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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유작(遺作)

2014.08.19 10:0108.19


 
 
  * 문 교수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단 하나의 표절조차 용서하지 않으시는 새 황제의 법은 지엄하였다. 황제께서는 태후께로부터 나시자마자 말씀하실 줄 아시었고, 걷기도 전에 다섯 나라의 말과 글에 통달하셨으며, 걸음에 익숙할 무렵에는 시를 지으시며 양손에 쥔 창검을 각기 다른 검법으로 휘두르는데 막힘이 없으시었다. 그러니 단지 문 교수와 같이 늙은 범재(凡才)의 고충을 헤아리기 어려우시었다. 글과 금을 똑같이 무겁게 보시는 황제의 뜻은 드높고 존귀하였다. 그리하여 문 교수에게 은혜를 입었던 옛 제자들 중 뉘도 감히 탄원서 한 장 제대로 올릴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문 교수는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혼자 외롭게 늙어죽을 운명이었다. 
 
 
 
 
 
 
      * 문 교수는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 그는 약 이십여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시체가 되어 감옥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때쯤 황제도 이미 노쇠하시어 영명하던 기억력은 차츰 때 낀 거울처럼 흐려져 문 교수가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마저 떠올리기 힘겨워 하시었다. 황제를 대신한 젊은 내관이 문 교수의 감옥을 휘돌아 살필 새, 다 떨어져가는 침상 한 자리에서 산처럼 쌓인 종이더미가 눈에 띄었다. 한때 황립 제도 1대학의 국문학과 교수였으나 젊은날 처녀작의 몇 문장이 문제되어 종신형을 살아야 했던 늙은 수인을 위한 간수의 작은 배려였을 터였다. 젊은 내관이 글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더미를 품은 채, 남성이라면 마땅히 있어야할 것이 없어 더욱 가벼운 발걸음으로 감옥에서부터 황궁으로 달려가는 동안, 그러나 이미 황제께서는 위태하시었다. 제아무리 제국을 호령하는 사내라도, 가장 비천한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또한 앞서 황위를 양위하시었던 선제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은 피할 수 없으시었다. 
 
 
 
 
 
 
     * 아직 풋기가 가시지 않은 젊은 내관은 감히 황제께서 승하하시려는 자리 앞에서 더러운 종잇조각을 내밀 수 없어 부복한 채 울음만을 터뜨리었다. 서서히 꺼져가는 황제의 움푹 패인 안정(眼睛)에는, 마지막 총기가 잠시 감돌으시었다. 황제께서는 삐거덕 소리가 날 정도로 말라빠진 목을 친히 돌리시어 옥음(玉音)을 내리시었다. "얘야, 네 품에 그 것이 무엇이더냐." 홍안(紅顔)의 젊은 내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문 교수가 죽기 전 마지막 남긴 글이라고 아뢰었다. 황제는 조용히 말씀하시었다. "가져오라." 더 높은 품계의 내관이 소맷자락을 감치며 두툼한 종이뭉치를 받아 황제께 친히 바치었다. 황제께서는 비단 금침에 누우신 채로 피조차 다 빠져나간듯한 어수(御手)를 뻗어 힘겹게 종이를 받으시었다. 황제의 옥체에는 이미 종이의 무게조차 천근이시었다. 할 수 없이 내관이 무릎을 꿇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한줄 한줄 찬찬히 읽어드리기 시작했다. 일찍이 거세하여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늙은 내관의 목소리는, 그 나이에도 상등품 유기 그릇을 번갈아 두드리듯 투명하게 울려 듣기 좋았다.
 
 
 
 
 
 
 
   * 모든 글줄을 다 읽어내려갈때까지 황제께서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가, 내관의 목소리가 멈추자 비로소 눈을 뜨시었다. 거대한 조가비를 여는 듯이 눈꺼풀을 밀어올리기 위해 온몸의 힘을 쓰시는 듯하여 참으로 세월이 무상하였다. 힘에 겨우신 듯 한동안 숨을 고르시다가, 비로소 옥음을 내리시어 다시 물으시었다. "끝이더냐." "네, 폐하, 끝이옵나이다." "정녕.. 끝이더냐." 황제 앞에서 내관은 감히 짜증을 낼 수 없었고, 다시 한번 훑어보는 척이라도 해야만 하였다. "없사옵나이다. 폐하, 이 것이 전부이나이다." 그 순간 황제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이를 부드득 가시었다. 온 몸의 뼈가 갈리는 듯한 맹렬함에 좌중은 황제의 안위를 걱정하였으나 옥음이 벼락처럼 터져나오시었다. 젊었을 적의 성정 그대로시었다. "그 간특한 글을 태우라!" 감히 뉘라서 황제의 명에 토를 달리요, 내관들은 깜짝 놀라 부싯돌을 당기어 이미 귀퉁이가 닳기 시작한 종잇장을 감히 어전에서 태워버리었다. 그때까지 황제의 안정은 젊었을 적 그대로 형형하게 빛나시어 꺼질 줄을 모르시었다. 그러나 이십년에 걸쳐 남긴 문 교수의 글이 마침내 한줌 재로 변하는 걸 보시었을 때, 용솟음치던 지존의 기운은 간 곳이 없으시었고 숨은 더욱 얕아져 가망이 없으시었다. 황제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하시었다. "그에게도 재주는 있었구나. 짐의 헤아림이 얕으었도다." 그 말씀을 끝으로 황제께서는 승하하시어 황자께 순리대로 황위를 양도하시었다.
 
 
 
 
 
 
 
    *  새 황제께서는 덕이 높고 무던하시어 적지 않은 보령(寶齡)에 일자(一者)가 되시었음에도 그 성정이 변함이 없으시었다. 새 황제께서 황위에 올라 황궁 안팎의 민심을 두루 살피신 뒤 하신 일은, 문 교수의 유작을 읽었던 늙은 내관에게 친히 하문하신 일이었다. "그 글이 대체 무슨 내용이었더냐. 선제께서 왜 그 글을 태우라 진노하시었는지 그대는 아는 바 있는가." 늙은 내관은 조용히 아뢰었다. "소신이 어찌 지엄한 지존의 큰 뜻을 헤아릴까마는, 하문하시니 아뢰옵니다. 소신이 그 글을 읽어받자온데, 시도 소설도 아니요, 수필도 경문도 아니요, 잡문도 아니여, 감히 갈래를 판별할 수 없었나이다. 단지 처음과 끝이 맞춘 듯 들어맞고, 문장과 문장 사이 붙은 듯 이어져 참말로 한 내용이구나 싶었는데, 글을 태우라 명하신 뒤 선제께서 조용히 가로되, 그 문장 중 단 하나도 문 교수의 것이 없었다 하셨나이다." 그 순간 새 황제께서는 친히 어수로 무릎을 치시었다. "장대하구나. 허면 다른 이들이 쓴 문장만을 인용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었단 말인가. 어찌 그럴수가 있느냐. 그에게는 오직 자신의 문장을 쓸 재주만이 없었을 뿐이었구나." 내관은 다시 아뢰었다. "하오니 폐하, 감히 소신이 간하건대, 문 교수의 유작을 문 교수의 것으로 인정해야할지 폐하께서 판가름해주심이 옳을 줄 아뢰옵나이다." 이에 새 황제는 주저없이 하명하시어 참으로 영명한 판결을 내리셨다 알려져있으나 후손이 불민하와 기록 한 줄 남지 않음이 애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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