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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화성에서 온 노인

2019.09.27 10:3709.27

  노인은 오늘도 혼자 공원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날씨는 한창 초겨울을 지나는 중으로 찬바람이 불었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똑같은 옷차림으로 그 찬기를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요란한 장식의 보라색 중절모, 제대로 닦지 않아 뿌연 은색 철제 안경, 때 묻은 코듀로이 상아색 재킷, 보풀 일어난 세로 줄무늬 진한 회색 바지, 뒷굽이 거의 닳은 검은색 구두. 노인은 늘 한결같았다.

  나는 항상 그랬듯이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오늘은 날씨가 쌀쌀하네요.”

  노인은 변함없이 중절모 챙을 살짝 잡고 입꼬리를 올리면서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우리가 인사를 나눈 지도 조금 보태서 1년이 다 되었다. 나는 2년 전 공원 바로 앞 5단지 아파트로 이사 와서 얼마 지나지 않은 날부터 이른 아침에 공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산책을 빠트리는 날에는 글이 잘 써지지 않아 어떤 징크스처럼 매일 밖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 해 넘게 걷다가 올해 초봄 공원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을 처음 보았다.

  내가 건네는 인사에 비해 그의 답은 매번 짧았다. 육성 없이 고개만 움직이는 식. 그래도 나는 상관없었다. 나름 멋 부린 매무새 속 조잡함과 여유 있는 척하는 표정 속 외로움을 발견하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실 그동안 내가 더 살갑게 다가갔다면 짧은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내 성격상 나름 정한 관계의 선을 넘는 것은 또 싫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돌려 노인을 다시 바라보았다. 뒷모습이 보였고 바람은 더 세차게 불었다.

 

  산책을 빠지지 않고 하는데도 새로 쓰고 있는 소설의 진도가 도통 나가지 않는 상황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거꾸로 산책하러 나가지 않아 보았는데 정말 한 문장도 채 쓰지 못했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잊지 못할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잠까지 설쳤다.

  퀭한 눈으로 외투를 대충 걸쳐 입고 현관으로 나가다가 냉장고에서 귤을 두 개 챙겼다. 평소에는 가져가지 않는 간식이었다. 우리 아파트장에서 파는 과일은 이상하게 하나같이 맛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나는 산책을 하면서 새콤달콤한 귤까지 까먹는다면 글이 잘 써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양쪽 주머니에 든 귤을 만지작거렸다. 노인이 생각났다. 나눠 먹을까, 그럼 몇 개 더 챙겨 와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공원으로 향했다. 내가 도는 코스를 걷는 내내 귤 하나라도 줄지 말지를 고민했다. 나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같이 먹으면서 대화까지 나눈다면 왠지 소설 속 인물이 스스로 앞으로의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만도 같았다.

  멀리 그 의자에 그가 당연하게도 앉아 있었다. 보라색 중절모에 달린 깃털이 휘날렸다. 슬그머니 다가가 노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앞만 보고 있었다. 오른쪽 주머니에 있는 귤을 꺼내 건네면서 내가 말했다.

  “어르신. 귤이 맛있더라고요. 드셔보실래요?”

  그는 나를 쳐다보면서 고개와 손을 동시에 저었다. 나는 그가 팔을 힘차게 흔드는 모습을 보고 또 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무안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노인의 입꼬리만큼은 여전히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뭇거리다 그의 옆에 그대로 앉아서 귤 두 개를 모두 까먹었다. 달콤한 맛이 났다.

  그 뒤로도 나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노인을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뭐랄까, 굳이 억지스럽게 상황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우직하게 평소와 같은 정자세를 유지했다.

  안정된 마음 탓인지 풀린 날씨 탓인지 나는 졸다가 깨어났다. 노인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의자 위에 올려놓았던 귤껍질도 사라지고 없었다. 시계는 벌써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이 그대로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불안해졌다.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면서 어르신은 어디로 가셨을까, 끼니는 잘 챙겨 드실까, 하는 잡다한 걱정거리들까지 생겨났다. 나에게는 당장 마감이라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기에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꼴이었다.

 

  빗소리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새벽 다섯 시 반쯤이었다. 일기 예보에서 말한 것과는 달리 비가 조금 더 일찍 많이 내리기는 했으나 눈이 저절로 떠진 주된 이유는 최근 예민한 탓인 듯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평소 리듬대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어스름에 익숙해진 눈으로 집 안의 불을 켜지 않고 거실로 갔다. 텔레비전을 켜서 재즈만 나오는 오디오 채널에 맞추었다. 볼륨은 최대한 줄였다. 나는 침대에 기댄 채로 쉬다가 아침을 먹을 참이었다. 빗방울은 더 굵어지는 것 같았다. 우비라도 입고 나가야 하나, 생각했다. 산책하러 안 갈 수는 없었다.

  시리얼로 아침을 때우고 씻고 나오니 다행히 비가 꽤 줄어들어 있었다. 작은 접이식 우산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보였다. 나는 옷을 두툼히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 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산책할 때 내리는 비가 항상 반가운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괜찮았다. 사람도 많이 없어서 한산했다. 그러나 이내 생긴 당황스러움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노인이 있었다.

  그는 비가 오는 날만큼은 의자든 공원 어디에서든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오늘은 의자 위에 신문지를 깔고 똑같은 옷차림을 한 채 앉아 있었다. 당연하지만 또 요행스럽게도 우산은 쓰고 있었다. 나는 빠른 발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갔다. 그는 애써 추위를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아이고, 어르신. 비도 오고 추운데 웬일로 나오셨어요.”

  나는 말을 내뱉은 뒤 그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냥,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올라오는 어떤 염려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향하여 고개를 돌려 우리는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때 나는 그의 그토록 힘없고 서글픈 눈을 처음 보았다. 여태까지 몰랐던 것이었다.

  “나는⋯⋯.”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움직였다. 사실 나는 지난번에 그에게 귤을 건넸을 때 이후로 그가 말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었기에 놀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를 재촉하듯이 계속 수그린 채로 내가 말했다.

  “네, 어르신. 말씀하세요.”

  “나는, 저 멀리 화성에서 왔어. 지구 말고 화성.”

  그리고 노인은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분이구나, 나는 생각했다. 비는 그칠 듯 그치지 않고 있었고 무엇보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꽤 쌀쌀했다. 노인이 아까보다 더 몸을 움츠렸다. 순간 그의 말동무가 되어 주고 싶어졌다.

  “저하고 저기 공원 건너편에 카페에서 차 한잔하시겠어요? 여기 너무 춥잖아요. 비도 오고. 감기 걸리시겠어요.”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 돼. 여기 있어야 저기서 내가 보인다고. 잠깐만, 오늘이 2018년 12월 17일 맞지?”

  나는 맞는다고 답하고 정확히 여섯 번 더 권했다. 춥다, 감기 든다, 비가 계속 올 거 같다, 쌀쌀하지 않으냐⋯⋯. 하지만 노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있잖아. 나는 차보다 커피가 좋아. 달달한 거 그게 이름이 뭐더라. 카라멜 모카아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서 그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는 따뜻한지 가만히 있었다.

  “어르신, 제가 따뜻한 커피 사 올 테니까 잠시만 앉아 계세요. 제 점퍼 입고 그냥 가시면 안 돼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노인을 뒤로하고 아파트 단지 편의점으로 향했다. 공원 맞은편 카페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 당장 내가 춥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소리 나는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가 온장고에 있는 카라멜 마끼아또 캔커피 두 개를 고르고 깔고 앉으려고 신문을 찾았지만 없었다. 대신 박스 하나를 얻었다.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나도 그 옆자리에 박스를 깔고 앉았다. 그의 시선이 캔커피를 담은 비닐봉지를 향한 듯하여 얼른 꺼내서 주었다. 그가 뚜껑을 따는 데 애를 먹기에 내가 나섰는데 어찌나 견고하던지 손이 얼얼해졌다. 노인이 커피를 몇 모금 마시고 입을 뗐다.

  “내가 아까 했던 말, 아무래도 믿기 힘든 모양이지?”

  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면서 대답했다.

  “어휴, 아니에요. 어르신 말씀 들으려고 이렇게 커피까지 사왔잖아요. 그럼. 음. 지구엔 언제 오신 거예요?”

  “말하자면 긴데.”

  “어서요, 어르신. 일단 화성엔 언제 가신 거예요? 왜 가신 거예요?”

  이 정도면 이미 훌륭한 말동무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하신 웃어른을 놀리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엇이 옳은 방법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평소에 과학 영화를 볼 때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다른 뜻 없이 순수하게 그의 말벗이 되는 것이 나의 본심이었다.

 

  비는 아니어도 바람만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노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내 발로 화성에 간 적은 없어.”

  “네?”

  “난 그곳에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지.”

  “태어나셨⋯⋯.”

  나 때문에 그의 말이 시작부터 끊어졌다. 일일이 반응하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객관적인 사실 여부를 따지려 하고 있었다. 순간 그가 다시 예전처럼 입이 무거워질까 봐 초조해졌다.

  “아. 죄송해요, 어르신. 너무 궁금해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무슨 말인가 싶은 거지? 아무튼 나는 화성에서 태어난 셈이야.”

  그가 살짝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갈 듯하여 마음이 놓였다.

  “얼마 전에 뉴스를 봤어. 나사에서 화성으로 보낸 탐사선 인사이트가 처음으로 화성의 바람 소리를 탐지했다고 했지. 사람들은 열광하는데 나는 어찌나 안타깝던지.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고작 바람 소리를 들었다고 그 난리를 피우다니.

  화성엔 말이야. 지표면 위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전혀 중요하지 않거든. 엘리시움 평원이니 뭐니 요상한 이름을 붙여서 불러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얘기지. 아, 다행히 나사에서 이번엔 감을 좀 잡았는지 인사이트로 지표면 아래를 탐사할 예정이라던데. 근데 참 답답하지. 안쓰러워 쓰러질 지경이야. 겨우 5미터 아래에서 뭘 발견하겠다고?”

  나는 휴대폰으로 관련 기사를 검색하여 인사이트 사진을 노인에게 들이밀고는 이게 맞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튼 화성은 그 안을 깊숙이 들여다봐야 해. 화성은 그러니까⋯⋯. 그래, 거대한 지하 세계야. 그곳에서 어머니 김복례와 아버지 박만산이 날 키워 줬어. 친구 조영준과 그의 가족을 만났고 아내 홍순옥과 결혼했지.”

  “그렇, 구나. 우와. 모든 존함이 지구의 한국식이네요. 많이 그리우시겠어요. 그럼 거기에도 지구처럼 사람이 살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나 하나였고 나는 지금 지구에 있으니까 거기엔 그들밖에 없어. 사실 그들도 화성을 떠났을 수도 있지만⋯⋯.”

  갑자기 그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이야기도 힘겹게 따라가는 중인데 급격한 감정선의 변화까지 맞닥뜨린 것이었다. 내가 특별히 더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다. 대신 노인이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옆자리를 지키자, 라고 속으로 다짐했다. 잠시 뒤 진정한 듯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어르신께 그분들은 굉장히 소중한 사람들 아니, 존재였나 봐요. 그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의 눈에 생기가 다시 돌았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캔커피를 의자에 내려놓고 말했다.

  “그들은 태양계가 아닌 다른 항성계에서 온 한 종족이야. 사람이 아닐 뿐 광범위하게 보면 우리와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사는 유기체 집단이지. 항성계와 종족 이름은 음⋯⋯. 내가 부모님 이름을 지구식으로 붙인 것과 같이 말하자면 각각을 녹양과 수물이라고 하면 되겠네.

  아주 오래전, 우리의 시간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오래전 녹양계에서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어. 녹양계의 수많은 종족들이 가와 나, 두 가지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결국 서로를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것이지.

  그러나 수물족은 어떤 진영에도 속해 있지 않았어. 그들은 양 진영을 돌아다니면서 전쟁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하며 모두가 함께 자멸하는 길이라고 설득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지. 오히려 각 진영으로부터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라는 재촉만을 당했어.

  수물족은 굴하지 않고 숨어 있던 전쟁 반대 세력들을 규합하기 시작했어. 초반에는 비밀리에 진행하는 모든 것들이 순조로운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지. 세력들 중 셋이 따로 연합해 배신해버린 거야. 핵심 정보를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던 나 진영에 넘겨버렸어. 나 진영은 곧장 수물족을 공격했고 가 진영은 그 상황을 방관했지. 자신들의 전세를 가다듬으면서.

  그래서 수물족은 도망 온 거야. 비어 있고 물도 있던 태양계 화성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화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지상이 아닌 지하에 거처를 마련하기 시작했어. 최대한 몸을 숨겨야 했기 때문이지. 그들 존재 자체의 원천은 우리와 비슷하게 물인데 물을 다루는 능력은 비교가 불가능해. 자신들 고향만큼은 아니지만 말했듯이 화성에도 물이 있었으니 정착은 그런대로 할 수 있었지. 아, 오해는 마. 말하다 보니 과거형으로 표현했는데 화성엔 지금도 물이 있어. 내가 지구에 온 지 8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설마 그새 다 마르기야 했겠어? 올여름에 이탈리아 사람들이 마스 익스프레스 위성으로 확인하기도 했고. 엄한 남극 쪽 빙하 밑 호수를 발견한 거긴 하지만 말이야.”

  그는 말을 멈추고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고는 캔커피를 입에 가져다 댔지만 거의 남지 않았는지 두 차례 흔들어 보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나는 커피가 부족한 것보다 노인의 컨디션이 더 걱정되었다. 내가 말했다.

  “어르신. 저야 이야기 들어서 재밌고 좋은데 기침도 하시고 진짜 감기 걸리시겠어요. 내일 이어서 얘기해 주시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기침을 했어. 그냥 사레들린 거지. 그리고 이 얘기는 지금 여기서 마저 들어야 할 텐데. 만약에 그들이 날 데리러 오면 나는 바로 같이 떠날 거거든.”

  아주 약간 짜증이 났다. 적당한 핑계를 대면서 자리를 뜰 수도 있었지만 아까 했던 다짐을 떠올렸다. 뭐 이야기도 나름대로 재밌잖아, 라고 생각도 하면서 나 스스로를 달랬다. 나는 내의를 챙겨 입은 덕에 추위는 그럭저럭 참고 있었으나 노인과 내가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따뜻한 커피가 더 필요할 듯 보였다. 편의점에 다녀오겠다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저기 청년. 커피보다 와서 이 우산 좀 들어줘. 팔이 아파서 그래. 이놈의 비는 내리려면 확 내릴 것이지. 애매하게 이게 뭐야.”

  나는 내 우산을 접어 옆에 놔두고 그의 우산을 잡았다. 본의 아니게 한 우산을 같이 쓰게 되었다. 노인이 이야기를 재개했다.

 

  “음.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래, 아무튼 수물족은 화성 지표면 아래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숨었어. 그들은 물만 있으면 자급자족할 수 있으니까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 나갔지. 평화 연대 투쟁을 이어 나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어. 가끔씩 기습 정찰로 전쟁 상황을 파악하는 게 다였어. 그렇게 시간이 지나 녹양계 전쟁은 나 진영의 승리로 끝났고 수물족은 되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지. 고향 행성을 통째로 뺏겨 버렸으니까.

  그들은 좌절했지만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았어. 태양계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기로 한 거지. 수물족은 일단 거처 내부에서 중심 행성이 어디인지 조사하기 시작했어. 왜냐고? 녹양계 전쟁은 끝났지만 자신들에 대한 위협까지 멈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앞으로 태양계 일원으로 인정받아 일정 부분 보호도 받으려면 중심 행성에 가서 필요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야.

  그러나 지하 세계에서는 탐사에 한계가 있었어. 근접 행성밖에 볼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그나마 생물체 반응이 감지되는 여기, 지구로 경량급이지만 가장 빠른 함선 하나를 보냈지. 간절한 마음을 담고서⋯⋯. 그때 함선에 누가 타고 있었는지 알아? 바로 우리 부모님이야.

  부모님은 지구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 화성에서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수물족 모두도. 지구는 미개 행성 그 자체였던 거야.

  부모님은 희망을 놓지 않고 지구의 전파를 활용해 증폭 시켜 태양계를 탐색했어.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지. 그나마 지구가 최고로 발달한 곳이었으니. 화성은 지상에도 지하에도 마치 어떠한 존재도 없는 것처럼 조용해졌고 부모님도 말없이 귀환을 준비했어.

  화성으로 돌아가면서 부모님은 아시아 대륙의 한반도를 들렀는데 그 이유가 말이지. 생각이 안 나. 분명히 들었는데 말이야.

  어쨌든. 난 그때 부모님과 처음 만났어. 부모님은 낡아빠진 얇은 천에 둘러싸여 길가에 버려진 갓 태어난 나를 발견하고 함선에 태웠지. 그렇게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수물족과 함께 하는 삶이 시작됐어.”

  나는 자연스럽게 몸을 옆으로 틀고 우산 든 손을 바꾸었다. 노인이 이 정도면 우산을 접어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아도 그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어릴 적 화성에서의 생활은 글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내가 수물족이 아니란 사실을 몰랐던 것만 빼고는 부모님의 돌봄으로 그저 매일이 평온했다고 하면 정확하겠네. 이웃들과도 잘 지냈고. 그곳은 온통 하얀색 바탕이었어. 모든 곳은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로든 갈 수 있었지. 대략 겉모습을 상상해본다면 지구에 있는 대형 플랜트 공장과 닮지 않았을까. 물론 훨씬 더 간결한 모습이겠지만 말이야. 내 생각은 그래.

  아무튼 수물족이 사는 곳답게 어디서든 물이 흘렀지. 투명한 내벽 바깥쪽과 안쪽 모두에서. 안쪽에서 흐르는 물이 우리의 식량이었어. 다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살아나갈 수 있었지만 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래서 부모님은 그저 내가 다른 어린이보다 아주 조금 약하게 태어난 것뿐이라면서 정기적으로 나에게 특별식을 줬어. 무슨 무지개색같이 여러 색으로 된 끈적한 액체였는데 탄수화물이나 지방같이 우리 사람한테 필요한 영양소를 섞어 놓은 거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지.

  내가 청소년기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야. 어렸을 땐 몰랐는데 그때쯤 되니까 겉모습이 수물족과는 조금 달라져 있더라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약했던 내 몸이 더 이상 못 버티는 순간까지 왔다고 생각하고 절망했지. 근데 부모님은 나만큼 슬퍼하지 않는 거야. 그때 정말로 크게 대들었어. 내가 친자식이 맞느냐고 따졌지.

  부모님은 말할 기회를 놓쳐 늦었다고 미안해하면서 우리 가족이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를 들려줬어. 널 꼭 데려오고 싶었다고, 넌 우리 자식이고 우린 엄연한 한 가족이라고 했어. 그러나 네가 원한다면 지구로 돌려보내 줄 수 있는데 헤어지기 싫으니 그러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도 말했어.

  내 마음속에서는 여태껏 나를 속인 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일긴 했지만 잠시뿐이었어. 오래 가지 않아 사그라들었지. 부모님의 진심이 와 닿았다고나 할까. 그리고 어차피 지구에 있는 부모란 작자들은 날 버린 사람들이니까 그들 곁으로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았어.

  다른 겉모습의 나를 수물족은 보듬어 주었어. 아직 기약은 없지만 언젠가 지구인과 교류를 시작하게 될 때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지. 사실 점점 나를 밀어낼까 봐 겁이 났었는데.

  물론 호의적이지 않은 존재들이 없진 않았어. 그러나 거기에서 생기는 두려움이나 외로움은 부모님과 그 무렵 친해진 두 명의 친구, 순옥이와 영준이의 도움으로 떨쳐 냈어. 그러면서 난⋯⋯. 순옥이를 좋아하게 됐지. 뭔지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면서도 말이야. 사랑이라는 감정은 정말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더라고. 뭐 이제 와서 다 쓸데없는 얘기지만.

  그래, 이 지구어. 완벽하지? 나중에 잘 쓸 수 있을 거 같아서 부모님이 가지고 있던 데이터로 진짜 열심히 공부했어. 비록 지금 이렇게밖에 쓰고 있지는 않지만. 아니다. 청년, 취소할게. 이렇게 내 얘기를 들어주니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몰라.

  음. 그래서 그런지 나는 오랫동안, 그러니까 지구에 오기 전까지 언어 연구소에서 일했어. 녹양계의 각종 언어들부터 지구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을 다뤘지. 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종종 따분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라 대체적으로 견딜 만하더라고.

  연구소에서 일한 초기부터 나름대로 인정도 받았어. 그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순옥이의 마음도 얻었지. 순옥이는 실내 장식 설계사였는데 실력이 상당했어. 그러고 보니 잘 나가는 사람끼리 만났었네. 어, 내 입으로 직접 말하니 민망하구만.

  어쨌든 우리는 중앙 지역에 있는 영원의 물길이라는 곳에서 자주 만났어. 지하 세계 모든 물길이 만나고 또 거쳐 가는 멋진 곳이야.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난 처음부터 마음먹은 대로 청혼하기로 결심했어. 근데⋯⋯. 못했어. 결국 나라는 존재는 수물족이 아닌 사람이었던 거야. 모르겠어. 그냥 원인 모를 불안감이 나를 덮쳤다고 해야 하나. 무책임한 짓이었지. 우리는 자연스레 헤어졌어. 그래서 한동안 셋이서는 만날 수 없었지. 영준이? 걔는 그냥 평범하게 동족하고 결혼했어. 자식도 다섯째까지 낳고 말이야.

  우리 셋이 다시 만나게 된 계기는 안타깝게도 영준이 아버지가 다시 물로 돌아갔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사망한 거지. 아버지를 물로 흘려보낼 때 영준이는 오열하더라. 수물족이 보통 200세 전후까지 사는데 90세쯤에 갑자기 그렇게 됐으니 흔치 않은 일이었지.

  그때 오랜만에 만난 순옥이는 이전부터 영준이가 말해준 대로 나처럼 여전히 혼자였어. 그 뒤로 어쩌다 보니 나와 순옥이는 영준이와 함께 셋 모두가 모일 때 말고도 둘이서도 다시 만나기 시작했어. 그냥 가끔씩 친구처럼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영원의 물길에서 순옥이가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만약에 이제라도 용기가 난다면 마지막 기회이니 청혼하라고⋯⋯. 세상에. 이런 존재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싶더라고. 무릎 꿇고 펑펑 울면서 말했어. 미치도록 그리웠다고, 지금이라도 날 받아주면 안 되겠냐고. 그렇게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살게 됐어. 부모님과 영준이 가족의 축복과 함께.

  그리고는 쭉 행복했어. 아내와 나는 서로 함께 있기만 하면 늘 100퍼센트가 됐어. 영웅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온전히 쓸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부모님도 건강하셨고 영준이 가족도 이웃들도 모두 잘 지냈어. 아마도 나와 수물족 모두가 화성 지표면 아래의 삶에 완전히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은 거기까지였어.

  내가 지구로 오기 1년 전쯤부터 갈등이 시작된 거야. 녹양계 연락선이 화성에 닿으면서부터⋯⋯.”

 

  노인이 이야기를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도 그친 듯했다. 나는 우산을 들어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그럴듯한 그의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그가 아까보다 더욱 심한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들은 이제 내가 안 보일 거야. 내일 다시 와야 해. 또 비가 오면 안 되는데⋯⋯.”

  노인이 말미에 또 기침을 했다. 나는 아까 더 설득해서 댁으로 들어가시라고 해야 했는데, 하고 속으로 자책했다.

  “어르신. 제가 댁으로 모셔다드릴게요. 얼른 가서 쉬시고 나머지 이야기는 내일 해주세요.”

  “걱정 마. 남은 이야기는 마저 해야지. 근데 나 집으로 안 가는데. 이따 약속이 있어. 그리고 혼자서 가야 해.”

  나는 다시 그의 고집과 맞서게 되었다. 내가 일단 비도 왔고 지금은 물론이고 늦은 오후쯤 되면 더 추워지니까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되냐고 하니 노인은 약속이 감히 내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라 반드시 지켜야 하고 상대방이 신분 노출을 꺼린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청년. 난 화성에서 왔다니까. 하나도 안 추워.”

  노인은 어느새 내 점퍼를 입고 있었는데 난 그가 그것을 계속 입고 싶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뭔가 상황이 자연스러워 모른 척 하고 싶어졌다. 그가 나중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돌려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노인이 우산과 두 개의 캔커피 쓰레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레기는 놔두고 가시라는 말은 당연하게도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늘 그랬던 것처럼 중절모 챙을 살짝 잡고 입꼬리를 올리면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큰길가를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불규칙한 기침과 함께 나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다. 나는 그래도 점퍼를 입으셨으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생각했다. 점퍼는 노인에게 약간은 커 보였다.

 

  감기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어 목도리는 물론이고 마스크까지 쓰고 중무장을 한 채로 집을 나섰다. 소설의 진행을 위해서는 산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실 더 실질적인 이유는 나의 강박증 때문일 것이었다. 나는 어째서인지 오늘만큼은 혹시 몰라 편의점에 들러 두 개의 따뜻한 카라멜 마끼아또 커피를 샀다. 그리고 이번에도 아파트 단지 입구와 공원이 연결된 곳에서 내 코스로 가는 대신 그 의자가 있는 곳으로 곧장 가로질러 갔다.

  오늘도 노인은 자리에 없었다. 4일째였다. 아무래도 날씨가 궂었던 그날 무리해서 나보다 더 심한 감기에 걸리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주 솔직한 마음으로는 나머지 이야기를 듣고 싶기도 했다. 비록 그것이 진짜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나에게는 그럴싸하게 다가왔기에 그랬다. 점퍼 생각도 물론 났다.

  나는 의자에 앉아 아까 산 커피 중에 하나를 꺼내 마셨다. 미지근했다. 원래 충분히 안 데워졌는지 그사이에 식어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주말인데도 공원은 한가했다. 나는 때맞은 캐럴을 들으면서 공원을 걷고 있었다.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가 왼쪽으로 꺾고 조금 더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었다. 곧 의자가 보일 참이었다. 노인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어르신, 잘 지내셨어요? 한참 못 뵌 거 같네요. 편찮으셨나 해서 걱정했어요.”

  “쓸데없는 소리. 그나저나 청년. 그 잠바 잘 입었어. 아주 따뜻하던데.”

  “아, 네. 다행이네요. 오늘은 왜 안 입고 오셨어요? 이제 진짜 추워지니까 잘 챙겨 입으셔야죠.”

  “내가 세탁소에 맡겨서 새 옷처럼 만들어 놨어. 가자.”

  “어디를요?”

  “우리 집. 남은 이야기도 해줄게.”

  “근데⋯⋯. 지금 여기서 벗어나 버리면 그분들이 데리러 못 오시잖아요?”

  그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나를 1단지 아파트 입구로 데려갔다. 5단지인 우리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는 노인을 따라 아파트 놀이터와 지상 주차장 두 곳을 지나 단지 구석에 있는 101동 앞까지 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경우에는 머릿속에서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올라 충돌하여 말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그중 한 가지는 굳이 집 안까지 들어가야 하나, 라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그가 자신의 공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보고 싶다, 라는 것이었다.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에 더해 후자의 생각과 그의 안내가 나를 엘리베이터로 이끌었다. 우리는 8층에 도착했고 곧 그가 현관문을 열었다. 옆집과 완벽하게 동일한 회색 현관문이었으나 그 안만큼은 다를 것이었다.

  아니었다. 그곳은 평범하디 평범한 한 노년의 집이었다. 그는 예상대로 혼자 사는 듯했는데 형편이 그렇게 또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집 안을 가득 채운 나전칠기 가구들이 집 안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 세계를 수놓는 별빛과는 달랐다.

  나는 조그만 거실 소파에 앉아서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생각했다. 스스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작은 방에 들어갔던 노인이 점퍼를 꺼내 왔다. 점퍼는 세탁소 흰 옷걸이에 걸려 비닐에 덮인 채로 있었다. 드라이클리닝 냄새가 났다. 또 그는 감사하다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부엌에 가서 무언가를 뒤지더니 지난번에 같이 먹었던 캔커피 두 개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았다. 이야기를 이어 나갈 생각인 듯했다. 나는 옆자리를 지키자고 다짐했던 것이 생각나 노인에게 물었다.

  “음⋯⋯. 아, 녹양계 연락선은 왜 왔던 거예요? 수물족이 거기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나?”

  “글쎄. 그건 확실히 모르겠어. 일이 닥치고 난 뒤에 찾았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연락선이 화성에 온 이유는 급하게 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어. 우리도 처음엔 깜짝 놀랐지. 전쟁 후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어코 찾아와서 죽이려 든다고 경계했어.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 녹양계 행성 전체가 아예 사라져 버릴 위험에 처했다고 수물족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거야.

  우리는 일단 최소한의 경계만 하면서 무슨 일인지 들어보기로 했어. 엄중한 사안인지 기괴하게 생긴 함장이 직접 설명을 시작하더라. 그것은, 여태껏 녹양면 폭발에 잘 대응해 왔지만 차후 2년에서 3년 사이에 일어날 폭풍은 수치적 규모조차 파악하기가 힘들다는 거였어. 그래서 고향 행성을 복원하는 데 전면 지원하고 새로 발견한 행성 중 하나의 단독 개발 및 영구 통치권을 제공할 테니 다시 돌아와서 터전의 멸망을 막아달라고 부탁하더라. 수물족의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고.

  우리는 분열하기 시작했어. 돌아가서 행성을 되찾으면서 모두를 살리고 그렇게 얻은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강하게 살자는 세력과 우리를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던 실체들의 말을 결코 신뢰할 수 없으며 이제는 우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니 지구인들과 연합해 태양계를 개발하자는 세력으로 나뉘었지.

  아, 그러니까 화성을 떠나지 않겠다는 세력은 그것들이 녹양계를 포기하고 태양계 또는 타 항성계로 점령 이주한 뒤에 복수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자신들을 못 건드린다고 확신했냐고?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녹양계 전쟁에서 나 진영에 속했던 종족들은 녹양 빛 아래 말고는 살 수가 없었어. 그래서 어찌 됐든 우리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와 내가 아끼는 모든 존재들은 두 번째 세력에 속해 있었어. 그런데 우리 세력은 큰 맹점을 가지고 있었지. 윤리적 문제를 벗어날 수 없었어. 첫 번째 세력은 이걸 빌미로 우리를 압박하기 시작했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냐고 말이야.

  그리고⋯⋯. 화살이 나에게로 다가온 거야. 이 지구인을 당장 돌려보내라는 화살.

  지구인과의 교류니 연합이니 모든 것들이 어떻게 녹양계 유무의 가치보다 높을 수 있냐고 말하는 첫 번째 세력에게 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돼 버린 거지. 그들은 부모님이 나를 데리고 온 것부터 문제로 삼기 시작해 수많은 의혹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어.

  억측 앞에 나와 아내와 부모님과 영준이 가족 그리고 맹점 앞에 두 번째 세력 모두는 지쳐 갔어.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말하더라. 지구에 잠시만 가 있으면 사태가 진정됐을 때 데리러 가겠다고, 혹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최종 결정이 나도 같이 갈 수 있게 조치해서 그 전에 무조건 데리러 가겠다고.

  나는 어떤 의심도 없이 믿었고 그렇게 지구로 오게 된 거야. 대략 8년 전 이곳 겨울이 끝날 때쯤.

  한 가지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난 아내를 포함한 내 존재들을 여전히 믿고 있어. 그들은 사정이 있어 늦을 뿐 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냥⋯⋯.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었어.”

  말을 마친 노인이 캔커피 뚜껑을 만지작거리기에 따서 건네주었다. 그는 목이 탔는지 한참 동안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아 참, 그런데 청년 이름은 어떻게 돼? 이제야 물어보네.”

  “제 이름이요? 박성진이에요. 어르신.”

 

  그리고 잠시 동안 우리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으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꿔 다 마셨다. 노인은 금세 빈 캔들을 치웠다. 그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성진 청년. 나 오늘도 약속이 있는데.”

  나는 벗어 두었던 외투를 입고 드라이클리닝된 점퍼를 챙겨 나설 준비를 했다. 나대로도 소설 쓰기라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노인이 중절모만 빼고 변함없는 옷차림을 한 채 현관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신발을 신다가 나도 모르게 내일 뵙자는 말을 했다. 그는 웃었고 나는 말을 덧붙였다.

  “어르신. 이제 진짜 추워서 그렇게 입고 나가시면 안 돼요. 아셨죠? 혹시, 마땅한 게⋯⋯.”

  “뭐? 나 잠바 있어. 두 벌이나.”

  “근데 왜 그렇게 춥게 다니셨어요?”

  “이렇게 입으면 아내가 좋아할 거 같아서.”

  나는 뒤돌아 현관문 번호 키 버튼을 못 찾고 헤매다가 다시 노인을 향하여 뒤돌았다. 물어보려다 깜박한 것이 생각나서였다.

  “아까 여쭤보려다가 깜박했는데 어르신 존함은 어떻게 되세요?”

  “곤란하네 이거. 아직도 내 이름을 지구식으로 어떻게 정하면 좋을지 결정을 못 해서 말이야.”

  아파트 밖으로 나왔을 때 날씨는 아침보다 더 쌀쌀해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과연 나는 어떤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놀랍게도 따뜻한 기억은 없었다. 온통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추억들만 떠올랐다. 무엇보다 그것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추억이라는 사실도 분명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노인의 모든 이야기가 적어도 그 자신에게만큼은 차라리 완벽한 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바라는 바가 이른 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아 지치더라도 따스하게 데워진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도 생각했다.

  우리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다다른 나는 집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동네 마트로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이 좋아하는 카라멜 마끼아또 캔커피를 넉넉히 사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나는 데운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 내 코스를 돌고 노인이 앉아 있을 공원 의자로 갔다. 그는 자리에 없었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역시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집으로도 가 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급하게 이사를 해서 정신없다며 자신은 전에 살던 사람에 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거래한 중개업소를 물었더니 귀찮다는 듯 손사래 치며 나가라고 했다.

  1주일쯤 되었을 때마저 노인이 자취를 감춘 것을 확인한 나는 순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는데 그것은 마감을 끝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의자에 앉아 보온병에 든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처음 데웠을 때처럼 여전히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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