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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숟가락 침공.

2019.07.03 17:0207.03

소개: 지구를 멸망 시키는 것은 숟가락이었다.

1장 한밤중.

 사뿐.

 사뿐.

 끼이--.

 사뿐.

 조용히 숨결을 내뱉는 바람이 걸음을 옮길 때처럼. 머리카락을 왕관처럼 두른 아기가 집 안에 있을 때처럼. 조심하고 신중하게, 날아가는 민들레 씨앗 같은 발걸음이 판자로 된 바닥과 그 위에 깔린 카펫을 누볐다. 늦은 밤. 달마저 피곤해서 구름을 덮고 자는 장막이 깔린 밤중에 소년은 생각했다.

 ‘대도둑들은 날아다닐 거야.’

 그랬다. 소년은 자신이 대도둑이길 바랐다. 그들은 자신이 정한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숨소리 하나, 머리카락이 백만분의 일이 자라나는 소리까지도 감출 테니 말이다. 발소리? 그들은 발소리를 감추기 위해 날아다녔을 것이다. 그리고 진품을 가짜와 바꾸고 세상에 진품을 두 개라고 당당히 선언할 터이니.

 소년은 앞에 놓인 진품을 바라보았다. 밤의 어둠만큼이나 어둡고 별들이 뿜어내는 다양한 빛만큼이나 다채로운 불꽃들이 새겨진 네모난 상자를. 소년은 식탁 위에 놓인 상자를 두고 부엌에서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일회용 숟가락을 꺼내왔다. 먼지를 터는 소년의 살갗에 닿은 숟가락은 아직 쓸만하다고, 언제든지 준비가 돼 있다고 소년에게 알리려고 꿋꿋하게 시련을 견뎠다. 상자 앞에 선 소년은 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여우같이 가늘게 뜬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어느 소리라도 들리면 귀가 쫑긋하고 반응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다. 마침내 소년은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온전히 손가락만 움직일 힘을 주면서, 열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처럼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것들이 튀어나오는 일 대신에 열기 전과 마찬가지로 소년의 두근대는 심장에서 미약하게 뿜어나오는 따뜻한 숨결만이 주방의 대기를 덥혔다. 아. 아주 작은, 빛을 향해 가던 벌레가 타닥 하고 타오르는 소리가 소년이 상자를 열 때 미약하게 들리긴 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작은 벌레에게는 공기를 찢고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였을지도 모르지만, 소년은 듣지 못했다. 그저 지나가던 나비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착각할 뿐이었다.

 소년은 상자 안에 있는 구체, 자신이 내일 출품해야 하는 작품을 쳐다보았다. 작품의 형태는 완벽한 구는 아니었고,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으며 보이는 모든 것들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중이었다. 뭉게구름이 쪼개져 조각구름이 되기도 하고, 꿀을 모으는 벌의 날갯짓이 꽃과 언덕을 가로지르는 바람이 되어 소녀의 어깨를 꽃향기로 시원하게 적시기도 했으며, 심해의 것과 수면과 가까운 것들이 고래 뱃속을 휘젓다 숨구멍으로 입으로 분출되어 뒤섞였다. 소년은 이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소년의 눈에 그런 것들은 지나가는 들꽃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소년이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들을 예로 들면 이런 것들이었다. 도시 밑을 핏줄처럼 지나가는 화산, 바다 밑의 깊게 팬 흉터인 협곡, 내리꽂을 희생양을 찾아 번개라는 눈을 번쩍 뜨고 천둥으로 갈무리를 준비하는 폭풍.

소년은 손에 든 숟가락으로 지구에 있는 빙수를 툭툭 건드렸다.

 

2장 이런 우연이!

 조금만 더… 조금만! 한 발자국만 더! 이제… 끝이야!

 “해냈다! 빨리 올라와!”

 정상에 오른 현택은 만개한 웃음을 띠고 뒤따라 올라오고 있는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뒤이어 동료들이 도착했다. 그들은 동시에 발을 내디뎌 동시에 정상에 도달했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인간의 위대함에 감탄했다. 영헌, 현택, 범규, 민재 4명은 서로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부르면서 각자 해왔던 일에 대해, 당했던 일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떠들면서 기뻐하고 자부심에 들떠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했어!” 누군가 소리쳤다.

 “그래! 우리가 해냈지!” 누군가 대답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걱정 마. 사진으로 남겨놓을 테니까.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거야.”

 그래서 그들은 이 순간을, 지나가는 순간을 잡아 그림에 넣기 위해서 사진을 찍었다. 먼저 혼자 자세를 취하고 여럿이서 모여서 찍기도 하고 주위 풍경을 찍기도 했다. 그림에 나오는 모든 얼굴에는 붉게 달뜬 양 볼 만큼이나, 입 주위로 뿜어져 나오는 안개 같은 날숨의 존재만큼 확실하게, 꾸밈없는 웃음들이 연방 얼굴을 장식했다.

 “자 그럼 내려가 볼까?” 누군가 말했다.

 서서히 그들을 찾아오는 것은 집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이제 성취감은 마음 한구석의 다락방 위에 아직은 먼지가 쌓이지 않은 형태로 보관을 해야 했다. 누구도 여기에 계속 있고 싶다는 생각은 감히 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 모두가 대답했다.

 이제 하산을 위해 다시 짐을 꾸리고 그들이 발을 내디뎠을 때. 그들 모두가 처음에는 왜?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소리를 들었다. 머나먼 곳 어디선가 거리조차 가늠할 수 없는 먼 거리에서 공기의 형체를 몽땅 뭉그러뜨리는 소리가 오래전 공룡들이나 마지막으로 들어봤을 대기 전체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유우우우웅! 하는 소리가 가까워져 커질수록 물체의 정체 또한 가늠하기 쉬워졌다. 마치 산과 하나가 된 듯 서 있던 4명의 무리는 동시에.

 “숟가락?!” 모두가 소리쳤다.

 만들라고 주문을 해도 지구의 절반은 써야 겨우 만들 수 있어 보이는 숟가락 유성은 대기에 벌겋게 달궈진 그대로, 대각선으로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선을 그리듯 무리가 서 있는 곳보다 저 아래로 향했다! 유성은 떨어져 모든 것을 파괴로 몰고 갈 것이라 무리는 생각했지만 어떤 어마어마한 힘이 유성 자체를 산에 부딪히기 바로 직전에 세우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다. 유성의 잔존했던 힘에 에베레스트는 이미 깜짝 놀라 몸에 난 구멍을 보고는 온몸을 떨어

눈사태를 일으켰다. 무리는 멀리 작은 원에서부터 시작해 점점 커지는 충격파의 지름이 그들을 덮쳤을 때 ‘제발 저를 살려만 주신다면…’ 으로 시작하는 기도를 속으로 외쳤다.

 

3장 이런 운명이!

 ‘여긴 됐어, 여기는 이렇게… 그래. 다음은…’

 소년이 들고 있던 숟가락이 이번에는 지구가 품고 있는 시럽으로 향했다.

 

 “휴우…”

 한 무리의 사내들이 지구가 흘린 땀인 온천에서 저마다의 고민과 격정을 물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후지산이 보이는 노천온천에서 그들 중 누구도 후지산을 바라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비슷한 시도조차 없이 조용히 몸을 담그던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진짜 자리가 여기밖에 없었나.” 영헌이 말했다.

 다들 꺼리는 주제였기에 섣불리 말할 수 없었지만 각자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두려움에 맞서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

 “어쩔 수 없다는데 어떻게 하겠어. 거기다. 실은 이 자리가 더 비싸잖아.” 범규가 말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민재가 말했다.

 조용히, 풍파에 시달린 폐가를 연상시키는 표정을 짓고 있던 현택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 후지산 말인데.”

 현택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한없이 실을 늘어뜨려 길이를 내주고 말을 하라고 보채도 그 말을 꺼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택을 보는 다른 이들의 생각은 하나의 직선이 머리를 꿰고 지나 흘러가는 듯했다.

 ‘설마… 저기를 오르자고?’

 마침내 현택은 말했다.

 “여기서 배경으로 사진이나 찍을래?”

 “아…”

 그들의 표정은 절망에서 환희로 관에서 침대로 정적에서 동적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아! 좋지!”

 “그래! 뭐가 무서워서 그렇게 뜸을 들이나 했어!”

 “그럼, 되고말고 찍어.”

 그들은 에베레스트를 마지막으로 본 생존자였으며, 다시는 산과 인연을 맺지 않을 이들이었고, 자신들이 믿는 기적과는 180도 다른 방향의 기적을 목격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믿어왔던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부수고 다시 새로운 건물을 쌓으려 기반을 다지는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의식으로 그들은 후지산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제물로 바치고 이제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우리가 뭐가 무서웠던 걸까?” 누군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삶이 눈앞에 있는데!”

 “그래도 산은 다시 오르지 말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지난 몇 달 동안 악몽에서 들리던 소리가 꿈의 경계를 찢고 빠져나와 그들의 고막을 북 삼아 쳐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다시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있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전주곡과 뒤에 등장해 막을 내릴 것의 존재를 이미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너무도 생생한 현실의 연극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로의 표정에서는 이미 다시 쌓은 건물의 토대가 먼지가 되어 들려오는 소리에 휩쓸려간 지 오래였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숟가락 유성이 전과 같은 모습으로 이번에는 멈추지 않고 대지가 놀란 듯 느낌표를 그리며 그대로 땅속 깊숙이 박혔다! 무리의 발끝에 대지가 자전을 멈추어 모든 것이 휘청거리는 느낌이 닿았다. 이어 숟가락 유성이 왔던 우주의 끝없는 공간으로, 하늘 뒤에 감춰진 진정한 밤의 색상 속으로 사라졌을 때, 죽은 척을 했던 지구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지구는 고통을 동반한 용암을 내보내서 벌어진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했다.

 

4장 이런 필연이!

 ‘좋았어. 최대한 티가 안 나게… 그렇지.’

 소년은 작품의 마지막 손볼 곳인 틈새를 찾아 헤맸다.

 

 사람치고는 기괴한, 그렇다고 괴물의 범주에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생기 있는 4명의 무리가 남태평양의 화산도, 눈사태도 없는 오로지 밀려오는 위협은 그늘 밑의 잠을 깨우는 코를 간질이는 바람과 지구와 달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빚어내는 파도 밖에는 없는 작은 섬에서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  하고 있다. 그들은 잃어버렸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그렇다고 안 적이 있었던가? 그건 아니었다. 본래 지니고 있던 감각이 영문모를 폭풍에 휩쓸려 사라졌다고 하는 편이 신빙성이 있었다. 그들은 뭔가를 하고 싶어 했는데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알기만 한다면, 조그마한 단서라도 주어지면 몸이 먼저 움직일 텐데, 운명은 보이지 않는 공기 뒤에 숨어서 위로는커녕 비웃듯이 하늘에 구름만을 널어대고 있었다. 무리는 평상에 모여 뭔가라도 해보려 대안을 찾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전처럼 기운이 없지도 무덤을 통과해 지나가는 을씨년스런 바람의 애절함도 햇살을 보고 눈을 찌푸리다 흙탕물만 봐도 새어 나오는 아이들의 활기가 담겨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말하는 대로 숨을 들이쉬고 내뱉고 혀를 굴려 발음이 다른 소리를 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그들은 이런 얘기에 이르렀다.

 “저기 저 코코넛으로 술도 만든다는데.”

 그들은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용기의 물약으로 축배를 들었다. 물약의 효과는 탁월해서 그들 각자를 영웅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승리의 전장인 해변을 어깨동무를 하고 한 발 한 발 위태롭지만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무서워서 이리로 왔냐?! 더러워서 피한 거지 안 그래!?” 누군가 소리쳤다.

 “암. 그럼.”

 “물론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저마다 꼬여버린 혀와는 반대로 마음속 꼬여있던 실타래를 풀어 저마다 승리를 상징하는 언어를 자아냈다. 그러던 중.

 “야. 우리 사진이나 찍자.”

 “뭐! 사진. 그게 대수냐.”

 “얼른 찍어. 찍어.”

 “모여. 모여.”

 그들은 황혼이 가까워진 태양과 별이 교차하는 순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곧 황혼의 끝자락에 서 있던 그들의 머리 위로 언제부턴가 별들이 지켜보기 시작함과 동시에.

 들려왔다. 틀림없이 이곳으로 향하는 소리가. 그들이 했던 모든 사고를 정지시키는 소리가. 밤을 배경으로 한 유성의 존재감에 주위 별들마저 흔들거리며 떨어지는 작은 유성이 될 것만 같은 진동이, 그리는 그 거대한 궤도에 하늘에 수많은 별이 터져나가고 밀려가는 웅장한 모양새가 다시 또 그들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유성은 지구를 통째로 시추하려는 기세로 바다의 한가운데를 도려냈다. 수많은 해상 생물들이 갑자기 바다의 품에서 허공으로, 중력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내 모든 것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밑바닥 햇빛을 받아본 적 없는 협곡의 밑바닥 속으로. 하늘의 구름마저 집어삼킨 높이의 파도가 무리의 눈 앞에 펼쳐지고 마저 남은 배고픔을 채우러 무리에게 다가오고 있을 때. 웃음소리가 들렸다.

 “흐흐...하. 하하. 하하하!” 누군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 모두 웃고 있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찾았다. 눈앞에 배불리 먹고도 남을 죽음이,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그들은 앞으로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한 번은 장례식 행렬의 것과 꽃밭을 뛰어다니는 것 사이 경계를 오갔다.

 

 6장 빛과 소음

 탁!

 소년은 눈을 찌푸리고 얼른 손으로 눈 앞을 가렸다. 주위가 갑자기 암실에서 연극 무대 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손의 틈새로 들어오는 바늘처럼 가느다란 빛에 익숙해진 소년은 막을 올려 또 다른 인물의 등장을 확인했다.

 “어...엄마?” 소년이 말했다.

 “아가, 여기서 뭐 하니?” 엄마가 말했다.

 소년, 고리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에 든 숟가락부터 등 뒤로 가져갔다. 그리고 후회했다. 괜히 더 의심을 받을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요. 그냥 잠이 좀 깨서.”

 의심받을 대답도 하였다. 이런 중상모략이 흘러넘치는 식탁에 발을 들인 엄마는 주방의 파수꾼답게 위엄있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열려있는 상자와 그 안에 본래는 구체여야 할 것이 이제는 모래성 쌓기의 마지막 단계에 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아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들, 무슨 일인지 엄마한테 설명해 줄래?”

 엄마의 평범하지만, 진실을 요구하는 눈빛이 고리에게 향했다. 고리는 잔잔하고 맹렬한 이 공격에 맞서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휴우, 알았어요. 부정행위를 했어요.”

 고리는 목소리로 백기를 짜고 있었다. 그는 항복의 표시로 자신의 무기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일회용 숟가락마저 압박에 짓눌려 조금 휜 것도 같았다.

 “알았으니 다행이구나.”

 문득 고리는 궁금했다.

 “화 안 내세요?”

 평소의 엄마라면 밖에서 운동화와 옷에 먼지만 묻히고 돌아와도, 밥을 너무 급하게 먹어도, 자기 전에 양치질 하지 않아도, 친구들과 오래 놀다가 집에 늦게 귀가를 할 때도. 마치 꼭 건너가야 하는 건널목처럼 하루에 한 번은 꾸짖음을 하셨다. 그런 엄마가 화를 내지 않으시는 일도 있다니. 고리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엄마도 어렸을 땐 그랬으니까.”

 “네?! 엄마가요?”

 “그래, 아가. 엄마는 상자 속에 물을 떠서 부어버렸어.” 엄마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고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깨비의 얼굴을 하고 화를 내시는 일은 있어도 한없이 자애로운, 뭔지 모를 재료들로 계절을 요리하고 거센 바람도 달래는 자장가를 불러주시는 엄마와 폭력성이 같은 범주 안에 있다니!

 “엄마의 그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벌레도 못 죽이잖아요.” 고리가 물었다.

 “어렸을 때 그랬다는 얘기지, 네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란다.”

 “그럼 지금은 왜 안 죽이세요? 저것들은 그냥 사람이잖아요.”

 엄마는 고민했다. 아들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가장 적절하고 체감할 수 있는 단어일지 찾아 궁리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음. 그래. 땡칠이를 예로 들어보자.”

 땡칠이는 고리가 키우는 애완동물의 이름이었다.

 “땡칠이가 잘 때 일부러 깨우고 싶니?”

 “아니요.”

 “땡칠이가 불편했으면 좋겠어?”

 “아니요. 아니. 가끔요.”

 “땡칠이가 없어지면 어떨 것 같아?”

 “안돼요! 얼마나 귀여운데!”

 “사람도 땡칠이랑 비슷하단다. 둘 다 생명이지. 아직 잘 모르겠지?”

 “네. 쟤들은 별로 귀엽지 않아요.” 고리는 곧바로 대답했다.

 엄마는 미소를 지었다. 생김새도 하는 행동도 어쩜 남편과 자신을 닮았는지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사람을 보고 땡칠이를 보면 더 예뻐 보이지 않니?”

 “그건 그래요.”

 

 7장 학교로

 달빛이 하얀 얼굴을 숨기고 붉게 달아오른 태양이 그 자리에 새벽을 비추었다. 곧 집마다 고유의 향기와 온기로 대기가 떨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한 집에서 문을 쾅하고 여는 소리가 들렸다.

 “다녀올게요!” 고리가 소리쳤다.

 양손으로 상자를 끌어안고 달리기 경주를 시작한 사람처럼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조심해! 뛰지 말고!”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을 따라 학교로 걸어가던 고리의 뒤에서 경주마 같은 뜀박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리는 웃었다. 발소리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헐떡이는 숨을 옆에서 몰아쉬는 소년이 말했다.

 “야! 고리! 같이 가.”

 “안녕. 지모.”

 둘은 나란히 학교로 향했다. 서로의 손에 상자 하나씩 들고가는 채로. 길을 걷다 신호등에 선 지모가 고리에게물었다.

 “고리. 혹시 보여줄 수 있어?”

 “왜?”

 “아니. 그냥 궁금해서. 헤헤.”

 고리는 지모가 지닌 웃음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것은 서로의 눈빛으로, 웃음으로, 주위의 공기마저 그 속삭임을 듣기 위해 멈추어 정적으로 알 수 있는 분위기였다.

 “너도?” 고리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

 둘은 동시에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상자는 정신없이 흔들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이리저리 휘말렸다. 웃음을 진정시키고 둘은 서로의 상자를 바꿔 열어 보기로 했다.

 “하나. 둘. 셋. 하면 여는거다?” 고리가 말했다.

 “그래!” 지모가 대답했다.

 둘은 상자의 뚜껑에 손을 갔다 댔다.

 “하나- 둘- 야!” 고리가 소리쳤다.

 지모는 둘에서 상자를 열면서 웃어댔고 고리는 이에 질세라 재빨리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서 고리가 본 것은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해 보이는 구체였다. 다만 구체가 살이 좀 쪘는지 상자에 꽉 차고 자신이 가진 것보다 색이 다양하지 않았다. 검은색 또는 갈색이 혼합된 고체가 딱딱하게 껍데기처럼 감싸고 있었다.

 “응? 이게 뭐야?” 고리가 물었다.

 “초콜릿.” 지모가 대답했다.

 잠깐의 웃음소리.

 “네 건 왜 이렇게 됐어?” 지모가 물었다.

 “빙수같이 생겨서 일회용 숟가락으로 팠어.” 고리가 대답했다.

 웃음소리.

 “야 이러다 학교 늦겠어!” 지모가 소리쳤다.

 “그러네…. 정문 늦게 도착한 사람은 여자애들이랑 공기놀이하기.”

 고리는 말과 동시에 뛰어갔다. 뒤이어 지모가 소리치며 뒤따라왔다. 그날 하루 만에 고리는 공기놀이를 수준급으로 할 실력이 되었다.

 

 8장 우승자는?

 경연대회의 심사는 단조롭게 진행되었다. 선생님들은 돌아다니며 무수히 많은 파괴의 흔적들을 살폈고 그중에는 고리와 지모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생님들은 수많은 괴상하고 엉뚱하고 약간은 섬뜩한 대부분 멀쩡한 것들이 없는 출품작들에 놀라고 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하나의 작품만이 남았다.

 그 작품의 구체는 어떤 인위적인 조작도 없었지만, 대부분의 구체에서 뿜어나오는 자전거 페달이 돌아갈 때 생겨나는 그리움, 옆집 친구를 찾으러 창문에 머리를 들이밀고 앵무새가 되는 아이의 목소리가 없었다. 심지어 미라의 한숨 조차도 담겨있지 않았다. 구체가 돌면서 보여주는 완벽한 적막은 보는 이들을 긴장하게 하였다. 한 바퀴 구체가 돌아오기까지 보여준 것은 죽음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빙글빙글 도는 손잡이 없는 맷돌이며 천천히 갈려 작아져 결국에는 별의 먼지가 되는 일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저곳에는 무덤조차, 글자가 각인된 묘비조차 필요 없었다. 무덤은 곧 구체였고 묘비는 달에 새겨진 크레이터가 대신했다. 상자 안의 빈 우주 공간마저 손을 뻗어 살아있는 모든 것을 긁어내 간 자국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인류멸망 경연대회’의 승자는 한 소녀의 것으로 돌아갔다.

 “샛별양. 이런 기록은 이 대회 사상 최초일 텐데 비결이 뭔가요?”

 “사람이요.” 샛별이 대답했다.

 “사람? 물리적 현상을 직접 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나요?”

 샛별의 잘 여문 귀엽고 작은 입술에서 나온 의외의 대답은 낮게 공기를 헤엄치는 듯한 목소리와는 대비되게 벼락같은 충격을 선사했다.

 “물론 그래요. 전 한 게 별로 없어요. 누구 앞에 나뭇가지를 떨어 사과를 떨어뜨리거나, 별이 잘 보이게 구름을 치워주고 몇 가지 사소한 것들만 했어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었죠?” 누군가 물었다.

 모두 그게 궁금했다. 고작 사람이 뭘 할 수 있는가? 어렸을 적에는 아무것도 몰라서 행복하다 늙어서는 무지를 깨닫고 즐거워하는, 유연하지만 부러지기 쉽고 살과 살점 사이사이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영원히 죽음의 비밀을 알 길이 없는 사람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알아서 잘하던데요.” 소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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