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그들의 방식

2014.09.14 05:5509.14

안녕하세요.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요 바로 앞 수선집에 가방 맡기고 왔어요.”

기자는 오래 입은 듯 편안한 정장차림에 손에는 알 수 없는 서류뭉치를 잔뜩 끌어안고 있었다. 인터뷰에 앞서 편안한 인상을 심으려는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나는 그녀에게 믹스커피와 녹차 중에 선택권을 주었으나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테이블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쏟아 내리고는 내 손에 들린 녹차를 귀엽게 가로챘다.

땡기는 건 커핀데 설탕 때문에

냉온수기 꼭지에 고였던 물을 살짝 빼서 버린 뒤 종이컵에 물을 받으며 그녀는 오늘 인터뷰와는 별 상관없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정말 고역이다, 이 동네 터미널을 가끔 이용하지만 20년 째 뭐 바뀐 것이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손님이 없는 시간에 왔다 등등.

그래도 가방은 진짜를 써요. ~ 진짜 비니루. 몇 년 전에 마트에서 4만원 줬어요. 그런데 지퍼가 고장 난 채로 계속 버티다가 때마침 수선집이 눈에 띈 김에 그냥 들어갔죠.”

나는 화장실 위치가 다행스럽게도 미용실에서 가장 멀다는 것을 잠시 떠올렸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수선집 노인을, 많은 날엔 세 번 이상 화장실 앞에서 마주치기 때문이다. 주변정보를 꿰고 있는 세탁소아줌마의 말에 의하면 수선집 노인은 전립선문제로 화장실을 수도 없이 들락거린다고 한다. 실제로는 몇 번인지 알 수 없지만 노인은 가게를 열어두고 화장실을 갔다가 도난을 당한 일이 많다고 한다. 그것이 어느 정도 부풀려졌을 것이라 짐작되긴 하지만 여하튼 이 주변 사람들은 노인에게 소중한 물건을 맡기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수선집 노인이 그녀의 가방을 작업대에 올려둔 채로 화장실을 갔을지 모른다는 말을 전할까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그녀는 실례가 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미용실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공깃돌을 빠르게 낚아채듯이 일단 눈에 담아놓고 이미지에 생각을 덧대는 취재방식을 쓰는지 모르겠다.

괜찮아요. 편하게 계세요. 인터뷰 편하게 하시라고 손님도 없네요 뭐원래 이때쯤 꼬맹이 한 둘은 오는데

그녀는 자신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쾌활한 모습으로 뭔지 모를 콧노래를 부르며 서류를 추리고 녹음기를 꺼내서 점검을 했다. 녹차를 마시기는 했는지 입술에 살짝 갖다 대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그녀가 자신의 일을 무난히 하도록 협조하기 위해선 우선 내가 앉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가장 가까운, 이용 빈도가 가장 많지 않은 미용의자를 돌려서 앉았다.

 

기자님도 어느 정도 아시는 바가 있으시겠지만 걔들은 좀 다른 행동을 많이 하잖아요? 미용실을 오는 사람들의 뭐랄까요. 행동패턴? 뭐 중요하진 않겠지만 그런 게 있어요. 대부분 여자 손님들은 기다릴 때 다리를 꼬고서 잡지를 뒤적거리거나 누구랑 통화하다가도 자기차례는 귀신같이 안 놓친다거나, 떼로 몰려온 여학생들은 말이죠. 누군지도 모르는 가수를 놓고 자기네들끼리 편이 갈리기도 해요. 우리도 옛날에 그랬잖아요? 꼬맹이들은 이것저것 손대다가 엄마한테 야단맞고 울고, 깎다가 또 울고, 감기는 건지 물고문을 하는 건지남자들이요? 간간이 특이한 진상들 빼고는 죄다 비슷해요. 머리 푹 숙이고 핸드폰만 만지다가는 얌전히 깎고 계산하는 게 다예요. 더러는 졸기도 하지만 뭐 그 정도야아 꼬맹이 손님이 왔네요.”

처음 얼마간 말이 없던 아이엄마는 나와 기자가 이따금씩 주고받는 이야기의 맥락을 꿰고는 슬쩍 끼어들었다.

요 앞 105동에서 여학생애가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온 적 있었다고 하잖아요. 밖에서 누구 들어가기 기다리다가 여학생이 들어가니까 따라서 들어갔는데 어마르래요 글쎄모자를 푹 눌러썼는데 버튼을 누르지도 않더래요. 그래서 문 닫히기 직전에 밖으로 나와서 냅다 뛴 거래요. 나중에 애 엄마가 관리소에 물어보니까 입주자 중엔 어마르가 없다고 했는데

나는 불안정한 정보를 들었을 때의 기자 반응이 궁금해서 아직 순서가 되지 않은 아이 옆머리를 먼저 깎으며 그녀의 행동을 거울로 보았다. 그녀는 뭔가 받아 적는 시늉을 태연히 하면서도 뭐야 이 아줌만하는 마음을 아주 미약하게 살짝 드러냈다.

재작년쯤일까요? 미용실에서 어마르를 처음 만난 게네 당황했었죠. 영어를 해야 하나 하고 잠깐 동안 정신없었어요. 그런데 생각하곤 다르게 한국말을 곧잘 해요. 그리고 네 맞아요. 꾸깃꾸깃한 천 원짜리를 뭉텅이로 꺼내서 그냥 내밀었었어요. 지폐를 색깔에 따라 보는 게 아니라 장수로 보더라고요. 그 뒤부터 점차 늘어나면서 단골도 생겼어요. ~ 우리랑 다르게 걔들은 머리가 정말 빨리 자라요. 대략 1.5?”

아이엄마는 간신히 사람소리만 들리는 TV를 향해 고개를 고정한 채였지만 내가 아이의 머리를 제대로 깎으면서 떠드는 것인지, 기자는 뭘 쓰는지 궁금한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눈치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펜을 흘깃거리는 눈이 호기심 많은 새끼고양이 같았다. 얼른 집중해서 깎거나 짧게 대답을 잇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아이엄마의 핸드폰이 울리고 아이엄마는 편견을 깨는 행동을 보였다. 인터뷰가 방해될까 황급히 핸드폰을 들고서 바깥 통로로 나가서 받은 것이다. 그 행동을 반기는 기자와 눈이 마주치자 우리 사이에 무언의 통함을 짧은 순간 느끼게 되었고, 그녀를 신뢰하는데 남은 어려움이 자연스럽게 걷어졌다.

모르진 않았지만 걔네들은 성장속도가 정말 빠르다는 것을 체감으로 알았어요. 일 년 만에 어린 티를 벗는 모습을 보고 좀 놀랐으니까그리고 자주 오는 녀석은 일주일에 세 번도 와요. 근데 재밌는 건요 이런 얘기 필요한지 모르겠는데, 머리를 감길 때 얘들 손 위치가 전부 똑같아요. 우리 지구인은 팔걸이에 얹거나 아니면 깍지를 끼거나 하는데 얘들은 하나같이 그냥 축 늘어뜨려요. 네 시체처럼. 그리고요? 머리 깎을 때 거울로 얼굴을 보면요 다른 사람들은, 여자들은 잡담하면서 좌우로 돌려보거나 하잖아요? 남자들은 눈을 감다가 졸기도 하고요. 그런데 얘들은 눈을 똑바로 떠서 거울 속 제 눈을 응시해요. , 네 생각처럼 뭐 무섭거나 그렇진 않아요. 뭐랄까요 순박하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길들여진 야생동물 같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마음에 들진 않아요.”

통화를 마친 아이엄마가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소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연신 떠들면서도 아이 목 주변에 잘린 머리카락을 털어내는 것을 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보았다.

이 다음 질문부터가 살짝 좀 부담스럽겠네요. 애기 손님 가고 나서 하시죠.”

그녀는 다 식어버렸을 녹차 티백을 괜스레 집어 저었다.

 

아이는 얌전했고 깎은 머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눈높이에 보이는 미용기구들이 궁금한 눈이었지만 손을 대지는 않았다. 아이엄마는 통화 이후부터 다른 관심사로 머릿속이 찼는지 조금 전 자신이 끼어들던 대화에 대해 싹 지워버리고 들어올 때의 상태로 계산한 뒤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나서고서 몇 초간 뜸을 들인 기자가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까지 아이의 몸에 붙어있었을 가느다란 머리카락들이 온기로부터 단절되어 내리다 만 눈처럼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비질을 서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나는 꼬맹이 손님이 들어오기 전처럼 미용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혹시나 내가 과민반응이라도 보일까 최대한 안정적인 태도를 갖추면서도 하고자 하는 말은 차근차근 다 토해내었다.

황당했죠. 뉴스에서나 보는 일인 줄 알았었으니까손이 묶일 때쯤에서야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 괜찮아요. 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네 뭐, 처음부터 그냥 다 말씀드리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테이블 하나만 사이에 두고 앉으니 성량조절과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 일이 있기 몇 주 전부터 가게 앞에 파가 있었어요. , 대파요. 출근해서 문을 따려고 보면 가게 앞에 교차로로 싼 시든 대파가 놓여있는 거예요. 당연히 누가 실수로 두고 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아서 바로 옆에가 중국집이잖아요? 가서 물어봐도 전혀 모르고. 그래서 일단 저 냉장고에 넣어두고 기다려봤지요. 그런데 며칠 뒤에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된 거예요. 그때부터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생겼죠. 그래서 금은방에도.”

기자의 눈이 살짝 커지는가 싶더니 펜 끝으로 자신의 턱을 두어 번 두드리면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깐만요. 그냥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여기 상가 사람들하고는 평소 잘 알고 지내시는 편이시겠지요?”

그럼요. 바로 앞 태권도장 관장님하고 중국집 사장님이 어디 다른데 이발소에서 깎고 나머지 분들은 전부 제 고객인걸요. 태권도장 바로 옆 금은방하고 그 옆에 선물가게가 주인이 같아요. 부인 분들이 가끔 미용실에서 모이게 되면 수다가 길어지기도 하지요. 금은방은 실질적으로 장사가 심각하게 안 되는 편이지만 CCTV랑 세콤을 달았어요. 덕분에 여기 바깥 통로를 죄다 비추고 있죠.”

형태가 예쁘진 않았지만 제법 고와보이는 기자의 손이 끼적이던 메모지를 솜씨 좋게 뒤로 젖혀 넘기더니 백지 위에 큼지막한 네모를 그렸다. 네모 속엔 상가현황이 빠르게 정리되어 들어갔다. 엉성하지만 오밀조밀 들어갈 것이 다 들어간 그림에 상대적으로 골방과도 같은 금은방과 선물가게 사이로 진하게 줄이 몇 번 더 그어졌다. 그리고 상가건물 바깥에 명왕성처럼 홀로 떨어진 수선집을 마저 그려 채우더니 금은방 앞 복도에 CCTV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하고서야 끝났다. 기자라기보다는 수사관 앞에 앉은 느낌이 들었다.

“CCTV에 파를 들고 지나가는 어마르를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어요. 걔 단골이거든요. 항상 구부정하고 눈은 올려다보는 습관이 있는 애죠. 금은방 주인이 굳이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아도 파악할 수 있었어요그 누구도 파를 그렇게 소중히 안고 다니지는 않거든요.”

기자의 펜이 네모 아래에 꽃다발을 주저 없이 슥슥 그리더니 꽃이 있어야 할 곳에 몸통이 가려진 파를 그려 넣었다. 앞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충분히 난초라고 우길만한 그림이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일부러 퇴근시간을 늦춰서 그녀석이 나타나길 기다렸어요.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걔가 뒤춤에 파를 숨기고 유리창 밖에서 기웃거렸어요. 그래서 들어오라고 했지요. 그리고 불편한 시간이 싫어서 제가 어마르한테 바로 물었죠. 왜 나한테 파를 주는지. 분명히 다 알아들었을 거라 확신했지만 대답은 없더군요. 그저 몸만 비비 꼬면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기분이 참 이상하더라고요. , 물론 좋다는 뜻이 아니에요.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내색하진 않았어요. 순전히 그냥단골손님 놓치기 싫었으니까요. 저 물 좀 마시고 해도 되죠?”

기자는 과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말이죠. 가령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 현지 생활방식을 최대한 숙지하고 가도 음~ 그걸 뭐라고 하죠? 맞아요, 문화정서 뭐 그런 거. 그걸 완벽하게 알아서 가긴 어려운 거잖아요? 누군가 다른 어마르가 걔한테 잘못된 코치를 해준 것 같아요. 지구에선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식물을 싸서 준다. , 그렇죠. 걔 주변 누군가가 풀 뭉치를 둘둘 말아서 선물하면 여자가 감동받을 거라 웃기는 코치를 했다고 생각해요.”

기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스케치를 이어갔다. 파 그림에 리본이 둘러쳐졌다.

그리고 사흘 쯤 지나서 걔가 다시 왔어요. 물론 머리 깎으러 온 것이 아니었죠. 한 손에 뭔가가 들려있기에 가위를 놓지 않은 채로 양 손바닥을 보이면서 말했어요. 이젠 그만 가져오라고요. 헌데 걔가 내민 것은 파가 아니었어요. 저 문 앞에 서서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과일주스박스를 한 손으로 내밀고 있었어요. 고집스럽게 안 나가는 잡상인처럼 말이죠. 뭐가 되었든 더는 받기 싫기도 했지만 사실 공연히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도 퍼질까봐 더 겁이 났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맛볼 테니 한 개만 놔두고 가시라고 검지를 펴 보인 채 말했죠. 그게

내가 일어나 냉장고로 다가가자 그녀는 당연히 다른 손님이 들어온 줄로 생각했다가 작은 안심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들의 심기를 간파하는데 미용실의 많은 거울들만큼 적절한 것이 있을까 싶었다.

그게 이거예요.”

기자는 목을 숙이면서 찬 기운 서린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과일주스치고는 뭔가 좀 이상했을 터였다.

그거 주스가 아니고 걔네들이 만드는 술이래요. 원래 받았던 것은 경찰들이 증거물 가치를 따지면서 가져갔고요. 이건 중국집 사장님이 무슨 유통업자한테서 샘플로 받은 거래요. 수사과정중에 그 술이 나오니까 멀찍이서 지켜봤던 중국집사장님이 나 그 술 안다고 하면서 나중에 보여주시기에 별 이유도 없이 받아뒀죠. 기자님 가지셔도 돼요.”

기자가 술병을 집어 들자 이미 결로가 얇은 원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네 소녀예요. 그 술 이름이. 그림도 참 애들 보기 불안~불안 하죠?”

기자는 몇 번 더 술병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서류뭉치 한쪽에 그것을 놓으며 희한한 술이지만 고맙게 받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메모지를 다시 들어 다음 장으로 넘겼다.

 

퇴근준비 하느라 바닥을 쓸고 있을 때 걔네들이 나타났어요. 세 놈이요. 순간 직감적으로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지만, 오늘은 끝났으니 내일 오시라고 웃는 얼굴로 보내려 했지요. 만일 기어이 깎으려 든다면 터미널 쪽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그 파를 준 놈 말고 다른 애들이 저들끼리만 알아듣는 말로 몇 마디 주고받더라고요. 그러더니 한 녀석이 대뜸 화를 내니까 다른 둘이 군말 않고 따랐어요.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화를 낸 놈이 직급이 높은 모양이었어요. 그러더니 그 대장 놈은 가만히 서서 저를 노려보고 있고 다른 한 놈이 저를 잡아 소파로 끌고 가려고 했어요. 그 사이에 파를 주던 그놈은 문을 잠그려 했고요. 그 순간 뭐랄까요제가 마치 딴 사람이 된 것처럼 이성을 잃어간다는 것을 알았죠.”

잠깐만요. 괜찮으시겠어요? 천천히 말씀하셔도.”

기자는 상체를 앞으로 보이며 지금껏 바꾸지 않았던 자세를 바로 했다. 나를 진심으로 위하는 눈빛도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숨을 한 번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니까파를 준 놈이 덤빈 게 일단은 아니네요?”

네 맞아요. 걔는 몇 초 만에 문 잠그기를 성공했고 바깥에 망보는 역할을 하더군요. 어찌나 기가 막혔으면 제가 어떻게 소파로 끌려가 던져졌는지 중간 중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어요. 한 놈이 제 팔을 닭 날개 잡듯이 꺾어버리고 준비해온 끈으로 손목도 묶었어요. 근데 끈을 어설프게 묶어서 제가 금방 풀어내고 비명을 질러대니까 수건을 입에 쑤셔 넣었고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 대장이 바지를 벗고 있었어요. 핸드폰으로 경찰을 부르기도 이미 무리였지만 핸드폰도 문 옆 계산대에 있었어요. 저는 정신이 나갈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쳐봤지만 방법은 없었어요. 제 발에 몇 번 차인 대장이 또다시 자기네 말로 화를 내다가 제 양 발을 잡고 올라타 버렸어요. 여기이거랑 이거가 그 때 제가 만든 흔적들이에요. 두 놈 얼굴하고 팔에도 손톱자국을 깊게 내줬죠.”

기자는 눈을 가늘게 떠서 내 등 뒤로 소파에 남겨진 기다란 손톱자국을 주시했다가 내 오른손 중지 손톱 끝이 아직도 성하지 않다는 것을 눈동자만 움직여 확인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손톱이 젖혀지고 놈들을 걷어차고 하면서 찝찔한 피 맛도 봤어요. 그 대장 피일 거예요. 제가 하도 완강하게 저항하자 망보던 놈 네, 파 준 놈이 미용가위를 들고 와서 위협을 했어요. 그런데 희한한 건 세 놈 다 악한의 모습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거예요. 맞아요. 너무 순박한 얼굴들을 하고서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이죠. 그래서 퍼뜩 떠올려지는 생각이 있었어요.”

협조군요.”

맞았어요. 급박한 상황에서 사람의 판단력이 이런 식으로 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그 때 알았어요.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생각이 떠올라서 온 힘을 다해서 수건을 뱉고서잠깐만요.”

단골 할머니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하면서 가게 문을 열었다. 기자는 맥이 끊기자 눈썹을 크게 한 번 올려 보이면서 살짝 웃어보였다. 짧은 웃음이지만 그 안에 잠시 쉬자는 의미와 내 상태를 점검하는 여러 의미를 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들어오자마자 언제나 앉는 그 자리를 찾아 말안장에 오르듯 힘겹게 앉으며 거울 속 모습을 느릿느릿 살폈다.

염색할 때 뒤얐어.”

기자가 초조할까봐 이 할머니는 염색하고 비닐 캡을 씌워드리면 아파트경로당으로 가서 한참 있다 돌아오신다고, 잘 안 들리시니까 크게 말씀하셔도 된다고 알려드렸다. 하지만 기자는 나만 들을 수 있게 작게 말했다. 담배 피울 만한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 화장실 뿐 이에요. 가장 끝 칸에 환풍기가 있어요. 아니에요저는 안 해요. 요즘엔 많이들 피우니까.”

 

할머니 염색을 하는 동안 기자는 자신이 휘갈긴 메모를 정리하거나 철지난 잡지를 넘기기도 하고 어딘가 전화를 걸어서 중요하지 않은 내용으로 떠들기도 했다. 그러고도 내가 끝나지 않자 다시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담배를 몰아서 피우는가보다.

염색을 마친 할머니는 들어올 때처럼 혼잣말을 하며 문밖을 나섰다. 30분 쯤 있다가 들어오신다면 자연스럽게 머리를 감겨드릴 텐데 어떤 날은 아예 오시지 않고 경로당이나 집에서 직접 감기도 하신다. 그러면 다음날이나 늦어도 사흘 안쪽으로 따님이 나타나서 값을 치른다.

기자는 인터뷰 상대로부터 최대한 편안하게 답변을 얻어내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사사로운 수다를 선택했다고 판단된다. 별로 궁금하지 않거나 나와 무관한 이야기를 혼자서 풀어내면서 여유로운 웃음으로 유도하는 잔재주가 있었다. 화장실을 가면서 바깥 통로를 비추는 CCTV가 어디 있는지 제대로 봐두었다는 얘기와 화장실 입구에서 수선집 노인을 연달아 만났는데 자신을 몰라보는 것 같다고 했다. 덧붙여 금은방은 영업을 하긴 하는 것인지 좀 쓸쓸해 보인다고 했다. 나는 이야기를 이어갈 준비가 되었지만 다짜고짜 심문하듯 물어오지 않았다.

화장실 입구 쪽 막 쓰는 창고에 온통 수선집 살림들이 많아요. 그런데 사실 그 할아버지는 소변참기가 힘들어서 자주 오는 거예요. 얘기를 이어서 가죠. 저는 괜찮으니까 뭐 염려는 안 하셔도 돼요. 근데재미있어요. 이게 태연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정말로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미리 말씀드리자면 전 변태 그런 거 아니에요. 걔네들이 제가 원하는 타입도 당연히 아니고요. 오로지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컸고 순간 떠오른 판단을 그냥 실행한 거예요. 믿어주시겠죠?”

기자는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작게 끄덕여주었다.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대장은 계속 밀어붙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대체 뭘 먹고 온 건지 헉헉대는 입에서는 시궁창 냄새가 났어요. 그 때 고개를 내밀어 그 역겨운 입에 키스를 했죠.”

작게 틀어놓은 TV쇼프로그램에서 방청객들의 웃음소리가 퍼지고 냉장고의 미약한 소음, 창문 밖 멀리서 고교생들의 욕지기소리가 들려왔다. 기자는 계속해보세요라고 눈빛을 건넸다.

대장놈 몸이 일순간 경직되더니 곧바로 누그러지더군요. 가위를 들고 설치는 놈한테도 손바닥을 보이면서 멈추게 하고요. 물론 입은 떼지 않은 채로요. 구역질나는 입에 키스를 퍼부으면서 잡힌 팔을 뿌리치니까 뒤에 놈도 스르륵 놔주더라고요. 그래서 차라리 놈 어깨를 밀쳐서 반대로 내가 그놈 위로 올라갔죠. 그때 그놈 표정이 아직도 생생해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소 잡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죽기직전 소 표정하고 겹쳤어요. 그리고엉덩이 아래서 뭉툭한 것이 꿈틀대는 걸 알았죠. 그놈이 깔린 채 속옷을 마저 벗으려고 몸을 뒤척이는데 저는 그 순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용기를 짜내서 그놈 눈을 응시하고 얘기했죠. 세 명 다 재미있게 해줄 수 있다고.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몰라서 조바심이 났지만 놈들은 지들끼리 무슨 얘기를 짤막하게 주고받더니 이해한 눈치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것 눈웃음으로 놈들을 유혹했어요. 최대한 색기를 부려보려고 해봤는데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어요. 그래서 저쪽을 가리키면서 약이 있다고 했어요. , 재밌게 해줄 약이 저기 구석에 있다고요.”

기자는 이라 메모하고는 밑줄을 그었다.

무슨약을

속인 거예요. 욕정에 눈이 멀어버린 놈들이 제각각 알아서 상상하기를 노린 건데, 바보들이라 그대로 속더라고요. 구석에 있는 거 네, 그거요. 초록색 헤어젤. 그걸 손바닥에 몇 번 짜서 양손에 범벅이 되도록 바르면서 눈웃음을 흘려주니까 죄다 좋아서 웃음을 주체 못하더라고요. 망을 보던 놈까지 경계를 풀고 웃기에, 턱짓으로 너도 저쪽 가서 앉으라고 해봤더니 바지를 벗으면서 순순히 가는 거예요. 그 때를 놓치지 않았죠.”

, 머리죠!”

맞아요. 초보 때 연습용으로 오래 쓰던 민두를 얼른 집어서 창문에다 힘껏 던져버렸어요. 바로 저쪽 창문만 색깔이 좀 다르죠? 그 때 유리 깨지는 소리가 정말 소름끼쳤어요. 그리고는 잠긴 문을 빠르게 열고 밖으로 뛰었죠. 심장이 그제야 쿵쾅거리면서 정신없이 달리는데 태권도 관장님이 건물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거의 안기다시피 붙잡았어요. 무슨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그냥 미용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쪽이에요! 저쪽! 했어요. 관장님은 도복에 온통 묻어버린 헤어젤을 잠깐 살피다가 미용실 문에서 바지를 너덜너덜 주워 입다 만 어마르들을 보고서 상황을 파악했어요. 저는 관장님 등 뒤로 숨어버렸고, 세 놈은 못 알아들을 소리로 협박을 하면서 다가오는데 관장님이 통로 한 가운데서 버티고 서서는 이 쌍놈의 새끼들아!’ 하고 소리를 꽥 지르니까 세 놈이 전부 기가 질려서 바닥을 기더라고요.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저도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 말았어요. 관장님이요? 애들 차량운행 마치고 승합차를 대려고 하는데 어디에서 날아온 사람 머리가 보닛 위로 쿵 떨어져 구르더래요. 아무리 무술을 하시는 분이시라도 순간 기겁을 하시곤 바로 달려온 거래요.”

그리고 경찰이 온 거군요.”

네 맞아요. 관장님이 기합만으로 걔네들을 제압해버린 동안에 상가 사람들이랑, 중국집에서 밥 먹다 나온 사람들이랑 요 앞 복도가 사람들로 꽉 찼었어요. 경찰들이 왔을 땐 관장님이 걔들한테 바지나 똑바로 입으라고 윽박지르고 있었죠.”

기자는 여전히 빠른 펜놀림으로 메모를 이어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어마르에 대한 실질적인 국가정책에 대해서 소견을 적어나갔다.

같은 여자로서 참 무섭고 당황스러웠을 텐데요. 그래도 정말 대처가 대단하시네요. 저라면 그렇게 침착하게 못했을 텐데요.”

기자는 사건 이후에 내가 가까운 신경외과에 통원치료를 다녔었다는 내용에 대해, 그리고 어마르고객에 대한 강박증 등에 대해 물어왔다.

진료는 다행히도 별거 없었어요. 그냥 밥 잘 먹고 휴식만 취하면 된댔어요. 악몽을 꾸거나 하지도 않아요. 다만 그 때 그 더러운 느낌은 정말 가시지 않아요. , 여기 동네 여학생들이 저를 머리통이모라고 부른다는 걸 알았어요. 살갑게 대하는 애가 몰래 귀띔해 줬는데 뭐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아요. 그래서 애들이 연예인 갖고 싸워대면 장난으로 너희들 계속 싸우면 내가 머리통 던진다!’ 고 농담도 했는데 이젠 재미없어져서 안 해요. 그리고 어마르가 왔어요. 못 보던 어린애에요. 그래도 안심은 되지 않더라고요. 비쩍 마르고 걸음걸이가 눈에 확 띄어서 낮에 나타나면 금은방 주인이 태권도 관장님께 몰래 알려줘요. 그러면 관장님이 도복차림으로 괜히 한 번 들어와서는 유리창이 흔들리도록 헛기침 몇 번하고 나가시곤 해요. 그런데 걔는 너무 약해보여서 뭐 저도 이길 수 있겠더라고요.”

기자는 메모지 중간부분에 이유과 콜론표시를 찍었다.

대략적인 이유는 알고 있지만 자세히 한 번 더 듣고 싶어요. 괜찮죠?”

그럼요. 경찰 조사결과 얘네들이 큰 착각을 했다고 진술했대요. 직장에서 남자들끼리 어울려서 유흥가를 자주 돌았나 봐요. 여기서 중심가 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그냥 별천지에요. 뭐 그렇고 그런 곳에서 술도 마시고 노래 부르고 하다가 퇴폐이발소도 몰려간 모양이에요. 거기서 뭐아시겠죠? 그랬었고, 그런 곳하고 미용실의 차이를 몰랐다고 했다는데 제가 볼 땐 어느 정도 납득도 가고 그래요. 그리고 지구 여자한테 환심 살 땐 꽃이 좋다는 것을 알았지만 문제는 얘들이 어디까지가 꽃인지 구분할 줄을 모르고, 꽃 사러 식품매장을 다니는 거래요. 잘 알려줘 봤자 신참 들어오면 반복된다 하더라고요.”

안 오실 줄 알았던 할머니가 맥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질적으로 이야기의 전말을 들은 기자는 고갯짓으로 괜찮으니 할머니를 돌봐드리라는 뜻으로 웃어주었다.

할미들이 어디 다~ 가고 읍서야

할머니를 뒤로 누인 뒤 놀라시지 않도록 온수를 손등에 대어 온도가 적당한가 보았다. 물은 빠르게 찬기가 가시었다. 할머니가 혼잣말로 뭐라 얘기하셨지만 나는 동시에 들린 기자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저기

기자가 보고 있는 것은 유리창 밖에 서성이는 어린 어마르였다. 어마르는 편의점 주변의 고양이처럼, 조심스럽지만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할머니의 축축한 머리를 조심스럽게 감기며 어마르의 행동을 살폈으나 들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로 태권도 관장님이 복도를 거닐면서 통화하는 시늉을 보였다. 간간이 욕설을 뱉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어마르가 어깨를 움츠리긴 했지만 여전히 이동하지 않자 태권도 관장님이 미용실 문을 박력 있게 열어젖히고 들어와 터벅터벅 소파로 걸어가더니 풀썩 앉았다. 유리문의 딸랑이 울림이 다른 때보다 오랜 시간동안 멈추지 않았다. 주섬주섬 짐을 정리하던 기자는 태권도 관장님을 보더니 가벼운 목례를 보냈지만 관장님은 누구신지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의 바람대로 어린 어마르는 스르륵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잠시 뒤 태권도 관장님도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가셨다. 드라이어로 할머니의 머리를 말리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기자가 방긋 웃어주며 인사를 했다. 내가 드라이어를 끄자 그녀는 같은 말을 다시 반복했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다음호에 기사 실리면 제가 직접 한 권 가지고 올게요. 그리고 머리도 하고요.”

말린 할머니 머리에서 풍기는 염색약 냄새를 맡으며 잡지에 기사가 어떤 식으로 실릴까 생각해보았다. 이런 일에 별로 무신경한 편이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저기 소파에 앉아 잡지를 뒤적거리던 중 우리 미용실에 관한 얘기가 있다고 호들갑을 떨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할머니를 보낸 후 꼬맹이의 은은한 잿빛 머리카락을 쓸기 위해 빗자루를 들었을 때 문이 다시 열렸다. 요란한 딸랑이소리 때문에 태권도관장님이 왜 다시 들어오셨을까 했지만 돌아보니 기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핸드폰이라도 놓고 갔을까 싶어서 그녀가 앉았던 곳을 둘러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놓고 가신게 없

어마르

?”

그녀의 모습은 수수한 정장차림과 팔에 잔뜩 끌어안은 서류뭉치들로 처음 미용실을 들어왔을 때와 다른 것이 없었다. 다만 수선집에 맡겼었다는 값싼 가방이 한 손에 덜렁덜렁 들려 있었다. 하지만 세련되고 여유로웠던 표정은 그녀로써도 어쩌지 못할 어떤 당혹감으로 젖어있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계산대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올렸다. 계산대는 그 많은 서류들을 올리기에 공간이 적당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아까 걔 어디로 갔지요? 어마르 말예요. 바깥에서 못 들어오던

저야 잘근데 무슨 일이신지?”

그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빈 가방만 덜렁대며 소파로 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다시 빗자루를 놓고 그녀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미용실 나와서 수선집에 갔더니 사람이 없어요. 문은 열려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자기 가방은 바로 찾을 수 있잖아요. 시커먼 작업대 위에 놓여있더라고요. 지퍼가 원래 검정색 이었는데 갈색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내 가방은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마음엔 들지 않더라도 계산은 하고 가야겠는데 이 영감님이 안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혹시 화장실로 찾으러 갈까 했더니 마침 들어오시더라고요. 그러더니 사람 처음 보는 것처럼 저를 훑어보시다가 그제야 제가 가방 맡긴 사람인 걸 알아보셨어요. 뭐랄까요. 물건하고 주인을 연결하는 본인만의 오랜 노하우가 있는가 봐요.”

나는 아까 전에 내 말을 경청하던 그녀의 태도를 상기하며 지금은 뭔가 상황이 바뀌어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그녀가 보여주었던 듣는 이의 바른 태도를 갖기 위해 노력해보았다. 그녀를 향해서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해보세요라는 눈빛을 보내주었다.

나는 그냥 수선비를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이 영감님은 가방을 들더니 새로 간 지퍼를 보여주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괜찮으니까 그냥 달라고 했지만 이 영감님은 이빨이 잘 안 나가는 새것이라고 웅얼거리시면서 기어이 시범을 보이시더라고요. 이짝으로-이짝으로 밀었다 당겼다. 하면서요.”

나는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그녀를 보고 한 번 더 계속해보세요를 보냈다.

영감님이 지퍼를 열 때 가방 안에 뭔가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순간, 아차 내 가방이 아니로구나! 하고 다른 곳을 찾아보는데 영감님은 거기 꺼가 맞는데 왜 그러냐면서 가방을 주시더라고요. 수선집을 나오자마자 다시 가방을 열어보고는 곧바로 온 거예요.”

기자는 헐렁해 보이는 그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수선집 노인의 자부심이 서린 지퍼를 열어젖혔다. 가방 안엔 오직 한 가지만 들어있었다. 줄기가 꺾여버린 대파 한 뭉치가 가방 안에 접힌 채 험악한 모양으로 들어있었다. 이내 우리 두 사람 사이로 파 냄새가 번져나갔다. 그녀는 심란해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녀는 일어서기 전에 아주 잠시 동안 기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에서 말했다.

책 나오면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는 계산대 위의 서류를 허겁지겁 챙겨들고는 서둘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나는 미용실 문이 닫히기 전 총총걸음으로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 앞으로 화장실 가는 수선집 노인을 보았다. 수선집 노인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채 화장실 입구부터 자신의 바지지퍼를 붙드느라 엉덩이를 뒤로 한껏 뺐다. 무슨 호기심이었을까. 잠시 뒤 그녀가 틀림없이 지나갈 곳을 보기 위해 내가 깼던 창문 앞에 서서 밖을 보았다. 때마침 모터소음과 함께 배달 오토바이가 도착했다. 독일군 헬멧을 쓴 중국집사장이 배달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고, 곧바로 나타난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가방을 열어 무엇인가를 넣고는 다시 닫았다. 그리고는 배달오토바이의 노란 바구니에 가방을 던져넣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갔다.


xeress@naver.com

과식하는 좋은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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