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꿈속의 숲8. 준비

2020.05.21 19:3905.21

”도이야, 지금 일어나야 해.“

 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눈은 퉁퉁부어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밖을 보니 아직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아 정신이 멍했지만 언니를 따라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생각도 못 했는데 금방 집에 도착했다. 조심스럽게 안을 살펴보니,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우리는 곧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는 떠나려던 참이어서 짐을 다 싸두어 내 짐을 챙기는 것을 돕기로 했다. 하지만 넉넉지 못한 살림이라 챙길 것이 옷 몇 벌밖에 없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쓴웃음이 나왔다.
 
 막 나가려다 활을 잊어버린 것을 떠올리고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던 창고로 갔다. 어머니가 쓰시던 단검과 활을 챙기는데 무언가 툭, 떨어졌다.

 비싸 보이는 묵직한 비단 주머니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어르신이 어제 건네주셨던 향낭이었다. 열어보니 쪽지와 화살촉이 같이 담겨있었다.

 ‘언제든 찾아오려무나.’

 울컥해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아 쪽지를 얼른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향낭도 품에 챙기고 활과 단검을 챙겼다. 마음이 한결 더 든든해졌다.

 급하게 움직이느라 정확한 목적지를 정하지 못하고 우선 가까운 옆 마을에 가기로 했다. 걸어서 하루면 도착하니 그나마 가까운 거리였다. 언니가 시장에 가 간단히 먹을 것을 사 온 후 움직이기로 했다.

 혹여나 마을 사람들과 마주칠까, 큰 바위 뒤에 앉아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어르신의 가족을 헤친 괴물의 행방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아무런 단서도 없으니 바위에 계란치기였다.

 부모님과 어르신에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떠올려봤지만, 어젯밤의 일이나 어릴 적 좋은 추억 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피곤함에 점점 머리가 굳어갈 즈음 스쳐 가듯 생각 난 것이 있었다.

”편지?“

 나는 바위에 기대어 눕다시피 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순식간에 정신이 들었다. 왜 미처 아버지가 어르신께 받은 편지를 찾을 생각을 못 했을까. 간간이 오던 답장을 소중히 보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일기 사이에 끼워두시던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언니가 돌아오면 다시 집을 들르기로 하고 다시 바위에 기대 쉬었다. 

----
”이것 좀 먹어.“

 언니는 시장에서 사 온 먹을거리를 건넸다. 언니에게 음식을 받자마자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언니는 뭘 먹지도 않고 술을 마셨다. 빈속에 마시면 몸이 상할까 잔소리를 하려다 문득 흡혈귀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음식을 다 먹고 편지를 가지러 집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했다.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가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것 빼고는 쉬지도 못했는데 계속 움직이는 언니를 보니 흡혈귀는 지치는 것도 없나보다고 생각했다.

 인적이 드물고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돌아 집으로 향했다. 나는 그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놓았다. 

”그놈은 어떻게 어르신의 저택에 침입할 수 있었을까요? 다른 집보다 사람도 많고 저택도 넓은데.“

”흡혈귀는 밤에 박쥐로 변할 수 있어.“

 언니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상처도 금방 낫는 몸에다, 박쥐로 변할 수 있다니. 상상을 뛰어넘는 존재를 상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발자국도 남지 않고 침입할 수 있었겠네요. 저택 구조도 박쥐로 변하면 금방 알 수 있고.“

 막막함에 말문이 막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씨가 화창해 기분이 더 암울해지지는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선선해지는 바람에 마음을 가라앉혔다.

”왜 하필 어르신의 가족이었을까요? 다른 사람들보다 수사가 엄하게 진행되었을 텐데.“

”원한인가?“

”어르신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실 분은 아닌데.“

”나도 흡혈귀는 한 명밖에 보지 못했지만, 상식적인 놈들은 아니야.“

 그다지 즐겁지 않은 일이었는지 언니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었는지 궁금했지만 나중에 묻기로 했다.

”감정 기복도 심하고 자존심이 강해. 마치 자신이 신인 것처럼 행동하고.“

”언젠가 죽는 인간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런 게 아닐까?“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만약 불멸의 존재이고,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사람일까요?“

”그런 놈이라면 왜 어르신의 가족을 헤쳤느냐가 다시 문제가 되겠지.“

 일리가 있었다. 그 도시에 높은 직위에 있는 자가 어르신만 있지 않을 텐데. 언니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작은 일이 그놈에겐 큰 계기가 되었을 거야.“

”음, 아직은 범인이 어떤 사람인지 특정하긴 힘드네요. 적어도 어르신이나 어르신의 가족과 마주쳤거나 관련이 있었을 텐데, 일반적인 계기가 아니라면 용의자의 범위가 넓을 테니까요.“

 나는 한숨을 쉬고 머릿속으로 우리가 그동안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정리했다. 집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최대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히 들어가야 한다. 나무 뒤에서 집 근처에 사람들이 있는지 지켜보다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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