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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꿈속의 숲- 4. 이별

2020.04.19 10:3804.19


 강한 햇빛이 눈을 찌르듯이 내리쬐어 잠에서 깼다. 어젯밤 어르신과의 대화 이후로 눈은 퉁퉁 부어 최대한 뜬 것이 평소의 절반 정도 되는 듯했다. 손으로 눈두덩이를 지그시 누르고 옆을 돌아봤다. 언니의 이부자리는 이미 정리되어있었다. 

 나도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는데 언니가 마침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피곤했나 봐. 어르신이 깨우지 말라고 하셔서 나랑 어르신이 손님을 먼저 보고 있었어.“

 내 편의를 봐주시느라 두 분이 고생했다는 얘기를 듣자 민망함에 괜히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었다. 언니는 내 얼굴을 보더니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을 잠시 손으로 막았다.

”눈 양쪽에 모기 물렸어?“

”아니에요!“

”그럼 왜 그렇게 부었어?“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그냥 모기에 물렸다고 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 괜히 욱해서 아니라고 버럭 했는데 할 말이 없어 그냥 눈가만 문질렀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별일 아니에요.“

 이렇게밖에 말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어 민망함에 괜히 미소를 지었다. 언니는 캐묻지 않고 잠깐 나를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아침 차려놨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언니는 곧 부엌으로 나갔다. 나는 밖으로 나가 세안을 하고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언니는 아침상을 들고 내 방에 들어왔다. 나는 어제 마셨던 술 때문인지 속이 좋지 않아 뜨거운 국부터 들이켰다. 뜨거운 국물이 속을 시원하게 풀어줘 저절로 길고 낮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어제 뭐, 술 마셨어?“

”네. 조금 마셨어요. 언니 자고 있었을 때 어르신과 잠깐 나가서요.“

”장난이었는데 진짜네.“

 언니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을 했지만, 표정은 어딘가 전처럼 시원해보이지 않았다. 언니의 머릿속은 그 일이 중요한 것 같지 않았다. 언니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머뭇거리더니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떠나야 할 것 같아.“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놀란 얼굴로 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니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주변 숲도 둘러보고, 알아볼 것도 있어서.“

 그동안 함께 했던 생활이 너무 빨리 익숙해져서 그런지 언니가 떠난다는 소식이 너무 서운했다. 언니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다.

”며칠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어린아이처럼 언니의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솔직하게 말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일이 생각보다 급해져서 얼른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미안해.“

 언니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언니가 떠난다니 아쉬운 마음은 여전했지만, 나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덤덤하게 손님을 보내줘야 한다. 문득, 어릴 적 손님을 배웅하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젠 더 붙잡기보다 얼마 안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언니와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오늘 저녁은 같이 먹어요.“

”알겠어.“
 언니는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는 어떤 기분일까. 나와 지냈던 요 며칠 즐겁게 보냈을지, 앞으로도 우리 집에서 지냈던 일들을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했다. 나는 식사를 마무리하고 일을 시작했다.
 


 감나무 집 선비님네와 주변 집을 돌며 서책을 갖다 드리고 오랜만에 날씨 좋은 날, 가벼운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름이 끝나가는지 확실히 날도 선선해지기 시작했다. 곧 다가올 새로운 계절에 대한 반가운 마음도 잠시, 곧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집에 적당히 먹을 만한 것이 없어 장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세 사람이 먹을 양을 사야 하기도 했고, 혼자보다 언니랑 장을 보는 편이 덜 심심할 것 같아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르신은 잠시 볼 일이 있다면서 우리 집으로 어르신을 마중 온 사람과 같이 어디론가 가셨다. 조심해서 다녀오시라고 인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언니는 필사하느라 어지러워진 방안 정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왔어? 더운데 고생했어.“

 나는 방문을 잡고 서서 몸 만 방 안에 기울인 채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같이 장 보러 가요!“ 

”그래.“

 기분 탓인지 언니는 집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얼굴도 푸석해진 것 같았다. 나는 반나절 만에 바뀐 공기를 모르는 척하며 더 밝게 웃었다.

”오랜만에 고기 먹을까요?“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에이, 이럴 때 먹어야죠. 어르신도 계시고.“

”그러네. 그럼 오늘 점심은 조금만 먹어야겠다.“ 

 다행히 언니는 곧 활기를 되찾았다. 왁자지껄한 시장에 와서 기분전환이 된 덕인 것 같았다. 장터에 오니 온갖 물건에 시선이 자꾸 갔다. 마음 같아서는 이것저것 사고 싶었지만 조그마한 세책방의 수입으로는 힘이 들었다.

 아쉬운 대로 눈으로만 둘러보다가 장터에서 만난 부모님의 지인분이나 이웃들과 인사도 나누고 같이 떠들기도 했다. 요새 산짐승들이 기승을 부려 집에서 키우는 닭들을 잡아먹으니 조심하라는 말씀도 다들 덧붙이시고 감사하게 집에 남는 것이라며 먹거리를 챙겨주시는 분들도 많았다.

”정말 아는 분들이 많구나.“

”작은 마을이니 당연히 다들 알고 지내죠.“

”다들 너를 아끼시는 것 같던데?“

”부모님 덕분이에요. 인복이 많으신 분들이라서요.“

”좋은 분들이네.“

”그러게요. 돌아가신 후에도 이렇게 부모님 덕을 보고 사네요.“ 
 의도치 않게 양손 가득히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구석에 사람들이 모여 시끄러웠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이 가 보니 마침 사당패가 마을에 들러서 춤과 노래를 하고 사람들이 둘러싸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언니의 손을 잡고 끌어 최대한 가까이에서 사당패 놀이를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시작한 지 꽤 된 모양인지 사람들은 이미 흥에 겨워 같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어떤 자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한두 푼을 그들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러면 사당패가 더 흥에 겨운 듯이 빠른 곡조로 춤을 추고 묘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환호성도 커졌다. 우리 둘도 곧 박수를 치고 따라 춤을 추면서 사당패 놀이에 푹 빠져버렸다.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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