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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법단추

2014.08.15 23:5708.15


마법단추






 

단추 빌려드립니다.

 

시내에 들어선 단추가게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시내라 해도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외진 골목이라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은 드물었다. 한 소녀가 단추가 떨어진 망토를 만지며 그 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소녀의 망토는 폐가의 빗장 풀린 문처럼 옷깃을 벌리고 사납게 펄럭였다.

단추가게 진열창에 소녀의 모습이 비쳤다. 푸석푸석한 피부에 흐리멍덩한 눈, 축 처진 입꼬리, 꿰고 덧대며 사계절을 견딘 망토는 소녀의 음울한 낯빛만큼 음울했다. 진열창 너머의 화려한 단추들이 창에 비친 소녀와 겹쳐졌다. 단추들은 상류층 여인의 장신구처럼 빛나며 소녀가 꿈꾸던 무늬를 소녀에게 덧칠했다. 소녀는 뭔가에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 빽빽하게 들어찬 단추들이 소녀를 환영하듯 광채를 뽐냈다. 소녀의 시선은 가게 한가운데에 놓인 네모난 유리 상자에 꽂혔다. 유리 상자 속에는 다이아몬드로 테를 두르고 그 안은 황금으로 채운 단추가 있었다. 자줏빛 비단이 여왕의 옥좌처럼 단추를 받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가게에 있는 단추들을 제 아래에 두고 호령하는 것 같았다. 단추 가장자리는 사람의 얼굴처럼 곡선이 흘렀다. 풍성한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올린 여인의 얼굴이었다. 단춧고리는 뒷면에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눈동자가 단춧구멍처럼 뚫려 있었다. 그 텅 빈 눈이 소녀를 끌어당겼다. 소녀는 유리 상자를 벗기고 단추를 끄집어냈다. 소녀는 단추를 귀한 열쇠처럼 쥐고 가게를 둘러봤다.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계산대에 알림판이 있었다.

 

마음에 드는 단추를 고르신 손님은 지니신 물건 중 하나를 맡기고 빌려 가십시오. 정해진 기한은 없으니 원하시는 만큼 사용하시면 됩니다. 현금은 받지 않습니다. 물건을 맡기실 곳은 이쪽입니다.

 

마지막 문장 옆에 그려진 화살표는 가게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에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정사각형의 지하문은, 곡예를 하듯 머리를 들이밀며 통로를 비집고 들어가야 겨우 통과할 만큼 좁고 작았다. 소녀는 구두코로 문을 툭 밀었다. 헐거운 여닫이문이 벌컥 열리며 시커먼 속을 드러냈다. 그 속엔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계단도 없고 등불도 없었다. 마치 들짐승을 잡기 위해 파둔 구덩이처럼 속이 뻥 뚫려 있었다. 알림판 귀퉁이에 덧붙여진 붉은 글씨는 낱알처럼 작았다.

 

직접 들어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건만 넣으시면 됩니다.

 

소녀는 팔에 끼고 있던 바구니를 뒤적였다. 밑동이 썩은 무, 싹을 도려낸 감자, 말라비틀어진 겉잎을 떼면 먹을 게 없을 양배추, 날달걀 두 개, 동전 몇 닢이 찰랑대는 돈주머니. 그게 다였다. 소녀는 몸 여기저기를 뒤적였다. 심장 쪽에서 뭔가 잡혔다. 소녀는 망토 안주머니에 달린 흑단추를 발견했다.

…… 이게 여기 있었구나.”

소녀는 흑단추를 툭 떼어 망토에 갖다 대고 거울을 쳐다봤다. 한참을 바라보더니 가게에서 고른 단추도 슬그머니 망토에 대보았다. 소녀는 단추 두 개를 몇 번 더 번갈아 대보았다. 거울을 응시하던 소녀는 망설이지 않고 흑단추를 지하로 던졌다. 흑단추는 검은 폭풍에 휩쓸리듯 휙 사라졌다. 단추를 삼킨 지하문은 유령이 문을 밀어내는 것처럼 저절로 닫혔다.

 

한 노파가 가게 앞에 서 있었다. 노파는 휘황찬란하게 번뜩이는 단추가게를,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소녀가 가게를 나설 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노파가 다가왔다. 노파는 가게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눈으로 그보다 더 뚫어져라 소녀를 쳐다봤다. 노파의 이맛살은 골목의 악취를 피해 코를 틀어막고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더 구겨져 있었다.

저기서 물건을 빌렸소?”

소녀는 노파의 움푹 파인 눈과 툭 튀어나온 코, 갈라진 입술, 해어진 망토 끝단, 칠이 벗겨진 지팡이, 지팡이 끄트머리에 묻은 진흙을 잽싸게 훑었다. 낯선 이를 대하는 소녀의 태도는 그 찰나의 심사로 정해졌다. 소녀는 마음껏 턱을 쳐들었다.

왜 그러시죠?”

소녀는 금덩이라도 든 것처럼 바구니 손잡이를 단단히 고쳐 쥐었다.

저기서 물건을 빌렸다면 돌려놓으시오. 맡긴 물건을 되찾고 싶거든 내가 도와주리다.”

아무것도 안 빌렸어요.”

소녀는 바구니를 끌어안고 획 돌아섰다. 노파는 소녀의 그림자가 골목 모퉁이를 꺾어 사라질 때까지 소녀를 지켜보았다. 골목에 드리운 그늘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소녀의 그림자를 향해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 같았다. 소녀의 뒷모습은 단추를 빌리기 전보다 더 어둡고 칙칙하고 위태로웠다. 소녀의 등에 늘어진 거뭇한 망토자락이 좁은 골목에 휘몰아치는 바람에 떠밀려 맥없이 휘청댔다.

 

집에 돌아온 소녀는 단추를 보석처럼 어루만졌다.

예쁘다…….”

소녀는 단추를 보는 것만으로 단추 속의 여인이 된 것 같았다. 소녀는 입고 있던 망토에 단추를 갖다 대며, 얼룩진 거울 앞에 섰다.

여기에 단추를 달면 아주 예쁘겠어. 꽤 화려해 보이겠지?”

소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인의 눈동자에서 반짝이는 실들이 뿌리처럼 뻗어 나오며 낡은 망토를 감쌌다. 그 실들이 빛을 몇 번 번쩍이자 낡은 망토가 순식간에 금실 자수를 놓은 망토로 바뀌었다. 빛나던 실들은 단춧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고 마법을 부린 단추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소녀의 손에 떨어졌다. 소녀는 넋을 잃고 단추를 바라봤다. 소녀의 흐리멍덩했던 눈은 놀라움과 기쁨, 주체하기 힘든 환희로 번뜩였다.

그날부터 소녀는 모든 것에 단추를 갖다 대었다. 단추는 갖다 대기만 하면 무엇이든 새로운 것으로 바꿔주어서 발에 차이는 돌멩이는 금화가 되고 썩은 판자는 흑요석으로 변했다. 소녀가 원하지 않을 때는 단추도 마법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원하는 게 많았다. 소녀는 평생을 쓰고도 남을 보석과 달을 만질 만큼 높은 저택을 얻었다. 상류층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지도 못할 보석도 선물했다. 사람들은 소녀의 저택에 몰려와, 신분을 숨긴 상류층 소녀의 이야기를 멋대로 지껄였다. 소녀는, 자신의 주위를 기웃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턱을 쳐들었다. 하지만 소녀의 마음은 마법단추를 사용하면 할수록 단추의 텅 빈 눈처럼 비어갔다. 소녀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끝없이 갈망했다.

 

이렇게 멋진 옷이랑 어울리지 않게 머릿결이 엉망이네.”

소녀는 머리카락에 단추를 갖다 대고 비단보다 매끄러운 머릿결을 얻었다.

손가락도 더 가늘면 좋을 텐데.”

소녀는 손등에 단추를 갖다 대고 백옥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손을 얻었다. 소녀의 욕심은 거기서도 멈추질 않았다. 소녀는 거울을 보던 어느 날, 자신의 눈에 단추를 갖다 대고 말았다. 첫날엔 매혹적이던 여인이 둘째 날에는 낯설어졌고 셋째 날에는 이방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소녀에게 누구냐고 물었지만, 소녀는 고맙다고 대답했다. 소녀는 거울 속의 미인에게 취해서 자신의 본모습을 잊어갔다. 어느새 소녀는 소녀가 동경하던 단추 속의 여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누군가 소녀를 찾아왔다. 소녀는 거울처럼 번들거리는 문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에도 문에 비친 자신의 여인을 황홀한 표정으로 감상했다. 소녀의 여인을 비추던 문 너머엔 쭈글쭈글한 노파가 고목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단추의 뒷면을 보았는가?” 노파가 물었다.

소녀는 노파를 제 마당을 헤집는 들개처럼 노려보다가 브로치처럼 달고 있던 단추를 떼어 뒷면을 보았다. 여인의 뒷모습은 얼굴이 뒤틀린 핏빛 괴물이었다. 소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그렇게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소녀는 개의치 않고 마법단추를 옷에 달았다.

그 단추를 계속 쓰다간 자네가 누군지도 잊을 거요. 단추를 내게 주게나.”

소녀는 턱을 치켜들고 노파를 내려다봤다.

제가 왜 단추를 댁한테 드리죠? 이 단추는 제 거예요.”

노파는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소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거기서 물건을 빌린 자들은 자네처럼 눈이 텅 비었지. 지금 자네가 그렇구먼.”

소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소녀는 노파를 밀쳐버렸다.

내가 빌린 단추니 내가 알아서 해!”

뒤로 떠밀린 노파는 지팡이를 움켜쥐며 소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욕망은 언제나 인간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인간이 원하지 않는 것까지 원하게 하는 저주를 부리네. 그건 단추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네. 그건 굶주린 욕망이자 어둠이며 타락이자 죽음이네. 인간의 심장에 기생하며 영혼을 뺏는 악마네. 그 단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노파는 지팡이를 창처럼 치켜들어 소녀의 마법단추를 찔렀다. 소녀는 노파의 힘에 떠밀려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늘에 단추가게의 지하문이 나타나 벌컥 열렸다. 지하문에서 흑단추가 쏟아졌다. 마법단추와 바꾼 소녀의 단추였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흑단추가 수십 개에서 수천 개로 늘어나며 끝없이 쏟아졌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던 흑단추는 저택을 종이처럼 구겨버렸다. 사방이 잠잠해졌을 땐,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가 손에 쥐고 있던 마법단추는 시커먼 오물을 뒤집어 쓴 박쥐처럼 퍼덕이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내 단추!”

소녀는 미친 사람처럼 마법단추를 찾아 헤맸다. 맨손으로 파편을 파헤치던 소녀는 자신의 손등을 보고 얼어붙은 듯 멈췄다. 난잡한 바느질 자국이 손등을 뒤덮고 있었다. 소녀는 뒷걸음치다 깨진 거울을 밟았다. 소녀는 거울 조각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거울 속엔 살갗에 바느질 자국으로 뒤덮인 괴물이 서 있었다. 마치 마구잡이로 덧대어 기운 봉제인형처럼 살은 퉁퉁 부었고 피부는 찢기고 벌어져 피를 머금고 있었다. 소녀는 주저앉았다. 으리으리한 저택과 화려한 드레스는 사라지고 딱딱한 흑단추와 흉터처럼 박힌 바느질 자국만 남았다. 소녀는 이제 소녀가 아닌 추악한 괴물일 뿐이었다.

노파는 흑단추를 가리키며 소녀에게 말했다.

이 흑단추를 단 옷을 입는 날, 자네를 되찾을 수 있을 걸세.”

노파는 떠나고 소녀는 흑단추 더미 위에 홀로 남았다.

흑단추는 먹빛의 납작한 단추였다. 쇠처럼 무거웠지만 보석처럼 매끄러웠다. 하지만 마법단추 가장자리를 장식했던 사람 얼굴이 없었다. 눈부신 실을 뿜던 눈도 없었다. 그저 먹빛 거울처럼 소녀의 괴물만 선명하게 비추고 있었다.

소녀는 흑단추를 옷에 달아보려다 실패했다. 흑단추는 송곳으로 찍어도 뚫리지 않고 도끼로 내려쳐도 깨지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끓여도 녹지 않고 풀을 발라도 붙지 않고 미끄러졌다. 그 어떤 것으로도 흑단추를 바꿀 수 없었다. 소녀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했지만, 흑단추를 옷에 다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소녀의 애원 끝에 돌아오는 건, 두건 속에 숨은 괴물을 본 사람들의 비명뿐이었다. 사람들의 비명은 메아리처럼 마을을 헤집다가 괴물을 조심하라는 벽보로 완성됐다. 소녀는 흑단추를 실은 수레를 끌고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다.

소녀가 마을을 떠나던 날, 단추가게는 구둣가게로 바뀌었다. 소녀는, 그 앞을 지나던 노신사가 밑창이 떨어진 구두를 끌고 가게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노신사가 황금 구두를 신고 나오자마자 구둣가게는 반지가게로 바뀌었다. 소녀가 그 길을 벗어날 때쯤, 어느 부인은 때가 덕지덕지 묻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반지를 빌려준다는 글을 홀린 듯 쳐다보고 있었다. 부인은 녹슨 은반지를 끼고 있었다.

 

깊은 숲으로 달아난 소녀는 수레를 처박아두었다. 적막한 호수 앞에 앉아 수면에 일렁이는 자신의 괴물만 쳐다보며 울었다. 오랫동안 보고 있으니 소녀가 괴물을 보는 건지 괴물이 소녀를 보는 건지 헷갈렸다. 마치 수면의 괴물이 현실이 되고 소녀는 그 호수에 갇힌 것 같았다. 소녀는 조각상처럼 앉아서 유령처럼 시간을 흘려보냈다. 배도 고프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은 허망하게 흘렀다.


누군가 수레에 담긴 흑단추를 몰래 가져가고 있었다. 소녀는 수면에 비치는 범인을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범인은 소녀만큼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인간과 짐승을 반씩 섞어놓은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로 뒤덮여 있고 뾰족한 손톱과 발톱은 갈퀴처럼 휘어 있었다. 괴물은 사람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며 호수 주위를 얼쩡댔다. 괴물은 수레에 쌓인 흑단추를 보석처럼 만지며 하나씩 훔쳐갔다. 흉악하게 생긴 괴물은 오히려 소녀에게 들키길 겁내며 수레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와 손에 가장 가까이 잡히는 흑단추를 훔쳐갔다.

며칠이 지나도록 소녀가 꼼짝하지 않자 괴물은 수시로 찾아와서 흑단추를 가져갔다. 처음엔 소녀가 어깨만 움찔거려도 달아나던 녀석이 어느덧 마음에 드는 흑단추를 고를 정도로 소녀의 눈치를 보지 않기 시작했다. 그것마저도 익숙해졌는지 하루는 흑단추를 골라 쥐고도 소녀가 바라보는 호수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도록 얼씬거렸다. 거대하고 투명한 수면에 괴물이 나타나자 소녀는 가차 없이 돌을 던졌다. 튀어 오른 물방울이 깨진 조각처럼 허공에서 흩뿌려졌다. 놀란 괴물은 골라두었던 흑단추를 떨어뜨리고 도망갔다.

그 뒤로 괴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훔쳐 갈 흑단추가 남았는데도 오지 않았다. 소녀는 괴물이 나타나던 곳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수레에 남은 흑단추를 세어보기도 했다. 며칠이 더 지나도 흑단추의 개수가 변하지 않자 소녀는 호숫가 비탈에서 일어섰다. 숲에 온 뒤로 처음이었다.

얼마 걷지 않아 괴물이 흘린 흑단추를 발견했다. 소녀는 떨어진 흑단추를 따라 걸었다. 황폐했던 숲길은 괴물이 흘린 흑단추를 따라갈수록 꽃길로 변했다. 징검다리처럼 이어지던 흑단추가 뚝 끊겼다. 소녀가 마지막 흑단추를 주운 곳엔 숲과 어울리지 않는 아치형 문이 서 있었다. 담장도 없고 문틀도 없는 괴이한 문이었다. 수풀과 나무 덩굴이 울타리처럼 문을 감싸고 있어서 마치 숲이 문을 호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치문의 표면에 번쩍이는 광택은 소녀의 얼굴에 그인 상처들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문엔 손잡이가 없었다. 소녀는 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문을 밀었다. 문은 커튼처럼 보드랍게 밀렸다. 그 커튼 너머로 하얀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쏟아졌다. 소녀의 눈앞엔 초록빛 정원이 펼쳐졌다.


정원 한가운데에 백색나무가 가지를 곧게 뻗으며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백색나무는 탑처럼 높아서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처럼 보였다. 기다란 나뭇가지는 바다로 뻗어 가는 물결처럼 굽이치며 정원을 드리웠다. 정원엔 동물 모양으로 가지치기한 나무들이 조각상처럼 드문드문 서 있었고 자그마한 샘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수면에 머금고 있었다. 정원은 벽이 없는 저택처럼 가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찻잔이 놓인 탁자와 푹신한 의자, 책이 쌓인 책장, 얼룩진 서랍장까지. 마치, 정원에서 자란 식물처럼 넝쿨을 휘감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버려진 저택이 수풀에 파묻힌 건지, 정원을 저택처럼 꾸민 건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에 달린 색색의 보석을 흔들었다. 보석이 서로 부딪치자 타악기를 두드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소리가 났다. 소녀는 백색나무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것이 보석이 아닌, 흑단추란 걸 깨달았다. 납작한 흑단추들이 귀한 장식품처럼 다듬어져 빛나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서 쪼그린 채로 흑단추를 다듬던 괴물은 소녀를 보자마자 나무 뒤로 숨었다. 소녀는 들고 온 흑단추를 괴물에게 내밀었다.


단추를 다듬는 방법을 나한테 가르쳐 줄 수 있어? 나는 이 단추를 꼭 달아야 해. 부탁이야.”


괴물은 툭 튀어나온 눈으로 소녀와 흑단추를 번갈아 보았다. 소녀는 괴물이 앉아있던 자리에 흑단추를 내려놓고 물러섰다. 괴물은 아이처럼 쭈뼛거리며 걸어 나와 백색나무 밑동에 난 풀을 한 움큼 뜯었다. 그리곤 풀을 끈처럼 이용해 흑단추를 묶었다. 십자 형태로 묶은 흑단추에 흑단추를 하나 더 엮었다. 흑단추를 엮자마자 풀은 반짝이며 사라졌고 흑단추는 마치 투명한 실로 이어진 것처럼 저절로 붙었다. 괴물은 뜨개질하듯 흑단추를 엮어나갔고 손수건 같은 한 장의 면을 만들었다. 괴물은 그것을 보자기 싸듯 오므렸고 소녀가 넋 놓고 보는 사이 괴물의 손바닥에는 흑단추 날개를 가진 나비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 나비는 흑단추를 엮은 것에 불과했지만 소녀에겐 마법단추가 선물한 보석보다 아름다웠다.

소녀는 괴물이 알려준 대로 흑단추를 망토에 달았다. 하지만 흑단추는 소녀의 망토에 닿자마자 떨어졌다. 소녀는 수레에 남은 흑단추를 모두 바꿔가며 망토에 달아보았다. 하지만 흑단추는 약속이라도 한 듯 소녀의 망토에서 떨어졌다. 다른 옷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괴물이 흑단추와 흑단추를 엮는 것을 보고, 흑단추를 달 옷은 흑단추로 만든 옷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소녀는 수레에 남은 흑단추를 한곳에 쏟아 붓고 하나씩 엮으며 망토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소녀는 정원에서 살았다. 흑단추는 꽃잎으로 문지르면 꽃잎의 색이 배였고, 샘물에 적시면 말랑말랑해졌다. 모서리를 네모나게 만들 수도 있었고 구부릴 수도 있었다. 정원에 있는 모든 것이 흑단추를 다듬어주어서 소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었다. 소녀는 얼마 가지 않아 그토록 기다리던 망토를 완성했다.

소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흑망토를 입었다. 흑단추로 만든 망토는 쇠사슬처럼 무거웠다. 흑망토는 소녀가 무릎을 펴기도 전에 소녀를 넘어뜨렸다. 소녀는 괴물의 부축을 받고 간신히 일어섰지만, 거울 속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뺨에 패인 바느질 자국도 그대로였고 목과 팔의 흉터도 아물지 않았다. 거울 속엔 여전히 흉측한 괴물이 분노에 찬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소녀는 어깨를 짓누르는 흑망토에서 기어 나오다시피 빠져나와 다시는 입지 않았다. 흑망토는 그대로 버려졌다.

소녀는 며칠째 샘터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흑단추가 남았는데도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다. 소녀는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괴물은 소녀를 수레에 태워 정원을 구경시켜주었다. 토끼처럼 생긴 나무가 진짜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것도 보여주고 토끼나무가 신사처럼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것도 보여주었다. 괴물은 탁자를 덮은 식탁보 넝쿨에서 꽃이 피듯 음식이 피는 것도 보여주고, 책장에서 코를 골던 책을 깨워 그림 구경도 시켜주었다. 무표정으로 따라다녔던 소녀는 시간이 지나자 괴물 없이 홀로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동물나무들과 술래잡기를 하고 넝쿨들과 백색나무 꼭대기에도 올라가 보았다. 백색나무 몸통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었다. 수다쟁이 책들과 별자리를 찾으며 밤을 새우고 아침이면 꽃밭을 뒹굴며 햇볕을 쬐었다.

소녀는 다시 흑단추를 다듬었다. 소녀는, 귀를 자주 잃어버리는 토끼나무를 위해 귀가 달린 모자를 만들고, 넝쿨들이 갖고 싶다던 초록색 손도 만들었다. 감기에 걸린 코골이 책을 위해 문 달린 책장까지 만들고 나서는 소녀 스스로 원하는 것을 만들었다. 소녀는 그네를 만들고 의자를 만들었다. 그 그네와 의자에 앉아 꽃을 만들고 나비를 만들었다. 흑단추가 마법단추였다면 꽃은 향기를 머금고 나비는 정원을 날아다녔겠지만 흑단추는 그런 마법을 부리지 못했다. 하지만 소녀는 마법단추가 부린 마법보다 흑단추가 변하는 과정을 더 마법처럼 바라봤다. 소녀는 자신이 다듬은 흑단추로 정원을 채워나갔다. 괴물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소녀를 도와주었다. 소녀와 괴물이 마지막 흑단추로 만든 새를 백색나무에 걸었을 때, 정원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되었다. 소녀는 더 이상 흑망토를 떠올리지 않았다.


동물나무들은 온종일 정원을 돌아다녔다. 한자리에 있는 걸 지루해해서 해가 뜨면 달이 뜰 때까지 이리저리 쏘다녔다. 토끼나무는 늑대나무와 함께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백색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잔 뒤, 샘터에서 물장구를 치고, 소녀와 괴물이 식사하는 탁자에 눌러앉아 차를 마시고 돌아갔다. 그날은 특별히 토끼나무가 부끄러움이 많은 새끼곰나무를 저녁 식사에 데려오겠다고 했다. 소녀는 새끼곰나무에게 선물하기 위해, 백색나무에 걸었던 흑단추를 떼어내 샘물에서 다듬고 있었다. 그러다 소녀는 수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흑단추를 다듬는 손짓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소녀는 흑단추를 내려놓고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뺨에 닿는 순간, 소녀는 마치 모든 상처가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정원 문이 부서졌다.

괴물을 찾았다!”

거미줄처럼 엉킨 그물이 하늘을 덮으며 날아왔다. 소녀는 도망쳤지만 괴물은 그물에 갇혔다. 사냥꾼들이 창을 들고 샘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나뭇가지에서 반짝이던 흑단추들이 흙탕물로 변한 샘물에 우수수 떨어졌다. 소녀는 관목 사이에 숨었다. 토끼나무와 늑대나무, 새끼곰나무가 허둥지둥 달아나다 사냥꾼의 칼에 베였다. 코골이 책이 비명을 질렀고 넝쿨들이 사냥꾼의 발에 짓밟혀 뱀처럼 꿈틀댔다. 오랜 시간을 거쳐 가꾼 그들의 정원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괴물은 숨어있던 소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소녀는 웅크린 채 떨기만 했다. 사냥꾼은 발버둥 치는 괴물에게 창을 내리꽂았다. 괴물의 비명이 소녀의 귀를 찔렀지만 사냥꾼들이 괴물을 고깃덩이처럼 끌고 갈 때까지 소녀는 숨어있었다.

 

괴물이 사라진 정원은 싸늘한 겨울로 변했다. 백색나무도 시들었다. 나무의 심장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파가 마법단추를 가져갔을 때처럼 사냥꾼에게 괴물을 빼앗긴 소녀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정원은 하얀 천을 씌운 듯 눈으로 뒤덮였고 흑단추는 얼어붙었다. 풀도 시들고 샘도 얼어붙었다. 눈이 끝없이 쏟아졌다. 소녀는 한없이 쏟아지는 눈을 괴물의 눈물처럼 쳐다보며 울었다. 소녀는 괴물을 구하지 못한 순간을 후회하며 울었다. 백색나무 가지에서 빛나던 흑단추는 사라지고 없고, 길 잃은 영혼만 남아 슬픔에 나부꼈다.

눈 더미 속에서 토끼나무가 불쑥 튀어나왔다. 토끼나무는 달랑거리는 목을 간신히 붙잡은 채로 소녀를 바라보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거울 밑에 쌓인 눈 더미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소녀는 밀려오는 바닷물을 헤치듯 눈 속을 달려가 눈 더미를 파헤쳤다. 그 속엔 소녀가 버린 흑망토가 있었다. 흑망토가 있던 땅은 얼지 않고 초록 잎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흑망토를 끄집어 올렸다. 하지만 흑망토를 걸치자마자 꺾인 나뭇가지처럼 고꾸라졌다. 동물나무들이 뼈다귀처럼 앙상한 가지를 흔들며 나타나 소녀를 부축했다. 속이 찢긴 코골이 책과 이파리 없는 넝쿨도 달려와 소녀를 일으켰다. 소녀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섰다. 무릎을 펴고 몸을 꼿꼿이 세웠을 때 소녀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흑망토를 입고 서 있었다.

소녀는 괴물을 찾아 정원을 나섰다. 아치문을 지날 때까지만 해도 어깨를 짓누르던 흑망토가 호수를 지날 땐 비단처럼 휘날렸다. 그토록 무겁던 흑망토는 새털처럼 가벼웠고 소녀의 몸에 딱 맞았다. 소녀는 날개를 편 새처럼 하늘을 날듯 숲 속을 달렸다.


소녀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괴물은 화형대에 묶여 있었다. 괴물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괴물에게 돌을 던지며 소리쳤다.

괴물을 죽여라!”

사람들의 눈동자처럼 시뻘건 불이 장작에 붙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소녀는 불길보다 더 이글거리는 사람들을 뛰어넘어 화형대로 달렸다. 사냥꾼들이 소녀를 막아서며 칼을 휘둘렀다. 소녀는 흑망토 끝자락을 잡고 칼을 쳐냈다. 사냥꾼의 칼은 흑망토에 부딪히자마자 썩은 가지처럼 부러졌다. 다른 사냥꾼이 괴성을 지르며 도끼를 내려쳤다. 흑망토는 그 도끼도 모래성처럼 부숴버렸다. 소녀의 흑망토는 그 어떤 방패보다 튼튼했다. 소녀는 흑망토를 휘두르며 활을 쳐내고 칼을 쳐내고 돌멩이를 쳐냈다. 사냥꾼들이 가진 어떤 무기도 소녀의 흑망토를 부술 수 없었다.

사냥꾼들 사이로 한 여인이 휙 지나갔다. 여인의 얼굴은 소녀의 마법단추와 똑같았다. 여인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소녀를 바라봤다. 소녀가 꿈꾸던 환상 속의 여인이 소녀의 눈앞에서 천천히 활을 들어 소녀를 겨냥했다. 여인은 텅 빈 눈으로 소녀를 응시하다 방향을 획 틀어 괴물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와 동시에 장작에 붙은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을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이 뒤틀리며 마법단추 뒷면의 핏빛 괴물로 변했다.

소녀는 화형대 위로 뛰어 올라가 흑망토를 날개처럼 펼치며 괴물을 안았다. 화살이 소녀의 눈앞까지 날아왔을 때, 흑망토에서 빛이 쏟아지며 주위를 집어삼켰다. 눈앞을 하얗게 채우는 섬광이 소녀를 향해 날아오던 화살과 돌멩이와 사람들과 사냥꾼과 환상의 여인을 지웠다. 빛이 세상을 삼킨 것 같았다.


소녀가 눈을 떴을 때, 소녀와 괴물은 서로를 껴안은 채로 그들의 정원에 앉아 있었다. 시린 눈은 녹고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정원은 예전으로 돌아왔지만, 소녀가 입고 있던 흑망토는 사라지고 없었다. 흑단추를 머금고 반짝이는 백색나무 아래에 노파가 서 있었다. 소녀가 흑단추로 만든 망토를 잃어버렸다고 하자 노파는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네. 보지 못했을 뿐이지.”

소녀는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노파는 대답 대신 소녀의 품에 안긴 괴물을 쳐다보았다. 괴물이 소녀의 흑망토를 입고 있었다. 괴물은 소녀를 바라보더니 말없이 소녀의 품을 빠져나왔다. 괴물은 천천히 거울 속으로 들어가 소녀와 마주 보고 섰다. 흉측하던 괴물의 모습이 서서히 소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거울 속에 있는 건 더 이상 괴물이 아닌 소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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