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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꿈속의 숲 6.- 이별 3

2020.05.03 23:3805.03

”검 내려놓으세요! 안 그러면 활을 쏘겠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믿기 힘드시겠지만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우현은 내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우현이라는 자는 어떤 자이길래 어르신의 황당한 말을 두둔하며 기꺼이 검을 사람에게 겨누는가. 내가 들은 말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제대로 보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언니를 보았다. 달빛이 밝은 탓인지 어두워진 저녁에도 언니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 항상 침착함을 잃지 않고 여유롭던 언니의 얼굴에 식은땀이 가득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호흡도 거칠고 가빴다. 문득 병이 있다는 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환자입니다!“

”도이씨.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현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짧게 들이쉬더니 언니에게 검을 내질렀다. 언니는 겨우 검이 오는 것을 피하고 막았다. 검과 검이 부딪칠수록 승패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언니는 검을 피하기 어려운지 검에 베이고 우현의 발에 차였다.

 처음으로 서로를 죽이기 위한 싸움을 눈 앞에 두니 저절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왜 가만히 보고만 있는가? 이제 누군가 시켜야 움직이는 어린아이가 아닌데. 결정을 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지게 되더라도.

 나는 활을 하늘을 향해 들었다가 내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시위를 당겨 호흡을 멈추고 우현의 어깨를 겨눴다. 언니가 다치는 모습이 눈에 자꾸 걸렸지만 생각을 비워야 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활이 우현의 어깨에 맞았다. 어르신은 화가 난 얼굴로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나에게 다가왔다. 우현은 어깨에 온 충격에 멈춰서 어깨를 부여잡았다. 언니는 그 틈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뛰쳐나갔다. 우현은 그 모습을 보고 곧 뒤쫓아가려 했다. 나는 다시 한번 시위를 당겨 우현의 종아리를 겨누었다.

”도이야, 제발!“

 얼른 시위를 놓아야 했다. 어르신이 내 팔을 잡아채기 전에. 나는 시위를 놓았다.

휙, 하고 화살이 날아가 앞으로 내딛는 우현의 발목을 아슬아슬하게 맞췄다. 어르신이 나를 잡기 전에 활 통과 활을 들고 언니의 뒤를 쫓았다.

-

 한참을 헤매다 작은 핏자국이 보여 그 길을 따라갔다. 언니가 정신없이 도망친다고 간 곳은 근처의 폐가였다. 언니는 자신의 기색을 숨길 여유도 없었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언니!“

 최대한 소리 죽여 언니에게 다가가 언니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언니는 몸을 떨고 있었다. 언니는 내 손길을 피하지도 않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병이 도진거예요?“

 언니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심장을 부여잡으며 작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당장이라도 어깨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의 병이 신경 쓰여 가만히 언니가 편하게 누울 수 있게 부축하려고 했다.

”...줘.“

”네?“

”도이야, 비켜줘.“

 언니는 쥐어짜듯이 입을 열고 나를 힘겹게 밀어냈다. 나는 뒤로 물러나 마음만 졸였다.

 평생 같았다. 언니는 겨우 안정을 되찾은 듯 호흡에 안정을 찾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언니에게 다가갔다.

”언니, 괜찮아요? 상처 좀 봐요.“

”도이야, 돌아가.“

 뜻밖의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순간 어르신과 우현의 간절한 외침이 귓가에 맴돌았다. 점점 피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외면했다.

”무슨 소리예요, 아픈 사람 두고 어딜 가요?“

”가.“

 언니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저 가라는 말뿐이었지만, 그 안엔 너무 많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들 나를 골탕 먹이려는 것 같았다. 언니는 내가 없었던 방에서 일어난 일을 얘기했다.

”향낭, 그 향기에 숨이 막혔어.“
 
”고작 꽃 향 가지고 다들!“

 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었다. 부서진 창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이 송곳니를 비췄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아도 보이는 송곳니는 날카롭고 길었다. 도저히 사람의 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나날이 창백해진 안색은 오늘따라 더 하얘 핏기가 빠진 환자 같았다. 자세히 보니 손도 유난히 길고 손톱도 확연히 길고 날카로워졌다. 사람의 형상을 한 괴물. 내가 보고 있는 이 모습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밤마다 짐승 피를 먹고 버텼어.“

 마치 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어리벙벙해 말문이 막혔다. 몸이 떨리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언니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어제 같이 자던 날, 네 피 향이 견딜 수가 없었어. 단순한 병인 줄 알았어. 술을 마시면 좀 버틸 만하길래.“

 언니는 말을 마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우는 언니를 예전처럼 주저 없이 안아 위로할 수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가 같이 지낸 날들은 무엇이었던가, 하고 되짚어보는 것만 해도 벅차 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우현과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쫓아온 것이다. 동네 활쏘기 대회의 연습용 활이라 활촉이 무뎌 움직임을 묶어두지 못했다. 충분히 예상한 일이라 얼른 언니를 데려가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괴물이 실존하고 있었고 나와 함께 살던 자였다.

”도이씨, 뒤로 물러나요.“

 우현이 도착해 내 앞을 가로막고 언니에게 다시 칼을 겨누었다. 내 표정과 달빛으로 밝은 방을 보며 우현은 내가 언니의 정체를 확인한 것을 눈치챘는지, 이젠 믿어달라는 호소는 하지 않았다. 

”이놈은 왠만한 상처는 금방 낫습니다. 한 번에 죽여야 해요.“

 이번엔 나도 우현을 막을 수 없었다. 언니는 우현이 등장하자 마냥 웅크려 앉을 수만은 없었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현은 언니가 움직일 때마다 천천히 다가서며 견제했다. 언니는 마음을 정리한 듯 감정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숲에서 죽게 해줘.“

”괜한 수작질하지 마라.“

 언니는 우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무언갈 읽어내려는 듯했다. 우현은 언니의 눈빛에 검을 쥔 자세를 고쳐잡았다. 둘 사이에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당에서의 일방적인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처치하기 위한 긴장감.
 
 난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내가 봐왔던 언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지금까지 봤던 언니의 행동들은 무슨 의미였는지.

”언니랑 얘기하게 해줘요.“

”안됩니다.“

”나 만나서 살아있는 거 같다고 한 말. 진심이야?“

 내 질문에도 언니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우현과 대치하며 긴장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언니의 강한 얼굴에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그러고는 떨리는 입술을 말아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는 다시 숨을 골랐다. 냉정하게 지금의 상황을 생각했다. 충분히 사람을 헤칠 수 있는 무력을 가진 언니가 가축만 골라 허기를 달랜 나날. 나에게 느낀 피 향 때문에 살아있음을 누린 생활을 버리려고 한 다짐.

 급하게 챙기느라 가지고 있는 무기는 활뿐이다. 무인이였던 어머니에게 억지로 끌려다니며 무술을 배운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반응에 어르신은 내가 다시 언니를 도울 거라는 것을 눈치채신 어르신은 절박하게 울부짖었다.
 
”도이야, 저 괴물은 내 가족을 죽인 괴물이야! 저놈들은 사람을 꾀어 죽이는 놈들이야!“

 어느새 어르신의 목소리도 슬픔과 분노에 젖어 있었다. 어르신의 지난 10년을 알고 있다. 이 선택을 한 결심만큼이나 어르신에 대한 측은지심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어르신, 언니는 그 괴물이 아니에요.“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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