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꿈속의 숲 7 - 이별 4

2020.05.11 00:0605.11

”저자는 괴물이야!“

 어르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 깊은 분노를 어떻게 참고 사셨을까. 저렇게 작은 체구에 담긴 어둠은 밤바다같이 깊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언니는 어르신의 가족을 헤친 괴물이 아닙니다.“

 언니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어르신과 우현이 죽이려는 괴물의 얼굴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이었다. 어릴 적 들은 아버지에게 들은 아이, 여자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피를 빨아 죽이는 괴물과는 겹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걸, 부엌에서 나눈 얘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납득할 것이다.

 하지만 저들을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엔 평생도 상처가 아물기엔 짧은 시간이었고 그 상처는 더 깊은 상처를 주는 갈고리가 되어 자신을 끌고 다녀도 알아챌 수 없는 법이다.

 어르신의 복수는 비단 자신의 가족을 죽인 범인에게만 한정되지 않았다. 언니가 흡혈귀인 것을 알자마자 달려든 것이 그 증거였다. 어르신은 범인을 죽이고 나서도 멈추지 않으실 것이다. 어쩌면 우현도 비슷한 과거를 가져 어르신을 돕는 것일지 모른다.
 그 갈고리가 평생 두 사람을 묶어놓고 지내면, 두 사람은 언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또, 나는 언니의 얼굴을 평생 잊고 살 자신이 있을까? 

 쨍, 다시 우현과 언니의 검이 부딪혔다. 둘 다 절박했다. 죽여야 했고, 여기선 죽지 말아야 했다. 언니는 몇 번 손발이 엇갈리는 듯하더니 곧 감을 익혀 매섭게 우현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무딘 화살촉이라도 어깨와 발목에 맞으니 계속되는 공격에 무리가 가는 듯 우현도 조금씩 틈이 보였다. 

 언니에게 맞춰 퇴로를 만들어야 했다. 어르신이 가로막고 있는 길이다. 어르신도 내 생각을 읽은 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후회할 것이다.“

 삶은 늘 선택할 때까지 몰아붙였다. 너무 버거워 항상 도움을 기다리기만 했다. 그러다 놓쳐 벌어진 일도 선택의 대가다. 그 뒤의 공허와 무력감, 죄책감. 잊어버리려 모르는 척 아니면 어쩔 수 없었다고 계속 되뇌었었다.

”감당할 수 없을 거다.“

 어르신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지니고 단단해졌다. 나도 저만큼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이 이후론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어르신의 간절하고, 슬픈 눈을 곧게 쳐다보았다. 한참 눈을 마주치자 어르신의 눈이 점차 흔들렸다.

”각오했습니다.“

 내 단호한 대답에 도술을 부린 듯 어르신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나는 어르신을 지나쳤고 언니도 이 상황을 알아챈 듯 우현을 밀쳐내고 내 쪽으로 뛰쳐나왔다.

 우리는 말 없이 뛰었다. 평소라면 아름다운 경치에 웃으며 거닐었을 거리를 우리는 두려움에 달려갔다. 어느새 작은 언덕에 도착해 거침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후회 할 일 없을 거야. 숲에 가면.“

 언니는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결연하면서, 모든 걸 뺏긴 사람처럼 연약했다. 언니에게 죽음은 늘 마음에 간직해왔던 날이었을 것이다.
 
 어르신은 가족을 잃은 십 년 전부터, 언니는 상처도 금방 낫는 몸을 가졌으니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예상하고, 각자 다짐을 했다. 

 내가 섣불리 내린 판단은 맞는 걸까? 당당하게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또 혼란스러웠다. 작은 언덕이라 금방 올라 뛰던 걸음을 멈췄다. 언니도 따라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현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흔적을 놓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르신이 나의 선택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이 신빙성이 있었다. 차게 내리비추는 보름달 빛에 의지하여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옳고 그름을 나누는 것.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해가 기울고 뜰수록 확신할 수 없었다. 막막함에 언덕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을엔 아직 불이 켜진 집이 몇 채 있었다. 평소엔 내 키를 훌쩍 넘어가던 집들이 너무 작아 보여 현실감이 없었다.
 
 문득 나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실감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말이다. 살아있으면서도 언제 죽을지 모르고, 한참이나 커 보이지만 거대한 세계 안에 두면 먼지 같다. 존재의 가치마저도 애매하다.

 나는 근처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밤은 환했고 별이 쏟아져 내릴 듯 반짝였다. 고요와 자연은 자꾸만 버리라 하는 것 같았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다 버리라고. 

”모두 후회할 거예요. 어떤 방법을 택했던.“

 언니는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말을 멈추니 조용히 흐르는 바람 소리, 작은 벌레 울음소리만 들렸다.

”어르신도, 우현씨도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무겁게 느낄 거예요. 그래도 괴물을 계속 쫓으며 잊어버릴 거예요. 어쩌면 언니와 저도 그럴 거예요.“
 
 언니는 끝내 앉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 같았지만, 죽음을 각오한 언니마저도 흔들리고 있었다.

”다 끝낼 수 있게 도와줄래요?“

 언니는 내게 등을 돌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언니에게서 고개를 돌려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눈이 감기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언니의 등에 업혀 마을 외곽까지 내려와 있었다. 나는 다 꿈이었나, 하다 번뜩 정신이 들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깼어?“

 처음 들어보는 언니의 갈라진 목소리에 다시 놀랐다. 내 등위에는 언니의 두루마기가 걸쳐져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생사가 갈릴뻔 했던 폐가가 눈앞에 있었다.

”다시 와도 되겠어요?“

”대부님이 너를 믿으시는 것 같으니,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지.“

 급박한 상황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안은 먼지가 수북했다. 저절로 기침이 나오려는걸 겨우 참았다. 이런 상황에서 장소를 가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언니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내게 두루마기를 입고 자라고 하고선 털썩 누웠다. 나도 따라 옆에 누웠다.

 피곤해서 금방 잠이 올 줄 알았는데, 마을 안이라고 생각하니 쉽게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누군가 피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괜히 이상한 망상을 하게 했다. 몇 번을 뒤척거리니 언니가 눈치를 챘는지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와 내 배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피곤할텐데 푹 자.“

”그렇겠죠? 내일은 집도 들려야 하는데.“

”들릴 수 있어.“

 언니는 작게 웃으며 느리게 내 배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타국에서 온 언니가 고선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괜히 신기해서 웃었다.

”언니네 나라에서도 이렇게 재워줘요?“

”이런 건 만국 공통일걸.“

 우리는 작게 킥킥대며 웃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 켠이 불안했다. 생각지도 못한 큰일이 닥치자, 어쩌면 나 자체가 완전히 바뀌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상상했던 떠돌이 무사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마음은 마냥 가볍지 않았다.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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