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린의 왼쪽 눈썹을 본 바로 그 순간부터에릭은 그녀의 왼쪽 눈썹에 홀딱 빠져버렸다서로 마주앉았을 때 에릭에게 오른쪽 방향의 눈썹이니까린에게는 왼쪽 눈썹이었다린의 왼쪽 눈썹이 흔들리는 원인이나 시간은 대중없었지만한 가지는 분명했다린의 눈썹이 움직이면 에릭의 가슴은 터질듯이 뛰었다.

 

 

 

 


 

그녀는 중국과 일본의 혼혈이라고 했다영어가 서툴러서어떤 연고로 씨애틀까지 흘러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이 나라에서 동양인은 원래 어려보이는 법이지만도서관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에릭은 린이 길을 잃은 동양 소녀라고 생각했다자그마한 몸집에 치맛단이 팔랑한 검은색 원피스유독 하얀 얼굴에 등까지 흘러내린 머리칼과 짙은 눈썹이 흠없이 까매서 기름을 바른듯 반질반질 윤이 났다중국어인지 일본어인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글자가 적힌 책을 옆구리에 낀 채그녀는 실내 복도를 돌아다녔고에릭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도와주려 했다가급적 무섭게 보이지 않으려 애쓰며무너질듯 가녀린 어깨를 검지로 톡 건드리자 돌아서는 등보다 머리칼이 먼저 찰랑찰랑 춤을 추었다마주치는 눈빛에서부터 동그란 눈매의 끄트머리까지 맑고 또랑또랑한 이국의 젊음이 고여 있었다. "무슨 일이죠?" 낯선 발음에 혀까지 짧아 외모와는 달리 몹시 투박한 영어가 건너왔다에릭도 덩달아 말을 더듬었다. "미안하구나얘야혹시혹시 길을 잃은 거 아닌가 해서." 린은 잘 알아듣지 못했는지 몇번이고 턱을 기울였다언젠가 차이나타운에서 먹었던 빠오즈마냥 하얗고 말랑말랑해보이는 뺨이 귀엽게 실룩일 때마다 에릭의 혀 위에도 묘한 군침이 고였다퇴역한 노병과 단지 지나치게 어려보일뿐인 스물한살 동양 여성은 그렇게 만났다.

 

 

 

린은 자신의 나이와 이름국적 외에 다른 사생활을 일체 드러내지 않았다에릭은 린이 어디 사는지결혼은 했는지무슨 일을 하는지심지어 성씨조차 알지 못했다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린은 다리를 흔들며 딴청을 부렸다아주 가끔 더운 날이면 린은 하얀색 반팔 티셔츠와 팔목처럼 가느다란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짧은 청바지를 입었지만보통은 치맛단이 물결처럼 찰랑대는 색색별의 원피스를 입었다치마가 편해서 좋다지만얼마 전까지만 해도 뱃살이 터지도록 허리를 조이는 군복을 입고 지낸 에릭은 팔랑거리는 치마의 느낌을 상상하기 어려웠다다만 에릭은 린에게 원피스가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특히 파란색의 엷은 셔츠에 무릎 윗쪽에서 살짝 찰랑거리는 반투명한 주름치마를 입었던 린의 모습은에릭에게 아주 오랫동안 선명하게 남았다.

 


 

 

린은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도서관에 와서 읽었던 책을 반납하고또다른 책을 빌렸다에릭에게 살며시 인사를 건네고는멀지 않은 곳에서 다리를 흔들고 턱을 괸 채 책을 읽었다때때로 귓불 아래로 그녀의 흑발이 차르륵 소리를 내듯 흘러내릴 때 에릭은 그 흑발을 도로 정돈해주고 싶은 생각을 애써 떨쳤다그래배럭(Barrack)에 참 오래 있었지그냥 난잡한게 싫을 뿐야에릭은 주 방위군 기동 훈련을 감독하느라 아내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한 자신이야말로 참군인이라고 믿었다스스로 생각하기에도그는 겁먹은 어린 여군들을 상사인체 윽박지르다 끝내 덮치고 마는 정신병자들과는 근본부터 달랐다.

 

 

 

 

에릭은 가까운 곳에서 책을 읽는 린을 건너다 보는 일이 좋았다그래서 군사 교본과 고급 승용차 캐덜록 이외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때때로 이 단어가 무슨 뜻이냐며 다가오는 린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되었다그를 닮아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아들과유타 깡촌에서 굴러먹은 주제에 "아버님요즘 왠 동양인 꼬마 계집애랑 날마다 도서관에서 노닥거리신다면서요아주 동네 남사스러워서 못 살겠네요그럴 시간에 우리 타미 기저귀라도 좀 갈아주시든지요!" 라며 툭하면 술담배 냄새가 뒤섞인 대거리를 해대는 폭주족 출신 며느리에게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하물며 평생 그를 뒷바라지 했지만 정작 임종도 못 지켰을 정도로 얼굴 몇 번 못 본 아내와도 마찬가지였다린의 왼쪽 눈썹만 움직이지 않았어도에릭은 어쩌면 죽는 그날까지 린을 타미인지 타미플루인지 이름조차 외우기 싫은 손자 대신으로 여기며 살았을지도 모른다제 몸에 새겨진 문신만큼이나 복잡한 과거를 지닌 며느리가 데려온 아이는에릭의 친손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린은 에릭을 그저 영어를 잘 가르쳐주는 마음씨 좋은 영감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어떤 책이든 가리지 않고 읽는 린이었지만영어가 서툴러 혼자서 내용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처음에는 쭈뼛거리며 에릭에게 한두 단어를 조심스레 묻더니하루종일 곁에서 한 문장 한 문장의 뜻을 꼼꼼하게 물어보는 날이 늘어나기 시작했다에릭은 린의 머리칼 사이에 수줍게 숨은 작은 귓불이 좋았고꼼틀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하얀 손가락이 좋았고가까이 다가온 린의 머리칼에서 나는 묘한 향기가 좋았다평생 주 방위군에서 근무한 에릭은동양에서는 도통 적응하기 힘든 괴상한 냄새가 항상 진동을 한다고 투덜대는늙은 참전 용사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하지만 만약 거기에 린이 있었다면 달랐을걸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리던 에릭은 바로 그 순간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서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커다란 배와 둔중한 엉덩이각질투성이의 무릎과 살찐 허벅지가 의자 위에서 튀어올랐고그의 뱃살은 서로 마주 앉은 동그란 탁자를 쳐올린 뒤 육중하게 도로 내려앉았다곰처럼 커다란 노인이 그렇게 튀어올랐으니 린도 몹시 놀랐을 것이다그 순간 에릭은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린의 왼쪽 눈썹을 보고야 말았다그녀의 눈썹은에릭에게 있어 그야말로 판도라의 상자였다.

 

 

 

 

에릭은 린의 왼쪽 눈썹에 왜 그렇게 마음을 빼앗겼었는지 죽는 그날까지도 끝내 설명하지 못했다린의 왼쪽 눈썹은 오른쪽 눈썹과 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른 여인들의 눈썹과 비교해도 평범했다린이 아주 즐거워하거나 깜짝 놀랄 때만 오로지 왼쪽 눈썹만이 움직였는데눈썹 한올한올이 살아 있는 듯 섬세하고 활기찼다평소에는 천연덕스레 열을 맞춰 얌전히 누웠다가 기습하듯 움직이는 모습은 십년 동안 죄수처럼 훈련받는다는 노쓰 코리아의 병정들처럼 보였다생크림처럼 맑고 하얀 린의 이마에 눈썹이 그토록 격렬히 움직였던 자국조차 없다는 사실이 괴상할 정도였다참말로 얄밉도록 매력적인 왼쪽 눈썹이었다에릭은 점점 린의 왼쪽 눈썹을 움직여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염치불구하고 직접 묻기까지 했다. “아가씨그 눈썹 좀,왼쪽 눈썹 좀 다시 움직여보겠소?” “?” 하고 되묻는 린의 눈썹이 분명 움직이긴 했지만그건 분명 에릭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움직임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그렇게 말고아까 전처럼방금처럼 말요!” 하지만 린은 오히려 멀뚱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방금 전처럼요방금 전 뭐가 어땠는데요?” 에릭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훗날 에릭은 고대 중국에 살았던 포사라는 미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천하절색 포사의 보일듯말듯한 미소를 보려고 하루에 백 필씩 비단을 찢게 하고온 나라의 군사들을 긴급하게 모으는 비상용 봉화를 시도 때도 없이 피웠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도 에릭은 포사는 아마 틀림없이 린의 전생이었을 거라고 담담히 중얼거렸다그러나 그 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에릭은 그날부터 린의 왼쪽 눈썹을 움직이게 하려고 별 짓을 다했다말 그대로 '별 짓이었고남들이 보기엔 '수작이기도 했다입대하고 나서도 껄렁한 겉멋을 버리지 못한 예비 장정들을 괴롭히는 행정 보급관 출신이었던만큼에릭은 철저하게 린의 눈썹을 다시 움직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린의 왼쪽 눈썹이 움직이는 경우는 금방 알아낼 수 있었다문제는 방법이었다어떻게 하면평생을 군대에서 보낸 노인이 이국의 젊은 처녀를 웃게 만들 수 있을까놀라게 하는 방법 쪽이 훨씬 쉬워보였지만그에게도 린의 나이는 부담스러웠고자신의 입장 또한 생각해야 했다저녁 때마다 시아비의 넓은 이마에 눈총을 박는 며느리에게 더 이상의 추태를 선보이고 싶지는 않았다주 방위군 부사관 출신의 퇴역한 노인네가 젊은 동양 여자를 성희롱하다 체포되었다는 추문도 싫었다에릭은 그저 린에게 아주 기분좋고 맑은 웃음을 선물해주고 싶었다붉은 입술을 꽃처럼 벌리면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린의 얼굴과 얄밉도록 예쁜 왼쪽 눈썹이 후루룩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에릭은 심장이 가슴 바깥으로 넘칠것 같아 아무때고 벌쭉벌쭉 웃었다린만 생각하면아니탄력있게 움직이는 그 왼쪽 눈썹을 상상만 해도 가슴 속에 집속폭탄이 두세발 연달아 터진듯 가슴이 쿵덕쿵덕몸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오죽하면 그 껄렁하던 며느리조차 황당한 표정으로 핀잔을 줄 정도였다. “아버님약은 초기에 끊으세요제가 좀 해봐서 알거든요?”

 

에릭은 온갖 코믹북과 TV 스탠딩 쇼와 코미디 영화 등에 몰두했다심지어 에릭 못지 않게 노숙해보이는 내 여자를 웃기는 백한가지 방법.” 혹은 너드(Nerd) 탈출당신도 할 수 있다!” 따위의 말도 안되는 책까지 전부 들춰보았다며느리 볼까 무서워 차마 집 안에 들이진 못했으나 제 생각에도 한심한 책들을 도서관 열람실 구석에서 아무리 조심스럽게 펼쳐도 온갖 비웃음이 등판을 뚫고 심장까지 가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그러나 그는 린의 왼쪽 눈썹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고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며그렇게 당당히 실천하는 자신이야말로 남자 중의 남자라고 자부했다비록 적지 않은 나이에도 이만한 호탕함과 호연지기(浩然之氣), 프런티어 마인드를 길러준 군생활에 대해 그는 또 한번 무한한 신뢰감을 느꼈다다만 린이 오기 전에는 반드시 이 책들을 숨겼다에릭은 진심으로 린이 자신의 부족함을 눈치채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혹독한 훈련과 승리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지상에서의 공중 강습 훈련을 손쉽게 수료하며 정일 킴의 곱슬머리조차 직모로 펴버릴듯 거만하던 해병대원조차도마침내 헬기에서 뛰어내려야하는 순간에는 팔각머리 갓난아기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에릭이 던진 회심의 농담들은린의 왼쪽 눈썹뿐 아니라 사지를 굳혀버리는 요술을 부렸고연전연패의 가련한 노병은 정말이지 애덤 쌘들러라거나 휴 그랜트비교적 익숙한 짐 캐리나 브루스 캠블을 비롯하여 유명 코미디언하다못해 운동장에 가득 운집한 백만명의 신도들의 배꼽을 분리 이탈시키는 전설적인 목회자들에게 단체 메일이라도 보내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들은 영화와 현실을 넘나들며 각양각색의 여인들을 어찌 그리 박장대소하게 만들 수 있더란 말인가에릭의 표정이 점점 무거워질때마다 저녁 식탁에서 마주한 아들과 며느리의 걱정도 깊어져갔다마침내 아들은 먹다 남은 샐러드 접시에 담배를 비벼끄면서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알았어요주무시기 전에 섹스 안하면 되잖아요그 연세에 그렇게도 외로우세요안 그래도 참한 여사님 없나 알아보고 있다구요!” 아주 틀린 방향은 아니었지만나잇대는 한참 잘못 짚었다는 말을 에릭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그 정도로 그는 몹시 의기소침해져 있었다린의 왼쪽 눈썹은기동 훈련에서 번번히 실패만을 안겨준 난공불락의 참호 진지처럼 보였다.

 

 

 

 

그래서 린이갑작스레 자신을 향해 손등을 내밀었을 때에릭은 심장이 멎어버릴 듯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때요?” “뭐가뭐가 말이오?” 말을 더듬으면서주름진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물든 채콧김을 우렁차게 내뿜으며 에릭이 린의 눈썹을 흘끔 쳐다보았다 한들적어도 그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차마 순진할 뿐인 불쌍한 노병을 탓하기 어려울 것이다린은 양 관자놀이를 살짝 위로 밀어올려 코주름을 잡으며 덧붙였다. “손톱손톱 색깔 말여요매니큐어를 바꾸었거든요.” 린의 옥빛 손톱을 바라보는 순간 에릭은 정말로 가슴이 두근거리다 이대로 찢어지지 않을까 겁이 났다스스로가 주책맞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아아예뻐요예쁘군요제이드(Jade), 동양의 색이지.” 린은 흡족한듯 화사하게 웃었다분홍빛의 도톰한 입술과 하얀 뺨이 몹시 잘 어울렸다린은 아주 살짝 자신의 이마를 기울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릭미안하지만괜찮으시면여기 옆쪽제 오른쪽 뺨에 머리카락 좀 귀로 넘겨주실래요?” 아닌게 아니라 린의 하얀 뺨 옆으로검은 머리칼 몇 올이 마치 실금처럼 사르륵 내려와 있었다내 심장이 간지러운 것처럼너도 간지럽겠구나속엣말을 침과 함께 꼴깍 넘기면서심장이 목 바깥으로 넘어오지 않길 바라면서에릭은 그녀의 뺨을 향해 손을 살살 뻗었다뼈마디가 굵고주름진 자신의 손에서쇠냄새나 흙냄새땀냄새가 날까 걱정이었다여드름 자국 하나없이 깨끗한 린의 도자기처럼 하얀 뺨 가까이에 있는 자신의 울퉁불퉁한 손은 무척 못나보였다에릭은 처음으로 자신의 손이 너무 못생겨서 창피하다고 생각했다굳은살이 잔뜩 박힌 그의 손끝에 린의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올이 닿았다매끄러운 감촉이 낯설어 에릭은 저도 모르게 샅을 허리 뒤쪽으로 뺐다의자가 끼리릭 진저리를 치며 에릭의 주책을 조롱했다에릭은 의자 소리를 감추려는 듯 다급하게 물었다. “근데어쩐 일로 손톱 색은 다 바꾸었소?” 의자 소리의 여운이 에릭을 비웃는 듯 했다영감탱이널 위한 것일까봐꿈도 야무져아주린은 여전히 이마 앞을 살짝 내밀고 눈을 감은 얼굴로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헤헤라오꽁(Laogong)이 드디어 제 전활 받았거든요교토에서이년만이에요이제 행복해질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어쩌면 에릭은 린의 입술에 입맞추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에 굴복했을지도 몰랐다.

 

 

 

라오꽁(老公/남편).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어감만으로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지만사전을 덮는 에릭의 가슴은 참담하게 무너졌다억양조차 복잡한 이국의 단어를 발음하는 린의 얼굴에서는 찬란한 빛이 넘쳐흘렀었다그럼 그렇지그렇게 예쁘고 참한 아가씨를더군다나 중국에도 일본에도아니 어딘들 남자는 넘치고 넘칠텐데눈깔에 유탄이 박히지 않고서야그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를그런데 도대체 나는이 영감쟁이야대체 혼자 뭔 주책인 게야왜 이리 마음이 아프고 쓰린게야한심하긴착각도 유별났구나스스로를 질책할때마다 에릭은 그저 그 얄밉도록 아련한 왼쪽 눈썹 때문이었을 거라고 위안하며 돌아누웠다그러나 한쪽으로 돌아누운지 일분도 안되어 다시 무거운 한숨을 삼킨 채 되돌아누울 수밖에 없었다그 때마다 에릭의 상상 속 린의 곁에는아주 그럴싸한 젊은 남자가 보란듯이 버티고 서 있었던 탓이었다말끔하니 잘생긴 얼굴에날렵하게 단련된 몸매도 모자라 고급 정장으로 잔뜩 멋까지 부린 젊은 도령이었다그는 귀티가 흐르는 얼굴로 린과 씽글씽글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그 앞에 선 린의 눈썹은 전에 없이 요염하게 쉴새없이 꿈틀거렸다에릭은 그 순간 땀에 흠뻑 젖어 꿈에서 깨어났다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기로 온 몸의 주름들이 내려앉을 듯 무거웠다게다가 간밤에 다리 사이마저도 제멋대로 주책을 부린 모양이었다불쌍한 노인은 참담한 심정으로 비린내 나는 속옷을 빨래통 안에 조심스레 집어넣었지만결국 그 날 저녁 식사 전에도 아들과 며느리는 소리죽여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애인 생기신게 분명해게다가 꽤 정정하신 모양이야.” “마이 가드니스(Oh, My godness), 나 세탁기 돌리려다 냄새에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속옷 봤어쒸엣(Shit), 완전 미시간 호수야어쩐지 계속 돌아누우시면서 삐이걱삐걱침대 스프링 확인하시더라니까!” 들으려면 들을 수도 있는 목소리였고화내려면 화낼 수도 있는 순간에그러나 에릭은 애꿎은 접시 바닥만을 포크로 긁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어쩌면 자신의 몫은린의 맵시 있는 왼쪽 눈썹이 아니라그 동안 미동조차 한 번 하지 않았던 오른쪽 눈썹이 아니었나 싶었다에릭은 점점 도서관도 가기 싫어졌고실제로 발길도 딱 끊었으며대신 낮이고 밤이고 무거운 한숨을 그림자처럼 끌며 방황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어느 날 밤 우연히 마주친 린이 차갑게 식은 밤거리에 나뒹굴었을 때 에릭의 늙고 비둔한 몸을 황소처럼 앞으로 떠민 힘은과연 무엇 때문에 어디서 샘솟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다그때까지도 에릭의 가슴은 누클리어 밤(Nuclear Bomb)이 터지고 난 히로시마처럼 온갖 감정들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아비규환이었다린을 사납게 떠민 남자는에릭의 악몽 속 남자와 얼추 비슷해보였지만 다른 점도 많았다젊고 날렵한 체격이었지만야비하고 험악하게 생겼으며얼굴에 줄줄이 새겨진 흉터들은 동양식 체스판-GO(바둑 기의 일본식 발음을 영어로 음차한 것)를 연상케했다덩치 큰 백인 남자가 덤벼드는데도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에릭의 주먹을 피했을 뿐더러오히려 위협적인 찌르기로 반격하여 에릭을 물러나게 만들었다그때서야 에릭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꿈 속에서 튀어나온 남자는막강한 고수였다에릭의 머리 뒤로한때 열광했던 브루스 리며 스티븐 시걸재키 챈제트 리준 리 등의 영상들이 줄줄이 지나갔다.

 

 

 

쫄거 없어남자라면 군 격투기야에릭은 젊은 시절의 날렵함을 되찾으려 애썼다그 와중에도 거리에 널브러진 채로 멍하니 에릭을 올려다보는 린이 눈에 들어왔다보나마나 뻔하지남편이랍시고제 어미와 씹할 놈(Mother fucker), 젊은 아내를 여기다 팔아먹고지는 탱자탱자 놀다 돈 없다니까 손찌검한 거렷다혼구녕을 내줄테다똥구멍을 핥게 해준다고(Suck' assholes)! 괴상한 기합소리를 내어가며 동물 흉내를 내곤 하는 동양 출신 신병들은 항상 있었다에릭은 젊은 시절 그들의 버릇을 어떻게 고쳐줬었는지 잠시 생각했다.

 

 

 

에릭에게도 훈련소 시절 참호 격투에서 늘상 승리의 주역이었던 때가 있었다곁눈질로 배운 어설픈 복싱이었지만 타고난 체격에 완력이 좋아 감히 그를 참호 바깥으로 메다꽂을 적수가 많지 않았다교관 시절에도 에릭의 펀치는 제법 유명해서신병들의 기세높은 콧잔등도 보기 좋게 주저앉혀버리곤 했다에릭에게도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그런데 주먹을 제대로 뻗으려면글러브그렇지글러브가 있어야 하는데……산책길에 글러브를 가지고 나왔을리도 없었고이 와중에 사 올수도 없었다며느리가 선심쓰듯 넘겨준다던 낡은 아이폰이 불현듯 아쉬웠다요즘에는 전화기로 쿡쿡 눌러 주문만 하면 별거별거 다 가져온다는데……현실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생각에 잠긴 에릭의 콧잔등에서는 그때쯤 쇠 냄새로 범벅된 코피가 덩클덩클 흘러내렸다노병의 마구잡이 주먹질은 신비한 동양 무술로 단련된 젊은 사내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그는 괴상한 자세와 기합으로 에릭의 주먹을 받아내거나 피했고그 다음에는 반드시 반격을 가했다공격방법도 다채로워서준 리처럼 정권으로 뱃살을 찔러들어오는가 하면브루스 리처럼 손등으로 에릭의 턱과 관자놀이를 훑어올리기도 했고혹은 제트 리의 연속 발차기로 에릭의 허벅지와 무릎 뒤쪽을 호되게 갈기기까지 했다에릭은 왜 싸우는지도 모른 채 싸웠고왜 맞는지도 모르는 채 맞았지만,허리 아래가 없어진 듯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딱딱한 아스팔트의 감촉이 무릎에 느껴졌지만군인 출신의 마지막 자존심으로 엎어지지 않은 채 겨우 버티었다.

 

 

 

에릭이 쓰러지자 비로소 동양 남자도 주먹질을 멈추었다그는 초점을 잃은 에릭의 눈빛을 마주하며 아주 깔끔하고 정확한 영어로 이죽거렸다. “뭐야노인네이 년 손님이었나아님 설마 기둥서방이라도 꿈꿨어뭐가 됐든 주책 한 번 대단하셔아주아이고오무서워라.” 말끝에 남자는 보란듯이 과장되게 몸을 떨어보였고그 순간 에릭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그 것은 평생을 계급 사회에서 지냈지만모멸받는 법을 오랫동안 잊고 살아온 이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였다에릭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재킷 안쪽에서 아주 익숙한 물건을 꺼내들었다구형 베레타 M92Fs였다날씨가 선선해져 아무거나 주워 입은 겉옷이 군용 재킷이 아니었더라면그 안주머니에 있을리가 없는 물건이었다에릭의 몸은 늙었지만 손은 질리도록 쏘고 쏘던 권총의 무게와 감촉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동양 남자는 까맣게 탄 얼굴이 해쓱하도록 하얗게 질려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에릭은 남자를 계속해서 겨누었지만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자루 끝으로 그의 머리통을 강하게 내리찍었다영화나 만화와 전혀 다르게남자의 정수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터지듯 솟아올랐고그는 에릭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그러나 힘없이 쓰러졌다그리고 에릭은 여전히 총을 겨눈 채로힘차게 그를 내리밟기 시작했다그 때 에릭의 입에서는 알 수 없는 기합과 신음이 침과 함께 흘렀고눈에서도 영문모를 눈물이 뚝뚝 떨어져내렸다에릭은 남자를 내려밟는 그 순간에도그때서야 신고를 받고 달려온 캅(Cop)들의 순찰차 싸이렌 소리가 들릴 때까지도여전히 자신이 왜 이러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과연 에릭이 뉴스와 신문에 실리긴 하였으나그가 걱정하던 방향과는 정반대였다그는 성매매 여성을 폭행하려던 동양 포주를 혼내준 전직 군인 출신의 용감한 어르신이 되었다게다가 린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증언해준 탓에 권총 문제도 별 혐의없이 풀렸다하지만 정작 에릭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포주라고……?” 여러 가지 의문이 한꺼번에 담긴 질문이었으나 린은 단 하나의 대답만을 수줍게 내밀었다. “라오반(Laoban)이라고 했잖아요.” “라오반난 라오꽁이라고 들었는데.” “라오꽁은 허즈번드라오반(老板/사장)은 보스그래봐야 사카모토는 재일화교에서도 내쫓긴 삼류 야쿠자 건달에 불과하지만요그래서 저처럼 갈 곳 없는 혼혈 아이들을 잡아다 장사를 시키죠저한테 남은 빚을 지불하면 자유가 되는 거였는데이상한 핑계를 대면서 끝까지 못 가게 막아요그게 이 쪽 인간들 수법이죠.” 에릭이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자 린은 양 눈썹 사이의 미간을 좁혔다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살짝 비틀어 에릭을 흘겨보는 모습은 여전히 깜찍했다. “뭐예요에릭설마 이제 와서 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 몰랐다고 하실 건가요?” “나는 그게…….” “책 한 권 살 돈도 없고영어도 못해서 도서관에서 띄엄띄엄 책 읽으며 말 배우는 동양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몸이 약해서 청소도 세탁소 일도 못하고사실 찻집이라도 하면서 살고 싶었지만 이 나라에선 영어 못하고휴대전화 없으면 누구도 일자릴 안 주는걸요그래도 에릭당신은 내게 짜증 한번 없이 내게 궁금한 것을 알려줬던 유일한 이 나라 사람이었어요.”

 

 

 

그러리라 생각했다에릭도 모르지 않았다그러나 왜 그리도 가슴이 미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아내의 부고를 들었을 때에도 울지 않았다단지 우연찮게 화생방 훈련을 마치고 나온 뒤였을 뿐이었다몇 년을 주기로 꼬박꼬박 맞아왔던 CS 최루분말이 유난히도 따갑게 느껴지던 날이었다지금보다 덜 늙었던 에릭은 사자처럼 몸부림을 치며 울었고주위 동료들은 그의 얼굴을 불어주며 위로를 전했지만정작 에릭은 아내의 무덤 앞에서도 여전히 덤덤했다그저 남들처럼 결혼했고남들처럼 바쁘게 지내다 남들처럼 아내를 먼저 떠나보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평생을 무뚝뚝하게 살아오다 조그마한 동양 처녀 한 명 때문에 갑작스레 눈물이 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그의 커다란 코는 찡찡 시큰거렸고눈은 점점 무거워졌다눈물과 콧물이 인중에서 서로 만났다그녀보다 두세 배는 클듯한 노병의 울음에린은 어쩔 줄 몰라할 뿐이었다. “에릭왜 이러세요왜 우시는 거예요?” 만을 반복하던 린도어느틈에 코끝이 빨개져서 또르르 작은 눈물을 떨구며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때 에릭은린의 왼쪽 눈썹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기쁘지도놀라지도 않은 상황에서 왼쪽 눈썹이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었다놀랍게도 그 때 에릭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지금까지의 열기와 조바심이 몽땅 사라져버린 듯에릭은 그저 멍청하게 그녀의 왼쪽 눈썹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눈물로 일그러진 시야 때문인지 린의 왼쪽 눈썹은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에릭에게 무엇인가를 속삭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에릭은 황급히 눈을 질끈 감아 남은 눈물을 짜내었다그러나 눈물은 곧바로 다시 차올랐고린의 왼쪽 눈썹은 그 사이에 다시 고요해졌다그리고 에릭은 두 번 다시 린의 왼쪽 눈썹을아니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린과 사카모토는 이민국 직원들에게 인계되어 아마 곧바로 강제 추방될 거라고에릭과 비슷한 연배의 경찰이 전해주었다허리띠 바깥으로 나이만큼의 뱃살이 두둑히 매달린 늙은 경찰은 에릭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쳐주고는 사라졌다며느리와 아들을 눈짓하며 자네도 괴롭겠군요즘 젊은 것들이란!’ 따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한 모습에 속이 뒤틀렸지만 에릭은 잠자코 있었다어쨌든 아들과 며느리는 평생을 고지식하게 늙어온 사내의 일탈을 아직도 낯설어 하고 있었다이제 그를 그립게 할 린도지긋지긋하도록 괴로운 왼쪽 눈썹도 없었으므로앞으로는 평온할 터였다에릭은 왠지 빈 듯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담배를 피워물었다얼마만의 담배인지 폐가 뒤집히는 기분이었지만코와 혀는 상큼달큼 시원했다그리고 그 때서야 에릭은린의 왼쪽 눈썹 따위는 핑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으로에릭은 어쩌면 평생동안 몹시 잘못 살아온게 아닐까 생각했다오로지 남들이 하는대로군대에서 시키는대로 살아오며 늙은 자신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사랑일 수도 있었다아니사랑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에릭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벌렸지만그 순간 코와 폐에서 쏟아져나온 연기가 다시금 격렬한 기침을 끌어왔다그는 내장을 모두 토할 듯이 쿨럭거렸고그때 쏟아진 눈물은 고스란히 울음이 되었다에릭은 울고 또 울었다멀리서 며느리와 아들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달려왔지만그는 여전히 개의치 않고 울었다담배연기가 배를 채워주지 못하듯이 아무리 울어도빈 가슴은 끝내 채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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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늘 부족함에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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