. X조 아이들은 댕이 주변을 빙빙 돌며 한 대씩 땅으로 착륙하기 시작했다. 그때 마운드 쪽에서 누군가가 슬렁슬렁 댕이에게로 다가왔다. 익숙한 실루엣에 익숙한 향기였다.

 

양 대표?

 

댕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대형을 살폈다. 대형의 동쪽 끝에 언제나 대형의 기준을 잡아주던 ‘빨강기준이’가 충전모드로 잠들어 있었다. 댕이는 자세를 낮추고 빨강기준이에게 달려가 어깨에 두른 힙색에서 접이식 투하기를 꺼냈다. 투하기의 집게발이 새끼손가락만 한 실린더형 EMP탄을 붙잡고 있었다.

 

“댕이 씨?”

 

댕이는 접착용 고무찰흙을 꺼내 조물조물 눌러서 투하기 머리에 붙인 다음 빨강기준이 배 부위의 LED 덮개에 찰싹 붙였다. 양 대표는 그러는 댕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댕이 씨 맞네. 그런데 지금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댕이는 힙색을 주섬주섬 챙기면서 꾸물꾸물 일어섰다. 양 대표는 팔짱을 끼고 쌀쌀맞게 물었다.

 

“뭐야. 그렇게 나가고 연락도 안 되더니. 지금 다시 일하러 온 거예요?”

 

댕이는 쭈뼛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야구장 밖에서 루니와 미니멈이 손을 흔들며 재촉하는 게 보였다.

 

“그것 보라니까. 서울에서 일 구하기가 만만치 않죠?”

 

양 대표의 냉소에 댕이가 마지못해 대꾸했다.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우리 애들 데리러 왔어요.”

“우리 애들?”

 

양 대표는 귀를 의심하며 황당해했다.

 

“댕이 씨 야생인 되더니 진짜 많이 망가졌구나.”

“네. 그만 가볼게요.”

 

댕이는 건성으로 히죽 웃으며 등을 돌렸다.

 

“야!”

 

양 대표가 갑자기 댕이 손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댕이는 그만 중심을 잃고 옆으로 미끄러졌다. 쓰러진 댕이는 가슴을 털고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바짝 치켜들어 양 대표를 쏘아보았다. 양 대표도 댕이를 매섭게 내려다보았다. 댕이가 발을 딛고 일어서려는 찰나, 양 대표가 댕이의 뺨을 갈겼다.

 

짝!

 

댕이는 그 자리에 다시 푹 쓰러졌다.

 

“꺼져! 이 더러운 야생인 확진자 새끼.”

 

양 대표는 쓰러진 댕이 머리맡에다 침을 뱉었다. 댕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뒤를 보았다. 루니와 미니멈이 바리케이트를 넘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바닥을 보니 드론 충전이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이제 곧 드론이 뜰 것이다. 나노봇 없는 피가 도는 야생인 루니와 미니멈이 영락없이 발각될 상황. 지오펜스 반경으로 들어오면 안 돼. 댕이는 루니와 미니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오지 마!”

 

삐삐 삐삐 삐삐

 

여기저기서 충전 완료 알람이 울렸다.

 

벌써?

 

X조 아이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댕이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나가!”

 

그러자 슈우웅 소리를 내며 빨강기준이가 하늘로 치솟았다. 전에 듣지 못한 낮고 음산한 로터음이었다. 나머지 199대의 드론들도 비슷한 소리를 내며 나란히 따라 올랐다.

 

그우우웅 스아아악

 

200대의 하악질은 섬찟했다. 루니와 미니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양 대표는 여전히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쓰러진 댕이를 향해 욕지기를 쏟아붓고 있었다. 순간 빨강기준이가 양 대표에게 날아들었다.

 

핑.

 

양 대표의 뺨에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양 대표는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핑. 핑. 핑. 핑. 핑…

 

연이어 백여 대의 벌 떼 드론이 양 대표를 쏜살같이 가르고 지났다. 양 대표의 머리가 등 뒤로 툭 떨어졌고, 얼굴을 잃은 몸통이 핑그르르 돌면서 팽이처럼 무너졌다.

 

핑. 핑. 핑. 핑. 핑…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댕이는 파르르 떨며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X조 아이들이 천연덕스레 맴을 돌며 댕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니와 미니멈이 달려와 댕이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이야. 가야 해!”

 

루니와 미니멈이 댕이를 잡고 뛰었다. X조 아이들이 가만히 그 뒤를 쫓았다. 따릉이에 오른 댕이는 무의식에 이끌려 발을 굴렀다. 어둑한 밤의 야구장은 여느 때처럼 오르내리는 드론들로 분주했다. 양 대표 말대로였다. 드론충전사는 눈에 띄게 줄어, 너른 잔디밭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었다. 떨어진 양 대표의 머리만 외야 한구석에 박힌 채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쇼는 계속 되었다. 하지만 X조 200대가 ‘SEOUL SAVE EARTH’의 ‘E’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밤하늘에는 ‘E’ 빠진 문장이 펼쳐졌다.

 

SOUL SAVE EARTH

 

*

 

댕이는 정신을 가다듬고 작전에 집중했다. 루니와 미니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잡았고, 댕이가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계획대로 X조 아이들이 1킬로미터 상공에서 댕이의 따릉이를 뒤따랐다.

사라진 ‘E’를 확인한 관제소는 X조를 포획하기 위해 공연 중인 드론을 재밍모드(Jamming, 전파를 교란하여 드론을 무력화 시키는 방법)로 전환했다. 추격드론들은 문장을 한 자 한 자 지우면서 지오펜스 밖으로 풀려 나갔다.

 

SOUL SAVE EARTH

OUL SAVE EARTH

UL SAVE EARTH

L SAVE EARTH

SAVE EARTH

 

하늘에 EARTH만 남았을 때, 댕이 일행은 벌써 가양대교를 건너 까치산터널을 지나 부천으로 빠져서 작동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재밍드론이 X조를 따라잡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X조 아이들이 따릉이 속도와 지상 경로에 맞춰서 느릿느릿 구불구불 날아간 반면, 재밍드론들은 시속 120킬로미터 속도의 직선 항로로 추격해 왔기 때문이다.

 

“아, 저길…”

 

루니가 하늘을 가리키며 안타까이 탄식했다. 상공에서 반짝이던 X조의 아이들이 유성우처럼 우수수 쏟아지고 있었다. 대형의 뒤쪽에부터 재밍드론에 포획된 아이들이 GPS 좌표를 잃고 하나하나 강제 착륙 당하는 중이었다. 이미 대형의 반 정도가 사라진 상황. 미니멈이 다그쳤다.

 

“다 왔어. 더 빨리!”

 

까치울역을 지나 원미산으로. 일행은 몸을 세우고 따릉이를 좌우로 거세게 흔들어 대며 힘차게 언덕을 올랐다. 그래봤자 역부족이었다. 따릉이가 드론보다 빠를 수는 없는 일. 선두의 빨강기준이가 포획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부천종합운동장으로 가는 고개 중턱. 2킬로미터만 더 달리면 목표 지점인 세별바이오 만능백신 데이터센터였다. 하지만 이제 남은 아이들은 고작 대여섯 대. 댕이가 따릉이를 멈추고 앞을 향해 소리쳤다.

 

“안되겠어. 그냥 여기서 터뜨리자.”

 

미니멈이 뒤를 돌아보면서 외쳤다.

 

“아직 2킬로나 남았어. 여기서 터지면 정전 반경 바깥이야.”

 

루니가 관자놀이 버튼을 눌러 좌표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아냐. 직선거리로는 1킬로미터야. 딱 반경 안이야.”

 

일행의 머리 위에서 세 대의 X조가 원미산 기슭으로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X조는 빨강기준이까지 세 대.

 

“아슬아슬하지만 여기서 해 보자. 더 이상은 무리야. 기회는 지금뿐이야.”

 

루니의 말에 셋은 서로의 눈빛을 교환했다. 미니멈이 재빨리 거리측정기를 꺼내서 빨강기준이에 맞추고 레이저를 쐈다.

 

“고도는 그대로야. 1킬로미터!”

“오케이!”

 

댕이가 소리치며 투하기 리모컨을 흔들어 보였다. 루니가 댕이를 향해 소리쳤다.

 

“투하!”

 

틱.

 

투하 버튼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틱. 틱. 틱.

 

반응이 없었다. 루니가 소리쳤다.

 

“재밍에 걸렸나 봐. 전파교란이야. 그냥 터뜨려!”

 

댕이는 허겁지겁 폭파 버튼을 눌렀다.

 

틱.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틱. 틱.

 

리모컨 주파수마저 재밍에 걸려든 것이다.

 

“아…”

 

루니는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미니멈은 하늘에다 고함을 악 지르며 애먼 따릉이를 발로 차 쓰러뜨렸다. 하늘에는 홀로 남은 빨강기준이가 수백 대의 재밍드론에 둘러싸여 부천종합운동장 안으로 순순히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운동장 너머 원미산 기슭에서는 만능백신 서버를 식히느라 응결한 산안개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틱. 틱.

 

댕이는 부질없이 폭파 버튼만 눌러댔다.

 

*

 

수용소의 밤은 길다. 오늘같은 밤이면 더더욱 그렇다. 다음 달 업데이트 할 백신을 접종받은 댕이는 침상에 누워 창살에 빗겨 후두둑 떨어지는 장맛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긋지긋한 비. 근 한 달 동안이다. 장마만큼이나 지긋지긋한 임상이 끝나면 이제 정글로 쫓겨나겠지. 간수는 그나마 가을에 추방되는 걸 다행으로 여기라며 비아냥댔다. 모르는 말씀. 날이 좋아지면 사냥꾼만 신나는 거지. 옆 방 동료가 끼니마다 배식을 게워내면서 그렇게 말했다. 비쩍 말라야 빨리 죽는다고. 때깔 좋은 야생인은 산 채로 사냥꾼의 노리개가 되기 십상이라고. 하지만 댕이는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냥 배가 고파서. 임상 실험의 부작용으로 미각을 잃었음에도 허기는 여전했다. 이 또한 부작용인가. 댕이는 뻑뻑한 눈꺼풀을 억지로 닫고 되뇌었다. 오늘만, 아니 지금만 생각하자. 그러고는 지난해를 떠올렸다. 실패로 끝나버린 작전을. 흙잔디에 뒹굴던 양 대표의 머리통을. 루니는 X조 아이들이 댕이를 알아 본 건 착각이고, 양 대표를 공격한 건 일시적인 버그일 뿐이라고 했다. 댕이는 반박했다, X조 아이들이 분명히 자신을 알아본 거라고, 우호적인 생체신호를 발산하는 자신을 공격하는 양 대표를 적으로 인식하고 전투모드에 들어간 거라고. 루니는 그게 버그라니까, 라면서 미니멈과 터덜터덜 원미산 너머로 사라졌다. 수용소에 끌려온 댕이는 약에 취해 기절하는 순간마다 그 순간을 곱씹었다.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지? 나는 왜 따라가지 못했지? 왜 그랬을까?

 

그 때였다.

 

쿵!

 

마른번개 치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이웅

 

배관을 타고 귀를 찢는 파열음이 수용소 전체로 파고 들었다. 퍼덕이는 거대한 날갯짓 소리가 수용소 위를 감돌았다. 곧이어 기이한 울음과 웃음소리, 그리고 문 밖 여기저기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철컹.

 

댕이 방의 잠금 장치가 꺼지는 소리가 났다. 약이 덜 깬 댕이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미끄러지듯 침상에서 굴러 내려온 다음, 비틀비틀 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문을 당겼다. 복도는 쥐 죽은 듯 괴괴했다. 간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복도 벽과 바닥은 검붉은 손자국으로 어지러웠다. 선득한 핏자국들은 풀린 실타래처럼 이리저리 엉켜 엘리베이터 쪽으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댕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댕이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림자를 향해 걸었다. 그림자의 눈동자 사이에서 N자 모양의 붉은 섬광이 희뜩였다. 그 빛으로부터, 살기가 아니라, 적의가 아니라, 오래된 그리움의 감각이 전해졌다. 웅크린 그림자가 몸을 일으켜 날개를 펼치자 댕이는 확신했다.

 

“산이?”

“그래, 네 동생을 찾았어.”

 

그림자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익숙한 목소리. 루니였다.

 

“너희들…”

 

댕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뺨을 꼬집고는 루니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검은 비늘로 덮인 루니의 피부는 갑옷처럼 단단했다. 루니는 예리한 송곳니를 드러내 겸연쩍게 웃으며, 몸을 살짝 틀어서 자신의 등에 솟은 날갯죽지를 보여주었다. 댕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니와 산이를 번갈아 보았다. 산이는 반가운 건지 서러운 건지 날짐승처럼 끄악끄악 지저귀면서, 발톱을 숨긴 손으로 댕이의 양어깨를 조심스레 토닥였다. 댕이도 말을 잊고 그저 꺼끌꺼끌한 산이의 팔뚝 비늘만 쓰다듬었다. 루니는 날개를 살짝 펴서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한껏 뿌듯해했다.

 

“야생인들은 아이들을 저버리지 않았어. 모르모트로 버려진 아이들을 품어서 함께 길렀지. 아이들과 함께 감염되고 함께 진화했던 거야. 그들은, 아니 우리는 강해졌어. 비늘이 덮이고, 날개가 돋았고, 거리낌 없이 인간을 먹을 수 있게 되었어. 이제 우린 돌연변이가 아냐. 이렇게 진화한 거야. 이게 우리의 본모습이야. 어떤 바이러스도 우릴 해치지 못해. 인간들도 마찬가지야. 이제는 우리가 포식자야. 댕이야, 지금부터 서울은 우리들 거야.”

 

루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댕이의 등 뒤에서 시커먼 게 불쑥 튀어나왔다.

 

“소년소녀 진보정권 수립!”

 

미니멈이었다. 댕이의 웃음보가 터졌다. 미니멈은 장난스럽게 날개를 파닥이며 천장 위로 거꾸로 매달렸다. 그리고 먹이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갈고리 발톱을 쫙 펴고 한 번 더 구호를 외쳤다.

 

“로봇생산! 노동해방! 직접민주주의!”

 

산이가 껠껠거리며 천장으로 풀쩍 뛰어 올라 미니멈과 쫓고 쫓기며 몸장난을 벌였다. 루니는 그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도시만 있으면 우리 모두가 신이 될 수 있어. 우린 이 도시를 정복하고 신들의 도시로 만들 거야. 모두가 신으로서 평등한 도시. 경쟁도 착취도 없는 도시.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를 망치지 않는 도시. 우리는 인간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거야. 하늘은 땅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활하거든. 그리고 우린 날 수 있으니까.”

 

댕이는 모호하고 야릇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 인간들은?”

“음… 그게…”

 

루니는 난감한 기색으로 머뭇거리며 복도를 빙 둘러보았다. 천장과 벽을 타고 돌던 미니멈이 우다다다 달려왔다.

 

“면역인간종은 우리 가축이 될 거야.”

 

미니멈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댕이에게 사람 팔 하나를 불쑥 들이밀었다.

 

“먹어. 너도 우리랑 함께 해야지.”

 

어깨뼈째로 쑤욱 뽑힌 팔뚝은 여기저기 물어뜯겨서 너덜너덜했다. 댕이는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지못해 그나마 덜 뭉개진 팔목께에다 입을 앙 벌렸다.

 

와작.

 

시금털털한 피냄새에 코가 뻥 뚫리면서 댕이의 미각이 되살아났다. 거꾸로 매달린 미니멈이 세 갈래 혀를 날름거리면서 물었다.

 

“맛이 어때?”

“뭐 그냥, 불개미 맛?”

 

미니멈은 뭐가 좋은지 끼룩끼룩 지저귀며 날개를 파닥거렸다. 산이도 날갯짓을 하며 몸을 뒤집고 댕이를 천장으로 천천히 끌어올렸다. 어느새 산이는 댕이를 바싹 끌어안고 순식간에 복도를 헤쳐 나와 수용소 위로 치솟았다.

 

휘이이잉.

 

난생 처음 느껴보는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댕이는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좁다란 서울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하늘은 새까맸다. 산이와 댕이의 일족들이 날개를 펼쳐 달빛을 삼키고 있었다. 발아래로 인공달이 보였다. 더 이상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수천 대의 자율비행 드론들이 한갓 먹잇감에 지나지 않는 면역인간종의 도시를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어스레한 강물 위로 오방빛의 글자들만 스산히 흐물거렸다.

 

CORONA SAVE EA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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