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연구소 건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제홈은 지난 파견지에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상기하기 시작했다. 자전거 페달을 한 번 밟을 때마다 한 장면씩. 주차장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그의 회상도 막바지에 다다른 참이었다. 제홈은 자전거를 거치대에 세우고 연구소에 들어가기 전에 다시 전자담배를 꺼냈다. 집에서 나오면서 한두 모금 피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고된 작업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린 탓이었다.

한 달 반 만에 돌아온 연구소는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었다. 경비원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제홈을 맞았고, 휴게 공간을 겸하는 넓은 로비에는 연구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곳곳에 놓인 수시로 변화하는 기하학적인 패턴의 조형물들과 한때 다시 유행했던 액션 페인팅 풍의 그림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바뀐 게 있다면 제홈의 업무뿐이었다. 짧은 인사를 마치자마자 동료들은 실험실로 돌아갔고 그만 혼자 남아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각자의 연구로 바쁜 동료들과는 달리 그는 지난 파견 중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제홈은 턱을 괴고 파견지에서 맡았던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내용만을 써야 하는지, 아니면 그 외의 내용도 전부 써야 할 지 고민했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제홈은 빠른 속도로 보고서를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지체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파견 업무에 관한 보고서도 한참을 붙잡고 있어야 할 과제였지만, 그 후처리에 관한 내용으로도 그만큼의 시간을 쏟아부어야 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에게 힘이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면, 보고서만 제출하면 3주간의 유급 휴가가 그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제홈은 전자담배까지 멀리 밀어둔 채로 보고서 작성에 박차를 가했다.

 

》《

제홈은 담배꽁초를 창밖으로 던진 후 그대로 왼팔을 돌렸다. 손목을 휘감은 넓적한 스마트 워치에 숫자가 떠올랐다. 오후 11시 12분. 마지막 마을에서부터 1시간가량을 내리 달리고서야 인공적인 불빛을 마주한 시각이었다. 활기 넘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다시 마주한 시각이기도 했다. 차량을 같이 타고 온 사람들이 말 한마디 없이 목석처럼 앉아만 있던 탓에 제홈은 사람이 걸어 다니는 모습만으로도 내심 반가운 심정이 들 정도였다.

기쁜 마음을 만끽하기도 전에 딱딱한 표정의 경비원이 제홈의 앞을 막아섰다. 얼핏 봐서는 군인 같았지만, 왼 팔뚝에 사기업의 것으로 보이는 로고가 박혀 있었다. 그 경비원은 제홈을 출입관리소로 데리고 들어갔다. 제홈은 경비원의 안내에 따라 차례차례 홍채와 지문을 등록했다. 그때마다 스크린에 떠 있는 제홈의 사진 옆에 각각의 무늬가 추가됐다. 지문을 등록하는 동시에 검침기로 소량 채혈하여 유전 정보와도 연동시키는 것이 보였다. 뉴브라칩 항목에 <없음>이라는 표시가 뜨는 것까지 확인하고서야 제홈은 관리소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 신분 확인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경비원들은 X-ray 투시와 금속 탐지는 물론이고 얼마 되지도 않는 소지품까지 일일이 꺼내 꼼꼼히 검사했다. 마치 군사 지역을 방불케하는 경비 수준이었다.

내부에는 제홈이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늦은 시간임이 확실한데도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였고, 사람들이 많은 만큼 컨테이너의 양도 상당했다. 검색대 밖으로 나오자 처음 제홈을 맞았던 경비원이 그의 가방을 도로 건네주며 말했다.

“휴대폰 사용은 가능하지만 규정상 감청이나 추적이 일어나니까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계약서에도 이미 명시된 대로 이곳은 치외법권이니까 일반적인 법의 보호를 받으실 수도 없습니다.”

경비원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가며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복 차림의 여자 둘이 다가왔다. 한 명은 단발의 동아시아 계열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붉은 뿔테가 인상적인 히스패닉 계열이었다.

“랑시에 제홈 씨죠?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전 총괄 책임자인 노이카 에넷입니다.”

“반갑습니다, 마드모아젤 에넷. 계속 앉아 있기만 해서 딱히 힘들거나 하진 않았는데, 설마 도착하자마자 일을 시키진 않겠죠? 그것도 이런 시간에?”

제홈의 말에 에넷은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옆에 서 있던 루비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같은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전 루비오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에넷 씨는 지금 이어넷이 고장 나서 영어와 일본어 외엔 못 알아 들어요.”

루비오는 에넷과 마찬가지로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제홈은 짧게 탄식한 후 그들을 따라 영어로 말했다.

“실수했군요. 제가 이어넷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네요. 요샌 이걸 안 쓰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마드모아젤이 아니라 마담이에요, 마담 에넷.”

제홈은 이제 입까지 가리며 한 번 더 탄식했다.

“오, 저런. 한 번에 두 가지 실수를 하다니, 용서를 구해도 괜찮을까요, 마담 에넷?”

제홈은 사과의 의미로 에넷에게 악수를 청했다. 에넷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그에 응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이어넷의 통역 기능 때문에 외국어 공부가 거의 필요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런 게으른 사람 중 한 명인 제 잘못이죠.”

“뭐, 어찌 됐든 숙소로 이동하면서 얘기하죠.”

루비오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머지 둘도 컨테이너가 밀집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당장 일하고 싶으셔도 아직 설비가 마무리되지 않아서 불가능해요. 설비 팀에서 내일 안에 제홈 씨가 사용할 장비는 다 설치해준다고 하니까 본격적인 작업은 모레부터 가능하실 겁니다. 그 대신 내일은 기지 소개랑 현재 연구 진척도,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같은 거에 대해서 알려드릴게요. 방은 2층의 23호 쓰시면 됩니다. 오면서 받으셨을 ID카드로 작동하고 스마트 워치에 등록해 놓으셨으면 그걸로도 가능해요. 그럼 밤도 늦었으니 내일 뵙도록 하죠.”

제홈은 기껏 등록한 생체 정보 대신 ID카드를 사용하는 연유가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잠시만 사용할 기지에 그런 설비까지 세울 필요는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셋은 2층 컨테이너로 향하는 계단 앞에 멈춰 섰다. 말을 마친 에넷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루비오가 바로 다음을 이었다. 제홈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철제 특유의 텅텅거리는 소리는 오랜만이었다.

“아, 그런데 내일도 영어로 대화하나요?”

제홈의 물음에 둘이 뒤를 돌아봤다.

“저도 영어를 잘하진 못해서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 새 이어넷을 받을 수 있다고 하니 앞으론 문제없을 겁니다.”

“여긴 쓸데없이 보안에 신경 써서 탈이에요. 에넷 씨 이어넷이 망가진 건 어젠데, 이어넷 그게 뭐라고 검사다 뭐다 해서 결국 내일 들어온대요. 여기서 나가지도 못하게 하면서 제약은 엄청 많아요, 정말. 나중에 맥키퍼 씨한테 성질 좀 부려야겠어요.”

 

》《

문 밖으로 나온 제홈은 담배를 꺼내 난간에 기댔다. 컨테이너 벽에 금연 마크가 띄엄띄엄 붙어 있었지만, 난간은 엄연히 바깥이므로 괜찮을 거라고 합리화를 하며 불을 붙였다. 제홈은 어둠 속에서는 놓쳤을 기지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담았다. 고개가 반 바퀴 정도 돌아갔을 무렵 계단 끝에 선 에넷과 루비오가 보였다. 스마트 워치를 보니 업무 시작이라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제홈은 황급히 담배를 끄고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아침 일찍부터 마중 나오신 건가요?”

“여기 사람들 중 우리 둘이 제일 한가해서 말이죠. 일단 정식으로 다시 인사하도록 하죠. 전 핵물리학자인 노이카 에넷이고, 현재 이 기지의 총괄 책임자입니다. 그래봤자 이곳 관할이 NASA로 넘어오면서 맡게 된 거라 이제 겨우 한 달 있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거의 초창기부터 있었던 루비오 씨가 더 잘 아실 겁니다.”

“인스티아나 루비오입니다. 스페인의 말라가 대학에서 구조지질학과 암석학을 전공했고요. 이제 여기서는 할 것도 없는데 NASA에 붙잡혀서 못 나가고 있습니다.”

잠깐 동안 셋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루비오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제홈에게 눈치를 줬다.

“아, 전 랑시에 제홈이고 트레마 연구소에서 인간 게놈을 연구 중입니다.”

“그럼 천천히 기지 소개를 해드릴게요. 어제는 시간도 늦었고, 어두워서 제대로 못 보셨죠?”

바리케이드로 둘러싸인 기지는 연구 대상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무지였다. 드문드문 잡초가 난 것 외에 땅 위에 서 있는 것이라고는 컨테이너와 바리케이드와 차량과 사람들뿐이었다. 둘은 앞장서 걸으며 황량함만 느껴지는 기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제홈은 뒤따라 가며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북쪽에 위치한 숙소, 동쪽에 위치한 출입구와 출입관리소, 남쪽에 위치한 연구 센터, 마지막으로 서쪽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와 체육 시설 및 편의 시설. 각각의 시설들은 가운데의 공터를 중심으로 십자 형태로 세워져 있었다. 에넷은 문제의 연구 대상이 저 공터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공터에는 낮은 울타리와 햇볕만 겨우 가려주는 천막만 쳐져 있었다. 7명 정도의 경비원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주위에 서 있었다. 경비원들이 24시간 상주하며 지키고 있으니 울타리 안쪽은 관심도 갖지 말라고 에넷이 충고했다.

“그녀 말대로 하는 게 좋아요. 장난으로라도 돌이라도 던질 생각일랑 마세요. 전 한 번 시험 삼아 허락 없이 울타리를 한 번 넘어갔을 뿐인데, 글쎄 경비원들이 떼거리로 달려와서는 바로 제지하더라니까요? 그리고 출입 관리소에서 1시간 동안 경고와 훈계까지 들었어요. 아마 제가 연구원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벌집이 됐을지도 몰라요!”

루비오는 혀까지 내밀어 보이며 그날의 상황을 늘어놓았다. 단번에 이해가 가지는 않는 조처였다. 그 정도로 중요하고 보존해야 할 장소라면 보다 확실한 경계책을 세우는 게 당연했다. 가건물을 세우든가, 하다못해 비닐로라도 벽을 세우든가. 바람 등의 자연현상에 의한 훼손을 막기 위해서도 그러는 것이 나아 보였다. 하지만 공터는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 몇 명의 경비원만으로 지켜지고 있는 것이었다.

세 명은 어느새 기지를 반 바퀴 돌아 연구 센터 앞에 도달했다. 숙소와 마찬가지로 컨테이너를 이어 붙인 연구 센터는 상당히 고요했다. 차라리 경비원들이라도 걸어 다니는 바깥이 훨씬 생동감 넘쳐 보일 정도였다. 루비오는 지나치는 문들 위에 뜬 방 이름을 읽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일 뿐이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문 하나 열리지 않았고, 아무도 마주치지 못했다. 얇은 문 너머에 과연 사람이 있기나 할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루비오는 실험실 중에는 특정 실험을 할 때만 잠깐씩 쓰는 곳도 있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지금 어디 갔나요? 다른 연구원분들하고도 인사도 하고 프로젝트 진행 관련해서 교류도 좀 하고 해야 좋을 것 같은데, 아무도 안 보이시네요. 연구실 문도 다 닫혀 있는 것 같고.”

“여기 각 연구실은 잠글 때만이 아니라 출입할 때마다 ID카드를 찍게 되어 있어서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제홈 씨 같은 경우는 아직 보안 등급이 높지 않으셔서 본인 연구실 외에는 출입 가능한 곳이 거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아마 회의할 때 빼고는 저나 루비오 씨만 볼 수 있을 거고, 다른 연구실에 전달할 것도 저희가 중간에서 전해드릴 겁니다.”

외딴곳에 지어진 연구 기지, 군부대 수준의 경비, 홍채와 지문, 유전 정보까지 연동하는 신원 조회 시스템, 보안 등급의 차등. 무엇하나 자연스러운 것이 없었다. 물론 몇몇 분야는 논외였지만, 요즘처럼 지식의 공개와 교류가 중요해지는 시대에는 상당히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식 기지가 아니라 임시로 세운 기지라 하더라도 생체 정보를 등록하고도 정작 건물과 방을 출입할 때 이용하지 않는 것도 상당히 구식처럼 느껴졌다. 제홈은 바이오 해킹의 위험성 때문에 일부 군사 시설들은 일부러 구시대적인 보안 체계를 유지한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보안 등급도 또 따로 있어요? 뭐 얼마나 비밀스러운 실험이기에 이렇게까지 해요? 어차피 제가 할 건 운석에서 발견한 유기물 복합체 분석이라면서요. 겨우 그 정도 일이면 NASA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 같고, 그게 여의치 않아도 그냥 연구소로 샘플 보내는 식으로 외주 맡겨도 되는 거 아닌가요? 오히려 그게 더 괜찮을 것 같은데. 이렇게 귀찮게 보안 절차 같은 거 밟을 필요도 없고.”

에넷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NASA가 소심해져서 그런 거죠. 내부에서는 지금 당장 그 RNA를 밝힐 인력이 딱히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외부 인력을 끌어오는 건데, 혹시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골치 아파지니까 영향 범위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거예요. 그리고 보안 등급은 이해해주세요. 높으신 분들 보기에 뭔가 좀 걸리는 게 있나 봐요, 아무래도.”

결국 제홈은 간단한 인사 한번 나누지 못한 채로 복도 끝에 다다랐다. 복도 끝 문에는 회의실이 있었고, 그 바로 옆 방에는 ‘분자유전’이라는 글씨가 반짝이고 있었다. 문을 열자 방진 작업복을 입고 장비를 설치 중인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문이 열린 걸 눈치채고는 작업을 멈추고 제홈을 쳐다봤다.

“설치는 오늘 내로 끝날 거예요.”

어느새 문고리를 잡은 에넷이 천천히 문을 닫았다. 작업 중이던 사람들이 하나둘 제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에넷은 바로 맞은편의 ‘나노물성’ 글씨가 뜬 방으로 제홈을 이끌었다. 루비오는 문고리를 잡고 멈춰 섰다.

“지금부터 보실 것과 저희가 설명해드릴 내용은 전부 1급 기밀에 해당해요. 심호흡이라도 한 번 하세요.”

루비오는 말만 그렇게 하고는 숨 한 번 쉴 시간도 없이 문을 열었다. 실험실 내부는 온통 하얀색이었고, 덕분에 회색 일색의 장비들 가운데의 초록색 의자가 더 눈에 띄었다. 투명한 관 안에서는 검은 물체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저게 그 운석인가요? 뭔가 돌덩이라기에는 좀 기괴하게 생겼는데요.”

“운석이란 건 사실 편의 상이에요. 일단 여기선 다들 캡슐 X라고 부릅니다. 제홈 씨가 연구할 유전물질하고 단백질이 저 운석 내부에서 함께 나왔거든요.”

“계약서에도 쓰여 있었죠. 단백질과 유전물질. 오랜만에 배종발달설이 힘을 얻겠네요.”

“그건 또 모르죠. 방금 말씀드렸듯이 운석이라는 분류는 편의 상일 뿐이고 유래가 어딘지 확실치 않아요. 이게 어떻게 봐도 크레이터임이 확실한 곳에서 발견된 것도 아니고, 주변에 이리듐이나 기타 중금속이 분포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거든요.”

루비오는 제홈의 말에 미약한 반대 의사를 보였다. 에넷은 생경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그 배종발달설이라는 게 뭐죠?”

에넷의 물음에 둘은 대화를 멈추고는 동시에 그녀를 쳐다봤다가 다시 서로를 바라봤다. 흔한 지식의 저주였다.

“그, 생명과학? 우주생물학? 하여튼 그런 쪽 얘기인데, 지구 생명의 기원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요. 지구 밖에서 유입된 유기물질에 의해 지구에 생명체가 자리 잡았다는 가설이죠.”

“그래서 운석이냐 아니냐의 여부가 그 문제에서 중요한 거고요. 밖에서 들어와서 남아 있는 건 운석밖에 없으니까.”

제홈과 루비오는 번갈아 가며 에넷에게 설명했다. 초면인 것 치고는 둘의 합은 그런대로 잘 맞았다. 그 설명을 듣고 있던 에넷은 팔짱을 끼며 되물었다.

“그 내용을 왜 전 몰랐을까요, 한 달이 지나도록. 루비오 씨?”

“아, 그게… 에넷 씨가 오기 전에 그 가설의 가능성은 사라졌거든요. 보셔서 아시겠지만 캡슐의 그 복잡성이라든가 여러 특성 때문에 운석으로 보긴 힘들다고 결론이 나서요.”

“흠, 그렇군요. 그럼 마저 설명해주시죠, 루비오 씨.”

에넷은 팔짱을 끼며 옆의 책상에 기댔다. 그녀의 궁금증이 일단은 해결된 것처럼 보이자 루비오는 짧게 숨을 돌렸다. 제홈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에, 뭐, 그럼 다시 이어서 설명해 드리면, 어차피 외부에서 온 거면 하나 마나인 수준이긴 하지만, 동위원소 연대측정법으로는 대략 600만 년 전에 생성된 걸로 확인이 됐어요.”

“운석, 아니, 캡슐이요?”

“아, 아뇨. 내부의 유기물질들이요.”

제홈은 에넷을 따라 팔짱을 끼고서는 캡슐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허리까지 숙여 천천히 돌아가는 캡슐 X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캡슐 X와 제홈 사이를 가로지르는 투명한 벽에 스마트 워치가 비치는 게 보였다. 초 단위까지 설정한 탓인지 시간이 지나가는 게 바로 보였다.

“그렇군요. 600만 년 전이면 유전물질이나 단백질이 그렇게 희귀할 때도 아니네요. 이미 공룡이고 뭐고 다 번성하고 있을 때잖아요.”

“공룡은 훨씬 이전 시대이고, 마이오세라고 해서 신생대에 들어가는 시대에요. 유인원이 등장해서 번성한 시기기도 하고요.”

제홈은 몸을 돌려 설비에 기대어 섰다. 그의 등 뒤에선 캡슐 X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제대로 좀 설명해주시겠어요? 사실 이거 군사 작전이랑 연계된 거죠? 경비나 보안 같은 건 차치하더라도, 이 캡슐이라는 거, 아무리 봐도 인공물인 거 같은데, 생화학 테러용으로 제조된 게 아닌가 의심돼서 이러는 걸로 보여요. 그렇게 접근하는 게 더 합리적으로 보이고. 그리고 사실 DNA는 600만 년 정도 지나면 자연적으로 붕괴하거든요. 아슬아슬하긴 한데 붕괴는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됐겠죠.”

“테러라는 가능성을 제일 먼저 따져 보긴 했지만, 엄청 낮다는 게 현재의 결론이에요.”

제홈과 루비오의 지식 자랑을 듣고만 있던 에넷이 입을 열었다.

“언젠가 알려드릴 예정이긴 했지만, 보시자마자 추론하시다니 감각이 좀 있으시네요. 미 정보부의 판단으로는 이런 움직임을 보인 나라나 조직은 단 한 곳도 없다고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진짜 1급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을 이야기하도록 하죠. 보안 등급도 그에 맞게 조정해드릴게요.”

 

》《

제홈은 연구 센터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피우는 게 제홈의 작은 습관이었다. 그는 혹시라도 오가는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싶어 문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하지만 담배가 필터까지 타들어 갈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실 연구원은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에넷과 루비오, 이렇게 세 명뿐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실험실에 들어가니 루비오가 이미 와있었다. 그녀는 불투명한 액체가 든 병을 하나 들고 있었다.

“이게 제홈 씨가 연구하실 유기 샘플입니다. 간단하게 시료 X라고 부르고 있어요. 일단은 전체의 5분의 1 정도만 드리는 거고요. 실험실 후드 안에서만 개봉할 수 있도록 특수 제작한 용기예요. 20m 높이에서 떨어뜨려도 안 깨질 정도로 튼튼하고요. 아마 실수로라도 샘플이 유출돼서 실험실이 오염되거나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이런 용액 상태였다는 말이죠? 딱 봐도 인공적인 냄새가 나네요.”

“네, 처음부터 콜로이드 상태였어요. 그저 병에 옮겨 담기만 했을 뿐이죠.”

현미경으로 관찰해보니 루비오의 말대로 떠다니는 작은 부유물들이 보였다. 배율을 최대로 높여 봤지만 부유물의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 있거나 가시광선은 통과 못 할 정도로 무언가 빽빽하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표면에서 빛을 차단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제홈은 우선 표면이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함부로 화학 반응을 통해 확인할 수 없었으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건 원자현미경과 X-ray 산란일 수밖에 없었다.

제홈은 플레이트에 시료 X의 샘플을 조금씩 담고 실험을 시작했다. 물론 실험의 B부터 Y까지는 연구 보조 인공지능 Bio-AISID(Bio-Artificial Intelligence Supporting Integrated Data, AISID) v.2.64의 몫이었다. AISID는 파편화된 자료의 통합으로 사용자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고안된 인공지능이었다. 특수 장비와 그에 맞는 분석 프로그램이 기기 별로 난립하다 보니 이를 통합 관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과의 유기적인 상호작용 외에 다른 복잡한 기능은 따로 없었지만, 이 정도의 간단한 일을 수행하기에는 충분했다.

제홈은 AISID가 실험을 수행하는 동안 부유물의 내부를 확인할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제일 먼저 투과전자현미경이 떠올랐지만 그러자면 절삭 과정이 선행돼야 했다. 확실히 절삭을 하면 내부는 확인할 수 있겠지만, 안에 있는 물질까지 손상될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째로, 표면에 틈을 만들어 끄집어내는 것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려면 표면의 구성이 어떤지 알아야 했다.

“결국 마냥 기다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데,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재미없고, 시간도 너무 아깝지.”

제홈은 일단 그들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가 맡은 업무가 단백질과 유전물질의 분석이었고, 에넷의 말로도 둘 다 나왔다고 했으니, 저 부유물은 유전물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단백질일 거라고는 추정할 수 있었다. 제홈은 다시 소량의 샘플을 분리하여 단백질 분석 프로그램인 Pro-Sim-Pro(Protein-Simulation-Program, PSP) v.4.22를 통해 분석을 시작했다.

잠시 후 AISID가 두 실험에 대한 결과를 내놓았다. X-ray 산란 패턴은 너무 불규칙해서 특정한 결정 구조를 확인할 수 없었다. 심각하게 복잡한 상태에 있을 거라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었다. 원자현미경 분석으로는 부유물의 표면이 단백질일 거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단백질 분석을 시행한 게 정답이었다.

‘똑똑똑’

“네, 들어오세요.”

“누군지도 안 물으시고 막 들여보내시나요?”

에넷이었다.

“어차피 보안 코드 없으면 못 여는 문이잖아요. 그 문을 열 수 있으면 다 된 거죠.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점심시간입니다, 곧. 아무리 연구가 재밌으셔도 밥은 먹어가면서 해야죠. 그리고 다른 연구원분들하고도 인사하고 싶으시다 하셨잖아요.”

카페테리아는 점심시간인데도 한산했다. 경비 인력 때문에 기지의 인원은 상당한 편이었지만, 모두가 한 번에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탓이었다. 에넷은 창가에 앉아 있는 무리 쪽으로 제홈을 이끌었다. 딱 봐도 운동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한 명을 빼고.

“소문의 신입 연구원이시군요. 전 나노물성 실험실에 있는 니마 뤼스커입니다.”

뤼스커는 앉아 있을 때도 눈에 띄는 체격이었지만 일어서니 훨씬 더 거구로 보였다. 구불구불한 적발과 덥수룩한 수염이 그의 풍채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 그 캡슐 있는 방! 그런데 어제는 어디 가셨었나요? 아니면 다른 실험실에 계신 건가요?”

“하하! 보시다시피 제가 운동을 좀 좋아해서 말이죠. 월요일 오전엔 늘 운동하고 있습니다.”

뤼스커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고, 제홈의 손은 뤼스커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제홈의 손이 뤼스커의 손으로부터 탈출하자마자 다른 손이 그의 손을 다시 잡았다.

“저는 클램시 맥키퍼이고, 암호 해독을 위해 왔습니다.”

“NSA에서요. 그리고 출입 관리도 같이하고 계시죠.”

루비오가 맥키퍼에 대한 부연 설명을 늘어놓았다. 맥키퍼는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했지만 제홈은 간단히 흘려듣지 못했다. 평범한 경찰이나 군인도 아니고 NSA라니, 맥키퍼의 유난히 까만 피부색 때문인지 검은 홍채와 흰자위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자국민까지 감시한다는 미국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트레마 연구소에서 온 랑시에 제홈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인가요? 기지 크기에 비하면 생각보다 조촐하네요.”

“뭐, 그만큼 인력이 필요한 부분이 줄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여기 앉으시죠.”

뤼스커는 옆의 의자를 빼며 자리를 권했다. 제홈은 그쪽으로 걸어갔고 에넷은 반대쪽으로 갔다.

“전 이제 막 온 참이라 진행된 게 하나도 없는데, 다른 분들은 뭐 좀 알아내신 게 있나요?”

“제가 알아낸 건 이틀 후에 알려드리죠. 저 캡슐은 평범한 금속 덩어리가 아니거든요. 그게 에너지에 반응하는 방식은… 아차차, 나중에.”

뤼스커는 제홈을 향해 윙크했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제홈은 그가 상당히 익살스러운 편이라고 직감했다. 그에 질세라 루비오도 역동적인 표정을 지으며 바통을 이어받았다.

“사실 매주 목요일마다 미팅이 있어요. 그때 연구 결과를 다 같이 공유하고, 향후 과제 수립하고 그러죠. 각자 남의 학문에 대해 아는 게 뭐 얼마나 있겠냐만, 그래도 혼자서 머리 싸매는 것보다야 낫죠.”

제홈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저께 밤에 도착했고, 어제는 실험실 장비를 설치한다고 설명만 들었고, 오늘 아침에야 막 시료를 받은 참이었다. 앞으로 남은 이틀을 밤을 새운다고 해서 뭔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이번 미팅에 저도 발표하나요? 그때까지 보고할 만한 무언가가 나올 것 같지 않은데.”

“걱정 마세요. 제홈 씨는 아마 다음 주부터 하시게 될 거예요.”

에넷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다지 걱정이 누그러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

미팅이 끝나고 연구원 모두가 회의실에서 나왔다. 제홈도 다시 실험실로 돌아왔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로부터 이제 막 벗어난 참이었다. 특히 뤼스커가 발표한 메타물질 관련한 설명은 제홈을 괴롭히기에 충분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이니, 음의 굴절률이니 하는 것들은 제홈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그런 사정을 봐줄 리는 없었다. 잠시의 휴식을 취할 틈도 없이 AISID의 낭랑한 소리가 들렸다.

<단백질 분석 결과, 피막은 100종 이상의 단백질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중 일부는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어느 단백질과도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제홈은 터벅터벅 걸어가 의자에 힘없이 앉았다. 그는 한숨을 크게 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 일부가 몇 %인데?”

<현재까지의 분석으로는 75% 정도로 추정 중이고 오차율은 ±10%입니다. 피막 단백질에의 분리 분석을 추천합니다.>

전체는 아니니 일부가 맞긴 했지만, 일부라고 말하기에는 75%는 상당한 비율이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3분의 2에 육박하는 양이었다. 물론 생물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아미노산의 종류만도 20가지가 넘고, 천연 아미노산까지 합하면 100가지를 넘기기에 그 조합인 단백질의 종류는 무한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75%는 너무했다. 데이터베이스에 완성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전 세계의 석학들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업적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조직으로 추정되는 부분은 없었습니다. 비천연 아미노산의 존재도 확인되었습니다.>

“뭐? 이 미친….”

제홈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21세기 초부터 진행된 비천연 아미노산의 활용은 생화학 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기존의 단백질로는 구현이 어려운 기능을 구현할 수 있었기에 의약품 관련 산업이 엄청 발전한 것은 당연했다. 굳이 새로운 기능을 연구하지 않더라도, 단순한 치환을 이용해서 단백질과 유전자에의 추적과 분석을 용이하게 할 수도 있었다. 이런 비천연 아미노산의 존재는 시료 X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성분, 구조, 기능에의 분석의 범주를 배 이상 넓혀야 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자연적으로 합성된 비천연 아미노산이 우연히 단백질 중합에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명체가 비효율적이거나 합성이 어려운 아미노산을 굳이 고집하며 쓸 이유도 딱히 없었다. 초기 생명체라 할 만한 게 등장한 시기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난립했을 테니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600만 년 전이면 사용하는 물질이나 기작들은 이미 어느 정도 정형화되었을 시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인공적인 합성을 인정해버리면 600만 년이라는 간극이 문제가 되었다. 제홈은 유인원이나 돌아다니던 시대에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분명 현대의 과학자가 장난을 친 거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인 것 같았다. 그 과학자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작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사성 동위원소를 조작해가면서까지 만든 거라면 실로 대단한 정성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 실낱같은 가능성으로, 따로 격리되어 진화해온 생물체일 수도 있었다. 흔한 말로,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었다. 남들은 안 쓰는 물질을 쓴다는 건 치열한 자원 경쟁에서 비껴가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했다. 복잡한 기작은 비효율적이라도 유일하다면 필수가 되었다. 게다가 마치 갈라파고스섬의 생물들처럼 격리까지 되었었다고 한다면 천적도 따로 없었을 것이다. 수억 년에 걸친 진화의 과정에서, 이렇게까지 이상하고 엉성한 상태로도 살아남는 게 전혀 불가능한 거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저 단단한 껍질을 열어야 했다. 이왕 하는 김에 피막 단백질도 분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려면 다이아몬드 칼로는 부족했다.

 

》《

“안 됩니다.”

에넷이 말을 끊는 바람에 제홈은 자신의 제안에 마침표도 찍지 못했다.

“그 시료는 현재 위험 등급의 판정조차도 불가능한 물질이에요. 알고 계시겠지만, 이런 경우 최고 위험 등급으로 간주해서 다뤄야 합니다. 그런 물질로 함부로 생물 실험을 할 수는 없어요.”

에넷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원칙을 지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사안이었다. 제홈이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도 원칙을 지키지 않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뮬레이션만으로는 시료를 분석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양자물리학과 인공지능의 발달에 힘입어 단백질 하나하나를 따로 분석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딱히 이름도 없는 것들이 연결되면서 에너지 분포가 바뀌고 복잡한 구조체를 이루는 것까지 분석할 만한 길은 아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도 제홈 씨 의견에 동의해요.”

이를 이해해준 것인지 루비오도 제홈의 편을 들었다.

“예전에 고생물학 쪽에 흥미가 있어서 생명과학 쪽 수업도 몇 개 들었거든요. 단백질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애들 분석하는 것도 힘든데, 저렇게 뭉쳐 있으면 그냥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현재 컴퓨터 수준으로는 백 년을 돌려야 겨우 될 거예요.”

“다이아몬드 칼로 절삭하는 걸로는 안 되나요? 그러고 나서 투과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하면 되잖아요.”

“그럼 단백질 구조 분석이 불가능하죠. 결합 부위를 따라 자르는 게 아니니까요. 게다가 내부 물질까지 자를 확률이 큰데, 그럼 진짜 무의미하잖아요.”

에넷은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짚었다. 둘이나 그렇게 요구를 하니 에넷도 언제까지고 원칙만 고수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상부에 건의해볼 테니 응답이 올 때까지 하시던 일은 계속 진행해주세요. 당신네들이 대신 실험하라고 큰소리치면 뭐, 어떻게든 되겠죠.”

에넷은 그렇게 말했지만 제홈은 자신의 요구가 각하될 거라고 짐작했다. 그 때문인지 에넷을 찾아가기 전에 담배를 한 대 피우고도 다시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제홈은 자신의 실험실 문 앞에서 연구 센터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맥키퍼가 있었다. 둘은 짧게 인사를 나눴고, 제홈은 문을 가운데 두고 맥키퍼와 나란히 섰다. 그리고 담배를 물었는데 불이 붙지 않았다.

“저 혹시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제홈은 맥키퍼에게 다가가 물었다. 하지만 곧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 건 전자담배라서요.”

제홈은 자신에게 여분의 라이터가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실험실에는 확실히 없었고, 숙소에도 그런 건 따로 배치되지 않았다. 짐을 챙기면서 다른 라이터를 넣지 않았다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가벼운 라이터가 끝이었다.

“아, 마침 저기 연초 피우는 친구가 있네요. 잠시만요. 어이, 마니티리!”

맥키퍼의 외침에 경비원 한 명이 돌아봤다. 제홈에게 검사를 마친 가방을 돌려주던 경비원이었다. 감청과 치외법권에 대해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었다. 맥키퍼가 손짓으로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하자 마니티리는 주머니를 뒤지면 달려왔다.

“이거 부당 명령 아닙니까?”

“그럼 불복종하든지. 네 담배만 빼고 통과시킬 테니까. 그리고 내가 아니라 옆에 이 연구원분 불붙여드리면 돼. 난 연초 안 피워.”

마니티리는 구시렁거리면서 제홈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니티리는 제홈의 감사 인사를 받고 다시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카페테리아로 향하는 것을 보니 그의 식사 시간을 뺏은 것 같아 제홈은 괜히 더 미안해졌다.

“저도 이참에 전자 담배로 바꿀까 봐요. 그게 냄새도 덜 난다고 하고, 한 번 피울 때 피우는 양 조절도 가능하고.”

“처음 쓰시는 거라면 액상은 될 수 있는 한 작은 걸로 사시는 걸 추천합니다. 혹시라도 취향에 안 맞으면 남은 게 너무 아까우니까요. 그럼 전 이만.”

맥키퍼가 들어가고 제홈은 혼자 남았다. 그날따라 담배가 빨리 타는 느낌이 들었다.

제홈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허가가 떨어질 경우에 어떤 작업을 수행할지 미리 정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험실로 돌아온 제홈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부유물의 내부 물질을 안전하고 온전하게 빼낼 방법, 단백질 피막을 하나하나 분리할 방법에 대한 고민이었다. 전자담배를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기를 어느 정도 선별하고 담배 액상을 찾아보고 있는데 에넷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제홈 씨의 요구 사항에 대해 상부의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필요한 샘플 목록을 작성해서 회신해주세요.]

제홈은 스마트 워치를 만지작거렸다. 아까의 제안 이후로 4시간 정도가 흐른 후였다.

 

》《

“있잖아, AISID, 혹시 망가지거나 한 건 아니지?”

<오류나 문제 사항이 발견되었다면 피드백을 위해 리포트를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리포트를 작성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했어도 AISID는 어디까지나 연구 보조를 위한 것이었지 사교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제홈은 AISID가 자신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에 약간 실망하며 한숨을 쉬었다. 사실 프로그램의 특성도 알고 있고, 이미 십 년도 넘게 같은 식으로 받아주지 않는 농담을 던졌으면서도 여전히 실망하는 제홈이 이상한 것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는 유머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합리화를 했다.

“아니, 오류가 아니라, 들어 봐.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시료 X를 샘플 세포 쪽으로 보내니까 얘가 무슨 지 집인 양 들어갔잖아.”

<처리 불가능한 문장입니다.>

제홈은 이마를 어루만졌다.

“후, 그래. 시료 X를 샘플 세포 배지에 투여했지. 그러니까 시료 X의 단백질 부유물이 샘플 세포의 세포막을 침투하고, 곧이어 소포체 등을 비집어 열고 핵막에 달라붙는 걸 확인했고. 그리고 피막이 갈라지면서 내부에 있던 다량의 RNA와 효소들을 핵막 내부로 투입함과 동시에 단백질 피막이 하나하나 분리되는 것도 확인했고. 이해했냐?”

<입력됐습니다. 샘플 세포를 대상으로 한 초기 실험의 관측 결과와 일치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그래서 그 내부의 RNA랑 피막 단백질 얻어내려고 샘플 세포의 유전자랑 세포 소기관 다 제거해서 세포막, 핵막만 남은 공(空)세포 상태로 만들었잖아. 그걸로 결국 성공해냈고. 그렇게 얻어낸 걸로 지금 GIASS(Genetic Information Analysis Support System) v.2.16이랑 PSP로 따로 분석 중이고.”

<현재 수행 중인 실험 과정과 일치합니다.>

“그런데 GIASS가 분석한 자료 말이야. 물론 염기 서열 변이의 추산이 적용되긴 했다지만, 시료 X의 RNA와 일치하는 유전자를 가진 생물 목록을 만들라고 한 것치고는 너무 많지 않아? 이건 그냥 동물도감 수준이잖아. 벌써 한 80%는 채운 것 같은데?”

<절지동물문을 제외하고, 동물계 내에서 게놈 분석이 완료된 생물의 87.29%가 지금까지 집계에 포함되었습니다. 종별 일치율을 확인하시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가 말이야, 아직 게놈 비교가 끝난 게 아니니까 높아졌으면 높아졌지 낮아지지는 않잖아. 그렇다면 그냥 모든 동물이, 아 곤충은 빼고, 동물이면 이 유전 인자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공유하는 인자가 한둘은 아니잖아? 문제는…….”

문제는 그 유전 인자의 역할이었다. 시료 X의 유전 인자가 각 생물 종의 염색체에서 위치한 지점은 모두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어느 생물이건 그 인자가 발현되지 않는 불활성화 상태에 있다는 것이었다. 생물이 이런 선택을 하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인트론[1]이거나 엑손[2]이지만 발현될 필요가 없거나 발현되면 위험하거나.

“넌 이 셋 중에 어떤 거일 것 같아?”

<본 프로그램은 학술적 자문을 구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련하시겠어.”

제홈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정말 인트론이라면 애초에 생명체고 뭐고 할 것이 없었고, 인공적으로도 이런 걸 만들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발현될 필요가 없는 엑손은 그나마 생명체로서 기능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모든 종이 해당 인자를 불활성화시켰다는 점은 그 가능성을 매우 희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역시 인공 제작의 목적을 알기 어렵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가능성은 발현되면 위험한 엑손이었다. 비천연 아미노산의 존재와 더불어 이는 생화학 테러라는 확실한 목적성과 인공 제작의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문제는 600만 년 전이라는 시기뿐이었다.

“뭐,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걸 만들었는지를 밝히는 건 내 역할이 아니니까. 맥키퍼 씨가 NSA 출신이라니까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AISID, 발현되면 위험해서 불활성화시킨 엑손의 사례 좀 검색해 줘.”

<분화 조절 및 세포 자살의 제어 실패 사례가 있습니다.>

“아니, 그런 개체 수준에서 일어나는 거 말고, 서로 다른 종, 아니 더 크게 속이나 과, 최대 문까지 해서 같은 유전자를 막아 놓은 사례로.”

<앞서 설정한 조건과 조합하여 검색을 실시합니다.>

이번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제홈은 오늘 아침에 받은 전자담배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리 전자담배라도 실내에서는 피우면 안 된다는 것쯤은 그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은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제홈은 결국 전자담배를 집어 들었다.

<바이러스로부터 유래한 유전자의 유전 사례가 있습니다.>

아쉬운 순간이었다.

“바이러스? 바이러스 감염?”

<바이러스에 감염된 생식 세포가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불활성화시킨 후 유전 및 진화를 거듭할 경우 다양한 생물군에서 해당 조건에 부합하는 유전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일부 암 유전자를 포함한 다양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감염 속도가 빠르고 감염 경로와 숙주가 다양한 경우에도 비슷한 효과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합하는 사례의 목록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아, 그래. 레트로바이러스! 어떻게 이걸 잊고 있었지?”

제흠은 기억력에 자부심이 있었기에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다.

생명체가 원래부터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유전자를 지닌 채로 진화해왔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면 가능한 경우는 그런 유전자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었고, 자연에는 이미 바이러스라는 훌륭한 예가 있었다. 보통은 바이러스와 그에 감염된 세포를 죽이는 게 일반적인 면역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을 때는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불활성 상태로 묶어버리는 것으로도 생명은 유지할 수 있었다. 인류는 자신의 유전자 안에서도 이런 식으로 침입한 유전자가 남은 사례들을 많이 알아냈다.

“그래, 그럼 이걸 바이러스라고 생각해보자. 안에선 실제로 RNA와 역전사 효소가 많이 나오기도 했고, 물론 지질은 없고 순 단백질로만 이루어져 있었지만 뭐, 종류가 다양하니 그중 몇 개는 지질이랑 비슷하겠지…. 단백질이 몇 가지라고?”

<피막은 총 141종의 단백질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47종만이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것과 일치합니다. 천연 아미노산만으로 이루어진 종은 24종입니다. 목록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141종. 이것도 말도 안 되게 많기는 하지만, 게다가 비천연 아미노산도 포함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만, 도태되기 전의 원시적인 바이러스라고 하면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문제는 그거지. 얘가 스스로를 복제할 수 있느냐.”

한 생명체가 하나의 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유전자를 계승한 자손을 만들 수 있어야 했다. 인간의 유성 생식은 물론이고 원핵생물의 자기복제 역시 그런 과정이었다. 하물며 생명의 조건을 일부만 만족하는 바이러스도 마찬가지였다.

“AISID, GIASS의 게놈 비교 연구의 우선순위를 낮추고 시료 X의 RNA로부터 합성될 단백질 정보를 PSP로 보내 병행 연구해 줘. 그리고 그 정보와 피막 단백질 비교 연구 시행하고. 혹시 모르니까 실제로 단백질도 합성해보자.”

제홈은 온갖 물질로 표지한 배지를 준비하고 샘플 세포들을 적당량 덜어 놓았다. 샘플 세포가 모두 단세포생물이라 다른 결과가 나올까 봐 면봉으로 자신의 입안의 상피세포도 긁어냈다. 비록 적은 양이기는 했지만 당장 마련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아니면 피라도 뽑아야겠지만 혈액에서 백혈구만 골라내 실험을 하느니 차라리 이 방법이 훨씬 깔끔하고 효율적이었다. 물론 기계를 이용한 단백질 합성도 함께 수행할 것이었지만, 그것으로는 시료 X의 부유물이 바이러스인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표지 물질로 유전자 증폭도 해줘. 반대로도 해봐야 하니까. 그래야 얘네 추적이 가능하지. 으아, 할 거 드럽게 많다.”

제홈은 전에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그의 실험실에서는 안 돌아가는 장비가 없었고, 그 역시 숙소에는 씻고 옷을 갈아입을 때 밖에는 가지 않았다. 제홈은 실험실에 잠자리를 마련해두고 잠까지 쪼개 가며 장비를 관리했다. 물론 실험 사이클 관리와 간단한 샘플 교체는 인공지능이 할 수 있었지만, 초기 샘플과 기타 조건을 설정하고 결과를 확인하고 그걸 바탕으로 다시 설정을 조절하는 건 여전히 사람의 일이었다. 제홈은 오랜만에 박사 과정을 다시 밟는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이런 고행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시료 X의 RNA를 추적한 결과, 언제나 특정 순서를 유지하며 염색체에 침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당 인자가 발견되는 위치는 종마다 달랐지만 순서는 늘 그대로였다. 원래 상태의 RNA가 그렇게 긴 상태로 있던 것은 아니었다. 부유물 내부에 같이 있던 효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집어넣는다는 말이었다. 이는 곧 순서가 매우 중요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식의 과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의 물질을 분해하거나 합성할 때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그 물질이 항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특정 시기에만 있어 관련한 효소 등을 미리 만들어두는 게 오히려 낭비인 경우. 유전자의 연쇄적인 전사로 이를 해결했고, 이런 경우 보통 관련 유전자끼리는 모여 있는 게 보통이었다. 생명체 내에서 일어나는 상당수의 기작들이 이에 속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시료 X의 RNA로부터 합성된 단백질과 시료 X의 피막 단백질 간의 일치율은 4.26%입니다. 일치하는 단백질 목록을 확인하시겠습니까?>

“AISID, 농담하지 마.”

<본 프로그램은 사교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AISID가 알려주는 결과는 상당히 안 좋았지만, 제홈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RNA의 양이 꽤 많긴 했어도 100종이 넘는 단백질을 구성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 6개만 일치한다는 건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의 몸을 다시 구성할 수 없었으므로 생명체는커녕 바이러스라고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부족한 조건이 있었던 건지 자연적으로는 전사가 일어나지도 않아서 강제적으로 전사까지 시켰는데, 그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되는 기분이었다.

“하, 어쩔 수 없지. 합성된 단백질의 기능을 밝히는 데에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PSP는 아직도 피막 단백질 분석 중이야?”

<단백질별 구조 분석은 끝났습니다. 단백질별 기능과 피막 구조 형성 시의 기능은 분석 중입니다.>

“차도가 별로 없네. 그거 2순위로 내리고 합성 단백질 분석을 최우선 순위로 올려서 분석해줘.”

제홈은 펼쳐 놓은 이불 위로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하마터면 머리가 벽에 닿을 뻔했다.

“하, 내일이면 두 번째 발표인데 어떻게 알아낸 게 하나도 없냐? 진짜 어떡하냐, 이거…….”

<본 프로그램은 학술적 자문을 구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알아, 그냥 혼잣말한 거야.”

 

》《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런 겁니다. 시료 X의 부유물은 인공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단백질 피막 안에 레트로바이러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RNA가 있었습니다. 이 부유물은 바이러스는 아니었지만 마치 바이러스처럼 세포 내로 침투했고, RNA는 숙주 세포의 염색체 배열에 삽입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피막 구조는 붕괴하여 개별 단백질로 흩어졌습니다. 외부 환경에 노출된 DNA가 600만 년이면 자연 붕괴하는 걸 생각하면, 아마 이 단백질들이 붕괴를 막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홈 옆의 홀로그램 스크린에서는 3D로 구현된 실험 과정이 재생되고 있었다. 형형색색으로 표지된 조각들이 스크린을 한가득 메웠다. 실제 관측 영상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비전공자인 상황을 고려한 제홈 나름의 배려였다.

“숙주 세포에 침투한 RNA는 자연적으로는 전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전사의 조건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대신 강제로 전사시켜 단백질을 합성한 결과, 피막 단백질과는 가짓수도 다르고 일치하는 종도 6개밖에 안 됨을 확인했습니다. 이는 해당 RNA가 부유물과 동일한 피막을 합성할 수 없음을 뜻하며 생명체로서 기능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아마 단발성으로 제작된 유전자 제제로 보입니다.”

스크린에는 이제 두 단백질 집단의 목록을 비교하는 표가 나타났다. 두 집단이 공유하는 단백질은 맨 위에 있었다. 맨 끝에 위치한 단백질 종에 붙은 번호로 단백질 가짓수의 차이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각 단백질들에 대해 알 리는 없었다. 제홈 역시 전부를 아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제홈이 얼른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듣기로 생화학 테러의 가능성은 낮은 수준이라고 들었는데, 그 판단은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600만 년 전에 만들어진 걸로 보는 이유가 방사성 동위원소 때문인데, 지금의 기술력이면 엄청난 노력이 들기는 하지만 이런 걸 만드는 게 전혀 불가능한 수준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테러 가능성을 재고하는 게…….”

“그 판단은 제홈 씨가 하는 게 아닙니다.”

맥키퍼였다. 제홈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가끔 같이 담배를 피우기는 했지만, 역시 대하기 어려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으므로 제홈은 입술에 침을 다시 묻혔다.

“그렇지만 생물들이 공통으로 해당 유전자를 불활성 상태로 묶어 놨다는 건, 그 유전자의 발현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방증일 수 있습니다.”

“그보다 문제의 RNA로부터 합성했다는 단백질의 기능은 정말 아무것도 밝혀낸 게 없는 건가요? 그걸 알아야 뭐라도 할 텐데 말이죠.”

에넷은 대화의 주제를 다시 연구 내용으로 돌렸다. 맥키퍼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제홈은 테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봤자 손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홈은 시선을 다시 태블릿으로 옮기며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여전히 분석 중입니다. 단백질 분석 프로그램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실제 세포로도 실험해 봤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유전자가 전사될 때와 마찬가지로 특정 조건이 부합되어야 기능할 것 같은데, 현재로서는 그게 무엇인지 묘연합니다.”

회의실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맥키퍼마저도 이제는 태블릿을 터치하며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제홈은 천천히 시선을 옮기며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끝에 앉아 있던 에넷에게 시선이 닿자 제홈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또 다른 시료는 언제 받을 수 있죠?”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와중에 맥키퍼만이 고개를 그대로 숙인 채로 쏘아보는 게 느껴졌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제홈 씨?”

에넷이 다리를 반대로 꼬며 물었다. 루비오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쯤 되면 과연 제가 모든 정보를 다 알 수 있는 날이 올지조차 모르겠네요.”

제홈은 헛기침을 하고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분명 처음에 저한테 알려주시기를, 단백질과 유전물질의 분석이 제 업무라고 하셨죠. 그런데 넘겨주신 시료 X에서는 아무리 봐도 단백질밖에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물론 그 단백질 피막 안에 문제의 RNA가 있긴 했지만, 생물 실험으로 꺼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이었죠. 그렇다는 건 이전에 이미 그 RNA를 빼낸 적이 있거나 밖으로 나와 있는 걸 봤다는 얘긴데, 다이아몬드 칼을 이용한 절삭도 안 해본 것 같고, 제가 받은 시료 내에서도 밖으로 빠져나와 있는 RNA는 찾아볼 수 없었어요. 일부러 RNA를 거른 후에 저한테 주셨다고 보는 것도 이상하고요. 저를 시험해보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이제는 맥키퍼도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뭐가 있을까? 아마 RNA가 노출되어 있는 시료가 따로 있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추측입니다. 뭐, 아니라면 완전 헛다리 짚는 거겠지만, 이미 비슷한 전적이 있어서 제 추측일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제홈의 말에 루비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맥키퍼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고, 에넷은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제홈은 자신의 추측이 적중했다고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두 번째 시료를 드릴 예정이긴 했어요. 그 첫 번째 시료 분석이 어느 정도 끝나갈 때쯤에요. 그런데 이렇게 날카롭게 추측하고 대담하게 요구해 오실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네요.”

에넷은 제홈은 보지도 않고 태블릿만 조작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알려드릴 건, 두 번째 시료는 1개가 아닙니다. 총 3개에요. 우리는 그걸 각각 A, B, C라고 불러요. 간단하죠?”

“각각 따로 구분되어 있었나요? 캡슐이 최소 3개는 더 있었다거나, 아니면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거나…….”

“디테일한 건 알려드릴 수 없고, 제홈 씨께 제공해드릴 수 있는 건 유기물질 시료뿐입니다. 제홈 씨 보안 등급으론 그게 최대에요. 물론 더 높아질 수는 없고요.”

에넷은 제홈의 말을 끊은 것도 모자라 단호하게 말했다. 더는 스스로의 영역을 넘어서지 말라는 경고 같은 것이었다.

“추가로 더 알려드리자면…”

그렇게 무거워진 분위기를 루비오가 다시 바꿔 놓았다. 에넷이 그녀를 다소 날카롭게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사실 시료 A는 딱히 분석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이미 저희 쪽에서 분석을 끝냈고, 현생 인류와 상당히 유사한 유전자라는 걸 밝혀냈어요. 아마 선행 인류, 그중에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 분리될 때쯤의 유전자일 거라고 추정 중이죠. 그리고 물론 시료 3개 전부 600만 년 전에 형성된 걸로 보이고요.”

루비오의 말이 끝나자 에넷이 일어서며 손뼉을 쳤다.

“그럼 잠시 쉬었다가 회의를 이어가도록 하죠.”

제홈은 태블릿과 기타 발표 자료를 정리해서 자신의 자리에 놓고는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이미 시간이 꽤나 흘렀지만 회의는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제홈은 전자 담배만을 들고 센터 밖으로 나왔다. 이미 맥키퍼와 뤼스커가 나와 있었다. 제홈이 회의실에서 마지막에 나왔으므로, 에넷과 루비오는 각자 자신의 실험실로 돌아간 듯했다.

“뤼스커 씨도 담배를 피우셨군요.”

제홈은 뤼스커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제홈도 담배를 자주 피우지는 않았으니 그냥 단순히 시간이 겹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아, 저는 그냥 바람만 쐬러 나온 거예요. 회의실은 답답하잖아요. 그리고 전 가끔 대마만 피워요. 물론 여기선 금지지만. 여기 옆의 맥키퍼 씨가 은근히 까다로워서요.”

“연구 기지에 향정신성 약물을 들일 수는 없죠. 실험용이나 의료용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뤼스커는 그 말을 듣고는 담배와 대마의 차이와 대마의 장점 등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려 했지만 맥키퍼는 그에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상당한 추리력이군요, 제홈 씨.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저야 하는 일 때문에 보안 등급이 높기도 했고, 실험 장비나 물자 같은 걸 확인하다 보니 이미 다 알고 왔지만, 겨우 그 정도 정보로 그만큼까지 추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말에 관심이 없어 보이고, 상대인 맥키퍼도 다른 이야기를 하자 뤼스커도 항변은 포기하고 제홈의 눈썰미를 칭찬했다.

“저도 사실 처음부터 캡슐 자체에 대한 분석을 위해 온 거라 캡슐이 두 개라는 걸 알고 있긴 했는데, 저한테 하나만 보여줬다면 전 도저히 다른 하나는 눈치채지 못했을 거예요.”

셋은 그렇게 잠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에 돌아가니 에넷과 루비오도 돌아와 있었다. 둘은 남자들과는 달리 담배 대신 머그잔을 들고 이야기 중이었다. 세 시료를 얼마큼 제공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 같았다.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았고, 마지막 경과보고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럼 이제 맥키퍼 씨의 보고를 들어보도록 하죠.”

맥키퍼는 자신의 태블릿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처음 발표하는 거라 그런지 조금 긴장되네요. 보고할 게 그다지 없기도 하고요.”

지난 발표에서 다른 연구원들은 연구 내용이나 진척도와는 상관없이 모두 자신의 성과를 발표했었다. 오로지 맥키퍼만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었다. 제홈이 참여한 회의는 지난 발표가 유일했으니 그날 하루만 맥키퍼의 발표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국가 안보와 연결되는 문제여서 발표하지 않는 거라고 제홈은 생각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보안 등급 이상의 사람들만 따로 모여 보고를 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아실 분들은 다 아실 테지만 제홈 씨는 모르실 거고, 그리고 공식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도 있으니, 처음부터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맥키퍼가 손을 몇 번 움직이자 점자처럼 보이는 기호들과 고대의 상형 문자 같은 것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상형 문자는 간단하게 표현되기는 했지만 투박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상징들처럼 세련되 보였다. 점들은 점묘화라도 그리려 했던 것처럼 상당히 빼곡하게 찍혀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스 부호는 아닌 모양인지 선이 없이 오로지 점만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상형 문자와 점 기호를 짝 지어 놓은 표가 하나 있었다.

“이 세 기록은 모두 두 번째 캡슐, 통칭 캡슐 M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마모 등으로 인한 훼손을 피하기 위한 것인지 모두 캡슐 내벽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뤼스커 씨나 다른 조사원분들이 여러 번 검사했지만 두 캡슐 어느 곳에도 이밖에 다른 기록은 없었습니다. 명칭부터 알려드리면, 그림으로 구성된 기록은 ‘이미지 메시지’, 점으로 구성된 기록은 ‘텍스트 메시지’, 그리고 가운데의 이 표는 ‘암호화 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곧이어 암호화 표의 기호마다 번호가 매겨졌고, 다른 메시지 기록들의 같은 기호에도 번호가 매겨졌다. 대부분의 기호에 번호가 매겨졌지만, 중간중간 기호가 없는 것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표에 기록된 기호들은 메시지에 기록된 기호들의 종류보다 수 배는 더 많았다.

“보시는 바와 같이 각각의 메시지 기록에 나타난 기호들은 대부분 표에서 찾아볼 수 있고, 각 기호의 위치가 비슷한 걸로 봐서 이미지 메시지와 텍스트 메시지는 서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표는 일종의 상형 문자를 점 기호로 변환하는 암호화 법칙이라고 추정 중입니다. 각 기록의 이름도 이런 특징을 고려해서 지은 거고요. 그리고 표에 나타난 기호가 훨씬 많은데, 이는 암호화 법칙 전체를 기록함으로써 잘못된 해독을 막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물론 메시지의 모든 기호가 암호화 표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는 그러한 작업이 따로 필요할 만한 것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각각의 법칙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거나, 논리적 추론을 통해 암호화 법칙 없어도 밝혀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에넷과 루비오는 맡은 자리가 있다 보니 관련한 내용을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고, 뤼스커는 저 기록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하니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아예 처음 듣는 제홈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잠깐만요. 그렇다는 건, 저 이상한 상형 문자와 점으로 된 암호문이 누군가에게 해석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작성되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그리고 그냥 해석되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다면 굳이 어려운 점 기호 같은 것 없이 상형 문자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왜 굳이 다른 기록들도 같이 적어둔 거죠?”

“바로 그것을 밝히는 게 제 일입니다. 첫 단계로 이미지 메시지에 대한 해석을 진행했고,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해석해냈습니다. 다만 그 내용에서도 왜 이런 작업을 거쳤는지에 대한 것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그 해석한 내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해독

변환

나/우리-2/두 번째

나/우리은(는) 2/두 번째이다

다르다-은하-다르다-성계-움직이다-땅/장소

다른 은하, 다른 성계에서 땅/장소로 움직이다

땅/장소-집/주거/살다

땅/장소에 집을 짓다/살다

나/우리-땅/장소-많다/다양하다-무언가-많다/다양하다-일/작업

나/우리은(는) 땅/장소에 있는 많은/다양한 무언가에 많은/다양한 일/작업을 하다

크다-무너지다/깨지다

큰 무너짐/깨짐

많다/다양하다-무언가-변하다-다르다-길/선

많은/다양한 무언가은(는) 다른 길/선로 변하다

많다/다양하다-무언가-도착하다-사라지다/죽다

많은/다양한 무언가이 소멸/죽음에 이르다

나/우리-고치다-만들다-위해-땅/장소-무언가

나/우리은(는) 고치는 걸 만들다 땅/장소의 무언가을(를) 위해

고치다-나/우리-사라지다/죽다

고치는 건 나/우리을(를) 사라지게 하다/죽이다

나/우리-땅/장소-움직이다-그래야 하다

나/우리은(는) 땅/장소에서 움직이다

적다/기록-위해-나중에-생기다/나타나다-지적-무언가

적다/기록  나중에 생기는/나타나는 지적 무언가을(를) 위해

나/우리-울다/눈물-용서하다-바라다

나/우리은(는) 울며 용서하다을(를) 바라다

 

“말씀드렸다시피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기호로 작성된 다른 자료가 없어 반복 구문을 통한 유추나 비교도 힘들고, 또 각 문장 성분 간의 관계도 확실하지 않아서 다른 조합으로도 구성할 수 있어 아예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 해석이 약 77%의 신뢰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해석이 맞는다는 가정 하에 이야기하자면, 이미지 메시지에서 이 무당벌레처럼 보이는 존재가 캡슐과 시료들을 만든 것으로 보이고, 그것들의 제작 전후에 ‘큰 무너짐/깨짐’이라 표현되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치명적이라 어딘가로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제홈은 자신이 연구 중인 RNA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테러의 가능성을 거의 없다시피 여기는 이유를 알게 됐다. 해석되기를 바라는 암호를 넣은 것을 넘어, 저런 식으로 위협과는 멀어 보이는 기록을 작성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저것을 100% 믿을 수는 없겠지만, 무턱대고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었다.

“일단 아직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나 기호 간의 관계는 텍스트 메시지의 해독을 통해 보완할 수 있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암호화 법칙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몇 가지 특징을 알아낸 게 전부입니다.”

이미지 메시지와 텍스트 메시지가 스크린의 한구석으로 옮겨가고 암호화 표가 스크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방금 맥키퍼가 언급한 특징으로 보이는 것들이 빈 공간에 나타났다.

“여기 이 기호는 총 5종류의 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점들은 형태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기록을 위해 사용한 원소의 종류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형태적 구분을 놓칠까 봐 마련한 안전장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점들의 조합의 기본 구성단위는 6개인 것으로 보이지만 변칙적으로 8개인 것들도 확인되었습니다.”

스크린에 나타난 서로 다른 색의 점들에는 각각 알파부터 엡실론까지의 이름이 붙었다. 그 아래에는 2줄로 늘어선 6개 혹은 8개의 점들의 조합이 나타났다. 척 보기에도 가능한 조합의 수보다는 적어 보였다.

“이 점들은 특정한 조합만을 보여주는데, 위아래 두 줄의 관계를 짝이라 하면, 알파는 베타와 감마 둘 모두와 짝을 이룰 수 있지만 베타와 감마는 서로 짝을 이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델타와 엡실론은 서로하고만 짝을 이룹니다. 다른 조합은 암호화 표뿐만 아니라 메시지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맥키퍼의 보고는 그게 끝이었다. 그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상당히 적은 내용이기는 했다.

“얼마 되지 않는 내용이지만 여러분께 보고를 드리는 것은 암호 해독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이 기록을 작성한 존재는 상당한, 적어도 현 인류 수준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정도의 기술력이 없으면 열지도 못하는 캡슐을 만들었고, 그 안에 암호를 작성했습니다. 만일 정말로 해석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암호를 작성했다고 한다면 어딘가에 그에 관한 실마리를 마련해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요. 그러니, 조언이든 무엇이든 다 좋습니다. 수학과 암호학 등이 아닌 자연과학에서 이와 관련한 무언가가 떠오른다면 바로바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제홈이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 전에 질문 좀 해도 될까요? 이미지 텍스트를 해석한 내용에서 처음에 ‘두 번째다?’ 그런 내용이 있었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죠? 첫 번째도 있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캡슐 M이 두 번째 캡슐이라는 얘긴가요?”

맥키퍼는 다시 태블릿을 조작했다. 스크린에는 표의 특정 구간과 이미지 텍스트의 첫 줄이 편집되어 나타났다.

“’두 번째’라고 해석되는 건 기호의 유사성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숫자 체계와 관련된 암호화 표를 보면 ‘2’를 암호화한 점 기호가 텍스트 메시지의 해당 부분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앞뒤로 붙어 있는 다른 기호들과의 조합으로 인해 아예 다른 뜻이 되거나 할 수 있지만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딱히 없습니다. 아, 그리고 참고로 이들은 12진법의 숫자 체계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제홈의 질문을 끝으로 회의실은 잠시 침묵에 잠겨 들었다. 맥키퍼가 브레인스토밍을 제안하기는 했지만, 다들 암호와 관련한 것은 아는 게 없었으므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적막을 깬 건 이번에도 역시 루비오였다.

“그래서 5진법이라는 건가요? 아니면 12진법이라는 건가요? 12면 딱 수메르 문명 셈법인데. 뭐, 8천 년 전 문명이라는 게 문제긴 하지만요.”

“루비오 씨는 진짜 역사 좋아하시네요. 그보다 기계어 쪽이랑 비교해보죠. 지금 4진법 반도체 만든다고 오비탈 에너지 준위 갈라지는 거나 3차원 다중 집적 같은 거 연구하고 있는데 그 연장선으로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요?”

뤼스커는 나노 물성이라는 그의 전공에 맞게 기호들을 반도체 소자와 관련지어보려고 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뤼스커의 손을 따라 그의 태블릿을 보던 루비오는 곧 멀찍이 떨어지더니 눈을 비볐다.

“그렇게 복잡한 거면 막 양자 컴퓨팅 그런 거 아니에요? 반도체 끝판왕은 아직도 그거잖아요?”

“양자 컴퓨팅은 아닐 거예요. 제 생각에는 애초에 기계어 같은 것도 아닐 것 같네요. 이 정도로 발달한 기술과 배려심을 가진 존재라면 호환성이 낮은 특수 언어는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을 것 같아요.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자연에 이미 존재하는 현상들 중에 숫자 5와 관련된 게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2개, 3개 짝 지어져 있다면 15족 원소의 오비탈 형태와 비슷하지 않나요? 삼각쌍뿔의 수직 축으로 양쪽 2개, 수평 축에 삼각형.”

에넷은 물리학자답게 양자 컴퓨팅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녀도 화학 쪽은 잘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원자 간 결합 같은 화학적 현상은 아닐 겁니다. 15족 원소도 결합할 수 있는 가지 수의 최대가 5개인 거지, 기호에 쓰인 것처럼 5가지 원소하고만 결합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리고 위아래도 그렇고 수평 삼각형도 그렇고 어디가 어딘지 여간 구분하기 힘드니 아닐 것 같네요.”

뤼스커는 그녀의 의견이 성립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 후로도 사람들은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눴지만 딱히 이렇다할 것은 나오지 않았다. 각자의 지식으로 다른 사람의 제안의 불가능성을 따지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런 소모적인 논의가 사그라들 무렵 스마트 워치만 만지작거리던 제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아무래도 염기 서열 같은데요?”

사람들은 다시 한번 제홈을 주목했다.

“조합 방식이나 형태가 딱 그런 모양이에요. DNA는 아데닌(A), 티민(T), 사이토신(C), 구아닌(G) 이렇게 4종의 염기로 구성되고, 코돈이라고 해서 3쌍씩 총 6개의 염기로 묶어서 암호화를 해요. 이 코돈 각각이 아미노산과 연결돼 있죠.”

“그럼 약간씩 어긋나는 거 아닌가요? 맥키퍼 씨 말로는 5가지 원소인데다가 8개 단위의 묶음도 있다고 했잖아요.”

루비오의 지적에 제홈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기본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그걸 벗어나는 건 이미 많이 있거든요. 우선 유라실(U)이라고 RNA에만 쓰이는 염기가 있는데, 얘는 DNA의 티민을 대신하는 애예요. 그리고 종결 코돈이라고 해서 유전자의 정보를 읽어서 단백질을 만들 때 ‘여기가 끝이다’라고 알려주는 부분이 있는데, UAA, UAG, UGA 이렇게 3개에요. 지금 대충 보니 텍스트 메시지 배열의 각 끝에 항상 감마로 시작하는 부분이 있는데, 아마 감마가 유라실이 아닐까 싶네요. 그럼 자연히 알파는 아데닌, 베타는 티민, 엡실론이 구아닌, 델타는 사이토신이 되겠네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 눈을 바쁘게 움직였다. 제홈을 한 번 봤다가 홀로그램 스크린의 표와 메시지를 봤다가 태블릿에 무언가를 적으며 그 연결을 확인했다가 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 하필이면 종결 코돈의 종류가 3개나 되는 바람에 배열의 끝이 모두 다르게 끝난다고 생각했던 맥키퍼는 머리를 감싸가면서 다시 텍스트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홈은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기본 단위가 3쌍이라는 부분, 루비오 씨가 말씀하신 것처럼 자연적으로는 그렇긴 한데, 인공적으로 4쌍의 염기를 하나의 코돈으로 만들 수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붙이는 아미노산들은 다 비천연 아미노산으로 분류되고요. 게놈 관련 연구에서는 이놈 빼면 아무것도 못한다고 보시면 돼요.”

에넷이 머리 위로 손을 들어 보였다.

“잠시만요. 지금 제홈 씨 말씀은 저 텍스트 메시지라는 것도 사실 어떤 유전자를 보여주고 있는 거다, 그런 말씀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제홈은 텍스트 메시지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네요. 개시 코돈이라고 시작 부분을 가리키는 코돈이 있는데, 얘는 AUG거든요. 근데 배열 첫 부분에 항상 그게 있지는 않네요. 아데닌이 아닌 다른 염기가 붙은 변형 개시 코돈이 보이긴 하는데, 게네도 몇 개 없고. 아마 배열의 끝을 확실히 알려주기 위한 용도로만 종결 코돈을 갖다 쓴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는 건 저걸로 유전자 분석하고 단백질 합성을 시도해봤자 이렇다 할 건 얻지 못할 것 같다는 거네요.”

루비오의 말에 제홈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 지금도 할 게 많아요. 이제 주신다고 한 두 번째 시료까지 더하면 말 그대로 작업에 치여 죽을 판인데, 저것까지 하라고 하면 파업할 겁니다.”

 

》《

제홈은 사이클을 타면서 수시로 피트니스 센터의 출입구를 돌아봤다. 가장 낮은 강도로 타고 있었지만 30분째 내리 타고 있으려니 땀도 조금 나고 지겹기도 했다. 그렇게 그만 포기하고 연구실로 돌아갈까 하는 순간에 뤼스커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제홈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사이클에 집중했다. 잠시 후 운동복으로 갈아 입은 뤼스커가 제홈 쪽으로 다가왔다.

“여기에선 처음 보는 것 같네요. 오늘 처음 오신 건가요? 아니면 단순히 저랑 시간대가 안 맞았던 건가요?”

뤼스커는 물 한 잔을 건네면서 물었다.

“오늘 처음입니다. 사실 산악자전거가 취미인데, 계속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말이죠. 몸도 조금씩 움직여줘야 두뇌 회전에도 좋고요.”

“그런 것치곤 강도가 너무 약한 거 아닙니까?”

“아, 그건, 요새 밤샘하는 경우가 많아서 무리는 안 하려고요.”

“그럼 적당히 하다가 들어가세요.”

뤼스커는 물 잔을 수거통에 넣고 근력 운동 기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체조를 하며 간단히 몸을 풀고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제홈은 뤼스커를 흘끔흘끔 보다가 그가 벤치프레스를 3세트째를 끝냈을 때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뤼스커는 다가오는 제홈에게 물었다.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나요?”

“아, 혹시 다른 분들은 여기에 운동하러 안 오시나요? 제가 여기서 한 시간 넘게 있었는데 어째 사람이 없네요.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가?”

“확실히 이 시간대에는 사람이 없긴 하죠. 그래서 쾌적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공간이 좀 아까워요. 그래도 다른 날 아침이나 저녁엔 사람이 좀 있는 편입니다. 그래봤자 다들 경비대원들이고 연구원분들은 이 근처엔 얼씬도 안 하시네요.”

“오, 그래요? 그럼 맥키퍼 씨도 안 오시는 건가요? 그분은 NSA 요원이신데도요?”

“듣기로는 현장 요원 같은 건 아니고 그냥 비전투 요원으로 연구만 하신 것 같습니다. 뭐, 딱 봐도 막 운동을 열심히 한 몸은 아니시잖아요?”

“그렇군요.”

뤼스커의 말대로 맥키퍼는 그다지 건장한 체격은 아니었다. 벗은 몸은 본 적이 없으니 실제로는 어떨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비쩍 마른 체형이었다. 혹시라도 맥키퍼가 올까 봐 걱정하던 제홈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이를 알리 없던 뤼스커는 제홈의 반응을 보고는 콧소리를 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보아하니 여기서 맥키퍼 씨를 기다리신 모양이군요? 그에게 따로 물어볼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뇨, 그렇다기보다는…. 뤼스커 씨는 맥키퍼 씨께서 발표하신 내용을 그대로 다 믿으시나요?”

“제홈 씨 주장은, 맥키퍼 씨가 일부러 잘못된 내용을 발표했다는 건가요?”

제홈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그 메시지의 내용이 일종의 연막 같은 건 아닐까 하는 겁니다. 정확한 속내는 모르겠지만, 캡슐을 남긴 존재가 그렇게 호의적인 존재라고 믿기에는 미심쩍다는 거죠.”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로는 판단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밝혀진 것들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2개의 캡슐이 발견된 지역이 다르다는 것, 서로 다른 외형과 작동 방식을 가졌다는 것, 게다가 내용물도 다르다는 것 정도잖아요?”

“잠깐만요. 두 캡슐이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었다고요?”

제홈은 손을 들어 뤼스커의 말을 끊었다. 뤼스커는 제홈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혹시 모르셨습니까? 캡슐 M은 여기서 발견된 게 맞지만, 캡슐 X은 이미 10년도 더 전에 이베리아 반도 남쪽 해안 지브롤터 해협에서 발견됐어요. 그때는 단순 운석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리 용을 써도 내부 구조 같은 게 파악되지 않아서 애를 먹었었죠. 그래서 그냥 애물단지처럼 두고만 있었는데, 여기서 발견한 캡슐 X와의 유사성이 밝혀지면서 지금의 상황까지 온 거고요.”

“그 유사성이라는 건?”

“캡슐 X는 보셨죠? 사실 캡슐 X의 외벽에도 흠집이 좀 많긴 하지만 캡슐 M 내벽에 있던 것과 같은 점 기호가 있거든요. 캡슐 M 발견 전에는 그냥 흠집인 줄 알았는데, 캡슐 M 외벽에 캡슐 X의 개폐 방법에 대한 기술이 같이 있었어요. 그래서 헐레벌떡 캡슐 X를 여기로 가져온 거죠.”

확실히 뤼스커는 점점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고 있었지만 제홈은 그의 설명을 들을수록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캡슐을 여는 방법이 같이 있었다는 말은 두 캡슐 사이에 일종의 인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제홈은 새로 받은 시료에 대한 분석이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엄청난 정보를 들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입술을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맥키퍼 씨가 무당벌레도 언급했잖아요. 그게 그냥 상형문자만 보고 그런 게 아니라, 그 뭐였더라 파이어니어? 보이저? 하여튼 옛날에 쏘아 올린 탐사선에 넣은 금속판 그림처럼, 상형문자와는 좀 다른 것도 같이 있었거든요. 이게 훼손이 있던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워서 아직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말이죠. 어쩌면 정말 그냥 흠집일지도 모르고요.”

신이 났는지 한참을 혼자 이야기하던 뤼스커는 말을 멈추더니 주변을 조심스럽게 둘러봤다. 그가 말했던 내용 중에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되는 내용이 있는 게 확실했다. 그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뤼스커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혹시 모르니까 맥키퍼 씨에겐 제가 이 말을 했다는 건 비밀입니다.”

 

》《

제홈은 이불 위에 사선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태블릿도 책상 위에 그대로 두고 멀뚱멀뚱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여태까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문제 부류가 복잡하게 꼬여 있어서 엉덩이 붙이고 앉아 시간과 몸으로 때우는 것들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그건 ‘얼마나 더 하면 끝이겠구나’ 하는 게 짐작이라도 되지. 얘는 진득하니 앉아서 붙잡고 있는다고 뭐가 될 것 같지 않아. 지금 돌아가는 분석이 끝나면 뭐라도 나올까, AISID?”

<본 프로그램은 학술적 자문을 구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됐다, 그만.”

<수행 중인 작업을 중단할까요?>

“아니, 아니! 작업은 계속 해!”

제홈은 AISID의 한 마디에 깜짝 놀라며 일어섰다. 다행히 작업이 멈추지는 않았다.

“하, 기계의 반란도 아니고, 이거 원.”

제홈은 다시 책상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실험실 문에서 반대편 끝까지 계속 왕복하며 분석 결과를 재차 읽기 시작했다.

루비오의 말대로였다. 시료 A는 인간의 유전자와 상당한 정도의 일치율을 보였다. 그것만으로 선행 인류의 유전자로 단정 짓는 것은 무리였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추측으로 보였다. 문제는 시료 B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단 2가지의 차이를 제외하면 시료 A와 시료 B는 동일한 종의 유전자라고 할 수 있었다. 염색체의 수와 시료 X 유전 인자의 유무. 시료 A는 시료 X 유전 인자를 포함한 23쌍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었고, 시료 B는 시료 X 유전 인자를 포함하지 않은 24쌍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료 A와 시료 B의 염색체 수의 차이는 인간과 유인원 간의 염색체 수의 차이와 같았다. 23쌍의 유전자를 가진 인간과는 달리, 인간을 제외한 모든 유인원들은 24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를 진화론이 틀린 증거라거나 신이 만물을 창조한 증거라며 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었지만, 결론은 아니었다. 인간 유전자의 2번 염색체는 염색체의 양 끝에만 존재하는 텔로미어가 가운데에도 있었고, 염색체의 가운데에 하나만 존재하는 동원체가 2개였다. 2번 염색체는 사실 서로 다른 2개의 염색체가 하나로 붙어 생긴 것이었다. 아직 학계에서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그럴듯한 가설이나 이론은 없었지만, 인간과 다른 유인원이 분화된 시기가 그때쯤일 거라고 추정하고 있었다. 바로 5~600만 년 전이었다.

“설마!”

제홈은 곧바로 실험 장비 쪽으로 달려갔다.

“AISID, 지금 GIASS가 하고 있는 작업, 시료 C의 유전자 분석은 2순위로 밀고, 시료 X 유전 인자의 발현 조건 추적은 제일 후순위로 조정해. 그리고 새로운 실험 준비해. 시료 B 유전자, 시료 X 유전 인자, 샘플 공세포, 그리고 시료 X 유전 인자로부터 합성한 단백질, 이렇게 쓸 테니까 부족해지면 그때그때 만들어 놓고.”

제홈은 공세포에 시료 B 유전자와 시료 X 유전 인자 합성 단백질을 투입하여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확인했다.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 시료 B 유전자에 시료 X 유전 인자를 삽입한 유전자로도 같은 실험을 진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실험 모두에서 같은 결과를 볼 수 있었다. 합성된 단백질은 시료 B 유전자의 짧은 염색체 2개를 하나로 이었다. 제홈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 이거 완전 노벨상감 아닌가? 아, 아니지. 실용성은 딱히 없으니까. 그래도 진짜 미쳤다, 이거. 지금 내가 인류에 관한 미스터리 하나 푼 거잖아? 와, 진짜, 입 근질거려서 미팅 때까지 어떻게 참지?”

제홈은 한동안 혼잣말을 하다가 스마트 워치를 바라봤다. 오전 9시. 곧 다른 연구원들이 각자 자신의 업무를 시작할 시각이었고, 그가 깨 있은 지 11시간 정도가 지난 시각이었다. 물론 마지막 수면 시간은 2시간 남짓이었다. 제홈은 지금 당장이라도 연구 센터 밖으로 나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붙잡고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싶었지만, 잠 역시 간절함을 느꼈다. 확실한 것 하나를 끝냈으니 푹 자도 괜찮겠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제홈은 다소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불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아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는 괴상하게 생겨 먹은 시료 C의 유전자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AISID, GIASS 작업 우선순위 원래대로 돌려놓고, 7시간 후에 알람 좀 맞춰 줘.”

<알람 시각을 오후 4시 9분으로 설정합니다.>

‘똑똑’

“어, 뭐야? AISID, 벌써 4시야?”

제홈은 이불을 걷을 생각도 없이 몸만 뒤척이며 물었다. AISID는 아직 오후 1시라고 답했다. 다시 들리는 소리에 제홈은 안대를 들어 올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맥키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제홈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정리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실험실 안에는 그 혼자였다. 제홈은 천천히 걸어가 문을 열었다. 맥키퍼가 바로 앞에 있었다.

“들어오시지 않고 왜?”

맥키퍼는 왼팔을 들어 자신의 스마트 워치를 보여주었다.

“제 보안 코드가 만능은 아니라서요. 그보다 제가 수면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일어나야죠. 근데 제가 자고 있던 건 어떻게 아셨어요? 실험실에 막 CCTV 같은 거 있는 거 아니죠?”

맥키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톡톡 쳤다. 제홈은 손으로 머리를 만지고서야 아직도 안대를 벗지 않은 걸 깨달았다. 제홈은 안대를 벗어 이불 쪽으로 던지고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졌다. 하품을 한 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나요? 혹시 제가 주문한 담배 액상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죠?”

“하하,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뤼스커 씨처럼 매번 대마를 적어 내시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이해하세요. 네덜란드인이잖아요.”

제홈은 책상에서 머그잔을 찾아 들었다. 잔 입 주변에 커피가 마른 흔적이 군데군데 있었고, 반쯤 남은 커피는 차게 식어 있었다. 제홈이 커피를 한 모금 넘기고 나자 맥키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난 회의 때, 이 캡슐M의 암호문이 유전자 염기 서열에서 착안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제안해주셨죠. 지금 그걸 토대로 재분석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가진 프로그램으로는 무리인 듯싶습니다. 제가 생명과학을 좀 알면 모르겠는데, 전 수학과 언어 아니면 젬병이라서요. 그래서 제홈 씨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전 암호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데 도움이 될까요? 그리고 보셔서 아시겠지만, 전 여기서 숙식해가며 실험할 정도로 할 게 많아서요.”

“흠, 아무래도 새 커피가 필요하실 것 같은데, 카페테리아에서 차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 나누실까요?”

제홈은 아메리카노와 파니니, 타르트에 더해 푸딩까지 들고 맥키퍼가 앉아 있는 자리로 갔다. 맥키퍼는 기지 안을 거니는 경비원들을 여유롭게 보고 있었다. 맥키퍼는 달랑 음료 하나만을 들고 있었다. 반면 제홈은 자신의 쟁반에 더 담을 공간이 없는 것을 보고 너무 많이 주문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 저녁 이후로 한 끼도 먹지 않았으니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합리화했다.

“맥키퍼 씨는 안 드세요?”

“아, 전 1시간 전에 먹었습니다. 사실 점심시간에 오실 줄 알고 그때 말씀드리려 했는데 안 오셔서요. 시장하실 테니 일단 좀 드시면 이야기하도록 하죠.”

제홈은 아메리카노로 먼저 목을 축이고 파니니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다크오렌지 색의 진한 치즈가 틈 사이로 한가득 흘러나왔다. 제홈은 치즈를 흘릴까 봐 파니니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먹었다. 사내 식당의 셰프가 총괄하는 음식보다는 못한 편이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균일한 맛을 기대할 수 있는 로봇만큼 수지 맞는 투자도 없었다. 마지막 한 입 정도가 남았을 때쯤 맥키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무턱대고 도움을 청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알아낸 걸 조금이라도 들어보시면 분명 마음이 바뀌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대로 암호 해석이나 이걸 만든 사람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건 제 소관이 아니잖아요.”

맥키퍼는 제홈의 말에서 그의 속마음을 파악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협력을 포기하기에는 잃는 것이 너무 크다는 판단이었다.

“그것보다는 유전자 분석에 좀 더 가까울 테니 분명 흥미가 생기실 겁니다. 일단 코돈과 그에 해당하는 아미노산의 종류를 암호 해석 프로그램에 학습시키고 텍스트 메시지의 각 배열이 어떤 식으로 번역되는지 봤습니다. 물론 제홈 씨가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 뭐냐, 첫 코돈?”

“개시 코돈이요.”

“네, 그건 임의로 넣어서요. 그래서 가상의 단백질을 구현하긴 했는데, 제가 가진 장비로는 이걸 분석할 수가 없어서 말입니다. 물론 이게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 아니지만, 두 손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제홈은 파니니의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넣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많이 식은 상태였지만 치즈의 풍미는 그대로 느껴졌다.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은데요?”

“아직 중요한 부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찾아보니 유전자와 단백질 간의 관계를 암호화, 복호화라는 이름으로 정의하는 것 같더군요. 실제 암호와 일상 언어의 관계처럼요. 그리고 텍스트 메시지로도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고요. 물론 비천연 단백질을 포함하지만.”

“비천연 아미노산이요.”

“네, 그거요. 그래서 생각한 게, 암호화 표가 상형 문자들을 점 기호로 암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점 기호를, 그러니까 일련의 유전자 가닥을 상형 문자로 변환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나아가 단백질로부터 유전자를 추적하고 다시 그 유전자를 상형 문자로 변환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물론 아미노산 하나를 여러 종류의 코돈이 지정하는 것 같지만, 그 정도 경우의 수는 감수해야겠죠. 이 아이디어를 그냥 버리긴 좀 그렇고, 또 마침 제가 시간도 좀 있고 해서 제홈 씨가 분석해서 정리한 시료 X의 피막 단백질에 적용해 봤습니다. 이건 그 결과입니다.”

맥키퍼는 자신의 태블릿을 제홈에게 건넸다. 제홈은 반쯤 먹은 블루베리 타르트를 내려놓고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 대부분의 배열은 암호화 표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상형 문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해석에 성공한 배열은 단 하나인 것 같았다. 그마저도 너무 모호해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움직이다-주머니/그릇-강조/드러나다

움직이는 주머니가 드러나다

 

“뭐랄까, 난해하네요. 무슨 속담 같기도 하고, 말장난 같기도 하고. 실제 암호로 쓰일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끝인가요?”

“다음으로 넘겨 보시죠.”

제홈은 맥키퍼의 말을 따라 태블릿을 조작했다. 그러자 더 짧고 간단하지만 뜻을 알 수 없는 내용이 나왔다. 내용의 반이 해석되지 않은 상태였다.

 

유전자-강조/드러나다

유전자이(가) 드러나다

 

“그 부분은 시료 X의 RNA를 해석한 겁니다. 물론 그 배열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마찬가지로 아직 해석을 못 했지만 말이죠.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제홈은 해석에 실패한 부분이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시료 X의 피막 단백질과 RNA가 보여준 기작을 상기하니 그 짐작은 점점 확신으로 변했다. 캡슐에서 발견했다는 암호만 제대로 해석할 줄 알았어도, 복잡하고 번거로운 실험 없이 시료 X의 부유물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해석되지 않은 상형 문자는 그 특징의 나열과 원리 같은 것으로 보였다. 일상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전문적인 내용이라면 상형 문자로 변환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을 거고, 그게 어떻게든 이뤄졌다고 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석하는 게 어려운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머리가 아파지네요. 그러니까 지금 맥키퍼 씨 말씀은, 제가 연구하고 있는 단백질이나 유전물질이 생명과학적 현상을 보여주는 물질임과 동시에 어떤 암호일 수도 있다, 그런 건가요?”

맥키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홈은 숨을 크게 내쉬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뒤로 기댔다. 제홈은 얼마간 가만히 있다가 손을 뻗어 남은 타르트를 한입에 넣었다. 그리고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재빨리 입안의 내용물을 씹어 삼켰다.

“유전자하고 단백질을 분석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제홈의 물음에 맥키퍼는 손을 뻗었다.

“암호 해석 프로그램이 필요하실 겁니다.”

제홈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테이블에 남아 있던 푸딩을 집었다.

“푸딩은 실험실에서 먹죠.”

 

》《

제홈은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맥키퍼가 도와주는 덕에 며칠간 숙소에서 편하게 잘 수 있었지만, 일어날 때면 늘 어색함을 느꼈다. 제홈은 서랍장 위에 둔 전자담배를 손에 쥐었다. 빨간 불이 들어온 게 보였다. 담배 액상이 다 떨어졌다는 표시였다. 실험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빨리 누적되는 것인지 최근 담배를 피우는 게 잦아진 탓이었다. 액상을 다시 채우기 위해 병을 들었지만 병도 비어 있었다. 제홈은 한숨을 쉬고는 씻어서 모아 놓은 병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들고 있던 빈 병을 놓았다.

“나중에 하자, 나중에.”

제홈은 우유를 한 잔 마시고 찬물로 샤워를 하고 새 병을 뜯어 액상을 채우고 밖으로 나왔다. 아침 바람에 아직 덜 마른 머리가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제홈은 담배를 입에 물고 지난 밤에 있었던 맥키퍼와의 언쟁을 떠올렸다.

메시지들, 암호화 표와 시료 X, C를 연동한 분석은 성공적이었다. 텍스트 메시지의 해석은 지지부진했지만, 시료 X의 피막 단백질의 해석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GIASS의 분석으로는 그저 인트론이었던 시료 C의 유전자도 다른 식으로 분석 가능했다. 맥키퍼의 예상대로 시료 C의 유전자 역시 일종의 암호문이었다. 암호화 표에 있었던 기호의 대부분을 이용하는 막대한 양의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쓸모없는 정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는 게 중요했다.

이런 결과의 공개를 두고 둘은 상반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제홈은 학계에 보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맥키퍼는 이 기지의 연구원들로 공개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홈은 이미 AISID, GIASS, PSP 등의 인공지능을 통해 관련 정보가 네트워크에 퍼져 남아 있을 거라고 했지만, 맥키퍼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다소 섬뜩한 소리였다. 결국 어느 한쪽으로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대신 돌아오는 미팅에서 사람들의 의견을 구해 결정하자는 협의만 겨우 내린 상태였다. 그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간에 제홈은 자신이 연구한 것을 공개하고 싶었다. 학계에 보고는 못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연구소에는 가져가고 싶었다. 상당히 개인적인 이유이기는 했지만, 그 자료들이 자신이 원래 하던 게놈 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파견 기간의 끝이 보이는 것도 한몫했다. 웬만한 시료의 분석이 전부 끝나가고 있었다. 아직 세세한 부분은 남은 상태였지만, 텍스트 메시지와 시료 X, C 암호의 해석이 어느 정도 성공한 시점에서 제홈의 역할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추가적인 연구를 제홈이 맡을 수도 있었지만, 맥키퍼의 주장대로 세간에는 비밀로 한다면 그럴 확률은 낮았다. 연구가 한동안 보류되는 일이 있더라도 내부 인력으로 해결하려 할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보름 정도, 아니면 아무리 길게 잡아도 한 달은 안 넘겠네. 그 사이에 모두를 설득할 수 있을까? 안 되면 어떡하지?”

제홈은 연구원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봤다. 루비오는 큰 걱정이 들지 않았다. 그녀라면 비밀이라고 해도 알게 모르게 흘릴 것 같았다. 뤼스커 역시 풍채만큼이나 호방한 성격이었으므로 같은 학자로서 흔쾌히 동의해줄 것 같았다. 게다가 뤼스커 역시 맥키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듯했고, 제홈과는 모종의 비밀도 공유하는 사이였다. 문제는 에넷이었다. 그녀는 원칙을 상당히 중시하는 듯했다. 맥키퍼가 안보와 관련한 원칙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에넷은 맥키퍼의 듬직한 수문장이 될 것만 같았다.

제홈은 그런 고민을 하며 연구 센터로 향했다. 늘 그렇듯 무장한 경비원들만을 마주쳤다. 센터 복도 역시 언제나처럼 삭막했다. 그때 갑자기 문 하나가 벌컥 열렸다. 방사성 실험실이었다. 곧이어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에넷이 뛰어나와 센터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루비오가 따라가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에넷의 찡그린 표정과 뤼스커의 당황한 눈빛이 보였다. 제홈은 뒤늦게 그 둘을 따라가려는 루비오를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에넷 씨 남편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에넷 씨 어떡하죠? 몸이 안 좋아서 자식은 못 낳아도 남편이랑 둘만이라도 알콩달콩 살아갈 거라고 그랬었는데…….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중에 봐요!”

루비오도 곧 센터 밖으로 나갔다. 제홈은 센터의 문이 닫히는 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활짝 열려 있는 방사성 실험실의 문이 보였다. 제홈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방의 문이 열린 걸 본 적이 없었다. 연구원들 각자에게 할당된 실험실이 있었지만, 방사성 실험실은 방사성 관련 실험을 할 때만 잠시 사용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 방이라고 루비오가 설명했던 게 기억이 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홈은 어느새 실험실 안에 있었고, 잠시 후 철컥하고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사성 실험실 역시 내벽은 전부 하얀색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벽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장비와 스크린에 뜬 자료들이 가득했다. 방금까지 세 명이나 되는 연구원이 있던 방다웠다.

실험실 한쪽에는 제홈이 처음 보는 캡슐이 있었다. 캡슐 M인 모양이었다. 캡슐 M은 캡슐 X보다 좀 더 컸고, 마찬가지로 장치 안에서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머리만 한 크기의 작은 캡슐이 3개 있었다. 그 양 옆으로 온갖 그래프와 수치들이 벽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메시지들과 암호화 표도 있었다. 반대쪽 벽에는 제홈이 분석한 유전자와 단백질에 관한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실험실 끝에는 불투명한 액체가 든 4개의 통이 있었다. 제홈은 주머니에 든 빈 담배 액상 병을 만지작거렸다.

제홈은 방사성 실험실에서 나왔다. 복도에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제홈은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맥키퍼와 눈이 마주쳤다.

“그 방에서 나오시는 겁니까?”

“네? 아뇨. 그냥 사람들이 문을 열어 두고 나갔길래 대신 닫았을 뿐이에요.”

제홈은 맥키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맥키퍼는 잡고 있던 문고리를 돌려 분자유전학 실험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제홈은 감사 인사를 하고 문을 잡았다. 맥키퍼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맥키퍼 씨도 어디 가시나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막 뛰어가시던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닙니다. 에넷 씨가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기지를 떠나게 되셨습니다. 저는 그와 관련한 출입 관리 때문에 가는 거고요. 다른 분들은… 곧 돌아오시겠죠. 자세한 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맥키퍼도 센터 밖으로 나갔다. 제홈은 천천히 자신의 실험실로 들어갔다. 방금까지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맥키퍼의 랩톱 화면이 밝았다. 장비가 가동하는 소리만이 실험실에 가득했다. 제홈은 실험실 안에 혼자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제홈이 방사성 실험실에 들어가 있던 사이 다른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연구 센터에는 정말로 그 혼자 남아 있는 것이었다. 실험실에 혼자 있었던 적은 많았지만, 센터에 혼자 있던 적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사람들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맥키퍼가 언제든 저 문을 열 수 있었다. 제홈은 스마트 워치를 만졌다.

“몇 분이나 걸릴까?”

 

》《

사람들이 자리에 앉았고, 에넷의 빈자리를 대신해 루비오가 회의를 진행했다. 제홈은 그간 봐온 루비오의 천진난만한 모습 때문에 살짝 걱정했지만, 루비오는 그녀 나름대로 회의를 매끄럽게 잘 이끌어나갔다.

“그래서, 제홈 씨와 맥키퍼 씨가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고 하셨는데, 그 보고를 들어볼까요?”

루비오의 말이 끝나고 맥키퍼가 태블릿을 조작했다.

“지난 회의 때 제홈 씨께서 제안하신 아이디어를 토대로 암호 해석을 다시 진행했고, 지금 보시는 암호문들이 그 결과입니다. 아쉽게도 텍스트 메시지의 해석에는 진전이 없었습니다만, 제홈 씨께서 연구하시던 유기물 시료들에서 큰 발견을 했습니다.”

일전에 카페테리아에서 맥키퍼가 제홈에게 보여줬던 자료들이 홀로그램 스크린에 나타났다. 더불어 새로 구성한 암호문도 그 옆에 차례대로 늘어섰다.

“왼쪽부터 순서대로 시료 X의 피막 단백질, 내부 RNA, 시료 A 유전자, 시료 B 유전자, 시료 C 유전자를 각각 상형 문자로 복호화한 것입니다. 우선 시료 A, B의 경우에는, 제홈 씨 말로는 실존했던 생물의 유전자일 확률이 높아서 유의미할 암호일 것 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게다가 유전자의 정보량이 상당해서 현재는 상형 문자로 복호화만 진행했습니다. 이 두 암호문에 대한 해석은 다른 암호문의 해석이 끝나고 진행할 예정입니다.”

스크린에서 시료 A, B의 암호문이 사라지고 시료 X의 두 암호문이 전면으로 나왔다. 제홈이 직감적으로 추정한 해석이 부연으로 붙은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지금 보고 계시는 부분이 신뢰할만한 수준의 해석이 진행된 부분이고, 약 99%에 달하는 나머지 부분들은 아직 신뢰할만한 해석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옆에 괄호로 붙여 놓은 부분은 제홈 씨께서 단백질과 유전자의 기능을 토대로 추정하신 내용입니다. 단백질을 복호화한 암호문은 ‘운반자의 특징’으로 해석되고, 여기서 운반자란 피막 단백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전자를 복호화한 암호문은 ‘유전자의 특징’으로 해석됩니다. 즉 각각 피막 단백질과 그 내부 유전자가 어떤 성질의 것이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해석이 안 된 부분이 바로 그 특징들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맥키퍼는 스크린의 빈 공간에 지난 회의 때 보고한 텍스트 메시지의 해석을 띄웠다.

“그리고 이건 제가 지난주에 보여드린 해석입니다. 여기에 방금 이 두 해석의 내용을 조합해서 보면, 시료 X는 일종의 치료제인 것으로 보입니다. 600만 년 전에 어떤 질병이 발생했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 시료 X를 만든 거죠. 그 질병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시료 X 덕분에 해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치료제인지는 어떻게 확신하죠? 아직 그 특징에 대한 부분이 해석이 안 됐다고 하셨잖아요. 만일 지난번에 보고하신 해석의 ‘깨지다/무너지다’에 해당하는 부분이면요?”

루비오의 물음에 제홈이 손을 들어 답했다.

“현존하는 동물들의 절대다수에서 그 유전 인자를 찾을 수 있다는 게 증거입니다. 시료 X가 생화학 테러 병기였다면 이게 유전자에 없는 애들이 살아남았겠죠. 설령 병기로서의 기능에 실패했다고 해도 이 비율을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고요.”

“근데 그 치료제가 정작 그걸 만든 본인들한테는 치명적으로 작용해서 다 죽었다고요?”

루비오는 팔짱을 끼며 다시 물었다. 에넷이 자주 했던 행동이었고, 전에 없이 불신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맥키퍼가 답했다.

“죽었는지까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해석된 내용으로는 ‘움직이다’라고만 되어있으니까요.”

“아까 제홈 씨가 보고하신 내용 중에 시료 X 유전자에서 합성한 단백질이 인간의 유전자를 변질시켰다는 내용이 있지 않았나요? 그럼 그건 뭐죠?”

마찬가지로 팔짱을 끼고 있던 뤼스커도 의문을 표했다. 이곳의 연구원들은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 있거나 의문이 들 때 팔짱을 끼는 버릇이 있는 듯했다. 뤼스커의 물음에 루비오는 물론 맥키퍼도 제홈을 쳐다봤다.

“변질까지는 아니고, 염색체 두 개의 끝을 이어 붙인 겁니다. 이건 아무래도 부작용인 것 같습니다. 유전자에 어떤 영향을 주려 했다고 보기엔 그 사례가 현재로선 하나밖에 없고, 그 특정한 종 하나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종에 해당 인자가 퍼져 있습니다.”

제홈의 답변에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인지 한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제홈은 맥키퍼를 쳐다봤다. 맥키퍼는 단번에 그 의미를 파악했다. 그리고 그가 태블릿을 조작하자 마지막인 시료 C의 암호문과 해석이 전면에 나왔다.

 

해석

변환

유전자(유전자)-고치다-만들다/제작

유전자를 고치는 걸 만들다

유전자(유전자)-변하지 않다-지키다

유전자가 변하지 않게 지키다

세포-껍질-뚫다

세포의 껍질을 뚫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만, 이게 현재로선 최선입니다. 시료 C 유전자의 해석 역시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저 3개 배열만이 현재 해석에 성공했으나 전체의 0.1%도 안 되는 내용입니다. 그나마도 제홈 씨가 아니었다면 저 부분이 유전자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는 것도 알 수 없었을 겁니다.”

“결국 알아낸 게 1%도 안 된다는 거군요.”

뤼스커는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그의 행동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요. 아직 연구할 게 99%도 넘게 남았다는 뜻이니까!”

루비오가 애써 힘차게 말했지만 어느 누구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끝이 없어 보이는 연구 때문도 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외진 곳에 격리된 채로 지내는 것도 모두를 지치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흠, 그럼 보고는 그만 마치도록 하고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은 문제가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침울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가운데, 제홈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틀 전에, 유기물질의 분석 결과에 대한 공개를 두고 저와 맥키퍼 씨가 논쟁을 했습니다. 물론 저는 학계에 공개해야 한다는 쪽이었고, 맥키퍼 씨는 이 기지 내의 연구원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셨죠. 제가 보기에 이 시료들의 특징이나 암호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 특히 인간 염색체 2번에 관한 건 국가 안보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입니다. 안보에 걸리지 않는 부분은 공개 제한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계약상에도 명시되어 있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물질들에 관한 내용들이 게놈 연구와 발전에 정말 지대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대로 묻히게 두는 건 너무 아까워요.”

“하지만 그 유기물질을 분석하는 데 NSA의 암호 해독 프로그램이 사용된 이상 더는 국가 안보와 무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해독 기술을 다른 나라가 추적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면 안보에 무관한 내용이라도 함부로 공개해서는 안 됩니다.”

맥키퍼의 단호한 말에 제홈은 카페테리아에서의 일을 약간 후회했다. 물론 맥키퍼의 도움 덕분에 연구도 수월해졌고, 훨씬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와의 협력으로 얻은 것은 단백질과 유전자의 특징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다른 연구원은 물론이고 맥키퍼조차 알아채지 못한 것을 제홈은 알게 되었다. 제홈의 아이디어를 반대로 뒤집은 맥키퍼 덕분에 제홈은 암호의 비밀에 그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그것을 공개하지 못한다면 개인적인 만족에 밖에 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홈 씨와 제가 합의한 건,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구해 결정하는 겁니다.”

맥키퍼의 말에 루비오는 안경을 벗고 마른세수를 했고 뤼스커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다들 머리가 아픈 모양이었다. 잠시 후 뤼스커가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들어 올렸다.

“전 반대합니다. 인류 이전의 지적 생명체를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것 같아요. 뭐, 학계에서야 알아서 잘 걸러 듣겠지만, 이런 쪽에 지식이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

“저도요. 과학의 발전도 중요하고, 인류 지성이 저변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험이 너무 커 보여요. 특히나 언론은 그런 거 잘하잖아요? 별것도 아닌 말이나 전문용어를 마음대로 해석해서 갖다 쓰는 거. 안 그래도 자극적인 내용인데 그 장기로 양념이라도 치면 완전 시끄러워질걸요?”

둘 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학계는 차치하더라도 일반 사회는 이런 내용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수 있었다. 특히 창조 신화를 가진 종교들은 이 내용에 집착적으로 달라붙을 것이 뻔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신념과 논리로 이 결과를 난도질하고 억지로 기워서 자신들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호도할 것이었다. 종교가 없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목적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므로 대부분이 이 내용을 곡해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제홈이 끝내 외면하고 있었던, 최악의 결과였다. 에넷이 빠진 상황이었기에 그는 한 명이라도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면 연구 내용을 조금이라도 공개할 여지가 남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나마 자신과 비슷한 의견일 거라고 생각했던 둘 다 반대의 선택을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게 있는 제홈을 위로라도 하려는 것인지 맥키퍼가 다가와 말했다.

“뭐, 그래도 인간 염색체 2번에 관한 건 공개 가능할 겁니다.”

 

》《

제홈의 짐작이 얼추 맞았다. 에넷이 기지를 떠난 지 보름을 막 넘길 무렵 제홈의 파견 기간도 끝이 났다. 제홈은 전날 미리 싸놓은 짐을 들고 기지의 출입구로 향했다. 다른 연구원들이 제홈을 배웅하기 위해 먼저 나와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할 게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특히 루비오는 자신보다 늦게 와서 먼저 떠나는 제홈을 매우 부러워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연구원들은 다시 실험을 위해 연구 센터로 돌아갔다. 출입 관리를 위해 맥키퍼만이 남아 있었다.

제홈은 첫날 받았던 ID카드를 반납하고 검색대 앞에 섰다. 기지에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X-ray 검색대 안에 들어갔고, 가방 역시 컨테이너 벨트를 따라 검색대를 통과했다. 방금 막 기계를 빠져나온 가방을 경비원이 수색했다. 경비원은 제홈의 가방 한구석에서 다 쓰지 않은 담배 액상 병을 몇 개 꺼냈다. 제홈은 그 모습을 보며 검색대 밖으로 나왔다. 마니티리가 제홈의 스마트 워치를 들고 바로 옆에 서 있었다. 하지만 첫날처럼 바로 돌려주지 않았다. 제홈은 마니티리를 쳐다봤고, 맥키퍼 역시 마니티리를 쳐다봤다. 맥키퍼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눈짓을 했다. 마니티리가 입을 열었다.

“잠시 소지품 검사를 실시하겠습니다. 거부할 시 즉각 구속될 수 있으며 구속 과정에서 안전상의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마니티리와 다른 경비원은 제홈의 스마트 워치와 담배 액상을 또 다른 경비원에게 넘겼다. 그 경비원은 그것을 받아 들고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제홈은 출입관리소 한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수 명의 경비원들에게 감시를 받았다. 맥키퍼 역시 멀찍이 떨어져 서서 제홈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에 비해 제홈은 상당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1시간 반 정도가 흐른 후, 예의 그 경비원이 제홈의 물건을 다시 가져왔다. 스마트 워치는 그대로인 것 같았지만 액상 병들은 전부 비워져 있었다. 그는 맥키퍼에게 태블릿을 건네며 동시에 귓속말했다. 맥키퍼는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그 경비원과 함께 제홈에게 다가왔다.

“제홈 씨의 소지품에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담배 액상에 대한 배상은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중하신 시간을 빼앗아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홈은 스마트 워치를 다시 손목에 찼다.

“아닙니다. 안보는 중요한 문제니까요. 이해합니다. 그리고 빈 병은 필요 없으니 버려주세요.”

 

》《

휴가를 보내고 제홈은 다시 트레마 연구소로 돌아왔다. 지난 3주간의 휴가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고, 일주일 내내 붙잡고 있던 보고서가 떠올랐다. 파견 중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것은 사흘이 채 넘어가기 전에 끝이 났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칼라하리 기지의 그 누구도, 심지어 맥키퍼도 알아내지 못했던 비밀을 밝히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었다. 트레마의 권한을 일부 위임받아 연구소 내의 접근 가능한 비사용 설비를 모두 동원했음에도 금요일까지 작업이 끝나지 않았다. 결국 제홈은 주말 이틀마저 반납해가며 막바지 연구에 몰두했었다. 유전자 암호와 상형문자 암호, 그리고 그것들이 지시하는 온갖 종류의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총망라하는 암호화/복호화 작업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음 월요일이 오기 전에 가까스로 그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가를 떠났다가 돌아오니 제홈의 첫 일정은 연구소 소장인 트레마와의 독대였다. 그는 트레마를 스크린으로밖에 본 적이 없었다.

보고서를 읽고 있던 트레마는 제홈이 들어오자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 제홈 씨, 수고 많으셨습니다. 삼 주간의 휴가가 지친 심신을 회복하기에 부족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트레마는 손짓을 하며 제홈에게 자리를 권했다. 제홈이 자리를 찾아감과 동시에 트레마 역시 일어서서 제홈의 맞은편 자리로 이동했다.

“충분했습니다, 트레마 소장님.”

“다행이군요. 다른 사람들은 한창 연구 중이던 당신을 보낸 것에 대해서 아직도 불만이 많은 모양이지만, 전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번 파견 때문에 하시던 연구에서 빠지게 된 건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대신.”

트레마가 가운데의 테이블을 조작하자 홀로그램이 가동됐다. 곧 트레마 연구소 내 최고위 연구실의 마크가 나타났다. 해당 연구실은 연구도, 발표도 모두 독립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소속 연구원이 아닌 이상 학계에 발표되는 것 외에 그 연구실과 관련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마 트레마 한 명뿐일 것이었다. 심지어는 연구실 인원이 몇 명인지까지도. 트레마가 테이블을 다시 조작하자 일련의 동의서와 반짝이는 구획이 홀로그램으로 구현됐다. 저 구획에 손을 올리기만 하면 분명 비밀스러운 삶이 시작될 것이 뻔했다.

“동의만 하시면 곧바로 DaPre 게놈 특수 연구팀으로 배정해드리겠습니다. 아마 그쪽에서도 당신의 사진 같은 기억력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갑자기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홈 씨가 올린 보고서를 전부 읽고 배정한 거니까요. 그리고 기존 팀에 들어가시는 것도 아니고, 팀장 자격으로 새로운 팀을 꾸리게 되실 겁니다. 그 시료 C에서 나왔다는 암호 내용, 분명 유전자를 안정시키고 제어하는 방법에 관한 게 포함되어 있다고 했죠? 앞으로 꾸리실 팀에서 하실 게 바로 그와 관련된 겁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아직 그 어떤 기술로도 DaPre 게놈의 증식과 변이를 완벽히 제어하지 못했죠. 아마 제홈 씨가 알아 오신 새 방법이 그와 관련한 유전자 제제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트레마는 다시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그가 몇 번 터치하자 곧 방 전체에 보고서 내용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제홈이 연구한 시료 X, A, B, C에 관한 것은 물론 캡슐에서 발견되었다는 메시지들과 암호화 표까지 전부 있었다. 제홈이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에 더해 맥키퍼조차 해석하지 못한 암호들이 전부 해석되어 있었다. 암호화 표에서 의미가 파악되지 않았던 상형 문자 옆에는 식별 코드와 별칭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 내용, 정말 당신밖에 아는 사람이 없나요?”

“네. 식별 코드가 붙은 상형 문자들은 전부 아미노산의 구조를 본따 표현한 걸로 파악됐습니다. 이성질체의 구분까지 포함해서요. 칼라하리의 연구 기지 사람들은 모두 모르는 것 같았고 이걸 알만한 사람도 저밖에 없었습니다. 이 보고서에 처음으로 밝히는 겁니다. 언젠가 이걸 알아내는 사람이 또 생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다들 상형 문자가 눈에 보이는 사물을 단순화한 것으로 보고 있으니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트레마는 다시 태블릿을 조작했다. 시료 C 유전자의 해석 중 일부분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조금씩이라도 군데 군데 일상어로 해석된 다른 부분과는 달리 상형 문자만 가득한 부분이었다. 그나마 해석된 배열은 단 7개였다. 은하, 태양, 지구, 광속, 방향, 시간, 공간.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불명확했다. 제홈의 기억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그는 생명과학 전공자였다. 트레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건 아마 그들의 고향을 알려주는 거겠죠. 뭐, 우리로선 아직 알 길이 없지만.”

트레마는 다시 자료를 쭉 넘겨 이미지 메시지의 해석문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그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두 번째입니다.]

[다른 은하, 다른 성계에서 지구로 왔습니다.]

[이 땅에 정착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이곳의 생명체들에게 다양한 것을 했습니다.]

[중대한 실패가 있었습니다.]

[많은 생명들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했습니다.]

[많은 생명이 사라질 위기였습니다.]

[우리는 이곳의 생명들을 위해 치료제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독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생길 지적 생명체를 위해 이것을 남깁니다.]

[슬픈 마음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세컨드라… 재미있네요.”

 

[1] DNA 염기 서열 중 단백질의 구성정보를 담고 있지 않은 부분. RNA 최종 산물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 전체가 포함된다.

[2] DNA 염기 서열 중 단백질의 구성정보를 담고 있는 부분. 일반적으로 고등 생물로 갈수록 실제 게놈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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